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 쥐를 잡자
“주군!”
어둠 속에서 창천목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방 안을 서성이던 조관악이 얼른 고개를 들며 물었다.
“어찌 됐는가!”
하지만 그는 이미 질문을 던지면서도 어느 정도 대답을 짐작하고 있었다.
설마 했던 일이 벌어졌으리라는 것을.
믿을 수 없게도 문도들을 전부 끌고 간 장로회주가 강호맹주에게 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을 부르는 창천목주의 목소리가 여느 때와 달랐기에.
“장로회주께서 당하셨습니다.”
“아……!”
조관악이 비틀거리면서 탁자를 짚었다.
하루아침에 패가망신한다더니.
지금 창신문이 딱 그 꼴이 아닌가?
지금까지 어떻게 키워온 창신문이던가?
가후의 은밀한 지령을 따르면서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고 자행해 왔다.
숱한 후기지수들에게 온갖 몹쓸 짓을 하고, 또 자신을 찾아와서 사정하는 유가족들의 염원을 사골처럼 우려먹으며 재물을 쌓고 세력을 키웠다.
창신문을 무한제일문이 아니라 강호제일문으로 키울 수만 있다면 어떤 구정물도 덮어쓸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데……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겪게 생겼다.
이게 다…….
‘적비연……! 벽력적가주! 이 개새끼!’
새파랗게 어린 새끼였다.
애초에 그의 관심 밖이었던 인물이다.
굳이 따지자면 만검세가를 오히려 더 견제해 왔다.
그런데 엉뚱한 놈이 갑자기 튀어나와서 강호에 혼란을 부추기다니!
온갖 핑계를 대면서 천벌전에서 빠진 것도 훗날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였는데!
물론, 천벌전에서 빠진 것은 신의 한 수이긴 했다.
그러지 않았다면 지금쯤 창신문도 다른 문파들처럼 반토막이 나 있었을 테니까.
게다가 그 미친 천림주가 모든 강호인을 죽이려고 할 줄이야 누가 알았을까?
만약 천벌전에서 천림주가 이겼다면 창신문은 곧 멸문을 당했을 테지.
한데 기적처럼 무림맹과 흑천련이 협력하여 이겼으니, 이제는 새 시대에서 새로운 힘을 키울 일만 남았다고 여겼는데…….
’“적비연 이 씨부랄 놈! 그놈 혼자더냐?”
“아닙니다. 강호맹의 수뇌부가 총출동한 듯했습니다.”
“수뇌부들이 모두?”
“예, 주군.”
“그럼 그렇지. 놈이 뒤를 믿었구나. 그놈에 대한 소문도 어쩌면 그 수뇌부들이 만든 것일지도 모르지.”
창천목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들어오는 보고에 의하면 강호맹주 적비연이야말로 정말 무서운 존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의 주인에게 그런 말로 설득해 봐야 소용이 없다.
차라리 지금은 저렇게 오해를 해서라도 빨리 몸을 빼낼 방도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조관악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물었다.
“강호맹주가 얼마나 알고 있는지 파악됐느냐?”
“그건 의외로 어렵지 않게 파악됐습니다. 강호맹에서 그 과정을 애써 숨길 의도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흥,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건가?”
“주군, 조심하셔야겠습니다.”
“시끄럽다. 놈이 어찌 우리에 대해 알아냈는지나 말해 봐라.”
“일단 정사화합 반대자들의 행세로 꾸민 도발 행위가 허위라는 걸 진작 알아낸 것 같습니다.”
“과연 만통지로군. 교패도 군사로 있다고 했으니 그럴 만하지. 그래서?”
“그들이 신룡당에서 심어둔 감시자를 찾아냈습니다. 공사장 인근 기루에서 일하는 기녀인데…….”
“기녀를 족쳐서 신룡당을 알아내고, 신룡당을 다시 족쳐서 본 문의 정체를 알아냈다?”
“예, 주군.”
조관악이 주먹을 쥐더니 이를 빠득 갈았다.
“한심한……! 다들 뚝심이 없군. 짓밟혀도 잡초처럼 일어나려면 끈질긴 인내력이 있어야 하거늘!”
“주군, 피하셔야 합니다.”
“암동(暗洞)으로 들어가겠다. 모든 기관을 작동시키고 어떻게든 막아. 못 막겠거든 시간이라도 최대한 끌도록.”
“존명!”
곧 기척이 사라지자 조관악은 벽에 걸린 환도 한 자루를 들고는 몸을 돌렸다.
그가 선반으로 다가가 가장 오른쪽에 있는 그릇 하나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러자 육중한 소리가 울리면서 벽면이 스르르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암동으로 가는 입구.
물론 단순히 선반의 그릇만 돌린다고 기관이 작동하는 것은 아니다.
그릇에 적당한 공력을 일정 시간 동안 불어넣지 않으면 기관은 절대 작동하지 않는다.
그러니 강호맹주 뿐만 아니라 그 할아비가 오더라도 암동 입구는 절대 발견할 수 없으리라.
‘내 야망을 짓밟은 놈. 두고 보자. 반드시 네놈에게 복수를 하마.’
조관악이 한기를 풀풀 날리며 벽면 안쪽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자 ‘구구궁’ 소리가 나면서 곧 벽면이 돌아가며 닫혔다.
* * *
“여긴…… 왜……?”
노상천이 고개를 꺾어 들고 창신문의 현판을 올려다보았다.
웬만한 궁궐 입구만큼이나 높고 커다란 문.
그 현판에는 ‘대창신문’이라는 글씨가 자랑스럽다는 듯 차지하고 있었다.
노상천이 고개를 돌리고는 적비연의 눈치를 살폈다.
정말이지 오늘 하루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강호맹주가 창신문의 대주를 벌레 죽이듯 하더니, 조금 전에는 장로회주마저 죽였다.
뿐만 아니라 수백 명의 창신문도들을 사로잡아 압송해 버렸다.
그러고 도착한 곳이 창신문.
대부분의 무인들이 풍랑객잔에서 죽거나 사로잡혔기 때문에 문 내에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듯했다.
마침 문지기 둘이 걸어 나와 적비연을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이오?”
“비켜라. 너희 주인에게 볼일이 있다.”
적비연이 태연하게 말을 하자 문지기 둘이 미간을 좁히고는 서로를 보았다.
그들이 아직 풍랑객잔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지 못한 게 분명했다.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오셨소? 썩 물러가…….”
퍼억!
“컥!”
적비연이 휘두른 손찌검에 덩치 큰 문지기 한 명이 그대로 종잇장처럼 날아가 구겨졌다.
눈이 퉁방울처럼 튀어나온 다른 문지기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적비연이 그를 돌아보고는 싸늘하게 일렀다.
“너도 개길 거냐?”
“잠, 잠, 잠시만……!”
다른 문지기가 쓰러진 문지기를 보면서 엉거주춤 물러났다.
한편 이 과정을 지켜보던 노상천은 안절부절못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창신문 의협대주가 자신을 업신여기고 무례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겨우 그런 이유로 무한제일문을 몰락시키려고 하다니.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겠지.
아무리 강호맹주가 젊고 혈기가 넘친다고 한들 고작 그런 이유로 이러진 않을 터다.
하면 무림맹 시절 창신문이 어떤 부정한 짓을 저질러 그에 대한 응징을 하러 온 것인가?
그러다가 우연히 자신을 찾아온 의협대주를 알게 된 것이고?
그렇다면 대체 자신을 여기까지 끌고 온 이유가 뭔가?
오로지 딸의 행방만 알면 그만인데.
뭐가 뭔지 도통 모르겠다.
어쨌거나 몸을 돌린 문지기가 막 문 안으로 들어가다가 우뚝 멈춰 섰다.
문 안쪽으로 넓게 펼쳐진 마당에 수십 명의 무인들이 흉흉한 투기를 드러내며 도열해 있었던 것.
“어어……?”
문지기가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데, 그들 중 문주를 호위하는 자가 성큼성큼 앞으로 나섰다.
“강호맹주께서 본 문에는 무슨 용무이신지요?”
적비연이 허락도 받지 않은 채 대문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그 뒤를 따라 노상천도 눈치를 살피며 들어갔다.
적비연이 히죽 입매를 치켜 올렸다.
“날 아는 걸 보니, 내가 왜 왔는지도 이미 알 것 같은데?”
“제가 독심술을 부리는 것도 아니고, 귀하신 분이 예고도 없이 행차하셨으니 그 연유를 어찌 알겠습니까?”
중년의 호위가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러자 적비연이 냉랭한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귀한 분이 오셨는데 네가 누군지도 말 안 하냐?”
“이런. 제가 결례를 범했군요. 장문인을 호위하고 있는 범여(范與)라고 합니다.”
“범여. 창신문주 호신위란 말이지?”
“그렇습니다만.”
“주인을 지켜야 할 개가 주인 없이 짖고 있다는 건…… 주인이 그 개새끼를 버렸다는 말이군.”
“…….”
시종 싸늘한 표정을 유지하던 범여의 표정이 순간 일그러졌다.
노상천은 안절부절못하면서 적비연의 눈치만 살폈다.
범여는 의협대주와 비교할 대상이 아니다.
그는 초절정 칠 단에 이르는 초고수다.
만약 의협대주 정도로 생각하고 섣부른 도발을 하면 큰코다칠 수도 있는 상대.
더구나 지금은 강호맹의 수뇌인들도 대동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과 단 둘이 온 게 아니던가?
[저어…… 맹주님 일단은 돌아가신 후에…….]
노상천이 전음을 흘렸지만, 적비연은 오히려 말을 멈추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네 주인은 식솔들마저 내팽개치고 꽁무니를 말고 줄행랑을 쳤다는 뜻이겠지.”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후우우우웅.
범여의 전신에서 살벌한 기운이 뻗쳐왔다.
적비연이 그런 범여를 물끄러미 보다가 노상천에게 말을 건넸다.
“노 문주.”
“예, 맹주님.”
“딸의 행방을 알고 싶다면 여길 반드시 짚어야 하오.”
“……!”
그런 것이었나!
적비연의 속내를 알고 나자, 노상천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오히려 적비연보다도 훨씬 도발적인 눈빛으로 범여를 노려봤다.
그간 딸을 찾아달라며 애걸복걸 매달린 곳이 바로 창신문이지 않던가?
그들의 역량이라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한데 딸의 행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곳이라니!
지금껏 자신을 농락했단 말인가?
적비연이 범여에게 성큼 다가섰다.
“순순히 투항하면 목숨은 살려주지. 그저 주인이 짖으라는 대로 살았을 뿐이니까. 하나 기회를 걷어찬다면 자비는 없다.”
“맹주. 당신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었소만 나 또한 만만치는 않소. 아무래도 내 소문은 못 들었나 보오.”
“기어이 벌주를 마시겠다면야.”
팟!
적비연이 순간 몸을 날리자, 범여가 칼을 뽑아 들며 소리쳤다.
“쳐……! 컥!”
그는 명령을 마저 맺지 못했다.
적비연이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그의 검이 먼저 날아와 범여의 목을 꿰뚫은 것이다.
정말이지 빛살 같은 속도.
“……라……!”
콰당……!
눈을 부릅뜬 범여가 그대로 고꾸라지더니 다시는 움직이지 못했다.
“어어……?”
마당에 가득한 수십 명의 무인들이 주춤거리면서 서로 눈치를 살폈다.
초절정 후단에 이른 범여가 단 일격에 당하다니!
어쩌면 강호맹주에 대한 소문이 전부 사실인 게 아닐까?
그들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는데, 적비연이 차분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주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란 말을 들었을 테지. 하지만 보다시피 그건 개죽음에 불과하다. 정 죽고 싶다면 죽여주마. 하지만 삶의 의미를 한 번 찾아보겠다면 투항해라.”
“……!”
“시간이 없으니 바로 진행하겠다.”
말을 마친 적비연이 범여의 목에서 검을 뽑아내더니 하늘로 던져 올렸다.
다음 순간,
슈슈슈슈슈슈슉!
“엇!”
“허억!”
장내에 포진해 있던 무인들의 병장기가 일제히 허공으로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수십 자루의 병장기가 허공에 떠서 구름처럼 운집하자 무인들의 표정이 새파랗게 질렸다.
“소, 소문이…… 사실이었어!”
“병장기를 한꺼번에……!”
창신무도들 중 천벌전에 참여한 자들은 없었지만, 천벌전에 대한 소문은 숱하게 들은 상황.
병장기가 둥실 떠올라서 강기를 머금기 시작하자 그들 모두 오금이 저려 주저앉기 직전이었다.
용기를 내서 적비연에게 달려들던 자들마저 결국은 무릎을 꿇고 투항하기 시작했다.
“맹주님께 칼을 겨눈 죄,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여기저기에서 무릎 꿇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적비연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저만치 우뚝 솟은 건물을 보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노상천이 헐레벌떡 뒤따르자 마침 장문인이 기거하는 창신전(昌新殿)이 나타났다.
“맹, 맹주님…… 여긴……?”
“암동으로 이어지는 기관이 설치되어 있을 거요. 하지만 쥐새끼가 도망을 갔으니 좀 서둘러야겠소. 기관장치 찾아내는 재미는 다음으로 미룹시다.”
말을 마친 적비연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수십 자루의 병장기가 강기를 머금은 채 쏜살같이 내려 꽂히는 게 아닌가?
쉬쉬쉬쉬쉬에에엑!
꽈과과과과과과아앙!
천지가 격동할 만한 소음과 진동이 울리고, 자욱한 먼지가 구름처럼 솟아올랐다.
투항한 창신문도들이 저마다 입을 딱 벌리고는 그 자리에서 꿈쩍을 하지 못했다.
그들 모두의 입에서 투항하길 잘했다는 안도의 숨이 흘러나왔다.
“엇! 저기에……!”
노상천이 한 곳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완전히 초토화된 창신전의 터 한쪽에 시커먼 구멍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었다.
조관악이 절대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했던 기관장치 뒤편의 암동 입구였다.
적비연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걸음을 옮겼다.
“갑시다. 쥐새끼를 잡으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