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78화 (279/301)

278. 천번지복(天翻地覆)

쩌엉! 꽈앙! 꽝!

지축이 뒤흔들린다.

하늘이 뒤집히고 땅이 갈라진다.

정말이지 인간의 싸움이라고 할 수 없다.

두 종류의 기운이 어찌나 강렬하게 얽히는지 근방의 초목들이 그 기운을 이겨내지 못해 급속히 시들어 버린다.

연못의 물은 연신 춤을 추듯 튀어 오르고 허공에 떠올랐던 물방울은 이내 비처럼 떨어져 내린다.

그러다 보니 비무장 한쪽, 적비연과 아송이 싸우는 장소에만 계속 비가 내리는 것 같다.

츄아아아앙!

촤아아아아!

연신 물방울이 튀고 비산하길 반복한다.

아송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신출귀몰이다.

두 눈을 잃었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민첩하고 즉각적인 반응을 보인다.

거기에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살기는 또 어떤가?

반경 삼 장 이내에만 들어가도 숨이 막혀 죽을 지경이다.

쏟아져 내리는 물방울조차도 그가 뿜어내는 살기에 닿으면 순식간에 기화하고 만다.

반면 적비연의 움직임은 정적이다.

연무장 한쪽에 깊숙이 박힌 거대한 바위 같다.

사방에서 번쩍번쩍 치고 들어오는 아송의 검을 선 자세로 모두 막아내고 있다.

쩌어엉! 쩡!

연신 쇳소리가 울리니 고막이 떨어져 나갈 것만 같은데도 적비연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주변에서 격전을 치르던 무인들조차도 넋을 놓고 구경하기 시작했다.

생사가 오가는 전장에서 적과 대치한 상황도 잊은 채 구경하기 바쁘다.

평생 살면서 저런 기이한 광경을 몇 번이나 보겠나?

“미쳤군, 미쳤어. 사람이 어찌 저리 빠르지?”

“그나저나 적 가주와 싸우는 저 인간은 정체가 뭐야?”

“어? 정파 네놈들 쪽 사람 아니었냐?”

“우린 모르는 자인데. 누구 아는 사람 없어?”

무인들이 술렁거렸다.

그러자 지켜보던 노인 한 명이 불쑥 끼어들며 소리쳤다.

“아, 누구면 어떤가? 지금 구경하고 자빠졌을 때가 아냐! 맹주의 말 못 들었느냐? 어서 저 미치광이들을 상대하라고!”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악을 쓰는 자는 다름 아닌 개방의 장로인 취걸개(醉乞丐)였다.

그의 호통에 그제야 사람들이 몸을 돌리고 천림인과 백발광인들을 상대하기 위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아쉬운 마음은 가득한 표정으로.

취걸개가 혀를 끌끌 차고는 고개를 돌려 적비연을 보았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 자군. 저 정체불명의 괴한을 가만히 서서 다 피하고 막아내다니. 도대체 저런 자의 정보가 어째서 개방에 없는 거지? 정보 수집 체계를 완전히 다시 짜야겠어! 젠장!”

취걸개는 적비연의 신들린 방어력을 보면서 혀를 찼다.

한편 적비연은 움직임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싸우는 것에 집중했다.

현재 아송은 주변의 모든 무기와 무인들을 이용하고 있었다.

때문에 자신이 운신의 폭을 넓히게 되면, 그만큼 희생자가 늘 수밖에 없는 상황.

때문에 웬만해서는 선 자리에서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벽력처럼 빠른 아송을 그러고도 상대할 수 있는 이유는 시활안 덕분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아슬아슬한 차이로 아송의 공격을 막고 피했을까?

“나를 아주 우습게 보는군!”

서늘한 목소리에 이어 허공으로 병장기가 빽빽하게 솟아올랐다.

얼핏 보아도 수십 개의 도검창!

각각의 예기를 품은 도검창이 일시에 적비연을 향해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집중 폭격!

쒸쒸쒸쒸쒸에에엣!

이번만큼은 적비연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저 많은 도검창을 호신강기로 막았다간 공력 소모가 극심할 터.

다행히 취걸개 덕분에 주변으로 몰려들었던 사람들은 상당수 흩어진 상태였다.

파바밧!

적비연이 오랜만에 보법을 밟고 움직였다.

가장 먼저 날아든 것은 가벼운 연검.

적비연이 몸을 비트는 것과 동시에 손바닥으로 연검을 쳐냈다.

티잉!

휘리리리링!

물고기처럼 몸을 흔들어대며 튕겨 나간 연검이 누군가의 목에 박혀든다.

푸욱!

“컥, 커억!”

놀랍게도 목을 부여잡으며 쓰러진 자는 백발 광인!

그 모습을 본 취걸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 와중에 백발 광인을 노렸다고?

말도 안 되는 일!

그래, 운이 좋은 것이리라.

‘제길, 지금 내가 뭐 하는 거야? 구경꾼들 싸움터로 내몰고 내가 구경하고 앉았네.’

취걸개가 내심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발걸음을 떼려고 했다.

한데 쉬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다.

정말 운일까?

여기까지 생각은 길었으나 흐른 시간은 찰나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적비연에게는 두 번째 무기가 날아들었다.

이번에는 도!

도강까지 품고 있다.

적비연은 빠르게 뻗어오는 도를 보며 왼발을 뒤로 뺐다.

피츗!

왼쪽 어깨를 얇게 벤 도가 그대로 적비연을 지나치며 바닥에 처박힌다.

콰아아아앙!

마치 폭약이 터지는 소리가 쟁쟁 울린다.

그러는 사이 또 세 자루의 검이 적비연을 향해 날아든다.

탁!

발끝으로 땅을 툭 찍어차자 검 세 자루가 적비연을 지나친다.

한데 놀랍게도 그중 한 자루는 그대로 적비연을 따라 아래에서 솟구친다.

이기어검이다.

휘리리릭!

적비연이 팽이처럼 회전하면서 솟구쳐 올라오는 검신의 옆면을 발끝으로 때렸다.

파앙!

투카카카카캉!

쒸에에에엑! 푸욱!

튕겨나간 검이 날아드는 다른 병장기를 마구 뿌리치고는 누군가의 목에 처박힌다.

“……!”

취걸개는 다시 놀랐다.

‘운이…… 아니라고?’

이번에도 목을 부여잡고 죽는 자는 백발 광인이다.

백발 광인이 쓰러지자 그에게 달려들며 협공을 펼치던 무인들이 순식간에 흩어진다.

목숨이 다하는 순간 백발 광인이 폭약처럼 터진다는 걸 학습한 효과다.

아니나 다를까,

꽈아아아앙!

엄청난 폭음과 함께 강렬한 폭발이 일어났다.

분지 한쪽이 작은 분화구가 생긴 것만 같다.

이 모든 과정이 순식간에 일어나고 있었다.

시활안 덕에 모든 현상을 느리게 볼 수 있는 적비연에게는 대략 이런 흐름이지만, 범인이 볼 때는 전혀 다르다.

투타타타타! 까가가가강!

이걸로 끝이다.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났냐고?

모른다.

적비연의 몸 주변으로 빛이 번쩍이면서 요란한 소리가 울렸고, 튕겨 나간 도검창이 제멋대로 땅바닥에 박혀 있을 뿐.

그리고 그중 몇 자루는 기가 막히게도 백발 광인들을 정확히 노렸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쓰읍, 후우……!”

한 차례 폭격이 끝나자 적비연이 심호흡을 하고는 아송을 노려보았다.

“아송. 내가 널 왜 살려두는지 아는가?”

“후후. 강호인에게 언제부터 이유가 중요했나? 그저 의지만 중할 뿐.”

“제대로 꼬였군. 이미 일어난 일을 되돌릴 수는 없겠지만, 너의 어설픈 정의가 얼마나 많은 불행을 만드는지 생각은 해봤나?”

“어설픈 정의도 갖지 못한 너희들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데?”

“그만두지. 대신 하나만 묻자.”

“얼마든지.”

“너, 저것들 그만두게 할 생각 없지?”

적비연이 검을 들어 백발 광인 하나를 가리켰다.

아송은 두 눈이 멀어 보이지 않았지만 적비연이 누굴 가리키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내가 그럴 것 같나?”

“뭐, 그럴 줄 알았지. 그럼 이제 살려둘 이유는 없군.”

“그러고 보니 공천지권위는 이지를 잃은 자에게 잘 통하지 않던가? 후후. 그건 참 안타깝게 됐어.”

“뭐, 그렇게 안타까울 건 없어. 어차피 다 쓸어 버리면 그만이니까.”

“그래, 그게 너희 강호인의 방식이지. 그 방식으로 나도 너희 강호인을 청소하려는 것뿐.”

파파앙!

동시에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화살처럼 쏘아졌다.

이번에는 적비연도 제자리에 서서 막아내기만 하지 않았다.

쩌어어어엉!

공기가 흔들린다.

그 충격파가 사방으로 뻗어나간다.

그 바람에 곳곳에서 싸우던 무인들이 흠칫거리고는 돌아보았다.

한창 백발 광인을 상대하던 임송화도 마찬가지였다.

광인의 발길질에 얻어맞고 땅바닥을 한참 구르다가 일어난 임송화가 움찔거리고는 적비연을 돌아보았다.

분지 복판으로 솟구쳐 오른 적비연과 아송.

그 둘이 서로 검을 섞기 시작하자 연신 천둥이 울리고 바닥의 연못은 물방울을 분수처럼 튕기며 춤을 춘다.

쩡! 쩌정! 꽈르르릉!

‘맙소사……!’

임송화가 멍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금방 사랑에 빠지고 마는 자신에게 조금 실망했었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저렇게 멋진 사람을 보고 어찌 반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하지만 사랑에 빠지기에는 그녀의 상황이 썩 좋지 않았다.

“계집! 천벌을 받아라!”

거친 목소리와 함께 살기가 먼저 떨어져 내렸다.

얼른 고개를 돌려 보니 벌써 백발 광인이 대도를 들고 육중한 무게를 과시하며 낙하하고 있다.

‘아……! 어쩌자고 저런 괴물을 앞에 두고 사랑 타령이었냐? 송화야, 송화야!’

임송화는 스스로를 자책하면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무인으로서 정당한 비무 중에 당한 것이라면 두 눈을 뜨고 죽겠건만, 이렇게 비참한 죽음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싶진 않다.

마침내 그녀의 귓가에 섬뜩한 파육음이 전해진다.

푸우우욱!

곧이어 지독한 고통이 뇌리를 들쑤셔야…… 하는데?

“어……?”

눈을 떠보니 가슴에 검신이 비죽 튀어나온 백발 광인이 돌처럼 굳은 자세로 서 있는 게 아닌가?

“뭐 하느냐! 어서 피해랏!”

느닷없는 고함 소리에 이어 백발 광인의 등 뒤에서 누군가 불쑥 튀어나왔다.

송화는 상대가 누군지 미처 알아볼 겨를도 없이 어깨가 붙들려 그대로 날아올랐다.

“헉!”

대단한 고수.

순식간에 백발 광인으로부터 멀어지자마자,

꽈아아아앙!

아니나 다를까, 백발 광인이 전신을 터뜨렸다.

그 바람에 임송화를 낚아채다시피 안아들고 달리던 자가 그대로 고꾸라졌다.

콰당탕탕!

한참이나 구른 임송화가 입술을 질끈 깨물고 일어났다.

“크읏……! 대체 누구……?”

“화야! 송화야!”

흩날리는 먼지 너머로 아스라이 들리는 목소리.

곧이어 뿌연 먼지 안개를 헤집고 한 노년의 사내가 나타났다.

“송화야!”

“사, 사부님?”

“무사한 것이더냐? 괜찮으냐?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그는 다름 아닌 낙양문주 천기림이었다.

한쪽 팔을 잃은 그가 다른 한 팔로 송화의 어깨를 붙들고 살피며 다그쳤다.

“사부님…….”

송화는 울컥 눈물이 솟구쳤다.

조금 전의 폭발 때문에 사방이 희뿌연 먼지로 덮였지만, 죽어가는 무인들의 비명이 계속해서 귀를 찌르고 있다.

이 지옥 복판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오로지 자신의 안위만을 걱정해 주는 자를 만나니 감개무량할 수밖에.

“아이고, 다행이구나! 정말 다행이다! 무사한 걸 보니 이제야 내 마음이 놓이는구나!”

“사부님은…….”

송화의 시선이 천기림의 왼쪽 어깨로 향했다.

이미 본 적은 있지만, 그때는 경황이 없었다.

다시 보니 마음 한편이 찌르르 아파온다.

하지만 천기림은 대수롭지 않은 듯 송화의 어깨를 토닥였다.

“나는 괜찮다. 걱정 마라. 그나저나 네 말이 맞았구나. 나이 들고 늙어갈수록 제자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법이거늘. 이 사부가 못난 탓이다.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네 말을 외면하고 있었다니.”

“아니에요, 사부님.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다행이죠. 그런데 어떻게 아시고…….”

“네 말을 듣고 나서 영 찜찜해서 천림에 대해 좀 알아보았다. 게다가 죽은 줄 알았던 네가 버젓이 살아 있었으니 이 사부가 어찌 의구심이 들지 않겠느냐? 확실히 자세히 파고드니 이상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구나. 그런데 오늘 이 사달이 난 것을 보고는 확실히 깨달았다. 물론 부끄럽게도 천림주의 사술에 넘어갈 뻔했지만, 적 가주 덕분에 지금은 정신을 차렸다.”

천기림이 창공에서 무신처럼 싸우는 적비연을 바라보았다.

만약 적비연의 공천지권위가 아니었다면 지금쯤 홀린 듯이 맹목적으로 싸우고 있었을 터.

정확한 영문은 모르지만, 적비연의 음성이 자신의 이지를 깨운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임송화가 짐짓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그녀의 시선이 적비연에게 향했다.

아송을 상대로 조금의 밀림이 없다.

대단하지 않은가?

그녀의 안색을 힐끔 살피던 천기림이 눈을 빛냈다.

“화야, 혹시 네 마음속에…….”

“네? 아, 아니에요! 제가 어찌 그런……!”

“허허! 어느새 네가 그럴 나이가 됐구나. 네가 어디가 어때서? 지금은 전시라 자세히 말을 나눌 상황은 아니지만, 이 사부는 너를 응원한다!”

“사, 사부님……!”

임송화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얼른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곧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는 벌떡 일어났다.

“먼지가 걷히고 있어요! 싸워야겠어요!”

“그래, 싸워야지!”

천기림도 벌떡 일어났다.

그때였다.

꽈아앙!

엄청난 굉음이 창공에서 터졌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하늘로 향했다.

마침 적비연에게 일장을 얻어맞은 아송이 피를 한 움큼 토해내고 있었다.

그런 아송을 보며 적비연이 싸늘하게 읊조렸다.

“넌 날 이길 수 없다.”

“과연 그럴까?”

아송이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는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그 순간, 전장에서 싸우던 백발 광인들이 모두 멈칫거리더니 일시에 아송을 올려다보는 게 아닌가?

슈우우욱!

곧이어 아송이 지상으로 빠르게 추락하기 시작했다.

아송이 앙천광소와 함께 소리쳤다.

“하하하하! 자고로 전쟁에서는 반전이 있어야 즐겁지 않겠는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