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무적-300화 (완결) (301/301)

300. 종장(終場)

강호맹 본단이 완공되고 정식으로 출범한 날, 장사에서는 강호 최대의 연회가 벌어졌다.

팡! 삐이익, 팡! 파팡!

상강 위로 화려한 불꽃이 연신 터졌다.

하늘에 불꽃이 피면, 수면에도 불꽃이 함께 피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그렇게 불꽃으로 물든 상강 복판에는 한 척의 거선이 떠 있었다.

어지간한 전각보다도 훨씬 큰 은황선이었는데, 그곳에서도 왁자지껄한 술판이 벌어졌다.

다만 평소와 다른 점이라면 은황선에 올라탄 사람들이 수로채뿐만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평생을 산과 숲에서만 구르던 녹림채 무인들이 한가득 탑승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상석에서는 술이 얼큰하게 취한 투왕이 연신 목청을 높이며 소리 질렀다.

“야! 그러니까 인마, 내가 투황이라고! 너는 수왕! 알겠냐?”

“…….”

“어이! 가는 귀가 먹은 게냐! 대답을 하라니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에는 답을 하지 않는다.”

수황의 싸늘한 대꾸에 투왕의 눈이 뒤집혔다.

“뭐가 어째!”

콰앙!

투왕이 주먹을 내려치자 탁자가 산산조각 나면서 부서졌다.

하지만 근처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으레 있는 일이라는 듯 태연할 뿐.

수황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투왕을 노려보았다.

“배에 상처 나면 죽인다.”

“오냐, 어디 한 번 죽여 봐라! 일어나라.”

“귀찮다.”

“쫄았냐?”

“야생 멧돼지를 보고 쫄 나이는 지났지.”

“뭐가 어째? 아오오!”

투왕이 제 가슴을 탕탕 치며 분통을 터뜨리자 주변 사람들이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한편 그 모습을 뱃머리에서 지켜보던 미계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아, 체통 좀 지키시지. 저러니 녹림이 멸시를 받는 거 아니겠소?”

“풋. 그래도 그래서 녹림다운 것 아닌가요?”

옆에서 동소유가 고운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리며 물었다.

미계수가 피식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겠구려.”

“그러고 보면 당신은 참 녹림 같지 않아요.”

“내가 왜?”

“그러니까…… 뭐랄까, 좀 잘생기기도 했고…… 옷차림도 깔끔하고…….”

동소유가 말을 이어가면서도 낯빛을 붉게 물들였다.

“동 소저.”

“네……? 흡……!”

동소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깜빡였다.

맑은 그녀의 눈에 밤하늘의 불꽃이 담겼다.

팡! 파앙!

폭죽 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리는 것인지, 하늘에서 들리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한참이나 이어진 입맞춤 끝에 미계수가 부드럽게 웃으며 물었다.

“나와 혼인해 주시겠소?”

“미, 미 공자…….”

“부족한 게 많은 놈이지만 노력하리다.”

“하, 하지만…… 저로 괜찮으시겠어요? 저는 뭇 남성들을 유혹해서…….”

“쉿.”

미계수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동소유의 붉은 입술을 가로질렀다.

미계수가 빙그레 웃었다.

“알고 있소. 동쪽 장강 인근의 여인들이 당신을 절경귀녀(絶莖鬼女)라고 부른다는 걸.”

“그, 그런 상스러운 별호는…….”

“하나 그 상스러운 별호가 그 여인들을 지켜주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소.”

“……!”

“여인들을 겁간하는 놈들만 골라서 지옥으로 보낸다는 절경귀녀. 지나간 일은 더 묻지 않겠소. 그저 오늘부터는 그 악한들을 내게 맡겨주시오. 그리고 나만 바라봐 주시오.”

“공자…….”

“나야말로 괜찮겠소? 나는 상단을 약탈하고…….”

“저도 알아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음?”

“당신의 손을 거친 상단들. 대부분 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축적한 곳이죠. 대외적으로는 평판이 좋더라도 비밀리에 악행을 저질렀던 상단들. 제가 모를까 봐요? 당신 별호 중 하나가 천목의적(天目義賊)라는 걸.”

“하하, 부끄럽군.”

“가가…….”

“소저…….”

“사랑해요.”

“나도 사랑하오.”

두 사람이 뜨겁게 끌어안았다.

파앙! 팡!

그때 누군가 소리쳤다.

“엇! 두 분 혼약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우왓! 경사다, 경사야!

대번 은황선에 올라탄 사람들이 난리법석을 떨었다.

당장에라도 칼부림을 할 것 같던 수황과 투왕도 고개를 돌리고는 두 사람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크하하하! 내 아우가 어여쁜 처자를 들이게 됐으니 오늘은 기분 좋은 날이다! 우리 비무는 나중으로 미루지!”

“그러지. 좋은 날인 만큼 마시도록.”

“좋아, 좋아! 그런데 비무는 언제가 좋을까?”

“흐음. 혼례식 행사로 좋겠군.”

“오오! 좋은 생각이군! 저것들 혼례라면 그 정도 행사는 해줄 만하지!”

그러자 미계수가 버럭 소리쳤다.

“혼례장을 피바다로 만들 생각입니까아악!”

“푸하하하하!”

은황선 선상에 웃음소리가 퍼져 나왔다.

그리고 그 웃음소리가 아스라이 닿는 강호맹 본단의 한쪽 전각 지붕.

거기에서도 작은 사랑이 시작되고 있었다.

“커험, 험. 난 정말 사심이 없었다.”

단휘가 연신 헛기침을 하고는 밤하늘을 보며 툭 던지듯 말했다.

“누가 뭐랬냐?”

등을 돌리고 먼 산을 보던 예홍이 예의 그 무감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

“…….”

어색한 침묵.

“커흠. 천벌전에서는 우리가 등을 맞대고 생사를 함께 넘었지.”

“그랬지.”

“…….”

“…….”

다시 어색한 침묵.

기다리다 못해 예홍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왜 불렀어? 할 말 없으면 갈게.”

그녀가 몸을 휙 돌리자, 단휘가 다급하게 목소리를 뱉었다.

“잠, 잠깐! 이거!”

“……?”

예홍이 돌아보니 단휘가 곱게 접힌 비단을 내밀고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선물이다.

‘뭐야? 갑자기…….’

예홍도 당혹감을 지우지 못하고는 얼른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더듬더듬 물었다.

“뭐, 뭐야? 그게…….”

“아…… 음…… 오다 주웠다.”

“주운 걸 왜 날 줘? 너나 가져.”

“아, 아니 그게……! 사, 사실은…… 샀다.”

“……나 주려고?”

“그, 그래.”

“음…… 고, 고마워.”

감정 표현이 서툰 두 사람이었다.

예홍이 살짝 붉어진 얼굴로 비단을 풀기 시작했다.

뭘까?

가슴은 또 왜 두근거리는 건지.

귀걸이? 팔찌? 옷?

“너, 너랑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

단휘가 먼 산을 보며 말한다.

‘나랑 잘 어울리는 거라니…….’

예홍이 다시 낯빛을 슬쩍 붉히고는 비단을 완전히 풀었다.

“비…… 수?”

뜻밖에도 곱게 접힌 비단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건 시커먼 비수 두 자루.

기껏 여인에게 선물한다는 게 비수라니.

예홍이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는데, 단휘가 눈치도 없이 물었다.

“어, 어때? 맘에 들어?”

“그래. 아주 맘에 드네. 그런데 날이 좀 무딘 것 같은데 시험해 보고 싶네. 당장 아무에게라도.”

“어, 어째 눈이 이글거리는 게…… 꼭 날 보고 하는 말 같은데…….”

“눈치가 영 없진 않구나?”

“헉! 진, 진심이냐? 어어? 야, 지금 뭐야? 갑자기 강기냐? 왜, 왜 이래? 우아아악!”

단휘가 비명을 지르며 헐레벌떡 달려가 버렸다.

‘아니, 쟤는 왜 저러는 거야? 모처럼 손잡이에 꽃무늬가 새겨진 비수인데!’

꽁지가 빠지도록 달아나면서도 도저히 영문을 모르는 단휘였다.

한편 홀로 남은 예홍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는 거뭇한 비수를 보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길이 비수의 손잡이를 어루만졌다.

희미하게 무늬가 새겨져 있었다.

‘꽃무늬……?’

달빛에 비춰 보니 음각으로 새겨진 꽃무늬가 보인다.

파아앙!

마침 불꽃이 터지면서 꽃무늬가 알록달록하게 물들었다.

예홍의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이 피었다.

‘뭐, 그래도 예쁘긴 하네. 회수하기 쉽도록 은잠사를 연결해 둘까?’

비수를 품에 갈무리한 예홍이 마침 전각 아래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았다.

‘응……? 맹주님?’

전각 아래로 빠른 걸음으로 걸어가는 사람은 다름 아닌 강호맹주 적비연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바짝 따라붙으며 질척거리는 사람은 뜻밖에도 낙양문주였다.

적비연은 걸음을 바삐 옮기면서도 낙양문주에게 정중히 말했다.

“하하. 아직은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말입니다.”

“허허, 맹주. 그럴수록 옆에서 보조할 여인이 필요한 법 아니겠습니까? 우리 송화로 말할 것 같으면 예전부터 똑 부러진 성격으로 실리를 정확히 따질 줄 알고…….”

‘알지. 얼마나 잘 따지는지.’

적비연이 속으로 생각하며 얼른 말을 가로막았다.

“네네, 일단 생각은 해보겠습니다.”

“오오! 그게 정말입니까? 잘 생각하셨습니다. 송화도 아주 기뻐할 겁니다. 그 아이가 외모도 예쁘고…….”

“아니, 그저 생각만 해보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럼 저는 바빠서 이만……!”

“어어? 맹주!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좀 더 대화를……! 허참…….”

한편 귀신같은 신법으로 낙양문주를 따돌린 적비연이 맹주전 후원으로 들어서면서 간신히 안도의 숨을 쉬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연회장에서 엽강호와 현청 등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던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낙양문주가 나타나서 혼례가 어쩌고저쩌고 하는 게 아닌가?

어찌나 말솜씨가 좋은지 까딱하면 어영부영하다가 혼례식까지 열 뻔했다.

‘어휴, 정신 차려야지.’

적비연이 후원 정자로 막 올라서는데,

“어머, 맹주님?”

“임…… 소저?”

적비연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임송화를 보았다.

어울리지도 않은 짙은 화장을 한 임송화가 후원 정자에 서 있는 게 아닌가?

“여, 여기엔 소저가 왜……?”

“맹주님. 단도직입적으로 여쭙겠습니다.”

꿀꺽……!

오늘같이 좋은 날, 일진이 왜 이런지 모르겠다.

“뭐, 뭘 말이오?”

“절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야…… 능력 있는 무인이라고 생각하오.”

이 정도면 나름 잘 대답한 것이리라.

남녀의 구도가 아닌 무인 대 무인으로서 평가를…….

“그 말뜻은 절 정혼녀로 받아들여도 좋으시다는…….”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거냐!’

“커험! 험! 소저! 나는 아직 혼례에 대한 생각이 없소. 미안하오.”

“앗! 맹주님! 어디 가세요?”

“바쁜 일이 있어서 그만.”

“잠깐만요. 우리 미래에 대해서 진솔하게 이야기를……!”

“그건 다음 공개회의 때 합시다.”

“아니, 그런 이야기를 왜 공개회의 때…….”

“우리가 나눌 미래 이야기는 그 자리에서만 해도 충분할 것 같소.”

“그러니까 좀 더 구체적이고도 자세한 이야기를 하려면…… 잠시만요! 너무 빨리 가시니까…… 어? 어디 가셨지?”

적비연의 뒤를 한참 쫓던 임송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그 모습을 맹주전 맨 꼭대기 지붕 위에서 적비연이 가만히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겨우 한숨 돌리겠네.”

고개를 드니 장사의 야경이 활짝 펼쳐져 있었다.

팡! 파앙!

하늘과 강에 불꽃이 수 놓인다.

‘아름다운 밤이네. 이런 아름다운 밤에 누군가 옆에 있는 것도 나쁘진 않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깍지 낀 손을 뒤통수에 대고 벌러덩 누웠다.

모든 것이 평화롭다.

위기를 넘긴 강호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고 되묻는 듯하다.

하지만 잊으면 안 될 것이다.

“아버지. 이 정도면 잘했지요? 약속대로 본 가를 강호 정점에 세웠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으헉!”

돌연 들리는 청아한 목소리에 적비연이 화들짝 놀라서 일어났다.

옆을 돌아보니 언제 와 있었는지 은하란이 앉아 있었다.

“은, 은 원주? 대체 언제 온 거요?”

“제가 먼저 와 있었지요.”

“그런데 어째서 기척이 전혀…… 아, 기문둔갑술…….”

기문둔갑술은 무공 수위와 별 상관이 없다.

물론 만해경에 이르렀으니 신경 쓰고 주의했다면 눈치챘으리라.

하지만 방심하고 있었다.

설마하니 맹주전 꼭대기에 누가 있을 줄이야.

은하란이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제 생각보다도 훨씬 잘하셨어요.”

“고, 고맙소.”

“한잔하시겠어요?”

은하란이 술병을 내밀었다.

“술도 가지고 왔소?”

“오늘 같은 날은 한잔해야지요.”

“한데 잔은…….”

“한 병 더 있어요. 각 일 병씩.”

은하란이 다시 생글 웃으며 술병을 들어 보였다.

아…… 저리 아름다운 미모로 술병을 들어 보이면 어쩌란…….

적비연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바로 앉았다.

팡! 파파앙!

불꽃이 터지는 와중에 두 사람은 맹주전 지붕에 나란히 앉아서 술병을 기울여갔다.

“좋군. 그런데 설마 이 술병에도 이상한 약을 탄 건 아니겠지?”

“이상한 약이라고 하시면……?”

“막 몸을 이리저리 옮겨 다니고 뭐, 그런?”

은하란이 풋 웃더니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아니랍니다.”

그 모습을 적비연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두근. 두근.

묘한 떨림.

익숙하면서도 낯선.

수많은 경험을 가진 적비연이기에 그 감정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어리숙하진 않았다.

다만…….

‘이런 감정은 늘 낯선 설렘으로 다가오는구나.’

그리고 기분 좋은.

침묵도 때론 부드럽게 느껴진다.

바람이 불고, 하늘과 강에 꽃이 피고, 술을 마신다.

그러다가 무슨 말을 해볼까 생각할 때, 청아하게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

“고생하셨습니다.”

적비연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고생하셨소.”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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