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 잔당들
갑자기 툭 터져 나온 하대.
진백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아무리 창신문의 대주라지만 자신의 주인이 있는 자리에서 이리도 무례하다니!
진백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꾹꾹 누르며 씹어뱉듯이 말했다.
“백 대주. 선을 넘지 마시오.”
“선? 무슨 선?”
백성준이 이맛살을 구기더니 진백에게 저벅저벅 다가갔다.
“아까부터 마치 네 부하를 대하는 것처럼 날 추궁하는데…… 먼저 선을 넘은 건 네놈 아닌가?”
“백 대주!”
“왜?”
백성준이 턱을 치켜들고 대꾸하자 진백은 살기가 일어나는 것만 같았다.
나이도 자신보다 한참이나 아래인 백성준이었다.
한데 자신을 이리도 무례하게 대하다니.
아니, 자신은 아무래도 좋다.
그깟 하대 백 번도 더 들어줄 수 있다.
하지만 이곳에 주군이 있지 않은가?
마치 정협문주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행동하는 그의 태도에 열불이 터질 것만 같다.
“그대는 최소한의 도리라는 것도 모르는……!”
짜악!
순간 눈앞에 빛이 번쩍였다.
진백이 균형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척!
“이 무슨……!”
짜악!
다시 한번 눈앞이 번쩍인다.
진백의 뺨을 사정없이 올려붙인 백성준은 손찌검을 멈추지 않았다.
짝! 짜악! 짝!
“이, 이보게! 백 대주! 이게 무슨 짓인가!”
당황한 노상천이 얼른 달려가 말렸지만, 백성준은 한기를 풀풀 날리며 노상천을 노려보았다.
“물러나시오. 이자가 죽는 꼴을 보기 싫으면.”
“백 대주!”
하지만 백성준은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진백을 일방적으로 구타하기 시작했다.
“뭐? 최소한의 도리? 그래서 네놈은 감히 대 창신문의 대주를 네 아래 취급한 것이더냐? 부탁을 하는 자세가 글러 먹었잖아!”
퍽! 퍽! 퍼퍽!
백성준의 일방적인 폭행이 계속됐지만 진백은 제대로 반격조차 하지 못했다.
물론 백성준의 무위가 진백보다 훨씬 높은 이유도 있었지만, 자칫 대응을 했다간 그 피해가 문주에게도 미칠까봐 염려한 탓이 컸다.
“백 대주. 고, 고정하시게. 진 호위가 말실수를 좀 한 것 같은데 자네가 너그러이 용서해 주게나.”
“물러나라고 했습니다. 그러다 다치십니다. 제가 힘 조절을 잘못해서 이자를 죽여 버릴 수도 있고요.”
“자네 정말……!”
“왜요? 딸내미 찾기 싫소? 여기서 그만둘까요? 그럼 내가 사과하겠소.”
그야말로 오만방자한 태도.
하지만 딸을 마치 인질처럼 대하고 있으니 노상천도 움찔거리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딸, 딸을 찾을 수 있겠나?”
“뭐, 사실 꽤나 단서를 발견하긴 했소. 하지만 아직 확실하진 않고. 앞으로 육 개월 정도라면 찾을 수 있을 지도.”
“육 개월……?”
“왜? 너무 길다는 거요?”
“아닐세. 사 년을 기다렸는데 고작 반년인들 못 기다릴까?”
“그래요. 내가 이렇게 열심히 노력하는데 이런 대접을 받으니 속상하잖소.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 같은 게 자꾸 으르렁대니까.”
퍼억!
마지막 말을 뱉은 백성준이 진백의 복부를 거칠게 걷어찼다.
“쿠욱! 쿠웨에엑!”
내공을 실은 것인지 내장이 가닥가닥 끊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이 뇌리를 들쑤셨다.
진백이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내고는 주저앉은 채로 부들부들 떨었다.
노상천이 얼른 나서며 말했다.
“그만 노여움을 푸시게. 진 호위를 대신해서 내가 대신 사과하겠네.”
“저놈이 잘못한 걸 왜 문주께서 사과하시오?”
“그래도 내 얼굴을 봐서라도 이쯤 하시는 게 어떤가? 그보다 아까 백만 냥이라고 했나? 백만 냥이면 정말 육 개월 안으로 딸의 행방을 밝힐 수 있겠는가?”
“아시겠지만 이 너른 강호에서 실종자를 찾는 건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보다 어렵소. 그걸 우리 의천대가 하는 중이고. 사실 문주께서 지나친 기대를 할까 봐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는데…….”
“뭐, 뭔가? 딸에 관한 이야기인가?”
“그렇소. 사실 딸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정보가 입수됐소.”
순간 노상천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아, 딸이 살아 있을 가능성이 있다니!
만약 딸이 살아만 있다면 무엇이 아까울까?
간이며 쓸개며 영혼까지 내어주리라.
노상천이 백성준의 손을 덥석 잡으며 소리쳤다.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백만 냥을 준비하겠네! 부디 내 딸을 찾아주게나.”
“흐음. 이게 시간과 인력이 많이 드는 일이라서 간단히 수락할 문제는…….”
“부탁함세! 어떻게든 돈을 준비할…….”
“그럼 좋소. 대신 백만 냥은 받지 않겠소.”
“그럼?”
“아무 때나 짖어대는 개새끼 다리 하나를 내어주시면 기분이 좀 풀릴 것 같소만.”
“그, 그게 무슨……?”
백성준이 야비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진백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놈의 다리 하나를 받아가겠소. 그럼 백만 냥은 없는 것으로 해주지.”
“백 대주! 그 무슨 말인가!”
“왜? 못 하겠소?”
“자네!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는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건 도가 지나친 게 아닌가?”
“그럼 할 수 없지. 딸의 행방은 스스로 찾아보시길.”
“하면 아까 말한 정보를 내게 넘기게!”
“그건 안 되겠소. 정 그 정보를 받고 싶다면 저놈의 팔 하나를 넘기던지.”
“백 대주!”
“거참, 시끄럽네. 나도 내가 백 대주라는 걸 알고 있소. 거듭 부르지 않아도 된다고.”
“어, 어찌 이리도 야비한……! 자식 잃은 부모의 심정을 이용해서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다니! 도대체 자네가 정말 명문 정파의 대주란 말인가?”
“허참, 아직도 이런 고리타분한 생각을 가진 영감님이 계셨군. 어이, 노 문주.”
“노 문주……?”
노상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피를 토해낸 진백도 어찌나 두 눈에 힘을 주었는지 눈알의 실핏줄이 터질 것만 같았다.
“강호맹주가 하는 말도 못 들었어? 이제 정사 구분 따위는 없다잖아? 어디 다 쓰러져 가는 문파에서 기둥 하나 겨우 붙들고 있는 주제에 이래라, 저래라 하는 거야? 정신 차려.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고 해도 당신처럼 멍청한 작자는 결국 도태되게 되어 있으니까. 아비가 이리 멍청하니 딸내미도 지금껏 뒈졌는지 살았는지 모르는 거지.”
“백, 백 대주, 네 이노오오옴!”
결국 분을 참지 못한 노상천이 노호성을 터뜨리며 그대로 일장을 날렸다.
하지만 백성준의 주먹이 훨씬 빨랐다.
“어딜!”
뻐억!
“크악!”
노상천은 손목뼈가 부러져 나가는 고통을 느끼면서 그대로 튕기듯 날아갔다.
콰당탕!
그가 집안 잡기를 부수며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
“문주님!”
진백이 벌떡 일어났다.
상황이 이리 되자 그 역시 앞뒤 가리지 않고 백성준에게 달려들었다.
“네 이노오옴!”
처음부터 백성준이 마음에 들지 않는 그였다.
의뢰를 맡긴 지 사 년이 흐르도록 이렇다 할 결과를 내놓지 못한 채 돈만 받으면서 시간을 질질 끌던 자가 아니던가?
다만 무한제일문이라는 창신문의 위세와 딸의 실종으로 정신이 나가 버린 문주 때문에 참고 참았을 뿐이다.
‘하지만 더 이상은 참을 필요가 없겠구나!’
차아아앙!
진백이 검을 뽑는 것과 동시에 백성준의 신형을 사선으로 베었다.
‘네놈을 죽이고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데…….
“헛!”
백성준의 신형이 신기루처럼 스르르 사라지는 것이 아닌가?
어느새 뒤로 돌아온 백성준이 그대로 진백의 등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뻐억!
“크억!”
콰당탕탕!
포탄처럼 튕겨 나간 진백이 실내 한쪽 구석까지 굴러가 처박혔다.
단숨에 두 사람을 처리한 백성준이 손을 탁탁 털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대낮부터 재수 없게 별 거지 같은 것들이…….”
그런데 그때 한 사내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네가 오늘 재수 없다는 건 잘 알고 있구나.”
“음? 누구냐!”
백성준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휙 돌아섰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의 목소리는 전음도 아닌 육성이었다.
육성이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 누군가 다가오도록 기척조차 느끼지 못했다니!
그래도 초절정 초입에 들어선 자신이 아니던가?
“어딜 두리번거리는 거냐? 여기다.”
다시 들린 목소리에 백성준이 화들짝 놀라며 홱 돌아섰다.
실내 한쪽 구석에 꼿꼿하게 서 있는 사내.
그는 바로 적비연이었다.
‘어느 틈에……?’
일단 경계심이 든 백성준이 차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서 오신 고인이시오?”
“어울리지 않게 무슨 예를 차리고 그러나? 하던 대로 해라.”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
“가르쳐 줄 이유가 없다. 누가 개새끼한테 자기 이름을 알려주나?”
빠직.
백성준이 어금니를 갈았다.
대체 누굴까?
혹시 노상천이 새로 고용한 호위무사라도 되는 걸까?
하나 백성준은 곧 고개를 저었다.
노상천에게 그만 한 돈이 없다는 것을 잘 알기에.
그는 이미 빚이 한가득이다.
그럴 돈이 있다면 호위무사가 아니라 딸을 찾기 위해 다 쏟아부었을 테지.
이리저리 생각을 굴리는데 적비연이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그대로 손바닥을 후려치는 게 아닌가?
짜악!
뺨이 휙 돌아갔다.
당황한 백성준이 얼른 물러나면서 정신을 차렸다.
‘대체…… 어찌?’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상대는 그냥 평범하게 걸어와서 자신의 뺨을 올려쳤다.
한데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 모든 과정이 너무 자연스럽게 이루어져서 마치 자신이 얻어맞는 게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
약이 바짝 오른 백성준이 버럭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
짜악!
“왜? 때릴 땐 좋았는데, 막상 맞으니 기분이 별로냐?”
“크익!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짜악!
“네가 누군데?”
“큽! 나, 나는 대 창신문의 의천대……!”
짜악!
“그런 놈이 이딴 짓을 해?”
“노오오옴! 창신문이 강호맹과 어떤 관계인 줄 알고 이러는……!”
짜악!
“알지. 그렇잖아도 네놈들이 줄을 댔던 신룡당주(神龍堂主)를 정리하고 오는 참이니까.”
“……!”
“이제 좀 상황 파악이 되나?”
“당, 당신은 그럼…….”
백성준이 퉁퉁 부어오른 뺨을 붙잡고는 놀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적비연이 손바닥을 어루만지며 대꾸했다.
“그래. 내가 강호맹주 적비연이다.”
“……!”
털썩!
백성준이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그제야 모든 것이 납득이 된다.
어째서 자신이 반격 한 번 할 수 없었는지.
척!
백성준이 얼른 포권을 취하며 소리쳤다.
“귀하신 분을 몰라 본 죄! 부디 너그러이 용서를!”
하지만 적비연은 감정이라곤 조금도 실리지 않은 표정으로 백성준을 응시했다.
“네 죄가 뭔지도 모르는군.”
“……!”
“딸을 잃은 부모의 심정을 농락하는 것도 모자라 거짓을 고해서 돈을 착취하고, 뿐만 아니라 죄 없는 자를 해치려고 한 죄, 내 마음대로 즉결 심판에 따라 사형을 내린다.”
“맹, 맹주님! 용서해 주십시오!”
백성준은 눈치가 빠른 자였다.
그는 자신이 젖 먹던 힘을 다해 싸워도 적비연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용서를 빌고 비는 것뿐.
적비연이 머리를 긁적이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 용서를 구하고 싶다면 다리 하나를 잘라내던지.”
“맹, 맹주……!”
“왜? 네 다리는 아까워?”
“제가 잘못했습니다, 맹주님.”
“그럼 벌을 받아야지.”
“부디 아량을 베푸시어 용서를…….”
“그러니까 다리만 받아가겠다니까. 못하겠나?”
“아…….”
백성준이 참담한 표정으로 얼버무리자, 적비연이 전에 없이 차디찬 미소를 지었다.
“그럴 줄 알았어. 그럼 즉결 심판을 내리도록 하지.”
“헛!”
쉬이이잇! 빠악!
정말이지 눈 깜빡할 사이.
적비연이 내리친 수도가 그대로 정수리를 강타하자, 백성준은 입에 거품을 물고 즉사하고 말았다.
겨우 몸을 일으키고 지켜보던 노상천과 진백도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적비연이 절명한 백성준을 보며 싸늘하게 중얼거렸다.
“그동안 네놈들이 한 짓을 생각하면 이렇게 빠르게 죽인 게 아까울 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