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 천 개의 기억
휘이이잉!
새하얀 눈발이 흩날리는 설산.
인적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설산 어느 구석진 곳에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모옥 한 채가 있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옥은 설산에서 그나마 유일하게 따뜻한 빛을 품은 곳이었다.
그리고 그 모옥에서는 생사를 건 긴박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크으으읍!”
상체에 대각선으로 기다란 자상이 새겨진 남자는 피를 토하면서 비명을 내질렀다.
이미 응급처치를 끝낸 상황이지만, 독상까지 입은 탓에 남자의 안색은 금방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그 곁에서는 열 살도 채 되지 않은 남자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남자의 몸을 흔들고 있었다.
잠이 들면 끝이기에 끊임없이 그를 깨우려는 소년.
그리고 머리맡 쪽에서는 자지러지게 우는 갓난아기와 아기를 달래느라 안절부절못하는 아낙네가 있었다.
“흐음.”
아상은 침음을 흘리고는 얼른 품에서 침을 한 자루 꺼냈다.
최후의 수단이었다.
이걸로 인중에 침을 놓고, 인당혈에도 침을 꽂는다.
그럼 깊은 잠에 빠져들게 될 터인데, 그사이에 남자를 완전히 치료해야만 한다.
성공할 확률은 삼 할 정도.
‘어려운 싸움이 되겠군.’
식은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다.
아상은 잠시 심호흡을 한 후 남자의 인중과 인당혈에 각각 침을 꽂아 넣었다.
푹, 푹!
“끄아아아압! 꺽, 꺼억!”
갑자기 남자가 몸부림을 치더니 이내 눈을 크게 부릅뜨고는 숨을 껄떡였다.
뭔가 잘못됐다!
“괜찮은가? 자네!”
아상이 다급하게 불렀지만, 남자는 시뻘개진 얼굴로 아상을 돌아보더니 이내 선홍빛 피를 왈칵 토하고는 쓰러졌다.
“아버지! 아버지! 일어나세요!”
소년이 울먹이며 소리쳤다.
당황한 아상이 얼른 침을 놓으며 남자의 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맥이 뛰지 않는다.
그제야 자신의 치명적인 실수를 깨달았다.
‘침 놓는 혈 자리 순서가 잘못됐구나!’
왜 그걸 이제야 알았을까?
이자의 기혈이 약한 것을 감안해서 족태음비경(足太陰脾經)에 침을 놓을 때, 두 군데에서 순서를 바꿨어야 했다.
이런 멍청한!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자신의 실수로 한 생명이 영원히 꺼져 버렸다.
가족들과 사별할 시간도 주지 못한 채.
“얘야…… 미안하구나.”
참담한 목소리를 꺼내며 고개를 드는데,
“으음?”
아상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휘이이이잉!
눈보라가 휘날리는 설산.
모옥은 온데간데없고 설산 복판에 쪼그려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시선을 내려 남자를 보았다.
진맥을 했더니 맥이 뛴다!
“이보게! 정신이 드는가?”
“그럼. 아주 멀쩡하게 정신이 돌아왔지.”
“헉!”
순간 아상은 너무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몸을 일으킨 남자는 다름 아닌 아상 자기 자신이었다.
아상이 비릿한 웃음을 머금으며 엉덩방아를 찧은 아상에게 물었다.
“왜 그리 놀라나? 자네라면 이해해야 할 것이 아닌가? 어떤가? 그 몸을 차지하고 있으니 편안하신가?”
“아, 아상 어르신……!”
“이제야 자네가 누군지 깨달은 모양이군. 자네가 아무리 나인 척해봐야 그건 기만일 뿐이지. 감히 내 몸을 차지해? 당장 그 몸에서 나오지 못할까!”
순간 사자후가 쩌렁쩌렁 울리더니 산 정상에서 울음이 터져 나온다.
우르르르르릉……!
눈사태!
까마득한 정상에서 눈보라가 성난 해일처럼 밀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헉! 안 돼!”
아상, 아니, 아상의 모습을 한 적비연은 얼른 몸을 일으키고는 달리기 시작했다.
“어딜 가느냐! 달아난다고 여길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가!”
아상이 쫓아오기 시작했다.
적비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설산을 내달렸다.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 보니 침엽수가 우거진 숲이 나타났다.
나무 사이를 얼마나 헤매며 달렸을까?
숨이 턱까지 차올랐을 무렵,
퍽!
“크윽!”
뭔가에 부딪친 적비연이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다.
“아야야. 엉? 대주님?”
“대주……?”
낯익은 목소리에 적비연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들었더니, 이번에는 여추백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여추백?”
“아니, 대주님. 여기서 뭐 하십니까? 검술 수련하시던 중 아니셨습니까?”
“아…… 그게…….”
뭐 하는 중이었더라?
적비연은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불과 조금 전의 일이 기억나지 않았다.
“잠시 휴식을…….”
“잠시 휴식이라뇨? 그 몸을 차지하고도 쉬고 있을 여유가 있습니까?”
순간 여추백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자신과 똑같은 목소리.
흠칫거리고 고개를 들어 보니 여추백은 어느새 반철룡의 외모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반철룡이 분노에 찬 시선을 던지며 으르렁거렸다.
“내 혼을 몰아내고 육신을 차지했다면 적어도 검의 극의를 깨우치기 위해 정진해야 할 것이 아닌가!”
이번에도 반철룡이 사자후를 터뜨리더니 다짜고짜 검을 후려쳐왔다.
“헛!”
깜짝 놀란 적비연이 얼떨결에 몸을 물려서 피하고는 다시 달렸다.
그러는 사이 마침 정상에서부터 쏟아져 내린 눈사태가 그를 덮쳤다.
쏴아아아아아아!
“크읍!”
적비연이 나무 기둥을 붙들고는 악착같이 버텼다.
온몸이 꽁꽁 얼어붙은 채로 눈사태에 휩쓸려 내려갈 것만 같다.
그렇게 얼마나 버텼을까?
쏟아져 내리던 눈사태가 사라지고 이번에는 새하얀 안개가 주변을 채웠다.
‘일단은 여길 벗어나야겠어.’
적비연이 어금니를 빠득 갈고 걷는데,
“어딜!”
우렁찬 고함 소리에 이어 묵직한 충격이 가슴을 타격했다.
뻐어억!
“크억!”
단말마 비명과 함께 튕겨 날아간 적비연이 나무 기둥을 부러뜨리며 쓰러졌다.
‘이, 이건 투혈권왕의 일권……!’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핏물이 목구멍으로 솟구쳤다.
“크읍…… 쿠웨에엑!”
적비연이 피를 한 바가지 토하고는 비척거리며 일어났다.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오는 서늘한 목소리.
“본좌를 등지고 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나?”
위기의식을 느낀 적비연이 재빨리 돌아서는 순간!
푸우욱!
“커억!”
시커먼 검신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왔다.
눈을 부릅뜬 적비연이 고개를 숙이고는 튀어나온 흑천검을 내려다보았다.
츄아아아아!
순간 검이 뽑히면서 검붉은 핏줄기가 분수처럼 터져 올랐다.
“크으윽!”
얼른 점혈을 해서 지혈했지만 당장 까무러쳐도 이상하지 않을 것만 같은 고통.
비틀거리는 적비연을 중심으로 사방에서 모여드는 이들.
아상과 반철룡, 투혈권왕과 흑천련주.
원망과 분노가 서린 표정들.
제일 먼저 입을 연 것은 아상이었다.
“자네에게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네.”
이후 반철룡과 투혈권왕, 흑천련주가 차례로 말을 뱉었다.
“고작 너 같은 놈에게 내 육신을 빼앗겼다니.”
“널 죽여 버리겠다!”
“이제 그만 사라지도록.”
찰나지간 네 사람이 동시에 적비연을 향해 살수를 뻗쳐왔다.
반사적으로 방어하려던 적비연이 순간 멈칫거렸다.
그간 자신이 빙의되었던 육신의 진짜 영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운재라 불리던 소년의 얼굴과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도 귓가를 스쳤다.
하천웅의 충복이었던 운귀도 보였고, 칠괴의 모습과 아상을 호위하던 무인까지.
찰나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들의 감정이 가슴 깊이 박혀드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시활안이 발동된 것일까?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이들의 면면을 살피게 되니 차마 그들에게 대적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목숨을 포기한 것이 아니다.
그저 그들의 내면에 공감이 되었을 뿐이다.
결국 그들은 곧 적비연이었다.
이미 모든 기억과 경험을 공유하지 않았던가?
그들의 원망과 그들의 욕망이 고스란히 사무치도록 와 닿는다.
여기서 자신이 맞서서 검을 뽑아 든다면, 결국 스스로에게 칼을 휘두르는 꼴이 아닌가?
마침내 아상의 손에 들린 단검이 적비연의 가슴을 찔렀다.
곧이어 반철룡의 검이 폐를 뚫고 튀어나왔고, 투혈권왕의 주먹이 복부를 때려 내장이 진탕이 됐다.
마지막으로 흑천검이 적비연의 등을 대각선으로 베어냈다.
츄아아아아아!
피가 터지면서 적비연이 비틀거렸다.
네 사람은 적비연이 한 걸음도 피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다소 당황하는 표정이었다.
이윽고 적비연이 아상을 먼저 돌아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어르신, 어르신의 뜻을 받들어 반드시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비록 부족한 점이 많겠으나, 그 숭고한 뜻만큼은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반철룡 대주. 검의를 깨우치기 위해 노력한 당신의 노고를 잊지 않겠소. 나 역시 검의 극의를 깨우치기 위해 쉴 새 없이 정진하겠소. 그리고 그 뜻을 깨우치게 되면 제일 먼저 당신에게 감사를 표하겠소.”
“……!”
“투혈권왕. 자네가 가장 아끼는 사예린을 내가 살아 있는 한 안전하게 보호하도록 하겠네. 편히 눈을 감으시게.”
“……!”
“흑천련주. 편견 없는 세상을 만들어 죄 없는 흑도 무인들이 차별받지 않도록 하겠소.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생각이오. 지켜봐주시오.”
“그런…….”
흑천련주의 표정이 흔들린다.
그뿐만 아니라 아상과 반철룡, 투혈권왕의 표정이 전부 흔들리기 시작한다.
적비연이 네 사람을 차례차례 둘러보았다.
어째서인지 온몸은 여전히 피범벅이 되었는데, 곧 죽을 것처럼 강렬했던 고통은 말끔히 사라졌다.
다음 순간, 놀랍게도 적비연을 죽일 듯 둘러싼 네 사람이 동시에 포권하며 이구동성으로 소리쳤다.
“적 가주! 부탁드리겠소!”
후우우우웅!
그들의 목소리 끝나기가 무섭게 눈보라가 한차례 휘몰아쳤다.
그러자 네 사람의 그림자가 연기처럼 흩어지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적비연이 뿌연 안개 너머를 빤히 바라보면서 물었다.
“이제 그만 나오지 그러나?”
“쳇, 눈치챈 모양이군.”
“내 몸을 누구보다 탐내는 게 너니까.”
“흥!”
하얀 안개를 뚫으며 저벅저벅 걸어 나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극마였다.
그가 적비연 앞에 다다라서는 주변을 한 차례 둘러보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한심한 것들. 말 몇 마디로 넘어가다니. 그러고도 정사를 대표한다는 놈들인가?”
“말 몇 마디가 아니라 진심 어린 공감으로 이해시킨 것이지. 물론, 너라면 죽었다가 깨어나도 모르겠지만.”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럼 끝까지 해볼까?”
적비연이 목을 우두둑 꺾고는 팔을 휘휘 돌렸다.
조금 전까지 입었던 상처는 어느새 씻은 듯 나은 상태였다.
눈살을 잔뜩 구긴 극마가 손을 내저었다.
“아서라. 주인하고 실랑이 벌일 생각 없으니까.”
“날 노리기 위해서 계속 숨어 있었던 게 아닌가?”
“뭐, 처음 의도는 그랬지.”
“그런데?”
“괜히 그 몸뚱이 차지해 봐야 편히 쉴 날이 없을 것 같아서 말이지. 조금 전의 그 원혼들이 나타나서 날 들볶아 대면 정말 짜증 날 것 같거든. 거기다가 나는 주인처럼 그 많은 숙제를 할 자신도 없고.”
피식.
적비연이 저도 모르게 실소를 머금었다.
확실히 극마다운 말이다.
“그래도 날 깨우러 와준 건 고마운 일이군.”
“뭐, 결론적으로 그렇게 된 셈이니 감사 인사는 받도록 하지.”
“하하하!”
적비연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는 정말로 극마가 마음으로 복속되었다는 게 느껴진다.
적비연이 입매를 치켜 올리고는 말했다.
“그럼 이제…….”
순간 적비연이 두 눈을 번쩍 뜨며 소리쳤다.
“내 몸에서 그만 물러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