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87화 (288/301)

287. 마신

분지를 에워싸듯 떨어져 내린 병장기들.

그것은 죽음의 비석이었다.

병장기에 꿰뚫린 무인들이 저마다 처참한 모습으로 매달린 채 축 늘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적비연을 믿지 못하겠다며 떠들어대던 무인들은 이제 입을 딱 벌리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이 경이로울 정도의 무공 수위에 그들은 모종의 두려움마저 은근하게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희망을 보았다.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던 강기의 폭우가 멈췄고, 대신 분지를 에워싸던 보패인들이 죽음을 맞지 않았나?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멍한 표정을 짓던 맹주 허위청이 모두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공력을 실어 외쳤다.

“다들 분지 밖으로 후퇴하라!”

그의 명령은 정사를 가리지 않았다.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다들 그럴 생각이었다는 듯 언덕을 달려 오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들을 막는 자들은 없었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무인들을 보면서 아송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어째서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것인가?”

“밥을 지으려면 제대로 지어야지.”

“감히!”

아송이 더는 참지 못한 듯 미간을 팍 구기고는 손을 번쩍 들어 올렸다.

하지만 구름처럼 운집한 병장기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오히려 형형한 기운을 뿜어내면서 천천히 방향을 틀더니 아송을 향해 예기를 발하는 것이 아닌가?

“칫……!”

순간 위기를 직감한 아송이 재빨리 강기를 거두었다.

찰나,

쒸쒸쒸쒸쒸에에엑!

창공에 머물러 있던 병장기들이 일제히 아송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비록 강기를 없애 버렸다지만, 빠른 속도로 날아드는 병장기는 그 자체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다.

탕! 타타탕! 타앙! 탕!

아송이 연신 날아드는 병장기를 정신없이 쳐냈다.

하늘에서 일어나는 어마어마한 폭격!

아래에서 고개를 꺾어 들고 바라보는 무인들은 분지를 벗어날 생각도 잊어버릴 만큼 넋을 놓고 말았다.

그러자 여기저기에서 동료들을 재촉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뭘 멀뚱히 보고 있는가? 어서 달리게!”

“자칫하다간 또 저것들이 벼락처럼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야!”

“달려! 어서!”

그들의 우려는 나름 정확했다.

쉬이이잇, 꽈앙!

쒜에엑, 콰앙!

아송이 쳐낸 병장기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가면서 지상으로 추락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강기를 머금은 병장기가 아니라는 점이다.

그저 빠른 속도로 낙하하는 병장기들이다.

워낙 높은 곳에서 떨어지다 보니 가속이 어마어마했지만, 그래도 몸이 온전한 절정 이상의 고수들은 병장기를 쳐낼 수 있었다.

그 덕에 조금 전에 비하면 상당히 양호한 수준이었다.

사람들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이따금씩 튕겨 나간 병장기가 자신들 쪽으로 떨어지면 재빨리 몸을 날려 피하거나 맞서서 쳐내곤 했다.

그럼에도 부상 정도가 심한 자들은 그 파편에 맞아 죽기도 했다.

한편 정신없이 병장기를 쳐낸 아송은 악에 받친 듯 고함을 버럭 질렀다.

“어째서 너는 나를 방해하는가!”

“네가 하는 짓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나?”

“쓰레기를 소각하는 건 당여한 일!”

“여기서 네가 제일 쓰레기야.”

적비연은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아송을 응시했다.

끊임없이 날아드는 병장기를 쉴 틈 없이 쳐내는 아송과 달리 적비연은 여유가 흘러넘쳤다.

마침 장창 하나가 아송의 어깨를 스치며 날아갔다.

피츗!

마찰음에 이어 핏줄기가 튀어올랐다.

“큿!”

미간을 팍 구기는 찰나, 또 다른 병장기가 그의 옆구리를 찢었다.

촤아악!

“이익……!”

호신강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날아드는 병장기가 너무 많다.

무려 수만 개의 병장기다.

수천 개를 지상으로 내다 꽂았지만, 아직도 수만 개가 남아 있다.

그런 병장기를 모조리 막아내려다 보면 호신강기가 바닥을 드러내고 말리라.

“젠자아앙!”

짜증이 솟구친다.

모처럼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하다.

마침 도검이 동시에 날아들었다.

“흐아아아압!”

기합성과 동시에 아송이 몸을 휘돌리며 도검을 양손에 움켜쥐었다.

“큿!”

날아들던 속도 때문에 손바닥이 화끈거린다.

만약 호신강기를 일으킨 채로 낚아채지 않았다면 손바닥이 찢어져 나가거나 화상을 입었으리라.

따다다다다다다앙!

아송이 도검을 휘둘러 날아드는 병장기를 되받아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장관이 펼쳐졌다.

수만 개의 병장기가 아송에게 날아들고, 그것들이 다시 튕기면서 사방으로 비산하는 것과 동시에 일부는 적비연에게로 쇄도했다.

지상에서 무인들을 통솔하며 분지 밖으로 후퇴하도록 돕던 허위청은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과연…… 인간이 아니로구나.”

“정말 위대하고 강하신 적 가주님이십니다.”

언제 다가온 것인지 하천웅이 옆에서 중얼거렸다.

“자네는 도대체 언제부터 그리 적 가주를 높이 본 것인가? 적 가주의 진가를 오래전부터 알았던 것 같은데.”

“사실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분을 부를 땐 항상 습관처럼 ‘위대하고 강하신’을 붙이게 됩니다.”

허위청이 실소를 머금고는 고개를 저었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다.

저 모습을 보고 어느 누가 위대하고 강하지 않다고 할 건가?

오죽하면 무인들이 후퇴령도 잊고 멍하니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을까?

마침 또 한 자루의 장도가 이쪽으로 내려꽂혔다.

쒸에에에에엑!

“조심하십……!”

하천웅이 얼른 소리치는데, 허위청이 먼저 몸을 날려서는 일장을 때렸다.

파아앙!

쉬이이잇, 쿠웅!

튕겨 나간 장도가 바닥에 처박히면서 조그마한 구덩이를 만들었다.

다행히 사람이 없는 곳이었다.

아니, 일부러 사람이 없는 곳으로 쳐낸 것이다.

하천웅이 감탄한 어조로 바라보자, 허위청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누구에게 주의를 주는 것인가?”

그제야 하천웅도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이자는 무림맹주가 아니던가?

무림오절의 최고봉이자, 정도 무인들이 존경해 마다하지 않는 자.

적비연과 아송이 워낙 고강한 실력을 보이니 잠깐 맹주의 수준을 착각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이런 맹주가 천상원주의 친부였다니.

하천웅이 새삼스러운 표정으로 은하란을 돌아보자, 그녀가 쓴웃음을 머금고는 말했다.

“그만 가죠. 적 가주님이 마음 편히 싸울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하천웅이 은하란을 호위하며 이동하기 시작하자, 그 뒷모습을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맹주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직 나를 용서하지 못한 게로구나.”

하기야.

제 어미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못난 아비가 아니던가?

쉽게 용서하긴 힘들 터.

그래도 자식이다. 죽은 줄만 알았던 친딸이다.

용서와 별개로 그녀를 목숨 걸고 지켜주어야 하지 않겠나?

맹주는 조용히 하천웅과 은하란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가 둘을 위협할 만한 무언가가 나타나면 어김없이 몸을 날려 제거했다.

그렇게 분지의 언덕을 거의 다 올랐을 때쯤이었다.

“적 가주우웃! 네놈만큼은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아앗!”

분에 찬 고함 소리가 천지를 떨쳐 울렸다.

고개를 들어 보니 온몸이 찢어져 피를 흘리는 아송이 어딘가로 날아가고 있었다.

아송은 모처럼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말 다 차려진 밥상이었다.

향만 피우면 끝날 일이었다.

한데 잘 차려놓은 제사상을 적비연이 돌연 엎어버린 것이다.

미친 듯이 강해진 모습으로 깨어나서는!

결국 쏟아지는 병장기를 쳐내다 못해 몸을 돌려 분지의 언덕 쪽으로 날아갔다.

적비연도 더 이상 병장기 폭격을 멈췄다.

자칫하다간 분지 밖으로 달아나는 무인들이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었기에.

대신 적비연은 손을 쭉 뻗어서 날아드는 흑천검만 낚아채고는 아송의 뒤를 쫓았다.

그러자 창공에 구름처럼 운집해 있던 병장기들이 일제히 지상으로 추락하는 것이 아닌가?

슈슈슈슈우우우욱!

콰콰콰콰콰콰아앙!

다행히 분지 복판에 떨어졌기에 피해자는 없었다.

한편 아송이 내려선 곳은 묘청운과 매소약이 장창에 몸이 꿰뚫린 채 겨우 숨만 붙어 있었다.

조금 전 적비연의 폭격으로 그들 역시 화를 피하진 못한 것이다.

“림, 림주……!”

“크읍……!”

묘청운과 매소약이 숨을 헐떡이며 아송을 보았다.

아송이 두 사람에게 다가가자 묘청운과 매소약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두 분은 최선을 다했습니다. 두 분의 희생을 헛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아송이 손을 뻗어 묘청운의 이마를 짚었다.

그 순간,

“크으으읍! 아아아아악!”

묘청운이 비명을 내지르며 몸부림치는 것이 아닌가?

옆에 있던 매소약이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림, 림주……!”

그러는 사이 묘청운은 벌써 비쩍 말라 버리더니 휘날리는 바람에 가루가 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대신 묘청운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은 그대로 아송에게 흡수됐다.

그가 매소약을 돌아보았다.

매소약이 고개를 저었다.

“아, 안 돼……!”

하지만 아송은 그녀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손을 뻗었다.

“꺄아아악!”

그녀가 비명과 함께 한 줌 먼지가 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론 그녀의 몸에서 뿜어진 기운은 고스란히 아송의 몸으로 흡수됐다.

누가 알았을까?

잠시나마 세상을 두려움에 떨게 하던 두 사람이 이렇듯 허무하게 스러질 줄을.

“후우우우!”

어딘지 나른한 표정으로 긴 숨을 내쉰 아송.

마침 그 뒤로 적비연이 내려섰다.

“결국 널 위해 충성하던 이들마저 네겐 먹잇감이었나?”

“후후후. 어차피 이들도 무인. 대사가 끝나면 모두 소멸되었어야 할 쓰레기인 것은 마찬가지지.”

아송이 어딘지 음산한 웃음을 흘리며 돌아섰다.

적비연이 눈살을 슬쩍 구겼다.

아송의 두 눈엔 전에 볼 수 없던 광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어쩌면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계속해서 공력을 쌓고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예외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송처럼 단기간이 아니라는 점에서 위안을 찾아야 하려나?

순간 아송이 히죽 웃더니 번개처럼 몸을 날려 왔다.

“네놈도 무인인 건 마찬가지! 결국 소멸되어야 할 쓰레기지!”

쒸이이이익!

전광석화가 따로 없다.

손을 뻗는 것과 동시에 어디선가 날붙이가 날아와 그의 손에 잡혔다.

다른 이가 보았더라면 정말이지 빛살 같은 속도.

하나 시활안을 펼친 적비연은 그 모든 동작이 너무나 느리게 흘러가고 있었다.

‘말하지 않았나? 너는 내게 안 된다고.’

적비연이 느긋하게 손을 뻗었다.

물론 제삼자에게는 눈으로 쫓을 수도 없는 반응 속도였지만.

어쨌거나 손을 뻗은 적비연은 아송의 팔꿈치를 쳐내고는 금나술을 펼쳐 그대로 손목을 꺾었다.

빠악!

“끄아아악!”

팔꿈치와 손목이 기이하게 꺾이면서 부러진 아송이 비명을 내질렀다.

하지만 그 비명도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탁, 푹!

“커억!”

아송이 눈을 부릅떴다.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이 그대로 복부를 관통해서 등으로 튀어나온 것이다.

“이…… 빌어먹을!”

“그만 포기해. 너는 내 상대가 안 돼. 그 유아기적 복수심도 이제 그만 버릴 때도…….”

“닥쳐라아앗! 포기할까 보냐아앗!”

광기에 찬 고함 소리를 내지른 아송이 마지막으로 온 힘을 다해 손가락을 튕겼다.

따아악!

그 순간 언덕마다 병장기에 꿰뚫려 시름시름 죽어가던 보패인들이 눈을 번쩍 뜨는 것이 아닌가?

그러더니 일제히 적비연, 아니, 아송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사지육신이 멀쩡한 자가 없었음에도 어디서 그런 힘이 솟는 것인지 정말 미친 듯이 달려왔다.

“크아아아아!”

동시에 아송이 양손을 뻗자, 마치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린 것처럼 보패인들이 달라붙기 시작했다.

그리고 묘청운과 매소약처럼 모든 기운을 빨린 채 먼지가 되어 증발해 가는 것이 아닌가?

그러자 아송의 몸이 괴이하게 부풀어 오르면서 흉측하게 변모하기 시작했다.

구구구구구……!

그의 몸이 계속 커졌다.

분지 밖을 향해 달리던 사람들이 모두 걸음을 우뚝 멈추고 그 괴이한 광경을 넋 놓고 보았다.

후퇴를 재촉하던 맹주도, 시종 평정심을 잃지 않던 은하란도 마찬가지.

“저, 저, 저건 진짜 괴물 아닙니까? 도대체 사람이 어떻게 저런 모습을……!”

하천웅의 반응에 은하란이 눈살을 찌푸리고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건…… 결코 저자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에요. 결국 자멸의 길이죠.”

마침내 어지간한 전각만큼이나 덩치가 커진 아송.

“쿠아아아악!”

한차례 끔찍한 포효를 터뜨린 그가 적비연을 내려다보며 괴물처럼 변해 버린 목소리로 외쳤다.

“크하하하하! 나는 지지 않는다! 절대로! 너희 쓰레기 같은 무림인에게 절대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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