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86화 (287/301)

286. 마신

츄아아앙!

섬광이 허공을 가른다.

츄핏! 츄핏!

아송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고 뺨을 스치는 빛줄기에 선혈이 튀어 오른다.

‘어떻게……?’

연신 몸을 뒤틀며 피하는 아송의 눈가에 이채가 서렸다.

분명 기절한 채로 허공에 떠 있던 적비연이었다.

그가 기절한 순간 지풍을 날려 훈혈과 마혈을 점했다.

제아무리 공력이 깊어도 스스로 깨어나긴 어려울 터였다.

백발 광인들의 전신진기를 모조리 흡수한 자신에 비할 수는 없을 테니까.

한데…….

‘깨어나?’

그가 의문을 품는 순간 다시 광풍이 휘몰아치며 권강이 날아들었다.

쑤아아아앙!

간발의 차이로 그의 안면을 스친 강기가 허공으로 뻗어가다가 소멸했다.

“빌어 처먹을! 쥐새끼처럼 잘도 피하는구나!”

적비연이 걸걸한 목소리로 외치며 연신 패도적은 무공을 펼쳐온다.

주먹질과 발길질 하나하나가 상대를 죽여 버리겠다는 일념으로 가득하다.

확실히 뭔가 다르다.

원래 적비연의 무공은 이 정도로 패도적이진 않았다.

강하지만 고요한 무공이었다.

한데 지금은 요란하다.

살기가 너무 지나쳐서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이 정도로 살기를 뿌려대면 자칫 손발이 어지러워지거나 무공의 극의가 흔들려 빈틈을 보이기 마련인데 그렇지도 않다.

마치 평생을 이렇게 살아온 사람처럼.

그래서 이 정도의 분노와 살기가 평정심과도 별 차이가 없는 무인처럼 공격해온다.

‘이래서야 전혀 다른 사람 같군.’

무의식에서 깨어난 것도 놀라운데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다니.

그렇다고 더 강해진 것은 아니다.

단지 더욱 패도적으로 변했고, 감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며, 모든 동작이 화려해졌을 뿐.

그런데 어떻게 깨어난 것일까?

아송은 무차별적으로 퍼부어지는 공격을 피하면서 아래로 추락한 흑천련주를 힐끔 보았다.

무리를 해가면서 높은 곳까지 경공술을 펼쳐 날아올랐던 흑천련주.

한데 적비연의 손등만 겨우 스치고는 그대로 추락했다.

어찌 된 것인지 추락하는 동안 의식을 아예 잃은 듯하다.

그리고 적비연이 거짓말처럼 깨어났다.

단지 손만 닿았을 뿐인데?

아니면 손이 닿는 순간 공력을 주입한 것일까?

‘뭐, 어느 쪽이든…….’

적비연이 자신을 이길 수는 없으리라.

생각지 못한 적비연의 반응에 잠시 어울려 주었지만 이젠 더 볼 것도 없다.

“깨어난 것은 용하지만, 더 이상 놀아드릴 생각은 없습니다. 여기서 그만 끝내도록 하지요.”

말을 마친 아송이 적비연의 가슴팍을 발로 찼다.

파아앙!

응축된 공기가 터져 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면서 적비연과 아송이 훌쩍 멀어졌다.

다음 순간 아송이 양손을 뻗으며 휘저었다.

그러자 구름처럼 떠 있던 병장기들 중 수십 개가 스르르 움직이면서 적비연을 에워싸는 것이 아닌가?

“이 개새끼! 네놈 따위가 무슨 정의를 실현한다는 거냐! 이리 와서 내 손에 뒈져라!”

“정말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같군요. 사람이 갑자기 바뀌면 죽을 때가 된 거라던데. 아무래도 적 가주께서는 지금이 바로 그때인가 봅니다.”

다음 순간 아송의 눈이 반짝 빛을 뿜었다.

곧이어,

쏴쏴쏴쏴쏴아아앙!

수십 개의 병장기가 일제히 강기를 품으며 적비연을 향해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찰나지간 적비연에게서 묘한 변화가 일어났다.

느닷없이 그의 전신에서 엄청난 기운이 폭발하듯 터져 나오더니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내 몸에서 그만 물러나라!”

동시에 그를 향해 쏟아진 병장기들이 요란한 폭음을 울렸다.

콰콰콰콰콰콰아앙!

‘방금 그건……?’

아송이 눈살을 구기고는 폭발의 중심을 빤히 보았다.

* * *

“아…….”

강호명숙들이 저마다 고개를 꺾어들고는 창공을 우러러 보았다.

아까부터 천벌이라는 명명하에 미친 듯이 쏟아지던 강기의 폭우는 멈춘 상태였다.

그 바람에 천지를 격동시키던 울림과 요란한 폭음은 이어지지 않았지만 곳곳에서 부상자들의 신음과 비명이 끊이질 않았다.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자들도 강호명숙들처럼 하늘을 올려다보며 아송과 적비연을 확인했다.

아송은 적비연을 상대하고 있었다.

“부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길!”

강호명숙들은 저마다 한마음 한뜻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저 창공까지 흑천련주가 무사히 다다를 수 있도록 강호명숙들은 저마다 격체전공을 시전했다.

본인의 내공을 깎아가면서 전한 기운.

그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른다.

하나 다른 방법이 없었다.

그저 은하란의 말대로 작은 기적이라도 일어나길 바랄 뿐이었다.

한데 정말 기적처럼 적비연이 깨어난 것이다.

비록 흑천련주는 의식을 잃고 추락했지만, 큰 부상을 입진 않았다.

하천웅과 단휘 등 몇몇 무인들이 추락 지점으로 달려가 그를 받아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조금 전의 폭격은…….”

“정말이지 엄청났소. 그 폭격을 맞고도 무사할 수가 없을 터인데…….”

천기림의 말을 청호진인이 받았다.

아송이 적비연에게 쏟아부은 강기의 폭격은 그야말로 바라보는 것만으로 숨이 멎을 것만 같은 무서운 공격이었다.

제아무리 절대고수라도 저런 맹공을 받으면 살 가능성이 희박하리라.

이미 아송은 인간의 경지를 한참 초월한 상태.

진작 우화등선을 해도 됐을 능력이다.

그야말로 무신.

그렇다면 적비연은 어떨까?

저 말도 안 되는 괴물을 상대로 버텨냈을까?

“어, 어찌 됐을까요?”

“틀렸소. 저런 공격을 받고도 무사할 리가 없소.”

“하지만…… 아직 천림주가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기대를 걸어도 되지 않겠습니까?”

“헛된 기대를 품느니 차라리 살 방도를 강구합시다. 애초에 우린 탈출을 해야 했소.”

강호명숙들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펼쳐졌다.

불안감이 짙게 깔려 있다 보니 희망보다는 절망에 가까운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

모두들 눈치를 보며 슬쩍 언덕을 돌아보았다.

보패인들이 여전히 자리를 지킨 채 누구도 그냥 내보내주진 않겠다는 듯 강맹한 기도를 드러내고 있다.

이젠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신세다.

진퇴양난.

흑천련주에게 격체전공을 시전하는 바람에 강호명숙들 모두가 내공을 꽤나 소모한 상태였다.

하나하나가 괴물 같은 보패인들인데 이렇게 진이 빠져서야 제대로 싸울 수나 있겠나?

은하란에 대한 원망이 슬금슬금 일어난다.

“이게 무슨 헛짓인지 모르겠군! 차라리 힘을 아껴 저 보패인들을 처리했어야 했거늘!”

“그러게 말입니다! 우리 모두 천상원주에게 속은 것 같습니다!”

“맹주! 말이라도 해보시오! 대체 어떻게 된 거요? 게다가 천상원주가 맹주의 딸이라니? 그건 또 무슨 해괴망측한 소리요?”

이름만 대도 알 만한 문파의 수뇌 무인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뱉어냈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맹주에게 향했다.

맹주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뒤늦은 후회.

그녀가 옳았다.

강호 멸망에 대한 예언.

이런 식으로 끝나게 될 줄이야.

결국 자신의 아둔함 때문이리라.

“사실…….”

무림맹의 입술이 천천히 열리는 그 순간이었다.

“어엇! 저기 좀 보십시오! 위대하고 강하신 적 가주님이……!”

하천웅이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호들갑을 떨었다.

처음에는 몇몇 무인들이 눈살을 찌푸리곤 고개를 돌렸다.

왜인지 하천웅은 적비연을 지나치게 떠받드는 경향이 있었기에.

그런데 그들은 곧 입을 딱 벌리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맙소사.”

“저게…… 뭐야?”

그제야 다른 강호명숙들도 흠칫거리고는 고개를 꺾어 들었다.

창공에 탑처럼 우뚝 서 있는 적비연.

그의 전신에서 은은한 붉은빛 광휘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적비연을 향해 쇄도한 수많은 병장기들이 차츰 물러나고 있다는 점이다.

“적, 적 가주가 무사하잖아?”

“허어! 어찌 저 상황에서 저런……!”

모두가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를 지켜보는 아송 역시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

그는 가늘게 떠는 손을 들어 올리고는 더욱 기를 실었다.

하지만 적비연을 향해 쇄도했던 병장기들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힘에 떠밀리듯 차츰차츰 거리를 벌려갔다.

“크읏……! 어찌?”

찰나,

파아앙!

응축된 공기가 터져 나가듯 요란한 소리가 울리더니 병장기들이 일시에 적비연을 중심으로 삼 장 이상이나 멀어졌다.

아송은 병장기들이 자신의 통제를 완전히 벗어났음을 깨달았다.

적비연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게다가 전신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 역시 묘해졌다.

“어떻게 된…… 걸까요?”

아송이 애써 침착하며 물었지만 적비연은 그저 싸늘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찰나, 아송의 시야에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저건……?”

착각인가?

너무 과도하게 내공을 흡수해서 주화입마에 든 걸까?

그럴 리가!

정신은 온전하다.

그런데 환영 같은 게 보인다.

‘같은’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환영이 정말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착각한 것인지 알 수 없어서다.

창공에 꼿꼿하게 선 적비연의 배후로 연신 넘실거리는 붉은 기운!

한데 그 붉은 기운이 어떤 형상을 만들어내고 있다.

‘마…… 신?’

무심코 떠오른 생각이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느껴지는 적비연의 기도는 분명 마기에 가까웠으므로.

게다가 적비연의 등 뒤로 떠오른 거대한 기운의 존재는 마신이라고 보기에 손색이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했으니까.

사실 이는 극마의 혼과 기운이 적비연의 마기를 빌려 형상화된 것이었다.

평소와 달리 그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나타난 이유는 극마 역시 성장했기 때문이었다.

적비연과 육신을 걸고 싸우면서도 성장했고, 이번에 적비연과 일체화를 진행하면서 다시 한번 성장했다.

그 덕에 그의 모습이 마기를 빌려 나타날 수 있게 된 것.

극마와 일체화가 진행된 적비연이 싸늘한 비소를 머금었다.

“놀란 모양이군.”

“조금 놀랐습니다. 확실히 마공까지 손을 대셨군요.”

“무공의 종류가 중요한가? 무인의 인간성이 중요하지.”

“무공의 성질이 인간성에도 영향을 미치는 법이죠. 아니, 인간성이 그른 사람이 대게 그런 마공에 손을 대는 거겠지만.”

“걱정 마. 적어도 너보단 내가 인간성이 나으니까.”

적비연이 히죽 웃었다.

확실히 이번에도 성격이 조금 바뀌었다.

예전처럼 차분하지도, 직전처럼 괄괄하지도 않다.

그 어중간한 느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은 극마에게 어느 정도 영향을 받고 있는 적비연이었기에.

아송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물었다.

“싸우면서 성장한다는 천재들에 대해 들은 적은 있지만…… 이건 좀 정도가 지나치군요. 어떻게 이렇게 급격히 강해지는 겁니까?”

“그거야 너는 혼자고…….”

적비연이 심호흡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나는…… 여러 사람과 함께하니까. 착취와 협력의 차이랄까?”

순간 적비연이 양손을 활짝 펼쳐 들었다.

촤촤촤촤촤아앙!

동시에 적비연을 에워싸고 있던 병장기들이 그대로 방향을 틀더니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쒸쒸쒸쒸쒸에에엣!

아송이 두 눈을 부릅떴다.

여전히 병장기들을 감싸고 있는 기운은 아송이 실어둔 강기였다.

하지만 그가 도저히 조절할 수 없다.

빛살처럼 뻗어나간 병장기들은 눈 깜빡할 사이에 보패인들의 심장을 뚫으며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는 것이 아닌가?

콰콰콰콰콰콰콰아앙!

분지를 둘러싼 언덕이 격동을 일으켰다.

그 순간 무인들의 눈에는 희망이, 아송의 눈에는 분노가 스며들었다.

적비연이 그런 아송을 보며 히죽 웃었다.

“봤지? 천벌은 이렇게 내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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