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293화 (294/301)

293. 잔당들

“아아! 이건 진짜 음모라고요! 누군가 제가 잠입할 거라는 정보를 흘린 거예요! 내부에 첩자가 있단 말입니다!”

단휘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소리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적비연이 먼 산을 응시하며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첩자라…… 그게 누구라고 생각해?”

“그야 저도 모르죠! 하지만 분명 첩자가 있어요!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 여자가 눈치를 챘겠습니까?”

“너, 정말 진심으로 말하는 거냐?”

“물론이죠! 전 언제나 진심입니다! 왜 제 말을 못 믿으십니까?”

“그 첩자. 사실 누군지 알아.”

“헉! 정말이십니까? 그게 누굽니까? 당장 잡아서 모가지를 비틀어 버릴…….”

“너.”

“예.”

“너라고.”

“예엑? 저요? 제가 첩자라고요? 제가 왜요!”

“그딴 발연기로 완벽하게 속였다고 자부하는 그 정신머리가 바로 첩자다!”

“에이, 왜 이러세요? 제 연기가 얼마나 감쪽같았는데요? 제가 누누이 강조했다고요. 나는 강호맹과 일 푼도 관련 없는 사람이다!”

“그게 문제야.”

“아니, 그게 왜 문젭니까?”

단휘가 정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적비연이 한심하다는 얼굴로 한참을 바라보더니 한숨 쉬었다.

“됐다. 말을 말자. 너를 데리고 무슨…….”

“어? 방금 저 무시한 거죠?”

“그건 빨리도 눈치채면서 연기력은 왜 그렇게 늘지 않을까?”

“정말 억울하네요. 제 연기가 얼마나 감쪽같았는지 아신다면 이런 말을 절대 하지 않으실 텐데.”

“그래, 그래. 알았다. 어쨌든 네 덕분에 월향이라는 기녀가 놈들의 끄나풀이라는 건 확실해진 셈이니까. 현행범으로 사로잡을 수 있어서 다행이지.”

“설마…… 그거 노리고 일부러 절 보내신 건 아니죠?”

“아니지. 난 네 연기를 믿었다.”

“믿음에 보답하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아냐. 충분히 보답했다. 네 역할은 딱 거기까지였으니까.”

“뭔가 칭찬인 듯 칭찬 아닌 칭찬 같군요. 이제 어떻게 처리하실 생각이십니까?”

“못다 밝힌 배후를 알아내야지.”

“배후를 밝힌다고 사라질까요?”

단휘의 말에 적비연이 그를 돌아보았다.

“무슨 뜻이야?”

“정사화합에 반대하는 자들은 많습니다.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불만이 많다는 거죠. 배후를 밝혀서 그들을 처리한다면 과연 불만을 잠재울 수 있을까요?”

“아…… 그 소리군. 네 말이 맞아. 정사화합에 대해 반대하는 자들은 많지. 나 역시 그들을 억지로 설득하거나 힘으로 납득시킬 생각은 없어.”

“언행일치가 안 되는데요?”

“네가 착각하는 게 있는데, 나는 지금 정사화합 반대자들을 처리하려는 게 아냐.”

“그럼요?”

“강호맹 건설 현장에서 조직적 자폭 행위를 한 것은 일종의 눈속임일 거라는 의견이 있어.”

“누구 의견이에요?”

“만통지와 교 선생.”

“아…….”

단휘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다물었다.

그 두 사람은 현재 강호맹의 임시 군사직을 맡고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의 조언이라면 새겨들을 필요가 있으리라.

“그럼 대체 무엇을 숨기기 위한 눈속임인 거죠?”

“천림의 잔당.”

“설마 아직 그들이 남아 있다는 겁니까?”

단휘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이며 벌떡 일어났다.

“글쎄. 원래 천림 소속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 다만 천림주의 방식을 이어가려는 자들이 아직은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아.”

“그럴 수도 있겠군요.”

“무엇보다 지금 아송이 천림인들을 만든 장소가 드러나지 않았어. 후기지수들을 모아서 가후가 어디론가 데려갔다는 건 알겠는데 중간에 그 행적이 끊어졌지.”

“누군가는 분명 가후를 도왔을 겁니다.”

“그래. 그걸 밝혀야 해. 그 누군가가 지금 정사화합 반대자들만 부각시키려고 하고 있어. 자신들의 음모를 은밀히 진행하려고.”

“어쩌면 귀문회가 정보를 가지고 있을 지도…….”

단휘의 말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적비연이 고개를 저었다.

“귀문회도 모를 정도로 철저하게 숨겼어. 만약 귀문회가 알았다면 적어도 천벌전은 벌어지지도 않았을 거다.”

“그것도 그렇군요.”

“우선 월향이라는 그 기녀를 조사해 봐야지. 만약 그녀가 정말 잔당과 한통속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 테니까. 단순히 정사화합 반대자라면 너의 발연기도 헛수고가 되는 거고.”

“그 여자가 쉽게 입을 열진 않을 텐데요. 묵검 형님이 벌써 한나절이 넘도록 혹독하게 추궁하는 모양인데 통하지 않나 봅니다.”

“추궁을 하니까 그런 거야. 고문을 해야지.”

“언제부터 그렇게 잔인해지신 겁니까?”

“내 몸에 칠괴의 기억이 들어온 후부터. 아니, 내가 칠괴의 몸에 들어간 후부터라고 해야 하려나? 아무튼.”

“직접 고문하시려고요?”

“그럴 생각이다. 시간은 금이니까.”

말을 뱉으며 돌아서는 적비연의 전신에서는 뭐라 형용하기 힘든 살벌한 기운이 풀풀 풍겨 나오고 있었다.

‘정말이지 가끔 주군이 너무 낯설다고요.’

물론 그 말은 단휘가 가슴으로 삼켰다.

어쩔 수 없으리라.

지금 적비연에게는 수많은 자들의 기억이 공존해 있을 테니.

자신이 차차 적응해 갈 수밖에.

* * *

“나한테 모두 말하는 게 좋을 거요. 맹주님이 직접 나서시기 전에.”

묵검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월향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오히려 표독스럽게 노려보면서 일갈했다.

“아무 죄도 없는 여인을 잡아다가 잔인하게 고문하는 게 새로운 강호맹주의 취미인가 보지?”

“주군을 욕보이지 마시오.”

“흥! 개새끼 훈련은 잘 시켰나 보네. 주인 욕한다고 짖어대는 걸 보니.”

결국 묵검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돌아섰다.

마침 실내로 적비연이 들어섰다.

“좀 어때?”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럴 줄 알았어. 묵검은 너무 마음이 물러.”

“주군은 저보다 더했습니다.”

“이젠 아니지.”

“저는 그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래, 괜히 못 볼 꼴 보면 속만 부대낄 테니까.”

묵검이 쓴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묵검이 나가고 나자 적비연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의 눈빛이 어찌나 싸늘한지 월향은 조금 전의 패기가 온데간데없어지고 왠지 모를 주눅이 들었다.

“뭐, 뭐죠?”

하대도 존대로 바뀌었다.

적비연 앞에서는 저절로 그렇게 된다.

이능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이런 반응이 너무 자연스럽게 나와서 월향 스스로도 의식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나는 흑천련에서 고문하는 방식에 대해 잘 알고 있어. 흑천련에 존재하는 고문 방식은 총 삼백육십 개. 그중에서 극악의 고문이라고 불리는 방식이 열두 개지. 그중 하나만 당해도 살과 뼈가 분리되는 경험을 하게 되고, 전신이 불에 타들어 가는 고통을 느끼게 될 거야. 그렇게 당하면 보통은 살려달라고 하지 않아. 제발 죽여달라고 빌게 되지. 자, 마지막으로 기회를 준다. 아는 게 있으면 말해. 아는 게 없으면? 그래도 말해. 고통만 더할 뿐이니까.”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두고 보자고.”

적비연이 무감한 표정으로 성큼 걸음을 옮겼다.

잠시 후 두 사람이 있는 실내에 월향의 끔찍한 비명 소리가 가득 차올랐다.

* * *

정협문주(正俠門主) 노상천(盧上川)은 탁자에 앉아 검파에 매여 있는 수실을 하염없이 매만졌다.

붉고 노란색이 예쁜 모양으로 꼬인 수실이었는데, 누군가 한 땀 한 땀 손수 엮은 정성이 느껴지는 물건이었다.

수실을 내려다보는 노상천의 눈시울은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연아…… 어디에 있는 것이더냐?”

무겁게 입을 연 노상천의 목소리는 잔뜩 젖어 있었다.

그래도 한때는 무한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힌다는 정협문이었다.

어디 그뿐인가?

그가 애지중지하며 키운 외동딸 노하연(盧河演)은 무림맹에 들어가서 명성을 날릴 수도 있을 만큼 뛰어난 후기지수로 성장했다.

한데 사 년 전, 무림맹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연이 비밀 임무를 맡아 진행하던 중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그 길로 노상천은 딸의 행방을 찾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부유한 문파는 아니지만, 그래도 딱히 모자랄 것도 없는 문파.

하지만 딸을 찾기 시작한 이후로 가세가 점점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문파의 세력도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사 년이 흐른 지금은 지방의 이름 없는 방파 보다 못한 수준.

그런데 얼마 전 천벌전의 소식을 전해 듣고 나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듯했다.

강호에 떠도는 소문을 근거로 추리하자면 자신의 딸은 비밀 임무를 맡은 것이 아니라, 천림인으로 만들어졌거나 천림인을 만드는 데 희생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믿었던 무림맹이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칠 줄이야.

하나 무림맹주조차 총군사의 손바닥에 놀아났다고 하니 누굴 원망해야 하나?

이미 총군사 가후는 죽고 없는 마당이 아니던가?

그저 마지막으로 바라는 게 있다면, 딸의 생사만이라도 확인하는 것이다.

해서 만약 죽은 것이라면 시신이라도 찾고 싶다는 염원을 가지고 있었다.

“연아…….”

노상천이 딸의 이름을 부르며 눈을 지그시 감는데, 마침 기척이 나더니 호위무사인 진백(眞百)이 들어왔다.

“주군, 창신문에서 의천대주(義天隊主)가 찾아왔습니다.”

“아, 어서 모시게!”

노상천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의천대주 백성준(白城俊)은 노상천이 딸을 찾기 위해서 의뢰를 했던 상대였다.

문파의 위세가 크게 기울어 버린 지금 그가 의지할 만한 곳은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창신문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의천대는 실종자를 찾거나 도망자를 추격하는 추종술에 뛰어난 조직이었다.

의뢰비가 결코 만만치 않았지만, 딸의 행방을 찾을 수만 있다면 목숨이라도 팔 수 있었다.

마침 백성준이 진백의 안내를 받으며 실내로 들어섰다.

“어서 오시게.”

노상천이 백성준을 얼른 자리로 안내했다.

백성준은 자연스럽게 상석으로 걸어가 자지를 차지하고 앉아서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했다.

“차 좀 내오시오. 목이 마르군.”

대뜸 문주에게 말을 던지는 자세가 불량하기 짝이 없었지만, 노상천은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이 이젠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다만 진백만이 불편한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잠시 후 시종이 가져온 차를 벌컥벌컥 들이켠 백성준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괜한 기대는 하지 마시오. 도저히 행방을 찾을 수 없었으니까. 차라리 새로 만들어진 강호맹 쪽의 소식을 기다리는 게 어떻소?”

“아비가 되어서 어찌 손 놓고 기다리기만 할 수 있겠나?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으니 자네들에게 의뢰를 한 것이지.”

“그런데 친딸이 맞긴 하오?”

“그게 무슨 말인가?”

“아니, 뭐. 친딸이면 직접 찾아나서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싶어서. 우리한테 의뢰를 맡길 게 아니라.”

이쯤되자 진백이 더는 보다 못해서 버럭 소리쳤다.

“의천대주! 말씀이 지나치시오! 주군께서는 몇 년째 마음고생을 하고 계신데 굳이 그런 말씀을 하셔야겠소!”

“이보게, 진 호위. 나는 자네가 아니라 자네 주인과 대화를 나누는 중일세.”

“……!”

“이래서 규모가 작은 곳은 위아래가 바로 서질 않는다니까.”

“크익……!”

진백이 당장에라도 칼을 뽑아 들 것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침착해야 한다.

상대는 창신문의 대주다.

무한 제일의 문파.

실력도 자신이 한 수 아래지만, 그런 문파의 눈 밖에 나면 정말로 정협문이 그대로 사라질 수도 있을 문제다.

강호맹이 새로 생겨서 새로운 질서가 생길 것 같지만 꼭 그렇지도 않다.

강호맹이 자리를 잡는 동안에는 지방 구석구석 신경 쓸 여유가 없으리라.

오히려 그런 틈을 이용해서 지방 방파는 더욱 세력을 확장하려는 데 애쓰고 있는 실정이기도 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창신문이 벌써 강호맹의 요직 인사를 포섭했다는 말도 있었으니까.

노상천이 비굴한 표정으로 손을 맞비볐다.

자식을 찾는 일인데 그깟 자존심이 무슨 소용이랴.

“이보게, 백 대주. 나도 당장 중원 곳곳을 누비며 다니고 싶다네. 하나 그렇게 정처 없이 무작정 돌아다니다가 만에 하나 딸이 돌아온다면 그 아이를 맞이해 줄 수가 없지 않은가? 내 부탁함세.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꼭 좀 찾아주게나.”

“자금도 이제 없지 않소?”

“내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원하는 만큼 마련하겠네.”

“흐음. 아시겠지만 사람을 찾는 일이라는 게 워낙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하고 돈이 많이 드오.”

“당연히 그럴 테지. 얼마가 더 필요한가?”

“그간 들어간 돈도 합해서 백만 냥을 더 주셔야겠소.”

“백, 백만……?”

노상천이 핼쑥한 표정으로 묻자, 백성준이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왜? 무리요?”

“백만까지는…….”

“그럼 어쩔 수 없지. 본 문이 한가한 것도 아니고. 이제 그만 포기하시오. 사 년이나 애썼으면 이제 놓을 때도 되지 않았소?”

“아비가 되어서 어찌 자식을 포기한단 말인가?”

“아니, 그럼 돈을 준비하시던가!”

백성준이 짐짓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러자 지켜만 보던 진백이 더는 참지 못해 성큼 나서며 소리쳤다.

“백 대주! 해도 해도 너무하군! 그간 우리가 낸 금액이 얼마인데! 느닷없이 백만 냥이라니!”

“뭐, 일을 하다 보면 예산을 초과하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결과라도 가져와야 할 것 아니오! 결국 아무것도 찾지 못했으면서 뻔뻔하게…….”

“어이, 진 호위.”

“……?”

“내가 네 부하냐?”

“……!”

어느새 백성준이 뱀처럼 차가워진 눈빛으로 진백을 노려보았다.

“내가 네 부하냐고, 이 새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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