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탈 출 - 4
"호호호호"
"깔깔깔깔"
안개 속에서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터져 나온다. 소리의 진동에 따라 안개도 덩달아 출렁거 렸다.
남궁휘를 비롯한 무림맹의 고수들은 출렁이는 안개를 쳐다보며 침음성을 토했다. 분명히 사 람의 웃음소리였다. 그것도 아직은 치기를 벗지 못한 10대로 여겨지는...... 그러나 그 웃음 소리만으로는 상대를 짐작키가 힘들었다. 어찌 들으면 여자의 웃음소리 같기도 하고 또 어 찌 들으면 남자의 것인 듯도 했다.
"대단하구나. 흑혈유마공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드디어 안개 속에서 사람의 말이라 여겨지는 분명한 소리들이 전달되어 온다. 남궁휘는 침 을 꿀꺽 삼켰다.
"너희들은 누구냐?"
당연한 질문이었다.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고 싶나? 우리를 꺾어보아라. 그러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남궁휘는 조금 여유를 되찾아가고 있었다. 상대가 분명해 졌음에 마음이 놓이는 것일 게다.
그러나 이 중에 그 누구도 퉁소소리가 멎었음을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이것만 보아도 여전 히 그들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우리는 너희와 아무런 원한관계도 없거늘 대체 무슨 이유로 이런 혈겁을 벌이느냐?"
이번에는 점창 장문인의 호통소리였다. 마치 어린아이들을 훈계하는 듯한 어조였다.
"깔깔깔깔 참으로 웃기는 녀석들이군. 적이라 판단되면 죽이면 그만이지. 시시콜콜 그런 것 을 물어보다니...... 우리가 겁이 나나?"
이것은 엄연히 조롱이었다. 성질 급한 남궁환이 고함을 질렀다.
"이런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들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대가리에 피? 호호호. 결정했다."
"뭘?"
자기네들끼리 말을 주고받고 있지 않은가?
"여자들만 죽이고 조용히 사라지려고 했더니...... 저 녀석부터 죽일 거야. 그런데 어딜 도려 내지?"
"낄낄낄 어디긴 어디냐? 남자의 몸에서 가장 튀어나온 부분을 도려내면 되지."
"호호호호 좀 징그러울 것 같지만, 이 기회에 안계를 넓혀 두는 것도 괜찮겠지?"
둘이 주고받는 말에 남궁환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격분하여 뛰어든다. 그는 검을 곧추세우 고는 곧 바로 검을 좌우로 휘둘렀다. 그의 검이 휘둘러짐에 따라 안개가 출렁대었으나 그가 기대한 비명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손끝에 걸려야할 파육감(破肉感)도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 그의 몸짓은 미친놈이 검무를 추는 것처럼 우스꽝스럽기까지 했으며 그가 얼마나 전력 을 기울였는지 안개를 가르고 난 뒤에 바닥의 청강석을 한치나 갈라놓기까지 했다.
"으아아아아 이 놈들!"
그는 계속 선불 맞은 멧돼지처럼 날뛰어 보았지만 오히려 상대의 조롱만이 기세를 더하며 그에게 화답을 할 뿐이었다.
"깔깔깔깔"
"호호호호 미친놈이었군."
"환아"
남궁휘가 내공을 실어 음성을 발하자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남궁환은 자신의 실태를 깨닫고 는 이내 되돌아 나오려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으......이, 이것이 뭐냐?"
안개는 점차 꿈틀거리며 남궁환의 다리를 감싸더니 꽉 조여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그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내공을 실어 발을 떼어 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비켜라"
남궁휘가 단검을 빼내들더니 전면을 향하여 뿌렸다. 단검은 공기를 가르는 파공성을 동반한 채 안개를 갈랐고 남궁환의 주위에 물결치던 안개의 농도가 점차 옅어진다 여겨졌다. 바로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남궁환은 전력을 기울여 발을 굴렀다.
쉬익
그가 형님인 남궁휘의 옆에 내려서자 가벼운 감탄성이 안개 속에서 흘러나온다.
"호...... 아는 것만 많은 줄 알았더니 무공도 쓸만하군."
"낄낄 그래보았자 별다른 게 있을 라고?"
남궁휘는 전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후후 물론 흑혈유마공이 절세 마공임은 사실이지. 그렇다고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너희들 이 펼치는 흑혈유마공은 그다지 위력적이지 못한 것 같구나. 12성 대성했다면 어찌 내 동생 이 너희들에게서 벗어 날 수 있었겠느냐? 대성한 흑혈유마공이 겁나는 거지, 너희들 같은 젖비린내도 아직 가시지 않은 꼬마들이 펼치는 거라면 솔직히...... 가소롭다."
그럴듯한 격장지계였다. 강호경험이 많은 자라면 이 따위 격장지계에 넘어가지는 않겠지만 상대는 아직 어린 나이의 인물들!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뭐야? 죽고싶어 환장을 했구나. 저놈부터 죽여 버릴래."
"그래 저 자식의 나불거리는 입부터 찢어버리자."
둘은 죽이 맞아 외쳤다. 바로 그때 남궁휘의 전음이 모두에게 전달된다.
[흑혈유마공은 오로지 양강의 장력이나 검강만으로 상대할 수가 있소. 그러니 자신이 아는 양강장력 중 가장 강한 것을 끌어 올려 대비하시오. 출렁대는 안개의 움직임이 최초로 시작 되는 지점이 그들의 위치라고 보면 될거요.]
역시 그는 오련회주다웠다. 그가 그 지위만으로 무림칠기중의 일인이 된 것은 아니다. 무림 칠기 중에서는 가장 약하다 평가되는 그였으나 검법과 무공에 대한 박식함은 그 누구도 따 르기 힘든 사람이었다.
한쪽에 몰려 있던 여자들은 장내의 전경에 모두 숨을 죽이고 쳐다보고만 있다. 만약 눈앞의 고수들이 저 정체모를 안개를 막아내지 못한다면 자신들은 속절없이 그들의 제물이 되어야 한다. 몇몇 여인들은 단검등을 꺼내어 손에 꼭 쥐고 있기도 했다.
안개는 점차 꾸물거리며 앞으로 전진해 왔고 어찌 보면 뱀이 기어오는 듯 요사스럽기까지 했다. 안개의 권역의 끝 부분의 경계는 순식간에 공간을 접으며 이내 무리 중으로 침투했 다.
"지금이오"
남궁휘의 소리가 이어지자 잔뜩 몸을 움츠리며 준비를 하고 있던 고수들의 손에서 일제히 빛이 쏟아져 나왔다. 성벽을 함몰시키기 위한 포의 격출을 보는 듯도 한, 장관을 연출했다.
특히 남궁휘의 손에서는 눈을 멀게 할 정도의 강렬한 빛의 분사가 이루어지고 각기 두 지점 을 향해 섬전처럼 공간을 질타해버린다.
"소소 조심해라."
콰앙
다급한 소랑의 외침이 이어지고, 안개는 순간적으로 씻은 듯이 눈앞에서 사라지는 듯 했다.
누구하나 움직이지 않았고 누구하나 말하는 이도 없었다. 오로지 그것만이 자신을 지켜주리 라는 신념이라도 지닌 듯, 그들의 의식은 한곳에 집중되어 그 결과물을 주의 깊게 살펴간 다.
"호호호호"
"깔깔깔깔"
그 웃음소리는 그들의 기대를 여지없이 깨부수는 소리이기도 했다. 저마다의 표정에는 깊은 절망과 위험을 타개할 묘책을 짜내느라 분주한 심사를 표해놓고 있었다.
"대단한 공격이었어. 이제는 우리 차례인가?"
그 말이 터져 나오는 곳을 무심결에 쳐다보던 남궁환의 표정에 회심의 미소가 스쳤다. 바닥 에 미세한 혈흔이 보였던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각혈의 흔적이 분명했다. 그것을 지우고자 손을 썬 듯 하나, 남궁휘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후후 역시 이번의 공격에 상당한 피해를 입었구나. 그렇다면 승산은 우리에게 있다.'
그는 상대의 공격이 있기 전에 이 사실을 모두에게 주지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미 늦어버 렸으니, 그들의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순식간에 안개가 흩어지며 오히려 넓은 지역을 점유 해가고 전체가 회오리치듯이 그들을 가두고 있었다. 그 중심에 그들이 위치하고 있는 형세 였다. 문제는 한쪽에 몰려 있는 여자들과의 간격이었다. 어느새 안개는 그들과의 사이까지 침투해 있었던 것이다.
피슛
"으아아악"
피슛
"꺽"
몇몇 고수들이 팔이나 옆구리, 다리들을 붙잡고 있는 모습들이 보였고 그 근처에 있던 여자 들 중의 몇 명도 비명을 지르며 속절없이 죽어갔다. 의외로 그들은 남궁휘쪽이 아닌 뒤쪽을 공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통의 신음성을 발하는 이들은 다름 아닌 천검장주와 청룡장주,
추경부주등이었다. 그들은 비교적 무공이 약하다 할 수 있었고 또한 이런 괴공등을 겪어 본 적이 없었는지라 어찌 방비해야 할지를 몰라 당황하고 있었다. 그들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잘 방비를 하고 있는 셈이었다. 점차로 안개의 움직임이 눈에 익게 되자 전체의 흐름을 꿰 뚫어 보게 되었고 그것이 고스란히 약점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깡
서로간에 자세의 변화만으로 서로를 견제하던 상황에서 남궁휘의 검과 무엇인가 부딪히는 최초의 충돌음이 전해졌다. 그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곧 바로 뒤로 물결치는 안개를 뒤 따르며 검을 수직으로 세워 아래로 그어버렸다. 단순한 동작이었으나 만근의 힘이 실려 있 었고 그 쾌속함 또한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콰앙
의외로 충돌음이 대전을 뒤흔들정도로 크게 들리자, 모두의 시선에 놀람과 반가움이 함께 떠올랐다. 남궁휘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고 튀어나온 반동을 되짚어 뒤로 흘리며 한바퀴 회 전을 함과 동시에 검을 정면으로 쭈욱 밀었다. 그의 상체는 흔들림이 없었으나 그의 발은 민활하게 보법을 밟아가고 그의 두 눈은 상대의 움직임을 잡아내기 위해 분주함으로 번득인 다.
"소소 피해!"
그 말이 터짐과 동시에 무엇인가를 꿰뚫는 소리가 들렸고 남궁휘의 손에는 검을 통해 느껴 지는 파육감이 묵직하게 전해졌다. 느낌으로는 허벅지 정도를 뚫은 것 같았다.
"아악"
비명이 터짐과 동시에 남궁휘는 검자루를 뒤틀며 살을 헤집어버렸다.
"꺄악"
"이놈"
슈우
장력이 쏘아져 옴을 본능적으로 느낀 남궁휘는 검을 빼내면서 옆으로 몸을 비켜섰고 곧 바 로 장력이 발출된 곳을 향하여 검을 찔렀다.
콰캉
남궁휘가 채 자세를 바로 잡지 않은 상태에서의 격돌인지라 몸의 자세가 흐트러졌다.
"죽어라."
바로 눈앞에서 들려오는 고함소리에, 오히려 남궁휘는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그의 검은 검 명을 울림과 동시에 일장이나 늘어나지 않는가? 그것은 검강이었다. 상대의 흠칫거림을 본 능적으로 느낀 남궁휘는 검강을 아예 상대가 있을 법한 방향을 향해 통으로 옆으로 쓸어버 렸다.
콰앙
"꺽"
피였다.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것은 분명히 피였다. 부상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결코 가볍 지 않은...... 남궁휘는 검을 들고서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다. 여전히 안개는 공간을 부영하고 있었으나 그다지 짙어보이지 않았고 그 속에서는 이제까지는 느껴지지 않던 인간 의 호흡소리가 간혹 들려오기 시작했다. 잠깐 동안 간헐적으로 들려오는 소리였으나 남궁휘 가 방향을 잡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소소와 소랑은 가볍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소소. 틀렸다. 나중을 기약하자.]
소랑이 옆구리를 붙잡고 지혈하며 하는 전음이었다. 그 말에 한쪽에 웅크리고 있는 소소 역 시 절망을 느끼기는 매 한가지였다. 설마하니 자신의 위치를 잡아내는 인물이 이 중에 있을 줄이야?
[그럴 수 없다. 한 놈이라도 죽이지 못하고서는 가지 않는다.]
소소가 한번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면 도저히 당해내지 못함을 알고 있는 소랑은 어쩔 수 없 다는 듯이 동조하고 만다.
[좋다. 이 놈은 너무 강하니, 뒤에 놈 중에 하나를 네가 해치워라. 내가 이 놈을 유인할테니 그 놈을 해치우고 곧 바로 밖으로 뛰쳐나가는 거다.]
[알았다.]
둘은 함께 움직임을 개시했다. 남궁휘는 순간 당황했다. 분명히 기척이 두군데로 분산되어 움직이는 것이 잡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그것을 염두에 둘 만큼 여유롭지 못 했다. 상대의 움직임 중 하나가 자신에게로 돌진해 옴을 느꼈기 때문이다.
남궁휘는 검극을 하늘로 수직으로 세우고 직단하며 한소리 쩌렁한 외침을 토했다.
"경천지세(驚天之勢) 천검투망(天劍投網)"
말 그대로 검기가 조밀한 망을 이루고 적을 포박하는 듯 에워쌌다. 수비와 공격의 이점을 동시에 취하는 가공한 초식이었다. 순식간에 검극이 떨림을 보이고 미세한 검선이 수십 개 로 분산되며 적의 모든 움직임을 차단해 버린다. 섣불리 맞설 수도 없는 강력함을 지니기 있기에 더욱 위력이 있어 보였다.
콰앙
"으윽"
"아악"
두 곳에서 동시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뿔싸"
남궁휘가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상황은 벌어진 뒤였다. 천검장주 도극추가 목을 움켜쥐고 서서히 쓰러져가고 있었다. 안개가 똬리를 틀 듯이 그의 몸을 감싸 고 있다 흩어져 가는 것이 시야에 잡혔다.
"이놈!"
남궁휘는 노성을 발하며 천지를 함몰시킬 듯한 기세로 검강을 뿌렸다.
콰앙
콰앙
그 충격의 여파로 바닥이 주저앉았고 대전이 무너질 듯이 진동을 보였다. 그는 고개를 홱 돌려서 대전의 입구를 쳐다보았다.
"놈들이 도주한다."
남궁환은 그 말을 하며 밖으로 뛰어가려 했으나 남궁휘가 제지한다.
"그만 두어라. 따라 가 보아야 잡기는 틀렸다."
그는 눈앞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천검장주는 두 눈알이 툭 튀어나오고 혀를 길게 내어 물고 그렇게 흉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다. 남궁휘는 그의 가족들이 이곳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는 얼른 눈과 혀를 수습해 주었으나 여전히 흉한 모습이었다.
"여보"
"아버님"
천검장주의 부인과 딸이었다. 둘은 죽어 나자빠져 있는 도극추를 끌어안고 오열을 터트렸 다. 자신의 부인과 딸을 보호하고자 자신의 목숨을 잃은 것이다. 도극추의 등은 세치 가량 으로 벌어진 상처가 있었고 그곳으로 끊임없이 피가 흘러 나와 대전 바닥을 적신다.
"흑흑흑흑"
"어엉......아버지"
두 사람의 모습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연민을 불러일으킬 만큼 애처로운 것이었고 그것은 곧 바로 흉수에 대한 적개심으로 불타올랐다.
★ 몇 번이나 설득하고 때로는 위협을 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녀의 뜻은 완고했고 죽음 이외에는 결코 비급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지가 엿보였다. 용단을 내리지 못하고 망설이는 이총사의 모습을 보는 혈마천의 수하들은 내심 욕을 해대고 있었다. 도무지 무리를 이끄는 수장으로서 보여야 할 결단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고 계집하나에 질질 끌려 다 니는 모습이 한심해 보였다. 또한 그 모든 것이 한권의 비급으로 인함을 알기에 그들의 호 기심은 더욱 승해갔다.
이제는 그도 어쩔 수 없었는지 눈길에 분노가 스며나온다. 그리고 어떤 식으로든 빨리 끝맺 음하고 싶은 갈망도 비쳤다.
'정말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저 계집에게서 비급만을 탈취해내기란 쉽지가 않다. 아니 거 의 불가능하다. 결국은......'
"잘 들어라. 한번만 더 말하마. 비급이냐? 생명이냐? 분명히 약속하건대 너에게는 손가락 하 나라도 대지 않으마. 너 가고 싶은 데로 언제든지 떠나면 된다. 단. 비급만 남겨두고......"
천향옥봉도 이제는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음을 느꼈다. 더 이상의 거절은 아무리 욕심 많은 이총사도 포기하게끔 만들 것이다. 어차피 저자에게 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 비급 을 먼저 없애버리고 죽음을 맞이하면 되는 것이다. 까짓 거 어차피 한번은 죽어야 하는 것.
좀더 일찍 가는 것 뿐이라 스스로를 달래 본다.
바로 그때였다. 그녀의 뇌리를 섬전같이 스치는 생각이 있었으니,
'그래 바로 그거다. 지금 이 주위 어디선가에는 대총사가 있을 것이 분명하다. 둘은 사형제 지간이긴 하나,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하다. 그들의 알력의 골은 예상외로 깊다. 그래서 저 놈이 더욱 애가 달아서 이것을 노리는 것이니...... 좋다. 그렇게 하자.'
그녀는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오연한 시선으로 주위를 한번 살피고는 이내 이총사에게 초점 을 고정한다. 그 상태로 그녀는 한마디씩 끊어 뱉듯 토해낸다.
"좋아요."
순간 이총사의 얼굴은 희색이 만연하여 참을 수 없는 희열의 웃음을 토해낸다.
"우하하하 잘 생각했다."
돌아가신 부모님이 살아 돌아와도 저런 반가움은 나타내지 않으리라.
"대신."
"응?"
또 무슨 말인가를 덧붙이려 하자 이총사는 불안의 기색을 드러내고,
"이 비급을 이총사에게 준다고 하더라도 내 생명을 어떻게 보장하죠?"
잔뜩 초조함으로 그녀의 말을 기다리고 있던 이총사는 의외로 그녀가 한말의 내용이 자기로 서 들어 줄 수 없는 것이 아님을 알고는 희미한 미소를 짓는다.
"걱정마라. 내 무인의 명예를 걸고 그 약속만은 지키마. 단 이곳에서만 널 살려준다는 것이 다. 이후 다시 만난다면 그때는 네 생명을 거두겠다."
"그것은 좋아요. 그런데 어떻게 하죠?"
"무슨 말을 하고 싶은거냐?"
"내가 여기를 떠나려고 해도 나를 막는 사람이 있으면 이총사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는 것이 되고 마니......"
"그 무슨 말이냐? 감히 어떤 놈이 내가 한 약속을 어기고 너를 해칠 수 있겠느냐? 그런 놈 이 있다면 내가 일검에 양단 해 버리겠다."
"분명히 약속했죠?"
"그래. 만약 그 약속을 어기게 되면 내가 네 아들이다. 아니 앞으로 나를 개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짐짓 호기롭게 너스레를 떨어대는 그 모습이 역겹기까지 했다.
"들으셨죠? 대총사. 이총사께서 나를 살려 보내 주신다는데......"
"무슨 개소리냐?"
이총사는 순식간에 고개를 돌려가며 사방을 살피는 모습이 그가 얼마나 당황하는지를 알게 해준다.
"우하하하하 역시 자운 너는 보통내기가 아니구나."
"응?"
이 총사는 그 웃음소리에 소태 씹은 것처럼 일그러지고,
"너의 말대로 나는 너를 살려 보낼 생각이 추호도 없다."
장내에 한 인물이 등장하고 있었다. 금포에 금면탈을 쓰고 있는 괴인이었다. 그 모습을 일 견한 장내의 인물들이 모두 무릎을 꿇었다.
"대총사를 뵈옵니다."
"후후 사제 오랜만이군."
차디찬 느낌의 음성은 아무런 감정의 기복도 느낄 수 없는 무미건조함 그 자체였다. 이총사 상여락은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는,
"언제 오셨소?"
"오래 되었지."
'재수없는 놈. 쥐새끼처럼 숨어 있으면서 내가 하는 양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겠군. 이렇게 되면 모든 일이 틀어진것인가? 아니다. 이미 저 년이 내게 비급을 넘긴다고 했으니 잘 구슬 려 살려 보내주게 한다면, 당연히 저 비급은 내게 우선권이 있는 것이다.'
"그래 여긴 어쩐 일이시오?"
"왜, 중원 땅에 내가 가서는 안될 곳이라도 있나?"
"그럴 리가 있겠소? 나는 사형이 워낙에 막중한 책무를 맡았는지라 이런 곳에 올 사람이 아 니라 여겼소이다."
"후후...... 자운"
"왜 그러세요?"
"넌 아직도 살아날 희망을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저는 이총사님과 흥정을 성공리에 마쳤는데요?"
"하하하하 참으로 잘 돌아가는 머리다. 내 인정하지. 그 좋은 머리를 좀더 본천을 위해서 사 용했으면 이런 식으로 만날 일은 없었을터인데 말이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구나."
"호호호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금면탈 괴인은 천향옥봉을 유심히 쳐다보더니 하는 말이,
"그만 죽거라. 여기서 네가 살아날 희망은 전혀 없으니......"
"무슨 말이요. 사형. 대체 훼방을 놓는 이유가 무엇이오?"
"훼방이라고 했느냐? 후후 멍청한 놈! 너는 세상에 혈영뇌전도법을 익힐 수 있는 사람이 있
다고 생각하느냐? 차라리 저것은 없어지는 것이 낫다. 그리고 너는 저것을 볼 자격이 없다."
이총사의 눈에 불꽃이 이글거리며 타오른다.
"무슨 의미요?"
"넌, 너에게 맡겨진 임무를 하나도 소화시키지 못했다. 그러고서도 뻔뻔하게 보물을 탐한단 말이냐? 그리고 저런 것을 가지게 되면 당연히 사형인 천주에게 먼저 보여야 하거늘, 너는 스스로의 욕심만 채우려 했다. 과연 천주께서 이 일을 아시고도 너를 용서 하실까? 생명 부 지하고 싶으면 아무소리 말고 내가 시키는 데로 하거라."
"빌어먹을 새끼. 너는 항상 그딴 식이었다. 네가 나보다 빨리 사부님의 제자가 된 것 말고는 잘난 것이 무엇이냐? 지금 너의 말도 내가 저 도법을 익혀서 너를 능가하고 우뚝 올라설 것 이 두렵기 때문이 아니냐?"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아니다. 그렇다고 해두지. 그래서?"
"이 위선자. 너만 보면 10년 전에 먹었던 것도 치솟아 오른다. 저 비급은 포기할 수 없다.
그리고 자운이도 여기서 살려준다. 만약 내 앞을 막는다면 오늘 너와 나, 둘 중 하나는 싸 늘한 시체가 되어야 할거다."
"으음...... 사형의 총애를 받는다고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너는 항상 철없는 짓만 골라서 했 지. 언제까지 내가 너의 재롱을 보아 넘기리라 여겼느냐? 넌 너무 큰 실수를 했다. 사형이 폐관에서 나오시면 그때도 너를 총애해 주시리라 여기는가? 미친놈이다. 너는. 뭐? 너와 나 둘 중에서 하나가 시체가 돼? 정말 그것을 원하느냐? 그렇다면 그렇게 해주마."
콰아아아아
가만히 서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총사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기세는 만인의 기세를 억누를 만큼 거세었다.
'빌어먹을. 저 자식은 예전보다 더 강해졌다. 대체 어디까지 갈 셈인가? 이렇게 되면 난 영 원히 삼인자 노릇이나 해야 된단 말인가?'
금면탈을 뒤집어쓴 대총사는 이총사에게서 아무런 반응도 없자 이내 고개를 돌려버린다. 철 저하게 무시하는 행동이었다.
"자운. 그것을 네가 나에게 주든 주지 않고 없애버리든, 너는 오늘 이 자리에서 죽는다. 준 비를 해라. 없애 버릴 거면 되도록 지금 없애는 것이 낫겠지? 나중에는 그럴 시간도 없을테 니......"
천향옥봉은 이제야말로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총사를 바라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병신같은 놈! 네가 그러면 그렇지. 잠시나마 네게 기대를 한 내가 어리석었다. 하긴 대총사 와 너와는 애초에 싸움이 되지 않지. 언제나 큰 소리만 쳤지 결정적인 때에는 꼬리를 마는 비겁한 자! 그러고서도 천하를 논한단 말이냐?'
천향옥봉의 시선에 이총사는 고개를 돌리고 딴청을 부렸다. 돌아가 있는 그의 얼굴은 밤이 라 잘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벌개져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소저. 그 비급을 우리에게 준다면 소저를 살려 주겠소. 어떻소? 서로 계약을 체결해 보는 것이?]
이것은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갑자기 들려온 전음소리에 천향옥봉은 놀람을 보였으나 그 것은 너무나 빠른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후후 나는 근처에 있소이다. 혈마천의 주력이라 하나 겁먹을 것은 없소. 나에게는 충분히 소저를 위험에서 구출할 만한 힘이 있소. 어떻소? 계약을 하겠소? 원한기만 하면 당장 저 놈들의 위협으로부터 구해주겠소.]
많이 되어도 30미만의 젊은 남자의 목소리였다. 대체 누구란 말인가? 하긴 누구라도 상관이 없었다. 대신 저들과 싸워 주겠다면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었다. 이들을 물리치지 못해도 좋았다. 그녀로서는 손해 날 일이 없었던 것이다.
"좋아요."
그녀의 말에 대총사와 이총사는 의아함을 드러내고,
"무슨 소리냐? 뭐가 좋다는거지? 나에게 주겠다는 말이냐? 아니면......"
"당신은 상관할 것 없소. 나에게 한말이니......"
싸늘한 조소의 말에 장내는 또 다시 급변을 일으켰다. 제 삼자의 개입! 이것은 생각지도 못 한 일이었다. 장내에는 어느새 10여명의 인물들이 등장해 있었다.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얼핏 보기에도 대단해 보였다.
이총사의 표정은, 이것은 또 뭐지? 하는 것이었고 대총사는! 세상에......
천향옥봉은 이렇게 놀라본적이 없었다. 대총사가 몸을 가늘게 떨고 있는 것이 느껴졌던 것 이다. 그녀가 생각하기에 대총사가 저렇게 몸을 가늘게 떨 때는 공포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적수를 만났을 때에 일으키는 반응이었다. 무광이라고도 할만한 대총사의 가장 큰 관심은 진정한 적수라 할만한 강자를 만나는 것이었고 그것이 실현되면 자신도 주체하지 못하고 몸 을 떨어대는 것이다. 그것을 알기에 천향옥봉은 의아함을 담고 새로이 장내에 나타난 인물 들을 쳐다보았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사람은 일단의 무리 중에 선두에 선 자였다. 그는 금포에 금색 영웅건 을 이마에 둘렀고 손에 같은 색깍의 섭선을 쥐고 있었다. 습관인지 부채의 결을 손가락으로 훑어내리는 모습이 참으로 인상적이었다. 여태껏 천향옥봉이 보아온 사내 중에는 남편인 광 마존의 지존이 가장 잘 생긴 사내였다. 눈앞의 남자! 그는 결코 그에게 뒤지지 않는 미남자 였다.
서른 전후나 되었을 듯 싶은 나이에 두 눈은 부드러우면서도 강렬했고 깊은 시선이 그의 심 기가 또한 깊음을 드러내고, 측량할 수 없는 지혜로움으로 충만되어 있었다. 코는 사내의 기개를 나타내듯 우뚝 솟아 있었으며 선이 미려하고 섬세하여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임을 느끼게 한다. 꽉 다물린 입의 윤곽은 굳은 의지를 나타내는 듯 했으나 왠지 여자의 입술처 럼 타는 듯 붉고 또한 육감적이었다. 어느 곳 하나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인중룡의 표상이라 할 만 했다.
그의 주위로는 7남 3녀가 함께 했는데 대부분이 30대의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모두 한가지씩은 금색으로 된 것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세 명의 여인들도 결코 천향옥봉에 뒤지지 않는 절세의 미인들이었으니 그들이 장내에 드러나자 갑자기 사람들의 모습이 꿈꾸는 듯 몽롱해져 가지 않는가?
이 총사가 외쳤다.
"너희들은 웬 잡것들인데 남의 일에 함부로 나서는 것이냐?"
선두에 선 사내가 이총사를 쳐다본다.
"후후 무림맹주 아니시오? 여기는 웬일이오? 더군다나 한 여자를 핍박하는 자리에 말이외 다."
이총사는 멍청히 굳어 버렸다.
"너희들은?"
대총사의 물음이었다. 마치 독백을 흘려내듯 진중 한 목소리였다.
"우리가 누구인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거요. 대신 우리의 목적이 당신의 관심을 끌 것 같 은데, 듣고 싶지 않소?"
대총사는 그 자를 신기한 듯 쳐다본다.
"무림에 너 같은 인물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 못한 것 같은데? 대체 너희들은 누구이며 무슨 목적으로 여길 온 것이냐?"
"하하하 세상은 넓어 기인이사들이 모래알처럼 많다지 않소? 우리도 그들 중에 하나라 이해 하시면 될 것이고...... 우리의 목적은 하나의 계약을 이행하기 위함이오."
"계약?"
"그렇소. 저기 당신들이 핍박하는 아리따운 소저를 이 몸이 보호하기로 했소. 이것은 당자 들간의 계약이니, 제 삼자들은 빠져 주셨으면 고맙겠소이다."
그의 말을 듣고 있자면 잠시 그 말의 진위여부를 떠나 당연히 그렇다 여겨질 정도였다.
"자운이 너랑 계약을 했다고? 웃기는 소리 집어치우고 어서 썩 꺼져라."
물론 이것은 화가 머리꼭지까지 치솟아 오른 이 총사의 외침이었다. 그런 그에게 사내는 빙 긋 미소를 한번 보여주고는 이총사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는다. 무시당했다 여긴 이총사 상여락이 발끈하여 나서려하자,
"그 계약을 이행할 자신이 있나?"
"물론이오."
"좋겠지. 그래. 어떤 식으로 그 계약을 이행할 생각인가? 우리는 보다시피 이렇게 사람들이 많은데? 그대들 10여명이 우리들 전부를 상대할 수 있겠는가?"
"하하하 그것은 그렇지가 않을거요. 무릇 백만의 군대에도 수장이 있기 마련이고 상대함에 있어 전체보다는 수장의 동의를 얻어내면 되는 것이지요. 그럼으로 우리의 숫자의 많고 적 음은 하등 상관이 없겠지요."
그의 뜻을 알아 챈 대총사가 즐겁다는 듯 웃음을 흘린다.
"후후후후 네 말뜻은 알겠으나 끝까지 너의 제의를 거절하면 어찌 할텐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소인배가 아닌 이상에야...... 더군다나 스스로 영웅이라 자처하는 분이 그런 일을 자행하지는 않겠지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제가 사람을 잘못 봤다 여기고 그에 합당한 조치를 취해야 겠지요."
"합당한 조치라면?"
"우리 또한 그다지 부족하지 않은 숫자를 보유하고 있지요. 이 화룡림은 우리를 돕는 세력 에 완전히 포위가 되어 있습니다. 언제든 신호만 하면 확인할 수 있을거요."
또 다시 그 화려한 미소를 짓는데 남자인 그도 찬탄을 금할 수 없을 정도였다.
"닥치거라. 어디서 씨도 먹히지 않을 공갈을 해대느냐? 사형. 저런 애송이와 더 이상 노닥거 릴 시간이 어디 있소? 당장에 쳐죽이고....."
"그래서 너는 아직 멀었다는 것이다. 네 눈에는 저자가 애송이로 보이느냐? 후후 어떤가. 젊 은이. 나와 한 수를 섞어 볼 의향이 있으신가?"
"물론이지요. 대신 저는 여태껏 대가가 없는 일에 손을 써 본적이 없는지라......"
"그렇게 하도록 하지. 내가 지면은 천향을 그대에게 넘겨주겠다."
이총사는 참으로 어이없어했다. 대체 무슨 개수작들이란 말인가? 물론 사형이 저까짓 애송 이한테 질리는 없겠으나 단 한마디면 쓸어버릴 수 있는 자들을 무엇 하러 힘들여 상대하려 하는가? 더군다나 자신들로서는 젊은 애송이의 제안에 동의해서 이긴다 하더라도 아무런 대 가도 없는 일에...... 이총사는 이 일만은 사형의 실책이라 여겼고 결과와는 상관없이 문제를 삼으리라 다짐하며 별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