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7. 피눈물이 흐를지라도
아송이 절규와 함께 터뜨려낸 파세공진음은 분명 강렬했다.
천림인을 필두로 꽤나 많은 무인들이 다시 광기와 살기를 피워 올렸으니까.
하지만 그보다 적비연의 공천지권위가 더 강한 인상을 남겼다.
때문에 무인들 중 칠 할 이상이 잠깐 마음이 흔들렸을 뿐 광기까지 머금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손가락을 튕기는 이상한 소리가 들린 후 동료들이 무작정 살기를 피워 올리는 것에 의문을 품기 시작했다.
“뭐, 뭐야? 다들 진정해 봐!”
“뭔가 이상하잖아!”
주변 무인들이 정신을 차리기 시작하자 지금까지 악착같이 버텨왔던 단휘와 예홍도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다.
“가주님 덕에…… 살았군.”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한 단휘가 비틀거리며 중얼거렸다.
예홍도 단휘와 등을 맞대고는 겨우 숨을 돌렸다.
“가주님의 말씀…… 왠지 좋았어.”
그녀의 말에 단휘가 피식 웃었다.
“그러게. 나도 모르게 눈물 찔끔 했다니까. 별말도 아닌데 왜 갑자기 마음이 격동하는지.”
“별말이 아니긴. 그건 내 이야기였어. 오늘까지 버틴 날 위로해 주신…….”
“무슨 말이야? 그건 내 이야기였다고! 날 위로해 주기 위해 하신 말씀이라고. 가주님이 날 얼마나 귀여워하시는지 알기는 하냐?”
“미친. 착각도 유분수지! 후우, 가주님이 이 많은 사람들을 정신 차리게 만들었지만, 정작 너는 미쳐 버렸구나. 가엾게도.”
“뭐야?”
발끈한 단휘가 휙 돌아보자, 예홍이 어디 따져보라는 듯 고개를 빳빳하게 들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전장에서 이런 여유를 부리다니.
놀랍게도 지금 그게 가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절망과 분노만 가득한 곳이었는데.
단휘가 어깨를 으쓱였다.
“뭐, 그건 사실 모두를 위한 위로였지.”
“그래, 나도, 너도. 저들도.”
“어쨌거나 가까스로 살아났으니 가주님께 감사해야겠군.”
“흐응. 목숨은 나한테 받아놓고, 감사는 가주님께만 하는구나.”
예홍의 핀잔에 단휘가 눈살을 찌푸렸다.
“너…… 적응 안 되게 정말 왜 이러냐?”
“내가 뭘?”
“아니다, 됐다. 너 진짜 예홍 맞지?”
“그럼?”
“설마……! 진짜 예홍을 죽이고 얼굴 가죽을 뒤집어쓴 가짜인 거냐!”
단휘가 화들짝 놀라면서 얼른 경계를 하자, 예홍이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농담이라기에는 반응이 너무 진지해, 멍청아.”
꿀꺽……!
“설마…… 농담이 아니라는 건가?”
예홍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노려보자 단휘가 검을 앞세운 채 심호흡을 했다.
“아니라고 해줘, 제발.”
“말 한마디로 믿을 것 같았으면 검을 왜 뽑았을까?”
예홍이 서늘한 웃음을 지으며 다가오자 단휘가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역, 역시…… 넌……!”
“어떻게 알았을까?”
“정, 정말이냐? 그럼 날 왜 살린 거지? 홍은? 예홍은 어떻게 한 거냐!”
“내가 잡아먹었지.”
“뭐?”
“못 들었어? 내가 잡아먹었다니까.”
타앗!
순간 예홍이 바닥을 차고는 쏜살같이 날아갔다.
휘리리리리링!
그녀의 손에 들린 연검이 뱀처럼 굽이치며 뻗어나갔다.
“우아악!”
단휘가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는 순간,
푸욱!
“커억!”
섬뜩한 파육음에 이어 답답한 신음이 머리 위에서 터졌다.
뚝……!
단휘의 정수리에 뜨끈한 액체가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 보니 연검에 목이 꿰뚫린 무인 한 명이 전신을 부르르 떨다가 이내 축 늘어지는 것이 아닌가?
“으헉!”
단휘가 얼른 몸을 피하자 그대로 고꾸라진 무인이 한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예홍이 연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고는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벌써 두 번째다, 너. 최소한 감사한 줄은 알아.”
“고, 고맙다…….”
“흥! 이 정도 해줬으면 앞가림은 하겠지. 살아남아라. 이 정도 환경에서는.”
“어, 어디가 ?”
“싸우러. 가주님 덕분에 상황이 꽤 좋아졌지만 그래도 아직 미친놈들이 많으니까.”
타앗!
순간 예홍이 바닥을 차고는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녀는 여전히 광기에 사로잡혀 몸부림치는 자들을 가차 없이 베어갔다.
그 뒷모습을 멍하니 보던 단휘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 정도 환경에서는 살아남으라니. 이건 진짜 최악의 환경이잖아! 도대체 어쩌다가 저런 긍정적인 아이로 변한 거야? 머리를 다쳤나?”
그때였다.
“빌어먹을 배신자로구나! 적가 나부랭이!”
느닷없이 고함 소리가 들리더니 정파 무인 하나가 허공을 붕 가로질러서 떨어져 내리는 게 아닌가?
넋을 놓고 있던 단휘는 상대의 민첩한 움직임에 암담한 절망감을 느꼈다.
‘제길! 넋 놓고 있다가 죽게 생겼잖아!’
못해도 초절정에 가까운 고수다.
반응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겨우 예홍이 두 번이나 목숨을 구해줬는데, 여기서 이렇게 어이없이 죽게 되다니.
그때였다.
“뭘 멍청하게 서 있냐?”
따끔한 질책이 귓가를 스치는가 싶더니 한 줄기 검은 바람이 휙 불었다.
슈컥!
곧이어 단휘를 찔러오던 무인의 목이 뎅겅 잘리더니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는 게 아닌가?
츄아아아아!
피를 분수처럼 뿜어낸 몸통이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퉁방울만 해진 눈을 끔뻑거리는 단휘에게 다가온 사람은 다름 아닌 묵검이었다.
“너, 내가 한 번 살렸다.”
“형, 형님! 무사하셨군요?”
“누가 누굴 걱정하냐? 정신 단단히 붙들어라. 모처럼 가주님의 이능으로 다들 정상으로 돌아왔으니 제대로 싸워야 할 것 아냐.”
“아…… 그렇죠.”
“홍은?”
“아! 예 대주 덕분에 제가 두 번이나 살았습니다.”
“널 살린 건 난데 왜 엉뚱한 곳에 감사하냐?”
“네네, 다들 절 살리시는군요.”
단휘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자 묵검이 뒤통수를 딱 때렸다.
“아얏!”
“최소한 감사할 줄은 알아라.”
“으씨, 다들 왜 절 잡아먹지 못해 안달입니까?”
“뭐 인마? 이 배은망덕한 놈이…….”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일단 예 대주부터 찾아야겠습니다. 빚지고 살 수는 없으니까요.”
탓!
찰나지간에 단휘가 바닥을 차고 어디론가 훌쩍 날아갔다.
묵검이 그 뒷모습을 얼빠진 표정으로 보다가 피식 웃어 버렸다.
“다행이군. 완전히 쫄아 버린 줄 알았더니.”
그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확실히 적비연의 공천지권위 영향은 컸다.
물불 가리지 않고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던 무인들이 이젠 제법 이성을 차리고는 광인들을 상대하고 있었다.
문제는 아직까지 이성이 돌아오지 않은 채로 설쳐대는 자들이 꽤 있다는 점이었다.
백발 광인들과 달리 그런 자들은 눈으로 식별하기도 어려웠다.
그나마 두 눈이 핏빛으로 물든 자들을 찾아내면 어김없이 파세공진음이 혼이 팔린 상태이긴 했다.
“그나저나…… 가주님은 어디에 계신 거지?”
가까운 곳에서 도움이 되어드리고 싶어도 허공에서 이형환위의 신법으로 사라진 터라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하긴, 이젠 자신의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강해진 분이 아니던가?
그래, 가주님이라면 어떤 상황에서든 해결방법을 찾아내실 분이리라.
한 차례 사방을 둘러본 묵검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무인 하나를 가차없이 베어 버리고는 곧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팟!
* * *
스팟!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눈앞에 적비연이 나타났다.
순간 모든 상황이 느릿한 광경처럼 보인다.
마치 시간의 흐름이 달라진 것처럼.
아송은 눈을 크게 뜨고 적비연을 응시했다.
그의 눈가에서는 여전히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적 가주…….”
아송이 어금니를 빠득 갈고 중얼거리는데, 적비연이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그 표정이 너무나 처연하면서도 씁쓸해서 절로 힘이 쭉 빠지는 것만 같다.
저 표정은 대체 무엇인가?
자신을 향한 동정인가? 아니면 공감? 그도 아니면 슬픔의 표현인가?
비웃음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없는 웃음이다.
묘하다.
분명 자신보다 한참 어린 자인데 어째서 나이 지긋한 현자를 대하는 심정일까?
느리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천천히 부는 바람이 적비연의 머리카락을 붙들고 끈질기게 늘어진다.
적비연의 눈빛은 고요하고 처연하다.
사뿐.
적비연이 한 걸음을 내디딘다.
주춤.
아송이 한 걸음 물러선다.
왜……?
설마 눈앞에 있는 저자를 두려워하는 건가?
천하의 자신이?
손가락을 튕겨 파세공진음을 일으킬 생각조차 들지 않는다.
그러는 사이에 적비연이 다시 한 걸음 내디딘다.
여전히 그 처연한 미소를 지은 채로.
바람결에 묻어나는 음성이 귓가를 스친다.
“아송.”
“……!”
단 한마디.
그저 이름을 불렀을 뿐인데 아송의 마음이 격동한다.
화산이 터지고 지진이라도 일어난 땅처럼 마음이 흔들리고 부서지는 것만 같다.
‘어, 어째서 이런……!’
눈물이 차오른다.
폭발해 버릴 것만 같은 설움이 목구멍을 타고 꾸역꾸역 밀려든다.
아수라장이 된 전장.
자신이 일으키고 만들어낸 지옥이다.
한데 지금 그는 마치 낯선 지옥에 홀로 뚝 떨어져서 구원자를 만난 것만 같다.
당장 달려가 적비연의 품에 안겨 펑펑 울고만 싶다.
어느덧 아송은 불행이 닥쳤던 그날의 아이로 돌아가 있었다.
“아, 아냐…….”
아송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흔들릴 수 없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지난 수십 년간 이 지옥도를 얼마나 그리고 그려왔는데.
다 해내지 않았는가?
여기서 굴복할 수는 없다.
하지만…….
’“너무 애쓰지 마라.”
적비연의 목소리를 들으니 다시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다.
단지 말하고 행동하고 있을 뿐인데, 보이지 않는 힘이 그의 전신을 친친 옭아매는 것만 같다.
“으으으……!”
“지나치게 애쓰다 보면 때론 잘못된 길을 택할 수도 있는 법. 지금은 애쓰지 말고 쉬어야 할 때다. 잠시 모든 걸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보아라.”
“시, 시끄러…….”
“아송.”
“끄으으읍!”
“나는 너를 믿는다.”
복받치는 설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오열하고 싶다.
모든 걸 포기하고, 그렇게 스러지고 싶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개수작이다!
저놈의 두 눈을 봐서는 안 된다.
저놈의 표정과 손짓, 걸음걸이, 스치는 바람조차도 봐서는 안 된다.
그래, 이건 틀림없는…….
‘공천지권위!’
굴복할까 보냐!
“끄아아아아악!”
순간 아송의 목에서 핏대가 터져 버릴 것처럼 불거져 나왔다.
동시에 그는 온 힘을 다해 손을 들어 올렸다.
다음 순간,
푹! 푸욱!
놀랍게도 아송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두 눈을 찌르는 것이 아닌가?
“끄아아아아압!”
파악!
마침내 손가락이 뽑혀 나오자 아송의 두 눈에서 검붉은 핏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쯤 되자 적비연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지독한……!’
적비연이 눈살을 구기는 사이, 아송이 바닥을 차더니 번개처럼 날아들었다.
“으아아아아아!”
두 눈에서 핏줄기를 뿌리는 아송이 손을 뻗자 어디선가 검 한 자루가 빛살처럼 날아와 잡혔다.
쒸아아아아아아앙!
일순 검강이 일어나며 적비연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쳤다.
머리카락 몇 올이 강기에 잘려 허공에 휘날린다.
만약 적비연이 조금이라도 늦게 상체를 젖혔더라면 잘려 나간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라 목이 되었으리라.
이 역시 시활안 덕분이었다.
‘죽을 뻔했네!’
내심 안도의 숨을 쉰 적비연이 그대로 몸을 회전하면서 검을 내질렀다.
쒸이이이잇!
파바바바밧!
두 눈이 먼 아송은 거짓말처럼 적비연의 공격을 피해냈다.
적비연이 얼른 몸을 바로 세우고는 소리쳤다.
“아송!”
“닥쳐라!”
콰직!
아송이 이번에는 자신의 왼쪽 귀를 찔렀다.
곧 귀에서도 피가 흘러내렸다.
오감을 자극해서 감정을 넘어 의지마저 빼앗는 공천지권위.
그것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수단이었다.
“크크크큭! 자, 이제 또 개수작 부려보지 그러나? 잘난 설득이라도 해보려는 건가?”
“정말이지 구제불능이군. 좋게 끝내려고 했더니.”
“하하하하! 이미 자네가 무인의 길을 걷는 순간, 우리 운명은 악연으로 이어져 있었다!”
파앙!
아송의 신형이 전에 없이 빠른 속도로 적비연을 향해 날아들었다.
찰나, 아송이 이기어검으로 검신을 날려 보내며 소리쳤다.
“보아라! 이 강호가 어찌 무너지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