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8. 탈 출 - 3 (68/111)

 68. 탈 출 - 3

 때로는 많은 사람이 함께 있다는 사실조차 큰 위로가 되지 않을 때가 있다. 지금이 그랬다. 

 밤의 적막의 결을 따라 달의 비추임으로 흘러 다니는 퉁소소리가 마치 영혼의 낮은 울부짖 음처럼 심금을 저려오고, 때아닌 밤바람에 흠칫 놀라며 몸을 추슬러 보면 어느새 안개가 자 욱하니 시야를 가려온다. 서로를 느낄 새도 없이 그것은 신비경으로 저마다를 이끌고 고스 란히 홀로 두려움을 감당해야 하는, 그래서 지척에 동료를 두고 있음에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지난 일의 괴사가 사람의 손길이 개입하지 않은 귀신의 장난쯤으 로 여겨지고 지금의 상황은 그러함을 확정이라도 하듯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각인되고 있지  않은가?

 남궁환은 고함을 질러댔다.

 "모두 정신들 바짝 차려라. 한 눈 파는 놈이 있다면 내 검이 먼저 그 놈의 심장을 멈추게  하리라."

 그 말은 오히려 스스로를 일깨우기 위해 하는 말이기도 했다. 그 조차 이 상황이 무엇인가  초자연적인 현상에 의한 것이 아닌가 의심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삘리리리

 소성은 멈춤이 없었다. 어디에서 비롯되는 소리인지, 저것이 정말 퉁소의 소리인지조차 분 간이 가지 않는다. 가만히 듣고있자면 어느새 스스로의 존재감마저 망각해 감에 섬뜩하니  놀란다.

 점차 안개가 짙어지고 이번에는 퉁소의 소리에 묻혀 새롭게 일어서는 소리가 있었으니,

 "크크크크"

 오련회 무사들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지고 부들거리며 몸을 떨어대는 사람들도 생겨난다.

 "이런 빌어먹을...... 대체 어떤 놈이 장난질이냐? 어서 썩 모습을 보이거라. 감히 이곳이 어 디라고 해괴한 짓을 일삼는단 말이냐?"

 남궁환이 내공을 실어 고함을 질러 보았지만 이미 맹렬하게 뛰기 시작한 심장의 지나친 고 동소리를 멈추게 할 수는 없어 보였다. 안개는 살아 있는 듯 했다. 제 스스로 생각하고 판 단하여 움직여 가듯이 무사들의 사이를 비집고 흘러 다니더니, 점차 안쪽으로 몰려 들어간 다.

 "으......으으"

 누군지 모를 무사의 흐느낌이 뒤를 잇는다. 두려움에 물든 무사는 자신의 몸을 타고 오르는  안개를 떨쳐내려고 이리저리 뛰어보았으나 허사였다.

 "저, 저럴수가?"

 남궁환은 벌리고 있는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이런 괴사는 보도 듣도 못한 것이기에 그 놀 람은 더욱 컸다. 한 명의 수하가 광분하여 날뛸수록 그의 의복이 이리저리 갈라지는가 했더 니 점차로 그의 온몸에서는 가는 혈선들이 그어지기 시작했다. 마치 몸 속의 피가 저절로  살을 가르고 튀어나오는 듯 했다. 금새 모든 의복이 잘게 조각나고 온몸의 피부가 균열을  일으킨다.

 푸확

 개구리의 배를 서서히 밟아 가면 나중에는 그 압력으로 한꺼번에 내용물을 뱉어내듯이 수하 의 몸 안의 장기들이 균열을 비집고 밖으로 꾸역꾸역 흘러 나왔다. 그 상태로도 살아 있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남궁환은 멍하니 그 장면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나 그럴 여유가 그에게는 없었다. 이미  이곳 저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한 일에 그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고 더군다 나 그들이 질러대는 비명이 더욱 급박하게 그의 침착함을 뺏어 버렸다.

 "아악"

 "꺼억"

 무엇인지도 모를 안개에 휩싸여 온 몸이 난자되어 죽어 가는 모습은 아무리 스스로를 설득  해 보아도 도저히 사람의 짓이라고 볼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무슨 행동인가를 취해야만  했다.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그에게만이 그럴 책임을 요구하고 있었으니,

 "멈춰라"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도 모를 말이 그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는 곧장 검을 뽑아 들고 안개를 찔러갔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검으로 아무리 안개를 찔러 보았으나 여전히 검 에 무엇인가가 닿는 느낌은 들지 않았으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음에도 그로서는 용납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귀신 따위가 인간의 생명을 이런 식으로 뺏어간다는 얘기는 어린 시 절에도 들어보지 못했고 또한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백검단류(白劍斷流)"

 남궁환의 검에서 검강이 피어나더니 검은 안개를 잘라갔다.

 스팟

 안개는 검에 달라붙으며 제 몸을 흔들어 흩었다. 그 또한 소용이 없었다. 정말 스스로 미치 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지금 자신의 두 눈을 뽑아 버리고 싶은 충동이 자꾸만 치밀어 올라 온다.

 십 여명의 희생을 뒤로하고 안개는 어딘가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말끔히 걷혀진 장내는 죽 어간 자들의 흔적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지만 누구하나 그것을 수습하려 하지 않았고 그 렇다고 어떤 돌발적인 행동을 취하지도 않은 채 멍하니 서 있을 뿐이었다.

 "이런 빌어먹을"

 남궁환은 그 말을 하고서는 안개가 흘러가는 방향으로 몸을 솟구쳤다.

 ★ "비명소리가? 누군가 오기는 왔군."

 남궁휘의 말에 모두들 안색을 굳힌다. 밖의 상황이야 어찌 되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적의  내습이 있는 것만은 분명하리라. 여자들은 대전의 한쪽에 몰려 있었는데 그들의 숫자가 물 경, 백을 헤아리고 있었다. 그들 중 상당수가 무공을 익힌 무림인들 이기도 했으나 지금과  같을 때에는 별로 소용이 없는 미미한 수준들에 불과했다. 몇몇은 일류고수의 반열에 오른  이들도 있겠으나 지금 대전에 포진하고 있는 각 문의 수장들에 비하면 내세울 것도 없는 경 지였다. 그러니 뒤에 물러서서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으악"

 비명소리에 모두들 서로의 시선을 찾았다. 이번의 것은 좀더 가까운 곳에서 들렸기 때문이 다. 한참동안 비명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고, 금새 대전 바로 앞에서 들려오기 시작 했다. 한참이나 지났을까? 대전의 문틈으로 시커먼 연기가 스며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모습 을 본 고수들은 잠시지간 어찌 할 바를 몰랐다. 그것은 안개였다. 보통의 것보다 좀더 짙었 을 뿐이었으나 그것은 분명히 안개였다. 그것을 유심히 관찰해가던 남궁휘는 고함을 질러댔 다.

 "저것은 안개가 아니오. 저것은...... 설마 그것이 다시 재현되었다는 말인가?"

 그는 놀람의 소리를 발했으나 그 보다 먼저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소리에 그의 상념은 잠시  뒤로 물러서고야 만다.

 쾅

 남궁환이었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검이 쥐어져있었다. 그는 재빠르게 움직여 안개의 앞을  막아섰다.

 "환아 비켜서거라."

 남궁휘가 동생을 불러 들였다. 그럼에도 남궁환은 꿈쩍도 하지 않고 기분 나쁜 안개만을 쳐 다보고만 있었다.

 "대체 저것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점창파 장문인인 섬전검이 안개가 스물 거리며 한곳으로 뭉쳐 가는 모습을 쳐다보며 하는  말이었다.

 "저것은...... 전설의 흑혈유마공이외다."

 "흑혈유마공?"

 "설마......"

 모르는 사람도 있고 알고 기성을 발하는 이도 있었다.

 흑혈유마공(黑血流魔功)!

 이것은 무림사의 무공들 중, 최고의 괴공이라 할 만 했다. 이것이 그런 이름을 지니게된 데 는 특별한 사연이 있었다.

 유마(流魔) 소독청(燒毒淸)!

 무림사에 명멸해간 마인들 중 가장 특이한 위치에 올라 있는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마인 들 이 그러하듯 그 또한 어린 시절을 너무나 불우하게 보낸 사람이었다. 두 명의 아버지와 두  명의 어머니를 둔 사람이 그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어찌 부모가 두분 씩 이나 있을 수 있 겠는가 만은, 그에게는 참으로 기이한 사연이 있었다.

 자기를 낳은 생모에게는 두 명의 남자가 있었다. 그 둘은 서로 절친한 친구사이였고 동시에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그것을 서로에게 감추었다. 어느 날 소독청의 생모 는 그 중의 한 사람과 야심한 밤에 만나게 된다. 물론 그것은 그 남자의 요청에 의한 것이 었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약속장소로 나간 그녀에게 그 남자는 사랑을 고백했고, 그녀는 이 미 그 남자의 친구를 마음속에 담아 두었으므로 냉정하게 거절한다. 물론 청춘남녀들에게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으나 그녀로서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 사내가 여자를 강제로 취하게 되고 그 남자는 비웃음을 흘리며 냉정하게 돌아선다. 일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또 한 명의 남자,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정녀가 친구와 함께 으슥한  곳에서 일정한 시간차를 두고 나오는 것을 목격하게 되고 친구가 사라진 다음 그녀를 붙잡 는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또한 겁간하게 되니, 그녀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이후 그 두 사람은 돌아가며 그녀를 희롱하고 결국 임신을 하여 유마를 낳 기에까지 이른다.

 세 사람은 이후 묘한 동거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여자 하나에 남자 둘. 두 사람의 사내는  일정한 시간을 주기로 집을 떠나기 일쑤였고 그 때마다 다른 남자가 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집을 나간 지 6개월이 다 되어 나타난 사내는 한 여자를 데리고 나 타났다. 결국 두 남자와 두 여자가 한 집에 함께 살게 된다.

 문제는 유마의 생부가 누구냐는 데에 있었다. 이후 두 여자 모두 아기를 갖지는 못했다. 그 래서 두 남자는 서로 자신이 소독청의 아비임을 내세워 보지만 그것을 증명할 길이 없었다. 

 심지어 유마의 생모조차 그것을 알지 못했음에야! 결국은 그렇게 복잡하게 얽힌 생활은 시 작되었고 어느덧 소독청이 8살이 넘어가던 때였다. 그때까지는 비교적 순탄하다 할 정도의  생활이었다.

 그 해 겨울, 유난히 눈이 많이 내려 온 대지가 하얗게 뒤덮인 때였다. 유마의 생모는 한만 은 생을 마감하고야 만다. 그 뒤로부터는 새로 온 여자가 유마의 어머니 역할을 한다. 그때 까지도 두 남자는 서로 자신이 생부임을 내세우고 있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 일어났다. 

 그 여자는 유마의 생모가 있을 때만 해도 소독청에게 무척 잘해 줬으나 생모가 죽고 난 뒤 에는 태도가 급변하여 심하게 학대하기 시작했다.

 어린 소독청이 견디기에는 너무나 혹독한 시달림이었다. 서로 아버지임을 내세웠던 두 사내 는 유마를 괴롭히는 여자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서로 그 여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온갖 선심 을 쓰기 시작했다. 결국 서로 자신이 유마의 생부가 아니라고 우기기 시작하더니 오히려 그  여자보다도 더욱 유마를 괴롭혔다. 아직 나이 어린 소독청을 세 명의 어른들이 괴롭히는 양 상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유마 소독청은 눈이 녹기를 기다렸다가 따뜻한 봄이 오자 집을 몰 래 도망쳐 나오게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정처 없는 부랑아의 생활이 시작된다. 그는 참으로 운이 없어서인지, 가는  곳마다 냉대를 받았고 모든 사람들로부터 이용만 당했다. 어린 유마의 가슴에는 한이라는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그가 커서 어른이 되자 온 세상을 저주할 만큼 거대하게 자라나  버렸다. 그는 서장과 천축, 대월과, 남만, 동영 등을 돌며 각종 사공(邪功), 마공(魔功), 괴공 (怪功)등을 익히다가 우연히 흑혈마공(黑血魔功)이란 것을 접하게 된다.

 마도에서조차 금기시하는 이단 마공인 흑혈대법이란, 생후 100일이 안된 어린 영아들을 5 가지의 독물에 담가서 그 정수만을 빼 내고 이런 식으로 100명을 채우게 되면 그 독물자체 에 영성이 담기고 마류가 흐르게 된다. 그것을 온몸의 모공을 통하여 흡취하고 흑혈대법의  독특한 심법으로 연공 하게 되면 3년이 지나지 않아 온 몸에 흑혈이 가득하게 되니 이것이  곧 흑혈마공이다.

 유마는 그 무공을 더욱 발전 심화시켜 강호에 등장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유마의 난(亂)의  시작이었다. 그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구대문파도 그의 상대는 아니었으며  온 세상이 비좁다 하고 설쳐대던 마도, 사파의 거두들도 그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만 했 다. 그가 나타나는 곳에는 언제나 검은 안개가 휘돌아 다녔고 그가 살심을 품으면 상대는  어김없이 검은 안개에 휩싸여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고는 했다.

 그가 어느 정도 무림에 흉명을 떨치기 시작할 때 그가 언제나 마음 한 편에 미뤄 두었던 일 을 하게 되니, 그것이 바로 자신의 생부일지도 모를 두 사람과 그들의 여자를 죽이는 일이 었다. 그는 세 사람을 자그마치 33일간이나 쇠고랑에 채워서는 질질 끌고 다니며 온갖 학대 를 하고 고문을 했고 결국 세 사람은 오래지 않아 곧 죽었으나 그래도 유마는 썩어버려 악 취가 나는 시체들을 쇠고랑에 채워서는 끌고 다녔다 한다.

 "저것이 정말, 흑혈유마공이란 말입니까?"

 청성장문인의 되물음에 남궁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저것이 정말 흑혈유마공이라면 상황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나쁘다 할 수 있었다. 

 과연 이 중에 자신 있게 흑혈유마공을 제압할 수 있다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있겠는가? 무림 칠기중의 일인인 오련회주조차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창천신검 남궁휘가 최초의 패배를  당할지도 모르는 날이었다.

 ★ 피가 흘러 내를 이룬다는 말은 이런 경우를 일컫는 것이리라.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는 인 간의 장벽은 그녀로서도 어찌 할 수 없는 절망감을 안겨주고 그것은 급속하게 그녀를 지치 게 만들었다. 손에는 앞길을 막아서는 자들에게 뺏었음직한 무기들이 쥐어졌다가는 상대의  몸을 파고들고는 그 소용을 다하고는 했다. 장법만으로 상대하기에는 상대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 내력의 소모를 줄이기 위함이었고 또한 그들의 기세가 흉험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 이었다. 어찌된 연유인지 그녀를 막아서는 자들은 하수들에 불과했고 그녀에게 위협을 줄만 한 고수자들은 모습도 비치지 않았다.

 '아, 이곳을 벗어나기란 이제 틀린 것 같구나. 아버님 죄송합니다.'

 그녀는 눈을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이미 자신은 완벽한 포위망속에 빠져 있었고 족히 천을  헤아리는 무사들이 제각기 병장기를 꼬나 쥐고는 살기 찬 시선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 

 화룡림의 가운데 지점에 해당하는 곳에 자리하는 비교적 큰 공터였다. 사냥몰이를 하듯 그 녀는 자연스럽게 그들에 의해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마치 잘 짜여진 각본에 놀아난 광 대처럼 여겨져 스스로를 나무라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휘이이이잉

 한줄기 바람이 그녀의 옷자락을 스치고 지나간다. 바람결에는 피 내음이 고여 있었다.

 "후우...... 그만 하자. 어서 나와라. 뭘 기다리는 것이냐?"

 나직한 말소리는 분명 대상이 분명한 말이었음에도 누구하나 대답하는 이가 없었다.

 "이총사, 그만 나오시지. 당신이 무엇을 즐기고자 하는지는 내 관심이 없으나 마지막으로 그 대 상판에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군."

 "우하하하하"

 휘리리리릭

 역시 그는 그녀의 예상대로 주위에 있었던 것이다. 천향옥봉의 전면에 뒷짐을 지고 멋들어 지게 나타나는 그는, 다름 아닌 한때는 무림맹주였던 혈마천의 이총사인 독고한천이었다.

 "상여락! 네 놈의 음흉함은 내 익히 알고 있었으나 지금 보니 개, 돼지만도 못한 놈이구나."

 상여락이라 불린 독고한천은 음흉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노려본다.

 "무슨 말이냐?"

 "수하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그들을 이리 헛되이 죽음으로 재촉한단 말이냐? 처음부터 네가  나서는 것이 옳지 않나?"

 "후후 계집! 착각하지 마라. 네 따위가 나와 손을 섞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자, 긴말  할 것 없다. 내 놓아라. 그것을 순순히 내준다면 깨끗한 죽음을 선사해 주지."

 "뭘 내 놓으라는 지도 모르겠으나 너한테 내어줄 것은 욕밖에는 없다."

 "후후 그런가? 하긴 홀딱 벗겨보면 밑천이 드러나겠지. 그 잘난 몸뚱아리 어딘가에 숨겨 두 었을테니...... "

 "이.......이이, 너 따위가 탐낼 물건이 아니다. 상여락. 제 분수도 모르고 욕심이 과하면 화를  불러들임도 모르나? 그리도 원하다면 주지. 받아라!"

 그 말을 하고는 순간 몸을 솟구치며 상여락에게로 돌진해 가는 천향옥봉!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검을 그에게 힘을 실어 내던졌다. 그리고 뒤이어 터져 나오는 장력!

 상여락은 몸을 슬쩍 비틀어 날아오는 검을 피하더니 한 손을 앞으로 내 뻗어 장난처럼 천향 옥봉의 장력과 마주쳤다.

 펑

 가죽 북 터지는 소리와 함께 위로 뿜어 올려지는 먼지바람이 일시 시야를 가렸다.

 "으음"

 결과는 너무나 뚜렷하게 두 사람을 갈라놓았다. 천향옥봉은 짓쳐가던 몸이 다시 반탄 되어  제자리에 오고서도 한참을 밀려나가 있었고 상여락은 어깨를 움찔 떨었을 뿐이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지금 이 순간, 상여락과의 격차를 좁힐 수는 없어 보였다. 그는 확실히 강했다. 그 의 주위에 늘어서 있는 고수들도 무시할 수 없는 자들이었으나 정작 천향옥봉에게 가장 큰  절망을 주는 장본인은 다름 아닌 그 한 사람이었다.

 그가 막기로 작정하면 여기를 빠져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녀는 마지막 한줄기  삶에 대한 애착을 끊어 버렸다. 죽기로 결심하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져 왔다. 참으로 기 이한 것은 이 순간 떠오르는 얼굴은 아버지인 사자도왕도 아니었고, 오빠도 아니었으며 지 존도 아니었다. 그녀의 남편인 광마존의 얼굴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를 한번만 더 보았으면  가슴이 이리 아리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자운! 좋은 말 할 때 그냥 다오. 우리가 그동안 쌓아온 정리도 있으니, 내 어찌 너를 핍박 하겠느냐? 차라리 저항을 멈추고 순순히 내 놓는다면......"

 그의 말을 천향옥봉 자운이 막아선다.

 "이것 말이냐?"

 그녀의 손에는 어느새 품속에서 꺼낸 비급이 상여락의 탐욕가운데 온전히 드러나 있었다. 

 그 순간 그것을 바라보는 무상신검 독고한천, 아니 상여락의 두 눈에 탐욕의 빛이 진득하니  흘러나온다.

 "그, 그래. 그것만 주면...... 너를 죽이지 않고 본천으로 압송시켜주마. 혹시 아느냐? 천주께 서 너를 어여삐 여기셔서"

 "닥쳐라. 호호호호 어디 힘이 있거든 뺏어 가봐라. 이것을 네게 순순히 내주리라 생각했더 냐?"

 상여락은 두 눈을 빠르게 굴렸다. 상대는 이곳에서 자신을 제외하고는 제일 고수이다. 그런  그녀의 손에서 비급을 뺏을 수 있는 자는 결국에는 자신 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을  고스란히 뺏기도록 그녀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데에 있었다. 상여락의 관심은 오 로지 비급의 탈취에만 머물러 있었으므로 지금껏 적극적으로 그녀를 상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의 염려는 천향옥봉이 마지막까지 몰리게 되면 비급을 훼손시켜버리지는 않 을까 하는것이었다.

 [자운. 네가 그것을 내게 준다면 너를 보내주겠다. 어차피 그것을 가지고는 여기를 빠져나 가지 못한다. 약속하마. 너를 온전히 살려서 보내 주겠다.]

 그가 얼마나 다급해 하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의 전음에 천향옥봉은 어이없는 실소를 흘려 낸다.

 "호호호호 똥줄이 타는가 보군. 네가 이것을 혼자 독식하려 하나본데. 과연 대총사나 천주가  그것을 용납할 것 같으냐? 이 많은 귀와 눈들은 어떻게 할 셈이냐?"

 '이런 쳐죽일 계집. 죽고싶어 환장했군.'

 상여락은 비급만 얻을 수 있다면 수하들을 전부 살인멸구(殺人滅口) 할 수도 있는 자였다. 

 그는 혈영뇌전도법을 얻으면 사형들을 넘어 설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래서 이렇게 애가 타 서 조급해 하는 것이다.

 '미련한 놈. 그것이 네 한계다. 지금 이곳에는 대총사가 와 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는 구 나.'

 그랬다. 분명히 대총사가 와 있었다. 그녀 앞을 막아섰던 삼혈랑은 분명히 대총사의 직계수 하들이지 않은가?

 천향옥봉은 손에 쥔 비급을 흔들어가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천하를 피로 적실만한 천고의 마공이다. 천연이 있는 자만이 이것을 볼 수 있는 자 격이 있다. 너는 이것의 주인이 아니다."

 "뭐라고? 모두 저 계집을 쳐라."

 상여락의 명령에 몸을 솟구쳐 가는 자들을 보며 천향옥봉이 미소를 머금는다. 그녀가 비급 을 두 손으로 잡고는 찢어버릴 듯한 자세를 취하자,

 "그만, 모두 멈추어라...... 멈추라고 하지 않았느냐?"

 다급한 상여락의 외침이 터져 나온다. 이총사의 명을 듣고 난 뒤에 거짓말처럼 전 수하들이  동작을 멈추었으나 몇몇 성질 급한 놈들은 벌써 천향옥봉의 앞까지 당도해 있었다. 그리고 는 머쓱해져서 천향옥봉을 쳐다본다.

 펑

 "으악"

 천향옥봉은 그 녀석에게 장력을 발출 해 죽여 버렸다. 참으로 재수 없는 놈이었다. 놈은 억 울하다는 호소의 눈빛을 천향옥봉에게 보내며 죽어갔다. 한번 주먹도 휘둘러보지 못하고 맞 아 죽다니?

 "이...... 이이이...... 후우"

 역시 천향옥봉의 태도는 그의 예상 대로였다. 이총사는 비급이 그녀에게 있고 또한 자신이  그 비급을 가지기를 원하는 한, 칼자루는 천향옥봉이 쥐고 있다 여겼다. 그렇다고 그녀에게  질질 끌려 다닐 수도 없다. 기회만 온다면, 그래서 천향옥봉이 비급을 훼손하기 전에 그녀 를 제압할 수만 있다면...... 그는 한번쯤은 그 기회가 오리라 여겼다.

 "호호호호 잘 생각해서 명령을 내려라. 네 말이 떨어지고 또는 네가 움직임을 보이는 바로  그 순간, 이 비급은 한줌의 재가 될 것이다. 네가 욕심을 버린다면야 지금이라도 날 죽일  수가 있겠지."

 눈앞에 죽어 있는 혈마천의 수하를 발로 툭 걷어찼다. 그러자 시체는 곧장 이총사에게 날아 가지 않는가?

 푸확

 어이없게도 이총사 상여락은 화공(火功)을 발휘하여 시체를 태워버린다. 새카맣게 타서 바 닥으로 떨어지는 시체는 모든 혈마천의 수하들의 동공을 가득 채우고야 만다. 수하를 거느 린 수장으로서 해서는 안 될 행동을 하고야 만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총사의 상태는 그 런 것 따위를 따지고 있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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