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 무덤을 파다
“맹, 맹주님……!”
노상천이 떨리는 목소리로 적비연을 부르며 비척비척 다가왔다.
내상을 입은 그는 몇 걸음 옮기지도 못하고는 한쪽 무릎을 털썩 꿇었다.
“큭.”
“괜찮으시오?”
적비연이 얼른 다가가 점혈을 하고는 가볍게 공력을 불어넣었다.
그러자 답답했던 가슴과 복부가 거짓말처럼 시원해지면서 한결 나아졌다.
“저, 저는 괜찮습니다. 염치없지만 저보단 진 호위를 부탁드립니다.”
적비연이 부드럽게 웃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 걱정 마시오.”
적비연이 다가가자 진백이 고개를 푹 숙이며 예를 갖췄다.
“강호맹주님을 뵙습니다! 상황이 여의치 않아 예를 다하지 못한 점 부디 용서하십시오.”
“그리 경직되지 않아도 괜찮소. 어디 봅시다.”
적비연이 진맥을 하면서 몇 군데 점혈을 했다.
급작스러운 충격에 막혔던 혈맥이 뚫리면서 역시나 숨통이 트였다.
다만 진백의 경우는 확실히 노상천보다는 내상이 깊어 점혈만으로는 통증을 덜어내는 데 한계가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대로 두면 후유증이 남아서 회복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거나 평생 장애를 가질 수도 있는 상황.
이에 적비연이 품에서 침통을 꺼내고는 세침을 뽑아 재빠르게 손을 놀렸다.
슉, 슉, 슉!
정말이지 곁눈질로 슬쩍 본 정도로 세침을 꽂아대니 지켜보던 노상천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적비연이 너무 대범하게 행동해서 그냥 아무렇게나 찔러대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손놀림 하나하나가 무척이나 섬세하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저 감탄하기에 바빴다.
‘굉장히 젊어서 놀랐는데, 의술마저 이토록 뛰어나다니. 강호에 퍼진 소문이 헛소문은 아니었구나. 아니, 오히려 소문이 축소된 모양이구나.’
기실 대개의 소문이란 그렇다.
작은 일을 부풀리고 부풀려서 너무 과장되거나, 큰일도 줄이고 줄여서 너무 과소되거나.
적비연의 경우는 후자일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그렇듯 처음에는 그의 무용담도 나름 정확하게 시작했을 것이다.
뭐, 어쩌면 조금의 과장이 보태졌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과장된 소문이라고 지레짐작해서 조금씩 축소했으리라.
그를 시기하는 누군가가 과소평가했을 수도 있고, 너무 허황된 표현이라고 여겨 저절로 축소하여 퍼트렸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지금 눈앞의 맹주 적비연은 노상천의 은인이었다.
백성준의 말대로 이젠 모든 힘을 잃고 쓰러져 가는 기둥 하나 붙들고 겨우 버티는 신세가 아니던가?
백성준이 마음먹고 자신을 죽인 다음 뒷수습을 시도했다면 소리 소문 없이 멸문됐을 수도 있으리라.
그만큼 작금의 가세가 심각하게 기울었고, 또 창신문의 위세가 대단했기에.
한편 적비연에게서 침술 치료를 받은 진백은 곧 몸이 축 늘어지면서 스르르 눈을 감았다.
노상천이 흠칫거리자, 적비연이 그를 안심시켜주었다.
“걱정 마시오. 잠이 든 거요. 이대로 좀 쉬면 무리 없이 상처를 회복할 거요.”
“아…… 하면 침은…….”
“그대로 놔두면 저절로 밀려나와 떨어질 거요. 그때까진 건드리지 말고 가만두는 게 좋겠소.”
확실히 적비연의 말대로 진백의 표정은 평온하게 바뀌었고 거칠었던 숨결도 고르게 다듬어지고 있었다.
노상천이 눈시울까지 붉히며 고개를 숙여보였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우선 사람을 시켜 진 호위를 쉴 만한 곳으로 옮기는 게 좋겠소.”
적비연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노상천이 시종을 불러 일을 지시했다.
시종은 난장이 된 실내를 보고는 놀란 눈치였지만, 제 주인이 멀쩡한 것을 확인하고는 고분고분 말을 따랐다.
대략의 상황이 정리되자 정신이 돌아온 노상천이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어…… 이미 아시는 것 같지만, 이자는 창신문의 의협대주입니다. 창신문은 무한 제일의 문파이지요. 아무리 맹주님이시더라도 창신문과 척을 지게 되면 여러모로 골치 아픈 일이 생기실 수 있을 듯한데…….”
잠시 망설이던 노상천이 결심을 굳힌 듯 입을 열었다.
“물론 맹주님의 지도력을 의심하는 은 아닙니다만, 곤란한 일이 생기실 수 있으니 이 모든 일을 제가 저지른 것으로 하겠습니다. 사실 맹주님이 나타나시기 이전에 기습을 가한 것도 저였으니까요.”
적비연이 눈에 이채를 띠고는 물었다.
“하면 노 문주께서 곤란해질 거요. 아니, 어쩌면 노 문주의 목숨을 요구할 수도 있을 거고.”
“괜찮습니다. 대신…… 감히 염치불구 부탁을 드리자면…….”
“실종된 딸을 찾아달라는 말이오?”
“크흡……!”
노상천이 결국 복받치는 설움을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오열했다.
“아비로서 하나뿐인 딸을 지키지 못한 이 무능함에 대한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맹주님께서 아량을 베푸시어 저의 간청을 들어주신다면, 그 은혜 죽어서도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
“…….”
두 사람 사이에 한참이나 침묵이 흘렀다.
적비연은 왠지 모를 뭉클함에 입을 다물었고, 노상천은 간절함으로 숨이 막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한참 만에야 적비연이 입을 열었다.
“그건…….”
노상천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제발……!’
“받아들일 수가 없소.”
“아…….”
저도 모르게 한숨 섞인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긴.
맹주가 뭐가 아쉬워서 딸을 찾는 일에 매달리겠나?
무려 사 년이나 찾아도 성과가 없던 일이지 않은가?
이제 강호맹을 설립하고 해야 할 일도 태산일 텐데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으라고 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그리 이해를 하면서도 속이 쓰리고 아픈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데,
“어차피 내가 백성준을 죽인 건 창신문이 알게 될 거요. 부대주가 지금쯤 창신문으로 미친 듯이 달려가고 있을 테니까.”
“아……!”
“그래도 너무 아쉬워하진 않아도 되오. 내가 노 문주의 딸은 반드시 찾아드리겠소.”
“그, 그게 정말입니까?”
노상천은 대번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되물었다.
적비연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빈말은 하지 않소. 다만, 딸의 생사는…….”
“생사만이라도 알 수 있게 해주십시오!”
노상천이 말허리를 자르며 소리쳤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하겠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 이럴 것이 아니라 어서 맹으로 복귀하심이…… 창신문에서 이 사실을 알면 당장에라도…….”
“배가 고픈데 뭐 좀 먹으러 갑시다.”
“예?”
“일단 싸우려면 배가 든든해야 할 것 아니오? 노 문주께서도 나와 함께 갑시다.”
“예에?”
노상천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묻자 적비연이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되물었다.
“딸의 생사를 확인하고 싶다고 하지 않으셨소?”
“그, 그렇습니다만…….”
“그럼 따라오시오. 일단 먹읍시다. 뱃심이 있어야 어떠한 충격도 견디지.”
적비연이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는 몸을 돌렸다.
잠시 멍하니 서 있던 노상천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표정을 굳혔다.
“따르겠습니다!”
* * *
“강호맹주가 물갈이를 시작했다는 소문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뭐, 대체로 앞날을 못 보고 제 배만 채우던 자들이 심판을 받은 걸로 보이지만.”
이마 주름에 세월을 새겨넣은 노인이 성성하게 자란 허연 수염을 쓸며 말했다.
그러자 눈이 뱀처럼 가는 중년의 사내가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는 답했다.
“보고받았소. 해서 신룡당주에게 각별히 몸가짐을 조심하라 일러두었지.”
“역시 장문께서는 대처가 빠르시군요.”
“과찬이오. 모두 육 회주 덕분이오.”
“허허허.”
백염이 성성한 노인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태평하게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이 두 사람은 바로 창신문주 조관악(朝款握)과 장로회주 육양진(陸養眞)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한가로운 담소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깨지고 말았다
의협대 부대주가 사색이 되어서는 달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문주님께 급보를 아룁니다! 의협대주가 조금 전 정협문에서 강호맹주의 일격을 받아 사망했습니다!”
갑작스러운 보고에 조관악과 육양진은 한동안 아무런 반응도 못했다.
너무 뜻밖이라 오히려 거짓말처럼 들렸다.
이 와중에도 조관악은 부대주의 보고가 왜 거짓말처럼 느껴지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쏟아낸 내용이 정신을 차릴 수 없게 했지만, 부대주의 급보는 나름대로 원칙을 따르고 있었다.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다만 단 하나가 빠졌는데…….
“왜……?”
그렇다.
아마 이 ‘왜’가 빠졌기에 현실성이 떨어졌으리라.
강호맹주가 왜 의협대주를?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다.
“그, 그것은…… 속하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이었다.
부대주는 목소리까지는 들을 수 없는 위치에서 창문 너머의 대주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강호맹주가 갑자기 나타나서 대주를 공격한 것이다.
다행인 것은 부대주가 한 가지는 어렴풋이나마 엿들었다는 것이다.
“강호맹주가 대주를 죽이기 전에 신룡당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
“……!”
조관악과 육양진이 움찔거리고는 서로를 돌아보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신룡당은 창신문과 가장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곳이 아닌가?
육양진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장문인, 신룡당이 당했다면 본 문도 위험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겠지. 창천목주(蒼天目主)!”
조관악의 부름에 허공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주군!”
“강호맹주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아보라.”
“알겠습니다!”
창천목은 창신문이 무한 곳곳에 심어 놓은 감시자들이다.
그들은 거지, 행인의 모습으로 또는 상인이나 관인의 모습 등으로 도심 곳곳을 누빈다.
즉, 창신문의 눈이 되어주고 귀가 되어주는 자들이다.
그들은 무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일각 이내로 파악하여 창신문에 전달할 능력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반각도 채 지나지 않아서 창천목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호맹주와 정협문주가 풍랑객잔에서 국수와 만두를 먹고 있습니다.”
“국수…… 만두……?”
“예.”
“이것들이 지금…… 남의 식구를 죽여놓고 밥을 처먹어? 다른 자들은?”
“둘만 보였습니다.”
그러자 듣고만 있던 장로회주 육양진이 나섰다.
“신임 맹주가 젊은 혈기만 믿고 설치는 모양입니다. 그래도 숨은 호위들이 있을 수 있으니 제가 직접 가보겠습니다. 허락해 주신다면 문도들을 전부 이끌고 가보겠습니다.”
누군가 들었다면 눈이 번쩍 뜨였을 이야기다.
창신문의 무인들을 전부 이끌고 가겠다니.
이건 전쟁을 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상대는 날고 긴다는 강호맹주다.
소문이라는 게 믿을 것은 못 되지만, 작금의 강호맹을 상대로 싸우려면 전쟁을 준비하는 게 맞다.
육양진이 말을 이었다.
“장문인께서는 혹시 모르니 만약을 대비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객잔에 도착한 후로 창천목의 보고가 한 식경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최후의 수단을 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설마 강호맹주의 소문을 다 믿으시오?”
조관악의 말에 육양진이 피식 웃었다.
“그런 허황된 소문을 어찌 믿겠습니까? 분명 절반은 거짓일 거고, 절반은 부풀려진 것일 테지요. 어쩌면 누군가 강호맹주를 허수아비처럼 데리고 노는 것일 수도 있고. 어쨌거나 그가 의협대주를 죽였으니, 초절정은 넘어섰겠지만, 제게는 안 될 겁니다. 그럼에도 창신문도를 모두 끌고 가려는 것은 기선제압을 위해섭니다. 본 문의 위세가 어느 정도인지 눈으로 직접 보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입니다.”
“일리 있는 말이오.”
조관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육양진은 선친과 호형호제하는 사이였는데, 창신문을 지금 이 자리까지 끌어 올린 인물이기도 했다.
“회주님 말씀대로 만약은 대비하겠소. 하나 기우이길 바라오.”
육양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대개의 소문이란 과장되게 마련. 하나 본 문에는 그런 허황된 소문이 안 통한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지요. 현재 임무 중인 조직을 제외하면 본 문에 남은 문도만 팔백에 달하니 아마 맹주는 보자마자 오줌을 지릴지도 모르겠군요.”
“하하하!”
조관악이 잠시 긴장했던 것도 잊고는 웃음을 터뜨렸다.
“회주님 말씀을 들으니 마음이 놓이는군. 회주…… 아니, 육 숙부님을 믿고 의지하겠소.”
“허허, 수하들 앞에서는 그런 말씀 삼가시길.”
“명심하지요.”
두 사람이 서로를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조관악이 굳은 표정으로 위엄 서린 명을 내렸다.
“육 회주! 창신문도 전원을 이끌고 자하객잔으로 가라! 가서 본 문의 위엄을 세우고 희생당한 문도의 억울함을 풀어주도록 하라!”
육양진이 공손히 읍을 하고는 우렁차게 소리쳤다.
“장문인의 명, 받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