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초행에는 고난이 따른다
뚝딱. 뚝딱. 쿵쿵. 탕탕.
여기저기 목수들의 망치질 소리와 나무를 깎는 소리, 돌을 다듬는 소리, 일꾼들의 기합성 등이 난잡하게 들려왔다.
장사에 신설되는 강호맹 본단의 공사 현장.
그중에서도 가장 높은 지대에 어느 정도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전각이 바로 맹주전이었는데, 그 맹주전 지붕 위에는 한 젊은 사내가 벌러덩 드러누워 늘어지도록 기지개를 켜고 있었다.
“흐아아아암!”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내뱉은 이는 다름 아닌 단휘.
그가 이런 곳에서 한가로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유는 바로 강호맹 본단 공사 현장의 총책 임무를 맡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으, 지루하다. 지루해.”
단휘가 모로 돌아누우면서 잠꼬대처럼 중얼거렸다.
벌써 몇 주째 그는 신설된 맹주전 지붕 위에서 이런 식으로 뒹굴거리고 있었다.
공사 현장의 총책이라지만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었다.
목공에 소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건축물에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다.
단지 혹시 모를 불미스러울 일은 감시하기 위해서 이곳에 머물고 있었지만, 어느 누가 감히 신임 맹주에게 반기를 들 것인가?
강호맹 건축 현장까지 찾아와 소득도 없이 훼방을 놓을 간 큰 놈은 없으리라.
“이런 한직으로 날 보내신 걸 보면 분명 맺힌 게 있으신 거야. 그러지 않고서야.”
단휘가 투덜거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다시 바로 누웠다.
노을이 펼쳐진 하늘이 아름다웠다.
“지겨운 하루도 저물어가는구나.”
“쯧쯧. 한창 의욕이 넘쳐야 할 나이에 건어물처럼 축축 늘어져서 한심하긴.”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단휘가 화들짝 놀라서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가 돌아본 곳에는 죽립을 눌러쓴 묵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혀를 차고 있었다.
“그래서야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하기라도 하면 잘도 막겠다.”
“대체 언제 오신 겁니까?”
“방금.”
“원래 이렇게 몰래몰래 접근하시는 게 취미입니까?”
“취미가 아니라 직업이지. 원래 내가 가주님 호위무사라는 걸 잊었느냐?”
“그거야 너무 잘 알죠. 그런데 그런 분이 왜 가주님과 함께 계시지 않고 이런 곳에서 농땡이 치십니까?”
“그 말은 너도 곧 농땡이 친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뜻이렷다?”
“에이, 그건 다르죠. 저는 어디까지나 업무 중이었습니다.”
“지붕 위에 드러누워서?”
“잠시 휴식이라고 해두죠.”
“그럼 나도 그렇다고 해두지.”
“경우가 다르지요. 적어도 저는 근무지를 이탈하진 않았습니다. 이래 봬도 여기가 공사 현장을 감시하기에 가장 좋거든요. 보십시오. 목수들과 일꾼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할 수 있어요. 여기선 공사장을 들락거리는 개미 한 마리까지 다 보인다고요.”
“개미를 왜 봐? 공력을 그렇게 허투루 쓰면 정작 필요한 순간에…….”
“아이참, 말이 그렇다는 거죠. 아무튼 전 그런 이유로 직무유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어디까지나 일을 위해 이곳에서 뒹굴…… 아니, 감시하고 있는 거죠.”
“그렇다고 치자.”
“이제 형님 차롑니다. 왜 호위는 하지 않으시고…….”
“잘렸다.”
“예?”
“더 이상 가주님 호위가 아니다.”
“흠…… 공식적으로요?”
“그래, 오늘 공식적으로 통보받았다.”
“하긴. 가주님이…… 아니, 맹주님이 이제 누군가의 호위가 필요한 수준이 아니긴 하죠. 아마도 형님이 호위한다고 나서게 되면 더 걸리적거릴 수도 있을 테니…….”
“틀린 말은 아닌데…… 듣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안 좋다?”
“헤헤. 제가 술 한잔 사죠.”
“그래도 새로운 임무를 받았다. 널 감시하라는.”
“네, 술 사는 건 취소하죠.”
“남아일언중천금이지.”
“오늘부터 여아 하겠습니다. 오라버니.”
“오냐, 그렇다면 너의 흉물부터 손수 제거해 주마.”
스르릉.
“어엇! 그렇게까지 진지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왜? 아까워?”
“쳇! 아직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다고요! 가주님이 제게 한 약속을 지키기 전까지는 안 됩니다!”
“가주님 약속?”
“홍월루에서 최고로 잘나가는 기녀를 소개해 준다고 하셨다고요.”
따악!
“아얏! 왜 때리십니까?”
“그냥 한심해서.”
“쳇, 제가 제일 만만하죠? 그렇죠?”
“어떻게 알았지?”
“어어? 또 때리시면 저도 가만 안 있습니다? 이래 봬도 제가 여기 총책이라고요!”
결국 묵검이 손을 들어 올린 채로 피식 웃었다.
“가자, 국수나 한 그릇 하자.”
“정말로 상심이 크시군요?”
“뭐,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지.”
뜻밖에도 묵검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하자, 단휘 역시 표정을 슬쩍 굳혔다.
하긴 전대 가주부터 호위를 해왔던 묵검이 아니던가?
갑자기 본연의 임무를 잃게 됐으니 그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나한텐 그런 약속을 안 하셨으니까.”
‘그쪽이었던 거냐!’
단휘가 입을 척 벌리고 있는데, 묵검은 시종 진지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왜 너한테만 그런 약속을 하셨을까?”
“끄음. 제가 오늘 술 사겠습니다. 왠지 사야 할 것 같네요.”
“그래, 사양하지 않으마. 그런데…….”
말을 뱉던 묵검의 눈매가 슬쩍 가늘어졌다.
그의 시선이 어딘가에 고정되어 있는 것을 본 단휘가 눈길을 쫓았다.
묵검은 저만치 아래에서 통나무를 옮기고 있는 일꾼들을 유심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자들, 원래 여기서 일하는 자들이냐?”
“예, 맞습니다.”
“언제부터?”
“보름 정도 됐습니다.”
“처음부터 일한 자들은 아니란 말이군.”
“예, 일손이 부족해져서 보름 전에 충원을 했거든요. 그때 새로 들어온 자들이지요. 그런데 무슨 문제라도……?”
“이상하군.”
“그러니까 뭐가요?”
“손발이 너무 잘 맞는데?”
“그야 뭐 다른 공사장을 전전하는 자들이었을 테니…….”
“아니지. 공사장을 전전하는 일꾼들은 대체로 그날 벌어 그날 먹고사는 자들이다. 막일이라는 게 충원 인원이 항상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지. 산적들처럼 조직력을 갖추기 어려운 법이야. 그리고 그런 자들이라면 진작 이 공사장에 지원을 했을 거고.”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런데 이제 보름 들어온 자들이 손발이 척척 맞아 들어가는군. 뿐만 아니라, 그들끼리 잘 뭉쳐 다니고.”
“흐음.”
그제야 단휘도 뭔가 미심쩍다고 여겼는지 미간을 좁히고는 가만히 살폈다.
확실히 통나무를 들어 옮기는 십여 명의 일꾼들은 손발이 척척 맞아 들어갔다.
그렇다고 다른 자들처럼 서로 소리치거나 지시를 내리는 일도 없었다.
묵묵히 일만 하는데도 이심전심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누군가 본다면 그들이 보름 된 일꾼들이 아니라, 처음부터 공사장에서 지낸 자들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찜찜한 건 그냥 못 넘기는 성격이니, 한 번 확인해 보겠습니다.”
단휘가 벌떡 일어나서 몸을 날렸다.
묵검 역시 경공을 펼쳐 단휘의 뒤를 따라갔다.
파라라라라!
장삼 자락을 펄럭이면서 화려한 경공으로 내려선 단휘가 십여 명의 인부들 앞에 멈춰 섰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상대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 일부러 화려하게 등장한 것이기도 했다.
십여 명의 인부들은 단휘와 묵검이 나타나자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무슨 일이 있으신지요? 대협.”
중년의 인부가 공손히 묻는 말에 단휘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무공을 익힌 적이 있소?”
“소인이 무공을 익혔다면 이런 노동을 하고 있겠습니까요? 제 평생 그럴싸한 무공을 익혀 대협처럼 하늘도 휙휙 날아다니는 것이 소원입지요.”
중년의 인부는 진심으로 말하는 듯 경외감을 담은 표정이었다.
그 말에 기분이 좋아진 단휘가 헤벌쭉하고 있자, 묵검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나섰다.
“그렇다면 실례랄 것도 없을 터. 진맥을 해도 되겠는가?”
“진맥은 왜…….”
“자네가 무공을 익혔는지 아닌지 확인해 볼 생각이네.”
묵검의 말에 중년 인부의 표정이 슬쩍 어두워졌다.
“설, 설마 소인을 의심하시는 겁니까? 소인은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하기 위해서…….”
“긴소리 할 것 없네. 자네가 무공을 익히지 않았다면 망설일 이유도 없을 터.”
“하, 하지만 듣기로는 무인들이 진맥만으로도 내공을 주입해서 멀쩡한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 수도…….”
“본 맹이 멀쩡한 사람을 폐인으로 만드는 악랄한 집단으로 보이는가?”
“어이쿠, 그런 말이 아니옵니다! 용, 용서해 주십시오!”
중년 사내가 넙죽 엎드리며 사죄했다.
그러자 다른 사내들도 그를 따라 엎드리면서 빌었다.
“무엇이 대협들 눈 밖에 난 것인지 모르나 부디 저희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기회를 주신다면 더욱 열심히 일해서 보답…….”
“그럴 필요 없다. 그저 진맥만 하면 된다. 여기 있는 자네들 모두.”
묵검의 말투가 더 차가워졌다.
이쯤 되자 공사장 인부 만 아니라, 인근을 지나던 사람들마저 우르르 몰려와 구경하기 시작했다.
왠지 모를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묵검이 이번에는 검까지 뽑아 들었다.
스르릉.
“마지막으로 말하지. 진맥을 해볼 테니 협조하도록.”
“알, 알겠습니다요. 부디 노여움을 푸시고 아량을 베풀어주십시오.”
“협조만 한다면 무사할 터.”
“그, 그럼…… 제가 먼저…….”
중년 사내가 오들오들 떨면서 단휘에게 다가갔다.
단휘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묵검과 중년 사내를 번갈아 보았다.
이들이 조금 의심스럽긴 하지만 이렇게까지 할 부분인가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혹시 적비연으로부터 어떤 언질을 받아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잠자코 있었다.
단휘가 헛기침을 하고는 말했다.
“커험! 그럼 실례하겠소.”
단휘가 엄지와 검지를 뻗어 중년 사내의 손목을 짚었다.
중년 사내는 순순히 손목을 내어주었다.
‘어디 보자…… 딱히 내공을 익힌 것 같진 않은데. 하지만 절정 이상의 고수인 데다 특별한 약을 복용했다면 더 꼼꼼히 살펴야 할 터.’
단휘가 한 줄기 내공을 불어넣었다.
단순히 진맥하는 것을 넘어 좀 더 세밀하게 점검하려는 차원에서였다.
그런데…….
“……!”
무공을 익힌 흔적이 있다!
단휘의 눈빛이 흠칫거린 그 찰나의 순간,
쉬아아아악!
중년 사내의 눈빛이 뱀처럼 차가워지더니 순식간에 품에서 단도를 꺼내 휘두르는 것이 아닌가?
쉬까앙!
워낙 가까운 거리인 데다 진맥을 집중하던 단휘는 목이 날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곁에서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고 있던 묵검의 반응이 빨랐다.
그가 휘두른 검이 중년인의 단도를 멀찍이 쳐내버린 것이다.
“치잇!”
중년인이 혀를 차더니 일순간 공력을 끌어올렸다.
‘초절정!’
단휘가 깜짝 놀라면서 마찬가지로 공력을 폭발시켰다.
콰아앙!
진맥하던 손을 놓는 것과 동시에 일장을 날리자, 중년인이 피를 한 움큼 토하면서 주춤 물러났다.
“크윽!”
그때였다.
“이놈드으을!”
차차차차차차앙!
엎드려 있던 인부들이 일제히 품에 감춰두고 있던 단도와 단검을 뽑아 들더니 벌떼처럼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쉬캉! 푹! 파밧! 서걱!
“크아악!”
“아악!”
단휘와 묵검이 재빠르게 반응하면서 상대의 무기를 쳐내며 반격했다.
인부들이 그 자리에서 피를 뿌리며 쓰러져갔다.
그들 개개인이 최소 절정 이상의 고수였지만, 묵검과 단휘의 무위가 그들보다는 두세 수 위였다.
묵검은 귀신처럼 은밀하면서도 벼락처럼 빨랐고, 단휘는 절도가 있으면서도 상대의 약점을 정확하게 공략했다.
순식간에 열두 명의 무인이 목숨을 잃자, 단휘에게 일장을 맡고 물러섰던 중년인이 두 손을 활짝 펼치며 소리쳤다.
“이놈들! 아무리 발악해도 정사는 하나가 될 수 없다! 물과 기름을 섞으려는 것만큼이나 어리석은 짓도 없거늘! 우리는 강호맹을 반대한다아악!”
발악하듯 외친 그가 순간 어금니 안쪽에 넣어둔 단환을 질끈 깨물었다.
순간 묵검과 단휘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순식간에 붉게 달아오르는 피부!
자멸단이 틀림없으리라.
한데 놈의 반응으로 보아서는 필시 체기를 이용해 주변을 초토화할 정도로 강렬한 폭발을 일으키는 것이리라.
‘젠장! 이대로 죽으면 억울한데!’
그때, 한 줄기 바람이 휙 부는가 싶더니,
퍼어억!
둔탁한 소리와 함께 중년인이 허공으로 화살처럼 날아오르는 것이 아닌가?
쉬이이잇, 콰아아아앙!
허공으로 치솟은 중년인이 그대로 폭발하면서 사방으로 인육파편을 흩뿌렸다.
가까스로 위기를 벗어난 단휘가 거짓말처럼 홀연히 나타난 사내를 보고 반색했다.
“가주님…… 아니, 맹주님!”
단 일장으로 중년인을 허공 높이 날려 버린 적비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섰다.
“넌 그놈의 홍월루 가기 전에 죽으면 안 되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