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 천인혈기(天人血氣)
쿠그그그그긍……!
육중한 굉음이 울리면서 천장과 바닥이 떨어댔다.
이제 막 암동으로 들어선 조관악이 흠칫 몸을 돌리고는 통로 쪽을 돌아보았다.
‘설마……?’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린다.
‘이 미친 것들이 벽력탄을 써서 창신전을 통째로 날려 버린 건가?’
생각해 보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
강호맹에서 수뇌부까지 무한으로 왔다면, 아예 작정을 했을 테니까.
물론 벽력탄 한두 개 정도론 기관장치가 부서지진 않으리라.
하지만 수십, 수백 개의 벽력탄을 터뜨렸다면 암동으로 이어지는 비밀통로가 드러났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서둘러야겠군!’
어금니를 뿌득 간 조관악이 몸을 돌렸다.
암동의 구조는 단순했지만 괴기스럽기 짝이 없었다.
커다란 원형의 터에 시신을 담은 것처럼 보이는 석관(石棺)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고, 벽면에도 석관이 빡빡하게 세워져 있었다.
각 석관은 여러 가닥의 가느다란 관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그 안으로 공기나 액체가 흐르는 듯했다.
그리고 그 가느다란 관은 다시 공동 한 가운데에 자리 잡은 커다란 금속 구조물로 이어졌다.
마치 그릇을 닮은 금속 구조물에는 검붉은 액체가 가득 채워져 있었다.
“칫, 올 때마다 적응이 안 되는군.”
조관악이 소매로 코를 가리면서 금속 구조물에 다가갔다.
구조물에 담긴 검붉은 액체에서는 숨 쉬기도 힘들 만큼 고약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얼핏 피비린내 같기도 했고, 오물 같기도 했으며, 탕약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쨌거나 결코 좋은 냄새도 아닐뿐더러, 금속 구조물에서 느껴지는 기운만으로도 전신이 오싹해질 정도로 기분 나빴다.
마치 욕조처럼 보이는 그 구조물 앞에 선 조관악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검붉은 액체를 내려다보았다.
“여길…… 들어가야 하는 건가?”
정말 내키지 않지만 방법이 없다.
어차피 강호맹주가 이곳까지 들이닥치면 자신은 살기 힘들 것이다.
암동 가득한 증거들이 자신을 죽게 만들 것이다.
그럴 바엔 주화입마를 각오하고서라도 여길 들어가는 게 나으리라.
결심을 굳힌 듯 조관악이 주먹을 콱 말아 쥐고는 몸을 휙 날렸다.
첨벙!
이내 그의 하반신이 검붉은 액체에 잠겨들었다.
기분 나쁜 액체가 몸에 달라붙는 것이 느껴진다.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허리까지 액체로 잠겼지만 여전히 망설임은 남아 있다.
천림주는 이 액체를 천인혈기(天人血氣)라고 불렀다.
젊은이들의 내공과 선천지기를 혈액에 녹여 담은 것.
거기에 천림주가 만든 특별한 영약도 첨가됐다.
평범한 사람도 초인의 경지로 만들어준다는 천인혈기.
하나 천인혈기를 잘못 취하면 주화입마에 걸릴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만 한다.
허리 아래쪽이 저릿저릿하다.
엄청난 압력에 감각이 둔해지는 것 같다.
그때,
키이이잉! 철컹!
아득하게 기관장치가 작동하는 소리가 들린다.
한데 소리가 시원찮은 걸 보아서는 제대로 기관이 작동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제 망설일 시간은 없다.
‘어차피 죽을 목숨! 최후의 수단이다!’
다시 각오를 다진 조관악이 천천히 천인혈기 안으로 몸을 담기 시작했다.
가슴을 지나 목이 잠기고, 이어서 귓불이 잠기고 정수리 끝까지 잠겨갔다.
그의 모습이 천인혈기 안에 완전히 잠겨 사라지자 공동 안은 생명이라곤 없는 것처럼 적막해졌다.
잠시 후 금속 구조물에서 묘한 변화가 생겼다.
슈우우우욱……!
구조물에 가득 담긴 천인혈기 한가운데에 소용돌이 물길이 생겨나더니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한 것이다.
점점 줄어드는 천인혈기!
마침내 바닥을 드러낼 만큼 줄어들자 다소곳하게 누워 있는 조관악의 모습이 보였다.
전신이 피에 젖은 것처럼 검붉게 물든 그가 갑자기 두 눈을 번쩍 떴다.
“크허어어억!”
상체를 벌떡 일으킨 그가 관절을 기이하게 꺾으며 바닥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크으으으읍! 끄아아아악!”
비명이 절로 터져 나왔다.
체내의 기운이 마구잡이로 설치는 것 같다.
뒷목이 불룩해졌다가, 독개구리처럼 목 양쪽이 불룩 튀어나오기도 한다.
가슴과 배, 허벅지와 종아리에서 연신 폭기가 형성되면서 피부가 찢어질 듯 불룩해진다.
퍽!
“크악!”
퍽! 퍼퍼퍽!
“으아아악!”
천인혈기를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탓일까?
그의 전신이 마구 뒤틀리면서 몸 곳곳이 터져 나갔다.
살갗이 찢어지면서 폭기가 터질 때마다 피가 한 움큼씩 뿌려지면서 바닥이 타들어 가는 소리를 냈다.
퍽! 퍼퍼퍼퍽!
치이이이익……!
“크악! 으아아아아아악!”
어느 순간 그가 허리를 꺾어들면서 광기에 찬 비명을 터뜨렸다.
콰아아아아아아아!
찰나 그의 전신에서 엄청난 기가 폭발하면서 금속 구조물을 산산조각 내며 튕겨냈다.
콰다다다다당탕탕!
금속 구조물이 순식간에 박살 나자 거기에 연결되어 있던 관이 피를 뿌리며 제멋대로 춤을 추었다.
츄츄아아아아아!
곧이어 꽉 닫혀 있던 석관의 덮개가 저절로 열리기 시작했다.
그그그그그긍……!
쿠구구구궁……!
한차례 소란이 일어난 후, 관 속에 들어 있던 자들이 스르르 상체를 일으켰다.
누군가 이 모습을 보았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했으리라.
관 속에서 깨어난 자들은 정말이지 시체나 다름없었다.
깡마른 몸에 하얗게 센 머리카락, 손톱과 발톱, 치아가 모두 빠져서 살아 움직이는 밀랍 같았다.
게다가 가늘고 날카로운 관이 그들의 몸 곳곳에 박혀 있었던 것인지, 몸 뒤쪽으로는 구멍 난 상처가 가득했다.
아마도 그 상처 부위에 가느다란 관이 연결되어 있었으리라.
그들 모두 이지를 잃은 듯 멍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릴 뿐이었다.
한편 천인혈기를 모두 흡수해 버린 조관악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서 있다가 이내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킥킥킥……!”
그의 어깨가 연신 들먹이더니 이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곧이어 그의 머리카락이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츳……!
“크하. 기분 최고구나!”
혀를 길게 빼문 조관악이 양팔을 벌리더니 황홀한 듯 중얼거렸다.
그가 광기에 찬 시선으로 공동을 한 차례 훑어보다가 이내 손가락을 튕겼다.
따악!
순간 움찔거린 밀랍 같은 인간들이 스르르 몸을 일으키더니 관에서 걸어 나왔다.
“으흐흐흐. 그래, 너희들과 나는 하나로 연결된 몸. 손님을 맞이할 시간이다! 으히히히힉!”
* * *
저벅저벅.
적비연은 어두컴컴한 통로를 망설임 없이 걸어갔다.
그 뒤를 노상천이 바짝 따라붙었다.
창신전 지하에서 이어지는 통로였다.
일단 정황상 보면 이 길이 딸의 행방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창신문……! 그동안 날 속이다니! 어찌 이리 사악할 수 있단 말인가!’
다시 생각해도 이가 갈린다.
하지만 어쩌랴.
자신이 약해서 일어난 일이 아니던가?
딸에게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돌이킬 수도 없는 일.
지금부터라도 마음을 다잡고 딸의 생사와 행방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어두운 통로를 따라 얼마나 걸었을까?
키이이잉.
어디선가 기관이 작동하는 소리.
하지만 이번에도 기관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는지 ‘절그덕’ 소리를 내면서 미약한 울림만 전해졌다.
철컥……! 키이이잉. 철컥……!
기관장치 어딘가가 방해물에 걸린 모양이다.
벌써 네 번째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적비연이 쏟아부은 강기의 폭우는 정말이지 인간의 힘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대단했다.
그런 충격을 받았으니 아무리 지하에 매립된 기관장치더라도 제대로 작동될 리가 없으리라.
적비연에 대한 소문이 과장되었다고?
천만에!
소문이 오히려 과소되었다.
적비연은 인간의 한계를 아득히 뛰어넘은 자였다.
“……고맙습니다.”
적비연의 등을 보다가 무심코 말이 튀어나왔다.
적비연은 걸음을 멈추지도, 대답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아주 잠깐 움찔거린 반응을 보였다.
그걸로 충분했다.
노상천은 자신의 진심이 전해졌음을 알았으니까.
그렇게 다시 얼마나 걸었을까?
적비연이 걸음을 멈추더니 스르릉 검을 뽑아 들었다.
“내 뒤로 물러서시오.”
“예.”
노상천이 마른침을 삼키고는 적비연 뒤로 물러났다.
무위 차이가 워낙 크다 보니 자존심 따위는 생각지도 않았다.
잠시 후,
“끄아아아아악!”
통로 깊숙한 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려왔다.
그 비명 소리가 워낙 끔찍하게 들려서 소름이 끼칠 지경이었다.
“이건……!”
“아무래도 조 문주가 마지막 발악을 할 모양이오.”
조 문주……!
분명 창신문주를 말하는 것이리라.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통로 안쪽에서 이처럼 끔찍한 기운이 전해진단 말인가?
지옥에서 야차라도 데려온 것일까?
어지간한 마기나 사기보다도 훨씬 지독한 기운이 풀풀 휘날리고 있다.
시커먼 통로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만 같다.
죽고 싶으면 이 아가리 속으로 걸어오라!
딸의 행방을 찾기 위해 독하게 마음을 먹었지만, 그 각오조차도 흔들어 버릴 만큼 사이한 기운이 물씬 풍겨져 온다.
“맹, 맹주님……?”
뭔가가 다가오고 있다.
기척이 여실히 느껴진다.
자박…… 자박……!
‘끄음. 한 명이 아니야. 최소 열…… 아니, 스물? 서른? 그 이상이야!’
마침내 한 무리의 인영이 통로 끝에 모습을 드러냈다.
“맙소사! 저게 대체……!”
노상천이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통로를 걸어오는 무리들.
백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그들은 살가죽이 뼈에 달라붙은 시체나 다름없었다.
찰나,
“크아아아아!”
타다다다닷!
밀랍 같은 인간들이 괴성을 내지르면서 쏜살같이 달려오는 것이 아닌가?
“으헉!”
그 광기 서린 모습에 노상천이 저도 모르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적비연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바닥을 찼다.
슈파파파파팟!
적비연의 움직임은 그야말로 빛살 같았다.
일검에 일살.
아니, 일살이라고 할 수 있을까?
비쩍 마른 적들에게서는 생명력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기운 그 자체가 움직이는 듯하다.
마치 이기어검술로 검신이 움직이듯이.
그러거나 말거나 적비연은 달려드는 적들의 목을 가차 없이 베어갔다.
쉬쉬쉬쉬쉬쉬쉭!
마침내 적비연의 손을 떠난 검이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제멋대로 움직이며 적을 도륙했다.
이기어검이다.
목이 잘리거나 상하반신이 갈라지거나 몸이 세로로 양분되거나.
끔찍한 학살의 현장.
통로에 시체가 쌓여간다.
하나 잔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적비연에게 달려드는 자들에게서 인간성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기에.
그저 짐승이나 밀랍 인형을 베어 버리는 것 같다.
그렇게 일방적인 학살이 진행되던 중에 노상천의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저 목걸이는……!’
순간 노상천의 눈동자가 퉁방울처럼 커졌다.
“안 돼엣!”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노상천이 벌떡 일어나서 적비연을 지나쳐 달렸다.
적비연이 재빨리 검을 회수하자, 노상천이 마구잡이로 검을 휘두르며 시체나 다름없는 인간들을 베어갔다.
“으흐흑! 연아! 하연아! 아비다! 아비가 왔다!”
절규에 가까운 외침에 적비연이 눈살을 구기고는 시선을 옮겼다.
노상천이 향하는 곳.
그곳에는 초점 잃은 눈으로 노상천을 바라보는 여인이 있었다.
그녀 역시 다른 자들과 마찬가지로 이지를 상실한 듯 보였다.
마침 노상천이 마지막 방해자를 검으로 베어 버리고는 앞에 선 노하연에게 달려갔다.
그가 두 팔을 활짝 벌려 안으려는 순간,
덥석!
“……?”
누군가의 손길이 목덜미를 낚아채더니 몸이 뒤로 훅 날아가는 것이 아닌가?
“헉!”
콰당탕탕!
한참이나 구르며 튕겨 나간 노상천이 벌떡 일어나 적비연을 향해 외쳤다.
“이게 무슨 짓이오!”
“정신 차리시오. 죽고 싶지 않으면.”
적비연이 냉정하게 말하자, 노상천이 흠칫거리고는 노하연을 바라보았다.
하얗게 센 머리카락, 비쩍 마른 얼굴, 옥빛 목걸이, 귓불에 난 점.
틀림없이 자신의 딸 노하연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수도를 뻗고 있었다.
만약 적비연이 조금만 늦게 노상천을 잡아당겼어도 그 수도에 노상천의 심장이 뚫렸으리라.
“그래도…… 그래도 저 아이는 내 딸입니다!”
“안타깝지만 장문인의 딸은 이미 운명을 달리한 것 같소.”
“그게 무슨! 바로 눈앞에 있지 않……!”
“이미 혼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 않소?”
“……!”
“짐작은 했을 텐데. 이자들…… 산 자들이 아니오. 혼을 잃은 망자들이오.”
“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내 딸 하연이……! 하연이가 망자라니!”
“그저 사특한 기운으로 움직이는 인형이나 다름없소.”
“그런…… 내 딸 하연이가 강시라도 됐단 말입니까?”
적비연이 착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지.”
그러자 통로 안쪽에서 괴기스러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크히히히힉! 눈물 나는 부녀상봉이로구나. 본 문이 원을 이뤄주었으니 노 문주는 감사히 여겨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