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독사의 허물
빙백독광사의 비늘 중 단 하나, 거꾸로 솟은 역린.
그 역린을 잘 이용하면 사퇴호신기를 펼칠 수 있다.
비단 빙백독광사뿐만이 아니다.
비늘을 가진 영물.
그래서 허물을 남기는 영물이라면 어떤 존재든 가능하다.
다만 그 과정이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일단 그만한 영물의 역린을 취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영물을 찾기도 힘들지만, 찾았다고 한들 목숨을 걸고 취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영물이 죽은 후에도 역린을 잘못 건드리면 독성에 중독되어 즉사하기 쉽다.
어찌어찌 구한다고 한들, 역린을 가공해서 사퇴호신기를 펼칠 도구로 사용하려면 매우 손이 많이 간다.
약학에 박식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문둔갑과 고대 사술에 대해서도 빠삭해야 한다.
이러다 보니 세월이 흐르면서 이 역린을 이용한 사퇴호신기술은 점점 잊혀갔다.
비늘을 가진 영물의 역린은 그저 계륵일 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적비연도 영물의 내단만 흡수했고, 역린은 찾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한데 그 빙백독광사의 역린을 아송이 취했고.
그리고 지금 이렇게 사퇴호신기를 펼친 것이다.
사퇴호신기를 펼치게 되면 일단 약간의 공력만으로도 기막을 펼칠 수 있게 되는데, 호신강기보다도 단단한 보호막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영물의 내단을 복용한 자에게는 사퇴호신기가 잘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상고시대의 무인들은 보통 내단을 복용한 자가 역린까지 취하니 거리낄 것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소용없다!”
적비연이 고함을 지르며 쇄도했다.
역린은 아송이 취했으나, 내단은 적비연이 흡수했으니 사퇴호신기가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것이다.
백발 광인들이 불나방처럼 적비연에게 달려들기 시작했지만, 모두 섬광에 잘려 나갈 뿐이었다.
스파파파파팟!
눈 깜빡할 사이에 아송에게 날아간 적비연이 검첨에 공력을 잔뜩 실었다.
찰나,
팍!
쿠우웅!
기와 기가 부딪치면서 육중한 소리가 울렸다.
적비연은 믿을 수 없는 표정으로 아송을 보았다.
새하얀 머리카락이 한 올 한 올 공중으로 솟구친 아송이 느긋하게 손을 들어 엄지와 검지로 검신을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까지 싸우던 아송과 차원이 다르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그리 강맹하지도 않다.
마치 서서 잠든 사람처럼 평온한 얼굴.
새하얀 머리카락이 차분히 내려앉기 시작하자, 아송이 스르르 눈을 떴다.
너무 깊고 맑은 눈빛이라 시리게 느껴질 정도.
아송이 희미한 웃음을 머금었다.
“사퇴호신기가 깨졌군요.”
“어떤 수작을 부리든 내가 깬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이번엔 반대가 될 것 같습니다만.”
스윽.
아송이 가볍게 손을 젓자 흑천검을 쥔 적비연이 휘청거리며 비틀거렸다.
다음 순간,
슈욱! 빠악!
“커헉!”
비명을 터뜨린 적비연이 그대로 포탄처럼 날아가서 언덕 아래에 처박혔다.
콰다앙!
“적 가주!”
“저, 저런 괴력을……!”
“어찌 갑자기 저런……!”
주변에서 지켜보던 강호명숙들이 저마다 놀라서 소리쳤다.
아송은 그저 손을 내밀었을 뿐이다.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다.
마치 손을 맞잡으려는 사람처럼 느긋한 동작이었다.
한데 그의 장력에 맞은 적비연은 종이뭉치처럼 날아가는 게 아닌가?
슈우우우.
잠시 후 아송의 신형이 허공으로 부웅 떠올랐다.
그러자 백발 광인들이 그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와 찬양이라도 하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우우우우!”
그들은 이제 완전히 이지를 잃어버린 듯 붉게 충혈된 눈으로 아송만 바라보고 있었다.
아송이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양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무형의 기운이 백발 광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와 아송의 손바닥으로 흡수되는 것이 아닌가?
슈우우우우우!
“크아아아아아!”
고통인지 쾌락인지 모를 비명이 백발 광인들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보면서 강호명숙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손도 대지 않고 내공을 갈취하다니……!”
“저, 저게 가능하단 말입니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오! 저놈이 더한 괴물이 되기 전에 우리가 쳐야 하오!”
“옳소! 갑시다!”
말을 마친 강호명숙들이 일제히 몸을 날렸다.
파파파팟!
그들이 공력을 끌어 올리고는 아송을 치려고 할 때였다.
슈슈슈슈슉!
아송으로부터 삼 장 정도 떨어진 곳에 보패인들이 부채꼴로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그들 중 가운데에 서 있던 매소약이 한 걸음 나서며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감히 림주님을 건드리겠다? 그냥 둬도 뒈질 놈들이지만, 림주님의 손을 더럽힐 수는 없지! 한 걸음이라도 더 움직였다간 그 자리가 바로 무덤이 될 줄 알아라.”
서슬 퍼런 목소리에 강호명숙들이 저마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은 보패인이 얼마나 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불과 며칠 전까지 그들이 아군이었을 때만 해도 뒤가 든든하기만 했다.
한데 적이 되니 공포스럽기 짝이 없다.
“매소약! 너는 명색이 명문정파의 자제로 태어나 이 무슨 해괴망측한 짓인가! 저 정체 모를 괴한의 앞잡이가 되어서 무림맹을 등지다니!”
불쑥 소리를 내지른 사람은 바로 개방의 취걸개.
그 말에 강호명숙들이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한마디씩 했다.
“나도 자네 가문의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네. 그 일은 안타깝게 됐으나, 무림맹에 척을 질 일은 아니지.”
“지금이라도 돌아가신 아버님을 생각해서라도 정신 차리시게.”
“어쩌다 그런 길로 가게 된 건지는모르겠지만 어서…….”
순간 매소약이 말을 가로지르더니 깔깔거리며 웃었다.
“호호호! 우습기 짝이 없군.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우리를 찬양하던 영감탱이들이. 이젠 뭐? 정신을 차리라고?”
“매소약! 네년은 부끄럽지도 않은……!”
“닥쳐, 주정뱅이!”
파앙!
순간 매소약이 쏜살같이 튀어나가며 검을 후려쳤다.
쩌어어엉!
가까스로 술병을 들어 막아낸 취걸개가 버럭 소리치며 물러났다.
“이 무례한!”
“시끄러워, 주정뱅이. 본 가가 기울 때는 어디에서 술을 처마시다가 이제 와서 아버지를 들먹여? 네놈들은 불리해지니까 존재하지도 않는 내 가문을 들먹이는구나. 쓰레기 같은 놈들.”
“네, 네 이년! 감히 건방진……!”
따다다당! 따앙!
취걸개는 말을 마저 잇지도 못했다.
매소약이 검격을 소낙비처럼 쏟아냈기 때문이다.
하나 그 와중에도 취걸개의 방어 수단은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괜히 개방의 장로가 아닌 것이다.
범인이라면 차마 쫓지도 못할 만큼 빠른 속도로 공방이 오갔다.
마침내 매소약이 공력을 잔뜩 실은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쩌까아아앙!
“크읍!”
취걸개가 두 눈을 부릅떴다.
지켜보던 강호명숙들도 섣불리 끼어들지 못하고 마른침만 삼켰다.
자칫 괜히 손을 썼다간 오히려 취걸개가 위험해질 수도 있기에.
“흥! 네년이 사특한 술법으로 강해졌다고는 하나 노부를 당해낼 수 있을 것 같으냐!”
“하여튼 곧 뒈져도 개똥 같은 자존심만 남을 늙은이들 같으니라고!”
“뭣이? 헛!”
한마디 더 내뱉으려던 취걸개는 순간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이게……!”
쩌적…… 쩍!
놀랍게도 그가 들고 있는 술병에 실금이 생기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그는 처음 갑작스러운 공격을 당했을 때보다도 훨씬 놀란 표정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방어 수단으로 들고 있는 이 술병은 결코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흑철주호(黑鐵酒壺).
무려 현철을 섞어서 만든 술병이다.
온전히 현철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기껏해야 술병에 현철이 섞였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다.
취걸개의 또 다른 별호는 타두개(咑頭丐)였는데, 바로 이 흑철주호로 악인들의 머리를 깨트려 죽인다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한데 그의 애병이나 다름없는 흑철주호에 금이 가다니?
잠시 후,
까차아앙!
믿을 수 없게도 흑철주호가 산산조각 나면서 깨지는 것이 아닌가?
“이런!”
혀를 찬 취걸개가 훌쩍 물러났다.
매소약이 그런 취걸개의 품을 매섭게 쫓았다.
쉬이이이잇!
따앙!
마침 어디선가 날아든 비수가 매소약의 검신에 부딪쳤다.
하지만 그뿐이다.
매소약의 검로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호기롭게 나섰던 취걸개의 표정에 낭패감이 서렸다.
‘제기랄! 이년이……!’
이를 빠득 간 그가 발끝으로 땅을 툭 찍어 찼다.
파라라라라!
순간 그의 몸이 팽이처럼 회전하면서 매소약 옆으로 돌아갔다.
동시에 그의 손이 옆구리에 찬 술병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그랬다.
그가 가진 흑철주호는 두 개였다.
‘걸렸다! 계집!’
회심의 미소를 지은 취걸개가 흑철주호를 번쩍 치켜들고 매소약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콰아앙!
흑철주호가 매소약의 머리를 정확히 가격하면서 공력이 폭발하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촤아악!
바닥에 미끄러지다시피 멈춰 선 취걸개가 잠시 휘청거리고는 딸꾹질을 하며 말했다.
“히끅. 클클, 계집아. 네년이 사술로 강해졌다고 노부를 이길 수 있을 것 같았느냐?”
그런데 이상하다.
분명 뒤통수를 얻어맞은 매소약이 멀쩡하게 서 있지 않은가?
넘어갔어도 진작 넘어갔어야 했는데.
취걸개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가리를 얻어맞으니 감각이 둔해진 게냐?”
마침내 매소약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가 희미하게 웃었다.
“맞아. 꽤 아팠어. 살짝 짜증이 날 만큼.”
“뭐, 뭣이?”
“하지만 술을 너무 처먹어서 감각이 둔해진 건 영감 쪽 같은데?”
“이런 맹랑한 년을 봤……!”
거칠게 소리치던 취걸개가 흠칫거리고는 자신의 가슴을 보았다.
“히끅!”
딸꾹질을 한 그가 눈을 끔뻑이고는 다시 가슴을 보았다.
“이, 이게…… 어떻게……!”
털썩!
그는 말을 마저 잇지 못하고는 무릎을 꿇어 버렸다.
어느 틈인지 매소약의 검이 등을 찔러 가슴으로 튀어나와 있었던 것.
“장, 장로!”
강호명숙들이 일제히 그를 불렀다.
매소약이 차갑게 조소를 지으며 손을 뻗자, 취걸개의 가슴에 꽂혀 있던 검이 쑥 뽑혀 나와 손에 착 감겼다.
츄아아아아아!
피를 분수처럼 뿌린 취걸개가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졌다.
“취걸개 장로가……!”
“저, 저년을 죽여 버립시다!”
“이놈들! 네놈들이 이러고도 무사할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분기탱천한 강호명숙들이 일제히 매소약과 보패인들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곧 보패인들과 강호명숙들이 뒤섞이면서 난잡한 사투가 벌어졌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 모습을 보던 맹주 허위청은 애가 타는 마음으로 주변을 훑었다.
‘도산검수(刀山劍樹)로구나. 어쩌다 이 지경까지…… 너는 대체 어디에 있느냐?’
허위청은 지옥 같은 광경 속에서 얼마 전에 만났던 은하란을 찾고 있었다.
‘분명 현장에 올 것이라고 했으니, 여기 어딘가에 있을 터인데.’
적비연의 공천지권위 때문일까?
은하란에 대한 애착이 더욱 심해졌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녀가 자신의 딸이라는 사실이 실감되지 않았다.
하나 지금은 미칠 듯이 보고 싶다.
딸이 아비 없이 혼자 커가면서 느꼈을 결핍을 어떻게든 보상해 주고 싶다.
아니, 그건 나중 문제다.
당장 이 지옥도에서 딸을 구해주고 싶다.
맹주라는 신분을 잊을 정도로 딸의 안위가 걱정된다.
어쩌면 오래전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사랑하는 이를 잃은 경험이 있기에 더 그럴지도 모른다.
그렇게 사방팔방을 두리번거리는데, 마침 허공에 떠서 이동하는 아송이 보였다.
‘노옴……!’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천림주.
감히 자신을 가지고 놀았던 자.
그가 지금 저만치 쓰러진 적비연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마침내 바로 앞에 다다른 아송이 적비연의 머리채를 잡아 일으켜 세웠다.
“벌써 지치면 안 됩니다. 당신은 대정화의 현장을 볼 자격이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