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84화 (285/301)

284. 마지막 희망

무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허공에 뜬 적비연에게 향했다.

그러자 한성균이 다소 신뢰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귀하가 천상원주라는 이유로 무조건 적 가주를 옹호하는 건 보기에 좋지 않소. 적 가주도 지금 저자에게 손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저런 처지에 놓였는데…….”

쿠웅!

느닷없이 울린 육중한 소리에 한성균이 말을 삼키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어느새 나타난 수황이 옆구리에 끼고 있던 투왕을 아무렇게나 던져두고는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조금 전의 그 육중한 소리는 투왕이 바닥에 엎어지는 소리였다.

일단 소리도 소리지만, 사람들은 수황이 투왕을 저리도 막 다룬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고 있었다.

“끄응……!”

투왕이 몸을 뒤척이며 신음을 흘리자 강호명숙들이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고는 물러났다.

괜한 오해를 받을까 봐 염려한 탓이다.

이미 투왕의 무공 수위가 절대고수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확인한 터였다.

그렇잖아도 성격이 괄괄한 투왕인데 오해라도 샀다간 골치 아플 일이 아니겠나?

그러거나 말거나 수황이 한성균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적 가주가 우리의 희망이라는 말. 본좌도 공감하는 바다.”

“……!”

강호명숙들 모두가 놀라서 수황을 보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수황이 저런 말을 꺼낼 줄이야.

자존심으로 따지자면 투왕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자가 아니던가?

너무 놀라서일까?

지금도 주변으로는 천벌이라 이름 붙인 강기 머금은 날붙이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고 있는데, 그 사실조차 까맣게 잊을 정도였다.

한성균이 수황을 보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그는 본좌보다 강하다. 그것으로도 충분하다. 여기에 본좌를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있는가?”

“……!”

강호명숙들이 다시 한번 더 놀랐다.

일단은 수황의 광오함에 놀랐고, 그런 수황이 적비연을 더 강하다고 치켜세운 것에 또 놀랐다.

하지만 주변의 무인들 모두 내심 수황의 말을 인정하고 있었기에 겉으로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

주변의 반응이 잠잠해지자 은하란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러분도 보셨다시피 적 가주님은 절대고수의 영역에 올라섰어요. 물론 지금은 비상식적으로 공력을 흡수한 천림주의 적수가 못 되죠. 하지만 그를 꺾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도 역시 적 가주님이십니다.”

“적 가주가 대단한 건 알겠소? 하나 무엇을 근거로?”

“이 자리에서 그 근거를 다 설명할 자신은 없네요. 다만 제가 천상원주라는 사실을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적 가주님을 절대고수의 영역에 오를 수 있도록 제가 도왔다는 사실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러자 강호명숙들이 서로를 보며 술렁거렸다.

제일 먼저 나서서 물어본 사람은 이번에도 한성균이었다.

“하면 영단 같은 것으로 적 가주를 그리 강하게 만들었단 말씀이오?”

“복합적입니다. 다만 적 가주님의 체질이 특이했습니다.”

“대체 얼마나 특이하기에…….”

“백 년…… 아니, 천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특이 체질이지요.”

은하란의 말에 강호명숙들이 저마다 입맛을 다셨다.

그 정도로 특이체질이라면 자신들은 해당 사항이 없을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기에.

은하란은 일부러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여기 있는 무인들 모두 자신도 적 가주처럼 만들어달라고 매달려 댈 것이 뻔하기에.

하나 천지가 격동하는 이 생지옥에서 은하란의 말을 고분고분 믿어줄 사람이 많지는 않았다.

한성균에 이어 의구심을 표한 것은 순양진인이었다.

그가 하늘에 드러누운 채로 꿈쩍도 하지 않는 적비연을 힐끔거리고는 물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가 그 말을 어찌 전부 믿을 수 있겠소? 천상원주인 당신이 한배를 탄 적 가주를 구하기 위해서 우리를 이용하려는 것일 수도 있지 않소? 애초에 적 가주는 무림맹을 배신하고 흑천련과 손을 잡은 자이기도 하고.”

“이 상황에서도 흑천련을 적대시하는 건가요?”

“커흠! 그런 말이 아니지 않소?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 건 사실이지만, 그간의 과정을 모두 이해하지 못하는 것 또한 사실이외다. 아무리 천상원주라도 우리에게 거기까지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오.”

그러자 다른 강호명숙들도 저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하긴. 천상원은 적 가장의 일부니까.”

“애초에 천상원주라면 적 가주의 심복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것도 함정일지도 모르지.”

은근한 시기와 질투는 트집으로 변하고, 트집은 의심으로, 의심은 다시 확신으로 바뀐다.

어찌 보면 이미 답을 정해놓고 그 과정만 애써 끼워 맞춰갈 뿐.

너무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온 것이다.

정도의 무인들은.

이제는 스스로가 인과관계를 뒤집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그 모습을 보던 맹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자신도 이들과 같지 않았던가?

이들은 말로 설득되지 않는다.

세 치 혀로 당위성을 내세우고, 명분을 찾아내고, 온갖 핑계와 거짓 정의를 만들어 가는 데 도가 튼 자들이 아니던가?

이토록 오랜 세월 굳어진 관습을 깨려면 엄청난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 엄청난 변화란, 결국 근본에서 출발해야 한다.

정도 무인들 모두가 인정할 만한 자의 선언.

하나 그렇게 되면…….

‘지금까지 쌓아올린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인가?’

긴 한숨과 함께 주변을 둘러보니 아수라장도 이런 아수라장이 없다.

살아생전에 이토록 처참한 광경을 본 적이 있던가?

크고 작은 무림 전쟁을 겪어왔지만 단언컨대 오늘처럼 절망스럽진 않았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강기 벼락.

시퍼런 강기를 줄기줄기 품은 날붙이들이 정말이지 세상을 멸망시킬 듯 떨어져 내린다.

이것이 한 사람의 힘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믿을 수 없을 지경이다.

우화등선할 힘을 강호 멸망에 다 쏟아붓는 것만 같다.

그때, 누군가의 외침이 귓가를 찔렀다.

“으엇! 피하시옷!”

짜르르르르릉, 꽈아아앙!

한 줄기 벽력이 강호명숙들이 모여 있던 자리 복판에 내려 꽂혔다.

쩌저정……!

강기를 품은 채 묘비처럼 거꾸로 처박힌 대부는 바로 엽강호가 사용하던 것이었다.

구름처럼 떠 있는 병장기 중 엽강호의 대부가 하필 이곳으로 떨어진 것이다.

대부가 떨어진 이후로도 한동안은 여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 울림이 계속됐다.

다수의 강호명숙들이 호신강기를 펼치며 흩어진 덕에 피해를 줄일 수 있었지만, 공력이 약한 제자들 상당수는 그 자리에 흔적도 없이 즉사하고 말았다.

팔다리가 찢어져 나간 시체라도 남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거꾸로 꽂힌 대부를 중심으로 반경 삼 장 이내에 있던 자들은 흔적도 없이 스러져 시체도 찾을 수 없었다.

“젠장!”

“저 때려죽일 노옴!”

강호명숙들이 다시 대부 근처로 모여 이를 부득부득 갈면서 울분을 토해냈다.

그러는 사이 마음의 결심을 굳힌 맹주가 입을 열었다.

“은 원주의 말을 믿어야 하오.”

“맹주님! 그녀는……!”

“은 원주는 내 딸이오.”

“……!”

너무나 뜬금없는 고백에 강호명숙들이 저마다 눈을 퉁방울처럼 부릅떴다.

너무 놀라서 이번에도 주변의 소음이 그대로 묻혀 버린 것만 같았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청호진인이 더듬거리며 묻자, 맹주가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자세한 걸 말씀드릴 여유가 없소. 다만 분명한 건 천상원주는 내 딸이오. 나는 딸의 이야기를 믿소. 여러분도 적 가주의 무공 수위를 두 눈으로 직접 보아서 알 것이오. 우리에겐 적 가주가 필요하오.”

“허어, 대체 이게 어찌 된…….”

“거참, 아까부터 종알종알 말이 많네! 지금 수다나 떨고 있을 때야? 이럴 때일수록 빨리 뭔가 해야 할 것 아냐! 이런 답답한 늙다리들 같으니라고!”

거칠게 말을 토해낸 자는 다름 아닌 투왕이었다.

어느새 의식을 차린 것인지 투왕이 상체를 일으키고 주저앉아서 분통을 터뜨렸다.

낙양문주 천기림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다고 해도 적 가주가 저 상태인데 어떻게 그를 데려온단 말씀입니까? 묘책이라도 있으신지요?”

이에 맹주는 다시 은하란을 돌아보았다.

은하란이 당돌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두가 힘을 합한다면 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단, 분명한 믿음이 필요한 일입니다.”

“이제 와서 무얼 따지겠소? 말해보시오. 적어도 나는 협력하겠소.”

“끄음! 맹주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우리도 따르겠소!”

“은 원주께선 생각한 바가 있으면 말해주시오.”

이에 은하란이 입을 열었다.

“그럼 말씀드리지요.”

* * *

그야말로 초토화가 된 비무장.

죽음과 비명과 피가 난무하는 곳.

이 끔찍한 곳을 아송과 마찬가지로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보는 이도 있었다.

“아름답구나.”

언덕 위에서 홀린 듯 중얼거린 사람은 바로 무림맹 총군사인 가후였다.

생지옥 현장을 보는 그의 눈빛은 희열을 담고 있었다.

그래, 이것이 정의다.

처음 무림맹에 입맹했을 때가 떠올랐다.

정의를 수호하고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포부를 가졌었다.

하나 무림맹에서 일을 하면 할수록 무인들의 역겨움에 치를 떨어야 했다.

사람 죽이는 것을 밥 먹듯이 하는 사파 무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정도의 탈을 쓰고 비열함의 극치를 달리는 안하무인한 자들의 행태에 분노했다.

구조를 바꿔보겠다고 발버둥을 쳤지만 소용없었다.

자신이 기득권과 싸우면 싸울수록 그들은 더욱 단단하게 뭉쳐서 자신을 깔아뭉갰다.

무림은 그야말로 욕망의 집합소였다.

하늘을 휙휙 날아다니는 자들이 정의를 수호하는 꿈같은 이야기는 말 그대로 꿈일 뿐이었다.

그러던 차에 아송을 만났다.

그는 달랐다.

강하지만 뜻이 분명했다.

이 썩은 강호를 정화시키겠다는 그의 야망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하아…….”

행복하다.

저들의 아우성을 보는 것이 이토록 짜릿할 줄이야.

그나저나…….

“또 무슨 발버둥을 치려고 그러실까?”

가후가 희미하게 웃으며 강호명숙들이 모인 곳을 바라보았다.

하늘에서 천벌의 벼락이 떨어지는 와중에도 강호명숙들은 아까부터 옹기종기 모여 토론을 하고 있었다.

“크크큭……!”

웃음이 나온다.

탁상공론은 저들의 특기가 아니던가?

이 와중에도 난상토론이나 하고 앉았다니!

저러니 썩을 수밖에!

저것들이 무슨 정의 구현을 한단 말인가?

그나마 이번엔 토론의 결과가 나온 것인지 강호명숙들이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럼 어디 두고 볼까? 저 멍청한 자들이 어떤 묘책을 떠올렸는지?’

맹주와 련주가 나란히 섰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는 강호명숙들이 진법을 펼치듯 간격을 적당히 두고 섰다.

언뜻 보기에는 맹주와 련주가 강호명숙들과 한바탕 싸움이라도 벌일 것처럼 보인다.

‘진짜 싸우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 갑자기 맹주와 련주가 강호명숙들을 향해 맹렬히 질주하는 게 아닌가?

하늘에서 불벼락이 떨어지니 다들 미친 걸까?

아, 아니다!

‘호오, 의외로군.’

맹주와 련주가 달리기 시작하니 진법처럼 펼쳐져 있던 강호명숙들이 마치 사다리를 만들 듯이 서로의 어깨를 밟으며 올라섰다.

‘저런 진법…… 예전에 청성파에서 봤던가?’

땅에 넓게 펼쳐진 진법이 아니라, 동료의 어깨를 밟으며 올라가서 인간 탑처럼 쌓아올리는 진법.

그나저나 이 와중에 저런 독특한 진법은 왜……?

답은 곧 알 수 있었다.

‘디딤돌 역할이었군!’

맹렬하게 달리던 맹주와 련주가 진법처럼 쌓아 올린 강호명숙들의 어깨와 손을 디디며 빠르게 인간 탑을 오르는 것이 아닌가?

파바바바밧!

자세히 보니 그들이 한 단계씩 밟아 오를 때마다 디딤돌 역할을 하던 무인들이 온 힘을 다해 그들을 떠밀어 올리고 있었다.

‘천림에 닿을 생각이구나.’

피식.

웃음이 나온다.

저런 어설픈 방법으로 천림주의 옷깃이나 스칠 수 있을까?

아니, 적비연을 구하려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우스울 뿐이다.

맹주와 련주는 분명 천림주나 적비연에게 닿기도 전에 천벌 벼락을 맞아 떨어질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구름처럼 모여 있던 병장기 중 하나가 련주를 향해 떨어졌다.

꽈르르릉, 쒜에에엑!

그때였다.

쩌까아아앙!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철시 한 자루가 강기 머금은 병장기를 튕겨내는 것이 아닌가?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튕겨낸 것이 아니다.

그저 궤도를 살짝 틀어낸 게 전부였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련주는 계속해서 하늘로 솟구쳤으니까.

‘축일공이구나.’

축일공의 위치를 찾을 새도 없이 이번엔 지상에서 거대한 물줄기가 수룡이 되어 솟구쳐 올랐다.

‘수황인가?’

이쯤 되자 심상치 않은 게 느껴진다.

멍청한 무인들치고는 제법 단단히 준비했다.

츄아아아아아앙!

물줄기가 맹주와 련주를 떠밀어 올린다.

두 사람은 수상비를 펼치는 것처럼 물기둥을 밟고 더욱 위로 솟구친다.

마치 수룡의 머리 위에 올라타 창공으로 솟구치는 듯하다.

그리고 마침내,

“부탁드리겠소!”

맹주가 소리치면서 공력을 한껏 끌어 올려 흑천련주의 발바닥에 일장을 날렸다.

파아아앙!

거의 모든 공력을 아낌없이 쏟아부은 셈.

추진력을 받은 극마가 순식간에 적비연에게 쏘아지듯 날아갔다.

하나 그럼에도 아송과 가후는 느긋했다.

그래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렇게 개고생해서 적비연에게 손끝이라도 닿으면?

어차피 공력을 잃고 추락할 일만 남았는데.

그동안 아송이 두 눈 뜨고 구경만 할 것도 아닌데.

‘어디 지켜나 보자.’

가후가 피식 웃었다.

그러는 동안 극마는 마침내 적비연이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예상대로 추진력은 잃었고, 극마도 하늘을 태연히 날아다닐 정도로 공력이 넘치진 못했다.

겨우 적비연의 몸에 손끝만 스치면 다행일까?

“으아아아압!”

그리고 마침내 기합성과 함께 적비연의 몸에 손끝이 스치는 찰나,

‘니미럴, 그래도 이 몸에 정 들었는데…….’

의식을 잃은 흑천련주가 지상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풋, 하하하하!”

지켜보던 가후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기껏 저기까지 올라가서 옷깃 한 번 스치고 추락하다니.

하나 그의 웃음이 그리 오래 이어지진 않았다.

다음 순간, 놀랍게도 의식을 잃고 있어야 할 적비연에게서 반응이 나타난 것이다.

“크아아압! 이렇게 된 이상, 다시 한번 이 몸을 차지해 보겠다! 크하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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