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 심검(心劍)
노상천이 움찔거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통로가 끝나는 지점.
공동으로 보이는 곳에 백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사내가 양팔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집에 온 것을 환영한다는 듯이.
처음에는 그가 누군지 알아보기 어려웠다.
전신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피.
멀지만 여기까지 느껴지는 악취.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발.
광기와 노기가 뒤섞인 표정까지.
정말이지 지옥에서 야차가 올라왔다고 해도 고개를 끄덕였으리라.
하나 목소리 때문에 그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끄음…… 조 문주……!”
노상천이 주먹을 꾹 말아 쥐고는 부들부들 떨었다.
백발이 된 조관악이 그런 노상천을 보고는 히죽 웃었다.
“오랜만에 딸을 본 소감이 어떠신가? 크히히힉!”
“조 문주……! 당신이 어찌 나에게……!”
“어엉? 뭐야? 그 눈빛은. 전혀 감사하는 눈빛이 아니잖아. 어떤 모습이든 좋으니 딸내미 행방만 반드시 찾아달라고 질질 짜며 매달리더니.”
“조 문주!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아, 이래서 없는 집 새끼들의 의뢰 따위는 들어줄 게 못 된다니까. 기껏 딸내미를 찾아줬더니 욕이나 하고 자빠졌네. 어이, 노상천. 인간이 아무리 간사하다지만 뒷간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태도가 그렇게 싹 바뀌면 쓰나?”
“당신은 내 딸을 이용한 것도 모자라 날 속였잖소!”
“시끄러워! 어쨌거나 찾아줬잖아! 보라고? 자네의 예쁜 딸내미를. 어서 눈물의 상봉을 재개하란 말이야.”
“이 미친 새끼! 용서할 수 없다아악!”
파밧!
노상천이 비명과 같은 외침을 내지르면서 포탄처럼 튀어나갔다.
그는 전신의 기운을 용천혈로 쏟아내며 펼칠 수 있는 최대한의 경공으로 조관악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압!”
눈물에 젖은 기합성이 터져 나가면서 노상천이 검을 휘둘렀다.
그는 기도했다.
제발 이 일격이 조관악의 목에 닿기를.
딸을 구하지 못한 한을 이렇게라도 풀 수 있기를.
조관악이 쓰러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맹렬히 비난을 퍼부을 수 있기를!
하지만 검기가 닿기 직전까지 조관악은 비소를 거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비웃음은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검기가 막 목 줄기에 닿으려는 찰나,
스팟!
“끄헛!”
앞을 가로막은 노하연을 보고는 급히 공력을 회수했다.
하지만 너무나 가까웠던 거리.
촤악!
“하연아!”
검기가 그대로 노하연의 왼팔을 잘라냈다.
반면 무리하게 공력을 회수하는 바람에 혈맥이 뒤틀린 노상천이 울컥 피를 토해냈다.
“쿠웁!”
주르르륵!
한 움큼의 피를 토해낸 노상천이 헐레벌떡 노하연에게 달려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아아……! 어떻게……! 네 팔이……! 우리 딸 팔이……! 아아아아……!”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고통스러워야 한단 말인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딸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저기 서서 비웃는 악마 같은 자 때문에 이리도 괴로워야 한단 말인가?
“끄아아아아!”
그때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하는 노상천 앞으로 노하연이 불쑥 다가왔다.
곧이어,
슈우우욱!
“노 문주!”
적비연이 얼른 소리쳤지만 이미 노하연의 수도가 노상천의 옆구리를 깊숙이 찌르며 들어왔다.
“커억!”
고통으로 입을 딱 벌린 노상천이 뺨을 부들부들 떨며 노하연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이내 그의 표정은 한 없이 부드러워졌다.
“우리 딸…… 많이 무서웠겠구나.”
그가 덜덜 떠는 손을 들어 비쩍 마른 하연의 얼굴을 감아쥐었다.
하지만 노하연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혼이 빠져나간 노하연은 더 이상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웠기에.
그저 노상천의 미련이 딸의 없는 혼까지 붙들고 있을 뿐.
옆구리가 수도에 뚫린 채로 노상천이 노하연을 와락 끌어안았다.
“하연아……! 하연아! 아비다! 하연아!”
절규에 가까운 외침이었지만 노하연은 여전히 멍한 표정일 뿐이었다.
“키키킥! 크하하하하!”
뭐가 그리 즐거운지 조관악이 하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다음 순간,
슈팟!
그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부녀 앞에 나타났다.
적비연이 막 몸을 움직이려고 하자,
“동작 그만.”
싸늘한 조관악의 목소리가 적비연의 발길을 잡아 끌었다.
조관악이 쥔 검이 부둥켜안고 있는 노상천과 노하연의 가슴께를 노리고 있었다.
약간의 힘만 가해져도 두 사람은 단칼에 쓰러질 터.
“강호맹주. 자네가 강하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나는 더 강하다.”
“여전히 날 과소평가하는군.”
“아니. 충분히 널 제대로 평가한다. 보아하니 천해경에 이른 듯하군. 하나, 이 몸은 천해경도 아득히 뛰어넘었다!”
찰나 조관악이 노상천과 노하연을 손바닥으로 탁, 떠밀었다.
가볍게 민 것 같은데도 노상천과 노하연은 서로 부둥켜안은 채로 적비연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슈우우우우욱!
동시에 조관악이 바닥을 차면서 그 뒤를 바짝 쫓았다.
조관악의 눈빛이 서늘한 빛을 번쩍 뿜었다.
‘천해경이라. 훗! 이 몸도 이젠 천해경에 이르렀다. 네놈이 노상천을 구하기 위해 잠시라도 망설였다가는 내게 당하고 말 거다!’
슈아아아아악!
조관악이 든 검에서 강기가 맺혀갔다.
반면 적비연은 아무런 기운도 발동시키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자칫하면 노상천이 방패가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니.
대신 적비연은 왼손을 뻗어 최대한 부드럽게 노상천을 받아냈다.
휘리리릭!
적비연이 노상천을 받으면서 팽이처럼 회전하자 조관악이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크하하하! 멍청한! 천해지경에 이르면 무엇하느냐! 사사로운 인정에 얽매여 대업을 이루지 못할 운명인 것을!”
일갈과 함께 강기가 허공을 스쳐 날아갔다.
슈카아악!
섬광이 어둑한 공동을 통째로 베어 버린 듯하다.
동시에 적비연의 잘려 나간 머리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툭, 데굴데굴……!
“맹, 맹주니임!”
노상천이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는 절규했다.
하지만 머리가 잘린 사람이 다시 달아날 리는 없는 일.
“크흐흐흐. 노 문주, 이제 보니 자네도 꽤 쓸모 있는 인간이었군. 감사의 뜻으로 자네는 특히 딸과 함께 있을 시간을 주지.”
말을 마친 조관악이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 복받쳐 흐느끼는 노상천의 울음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통로를 따라 밖으로 나오고 나니 초토화된 공터가 나타났다.
“야단법석을 떨었군.”
피식 웃음이 나온다.
천해경에 올라서 기껏 한다는 짓이 기관 장치를 발견한 게 고작 아닌가?
“스으으읍, 하아아아아!”
상쾌한 공기!
이제 그럼 강호맹을 찾아가 볼까?
세상을 놀라게 한 강호맹주를 죽였다.
이제 세상이 자신을 보고 놀랄 차례다.
“쿡, 쿠쿡, 크하하하하하!”
조관악이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일인지하 만인지상!
그토록 염원하던 자리!
자신의 야망을 뛰어넘은 경지!
드디어 여기까지 도달한 것이다.
그렇게 한참이나 웃음을 터뜨리는데, 문득 앞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뭘, 그렇게 처웃고 있나?”
“음?”
무심히 시선을 내린 조관악은 순간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이, 이 무슨……! 여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분명 자신은 지하 통로를 빠져 나와서 초토화된 창신전 터에 서 있지 않았던가?
한데 거짓말처럼 주변 환경이 바뀌었다.
여전히 그가 서 있는 곳은 지하 암동!
그리고 앞에서 싸늘한 눈빛을 보내며 한심하게 쳐다보는 자는 다름 아닌 적비연!
“어, 어떻게 네놈이……?”
“가슴에 구멍이 뚫린 채로 잘도 처 웃는군.”
다시 힐난이 이어졌다.
뻣뻣하게 굳은 목을 숙여서 가슴께를 내려다보니 정말로 검신이 가슴을 관통하고 있는 게 아닌가?
“크으읍!”
뒤늦게 고통을 느끼고는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다행히 심장은 비껴 맞았다.
그때 자신 앞에서 털썩 쓰러지는 두 사람.
“……!”
조관악은 다시 경악한 표정으로 그들을 보았다.
적비연과 자신 사이에서 마찬가지로 검신에 꿰뚫렸던 자들이 있었다.
바로 노상천과 노하연.
조관악이 눈을 부라렸다.
“이, 이 미친놈……! 노상천을 관통해서 나를 찌른 것이냐?”
“왜? 그럼 안 되나? 뭐 굳이 그럴 필요까진 없었지만, 어차피 노 문주도 진정시켜야 해서 말이지.”
“진정시켰다고……? 사람을 죽여 놓고?”
“걱정 마라. 노 문주는 급소를 피해서 관통한 거니까. 목숨에는 지장이 없어.”
“말, 말도 안 되는……!”
그 찰나의 순간에 급소를 피해서 검을 내질렀다고?
그러고 보니 자신은 대체 어떻게 당한 건가?
분명 적비연의 목을 베어내지 않았던가?
설마……!
‘그게 다 환영이었단 말인가!’
대체 어떤 사술이기에 그 짧은 시간에 환각을 보게 만든단 말인가?
“끄음……! 기문둔갑술이더냐?”
“아니. 그런 건 쓸 줄도 몰라. 은 원주라면 모를까?”
적비연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조관악이 어금니를 뿌득 갈았다.
천인혈기를 모두 흡수하고 미친 듯이 강해졌는데…….
’어째서 눈앞의 이놈은 무섭다는 생각이 들까?
대체 이유가 뭐냔 말이다!
때마침 적비연이 그 대답을 해주겠다는 듯 나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경지가 천해경이라고 했던가? 틀렸다.”
“뭐? 그럼…….”
“네가 본 환각은 내 심공에 당한 것.”
“말도 안 되는 소리! 대체 어떤 심공이기에 모든 현상을 그토록 생상하고 또렷하게…….”
“그래, 네 말대로 너의 모든 감각을 지배했지. 그럼 답은 나온 것 아닌가? 너와 나의 차이가.”
“무슨 개……? 설마……?”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마침 적비연이 그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비릿한 조소를 지었다.
“너의 모든 감각을 지배할 수 있는 경지. 그렇다면 네 목숨은 어떨까?”
“말도…… 안 돼. 정말로 네놈이…… 심검(心劍)의 경지에 이르렀단……!”
“굳이 너에게 잠깐의 환각을 보여준 이유는…… 너도 한 번 희망을 가졌다가 절망에 빠져보라고.”
순간 적비연의 표정이 저승사자처럼 싸늘하게 식었다.
그 무감한 표정에 조관악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지독한 공포를 느끼고 말았다.
“안, 안 돼. 안 돼애애앳!”
“죽어라.”
서걱.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적비연에게는 느껴진다.
어떤 날카로움이 조관악의 명줄을 끊어 버리는 소리가.
마음으로 살검을 부리는 심검의 경지다.
그리고 무공으로 만물을 헤아리는 경지인 만해지경인 것이다.
조관악은 그대로 서서 천천히 눈을 까뒤집었다.
절대적인 명령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마지막까지 미련을 버리지 못해 중얼거리기만 할 뿐.
“죽기…… 싫……!”
쿠우웅!
마침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조관악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최후의 최후까지 살아남아 천번지복을 노리려고 했던 잔당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적비연이 고개를 모로 돌리고는 입을 열었다.
“왔나?”
“쳇, 심검지경이라니. 언제 도달한 거냐? 주인.”
흑천련주의 모습을 한 극마였다.
적비연이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아송과 싸운 직후에.”
“그간 아닌 척했던 거군.”
“딱히 보일 일이 없었던 것일 뿐. 그나저나 너는 말투가 자주 바뀌는군.”
“그래도 주인이라고 고분고분 부르잖아! 사람들 앞에서는 나름 깍듯하게 대한다고.”
“당연히 그래야지. 너는 흑천련주의 몸이니까.”
“그래서 심검의 경지에 이르면서 깨달은 건?”
“남이 어렵게 얻은 걸, 쉽게 빼앗으려고 하면 안 되지.”
“가르침을 나눈다고 닳는 것도 아니잖아!”
“배우고 싶나?”
“그, 그렇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그럴 거다.”
“그럼 스승으로 모시겠느냐?”
“무, 무슨 개소리!”
“주인으로 모시면서 스승은 싫다?”
“흥! 마지막 자존심이라고 해두지.”
“그럼 됐고.”
“알겠다, 사부! 내가 졌다!”
“사부에게 말하는 태도가 그게 뭐지?”
“죄송합니다! 사부! 님!”
“흐음. 구배지례(九拜之禮)를 해야지?”
“아, 아홉 번이나 절을 하라고? 됐어! 안 배우고 말아!”
“그러던지.”
적비연이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기다가 다시 말했다.
“아, 거기 노 문주는 깨워서 잘 달래줘라. 상심이 클 테니까.”
그렇게 적비연이 걸어가고 나자 극마가 제 가슴을 팡팡 치며 울화통을 터뜨렸다.
“어휴! 어쩌다가 내 신세가 이리 된 건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긴 극마가 쓰러져 있는 노상천과 노하연을 물끄러미 보았다.
노상천은 노하연의 사체를 보물 다루듯 꼭 끌어안고 있었다.
죽어서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극마가 고개를 꺾어들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길, 지하라서 그런가? 안구에 자꾸 습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