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내가 파천이다.
파천은 무림맹 지부 괴멸의 임무를 맡고 떠나는 4개대의 출정식을 마치자 마자연무관으로 향했다. 존마전에 딸린 연무관이었으므로 다른 사람들의 출입이 엄격히제한되고 있었다.
지금껏 파천은 끝없이 앞만 보고 달려 왔다. 지금껏 그를 이끈 것은 호기심이었고과거를 잊 기 위함이었으며 모든 것을 파괴하고 저주하고픈 마음을 다스리기위함이었다. 그렇지만 이 제 그에게는 그 모든 것이 점차 의미를 상실해가고 더선명하고도 확고한 이유를 요청하려는 의식의 움직임이, 자아를 끊임없이 망막한확산가운데로, 때로는 무한한 폭주의 상태로 몰고 가려 하고 있었다.
자신의 의지대로 일이 되지 않으면 파괴의 본능이 또아리를 풀고서는 고개를쳐든다. 그리고 타당성을 요구하는 제어력을 무참히 깨부수고는 그 폭주의 당위성을획득해 버린다. 장로들 을 죽일때도 그랬다. 이성은 더욱 명확한 이유로 그들의죽음을 저지시켰으나 연약하지만 강 인하고 보다 집요하며 끈질긴 본능은 내 이성의확고한 가치를 무너뜨리며 의식의 표면까지 도달하여 점령하고는 내게 명령을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내 이성도 그 권유와 강요, 그리고 명령의 단계로 급속히 퍼져가는 상태의갈등을 스 스로 해제시켜버리고는 그 힘에 동조하고야 말았다. 그것은 짧은 순간에동시적인 충동으로 전해졌기에 너무나 뚜렷한 인상으로 남겨졌고 어쩌면 이와유사한 순간에 또 다시 출현시키 고픈 욕망의 잔재로 남아 있을런지도 몰랐다.어쨌든 그 순간에는 스스로가 넘어서는 안 될 금단의 구역에 발을 들여 놓은 듯한,정체모를 두려움에서 오는 쾌감을 즐기고 있었다.
파천은 눈을 감았다. 아직도 살인의 여운이 두 손에, 그리고 망막에 마지막으로잡힌 영상으 로 남겨져 있었기에 또 다시 떠 올려 보았다. 무감각했다. 아무런 것도느껴지지 않았다.
-파천, 마음을 진정해라. 그리고 스스로의 마음을 어떤 식으로든 정리해라. 네가옳다고 여기 는 것,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춰질지를 고민하지 마라. 단지네가 하고 싶은 것, 그 리고 가야 할길을 가라.
=시주, 그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생명은 누구나 고귀한 것입니다. 세상의 어떤가치도 생명 보다 고귀하지 않습니다. 시주가 가는 길은 죽음을 부르는 길입니다.돌이키지 않는다면 크 게 후회하게 될것입니다.
-그만두어라, 혜능. 그의 삶은 그의 것이다.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이지요. 각자 고유의 삶이고 고귀한 기회입니다. 그것을자신의 삶의 목적 때문에 희생시킴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삶을 위해서 파천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단 말이냐?더군다나, 이곳 은 무림이다. 그 모든 것이 애초에 암묵적으로 약속이 되어 있는세계란 말이다. 그들 또한 그런 각오를 가지고 발을 들여 놓았을 것이고 적이라고생각되면 서로 죽이고 죽는 것이 당 연시 되는 곳이 바로 무림이다. 이런곳에서 혜능너의 말대로 하자면 스스로의 목숨이 열 개 라도 모자랄 것이다.
=그렇지만 시주는 절대자에 이른 사람이오. 자비를 베풀어도 얼마든지 자신이목표한 곳에 다다를 수 있지 않습니까?
-흥, 왜? 파천이 그런 사소한 것을 신경 써야 하지?
[둘다 그만들 해라. 내 일은 내가 결정한다. 지금 내가 괴로워 하는 것은 살인의충격이 아 니다. 이미 많은 사람을 죽였고 앞으로도 많이 죽여야 한다면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문제는 살인에 대한 충동이 내 의식을 지배하던 바로 그 순간이다.그 당시는 내가 아니었다. 그 무 엇인가가 나를 지배하는 것 같았다. 설명할 수 없는기분 나쁜 순간이었다.]
-그것이 바로 마의 정체다.
=마를 이기기 위해서는 마음을 닦아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마음과 분리된 것이아닙니다.
마음속에 있는 어그러진 모습이지요. 우리의 선택이 정도를 벗어날때마다 그것은 고개를 쳐 듭니다. 그리고 더큰 자극으로 이끌어 들입니다.처음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다가도 무감각해 지고 결국 마의 노예가 되어 버리지요.처음부터 그것을 이기지 못하면......
[그만 됐다. 알았으니...... 그만 해라.]
파천은 고요히 의식을 집중했다. 처음에는 무수한 생각들이 상념의 몸짓으로 그를괴롭히더 니 점차로 마음이 안정이 되고 아무런 잡념도 떠 오르지 않았다.
'결국 모든 사람은 이 세상에 내동댕이쳐졌을 때부터 혼자이다.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 없 고 대신 선택할 수 없는 나만의 삶이다. 스스로 선택하고 그 삶의 결과를홀로 담당하여야 한다. 난 이미 내 삶의 모습을 결정지었다. 그것이 옳고 그르고의문제는 차후의 일이다. 오 로지 내가 내린 결정에 충실하면 그뿐이다.
뒤를 돌아보지 말자. 그래...... 더 이상 내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세상이 나를원하지 않는 다 할지라도 그 세상에 이미 속해 있음으로 고민 따위는 필요없다.치열하게 부딪히는 것이 다. 나를 속박하는 것을 깨부수고 나를 짓누르는 것을떨쳐버리자. 난, 이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할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나만의 꿈속에모든 것을 동화시켜버리는 진정한 몽상가가 되 자. 아무것도 나를 막을 수는 없다.그 무엇도......'
파천은 앉은 채로 고요히 눈을 떴다. 천마검이 진동을 보이고 있었다. 검집에서스스로 빠져 나와 허공을 배회했다.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느릿하게 허공에 무수한선을 그으며 춤을 추 고 있었다. 파천의 눈이 감겨 졌음에도 검은 저 홀로 허공을선회했으며 검강에 휩싸여 있었 다. 점차 그 빛은 짙어지고 나중에는 순수한 빛의결정체처럼 느껴졌다.
그 검은 파천이 알고 있는 모든 검결에 따라 스스로 움직여 갔다. 물론 그것을움직이는 배 후에는 파천의 의식이 결부되어 있었다. 지금 그가 보여주는 경지야말로 이기어검의 심어검 의 경지였다. 연무관의 공간을 완전히 장악하고 움직여 가는검로들이 참으로 신묘하기 까지 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검은 제자리를찾아가고 검집으로 그 휘황한 자태를 감추어 버렸다.
파천의 손이 허공으로 내 밀어 졌다. 새하얀 검이 치솟고 있었다. 더 이상 밝을 수없는 빛 을 뿜어내고 있었고 그것은 파천의 손바닥위에 떠 있었다. 점차로허공중으로 떠 올라가더니 허공을 선회하기 시작하였고 아무런 파공성도 들리지않았으며 꿈결처럼, 환상처럼 허공을 수놓기 시작했다.
'여기까지가 내 한계이다. 초마의 정경에 올랐으나 더 이상의 진전이 없다. 천마의말에 의하 면 초마의 진경에 들어가면 무형검을 12개까지 만들 수 있다 했건만......지금 나의 내공은 10갑자에 육박한다. 내공의 성취는 천년내공을 득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수치상의 의미가 없 어진다. 내공의 성취가 부족함이 결코 아니다.
새로운 경지를 얻는 것은 마음으로 이르는 것, 내공은 자연히 따르는 것이다.그렇다면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머리로는 무형검의 모든 요결을 뛰어넘어 자연검의초입까지 바라볼 것 같 은데...... 실제 시전해 보면 되지 않는 이유가, 대체 뭐란말인가?'
파천은 답답했다. 그때 그의 뇌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그의 눈은 새로운 빛으로충만했다.
'좋아. 안되면 되게 하는 것이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라도 씹으면 되는것을...... 오로지 목표를 성취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파천은 무형검을 거두지 않은 채 곧바로 천마군림보를 시전했다. 양의분심공으로뜻을 나누 고 각각의 12분신이 동일하게 무형검을 시전하기 시작했다. 사방으로늘어난 12지신의 앞에 는 희미하나마 하나씩의 무형검이 떠 돌기 시작했다. 그것은제각기 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각각의 위력은 본신의 무형검에 뒤떨어지나12개의 공격이 합해지면 훨씬 뛰어난 위 력을 발휘 할 것이다.
-허, 참. 하여튼 기지하나는 못 당할 놈이다. 진경으로 들어가지지 않으니 그런편법을 사용 하다니...... 그러나 그 자체의 위력에 만족한다면 너의 정진에 방해가된다.
[알고 있다 천마! 잠깐...... 그러면 진경에 들어가면 12개의 무형검이 다시12지신으로......
으악]
자그마치 144개의 무형검이 공간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파천의무거워졌 던 마음이 조금은 풀어져 갔다.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을 막을수는 없었다. 그가 유일하게 마음의 평안을 누릴때가 있다면 무공에 심취해 있을때이다. 복잡하게 이것 저것 따지지 않아도 좋고 오로지 뜻을 하나로 하여 정진할수 있어 잡념이 생기지 않고 뚜렷한 목 표점이 있으니 혼란이 없다.
파천은 연무관의 바닥에 벌렁 누워 버렸다. 수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떠 올랐다.경병문의 자신 있어 하던 얼굴! 이 경륭의 패기만만한 모습! 숙부 연왕의 범접치못할 기도, 아버지 표 의 자애한 얼굴! 자신의 눈앞에서 자결하던 궁녀들! 태산으로향하던 그가 겪은 많은 사람들,
쌍노, 풍개, 천마교의 수하들, 제자 소군, 그리고또 하나의 얼굴, 그를 향해 미소짓는 얼굴,
너무나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 뒤에자리하는 아픔, 자신과 닮았다.
숨겨진 슬픔, 이런 자신이 싫었다. 파천은 팔을 베며 모로 누웠다. 여전히 떠나지않는 모습!
독고설란! 그녀는 울고 있었다. 처연한 얼굴을 하고 원망섞인 표정으로그를 바라보고 있었 다. 마주 볼 용기가 나지 않는다. 애써 외면해 보았지만......
파천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갑자기 무엇이 생각나서 그것을 하지 않고서는 못 견딜사람처 럼 행동하기 시작했다. 연무관을 나서자 마자 한 곳으로 빠르게 이동해 갔다.
마도련이 지하라고는 하나 수만명이 운집해 있는 관계로 그 안에는 각종 시설들이갖추어져 있었다. 생활물자가 반년치 정도는 항상 창고에 적재되어 있었으나 한달에두 번정도 각종 생활물품을 반입해 들여왔다. 제3광장을 따라 서쪽으로 가다보면거대한 석실이 자리하고 그 앞은 언제나 혼잡했고 떠들썩 했다. 이곳이야 말로마도련 총단의 유일한 주점이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돈을 받지 않고 내주지만 일정량 이상에 대해서는 돈을 지불해야했다. 그 곳에 파천이 온 것이다. 그가 실내로 들어섰지만 누구하나 그에게 시선을보내지 않았고 저 마다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비우기에 분주했다. 다행히 그를알아보는 자들은 없었다. 하 긴 그의 얼굴을 아는 자라고는 핵심간부들이나 천인대원 밖에 없으니 하급무사들이 그를 알아 볼리는 없었다. 이곳은 대부분 하급무사들이주로 이용 하는 곳이었고 간부들의 출입은 거의 없었다.
그는 주위를 휘 둘러 보았다. 빈자리가 별로 보이지 않을정도로 실내는 북적거렸다.이런곳 에 점소이가 있을 턱이 없다. 그는 안으로 들어가서 술과 안주를 주문하고그것을 손에 받쳐 들고는 빈자리에 가서 앉았다. 이미 그곳에는 두명의 남녀가 술을주거니 받거니 하고 있었 으나 파천이 그들 옆의 빈자리에 앉아도 신경도 쓰지 않는눈치였다. 파천은 자리에 앉자마 자 술을 들이키기 시작했다. 술병을 입에 물고는들이 부었다.
"커"
육포를 찢어서 입으로 가져갔다.
"우하하하"
"낄낄"
주변의 소음은 대단한 것이었으나 차라리 파천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었다.
"이것봐, 여랑. 너무 튕기는 것 아냐? 포삼에게는 그리 아양을 떨더니만 내게는 왜이리 박정 하게 대하는 거냐?"
"시끄러워. 술이나 마셔. 술친구가 필요하다고 해서 따라 왔더니만 웬 시덥잖은말은 하고 그 래?"
"그래, 너 잘났다. 아이고, 곽주야 어쩌다 네 신세가 이리 되었냐 그래?"
파천의 옆에 앉은 두 남녀는 매우 친숙한 사이인 듯 서로 농을 지껄여대며 술을마시고 있었 다. 꽤나 마신 듯 빈 술병들이 어지럽게 늘려 있었고 그들의 얼굴은보기좋게 상기되어 있었 다.
"이것봐, 형씨! 뭔 술을 혼자서 마시오? 자 이리와서 같이 마십시다."
둘 중의 사내가 한 말이었다. 그는 사람좋게 생긴 인상에 코를 찡긋하며 파천에게제의해 왔 고 파천은 사내를 응시했다.
"괜찮소."
"아따 그 양반, 자, 술이란 주거니 받거니 해야 제맛인거요. 자 이리로 오시오."
결국 그의 강청에 못이겨 파천이 그들과 함께 마주 앉았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오?"
"......정거이라고 하오"
생각나는 대로 뱉어냈다.
"난, 곽주요. 이쪽은 심여랑이라고 하고......"
"심여랑이오."
그녀는 여자가 분명하였으나 여자라고 느낄만한 어떠한 분위기도 풍기지 않았다.얼굴은 무 표정했고 평범했다.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가느다란 흉터까지 있어 밖에서보았다면 사람들 의 눈길을 끌 정도였다. 그러나 한가지, 그녀의 눈은 너무나 맑았고또한 투명했다. 나이 30 대중반정도의 무사가 지닐 수 있는 눈빛은 아니었다. 어떻게보면 굉장히 독특한 인상이었 다. 평범하지만 그 속에는 푸근함이 있었고 세상을달관한듯한 여유로움도 배어 나오는 듯도 했다.
"형씨는 어디 소속이오?"
"뭘, 그런걸 묻고 그러냐? 그냥 술이나 마시지."
심여랑의 말에 곽주는 머쓱해진 듯 술잔을 빠르게 비웠다.
"천인대...... 소속이오."
"천인대!"
두 사람은 파천의 말에 놀람을 나타냈다. 마도련에서도 가장 부러움을 사는 곳이있다면 천 인대와 마안대였다. 비교적 젊은 층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종사 직속이다.권력의 핵심부에 있으니 당연히 대우가 좋았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정보에빠르고 운이 좋다면 승진이나 출세도 빨랐다. 그들은 또한 상승비급을 볼 기회도상대적으로 많아 마도련 소속 무사들이라 면 누구나 한번쯤 꿈꾸어 보는 곳이었다.
"천인대 무사라면 지금쯤 비상이 걸려 있을 텐데...... 형씨는 어찌 나왔소?"
"마침 비번이라...... 술한잔이 생각나서 말이오."
"그렇소?"
그 말을 하는 곽주의 얼굴에는 의심스런 눈빛이었으나 금방 지나쳐 버리는 듯 했다.이곳에 서는 자신의 직급을 밝히지 않는 것이 관례였다. 적어도 술자리에서만은편하게 지낼 수 있 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렇다고 상대의 직급을 알고서도 무례하게대하지는 않으나 밝히지 않 은 것으로 상대를 곤란하게 하지도 않았다.
"나와 여랑은 외당 소속이오. 근데 듣기로는 대공이 장로들을 모두 죽였다고하던데...... 그 분이 그렇게 강합디까?"
곽주의 말에 심여랑은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파천을 응시했다.
"대단했소이다. 일검에 장로들을 도륙하는데...... 인간이 아닌 것 같았소."
"허 참. 난 그 소식을 전해 듣고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듣기로는 무림오천의천마서생이라더 니...... 엄청나긴 한가보군. 어이구...... 나 같은 삼류인생이야꿈엔들 그래 보겠소? 그나저나 천인대 소속이라면 직접 보았을 것 아니요? 어떤사람입디까?"
"뭐, 그냥 평범했소이다. 20대중반정도에 냉막한 인상. 뭐 특별한 구석은 없었소."
"대체 어떻게 하면 20대 중반에 그렇게 강해질 수 있다지? 난 그정도는아니래도...... 장로들 정도만 되도 소원이 없겠구만."
"그래봤자, 죽기야 매 일반이 아니오?"
"하긴 파리목숨이야 마찬가지이나 그래도 한세상 고개쳐들고 살 수 있지 않소?어차피 무림 에 발을 들여 놓은 이상에야 죽음이야 늘 따라 다니는거고 말이오.가끔씩 이런 생각을 해볼 때가 있소. 무림에 있는 인간들을 한 줄로 늘어 세워놓으면 난 몇 번째나 갈까? 아마 까마 득할거요. 그래도 나도 20대때는 청운의 꿈을품고 야망에 불탈때도 있었건만...... 시간이 지 날수록 내 주제를 알게 되지않겠소?
이제는 지금의 생활에 익숙해지고 이것도 그리 썩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도 있지만뭐랄까?
아쉬움이랄까? 그런게 있소이다. 내게는 기연도 없고 인맥도 없으니 죽을때까지 이렇게 살 다 가겠지만 한가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남들 다 해보는 결혼도못해보고 처자식 한번 못 거 느려 본다는 것이랄까? 뭐, 그렇소. 이거 쓸데 없는소리를 했구료. 자 한잔 합시다."
쨍
아무소리도 없이 술만 들이켰다. 각자의 생각에 도취되어 있었고 술은 그것을 잘도이끌어주 고 있었다.
"야 이새끼야. 너 정말 뒈지고 싶냐? 감히 내가 누구라고 그 따위 소리냐? 뭘 봐새끼들아"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곽주가 그쪽을 한번 쳐다보더니 하는 말이,
"저, 자식 또 시작했구만."
파천도 고개를 돌려 보았다. 키가 7척에 구릿빛이 도는 건장한 몸을 지닌장한이었다. 부리 부리한 눈을 치켜뜨고 주위를 윽박지르고 있었다.
"저 사람이 누구요?"
"신경쓰지 마시오. 아주 꼴통이오. 이제는 아예 면역이 되어서 하루라도 저 꼴을보지 않으면 서운하기 까지 하니 말이오."
"보아하니 꽤나 대단한 인물 같은데......"
"하긴 잘 나갈때도 있었지. 거력패산 장웅이라면 마도에서는 꽤나 알아주던인물이었소. 지금 은 저 모양이지만 말이오."
"자세히 얘기 좀 해주시오."
"아니 근데 형씨는 어찌 마도련의 사람이면서 저 사람도 모르오?"
"외부지단 근무를 오래해서 그렇소."
"그러시오? 뭐, 그러면 모를 수도 있겠구료. 저자는 한때 산서무림에서 알아주던고수였소.
십여년전에 마도련에 가입을 했고 그 당시의 직책이 내당 부당주였소.무공이 강하고 성격도 강직해 대종사의 신임을 받았소. 아마 5년전인가 였을 꺼요.당시에 마안대장이었는데...... 원 래 마안대란 것이 대종사의 최측근세력 아니오?그러다 보니 장로원과 몇차례 시비가 있었고 강직한 성격으로 인해 결코 굽히지않았지요.
그러니 장로들이 가만 둘리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대종사의 측근을 함부로 하지도못하고 결국 그들이 생각해 낸 계책이 미인계였소. 장로중 한명이었던 만독괴노의손녀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장웅에게 접근을 했소. 워낙에 절색인데다가 미혼향으로유혹을 해대니 꼼짝하지 못하고 걸려버렸지. 결국 장웅이 그녀를 겁탈하고깨어나보니 형틀에 매여 있었소이다. 뭐,
대충 얘기는 이런 거오만 당시의 은밀히돌던 소문에 의하면 실제 겁탈당한 여자는 장로의 손녀가 아니라 그 시비라는얘기가 있으나 확인할 길이 없고, 결국은 내공이 폐지되고 파면 되는 최악의상태까지 갔지요.
그 때부터 저자는 거의 이 주점에서 살다시피 하며 술을 마셔댔소이다. 알고 보면저자가 저 리 괴로워 하는 것은 자신의 충정을 알고 있는 대종사가 아무런 조치도취해주지 않은 것에 대한 섭섭함 때문일거요."
"비켜 이 자식들아. 모조리 불 태워 버려야돼. 이런 쓰레기 같은 놈들! 비키란말이다."
그의 고함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그를 제지하지 않았다.
"그런데 저자를 저대로 내버려 두는 이유가 있소? 장로들이나 하다못해 술을 먹다가시비가 붙어서 맞아 죽을 수도 있었겠건만......"
"그건 또 다 이유가 있지요. 대종사의 엄명이 저자를 실수로나 의도적으로나 죽이는자는 이 유를 불문하고 참살하겠다는 명이 있었소. 그러니 누가 저자와 시비를벌이겠소. 따지고 보 면 참 불쌍한 인생이지요."
'후후 재미있군. 내가 보기엔 무공이 폐지된 것은 맞지만 주독에 찌들린 자의 눈은아니다.
뭔가가 있다. 저 눈은 뭔가를 말하고 싶어하는 눈이다.'
그때였다. 한 사람이 장웅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야 이놈아, 이 술 줄테니 적당히 먹고 어디 구석에 처박혀 잠이라도 자거라.덩치는 산만해 가지고 하는 짓이라고는......"
그리고는 사내가 병에 든 술을 장웅의 입가에다 홱하고 뿌렸다. 장웅은 그 술이아까운 듯 혀로 핥아 먹었고 그것도 모자라 사내의 손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모습을 보고 있던 장내의 인물들이 비웃음을 토해냈다.
"우하하하하 저 자식 술이라면 사족을 못쓴단 말이야."
"에고, 불쌍한 놈! 그 웬만하면 주둥이에다 제대로 부어줘야지"
"낄낄낄낄"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장웅의 신색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사내에게매달리며 술을 요구했다.
"술, 술을 좀 사주라. 응?"
"이런 비켜. 이자식이 날 언제부터 알았다고 술을 사달라고 하냐? 너 사줄 술있으면 키우는 개에게나 먹이겠다."
"우하하하"
장웅의 눈이 순간 시퍼렇게 광기를 띄어가자 사내는 움찔하는 기색이었다.
"이, 자식 죽여버린다."
슈웅
그의 주먹이 공기를 가르며 짓쳐들어왔으나 사내는 가볍게 피하며 뒤로 돌아서더니등을 밀 어버렸다. 장웅은 볼썽사납게 구석으로 쳐박혔다.
"우하하하"
"낄낄 그 자식 아주 웃기는 놈이야."
"어르신들 앞에서 재롱을 다 부리고......"
"그만해라, 넌 불쌍하지도 않냐?"
보다 못한 동료하나가 말리고 나서자,
"불쌍하기는 뭐가 불쌍하냐? 사내 자식이 오죽 못났으면 겁탈이나 할까? 그저 저런자식 은......"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누군가 장웅에게로 다가서는 것을 보았기때문이다.
파천이었다. 그가 어느새 장웅곁으로 다가서더니 그의 손을 잡고 일으켜세워주고 있었다.
"너, 넌 뭐야? 이자식아."
사내가 파천에게 던진 말이었다. 파천이 사내를 상대도 하지 않고 여전히 돌아서있자 사내 의 얼굴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괜찮나?"
파천이 장웅에게 건넨 말이었다.
"히히 네가 술을 사주려고?"
"술? 그래 내가 사주지."
"정말이냐? 크크크 술을 사준다고? 좋지. 나야 술 사주면 제일 좋지. 킬킬"
뒤의 사내는 파천이 자신의 말에 반응도 하지 않고 장웅에게 술을 사준다고 하자얼굴이 벌 개져서는 고함을 치고 있었다.
"야 이자식아 내 말이 말같지 않냐? 야."
파천이 그의 말을 무시하고 장웅을 이끌고 가 술을 주문했다.
"저...... 저놈에게 줄 술은 없는뎁쇼. 이미 오늘 마실 술을 다 주었기 때문에 더이상은 안 됩 니다."
"무슨 말이지?"
"일정한 양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 이상은 주지 말라는 명이......"
"누가 내린 명인가?"
"대공자님이......"
"괜찮다. 내가 책임질테니 술을 주어라."
"아니 네 자식이 뭔데, 술을 주라 마라 하는거냐?"
그 사내였다. 참으로 끈질긴 자였다. 그들의 일행들마저 합류한 채 파천의 등뒤로몰려 와 있었다.
"이것봐, 이곳에서 시비가 붙으면 어떻게 된다는 것 쯤 알겠지?"
곽주였다. 그가 심여랑과 함께 파천쪽으로 다가 와 있었다.
"오호라, 이제 봤더니 외당 놈들이었군. 이야 언제부터 외당 놈들이 이리 기세가등등했냐,
그래?"
사내가 자신의 동류들을 바라보며 큰 소리로 비웃고 있었다.
"질나쁜 놈들! 너희들이 항상 장웅을 괴롭혀 왔다는 것쯤 알고 있었다. 그래도한때는 마안대 의 대장까지 지냈던 상급자이거늘, 너무 지나차지 않냐?"
"어이구, 여기 협사 나셨네, 웃기는 소리 하지 말고 저리 비켜라."
"조용히 해라."
파천의 말이었다. 그가 착가라앉은 음성을 토해내자, 모두의 시선이 파천에게집중되었다.
"너희들, 어디 소속이냐?"
"하하하 이것 웃기는 것들 아냐? 어디 소속이냐고? 마도8문중 사사방 소속이다. 왜?웬만하 면 적당히 넘어 갈려고 했더니 안되겠군. 너희들 오늘 혼좀 나야겠다."
사내는 살기등등해 갖고는 파천쪽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보며 어이없어하는파천.
"규율이 엉망이군. 사사방이면 마영천사가 방주겠구나. 그 놈이 너희들을 이렇게가르치더 냐?"
나직한 말이었으나 그 의미가 너무도 엄청난 것이었는지라 장내의 모든 인물들의얼굴에는 놀람이 가득했다.
"자. 자네 어찌 그리 심한 말을......"
곽주의 음성은 떨려 나오고 있었다. 잘못하면은 자신들까지 살신지화를 당할지도모른다는 두려움에 온몸이 떨려 왔다.
"대체...... 네 놈이 누구기에...... 우리 방주님을?"
"아가리 닥치고 살고 싶다면 조용히 꺼져라. 괜히 까불다가는 니네 방주까지 덤으로경을 치 는 수가 있으니......"
파천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휙 돌리더니 다시 주점의 책임자인 장노인에게 말했다.
"술을 다오. 난...... 파천이다."
"네?"
장노인은 아직 무슨 말인지를 알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곽주를 비롯해 장내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파천의 그말을 똑 똑히 들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이 누구를 말하는 건지도 확연히 깨닫고있었다. 누가 시 킨 것이 아니었음에도 그들의 몸은 일제히 바닥에 엎어지고여기저기서 큰 소리가 울려 퍼졌 다.
"대공을 뵙습니다."
"대공을......"
곽주와 심여랑, 그리고 조금전까지 그렇게도 기세등등하던 사내들의 몸은 가늘게떨려 오기 시작하더니 점차로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심해져갔다. 특히 장웅을핍박하고 파천에게 함부 로 말을 해 대던 사내는 사신을 건들였다는 공포심에바들거리며 떨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아무도 보지 못했으나 장웅의 눈에 미세한 번쩍임이 떠 올랐다가는 사라졌다. 장노인도 그 제서야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고서는 심하게 떨리는 손길로 술을 내주고있었다. 파천은 그 술을 받아 들고는 장웅을 이끌고 자리로 가고 있었다. 누구하나고개를 들지 않았고 장내는 쥐죽은 듯이 고요했다.
"곽주, 심여랑"
"네, 대공"
"너희들도 이리 와서 한잔씩들 해라. 내가 사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