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뜻밖의 제안
그녀가 일어서고 있었다. 뒤로 돌아서서 침상곁으로 다가온다. 이미 긴 머리는 마른 수건으 로 두르고 있었다. 침상으로 다가서는 그녀는 파천이 서 있는 곳의 한자 거리를 지나치고 있었다. 확 풍기는 체향과 향긋한 향수내음! 욕조에 아마도 여러 가지 향수를 뿌려 목욕을 하였나 보다. 정체도 분명치 않은 상큼한 향기가 코를 간지르며 지나친다. 그리고는 털썩 몸을 내려 앉히는 그녀! 바로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이라, 천하의 파천마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고 있었다. 천하의 절색미인이 홀딱 벗고 눈앞에서 왔다 갔다 한다고 생각해 보라!
더군다나 그녀는 자신의 존재를 전혀 모르지 않는가?
이불을 제치더니 낼름 그 안으로 몸을 숨겨 버린다
-어이구 아까운 것! 조금만 더 있다 들어가지!
천마의 탄식이 아니어도 파천도 아쉬웠다. 왜 이리 갑자기 가슴이 무너지듯이 허전해 지는 지?
'그런데 내가 왜 여기에 들어왔지? 아 맞어! 쟤를 꼬시러 들어 왔잖아! 보아하니 착하고 순 진한 애 같으니, 잘만 이용하면 아주 효과만점이겠단 말이야!'
결국은 파천의 내심은 그것이었나? 그런데 참으로 난감하지 않은가? 이대로 몸을 드러낸다 면 치한으로 몰릴것이 분명하고 그렇다고 어떤 우연을 가장할 만한 요소도 없으니! 에라이,
내가 언제 그런 것 따졌냐? 안 되면 되게 하라. 이제부터 이것이 내 신조다.
파천의 손길이 독고설란의 몸을 휩쓸었다. 그렇다고 추잡하게 더듬는다든가 하기 위함이 아 니었다. 순전히 그녀가 소리를 지르고 앙탈을 부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점혈을 한것이었다 (물론 파천은 고수여서 격공점혈도 가능하다.) 독고설란의 눈이 크게 휩떠지고 있었다. 이미 아혈마저 봉쇄되어 있었기에 소리를 치거나 하지는 못했지만 상당히 놀라는 눈치였다. 그런 그녀 앞에 파천이 나타나고 있었다. 그는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고 의자를 끌어다가 앉고 있는데 그 하는짓이 마치 자기 방이라도 되는 듯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리고는 그녀를 내려 다보며 벙긋 웃는다. 그녀의 눈은 끊임없이 질문하고 있었다. 누구세요? 무슨 짓이죠? 이러 고도 무사할 줄 알아요? 빨리 혈도를 풀지 않으면 크게 후회할 거예요! 기타 등등.
[소저! 난 소저를 해치려고 온 사람이 아닙니다. 먼저 제 소개를 하지요. 저는 옥면신룡 문 윤이라는 사람입니다. 저는 우연히 야행인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사람이 침입자인 줄 알고 이곳까지 따라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정말 우연히 소저의 사정을 듣게 되었습니다. 전 소저를 도와주고 싶은 사람이지 해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혈도를 풀어 줄 테니 고함치지 않겠다고 약속할수 있습니까?]
그의 전음에 눈만 깜박거리는 독고설란! 하긴 혈도가 제압되었으니 의사표현을 못하지!
"좋소. 그럼 믿고 풀어 주겠소"
다시한번 스치는 손길.
그녀는 혈도가 풀리자 마자 상체를 벌떡 일으켰고 파천의 따귀를 때려 오고 있었다. 파천은 그녀의 손목을 움켜쥔다. 그냥 맞아 줄수는 없지 않겠는가? 죽을 죄를 지은것도 아닌데......
그래도 따귀 한 대쯤 맞아 줄걸 그랬나? 아니지 대장부 체면에 아녀자에게 따귀를 맞는대서 야?
오! 그런데 파천을 때리려던 독고설란도 그녀의 손목을 나꿔 챈 파천도 잊고 있는 사실이 있었으니...... 그녀는 아직 아무것도 입지 않은 채 인간 본연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이다. 그 제서야 그것을 알게 된 두 사람! 상체를 낱낱이, 깔끔하게, 일목요연하게 드러낸 독고설란과 그것을 멍청하게 쳐다보는 파천! 그리고 마주치는 눈길! 여전히 파천에게 손목을 잡힌 채 그녀는 비명을 지르려고 어깨를 들썩이고 파천의 손이 번개같이 그녀의 입을 틀어막는다.
"으읍"
고작 나온 소리가 이거다.
"쉿 조용히 하시오. 떠들면 나도 어쩔 수 없이 모질게 대할 수 밖에 없소이다"
그녀의 고개는 끄덕거리고 있었지만 믿을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믿어야지 어쩔거야!
그는 또 한번 그녀를 믿기로 했다. 입에서 손을 떼자 이번에는 잽싸게 손을 들어 이불로 가 린다. 이미 볼 것 다 봤는데 새삼스럽긴......
파천은 의자에 깊숙이 몸을 젖히고 있었다.
"난 소저를 도와 주고 싶소. 이것은 진심입니다."
지금 자신의 말이 얼마나 억지인지를 자신은 알까? 그러나 독고설란은 그런 것을 가늠할 만 한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십수년을 고이 간직해 온 알몸을 외간 남자에게 보인 것이다. 그 것도 바로 앞에서 눈길을 마주치며...... 귓불까지 빨개진 채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 하고 있었다. 평소에 그 총명하던 재기는 자취도 없었고 그저 두려움에 떠는 한 명의 평범 한 소녀에 불과 했다. 게다가 설란은 무공을 익힌적도 없었다. 아버지의 뜻에 의해 그녀에 게는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고 책을 보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수를 놓는 등의 지극히 평 범한 삶을 살아 왔던 것이다. 세상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사람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그녀 가 아는 것이라고는 책에서 본것과 환사에게서 들은 것, 그녀가상상한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태어나서 한번도 이곳 북검회 바깥을 나가본적도 없었던 것이다. 지금 눈 앞의 남자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있는지 자신이 어떻게 해야할지도 판단이 서지 않았고 그 저 두려울 뿐이었다. 그러나 역시 그녀는 조금 특별했다. 파천의 눈을 가만히 살펴가더니 점차 평정을 되찾는다. 그녀는 그의 눈길에서 자신을 해칠 의도가 없음을 느낀 것이다.
'아...... 저 분! 눈이 부실정도로 잘생겼다. 저 눈은 너무나 신비로워! 그리고...... 슬픔이 느 껴지는 눈이야'
그리고 그녀에게서 느닷없이 튀어 나오는 말!
"어떻게 해 주실건데요?"
잘못 들으면 요상하게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말을 한 사람이 독고설란이기에 전혀 이 상하게 들리지는 않았다.
"흠흠...... 소저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소"
야심한 밤에 홀딱 벗은 여자와 나누는 대화치고는 너무 적절한 것 같지 않은가?.
"그럼! 공자께서는 제가 시키는 일이라면 뭐라도 하실건가요?"
점점 도가 심해지는(?) 어휘구사들! 모르는 사람이 보면은 오해하기 딱이다!
"그렇소! 말만 하시오! 그대가 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겠소"
스스로 낯간지럽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도 안든다면 지가 사람인가?
"그럼 절 데려가 주세요"
"?"
또 다시 멍청해진 파천! 이런 말이 튀어 나올줄은 생각지도 못했던지라 한참을 그렇게 말도 못하고 있는다. 오히려 그녀가 그렇게 나오자 할말을 잃어 버린 것이다. 어떻게 하면 얘를 꼬셔서 적절히 이용할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는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나를...... 따라 가겠소?"
"네! 어디든...... 북검회 밖에만 나갈수 있다면 어디든 좋아요. 그러면 전 공자님을 평생의 은인으로 여기겠어요."
"좋소이다. 그럼 어서 옷을 입으시오. 어서 나가게"
"지금은 안 돼요. 내일 이 시간에 다시 오세요."
"뭐라고 했소?"
"내일 다시 오라고요......"
얘가 지금 날 바보천치로 아나? 아예 가지고 놀아라. 나참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거냐?
"좋소"
까짓 것 그런다고 내가 쫄 줄 알고? 어림도 없다. 나도 배포빼면은 시체다 이거야. 나를 뭘 로 보고 지금......
이렇게 해서 이상한 약속이 세워지고 있었고 파천은 아쉬운 마음을 접으며 독고설란의 방을 나서고 있었다.
그가 수빈각으로 돌아오자 상황은 그가 생각한것보다 더욱 엄청나게 크게 벌어져 있었다.
처음에 남궁혁련과 남궁아연이 파천의 방으로 들어왔다가 그가 없자 둘은 그냥 돌아갔었다.
그 이후로 거의 일각정도로 들락거린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남궁아연이었다. 그리고 다른 일행들이 투표결과를 보러 간다며 나간 동안에도 파천의 방을 내내 지키고 있었던 이 도 남궁아연이었다. 그녀의 좀 도가 지나친 행동에 모두 의아하게 생각했으나 그녀는 막무 가내였다. 그래서 할수 없이 갔다 왔더니 그때도 여전히 그녀 혼자 파천의 방에 홀로 덩그 러니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제서야 일이 심상찮다는 것을 알게 된 남궁혁련은 곧 바로 오련회 고수들에게 이 일을 전 하였고 이것은 그 즉시 구정련에게도 알려지게 된다. 특히 구정련 대표로 참석한 지공대사 는 옥면신룡이라는 소협이 혜능조사의 진전을 이어 받았다는 사실에 경악을 하며 그에게 관 심을 갖는다. 그리고 여러 가지 정황상 북검회에 의해서 그가 변을 당했으리란 추측이 나 오게 되었고 오련회와 구정련은 이것을 북검회에 정식으로 항의 한다. 그러나 그들인들 파 천의 실종에 대해서 알겠는가? 이러던 차에 개방의 방주와 태상방주가 북검회를 찾게되 니...... 한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던 북검회주마저 개방의 태상방주가 왔다는 소리에 모습을 보인다. 태상방주가 누구였던가? 태조의 수하 중에 한사람이자 태조가 쌍노와 함께 강호에 심어 놓은 사람이 아니던가? 건문제 윤문을 겨우 만나게 된 것이 오늘 아침이건만 북검회의 음모에 희생당했을지도 모른다는 오련회 장로, 즉 팽가가주의 주장을 듣자 태상방주의 노화 가 하늘을 찌른 것이다. 아무리 북검회의 회주라하나 자신의 아버지인 잠룡대제의 친구이자 대선배인 그 앞에서 마냥 고개를 조아릴 수 밖에 없었고 북검회주는 자신들의 부하들을 윽 박지르며 그를 찾아보라고 한다. 한사람이 잠시 사라진 일치고는 너무 엄청나게 사건이 커 져 버린것이었다.
그는 수빈각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나?'
그는 자리에 가서 차를 한잔 따라 마신다.
'내일 오라고? 헛참 기가 막혀서...... 설마 함정을 파 놓거나, 딴 소리를 하는 것은 아니겠 지?'
-파천아! 너 정말 그애 말대로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왜?]
-아무래도 걔가 제 정신이 아닌 것 같거든...... 물론 착하고 이쁘긴 하지만 처음보는 너한테 자길 데려 가라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단 말이야? 더군다나 여자가 말이다.
[넌 그렇게 생각하냐? 내 생각은 조금 다름다. 무언지는 모르겠지만 일반적인 여자들하고는 많이 다른 애였어. 그리고 그 눈이 거짓을 말했다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고]
-야 파천! 너...... 혹시...... 수상한데? 너 걔가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 거지?
[그래. 그래서 그런다. 왜 그러면 안되냐?]
-너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냐? 걔는 장차 널 원수로 대할지도 모르는 애야
[나도 알고 있다]
-정신 차려라! 사랑! 그것 아무것도 아니다. 지나보면 한줌 흙처럼 부질없는 거지!
[근데 아까부터 왜 이렇게 애들이 뛰어다니고 난리람. 무슨 일이라도 터졌나?]
-모르지. 혹시 아니? 애들끼리 한판 붙었는지......
그가 바깥으로 나가고 있었다. 수빈각 주위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 북검회 검수들이 뛰어나 니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긴 했나 보다. 그는 바로 앞을 뛰어가는 무사를 불러 세 웠다.
"이봐. 무슨일이라도 벌이진 건가? 왜 그리 호들갑이지?"
그 무사는 파천을 아래 위로 훑어 보더니, 한다는 말이
"모르겠습니다. 옥면이래나 뭐래나? 한 놈 때문에 회내에 일급 비상령이 내려 졌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자기 갈 길로 가 버린다.
"옥면이라고? 그 자식이 누군데 그 한놈 때문에 이 난리람? 혹시 달단(元)이라도 쳐 들어 온건가? 아니지 이들은 무림인! 설사 그렇더라도 이들이 이렇게 난리 칠 일은 아닌데......
옥면이라 어디서 많이 들어본것도 같고?......뭐? 옥면? 그건 나잖아!"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람! 혹시 내가 그 기집애 알몸을 봤다고 이 난린가? 침입자라고 얘기한 것 아냐? 괜히 여기서 어물쩡 거리다 곤란한 일 겪는 것 아닌가 모르겠네.
그는 좀더 동정을 알아 보기 위해서 무사들이 많은 곳으로 달려 가고 있었다. 정말 그런 이 유라면 일단은 도망가는 것이 상수다.
마땅한 놈이 있었다. 그는 이곳 북검회의 허드렛일을 하는 장산이라는 하인 놈이었다. 그는 여기 저기 뛰어다니는 무사들을 쳐다보며 하품을 찍찍 하고 있었다.
"이 봐라"
그 소리에 놀라 뒤 돌아서는 장산!
"대체 무슨 일이냐?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진거지?"
"네? 저도 잘모릅니다. 저 같은 것이 무엇을 알겠습니까만은 어떤 분이 실종이 되어서 그 분을 찾는 거랍니다"
"뭐야? 혹시 찾는다는 사람이 옥면신룡이라고 하지 않더냐?"
"네...... 옥면....... 뭐라고 한 것 같은데요"
"그래?"
뭐야 이거? 내가 실종 돼?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야? 내가 왜 실종돼? 그리고 나는 왜 찾고 난리들이지?
아직까지도 상황파악이 안 되는 파천이었다. 이럴때는 아는 놈이라도 하나 만나야 물어라도 보는 건데......
신검각! 대 의사청! 이곳이야말로 이곳 북검회의 대소사가 결정되는 곳이었다. 지금 이곳은 공기가 싸늘하게 냉각되어 있었다. 태사의는 비어 있었고 북검회주 무상신검 독고한천은 다 른 사람들과 함께 밑으로 내려 앉아 있었다. 그 옆에서는 개방의 태상방주 개왕 풍천호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는데 보기에도 그의 심사가 얼마나 불편한지를 알게 해 준다.
장내에는 북검회의 고수들뿐만 아니라 오련회와 구정련의 고수들까지 모여있었고 소식을 듣 고 이 자리에 나온 남도맹의 고수들도 보이고 있었다. 이미 투표결과는 찬성쪽으로 결말이 났고 이제는 이들을 잘 다독여야 한다. 그런 중요한 시점에 그들에게 오해를 받게 되었으니 독고한천의 심사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개방 태상방주 앞이라 함부로 격동하 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아오신 대 선배이시지 않은가? 게다가 아 버지인 잠룡대제와는 수십년간 우정을 이어온 죽마고우이기도 했으니 그가 어려워 하는 것 은 당연했다.
"에잉...... 대체 어떻게 된 것이냐? 아직도 못찾았다는게 말이 되느냐? 대체 북검회가 개봉 부만틈 넓기를 하냐? 호광성만큼 넓기를 해? 15000명이나 되는 무사들이 사람 하나를 못 찾는단 말이야? 만약에 말이다...... 그 분의 신상에 무슨 일이라도 있을 시에는...... 우리 개 방하고 너희 북검회하고 누구든 하나가 없어지기 전에는 싸움이 멈추지 않을 것이다. 10만 의 거지들을 모두 동원해서라도 풀한포기 안 남겨 놓을테니 그리 각오해 둬라"
여지껏 이렇게 화 내시는걸 본적이 없는 독고한천인지라 의문이 들었다. 참으로 살벌한 말 이었다. 대체 태상방주와 그 공자와는 무슨 사이란 말인가? 그리고 조금은 도가 지나친 언 사이기도 했다. 아무리 아들같은 사이라고 해도 엄연히 강북무림의 패주인 북검회의 당대 회주가 아닌가? 그러나 그는 묵묵히 풍천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회주가 이러니 다른 북 검회 고수들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오련회의 팽가주는 고소하다는 듯 히죽거렸고 마침 그 것이 풍천호의 눈에 띄었다.
"팽가야 너는 뭐가 좋다고 히죽거리고 난리냐? 무슨 경사라도 났느냐? 응? 네 아비가 그렇 게 교육시키든?"
깨갱...... 그는 죽을 죄라도 지은 듯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남도맹의 수석장로가 올해 나 이 80이었으나 그도 풍천호보다는 한참 후배다. 그러니 여기있는 누가 감히 그의 말에 반박 하거나 끼어 들겠는가? 혹시 잠룡대제라도 온다면 모를까? 남궁혁련을 비롯한 9명도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그들의 내심도 무겁기는 매 한가지였다. 그들은 그에게 아무일도 없기를 빌고 또 빌었다. 이 자리에서 유일하게 그의 실종을 반기는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북검회 율령대 대주인 소면살검 우현충이었다. 그는 참으려고 해도 히죽 히죽 웃음이 나오 는 것을 참을수 없었다. 다행히 그는 풍개의 뒤쪽에 서 있었기 때문에 그에게 발각되지는 않았다.
"군사! 어떻게 되었나? 수하들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없나?"
"네, 안타깝게도......"
"흥, 안타깝기는 한거야?"
오련회의 팽가주였다. 역시 그가 아니면 누가 그들의 심기를 이런 순간에 건들겠는가?
"팽장로 이것 너무 하는 것 아닙니까?"
북검회 군사 삼안천뇌(三眼千腦) 소천악(召天惡)의 말이었다.
"뭐가 말이요? 내가 못할말 했습니까? 내가 듣기로도 옥면신룡에게 북검회가 무참히 망신을 당한 것으로 아는데 그가 북검회 마당 한복판에서 사라졌다! 그러면 뻔한 것 아닙니까? 그 런데 마치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들을 하고 있으니......"
"뭐요? 말이면 다 말인 줄 아시오?"
"조용히들 못하나? 이제는 싸우기까지 해? 그래 아예 끝장을 보자는 얘기냐?"
개방 태상방주의 고함소리였다.
"주군! 옥 - 면 - 신 - 룡 - 문 - 윤 대협 드십니다"
벌떡
"뭐?"
"어디?"
"어서 들라 하거라"
정말 그였다. 제일 먼저 뛰어 나간 것은 남궁아연이었고 자기를 향하여 두 팔을 벌리며 안 겨드는 그녀를 교묘히 피하며 여전히 걸어 들어오는 파천! 멀쩡한 그 모습에 사람들은 일순 간 멍청해지고.
"주군...... 무사하셨군요"
!!!
!!!!
!!!!!
태상방주가 옥면신룡 문윤 공자에게 주군이라고?
[풍개 이게 무슨 짓이오? 이렇게 보는 눈이 많은데서]
그제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닫게 된 개왕 풍천개! 너무나 반가운 나머지 아무생각도 없이 저 지른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물은 엎질러 진 것이 아니었던가? 북검회주의 놀라 부릅떠진 눈을 보라! 그것은 남궁혁련등도 결코 뒤지지 않았고, 구정련, 오련회, 남도맹 할 것 없이 마찬가지였다. 개왕 풍천호가 누구였던가? 이 시대 무림의 최고 원로중 한 사람이었으며 천 하제일거대방파인 개방의 태상방주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가 '주군'이라고 외치며 무릎을 꿇 다니? 더군다나 약관의 젊은이에게 말이다. 이것은 대 사건이었다. 어떻게든 수습을 해야 하는데 방도가 없었다. 이미 알려진 사실을 일부러 잡아 뗀다면 더욱 의혹은 증폭되는 것이 다.
파천은 자연스럽게 그를 일으켜 세운다. 그리고 좌중을 향하여 길게 읍을 하며 하는 말.
"제가 우둔하여 무림동도 제위 여런분께 이런 심려를 끼친 점, 머리 숙여 사죄를 청합니다.
특히 북검회주님께는 뭐라 드릴말씀이 없군요"
"아......아니요. 대협. 별말씀을"
그 또한 아직도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바람에 파천을 대하는 것이 굉장히 어색하지 않은가?
어쨌든 소동은 일단락 되고 있는 듯 했다. 그것을 알리는 목소리가 독고한천에게서 흘러 나 온다.
"자 자 어서 대연회장으로 가십시다. 오늘은 우리 정파무림에 새로운 역사를 쓰는 날이지 않습니까? 모두 마음껏들 드시고 즐기십시오."
그의 말에 모두들 씁쓸해 하고 있었다. 조금전까지 팽팽한 신경전을 펼치던 장내의 분위기 는 그 말에 누그러들고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오련회와 구정련측 사람들은 얼굴이 그리 편 치 않아 보였다. 그들은 바로 옆 건물에 자리하고 있는 대연회장으로 자리를 옮기고 있었 다. 풍개는 어찌된 영문인지를 파천에게 물어 보지만 속시원한 대답을 듣지는 못한다.
이미 그 곳에는 많은 정파인들이 모여서 술과 음식을 들고 있었다. 보기에도 먹음직한 각종 음식이 식탁들에 차려져 있었고 북검회의 하인들이 음식과 술을 나르고 있었다. 들어가는 출입구쪽에는 북검회의 고수들이 새로이 들어오는 구정련과 오련회의 인물들과 개방의 고수 들에게 인사를 하며 반갑게 맞이한다. 그런다고 그들의 얼굴이 춘풍에 녹아드는 눈 같아질 수는 없는 것이었다.
파천은 개방의 태상방주와 방주, 오련회의 팽가주, 구정련의 지공대사, 남도맹 수석장로등과 함께 연회장 가장 안쪽에 자리하는 상석으로 인도되어 갔다. 태상방주의 주군이라는 말이 주는 효과였다. 남궁혁련등은 파천과 함께 자리하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해 아쉬웠고 남궁아 연은 파천을 흘낏거리며 쳐다보기 바빴다.
"어르신! 노여움 푸시고 제가 따르는 술한잔 드십시오"
"자 문대협도! 제잔 한잔 받으시지요"
북검회주! 독고한천이었다. 그의 눈은 술을 따르면서도 파천의 모든 것을 작은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뚫어지게 살피고 파천은 상대의 눈길을 아주 담담하게 받아 넘기고 있 었다.
'으음 대체 이 어린 놈이 어떻게 개왕의 주군이 된단 말인가? 무림을 제패하기 위해서는 개 방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지금까지는 아버님과의 친분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지만 앞으로는 이 녀석을 구슬려야 한다는 말인데...... 이럴 때 딸자식이 하나만 더 있었어도......
에잉'
참으로 무서운 인간이었다. 독고한천이란 인간은!
왁자지껄 시끌벅적한 주연에서는 연신 호탕한 웃음소리들이 터져나오고 있었다. 대부분이 찬성표를 던진 북검회측을 지지하는 문파들의 사람이리라! 처음에는 반대표도 만만찮아서 우열을 가리기가 힘이 들줄 알았는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반대하는 문파는 채 3할이 되 지 않았다. 이제는 반대할 명분도 없어졌다. 팽가주는 정도연합에서 탈퇴하겠다는 말까지 했었으나 그것은 군웅들을 자극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고 그들도 어쩔 수 없이 대세를 따라야 할 입장이었다. 이제 모든 주도권은 북검회에 넘어간 것이다.
계속됩니다.
제 목:[연재] 황제의 검 15.검의 길! 관련자료:없음 [59010]
보낸이:임삼열 (logos333) 2000-12-24 00:22 조회:1960
-황제(皇帝)의 검(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