소설리스트

환생무적-276화 (277/301)

276. 무엇을 위해 싸우는가

“크으읍!”

“허억!”

첫 번째 충격파가 분지를 휩쓸었다.

그 순간 광기에 사로잡힌 모든 이들이 멈칫거리고는 시선을 돌렸다.

허공 복판에 사신처럼 떠 있는 사내.

어둑해지는 하늘에서 서녘으로 저물어가는 태양의 후광을 받으며 선 사내.

이 묘한 빛의 구도 때문에 적비연의 존재감은 상상 이상으로 크게 다가왔다.

마치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것처럼.

오죽했으면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아송조차 잠깐 흔들렸을까?

그러는 사이 두 번째 충격파가 분지를 휩쓸며 지나갔다.

메아리 때문에 기파가 요동치는 것이다.

‘설마…….’

불현듯 뇌리를 스친 생각에 아송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방금 떠올린 생각은 자신의 기우이리라.

하지만…….

‘심상치 않군.’

무인들의 반응이 눈에 거슬린다.

원래라면 적비연이 사자후를 외치든 말든 지금쯤 반응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하나같이 창공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나?

아송이 눈살을 가늘게 여미고는 적비연을 보았다.

‘자, 이제 무엇을 하려는가?’

그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자신이 아는 한 그 어떠한 무공도 파세공진음을 깨트릴 수는 없다.

익히기가 워낙 어렵고 까다로워서 그대로 실전되었던 이능이 아니던가?

하지만 만통지의 혜지를 물려받은 그가 결국 되살렸다.

무공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이능.

‘자, 뭐든 해보라. 그 어떠한 발버둥도 소용없을 테니!’

아송은 차디찬 웃음을 깨물었다.

한편 적비연은 허공에 뜬 채로 만인을 내려다보며 무겁게 입을 열었다.

처음처럼 벽력같은 외침은 아니다.

조용하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다.

하지만 공력이 워낙 심후하기 때문인지 무인들 개개인의 귓가에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하게 날아든다.

“맹주님이 말했듯이 흑천련 또한 무림맹과 손을 잡고 천림과 맞서 싸운다.”

두두웅!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분지의 천지가 진동을 울린다.

적비연이 일부러 일으킨 효과다.

딱히 계산한 것은 아니다.

본능적으로 가미한 효과다.

효과는 먹혀들었다.

많은 이들이 서로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갑자기 어째서 맹주와 적비연이 저런 선언을 하는 것인지?

개중에는 의구심을 품는 자도 생긴다.

“저게 무슨 말이야? 젠장, 설마 저자가 무림맹의 끄나풀이었던 거 아냐? 왜 이제 와서 갑자기 동맹인 척하는 거지?”

“아무래도 이상한데.”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적비연은 그런 무인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백발광인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지가 약한 백발광인이 서서히 다시 움직이려는 조짐을 보이자, 그가 얼른 극마를 불렀다.

“련주.”

“칫!”

아무래도 적비연의 말에 고분고분하는 처지가 마음에 안 드는 듯, 극마가 혀를 차고는 허공으로 솟구쳐 올라왔다.

극마 역시 정점에 우뚝 서서는 주변을 내려다보며 공력을 담아 소리쳤다.

“이 멍청한 것들아! 더 이상 천림의 손에 놀아나지 말고 적 가주의 말을 들으란 말이다! 네놈들이 지금 필요 이상으로 흥분하는 것은 죄다 천림주의 장난질이란 말이야! 그러니 의심은 때려치우고 무림맹과 일시적 동맹을 맺고…….”

꽈아아앙!

“크아악!”

“으아악!”

느닷없이 폭음이 터지더니 또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일시적인 소강상태가 끝나는 것과 동시에 다시 광분한 자들이 눈을 벌겋게 뒤집고는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이 개새끼들이! 잠시 방심한 틈을 타서 또 공격하는구나!”

“시끄럽다! 네놈들이 먼저 시작한 거다!”

“뭐가 어째?”

차창! 퍽! 쾅!

백발광인이 터진 곳에서 다시 전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극마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곳을 바라보았다.

감히 자신이 말하는 중에 칼부림을 하다니.

한편 그 모습을 본 아송이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재미있군. 말 몇 마디로 이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니. 생각보다 실망스러운데?’

반면 극마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더니 순간 허공을 가르면서 혜성처럼 떨어져 내렸다.

차차차차차차앙!

까가가강! 뻐억! 퍽!

“크읏!”

“우아악!”

“뭐, 뭐얏?”

정말이지 한 줄기 바람과 같았다.

극마가 난잡하게 어우러지는 무인들 사이를 비집고 돌진하자 손을 섞던 자들이 뭐가 어떻게 된 줄도 모른 채 튕겨나갔다.

어떤 자는 아예 늑골이 부서져서 죽기 직전까지 이르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확실히 극마의 방식은 패도적이었고, 많은 이들의 반감을 살 만했다.

한데 특이한 것은 그가 정도인만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흑천련 무인들조차도 그의 일격을 얻어맞아 추풍낙엽처럼 날아가서 바닥에 뒹구는 것이 아닌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된 곳을 갈지자로 누빈 극마가 마침내 누군가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낚아채더니 허공으로 솟아올랐다.

“크으으! 놔라아아앗! 노오오옴! 천벌을 내려주마! 천벌!”

머리채가 잡힌 채 발버둥치는 자는 다름 아닌 백발광인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극마에게 향했다.

가만히 지켜보던 아송조차도 눈살을 구기고는 극마를 응시했다.

‘흑천련주. 원래 저 정도의 무위였던가?’

확실히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것보다 강하다.

물론 그사이 무공이 상승했을 수도 있다.

오늘은 연리하가 제대로 손도 쓰지 못한 채 당하지 않았나?

예상보다 강하다고는 생각했는데, 오늘 또 그 예상을 뛰어넘었다.

그래도 연리하는 좋은 제물이 되어주었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그의 죽음은 파세공진음을 사용하기에 적절한 발화점이 되어주었으니까.

어쨌거나 흑천련주가 이번에도 놀라운 신위를 발휘하면서 백발광인을 낚아챘다.

저 정도면 천림인들과 호각을 다툴 만하지 않은가?

아니, 천림인 둘 이상이 덤벼야 하려나?

아송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극마가 손에 쥔 백발광인을 불쑥 앞으로 내밀면서 소리쳤다.

“이 멍청한 것들아! 이딴 것들에게 휘둘리지 마란 말이다!”

정말이지 귀청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 어마어마한 사자후.

확실히 거칠다.

게다가 극마의 전신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마기에 가깝지 않은가?

항간의 소문에 극마가 마공을 익혔다는 말이 떠돌았기에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끄으으윽! 으아아아아!”

극마의 손에 잡힌 백발광인이 비명을 내지르면서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마침내 이마의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오는가 싶더니 눈알이 뽑힐 것처럼 부풀어 올랐다.

다음 순간,

퍼억!

끔찍한 소리가 울리면서 백발광인의 머리가 수박처럼 터져 나갔다.

뇌수가 튀어 오르고 핏물이 비산했다.

머리를 잃은 몸통이 그대로 추락하다가,

꽈아아아아앙!

허공 복판에서 강렬한 폭기와 함께 터져 나갔다.

극마가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했고,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자들은 저마다 몸을 반사적으로 웅크렸다.

“알겠냐! 이 새끼들아! 쫄지 말고 덤벼라! 이놈들을 먼저 처리하란 말이다! 안 그러면 네놈들 전부 뒈진다! 내가 네놈들이 뒈지든 말든 상관할 바는 아니지만, 왜 뒈지는지도 모르고 황천길 건너면 억울할 것 아니냐! 본좌가 이렇게 친히 알려주니 좋은 기회잖냐? 늦기 전에 정신 차리란 말이야!”

강렬한 호소가 통한 걸까?

수만 명의 무인들이 술렁거리면서 서로를 바라본다.

이따금씩 극마를 올려다보기도 한다.

마침 아송 옆에 있던 무인이 아송을 툭툭 건드린다.

“이, 이보게. 저자의 말이 사실일까? 흑천련주가 우리 정도인들과 손을 잡으라고 강조하다니. 어쩌면 정말 천림인이 적일 수도 있겠는데?”

아송이 쿡쿡 웃었다.

“자, 자네 왜 웃나?”

“그럴 리가 없잖아.”

“뭐라고?”

아송이 손가락으로 죽립을 밀어올리고는 무인을 보았다.

“말 몇 마디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니까.”

“그게 무슨…….”

따악!

아송이 손가락을 튕기자, 무인이 흠칫 몸을 떨더니 두 눈을 벌겋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이내 그가 광기에 찬 표정으로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더니 혀로 칼자루를 핥았다.

“여윽시 그렇지? 니미럴! 흑천련주 따위가 제멋대로 지껄이는 말을 믿을 게 뭐야! 저딴 쓰레기들은 다아 죽여 버려야지! 안 그래?”

이죽거리던 무인이 몸을 홱 돌리더니 살검을 휘두르며 내달렸다.

“하하하.”

아송이 낭랑하게 웃었다.

비단 그자뿐만이 아니다.

그가 손가락을 튕긴 순간 잠깐 흔들렸던 무인들이 다시 두 눈을 벌겋게 물들이고는 광기를 머금어갔다.

“씨부럴, 동맹 좋아하시네! 저 개 같은 것들은 전부 죽여 버려야 해!”

“흥! 네놈들의 뼈와 살을 분리해 주마!”

그 모습에 아송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래, 그게 너희들의 임무다. 비열함을 향해서 칼을 휘두르는 것. 너희들은 그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채로 장렬히 전사하면 되는 거다. 본분을 지키도록.”

따악!

“정파 나부랭이 놈들을 쓸어버리자!”

“이 빌어 처먹을 사파 새끼들! 결국 교란책이었을 뿐이다!”

성난 군중들이 다시 살기를 피워 올린다.

천림인들은 앞장서서 일방적인 살육을 저질러 간다.

쉬이이잇!

푹! 서걱! 쾅!

“크아악!”

“으악!”

당황한 맹주가 다시 나서서 사자후로 외친다.

“멈춰라! 각 문파의 장문인들은 제자들을 통솔하여 주시오! 우리끼리 싸워서는 승산이 없소!”

하지만 소용없다.

이미 광기와 살기가 난무하는 와중에 누가 제 한 몸을 포기할 각오로 칼을 내려두겠나?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한데 바로 그때 거짓말처럼 기적이 일어났다.

“그만.”

단 한마디.

하늘에서 떨어진 그 한마디에 정사 무인들은 물론, 천림인들조차 움찔 떨고는 그 자리에 굳은 듯 멈췄다.

마치 뭔가에 홀린 것만 같다.

누구보다 놀란 사람은 바로 아송!

그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하늘에 떠 있는 적비연을 올려다보았다.

왜일까?

이제 노을도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워졌다.

핏빛 하늘이 이젠 흑빛으로 변했다.

그럼에도 적비연만큼은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마치 세상의 모든 빛이 그를 비추는 것만 같다.

서녘에서 떠오르는 달빛도, 하늘에 총총 모습을 드러내는 별빛도. 심지어 바닥의 호수조차 그를 비춘다.

동작 하나 하나, 표정의 미약한 변화, 눈동자의 움직임과 숨결까지 거짓말처럼 또렷하게 오감에 박혀든다.

‘이건…… 대체……?’

이럴 리가 없다.

그 어떤 무공으로도 절대 제압할 수 없는 파세공진음이 아닌가!

어째서……?

움직여! 움직이란 말이다!

따악!

손가락을 튕겨보지만 무인들은 움직이지 않는다.

미쳐 날뛰던 자들이 죄다 밀랍인형이 된 것 같다.

‘네놈들은 본분에 충실하란 말이다!’

따악!

반응이 없다.

따악! 딱! 딱! 딱……!

연거푸 손가락을 튕기지만 무인들은 집단 최면에 빠진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대신 적비연의 입이 떨어지자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적비연은 마치 지친 동료에게 말을 건네듯 나긋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그야말로 지옥 같은 전장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들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분노가 차오르는가? 절망에 몸부림치고 있는가? 그도 아니면 모든 걸 내던지고 살풀이를 하고 싶을 뿐인가? 하나 그것이 가져올 결과는 너희들을 더 수렁으로 빠트릴 거야.

한순간의 선택으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지 마라. 지금의 울분을 가슴으로 삼켜라. 세상을 향한 복수심도 이해한다. 하지만 복수의 칼보다는 너희들 자신을 보듬는 것에 더 집중해라. 너희들은 단 한 번도 인생을 쉽게 여기지 않았다. 너희들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때론 울음을 삼키며 악착같이 버티고, 죽음의 유혹도 견디며 살아온 너희들이다. 세상일이 내 마음처럼 흐르지 않지만, 그래도 끝까지 버티지 않았던가? 최악의 환경 속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악착같이 일어선 너희들이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지 않은가? 내가 살아 보니 죽음보다 어려운 게 살아가는 것이더라.

너희들의 목숨을 허망하게 낭비하지 마라. 그래도 너희들은 오늘까지 살아남은 용기를 가진 자들이니까. 나는 그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

느닷없는 일장 연설이 전장 복판에 차분히 내려앉는다.

적비연의 목소리는 마치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함박눈 같았다.

세상의 모든 소음을 집어삼킨 채로 고요히 내린다.

모두의 시선과 청각을 사로잡으며.

정말이지 이 전장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의 말은 모두의 마음을 울린다.

무인들 개개인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듯한 음성.

마치 어깨동무를 하고 친근하게 말을 건네 오는 듯한.

그 음성에 모두가 고개를 떨어뜨리고는 손에 힘을 풀어 버린다.

도대체 우린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가?

왜 이렇게 분노를 참지 못했던가?

삶은 인내의 연속이 아니었던가?

왜 오늘이 마지막인 것처럼 싸우고 있었나?

갑자기 회의감이 들기 시작하자, 전의마저 상실해 버린다.

뎅그렁……!

누군가는 아예 검을 놓고는 주저앉아서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격하게 반응하는 이가 있었으니…….

’멍하게 서 있던 아송이 흠칫거리고는 자신의 뺨을 쓰다듬었다.

눈물……!

‘내가 눈물을……?’

그러는 사이 적비연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러니…… 지금도 악착같이 살아남아라. 감정에 휩쓸리려고 할 때, 사력을 다해 이성을 붙잡아.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은 순간에는 어떻게든 힘을 내서 버텨라. 지독한 절망 속에서 오늘도 살아남을 너희들을 나는 존경한다.”

쿠웅!

만인의 기운이 격동하면서 묵직한 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그 복판에 서 있는 아송.

그가 주먹을 콱 말아 쥐고는 어금니를 빠득 갈았다.

이게 뭔가?

어째서 자신의 마음이 이토록 격동한단 말인가?

그 어떤 무공으로도 절대 꺾을 수 없는 파세…… 설마?

처음에 스쳐 갔던 그 생각이 다시 떠오른다.

감정만 휘어잡는 파세공진음과 달리, 그 너머의 의지마저 휘어잡는다는 전설의 이능.

공천지권위!

충격으로 몸이 굳는다.

“어떻게…… 어떻게……!”

울분이 차오른 아송이 어금니를 피가 나도록 악다문다.

뒤늦게 치솟는 분노의 감정으로 눈물을 삼켜간다.

신음처럼 흘러나오던 그의 목소리가 곧 절규가 되어 터졌다.

“어째서……! 어째서 네놈은 나를 방해하느냐아앗!”

따아악!

손가락 튕기는 소리가 올렸고, 동시에 적비연의 눈빛에도 이채가 떠올랐다.

파세공진음의 영향을 받은 천림인이 먼저 움직이기 시작했고, 뒤이어 적비연이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몸을 날렸다.

“거기였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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