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 무덤을 파다
후루루룩. 쩝쩝.
면발이 들어가는 소리가 연신 들린다.
노상천은 멍한 표정으로 적비연을 보았다.
적비연은 풍랑객잔의 국수와 만두를 삼 년 굶은 거지처럼 먹고 있다.
맛집을 알려달라고 해서 무심코 말한 곳인데 정말로 이렇게 포식을 할 줄이야.
이쯤 되니 의심이 된다.
혹시 젊은 혈기로 분탕질을 한 게 아닌지.
앞뒤 분간 못하고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맹주라면 곤란하다.
강호의 정치는 혈기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숱한 경험으로 쌓은 노회함이 필요한 곳이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도 언제 어디에서 칼이 날아들지 모르는 곳.
그런데 명문정파의 대주를 죽여놓고 한 시진도 지나지 않아 국수에 만두라니.
‘허 참…….’
그릇에 코를 박고 먹던 적비연이 고개를 들고는 물었다.
“안 드시오?”
“아…… 입맛이 없습니다.”
“그래도 드시오.”
“전 괜찮습니다.”
“딸의 생사라도 확인하고 싶다 하지 않으셨소? 그 말은 최악의 경우도 염두에 둔다는 뜻일 텐데. 가세가 기울었다지만 그대로 주저앉으실 거요? 그게 아니라면 악착같이 드시오.”
노상천이 움찔거리고는 천천히 젓가락을 들었다.
그가 곧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사실…… 딸아이가 이미 죽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다만 그 마지막 모습이라도 담고 싶은 게 아비의 심정이지요. 하나 정말 딸이 이승에 없다면…… 아비 된 자로서 무슨 염치로…….”
“드시오. 만약 최악의 가능성을 더 높이 생각하신다면 더 악착같이 드시오. 어떻게든 살아남아 그 의미를 찾아야 하지 않겠소?”
담담하게 건넨 말이다.
한데 적비연의 목소리와 음성은 묘한 힘이 있다.
사람의 마음을 바위처럼 가라앉게 만든다.
감정은 북받치지만 이성도 함께 유지된다.
외모만 보자면 아직 한참 어리지만, 묘하게 나이 지긋한 노인과 대화하는 기분도 든다.
결국 노상천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젓가락을 들어 국수를 입에 넣기 시작했다.
후루루룩.
두 눈을 질끈 감으니 눈물이 뚝뚝 떨어진다.
그래도 악착같이 먹었다.
그래, 어떤 결과든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위해 먹어야지.
국수가 오늘따라 유난히 짜다.
후루루룩. 쩝쩝…….
’이제 그는 걱정을 잊었다.
창신문이 어떻게 나오든 말든.
그들은 모를 것이다.
딸의 생사도 몰라 절망에 빠진 아비가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국수를 들이켤 때는 얼마나 독한 마음을 먹은 것인지.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적비연이 마지막 남은 만두를 입에 털어 넣었을 때였다.
“마저 드시오.”
드르륵.
말을 던진 적비연이 무심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노상천은 본능적으로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했다.
확실히 적비연의 실력이 자신을 아득하게 뛰어넘는 모양이다.
아직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데 적비연이 저리 나서는 것을 보면.
객잔 밖으로 걸어 나온 적비연이 썰렁한 거리를 둘러보았다.
확실히 이상한 분위기.
무한 중심에 위치한 이곳에 행인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객잔 앞에서 노점상을 열던 노인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적비연이 씨익 웃더니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거창하게 놀 줄 아는군. 하긴 나를 마중 나오려면 이 정도 규모는 되어야지, 안 그래? 자, 어디 한 번 멋지게 인사 올려보도록.”
그의 목소리가 끝나자마자 맞은편 지붕에서 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백염이 성성한 노인이 내공을 실어 말했다.
“창신문의 장로회주 육양진이 강호맹주님을 뵙소.”
“알현하는 자가 너무 높은 곳에 있잖아. 내려와라.”
“……!”
육양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토록 안하무인할 줄이야.
제아무리 강호맹주라지만 나이도 한참 어리지 않은가?
하오체도 아니고 아예 시정잡배나 쓰는 말투라니!
역시 그냥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될 자.
차라리 잘됐다.
한 번은 길들이기를 해야 했을 터인데 의협대주의 죽음을 이렇게 이용할 수 있다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터.
육양진이 냉랭한 웃음을 짓더니 지붕을 툭 차고 몸을 날렸다.
파라라라라라!
허공을 가로지른 육양진이 한 마리의 학처럼 부드럽게 대로까지 내려섰다.
척 보기에도 엄청난 내공을 소유한 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이토록 우아하게 내려선 것도 자신의 무위를 과시해서 상대의 기를 눌러보겠다는 심산이었다.
육양진이 포권을 취했다.
“제가 결례를 저질렀군요. 뭣들 하느냐! 너희들도 무한을 방문하신 강호맹주님을 알현하도록 해라!”
육양진의 우렁찬 목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거리마다 수백의 무인들이 빼곡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뿐만 아니라 주변 전각 지붕 위로도 그림자들이 바글바글했다.
어지간한 무인이라도 이 광경을 보았더라면 기가 질릴 수밖에 없으리라.
그토록 독한 마음을 먹고 국수를 먹던 노상천조차도 가슴이 두근거릴 지경이었으니까.
육양진이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본 문에 몸을 담은 자들이 너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지붕에도 올라가서 인사를 드렸습니다. 대로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말이지요.”
“이미 대로는 다 막아 버린 것 같은데.”
적비연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하자 육양진이 내심 냉소를 지었다.
‘흥! 끝까지 허세로구나. 분명 속으로는 떨고 있을 터.’
생각을 갈무리한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일렀다.
“이놈들, 무엇들 하느냐? 인사 올리라는 말 못 들었느냐?”
그러자 수백 명의 무인들이 일제히 포권을 하면서 소리쳤다.
“강호맹주님을 뵙습니다!”
다르르르르……!
그 목소리가 어찌나 우렁차고 큰지 주변 전각의 기와와 창문이 떠는 소리를 내질렀다.
하지만 그 정도로 기가 죽을 적비연이 아니었다.
“귀 아프다, 이 새끼들아.”
“……!”
일순 육양진의 표정이 굳었고, 다른 무인들 역시 눈에 힘을 주고는 살기를 드러냈다.
수백 명의 살기가 피부가 따갑도록 느껴진다.
적비연이 싸늘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런데 어째 다들 잔뜩 날이 서 있군. 환영인사치고는 싸가지가 없는데?”
“이해해 주십시오. 다들 의협대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예민해진 상태라서 말입니다.”
“아, 그래? 그런데 대답이 틀렸어.”
“무슨……?”
“그럴 땐 이해해 달라고 하면 안 되지. ‘죄송합니다’라거나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해야지.”
“흐음. 말이 나온 김에 여쭙겠습니다만, 어째서 의협대주를…….”
“죽였냐고?”
“예.”
“죽을 짓을 했으니까.”
이쯤 되자 육양진도 슬슬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 죽을죄가 뭔지 묻는 거요, 맹주.”
“말이 좀 가벼워지셨군.”
“맹주께서는 아까부터 가볍더군.”
“오오, 점점 더 가벼워지는군.”
“맹주, 아직은 돌이킬 기회가 있소. 부디 어려운 길을 가지 맙시다. 이곳은 무한이고, 본 문은 무한 제일의 창신문이오. 그리고 여기에는 맹주 혼자 있고. 아, 저기 딸내미 잃고 국수나 처먹으면서 맹주 바짓가랑이 붙들고 있는 멍청한 녀석도 있군.”
육양진의 말이 확실히 거칠어지자 적비연이 오히려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나와야지. 그래야 내가 너희들을 손보는 맛이 있지. 안 그래?”
“맹주!”
“보아하니 너희들이 무슨 잘못을 저지른지는 알고 있는 것 같고. 굳이 죽일 놈에게 죄목을 일일이 읊을 필요도 없을 것 같으니, 네 말대로 쉽게 가자.”
“이런 무엄한……!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운이 좋아 천벌전에서 공을 세운 것만 믿고 설치는군! 맹주 혼자 본 문 전체를 상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구구구구우우웅……!
육양진의 노호성에 땅과 전각이 흔들렸다.
하나 적비연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 표정으로 말했다.
“물론 나 혼자서도 너희들 같은 잡것들은 다 쓸어버릴 수 있겠지. 하지만 나는 혼자 왔단 말도 하지 않았어. 여태 손이 근질거린다고 징징거리는 것들이 많아서 말이야.”
“뭣이?”
“자, 이만큼 모았으니 원 없이 살풀이를 할 수 있겠지. 다들 나와라.”
적비연이 말을 뱉자마자 갑자기 주변으로 어둑한 그림자가 밀려들었다.
“이, 이건……!”
육양진이 당황해서 주춤거리는데, 근방의 가장 높은 전각들 위로 시커먼 그림자들이 한가득 나타나는 게 아닌가?
곧이어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맹주님의 부름에 응합니다!”
구구구구구구구우우웅!
천지가 격동할 정도로 큰 소리.
적비연을 에워싼 창신문도들이 저마다 어깨를 움츠리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졸지에 그들은 시커먼 그림자들에 완전히 포위된 상태가 되었다.
잠시 후, 그림자 중 몇몇이 단숨에 허공을 내디디며 날아와 적비연 앞에 내려섰다.
처처처척!
“제길, 기다리느라 좀이 쑤셨소, 맹주.”
가장 먼저 말을 건네며 다가온 자는 바로 흑천련주의 모습을 한 극마였다.
그는 현재 강호맹의 부맹주 직을 맡고 있었다.
그 뒤에는 사예린과 궁귀 조신우가 있었고, 축일공도 보였다.
한편 육양진은 흑천련주가 적비연 앞에서 낮은 자세를 취하는 걸 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사예린과 조신우, 축일공만 해도 자신이 감히 넘볼 수 없는 초고수가 아니던가?
이들이 적비연을 허수아비로 세운 것이든, 정말 적비연이 그들보다 강한 것이든 상황이 좋지 않다.
한데 이들이 적비연을 바라보는 눈빛을 보니 허수아비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위기감이 든다.
“맹, 맹주……!”
짜악!
육양진의 뺨이 휙 돌아갔다.
그는 백성준이 당했던 것처럼 적비연에게 연거푸 뺨을 얻어맞았다.
짝! 짜악! 짝! 짝!
살벌한 손찌검이 이어지는데도 창신문도들은 누구 하나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당주와 단주, 각주와 대주들이 모두 입을 딱 벌리고는 장로회주가 일방적으로 구타당하는 모습을 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들을 포위한 강호맹 무인들이 흉흉한 살기를 연신 뿜어내고 있으니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기 힘든 지경.
게다가 그들이 내뿜는 기운은 정사가 마구 뒤섞여서 그 낯선 감각 때문에라도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었다.
“그, 그만……!”
육양진이 뒤늦게 물러나며 손을 들고 소리쳤다.
적비연이 이맛살을 팍 찡그렸다.
“그만? 네가 그동안 납치하거나 속여서 데려온 후기지수들도 그리 얘기하던가?”
“무슨 말씀이신지…….”
“말했지? 다 알고 왔다고. 네놈들이 보패인들을 만드는 데 앞장섰다는 걸 모를 줄 알았나?”
순간 육양진의 표정이 급격히 흔들렸다.
정곡을 찔린 그가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신음처럼 목소리를 흘렸다.
“그, 그걸 어떻게…….”
“원래 모든 일이 흔적을 남기는 법이지. 네깟 놈들이 아무리 꽁꽁 숨겨도 드러날 건 드러나게 되어 있는 법이라고.”
이쯤 되자 육양진도 눈치가 있었다.
창신문의 위세를 보여서 기를 꺾으려고 했는데, 오히려 창신문도 전원을 갖다 바친 꼴이 되지 않았나?
그가 털썩 무릎을 꿇으며 포권했다.
“맹주……! 용서해 주시오! 맹세컨대 우린 천림주의 음흉한 뜻을 제대로 알지 못했소. 그저 흑도를 꺾기 위해 정도의 힘을 키우는 일이라고만 생각했소! 그가 천벌전 따위를 꾸미고 있을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소!”
“그래, 그건 믿어주지.”
“하면……?”
“아무리 그래도 후기지수나 죄 없는 사람들을 납치해서 보패인으로 만들거나 그 재료로 사용한 죄는 죽어 마땅하지 않겠나?”
“맹, 맹주……! 부, 부디 선처를! 용서해 주십시오!”
급기야 육양진이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기 시작했다.
바닥이 벌겋게 피로 물들어갔다.
적비연이 한숨을 내쉬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알았다. 용서해 주마.”
“정, 정말이십니까?”
“물론. 그게 다 정도인들을 위해서였다니까 인정해 주지. 그런데…… 부맹주는 어떨지 모르겠군. 이제 부맹주에게도 용서를 빌어보도록.”
적비연이 미련 없이 몸을 돌리고 나자 극마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도끼눈을 뜨고 있는 흑천련주의 모습을 보니 육양진은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바로 조금 전에 부정한 방법으로 힘을 키워 흑도를 꺾으려고 했다 하지 않았던가?
“흑천련주…… 아니, 부, 부맹주……!”
“어디 씨불여봐, 영감. 방금 뭐라고? 흑도를 엿 먹이기 위해서 힘을 키워?”
“그, 그것이……!”
“할 말 없지?”
“……!”
“할 말 없으면 뒈지든가.”
쉬이이잇, 퍼억!
눈 깜빡할 사이였다.
극마가 수도를 내려치자 정수리가 박살 난 육양진은 그 자리에서 숨지고 말았다.
적비연이 극마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하여튼 인정머리 없다니까.”
“의도한 것 아니었소?”
극마가 황당하다는 듯 묻자, 적비연이 얄미운 표정으로 답했다.
“뭐, 사실 그렇지. 내 손에 더러운 피는 가급적 묻히기 싫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