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 탈 출 - 1 (66/111)

 66. 탈 출 - 1

 흑호문주 단야적풍의 죽음은 마도련 전체를 술렁이게 했다. 한바탕 회오리속으로 휘몰아치 는 듯 일파만파의 파장으로 마도련을 뒤흔들었다. 광마의 호출을 전하러 온 천인대장 이시 명의 방문이후에 죽음을 맞았기에 그 시기가 참으로 공교로웠고 지금 흑호문과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곱지 않은 시선이 한곳으로 몰려갔으니 그 대상이야 광마가 아니고 누구겠는 가? 이일 때문에 군사를 비롯해 7문의 문주, 내외당주, 천인대장, 대종사의 네명의 제자들까 지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으니 잠재되어 있던 불만까지 불거져 나온다면 마도련은 공중분해  될지도 모른다는 예측이 마도련 전체를 무겁게 짓눌렀다.

 "이번에도 역시 지난번 장웅을 살해한 흉수와 동일한 범인으로 추정됩니다. 마도련 전체를  제방 드나들 듯이 움직이는 신비인이라...... 우리 중에 범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솔직 히 우리들 중 그 누구도 그 정도로 강한 사람은 없죠."

 군사는 마지막 말을 하며 광마쪽을 쳐다본다. 있다면 당신뿐이죠. 라는 무언의 표현을 하는  듯 했다. 누구하나 광마를 범인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렇지만 상황이 하도 묘한지 라 은연중에 그런 분위기가 조성된 것이다. 마도련 지도부가 오늘처럼 긴장한 적이 있었던 가? 지난번 장웅이 살해당한 것과는 그 비중부터가 달랐다. 그 또한 예전의 마안대장 이였 다고는 하나 당시의 그는 폐인이나 다름없었던 자였으나, 흑호문주는 달랐다. 이 중에 그를  저항조차 할 수 없게 죽일 수 있는 자라고는 광마밖에 없으리라.

 그 정도의 고수가 자신들의 목숨을 노린다 생각하니 섬뜩했던 것이다. 흑호문의 심처에서  아무런 소리도 없이 죽여버린, 그래서 더 이상 그 누구도 자신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게 된  두려움이 그들의 입을 무겁게 닫아 버렸다. 지금쯤이라면 몇마디 말이라도 오가야 정상이건 만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사실 무슨 말을 더 하리요? 아무 런 단서도 없고 심증이 가는 자도 없다. 물증은 더더군다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몇 마디  말을 더 주고받는다고 두려움이 감해지지는 않는다.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군. 중원 마도의 본산이라는 곳에서 지도부 고수가 죽어나가고 아무 런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꼴이라니...... 이러면서 무슨 정도를 타도한다 할 수  있겠소?"

 광마의 말이었다. 지금의 그 말은 장내의 인물들 모두를 싸잡아 일컫는 것이었기에 그들의  심기를 건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데도 누구하나 기세를 올려보지도 못하고, 그 말이 당 연하다는 듯 수긍의 태도를 보인다.

 "이것은 본련의 생존이 걸린 문제요. 더 이상 이를 방치하다가는 스스로 자멸하거나 공중분 해 되고 말 거요. 그래서 말인데......"

 그가 말끝을 흐리자 좌중의 인물들의 시선이 일제히 광마에게 쏠렸다.

 "특단의 조치를 내리고자 하오. 지금부터 대공이 오시는 날까지 전 간부진에게 두 명씩의  천인대원들을 붙이겠소. 어디를 가든 그들은 여러분들을 따를 것이오. 만약 그들이 죽는 일 이 발생한다면 제일먼저 배정된 인물이 의심을 받을 것이므로 필히 그 대원들을 보호하시 오. 그리고 이후 나와 천인대는 다시 한번 전 마도련의 고수들에 대한 정밀감사를 실시하고  수상한 점을 캐내 보겠소. 물론 여러분들이 이일에 동의하리라 생각하오. 그리고 이 일은  대공자께서 적극 도와 주셔야겠소."

 한당은 광마의 말에도 별 반응이 없었다. 일단은 승낙으로 보아도 무방한 것 같았다. 군사  제갈초홍이 광마를 쳐다보며 말한다.

 "흑호문의 일은 어찌할 생각입니까?"

 대공이 없는 지금, 련내의 전권은 자연스럽게 광마가 휘두르고 있었다.

 "문주가 죽고 부문주는 불경죄로 체포되었으니...... 이공자"

 "네"

 "그대가 맡아주시면 안되겠소? 물론 임시로 말이오."

 이제자 일도경혼(一刀驚魂) 능비호(能飛虎)가 의외였는지 한참을 망설인다. 하긴 금방 죽은  자의 후임을 맡는다는 것이 여러모로 썩 내키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그 역시 거절하기는  어려웠는지 고개를 끄덕이고야 만다.

 "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해보죠."

 왠지 그의 말에 힘이 없어 보였다. 군사 제갈초홍의 눈이 반짝 빛을 머금는다.

 "감찰관에 대해...... 지금 련내에 불만이 팽배해 있습니다. 그의 지나친 원리원칙주의가 무사 들의 사기를 저하시키고 어제까지 말단 무사였던 그자의 벼락출세로 시기하는 소리들이 높 습니다. 언제까지 그자의 횡포를......"

 "그것은 군사가 참견할 일이 아닌 듯 하오. 이것은 어디까지나 대공께서 명하신 일이므로  대공께서 돌아오시면 그때 다시 건의해 보시오."

 광마의 말은 한마디로 네가 나서서 이러쿵 저러쿵 할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래도 마 도련의 두뇌로까지 일컬어지는 군사의 위치로, 그 정도를 거론하지 못한대서야 어디 말이  되겠는가?

 "자, 별다른 말씀들이 없다면 이만 회의를 마칩시다."

 그 또한 이런 답답함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모두 죽을상을 하고 앉아 있는 꼴을 보고 있자 니 울화통이 치미는 것이다. 물론 마도련에 별다른 애착이 있을 수 없는 그였으나 같은 마 도를 걷는다는 동질감 만으로도 저들의 나약함이 보기 싫었던 것이다. 천마교에서는 있을  수 없는 장면이기도 했다. 몇 놈이 죽어나가 봐야 더욱 독기를 내뿜는 천마교도들과는 근본 적으로 다른 듯 했다.

 ★ 파천은 광인을 진가장으로 데려왔다. 파천의 처소에는 광인과 그의 동생인 사라, 천마가 함 께 있을 뿐이었다.

 "그대의 오빠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는 알겠지?"

 "네......"

 "그대의 부친도 알고 있나?"

 "물론이에요.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하셨죠. 제가 아버지의 금령(禁令)에도 불구하고 오빠를  따라 들어온 것이예요."

 "뭐야? 그렇다면 네 말은 효력이 없는 것일 수도 있겠구나."

 "그것은 그렇지가 않아요. 먼저 제 아버님의 오빠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에요. 오빠가 지금은  이런 모습이지만 한때는 북해검궁 사상 최고의 기재로 추앙 받던 시절이 있었지요. 아버지 의 기대와 총애는 남다른 것이었어요. 그러니 오빠를 도와준 사람을 나 몰라라 할 분이 아 니시죠."

 "단지 그런 것으로 우리의 계약이 성립이 되겠느냐? 좀더 확실한 것이 있어야 한다."

 "저로서는 더 이상의 확실한 대답을 드릴 방법이 없군요. 필요하다면 저도 인질이 되어 드 리죠. 그러면 되겠어요?"

 "으음"

 '그러면 확실하긴 하지만 저 귀찮은 혹을 달고 다녀야 한단 말인가? 이것 내가 괜한 짓 하 는 것은 아닌가 몰라?'

 "좋다. 뭐, 그 정도 각오라면 믿을 만 하겠군. 그런데 어떻게 하다 구음진경은 익히게 되었 지? 지금껏 그 누구도 성공하지 못한 괴공이거늘......"

 "그래요. 원래부터 이 무공은 우리 북해빙궁의 것이었죠. 무림에 알려진 단 한번의 출현도  400여년전, 제 선조 중 한분이었어요. 그 분도 구음진경을 익히며 발생하는 심마를 이기지  못하고 광인이 되셨어요. 그 이후로 구음진경의 무공은 그 누구도 보거나 익히지 못하게 되 었죠.

 그러나 아버님의 기대는 워낙에 총명하고 뛰어난 무골이었던 오빠에게 쏠려 있었고 어쩌면  오빠야말로 이것을 대성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 생각하시게 된 것이죠. 그래서 어렸을  때부터 갖가지 영약으로 벌모세수를 하고 내공을 쌓고 구음진경을 익히기 위한 준비를 시켰 어요. 그리고 11살이 되던 해부터 구음진경을 익히게 하셨죠.

 그러나 결국 오빠도 심마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보시는 것처럼 지금 같은 지경이  되었어요. 점차로 의식이 돌아오는 시간이 짧아지더니 급기야는 본 궁에서 혈겁을 일으키고  도주하기까지 이르렀죠. 그때부터 아버지는 오빠를 잊으라고 하셨어요. 그러나 저는 그럴  수 없었어요. 하나밖에 없는 오빠이기에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겁니다. 그러나 중원으로  들어온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어요.

 그 누구도 오빠를 제압할 고수가 우리 중에는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겁니다. 실제로 오빠와  마주친다 해도 오빠를 제압하지 못하면 소용이 없으니, 게다가 일시 오빠의 행방을 놓쳐버 리기까지 했답니다. 그러다가 무림맹 지부의 참사를 발견하게 되었고 오빠의 짓임도 알게  되었죠. 그래서 무림맹의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물론 옥면신룡의 근황을 알 수 있 지도 않을까 하는 기대와, 어쩌면 오빠에게 던져줄 새로운 미끼가 필요했는지도 모르지요. 

 ......대령사가 오빠를 제압할 만큼 고수라서 다행이에요."

 그녀의 긴긴 설명은 파천이 예상한대로 였다.

 ★ 천향옥봉은 남도맹을 벗어나자 강을 건너 북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녀가 가는 방향은 개봉 부 쪽이었다. 파천을 찾아가기 위함이었다. 결코 자신의 생명을 구걸하고자함이 아니었다. 

 어쩌면 자신의 생명보다 더 귀할 수도 있는 귀중품을 운반하는 신성한 책무를 지니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곧 이어 그녀는 추적을 받아야만 했고 그녀의 행동반경이 적의 천라지망 속 에 있음을 이내 깨달아야만 했다. 그처럼 그들은 신속했다.

 '이들이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것은 이총사나 대총사중에 하나가 돌아왔다는 말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리 신속할 수는 없지 않은가? 어쩌면...... 내 행동을 미리 예상하고 포위 망을 구축해 놓은 듯 하니...... 말도 안 돼. 만약 그런 것이라면 아버님은......'

 심정이 착잡해져 온다. 그렇다고 여기서 멈추거나 돌아갈 수도 없다. 지금 품속에는 자신의  생명보다 귀한 것일 수도 있는 절세비급이 있다. 이것을 혈마천에 빼앗길 수는 없다. 아버 님이 생명을 고스란히 적의 수중에 맡기면서까지 빼내려 했던 비급이다. 천향옥봉은 그것을  알기에 이를 앙 다물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개봉부까지 가야하는 것이다.

 처음에 남도맹을 나올 때 만해도 말을 타고 있었다. 그러나 더 이상 말을 타고 갈 수 없음 을 느껴야만 했으니, 남도맹과 혈마천의 무사들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각 요로  마다 진을 치고 있었고 관도나 소로, 숲, 할 것 없이 그들의 감시망은 방대한 지역에 걸쳐 있었다.

 천향옥봉은 장강을 건너자마자 무창에서 서북방향인 안륙(安陸)으로 움직여갔다. 무창과 안 륙사이에는 그다지 울창하지는 않으나 넓은 숲이 자리한다. 그곳이 바로 화룡림(化龍林)이 라는 곳으로 마치 용이 꿈틀대는 듯 구불구불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곳을 넘어 서야 안륙으로 들어갈 수 있고 그곳에 가야만 개방의 분타가 나온다. 그녀의 생각은 어차피  개방의 태상방주인 개왕을 만나야 한다면 먼저 소식을 전하는 것이 여러모로 나을 듯 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계획은 초반부터 장벽에 부딪히고 말았다. 도무지 틈이 보이지 않았다. 포위망은 너 무나 촘촘하여 앞으로 전진하기가 쉽지 않았다. 만약 이들에게 발각되기라도 한다면 도주는  힘들 것이라 여겨졌다. 그 자신이 한때는 그들을 지휘하는 입장이었기에 혈마천의 천라지망 이 얼마만한 위력이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던 것이다. 현재 중원에 나와 있는 혈마천의  인물 중에 그에게 위협을 줄 수 있는 자는 세명을 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것은 개개인으 로 대적했을 때의 얘기고, 떼로 덤비는데는 당할 수가 없다.

 천향옥봉은 나무아래에 있는 덤불에 몸을 은잠하고 있었다.

 '마냥 이렇게 있을 수는 없다. 이 밤이 다 가기 전에 탈출하지 못하면 내게는 더 이상의 기 회는 없다. 어떻게 해서든지 안륙 까지는 가야한다.'

 설사 그곳에 도착한다 하더라도 무사히 개봉까지 갈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럼에도 유 일한 방법이기에 그녀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의 은잠술이 하도 교묘했는지라 그녀 앞을 지나치면서도 알아채지 못했다. 반경 30장안 에만 해도 십 여명 이상이 어른거렸다. 아마도 천향옥봉의 이동경로를 화룡림으로 보는 듯  했고 그래서인지 이곳을 중심으로 천라지망이 펼쳐져 있었다. 그들의 이런 움직임은 이곳  어딘가에 천향옥봉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지 않고는 배치 될 수 없는 진형 이였다.

 혈마천의 이총사, 독고한천은 머리를 흔들었다. 그의 뒤에는 몇 사람의 무사들이 보인다.

 "아니다. 이곳을 아직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쯤 어딘가에 숨어서 틈만보고 있겠지. 

 후후 계집년, 너한테 이런 날이 올 줄은 몰랐을거다. 사형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려 했더니  먼저 꼬리를 드러내는군. 하긴 더 이상 이곳에 있음이 불안했겠지."

 그의 말로 봐서는 천향옥봉의 변심을 눈치챈 것이 꽤나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왜 내가 너를 그냥 두었는지 아는가? 후후 바로 혈영뇌전도법 때문이었지. 내가 맹 을 비우니 이때다 싶어 움직였단 말이냐? 그렇다면 지금쯤 너의 품속에 그 도법이 있겠군. 

 그것을 차지하기만 하면...... 후하하하"

 그가 서 있는 곳은 화룡림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이었다. 한밤중인지라 아무것도 보이 지 않음에도 그는 마치 천향옥봉이 어디 있는지를 아는 사람처럼 한곳을 뚫어지게 쳐다보았 다.

 "사우를 죽이는 것이 실수였다. 그 녀석을 죽이지 않았다면 어쩌면 오늘의 탈출은 성공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 녀석을 죽임으로서 이제 머지않아 네가 남도맹을 떠나리라는 것 을 직감했다. 후후 고맙구나 천향옥봉! 네가 내게 보물을 안겨주다니......"

 이미 자신의 수중에 들어 온 듯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는 독고한천이다.

 '여길 빠져나가는 방법은 한가지 밖에는 없다. 천라지망안에는 은잠자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작전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킨다. 내놓고 다니는 놈들은 그다지 위험하지 않다. 그 놈 들이 문제지...... 그 놈들의 위치를 파악하고 한 놈씩 죽여가면서 이동하는 수밖에는 없다. 

 후우 과연 가능할까?'

 점점 탈출의 성공여부에 먹구름이 끼는 듯 했고 회의감이 몰려왔다.

 ★ 사천성 성도에는 오련회의 총단이 자리한다. 사천에는 원래 정도 거파들의 본거지가 많은  관계로 예부터 마도가 힘을 떨치지 못하는 곳이었다. 성도에 있는 오련회 소속문파들을 제 외하고도, 구정련의 소속 문파인 사천성 서부의 아미산에 있는 아미파(峨嵋派), 점창산의 점 창파(點蒼派), 성도 서북쪽의 청성파(靑城派), 이외에도 청룡장(靑龍場), 구룡방(九龍房), 청 검장(淸劍場), 낙일검문(落日劍門), 추경부(追經府)등의 정도명문들이 존재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인가 이곳 사천에서 괴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고 각 대문파들뿐만 아 니라 작은 문파들마저 각기 문중의 단속에 들어갔으며 외부 출입을 삼가고 있는 실정이었 다. 이런 참에 무림맹에서 일단의 무사들이 파견되어 왔고 그들은 오련회를 중심으로 거대  문파들의 수장들을 소집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괴사를 파헤쳐가는데......

 일의 발단은 추경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문도수 1200명정도였는데 하루는 자시가  넘기는 시간에 괴이한 소성(簫聲)이 울려 퍼지더니 먹구름이 추경부 전체를 휘감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전 문도들이 나와서 횃불을 밝히고 경계를 강화했지만 별다른 일은 없었다. 그 래서 별일 아니겠거니 하고 들어가 자려는데 비명소리가 고요한 밤하늘을 찢어 놓으며 울려  퍼지는 것이 아닌가?

 그 소리의 출처는 안채 쪽이었고, 그곳은 추경부의 부주인 만장석의 부인과 딸들이 머무는  곳이었다. 만장석을 비롯한 추경부의 고수들이 달려가 보았을 때는 이미 모든 일은 벌어진  뒤였다. 부주의 부인과 세명의 딸, 시비 12명의 옷이 모두 벗겨진 채, 가슴이 도려져 있는  것이 아닌가? 참으로 끔찍한 혈사였다. 추경부는 이 일을 외부에 퍼져나가지 못하게끔 단속 을 하고 비밀리에 흉수를 추적해갔다. 그러나 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매일 밤 이런 혈사는 벌어졌고 어김없이 그일을 당하는 곳은 무림문파들이었다. 그것도 문 의 수장의 식솔들, 그 중에서 여자들만이 참변을 당했다. 지금까지 사천성내에서 11개문파 에서 이런 혈사를 겪어야만 했고 각 문파들은 만전에 만전을 기하며 경호에 신경을 썼다. 

 그것이 주효했음인지 그 이후에는 아무 일도 없는 듯 하더니 또 다시 혈사가 벌어진 곳은  청룡장이었다.

 아직 마음을 놓지 못한 청룡장주는 약 300명 이상을 부인의 처소를 중심으로 해서 경비를  세우고 있었지만 누구하나 흉수를 보지 못했다. 장주의 부인과 딸하나. 처제 두명이 변사체 로 발견되었고 그녀들 또한 가슴이 도려져 죽었다. 문제는 장주 조차 그 사실을 느끼지도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점차로 각 문파에 두려움이 엄습해가기 시작했다.

 오련회의 회주이자 무림맹 부맹주이기도 한 창천신검 남궁휘는 각 문파들의 수장들의 식솔 들을 한곳으로 모았다. 그들이 머무는 곳은 오련회의 심처였다. 처음에는 아직 변을 당하지  않은 문파들이 반대를 했지만 워낙에 강경하게 남궁휘가 명했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오련회의 의사청에 모여 있는 사람의 면면은 현 무림에서 그 명성이 자자한 인물들이 대부 분이었다. 서부무림의 주축인물들이기도 했고 무림맹에서 일좌씩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  대부분이다. 회주를 비롯해서 점창장문인인 섬전검, 아미파의 옥허신니, 청성의 청운검객, 

 무림맹 천무당주이자 오련회주의 동생인 낙성검 남궁환등이 보였고 당문주와 팽가주, 언가 주, 모용세가주, 청룡장주, 구룡방주, 청검장주, 낙일검문주, 추경부주등이 자리를 함께 했 다. 명실공히 서부 무림맹이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자리였다.

 남궁휘가 무거운 신색을 보이며 좌중을 둘러본다.

 "아시다시피 지금 현 무림의 정세는 참으로 안개 속과도 같소이다. 한치를 장담할 수 없는  위험이 보보마다 입을 벌리고 있는 셈이오. 이런 형국에 이번 괴사를 처리함에 신중하게 대 처하지 못하면 무림정세에 치명적으로 작용할지도 모르오. 아마도 내 생각에는 변방무림의  짓인 것은 분명할 것이오. 우선 어떤 세력의 짓인지를 밝혀내고 그들의 도발을 방비함에 부 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오."

 정창파 장문인이 회주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참으로 기이한 일이 아닙니까? 대체 어떤 자들이기에 흔적도 없이 살인을 하고 사라진단  말입니까? 모든 눈과 귀를 막아버린 듯이 유유히 살인을 하고 사라지니...... 참으로 난감한  일입니다."

 그 말에 청룡장주가 나서며 흥분하여 외쳤다.

 "내가 두 눈 멀쩡히 뜨고 식솔들을 잃었소이다. 바로 지척에서 자고 있던 나조차 느끼지 못 했으니......"

 그의 눈에는 분노이전에 수치감이 가득했다. 여태껏 그는 스스로 자신의 무공이 최고라 생 각해 본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서부무림의 한 기둥의 역할을 충분히 하는 자였고  그의 무공은 1000명이 넘는 문도를 거느린 사람으로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흉수 의 움직임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그를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누구하나 그를 비웃는 사 람은 없었지만 그 스스로 그런 수치감에 이 자리에 앉아 있기가 힘겨웠다.

 천무당주 남궁환이 형님인 회주를 쳐다보며 하는 말이,

 "더 이상은 그런 일이 없을 것입니다. 이미 이곳에는 무림맹 천무당 소속 5000명과 본회의  6000명, 각 문에서 증원시킨 고수 2000명이 진을 치고 있습니다. 설사 귀신이라도 이런 경 비 속에서 살인을 자행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구나. 상대는 한번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단서 가 될만한 점도 없었고......흠흠...... 사체들을 부검해본 결과도 어떤 특별한 점은 없어보였 고......"

 남궁휘는 그 말을 하며 청룡장주를 의식했다. 아니나 다를까? 청룡장주 또한 얼굴이 벌개져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의 괴사를 조사하는 과정에 변사체에 대한 부검이 따랐고 그  대상들이 하나같이 문파 수장들의 부인이나 딸들이었으니...... 물론 이미 죽은 시체라고는  하나 그 모습을 만인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냈으니 그 당자가 이 자리에 있으므로 신경이 쓰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여기다 남궁환이 한 말이 더욱 청룡장주의 마음을 무겁게 하니 그의 말인즉슨,

 "시체들은 하나같이 가슴이 깨끗하게 도려져 있었고 다른 곳에는 상처가 보이지 않았습니 다. 더군다나 그 상처라는 것이 원래 그렇게 생겨 먹은 것처럼 절단면이 자연스러우니 흉수 의 무공이 가공지경임을 알게 해 줍니다."

 원래 남궁휘와는 달리 그의 동생 남궁환은 눈치가 없고 단순 우직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 곳에 청룡장주가 있고 없고를 염두에 두는 사람이 아니었다. 남궁환이 말을 이었다.

 "만약 오늘도 흉수가 이곳에 나타난다면 아마 내년 이맘때가 그놈의 제삿날이 될 것입니 다."

 그가 확실하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가며 주먹까지 불끈 쥐어보였다. 남궁휘는 그런 동생을  보며 내심 한숨을 쉰다.

 "그것은 그렇고 내 듣기로...... 정도사령대에도 변고가 발생했다는 구려."

 "네? 무슨......"

 "맹에서 온 전서구에 따르면 무려 300명이나 사살되었다 하더이다."

 팽가주가 놀라 외친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자기 아들 또한 정도사령대에 소속되어 있으니 놀라는 것은 당연했다. 그 놀람은 그 혼잔만 의 것이 아니었다. 여기 있는 사람치고 정도사령대와 관계가 없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 들의 아들이나 제자가 포함되어 있었으므로 그 놀람은 극심한 것이었다.

 "사실이오. 그러나 다행인 것은 흉수를 잡기는 했다고 하오."

 "대체 대령사께서 계신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는 말이오?"

 "그것이 대령사와 함께하지 않은 쪽에서 변고가 발생했는지라...... 흉수를 잡고보니 이미 사 상자가 속출한 뒤라....."

 장내는 더 한층 분위기가 무거워져간다. 누구하나 말을 하지 않았다. 들리는 소식이란, 하나 같이 절망적인 소리들 밖에는 없으니......

 오련회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사람으로 보이는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한 명은 누웠고 한  명은 서 있었다. 서 있는 자는 등을 거목에 기대고 있었으며 입에는 어디서 꺾었는지 갈대 줄기가 매달려 흔들린다. 누워있는 자는 팔을 머리위로 해서 떠받치고 있었다. 그의 시선은  불타는 듯 훤한 오련회의 전경을 바라보고 있다. 참으로 기이한 느낌을 주는 소녀였다. 이 제 나이가 17세나 되었을까 싶은 나이에 얼굴은 회색으로 빛나고 있다. 두 눈이라고 짐작되 는 곳은 휑하니 뚫려있었고 깨알같이 작은 빛이 가끔씩 빛날 뿐이었다. 눈과 얼굴빛만 아니 라면 절세 미인이라 할 만도 했으나 그 두 가지 때문에 마치 귀신처럼 보였다.

 "소소 무엇을 그리 망설이지?"

 나무에 등을 기대고 있는 녀석의 질문이었다. 소소라고 불린 소녀는 한 팔을 머리 밑에서  꺼내더니 옆의 풀을 쥐어뜯었다. 그리고 손안 가득히 들어온 풀잎들을 허공 중에 비산 시키 며,

 "아무래도 오늘은 힘들지 않겠니? 좀더 기다려보는 것이......"

 "후후 너도 겁이 난다는 말이냐? 이것은 순전히 우리들의 의지로 하는거다. 비록 사형들이  와서 우리의 성급함을 질책할지는 몰라도 어쨌든 시작했으니 마무리는 지어야지."

 그 말을 하는 녀석은 남자아이였다. 누워 있는 소녀와 판에 박은 듯이 닮아 있었지만 덩치 가 조금 더 컸다.

 "소랑, 그런 소리 말아라. 나는 일을 끝내기 위해 무리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 일을 시작 하게 된 동기가 네 말이 그럴 듯 해서도 아니고, 특별한 충성을 발휘하기 위해서도 아니야. 

 나는 이 일이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야. 그런데......"

 "그런데?"

 "생각보다 재미가 없어. 중원의 아이들을 상대하는 것이 꽤나 재미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그 게 아니었어. 이런 중원 무림이라면 휘저어 봐야 별놈이 나오겠니? 저기 모여 있을 놈들도  하나같이 한심한 놈들 밖에는 없을 거야."

 "너!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니냐? 적어도 내가 아는 중원은 그렇게 약하지 않다. 아직 고 수를 만나지 못해서 그렇지, 꽤나 많은 고수들이 있을 거야."

 "그래봤자지......"

 그들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중원무림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공기 돌 정도로 여기는 이  아이들은?

 "사실 우리가 여기 먼저 온 것은 무림의 동정을 조사하는 것이었는데...... 너무 일을 크게  벌여 버렸군......"

 "그래서 후회하니?"

 "후회는...... 단지 사형들의 잔소리가 듣기 싫을 뿐이야."

 "호호호 좋다. 기분이다. 까짓 한번만 더 저질러보자. 그러고 나서 잔소리를 듣던지 아니면  도망을 가든지.... 깔깔깔"

 누워 있는 소녀가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며 사악한 미소를 지었다.

 ★ 처음 발각된 곳은 겨우 200장정도를 진행하고 나서였다. 한 명의 은잠자를 처치하고나서  주위를 살피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바로 나무 위에 또 한 명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 놈 은 곧 바로 천향옥봉에게 덤비지 않고 호각을 꺼내어 신호를 해댔다. 그 소리에 놀라 위를  쳐다보는 순간 두 사람은 눈이 마주쳤고,

 "이놈 죽어라"

 푸확

 그 놈은 천향옥봉의 장력에 온 몸이 터져나가며 즉사했다. 그런 것을 감상하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천향옥봉은 이미 위치가 드러난 이상 전력으로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다 여겼고 그  생각은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이어졌다.

 쉬익

 천향옥봉의 발이 한번씩 지면을 박찰 때마다 족히 50장 이상을 한번에 튀어나갔다. 너무나  빠른 신법인지라 주위 경물이 채 영상을 잡지도 못하고 흩어질 정도였고, 그를 막아서거나  뒤따르던 놈들도 금방 뒤처지고 만다. 그러나 천향옥봉은 알고 있었다. 곧 그녀로서도 곤란 을 겪을만한 고수들이 앞을 막아 설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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