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 비뚤어진 정의의 발로
“아…….”
무인들을 공포로 떨게 만들던 천림주가 죽었다.
그야말로 흉신악살의 모습으로.
하지만 너무나 허무하게.
자신들을 추종하는 이들의 정기를 모두 흡수하고 흉측한 괴물이 된 채로 쓰러졌다.
하늘에서 천벌을 내리던 그의 모습을 떠올려 보면 오히려 지금이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강기의 벼락이 내리꽂힐 때, 그의 존재감은 얼마나 위압적이었던가?
절대로 대적할 수 없는 신과 같은 존재.
마치 차원이 다른 존재 앞에서 한 마리 작은 벌레가 된 것처럼 비참해지는 기분.
그렇다.
그건 무인들을 상대로 일반인들이 느끼는 기분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터.
천림주의 몸이 양단되어 쓰러졌지만, 누구도 환호성을 지르지는 않았다.
다들 신음 같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씁쓸한 표정으로 분지를 둘러볼 뿐이었다.
살아남았다는 기쁨을 만끽하기에는 주변에 사상자가 너무 많았다.
웃음을 짓기에는 고통에 겨워하는 자들의 신음 소리가 너무나 컸다.
이겼다는 승리감에 도취되기에는 천림주가 남긴 뼈아픈 말들이 마음 한편을 아릿하게 만들었다.
무인들은 저마다 서로를 보았다.
천림주 앞에서 정도인도, 흑도인도 모두 무인일 뿐이었다.
사해는 동도라고 하던가?
결국 같은 처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는 인간일 뿐이었다.
그런데 왜 자신들은 서루에게 살검을 겨누었을까?
왜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던 것일까?
“허참…….”
죽음의 문턱을 넘었다가 돌아와서인가?
무인들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상대를 향해 지독하게 피어오르던 분노가 모두 부질없게 느껴진 탓이다.
무엇을 위해 싸웠는지도 모르겠다.
무엇을 위해 분노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정의를 지키기 위해?
하나, 천림주는 자신들을 쓰레기라고 불렀다.
그가 손가락을 튕겼을 때, 그의 울분과 원망이 가슴에 사무치도록 느껴졌다.
스스로도 칼을 차고 있으면서, 칼 찬 자들에 대한 울분이 미칠 듯이 솟구쳤다.
그런데 이제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들이 칼을 차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지 않은가?
확실히 아송의 원망은 무인들 저마다의 가슴에 깊은 울림을 남겼다.
그들 모두 누구도 활짝 웃을 수 없도록.
아니, 오히려 고개를 떨어뜨리고 염치없이 살아남았음에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적비연이 입을 여는 순간, 상처 받은 마음이 치유되는 듯했다.
“다들 고개를 드시오. 당신들의 잘못은 살아남은 것이 아니오. 살아남은 것은 위대하고 강한 것이오. 다만,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할 뿐.”
“…….”
“당신들도 느낀 게 있다면, 지금까지와 다른 삶의 방식을 택하겠지. 나 역시 마찬가지고.”
담담하게 뱉어낸 적비연의 말에 다들 침묵으로 답했다.
각자의 생각에 빠져든 무인들은 모두 제자리에 굳은 듯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전쟁에서 살아남았지만 기뻐할 마음조차 들지 않다니.
맹주 허위청은 쓴웃음을 머금고는 고개를 돌렸다.
‘이제 나도 마무리를 지어야겠군. 이 지긋지긋한 여정의 마무리를.’
그런데…….
‘어디 있지?’
은하란이 보이지 않는다.
은하란이 자신의 딸이라는 것을 공표했으니, 이제 모든 직위를 내려놓고 허락한다면 딸과 함께 여생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란아?”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휙 돌리던 그가 흠칫거리고는 멈춰 섰다.
“네, 네놈은……!”
맹주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는 곳에는 언제 나타난 것인지 총군사 가후가 은하란을 인질로 잡고 있었다.
그녀를 호위하던 하천웅이 흑천련주의 육신을 짊어지고 있었기에 그 빈틈을 노린 것이리라.
가후가 단도를 은하란의 희고 가느다란 목에 바짝 들이대며 소리쳤다.
“개소리! 어떻게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고? 네놈들이 그딴 걸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이 지경까지 왔을 거라고 생각하나! 결국 무공을 익힌 놈들의 욕망이란 다 똑같은 것! 오로지 강하고 강해져서 약자를 찍어 누를 생각밖에 없는 게지! 내 말이 틀렸나!”
“가 군사!”
“자네, 지금 제 정신인가!”
몇몇 강호명숙들이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하지만 가후는 차가운 미소를 지은 채 맹주를 빤히 노려보았다.
“모든 게 이년 때문이다! 림주께서 대업을 이룰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이년이 다 망친 것이야! 오래전 내가 이년을 추살하려고 했던 건 역시 옳은 결정이었다!”
“흡!”
가후가 단도를 바짝 들이미는 바람에 은하란이 헛바람을 삼켰다.
단도가 목 줄기를 파고들어 선혈이 흘러내렸다.
적비연이 가후를 빤히 노려보았다.
“무인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 대업인가?”
“그렇다!”
“그러고 나면?”
“뭐?”
“그러고 나면 뭐가 남지?”
“무공을 익히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남겠지. 모든 악의 근원은 힘에 있는 법. 모두가 나약하면 서로 협력하며 상생하려고 할 테지!”
“하하하!”
느닷없이 적비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본 가후가 눈살을 팍 일그러뜨렸다.
“뭐가 웃기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 우습잖아?”
“뭐라?”
“천하사대지자가 되면 생각이 유아기적으로 변하고 마는 걸까?”
“뭣이?”
“아송은 어렸을 때 당한 악몽 같은 기억에 시달려서 그렇다고 쳐. 그런데 넌 뭐야? 왜 그딴 말도 안 되는 생각에 빠진 거냐?”
“나, 나는! 나는 누구보다도 정의로운 무림맹을 만들기 위해서 노력했다! 하지만 무림맹은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세계! 사리사욕에 눈먼 자들이 권력을 탐하는 곳! 그래서 내가……!”
“다 죽이고 네 마음대로 하는 세상을 만들려고 한 거냐?”
“무슨 개소리냐!”
“개소리는 네가 지금 하고 있잖아.”
“닥쳐!”
“결국 너도 상생하지 못해서 네 마음대로, 네 뜻에 맞는 무림맹을 세우지 못해서 다 죽이겠다고 생각한 것 아냐?”
“그, 그런……!”
“뭐? 강한 자들이 다 죽고 나면 약한 자들만 남아서 상생을 한다고? 그야말로 개소리군.”
“네까짓 게 뭘 안다고……!”
“너보다 아는 게 적어도, 너보다 제대로 알고 있는 건 분명하거든.”
“웃기는군.”
“아니, 전혀 안 웃겨. 나는 진지하니까.”
적비연이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한 걸음 내디뎠다.
그러자 가후가 움찔거리며 물러나서는 더욱 단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움, 움직이지 마라!”
“너야말로 움직이지 마라. 뒈지기 싫으면.”
“뭐, 뭣? 이익!”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이다.
어차피 살아서 벗어날 생각은 버렸다.
마지막으로 은하란을 죽이고 스스로 자결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뭐, 뭐야? 왜 몸이 안 움직이는……!’
몸이 돌이라도 된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것도 공천지권위인가?
아니다.
적비연의 두 눈을 본 순간 가후의 심장이 그대로 얼어붙은 것이다.
뱀 앞에 얼어붙은 개구리처럼.
그대로 심장이 정지하기라도 한 듯 아무런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오롯한 공포심이 그의 전신을 휘어 감고 있다.
적비연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네가 말하는 욕망에 미친 자들은 무인만이 아니야. 그건 인간의 본질이야.”
“……!”
“무인이 사라지면 평범한 인간들이 상생을 해? 그야말로 공상에 빠졌군. 그러니 이런 말도 안 되는 대살상을 저질렀겠지만.”
“……!”
뭐라고 반박을 하고 싶은데 한마디도 꺼낼 수가 없다.
납득을 해서가 아니라 공포심 때문에.
“그러게 책상머리에 앉아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하니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거야. 알겠어? 머릿속에 지식만 잔뜩 집어넣는다고 네가 정말 똑똑해지는 줄 알아? 진짜 현명해지려면 직접 뛰어들고 경험을 해봐야 하는 거야. 그 삶의 현장에서 생생하게 느껴야 하는 거라고.”
“나…… 난……!”
어렵사리 말을 꺼냈지만 역시나 잇지 못한다.
“뭐? 무림맹에서 느꼈다고? 그게 네 문제야. 밖으로 나와서 느껴야지. 그런 곳에 갇혀서 꽉 막힌 시야로 사니까 너처럼 구슬리기 쉬운 존재도 없었겠지. 이 천하제일 멍청아.”
“큿……!”
“저들을 봐라.”
적비연이 흑천검을 들어 여기저기 쓰러져 있는 무인들을 가리켰다.
어떤 무인들은 부상자를 들쳐 업고 달렸고, 어떤 무인들은 사망한 동료 곁에 무릎을 꿇고 오열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처참한 광경.
“저 모습을 보니 기분이 어때? 통쾌한가?”
“그, 그렇다…….”
“그러면 너야말로 제거되어야 할 쓰레기지.”
“……!”
“강한 자가 문제가 아니라, 강한 자가 공감력을 상실했을 때 가장 문제가 되거든. 너처럼 똑똑한 자가 공감력을 상실하면? 인류의 악재가 탄생하는 거지.”
“네놈 따위의 설교는……!”
“들어. 죽기 전에. 알고는 죽어야지. 네가 뭘 잘못한 것인지. 아까도 말했다시피 너는 세상을 책으로만 배운 게 문제야. 현장에 있는 사람들과 교감을 하지 않으니 인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수밖에. 그러고도 네놈은 책상머리에서 익힌 알량한 지식만으로 잘난 줄만 알았겠지. 남들이 외우기 힘들어하는 걸 바보처럼 달달 외워서 그럴싸하게 말하면 모두가 우러러본다고 생각했을 테고. 똑똑히 새겨들어라.”
적비연이 심호흡을 하고는 가후의 관자놀이를 툭툭 찌르다가 이어서 가슴을 찔렀다.
“여기에 든 것보다 더 중요한 건, 여기로 공감하는 마음이다. 공감할 줄 모르는 천재는 인류의 재앙이 될 뿐이다.”
“시끄럽다! 인류의 재앙은 내가 아니라 너 같은……!”
푹!
“컥!”
악바리처럼 소리치던 가후가 순간 헛바람을 삼키며 우뚝 멈췄다.
다음 순간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어디서 날아든 것인지 검 한 자루가 왼쪽 옆구리에서 오른쪽 옆구리로 관통하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손을 뻗고 있는 맹주가 보였다.
그가 분노를 삭이는 눈동자로 가후를 노려보고 있었다.
“자네는 두 번이나 내 딸의 목숨을 앗아가려고 했네.”
“맹주……!”
“그래도 한때 자네를 믿었건만!”
“당신은…… 그게 문제요. 대의보다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이는…….”
“닥쳐라! 인정이 없는 네놈이야말로 인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모든 정의가 바로 그 정에서 나온다는 것을 정녕 모르겠더냐!”
“……!”
가후가 움찔거리고 두 눈을 부릅떴다.
털썩!
마침내 가후가 무릎을 꿇더니 검붉은 핏물을 한 바가지 토해냈다.
“쿠웨에에엑!”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고는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인정이라…… 모든 정의가…….”
그는 그렇게 하늘을 우러른 채 말을 마저 잇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제야 지켜보던 무인들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며 은하란에게 안위를 물었다.
특히 하천웅은 그녀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흑천련주를 바닥에 내팽개치기까지 하며 달려왔다.
“은 원주님! 괜찮으십니까?”
“네, 전 괜찮습니다.”
“목에서 피가……!”
“괜찮아요. 출혈이 약간 있을 뿐이에요.”
“하아. 죄송합니다. 제가 은 원주님을 더 가까이에서 지켜 드렸어야 했는데.”
“저는 멀쩡하니 개의치 마세요.”
한편 맹주는 은하란을 보며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친…… 곳은…… 있지. 음. 목을 다쳤구나. 그러니까 나는 네가…… 저자에게 위협을 당해서…… 당황했지만 두고 볼 수가 없어서…… 그때는 내가 미처 몰랐던 일이라…….”
맹주가 횡설수설하자 은하란이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풋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제야 맹주도 조금은 마음이 놓이는지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하구나.”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눈물을 보인 게 얼마만이던가?
무림맹을 이끄는 위치에 오르고 나서는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표정조차 감추며 살지 않았던가?
한 번 차오른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은하란의 담담한 목소리가 맹주의 귓가에 닿았다.
“괜찮아요, 아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