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92화 (293/301)

292. 초행에는 고난이 따른다

또로로롱.

맑은 찻물이 찻잔을 채운다.

고요한 실내에 찻물 따르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드시지요.”

귀문회주 화령이 조용한 목소리로 권했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찻잔을 집어 들었다.

차를 한 모금 마신 적비연이 잔을 내려놓고는 화령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화령 역시 적비연의 그런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녀는 이제 귀문회주로서 완전한 자질을 갖춘 듯 보였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활짝 핀 꽃을 연상했던가?

지금은 그렇게 눈부신 꽃이 아니다.

그저 평범해 보이는 들꽃.

그래서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는 사람.

달리 말하면 무엇이든 터놓고 얘기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방심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처럼 보인다.

그래서 위험하지만, 그래서 매력이 있다.

귀문회주인 만큼 그녀는 자신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소문의 진위도 정확히 알고 있을 테고.

그럼에도 조금도 주눅 들지 않는 표정이다.

일개 조직의 수장다운 면모.

무공 한 줌 익히지 않은 여인이 어쩌면 이리도 고아한 자태를 풍길 수 있을까?

“회주께서 내어준 정보는 확실히 도움이 됐소.”

“다행입니다.”

화령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 한 번에 마음이 절로 풀어지는 듯하다.

분명 아름답기는 하지만 눈이 부실 정도는 아닌데.

이상하게 마음을 흔드는 매력이 있다.

아마도 그건 반철룡의 감정이 남아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의 기억을 가진 적비연으로서는 화령에 대한 감정이 남다를 수밖에 없기에.

그건 화령 역시 다르지 않은 듯했다.

“혹시…… 저를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그녀는 질문을 던지면서도 묘한 기분을 느꼈다.

분명 처음 보는 사이다.

적비연에 대해서 너무 많은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일까?

정말이지 요 몇 개월간 귀문회가 가장 많은 정보를 다룬 사내.

절반은 거짓으로 밝혀졌고, 절반은 진실로 밝혀졌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거짓으로 밝혀진 정보에 대한 근거는 부족하다.

눈앞에 있으면서도 수수께끼에 싸인 사내다.

이런 사람이 근래 존재했던가?

게다가 이 친밀감은 뭐라고 표현해야 하나?

귀문회주가 된 그녀는 정보의 힘을 믿는다.

인간의 감정 또한 결국 정보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정보가 없으면 감정이 생기지 않는 법이다.

한데 너무 많은 정보를 들었기 때문일까?

초면인 적비연에게서 너무나 익숙한 향기가 난다.

후각으로 맡는 향기가 아니라, 정신적으로 느껴지는 향기.

굳이 표현하자면 그리움 같은 단어가 어울릴까?

어째서? 왜?

이 낯선 남자에게서 그런 단어가 떠오르는가?

인정하기 싫은데…… 이 남자에게서는 반철룡의 분위기가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을 울게 만들었던 투혈권왕의 분위기도.

“초면이오.”

적비연이 단답으로 말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적비연이 말을 이었다.

“회주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이번 공사장에서 난동을 부렸던 자들이 기녀 한 명과 연결되어 있는 것 같소.”

“음모가 진행 중이라면 강호맹 인근에 감시의 눈을 심어야 할 테니까요.”

“유용한 정보를 알려줘서 고맙소.”

“그래서 조치는 취하셨는지요?”

“그렇소. 단휘에게 접근하도록 했지. 마침 그 친구가 딱 좋아할 임무라서.”

“일이 잘 해결되었으면 좋겠군요.”

“고맙소. 혹시 내 제안은 생각해 보셨소?”

“본 회가 귀 맹의 정식 정보기관이 되는 것 말씀이신지요?”

“그렇소.”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 자리에 제삼자가 있었다면 두 눈을 번쩍 뜰 일이었다.

우선 두 가지 이유로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먼저 귀문회는 정사지간의 정보조직이지만, 그래도 굳이 나누자면 사파의 계열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전에 그들의 본 단이 항주에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다.

두 번째로 귀문회의 경우 강호맹에 협조할 이유가 하등 없다.

그들로서는 양지에 대한 갈망도 없을뿐더러, 오히려 지금처럼 어둠의 경로로 정보 거래를 하는 쪽이 훨씬 큰 수익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한데도 적비연은 귀문회를 포섭하고자 했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일.

어느 날 무작정 귀문회를 찾아온 적비연이 밑도 끝도 없이 제안한 것이다.

“그럼 저도 다시 한번 여쭙겠습니다. 귀 맹이 저희에게 제시하는 조건에는 변함이 없습니까?”

“그렇소.”

“그럼 본 회가 귀 맹에 귀속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 정도 보수로는 본 회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보수로는 그럴 거요.”

“그럼 다른 매력이 있는지요?”

“두 가지가 있소.”

“말씀해 보시지요.”

“우선 본 맹의 정보기관이 되면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들을 보호해 줄 것이오.”

“너무나 당연한 말씀이라 매력이라고 보기도 힘들군요. 다른 매력은?”

“의미지.”

“의미?”

“그렇소. 검을 다루는 자가 검의를 좇듯이. 정보를 다루는 귀 회가 그 의미를 좇을 수 있다는 것. 단지 돈이 아니라, 당신들의 정보가 의미 있게 쓰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오. 당신들이 수집한 정보가 수많은 사람을 살릴 것이고, 수많은 자들을 죽이기도 할 것이오. 하지만 반드시 바르게 활용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오.”

“검의를 좇듯이…….”

“그렇소. 검의를 좇듯이.”

적비연이 다시 한번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화령은 피식 웃었다.

다시 들어도 어이없다.

일확천금을 쥐어준다고 해도 움직이지 않을 판이다.

한데 고작 뜻을 심어주겠다는 황당무계한 말로 이런 설득을…….

‘이게 공천지권위일까?’

적비연이 가진 이능에 대해 들은 정보가 있다.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 뜻에 동참하게 만든다는 공천지권위.

모르겠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남자의 이 말도 안 되는 제안에 가슴이 묘하게 뛴다는 것이다.

그래, 그가 생각난다.

일평생 검의를 좇아 목숨을 걸었던 남자.

자꾸만 적비연에게서 반철룡이 보인다.

그래서 가슴이 더 뛴다.

그렇다고 단지 그런 이유로 적비연의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너무나 우스운 일이지만…….

‘그래도 좋은 걸까? 귀문회가 좇는 뜻이라…… 반 대주님, 만약 당신에게 조언을 구했다면 어땠을까요? 역시…… 답은 정해져 있겠죠?’

화령이 잠시 상념에 잠긴 사이 적비연이 말을 마저 이었다.

“만약 그대가 그 뜻을 본 맹에서 찾지 못한다면 언제든 떠나도 좋소. 그땐 나 또한 막지 않으리다.”

아…… 이렇게 맑은 눈으로.

자신에게 검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 남자와 똑같은 그런 눈빛으로 말을 건네는데, 어찌 거절할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거절할 이유도 없군요. 그 뜻에 동참해 보죠.”

그래, 한 번쯤은 귀문회도 그저 돈이 아닌 의미라는 걸 좇아봐도 좋으리라.

그 남자처럼.

* * *

‘오래 살고 볼일이라더니.’

단휘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긴, 그렇다고 자신이 그리 오래 산 것도 아니다.

그저 이 순간을 오래전부터 기다려온 것만은 분명하다.

이곳은 꿈에도 그리던 홍월루!

‘분명 오늘이 내 생일은 아닌데…….’

적비연이 목숨을 구해준 것도 모자라서 정말 홍월루 기녀를 소개시켜 주다니!

물론 어디까지나 임무의 연장선이긴 하다.

적비연은 자신에게 홍월루 기녀에게서 이번 난동 사건의 배후를 밝혀내라고 했으니까.

‘이거 그냥 놀러온 게 아니라 임무라고 생각하니까 또 묘하게 긴장되네.’

사실 놀러 온 것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곳은 처음인지라 긴장이 되긴 하겠지만.

단휘가 심호흡을 하는데 마침 문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소녀, 들어가겠습니다.”

“커험, 험! 들어오시오.”

단휘가 잔뜩 굳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마침 문이 열리고 들어선 여인은…….

‘아……! 만고절색이란 이런 것이로구나!’

얼굴이며 몸매며 필설로 형용하기에는 먹물이 모자란다.

정말이지 은하란만큼이나 아름다운 여인이 아닌가?

“월향(月香)이라 합니다.”

“아아…….”

“제가 한잔 올리겠습니다.”

“아아…….”

단휘가 바보처럼 입만 벌리고 말을 흘리자 월향이 풋 웃음을 터뜨렸다.

어쩜…… 웃는 모습도 이리 아름다울까?

그렇게 넋이 빠져 술잔을 기울이다 보니 시간이 얼마 흐르지도 않았는데 제법 얼큰하게 취했다.

월향도 취기가 올랐는지 손 부채질을 하다가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초봄인데도 더위가 느껴지네요.”

그러더니 옷고름을 스륵 풀어 버리고는 윗옷을 벗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바람에 가슴을 아슬아슬하게 가린 속곳과 보드랍고 하얀 어깨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헉!”

깜짝 놀란 단휘가 앉은 채로 움찔 물러나며 딸꾹질을 했다.

“어머, 대협.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셨어요. 혹시 열이라도……?”

“아, 아니오! 나는 전혀 아무렇소. 아니, 아무렇지도 않소. 그보다…… 궁, 궁금한 것이 하나 있는데…….”

“말씀해 보세요, 나리.”

월향이 팔짱을 끼며 바짝 밀착해 오자 풍만한 가슴이 어깨에 닿았다.

“뜨헉!”

“어머, 왜 이렇게 땀을…….”

“그, 그러니까 조금 떨어져서 이야기를 하는 게…….”

“아이참, 나리도. 제가 싫으세요?”

“그, 그럴 리가 있겠소? 세상 남자라면 그대 같은 아름다운 여인을 절대 싫어할 수 없을 거요.”

“호호호, 부끄럽습니다.”

맨살이 팔에 휘감겨 오는 느낌은 그 자체만으로도 황홀할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왜 이렇게 뻣뻣하셔요? 설마…… 이런 곳이 처음일 리도 없을 테고.”

“당, 당연하지! 나는 아아아주 경험이 많지. 기녀들이 나 때문에 흘린 눈물만으로 장강도 채울 수 있을 거요.”

“호호호, 재미있으셔라.”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아까부터 뭐가 그리 궁금하실까요?”

“그, 그러니까 이건 절대로 내가 그대를 의심해서 하는 말이 아니오. 그, 그러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이번 자폭 도발 사건과는 전혀 관련 없소. 그대가 그들과 연결되어 있다거나 이런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고 있소.”

만약 이 광경을 적비연이 보았다면 뒤통수부터 때렸으리라.

한편 월향은 누가 봐도 미심쩍은 단휘의 반응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래서 무엇이 궁금하실까요?”

“으음. 이곳에 온 지는 얼마나 되었소? 거듭 말하지만 이건 그대를 의심해서 묻는 것이 아니라오. 그대가 강호맹에 대항하는 조직의 끄나풀이라는 생각은 일 푼도 하지 않소.”

“이곳에 온 지는 한 달 정도 되었답니다.”

“그렇군. 하면 누구의 소개로 이곳 홍월루에 들어오게 된 거요?”

“그게 왜 궁금하실까요? 정말 절 의심하시는 걸까요?”

“아, 아니오! 저어어언혀! 그대는 강호맹에 매우 협조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다오.”

“흐응. 나리는 강호맹 소속 무인이셨군요?”

“어엉? 그, 그럴 리가! 핫핫핫! 나 같은 게 무슨 무인이라고. 나는 일개 졸부요. 그래서 이렇게 돈을 펑펑 쓰는 거지. 난 절대로 강호맹의 건설 총책 따위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오. 지금도 이렇게 그대와 사랑만 속삭이고 있지 않소?”

하지만 월향의 눈매는 아까보다 훨씬 차갑게 식었다.

다음 순간,

슈팟!

섬광 한 줄기가 단휘의 목 앞을 스쳐 지나갔다.

“우앗!”

깜짝 놀란 단휘가 엉덩방아까지 찧으며 물러났다.

“칫! 어떻게 내 정체를 안 거냐?”

월향이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쏘아보자, 단휘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떻게…… 내가 의심한다는 걸 눈치챈 거지?”

이쯤 되자 월향은 어이가 없었다.

눈앞의 이 작자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자신을 놀리는 것인지조차 구분되지 않았다.

“흥! 날 놀리는군!”

찰나, 월향이 번쩍 몸을 날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 단휘의 목을 다리로 휘감았다.

“헛! 허벅지 안쪽이 다 보이는…… 컥!”

쿠웅!

단휘가 그대로 넘어지자 목을 휘감은 채 올라탄 월향이 단도를 번쩍 들어 올렸다.

단휘가 기겁을 하며 외쳤다.

“잠, 잠깐! 왜, 왜 이러는 거요? 나는 정말 순수하게 당신과 사랑을 나누기 위해 온 거요! 나는 결코 맹주님의 지시를 받고 당신을 조사하기 위해 온 강호맹 건설 총책이 아니오!”

“미친……!”

월향은 더 말을 섞을 필요도 없다는 듯 단도를 내려찍었다.

쉬이이잇!

찰나,

콰다앙!

문짝이 부서져 나가는 것과 동시에 시커먼 그림자가 휙 날아드는 것이 아닌가?

퍼억!

그림자가 그대로 월향의 얼굴을 걷어찼다.

“꺄악!”

월향이 비명과 함께 나가떨어졌다.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단휘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문을 부수고 들어선 여인.

예홍이 한심하기 짝이 없다는 표정으로 단휘를 보며 혀를 찼다.

“쯧…… 너, 뭐 하냐? 그것도 연기라고 하고 자빠졌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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