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 도운검우(刀雲劍雨)
아송은 적비연의 머리채를 잡은 채 가볍게 허공으로 던져 올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적비연의 신형이 무형의 기운에 휩싸이더니 허공으로 둥실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능공섭물도 이렇진 않다.
아니, 이기어검술을 쓰더라도 이 정도로 자유롭게 검을 조종하진 못한다.
한데 아송은 적비연의 몸을 손도 대지 않고 허공에 띄우고 있었다.
능공섭물이나 이기어검술의 경우 물체를 움직이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바로 허공에 고정하는 것이다.
한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다니.
대체 어느 정도로 무공이 막강하면 저런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그 모습에 주변 무인들은 넋을 놓고 투지마저 잃어버렸다.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는 것을 절감한 것이다.
실제로 저런 경지라면 우화등선을 하고도 남음이 아닌가?
그런 속내를 읽기라도 한 것인지 아송이 빙그레 웃었다.
곧이어 그가 천천히 허공으로 솟구쳐 올랐다.
오로지 공력을 발출하는 것만으로 신형을 창공 높은 곳으로 띄운 것이다.
그것도 혼자가 아닌, 적비연의 신형과 함께.
분지의 창공에 우뚝 선 아송.
그 앞에 의식을 잃고 드러누워 있는 적비연은 마치 신성한 의식에 바쳐진 산제물처럼 보였다.
아송의 입에서 맑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모든 무인들은 원죄를 지닌다. 힘으로 약자를 굴복시키겠다는 의지. 그것이야말로 돌이킬 수 없는 원죄. 하나 누구도 벌하는 자가 없지. 오로지 강함이 정의가 되는 세상. 그것이 바로 무림이지 않던가? 자, 이곳에서 가장 강한 자는 누구인가? 바로 나다. 이제 내가 정의를 세워 너희들의 원죄를 다스리겠노라.”
감정은 조금도 실리지 않은 음성.
그렇기에 더욱 소름이 끼친다.
그가 내뱉는 광오한 말들은 얼핏 들으면 미친 것 같지만, 실제로 그는 그만한 능력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 분지 가득 사투를 치르던 무인들은 저마다 말할 수 없는 공포감에 휩싸여 온몸이 굳어 버렸다.
공천지권위로 모두를 결속시킨 적비연이 산제물처럼 떠올라 있는 모습도 한몫했다.
아송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리자, 강맹한 기운이 그의 손끝에 맺히기 시작했다.
이윽고,
“엇!”
“헉!”
“이게 뭐얏!”
무인들이 저마다 기겁을 하면서 주춤 물러났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병장기들이 일제히 둥실 떠오르면서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것이 아닌가?
그뿐만이 아니다.
무인들이 각자 쥐고 있는 병장기들도 손에서 빠져나간다.
공력을 일으켜 손아귀에 힘을 잔뜩 실어도 소용이 없다.
마비라도 된 것처럼 손가락 마디마디가 뻣뻣하게 굳으면서 힘을 줄 수가 없다.
결국 벌어진 손바닥에서는 병장기가 쑥 뽑혀 나와서 허공으로 떠오른다.
우우우웅……!
“크으읍!”
수황조차도 들고 있던 여의수룡창을 제어하지 못했다.
“끄어어어업!”
그가 비명 같은 기합성을 터뜨리며 손에 잔뜩 힘을 주었지만 역시나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여의수룡창을 막을 수는 없었다.
쑤아아앙!
“제길!”
그가 주먹을 불끈 쥐고는 다른 한 손에 들려 있는 투왕을 힐끔거렸다.
만에 하나 투왕이 이 모습을 보았다면 최선을 다해 비웃었을 테지.
자신이 이 지경이 된 사실은 따지지도 않고.
어쨌거나 너른 비무장에 모인 수만 명의 무인들이 그렇게 무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각양각색의 병장기들.
전장에서 오로지 피와 살점만 머금었던 그것들이 흉흉한 예기를 뿌려대며 창공 빼곡하게 솟아오른다.
가히 머리끝이 쭈뼛 설 정도로 괴기스러운 광경.
도산검수가 아니다.
도운검우(刀雲劍雨)다.
꾸르르르릉! 꾸궁……!
육중한 천둥이 울린다.
번쩍번쩍 벽력이 친다.
하나, 이건 진짜가 아니다.
각각의 병장기를 둘러싼 기운이 서로 부딪치면서 빛이 터지고, 천둥 같은 굉음이 울리는 것이다.
놀랍게도 이건 모두 한 사람의 손에서 펼쳐지는 일이었다.
아송!
무공과 이능의 조화를 이루어 강호 절대자로 솟아오른 아송.
그는 정말이지 인간을 초월한 존재처럼 보였다.
딱!
그가 손가락을 튕기자 무인들 사이에서 싸움을 벌이던 보패인들이 한쪽으로 일시에 모여들었다.
아송이 입매를 치켜 올리는 것과 동시에,
“천벌이다.”
그의 무거운 목소리가 떨어지자 창공에서 꿈틀대던 병장기 중 검 한 자루가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슈우우우욱!
“피, 피햇!”
무인 하나가 자신 쪽으로 내려꽂히는 검을 보고는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늦은 상황.
꽈아아아앙!
검이 꽂히기가 무섭게 폭음이 일어난다.
사방으로 파편이 튀고 기풍이 태풍처럼 휩쓸고 지나간다.
“크아악!”
“으아악!”
바닥에 꽂힌 검이 분화구처럼 구덩이를 만들었고, 반경 삼 장 이내의 무인들은 시체를 찾기도 힘들 만큼 사지육신이 찢어졌다.
쉬이익! 쉬쉬쉬이이익!
검우가 쏟아진다.
먹구름처럼 창공에 가득 떠 있던 병장기들이 강기를 머금은 채 무서운 속도로 추락하기 시작한다.
짜르르르릉! 짜릉! 꽈과아앙!
그야말로 천벌이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벌!
어마어마한 강기를 머금은 도검창은 원래보다 수십 배 커진 듯하다.
수만 개의 병장기가 수백 개씩 순서대로 떨어져 내리니 천지가 개벽할 정도의 충격이 마구 전해져 온다.
꽈과과과과아앙!
“크아아악!”
“으아악!”
“여, 여길 벗어나야……! 흐익!”
콰아앙!
사지육신이 제멋대로 찢어지고 흩어진다.
온몸이 터져 죽는 자, 팔다리가 아무렇게나 흩어진 자, 머리를 잃고 휘청거리다가 쓰러지는 자, 전신이 타들어가 버린 자. 상하반신이 양단된 자.
처절한 현장.
절망이 들어찬 분지에서 삶에 대한 욕망만이 들끓는다.
강호명숙들이 앞장서서 분지를 벗어나려고 했으나, 언덕 위에는 보패인들이 병풍처럼 버티고 서서 길을 막았다.
병장기를 잃은 무인들은 보패인들을 상대하기가 만만치 않다.
“진퇴양난이로군!”
화산파 장문인 청호진인의 말에 현청이 착잡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정말 우린 여기서 끝일까요?”
“아직 희망을 버리기에는 이르다!”
청호진인이 매서운 표정으로 타일렀지만, 기실 그 스스로 자신은 없었다.
눈앞에 펼쳐진 참담한 광경은 가히 지옥이나 다름없었기에.
하늘에서는 쉴 새 없이 천둥벼락처럼 병장기가 쏟아져 내렸고, 그때마다 분지 곳곳이 초토화되고 있었다.
운이 좋아 내려꽂히는 병장기를 피한 자는 살 수 있었지만, 조금이라도 근거리에 있던 무인들은 중상을 면하기 어려웠다.
“일단 우리가 힘을 합쳐 저들을 뚫고 달아납시다! 이곳에서는 가망이 없습니다!”
고함을 지른 사람은 다름 아닌 낙양문주 천기림이었다.
그러자 공동파의 순양진인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보패인들의 능력이 고강하긴 하나, 우리가 힘을 합치면 퇴로를 뚫는 건 가능할 겁니다.”
“그럼 당장 놈들을 치고 빠져나가지요. 마침 우리가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괜찮은 방법입니다.”
곤륜파의 기재인 한성균도 주먹을 불끈 쥐며 답했다.
하지만 그들을 반대하는 의견이 불쑥 튀어나왔다.
“역시 정파 놈들은 하나같이 제 한 몸 지킬 생각만 한다니까.”
“뭐요?”
천기림이 발끈해서 돌아본 곳에는 흑천련주의 모습을 한 극마가 서 있었다.
극마가 비아냥거리듯 말을 이었다.
“사실이지 않은가? 지금 저기 펼쳐진 지옥도를 보고도 제 한 몸이나 지키자고 퇴로를 뚫자니! 그럼 저기서 죽어가고 있는 당신들 제자가 뭐라고 할까? ‘아, 우리 사부님들은 역시 이 와중에도 목숨을 유지해서 훗날의 복수를 해주시려나 보다. 참 행복하다’라고 생각할까?”
“끄음.”
순양진인과 한성균이 침음을 흘리고는 눈치를 살폈다.
그때였다.
바람 한 줄기가 휭 불어오더니 그림자 하나가 뚤 떨어지듯 내려섰다.
장삼 자락을 펄럭이며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무림맹주 허위청이었다.
허위청이 수염을 쓸고는 진중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흑천련주의 말이 맞소.”
허위청이 자신들을 변호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강호명숙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맹주!”
“지금 무슨 말씀을……!”
하지만 맹주는 뱉은 말을 번복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한 눈빛으로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을 이었다.
“이대로 우리가 힘을 합하면 언덕 위에 위치한 보패인들을 뚫을 수는 있을 거요. 오로지 탈출만 신경 쓴다면. 그러나…….”
잠시 뜸을 들인 맹주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좋은 명분을 들이댄다고 해도 비겁하다는 비난을 피할 수는 없을 거요. 우리 무림맹은, 아니, 정도인들은 언제나 명분을 중시해 왔지. 그러면서 실리만 따지는 흑천련을 무시했소. 하나, 지금 우리는 오히려 흑천련보다도 더 실리를 따지지 않소? 자기 한 목숨 구하기 위해서.”
“끄음……!”
“커흠!”
강호명숙들이 저마다 붉어진 낯빛으로 먼 산을 응시했다.
딱히 반박할 말이 없다.
맹주의 말이 사실이니까.
그렇다고 해도…….
“당장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한성균이 불쑥 나서며 소리쳤다.
그가 앞장서자 다른 강호명숙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대협의 말이 옳소. 우리라고 이대로 도망치고 싶겠소? 생때같은 제자들이 저리 죽어나가고 있는 마당에! 하나 여기서 머뭇거리다간 다 같이 개죽음을 당하니 후일을 도모하자는 뜻이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상황이 애석하긴 하나 다 같이 죽는다는 것도 어리석은 방법입니다. 지금은 어쩔 수 없이 실리를 따져야 합니다.”
순양진인에 이어 낙양문주마저 동의하자, 분위기가 다시 탈출하자는 쪽으로 기울어 갔다.
극마가 코웃음을 쳤다.
“하여튼 물에 빠져도 주둥이만 뜰 것들. 뭔가 시도는 해봤나?”
“련주! 아무리 우리가 당신들과 손을 잡았다지만 말이 지나치오! 지금은 다함께 훗날을 도모하고 당장의 울분을 참아…….”
콰앙!
순간 극마가 발을 구르자 땅이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떨었다.
그에게 소리치던 순양진인이 깜짝 놀라서 말을 삼켰다.
극마가 으르렁거리는 눈빛으로 강호명숙들을 차례로 쏘아보았다.
“나라고 저 녀석이 마음에 드는 줄 알아?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놈이야.”
극마가 허공에 떠 있는 적비연을 가리켰다.
강호명숙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정도로 원한이 있으면서 어째서 흑천련주는 적 가주와 손을 잡았단 말인가?
그들의 궁금증을 뒤로하고 극마가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놈이 저렇게 죽게 내버려 두는 건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알겠어? 네놈들이 그러고도 무인이냐? 뭔가 시도라도 해봤냔 말이다. 절대강자가 나타나니 죄다 꼬리 말고 도망칠 궁리부터 하는 것들이 뭐가 어째? 말이 지나쳐? 당장의 울분을 참아? 이 병신 같은 것들아! 네놈들이 지금 참아야 하는 건 울분이 아니라, 그 밴댕이 같은 마음을 좀 먹어가는 공포심이다! 공포심을 이겨내고 싸울 궁리를 먼저 하는 게 순서란 말이다! 카악, 퉤!”
예의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말투.
하지만 그런 극마의 윽박질에도 강호명숙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것처럼 말을 잇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 모두 윗사람에게 혼난 아이처럼 풀 죽은 모습이었다.
마침 청호진인이 길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흑천련주.”
“뭐냐?”
“고맙소.”
“으응? 갑자기 왜 그래? 뭘 잘못 처먹…….”
“정말로 뭘 잘못 먹은 모양이오. 고통에 몸부림치는 제자들을 두고 달아날 생각만 했다니. 내 생각이 짧았소.”
“흥! 그래도 생각이 바로 박힌 인간이 있긴 하군.”
“빈도는 싸우겠소. 적어도 지금 달아나진 않겠소. 싸우고 싸우면서 이길 방법을 고민해 보겠소. 그러다 도저히 안 되면 그때 가서 차선책을 찾아보겠소.”
청호진인의 말에 지켜보던 현청의 표정이 밝아졌다.
괜히 그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듯했다.
그래, 이것이 화산의 기개가 아니던가?
그러자 낙양문주 천기림도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나도 남겠소이다. 제길, 저 미친 녀석에게 내 제자가 얼마나 죽었는지도 모르겠소. 흑천련주 말이 맞소. 지금은 울분을 참을 때가 아니라 터뜨려야 할 때요! 후일을 도모? 오늘 이렇게 꽁무니 뺀 정신으로 과연 후일을 도모할 수나 있겠소? 더 깊게 숨어버릴지도 모르지!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군!”
“사부님.”
천기림을 부르는 임송화의 눈빛도 맑게 빛났다.
천기림이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두 사람을 필두로 강호명숙들이 마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끝까지 탈출을 감행하겠다는 자들도 있었지만, 남겠다는 무인들이 훨씬 많았다.
대략의 상황이 정리되자 청호진인이 맹주를 보며 물었다.
“맹주님, 혹시 묘안이 있습니까?”
그런데 목소리는 다른 곳에서 들렸다.
옥구슬이 구르듯 낭랑한 목소리.
하천웅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난 그녀는 바로 은하란이었다.
“우리에게 희망은 저기 있는 적 가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