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 새로운 시작
대이변이 일어났다.
정사대전을 치르면서 이미 예고된 이변이었지만, 그 방향은 무림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사뭇 달랐다.
먼저 죽음의 전장에서 살아남은 무인들은 하나같이 적비연을 떠받들었다.
분명 정사대전이 한창 진행 중일 때만 해도, 적비연은 정도 무인들 사이에서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대상이었다.
무림맹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 마공까지 익힌 자로 간주됐으니까.
하지만 파양호의 마지막 대전에서 아송을 처리한 적비연은 그야말로 강호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었다.
주루며 객잔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이기만 하면 온통 적비연 이야기였다.
심지어 무인이 아닌 일반인들조차 적비연이라는 이름을 한 번은 들어봤을 정도였다.
강호 멸망의 위기에서 엄청난 신공을 발휘하여 무인들을 구한 영웅!
자연히 벽력적가가 급부상했고, 천상원에 피신해 있던 가신들도 무사히 귀가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장사의 벽력적가를 중심으로 무림맹의 재개편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이 부분이 현 강호에서 두 번째 화두였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을 놀라게 한 것은 무림맹주의 은퇴 선언.
그는 오래전 무림맹 소속 신녀와의 관계를 이실직고하고 천상원주인 은하란이 친딸이라는 것을 공표했다.
하나 맹주를 비난한 자는 없었다.
은하란이 아니었다면 적비연이라는 영웅이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기에.
오히려 맹주가 은퇴하겠다고 할 때는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매달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맹주 허위청의 뜻은 확고했다.
“그간 권력에 눈이 멀어 소중한 것을 보지 못한 채 너무 바보처럼 살았소. 이젠 자리에서 내려와 여생을 딸과 함께 보내고 싶소.”
그의 진심 어린 말에 결국 그를 지지하던 자들 역시 한 걸음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차기 맹주로 추대된 자는 당연히 적비연이었다.
압도적인 지지였다.
무인들이 천벌전(天罰戰)이라 불리는 그 지옥에서 강호를 구한 영웅이 아니던가?
적비연을 대체할 만한 사람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적비연도 마다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맹주 자리를 수락하자마자 정사의 구분을 없애겠다고 해서 큰 파장을 몰고 왔다.
비록 마지막 전투에서 정사가 손을 잡고 맞서 싸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특수한 경우였다.
정사 간에 오랫동안 쌓였던 앙금이 쉽게 녹지는 않았다.
“정사의 구분을 없앤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수많은 명문정파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신임 맹주께서 아무래도 의욕이 과하신 것 같습니다. 재고해 주십시오.”
“말씀하신 바는 알겠으나, 예로부터 정사는 섞인 적이 없습니다. 어느 쪽에서도 그걸 원하지도 않을 겁니다.”
무림맹 수뇌부가 너도나도 한마디씩 쏟아내자 장내가 어수선해졌다.
적비연은 그들의 반응을 보면서 살짝 숨이 막혀온다는 것을 느꼈다.
‘이런 환경 속에서 개혁을 꿈꾸었던 가후가 용하게 보일 지경이군.’
아니, 그러니까 오히려 그렇게 삐뚤어진 것일지도.
이런 자리를 수십 년간 유지한 맹주도 놀라울 뿐이었다.
모든 수뇌인사들이 한마디씩 다 뱉을 때까지 적비연은 침묵했다.
마침내 그들의 언성이 잦아들자 적비연이 차분히 눈을 뜨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실 몇몇 수뇌인사들은 적비연을 우습게 생각하기도 했다.
물론 무공으로 따지면 적비연을 이길 수 있는 자가 없다.
하나 정치라는 것은 힘의 논리로만 좌우되는 게 아니다.
처세술이라는 것이 있다.
동네 골목대장이라고 해도 그 골목대장을 쥐고 흔드는 유약한 아이가 하나쯤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들은 경험이 부족한 적비연을 세치 혀로 눌러줄 생각이었다.
원래 인간이란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동물이 아니던가?
그간 익숙했던 맹주가 물러나고, 혈기 왕성한 젊은 맹주가 추대되었으니 은근히 불편한 점도 없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한 가지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적비연이야말로 이곳의 누구보다 많은 경험을 가졌다는 사실을.
노회함으로 따진다면 적비연을 감히 따를 자가 없다는 것을.
적비연이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수뇌인사들을 하나하나 둘러보았다.
꿀꺽……!
왜인지 모르겠지만 수뇌인사들은 저도 모르게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켰다.
적비연이 저렇듯 차갑게 식은 눈으로 바라볼 때면 자꾸 긴장이 되곤 한다.
“천추당주(天樞堂主).”
“예, 맹주님.”
눈이 가늘고 길게 찢어진 노인 하나가 한 걸음 나서며 포권했다.
그는 무림맹에서 가장 경력이 많은 무인 중 한 명으로, 이번 천벌전에는 참여도 하지 않은 자였다.
때문에 내심 적비연을 무시하는 마음이 있었다.
‘모든 소문은 과장되고 허황되게 부풀어지는 법이지.’
한편 적비연은 그의 생각과 달리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바로 무림맹에서 오래 지냈던 아상의 기억 때문이다.
천추당주로 눌러앉아서 받은 뇌물만 전각 수십 채를 살 수 있을 정도가 되리라.
무림맹 곳곳이 곪아 있다.
전 맹주인 허위청은 이런 것들을 보고도 모른 척했다.
빈대 잡으려다가 초가삼간 태울까 봐 염려한 탓이다.
그는 가후의 말을 믿었다.
“때론 눈에 띄는 허물도 모른 척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장에는 그것이 지저분해 보일 순 있으나, 알고 보면 수레가 잘 구르게 하는 기름 역할을 하기도 하지요.”
그래서 못 본 척한 불의가 얼마나 많았던가?
아상은 애초에 그런 것에 관심도 없었고.
하지만 적비연은 다르다.
‘이제 내가 이곳의 주인이 된 이상 내 뜻대로 바꾸지 않으면 의미가 없겠지.’
천추당주는 말없이 자신을 보는 적비연을 향해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말씀하시지요.”
막상 자신을 불러놓고 주눅이 든 게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직위가 비록 당주이긴 하나, 실세는 여기서 누구보다도 막강하지 않던가?
천벌전으로 인해 세력이 위축된 다른 수뇌부들과 달리, 천추당은 굳건했다.
그런데…….
“천추당주는 오늘부로 직위를 박탈하겠소.”
“……!”
순간 장내가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천추당주 역시 눈을 크게 부릅뜨다가 곧 파르르 수염을 떨었다.
“그게 무슨…… 재미없는 농을…….”
“내가 농을 하는 것으로 보이시오?”
적비연의 눈동자가 전에 없이 차가워졌다.
한기를 느낀 천추당주가 딱딱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이유가 뭡니까?”
“그걸 정말 몰라서 묻나?”
완전한 하대다.
이제 천추당주는 노여움도 느낄 수 없었다.
너무 당당하게 나오니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이 천지분간도 못하는 젊은 무인이 도대체 자신을 얼마나 우습게 여기는 걸까?
오냐, 그렇다면 그 코를 납작하게 눌러…….
“그간 받아 처먹은 뇌물만 해도 전각 수십 채는 살 수 있을 테지? 그 재산도 모두 몰수한다.”
“뭐, 뭣이!”
“왜? 아까워? 부당한 방법으로 차곡차곡 모아놨더니 써보지도 못하고 빼앗기게 생겨서?”
“그, 무, 무슨 망발을……!”
“닥쳐. 너처럼 지위를 이용해서 어려운 자들의 피나 빨아먹는 새끼들이 제일 역겨우니까. 그런데 뭐? 사파를 용서할 수가 없어? 대체 사파가 뭐지? 말해봐라. 정과 사가 무엇인가?”
“그, 그야…….”
천추당주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면서 안절부절못했다.
제길, 내가 왜……!
그는 내적 갈등을 겪는 중이었다.
위축될 필요가 없다.
이런 새파란 애송이 맹주 앞에서 주눅들 필요가 없다.
세간에서 그를 뭐라고 떠받들던지 상관없다.
정치는 무식하게 힘으로 하는 게 아니다.
노련함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어째서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위축되는 걸까?
게다가 장내의 수뇌부들은 어째서 한마디도 자신을 거들지 않는 것인가?
지금쯤이면 정일당주(正日堂主)와 천해각주(天海閣主), 북검당주(北劍堂主)등이 자신을 옹호하고 나섰어야 했다.
그런데 단 한마디도 들리지 않는다.
곁눈질로 흘깃 보니 그들 역시 식은땀을 흘리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마치 괜한 불똥이 자신들에게도 튀는 게 아닐까 염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도대체 이 무슨……! 가만…… 혹시?’
공천지권위라고 했던가?
적비연이 가진 묘한 이능이 있다고 했다.
혹시 그 때문에 이런 분위기가 조성된 것일까?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데, 적비연의 음성이 다시 떨어졌다.
“다시 묻는다. 정과 사가 무엇인가?”
“그거야…… 부당한 무공과…… 정당한 무공의 차이…….”
“우습군.”
“…….”
“결국 무공의 종류를 나눠서 그 사람을 평가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무공이 먼저인가? 사람이 먼저인가? 어떤 무공을 익혔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지. 어떤 사람이 무공을 익혔느냐가 중요한 거지. 아송이 천림을 만든 것도 그 판단이 잘못되어 그런 재앙을 만든 것이고. 너 같은 쓰레기가 그 자리에 앉아서 힘없는 자들의 명줄을 쥐고 돈을 받아 처먹는 것 역시 사람이 잘못된 것이고!”
마지막 말을 뱉을 때는 마치 하늘에서 천둥벼락이 떨어지는 듯했다.
천추당주가 저도 모르게 털썩 무릎까지 꿇었다.
“용, 용서해 주십시오!”
이게 아닌데.
이럴 생각이 아니었는데.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만 같다.
적비연이 차갑게 일렀다.
“용서할 생각 없다. 용서는 내가 아니라, 네게 이용당한 자들에게 빌어야지.”
“정일당주와 북검당주, 천해각주 그리고…….”
그 후로도 적비연은 요직에 앉은 무인 몇몇을 더 불러서 같은 조치를 취했다.
그야말로 보이지 않는 칼바람이다.
그 자리에서 직위를 박타당하고 쫓겨난 자들이 무려 스물이 넘었다.
일사천리로 일을 진행했지만, 장내의 사람들 중 누구도 반기를 들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그들의 불의를 내심 불편하게 생각했던 무인들은 오히려 체증이 풀리는 듯한 시원함을 느끼기도 했다.
“자, 다시 회의해 봅시다. 내 생각에 정사를 차별하지 않는 것이 이번 천벌전을 통해 얻은 교훈이라고 생각하는데. 어찌들 생각하시오?”
아까와 달리 누구도 쉽게 말을 뱉지 않았다.
대신 감정보다 이성이 앞선 의견이 나왔다.
“정사를 차별하지 않는 것은 옳다고 생각되오나, 무인들 각자가 가진 서로간의 원망을 해소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릴 듯합니다. 앞으로 여러 정책을 통해 정사간의 화합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최대 과제일 듯합니다.”
차분하게 의견을 제시한 사람은 다름 아닌 염능파였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좋은 말씀이오. 하면 정사간의 화합을 위해서 어떤 정책이나 행사를 추진하면 좋겠소?”
“우선 흑천련의 입장도 들어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흑천련주는 이미 내 뜻에 동의하는 바요. 본 맹과 흑천련을 통합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거요.”
“하면 명칭도 바뀌어야겠군요.”
“그렇소. 해서 강호맹으로 생각 중인데 어떻게들 생각하시오?”
“괜찮은 생각이십니다.”
“강호맹의 위치는 장사로 정할까 하오.”
“찬성합니다. 비용은 본 맹과 흑천련이 절반씩 부담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한차례 칼바람이 불고 나니 제법 의견 개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강호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긴 회의를 마친 적비연이 자리에서 일어나 공표했다.
“좋소, 그럼 이제부터 무림맹의 역사는 정사를 통합한 강호맹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시작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