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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하늘을 말하는 자! (70/111)

 70.하늘을 말하는 자!

 청년은 무리중에서 한 걸음 나서더니 대총사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고 달을 쳐다 본다. 그 의 눈은 공허하게 비어 있었다. 먼 옛날을 회상이라도 하는 듯이 아련하게 젖어 온다. 가 끔씩 불어오는 바람에 옷자락을 나부끼며 서 있는 그는, 그 바람에 동화된 듯도 보였다. 왜  그런지는 모르나 그를 보고 있자니 까닭모를 슬픔이 차오 르고 그것은 이내 그 사내를 더욱  신비롭게 만들어주고 만다.

 그자의 하는 양을 살펴가던 대총사는 소리없이 헛웃음을 흘리더니 이내 사내에게 말을 붙여  보았다.

 "자네 이름을 물어 보아도 되겠나?"

 "이름따위야 무엇이든 상관이 없겠지요. 정히 궁금하시다면...... 초량(超量)이라 부르십시오."

 "초량이라......"

 대총사는 의미있는 눈빛으로 사내의 모습을 뇌리에 담았다.

 "자, 그럼 시작할까?"

 "무에 그리 급하십니까? 두려움은 자신 안에 있는 것인데, 무엇을 그리 두려워 하십니까?"

 뜬금없는 사내의 말은 장내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대총사에게 하는 말 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어 보였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대총사는 온 몸에 전율을 일으키 더니 더욱 심유해진 눈길로 사내를 쳐다본다.

 "그 두려움의 실체는 무엇인가?"

 초량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대총사를 바라보았다.

 "실체란 없지요. 애써 그것을 마음속에 짓는 자가 있을 뿐이겠지요. 모든 것은 마음속에서  일어났다가 스스로 상(像)을 짓고 그것으로 오히려 마음을 묶어 두니 삶이 고단한 겁니다. 

 두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두려움을 주는 대상을 피하고자 하니 더욱 멀어만 지고 결국은  스스로 마음을 결박하여 그 앞에 고개를 숙이게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하여야 두려움을 깨뜨릴 수 있는가?"

 "먼저 인정하셔야 합니다. 물론 힘들고 어렵겠지만 그 모든 상황을 인정하십시오. 그리고 겸 허하게 받아 들이셔야 합니다. 그런 연후에야...... 좀더 객관적으로 대상을 살필 수가 있고  그것이야말로 두려움을 이길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을 부여해줍니다."

 "...... 그런가? 오늘 많은 것을 배우는군."

 두 사람은 오래된 지기와의 대화라도 나누는 것처럼 스스럼없이 속내를 드러내었다.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했으나 둘은 서로가 마음을 엿보았다 느끼고 있었다. 두사람의 입가엔 누 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미소가 맺힌다. 너무나도 싱그러운 미소였다.

 "후후"

 "후후후"

 "이제 시작하시지요."

 "그럴까?"

 3장을 격하고 마주선 두 사람은 심원한 눈길로 서로를 쳐다보고만 있다가 초량이 먼저 섭 선을 소리나게 펼쳐들더니 가슴 앞에 세웠다. 그 동작이 전부였다. 대총사 역시 허리에 매 어진 검을 뽑아 들고는 오른쪽으로 비껴 내리고 서 있을 따름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은 서 로의 눈에서 무엇인가를 찾아내려는 듯이 떨어질 줄 몰랐다. 무언의 대화는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이총사는 한쪽에 서서는 두 사람의 대결을 관심 있게 지켜보다가 지루한지 하품을 해댔다.

 '미친놈들! 온갖 멋이란 멋은 다 부리고 있군. 대체 무엇을 그리 오래도록 탐색한단 말인가? 

 어차피 부딪혀보면 알게 될 것을......'

 그가 생각할 수 있는 한계였다.

 "자네의 눈은 참으로 맑군. 마치 하늘을 보는 것 같아."

 "하늘을 담으려고 노력을 하지요. 그렇지만 어찌 하늘이 될 수 있겠습니까? 인간의 몸짓은  결국 허무하여 죽음으로 끝이 나는 것을요. 짧은 인생에서 느끼는 것이라고는 스스로의 무 능함이 고작이겠지요."

 "그러나 말일세. 나는 스스로 하늘이라 여기는 자를 알고 있네. 내 두려움은 거기서부터 시 작되었지. 절망은 때로 희망을 부추기기도 하더군. 새로운 의욕이 생겨나는 시점은 언제나  그 두려움에 직면했을 때였네."

 "그럴테지요. 그렇지만 하늘이 되기를 원할 수는 있어도 하늘이 되지는 못합니다. 스스로 하 늘이라 말한다면 그자는 제대로 된 하늘을 모르는 자 일겁니다."

 "후후 그런가? 어쩌면 그 두려움을 이겨낼 수도 있을 것 같군."

 "축하드립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지루하게 이어졌다. 아무도 두 사람이 싸우기 위해서 대치하고 있다 여기 지 않을 정도로, 그 흔한 살기조차 드러내지 않고 서로를 마주 볼 뿐이었다. 그러던 두 사 람의 몸에서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은 대치하고 선지 반 시진이나 지난 뒤였다.

 이제 시간은 인시(寅時)를 지나 묘시(卯時)에 가까워져 갔다. 조금만 있으면 날이 밝아 올  것이다. 온 밤을 하얗게 지새기로 작정한 사람들 마냥 마주 서 있기만 하던 두 사람의 몸에 서는, 마주 대할 수 없는 광폭한 기운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옷자락은 찢어질  듯이 펄럭였고 그럼에도 둘 모두, 더 이상 환할 수 없는 미소를 얼굴 가득 담고 있었다.

 "갑니다. 조심하십시오."

 "자네나 조심하게."

 대총사의 검이 서서히 검극으로 하늘을 떠받치듯이 쳐들어 올려지고 그에 따라 초량의 섭선 도 결을 수직으로 세우며 대총사를 가리킨다. 그리고 그들은 느릿하게 한발씩을 옮기며 좌 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점차 그들의 발놀림은 빨라지고 나중에는 희미한 잔상조차 남지 않 을 정도로 급박하게 돌아갔다. 그 사이에서 첫 번째 부딪힘이 있었다. 그것은 뇌전에 버금 가는 위력이었다.

 콰광

 어찌 된 연유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단지 그나마 그들의 대결을 이해하는 사람이 라고는  이총사와 천향옥봉, 그리고 초량과 동행했던 자들이 전부였다. 두 사람의 검과 섭선은 수십  합의 부딪힘이 있었음에도 결코 물러서지 않고 재차 격돌 해간다. 그들이 쏘아낸 경력의 파 장은 의외로 큰 것이어서 주변에서 관전하던 사람들은 분주히 공간을 늘여야만 했고 흙덩이 가 치솟고 돌이 깨어져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그런가 하면 멀리 떨어져 있는 잡목의 잔가 지들마저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부러져 허공을 비산했다.

 점차 그들의 움직임의 반경은 커져갔고 때로는 허공으로 치솟으며 여러 합을 교환하기도 했 다. 그들은 거의 마주보고 서 있다 할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근신공박의 초식을 구사하고  있었다. 어찌 그리 가까운 곳에서 전력을 발휘해 공방을 교환하는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쾅

 그런 그들이 거대한 폭음과 더불어 각기 물러섰다. 여전히 처음의 그 자세 그대로였고 언제  공수를 나누었는가 싶게 신색이 편해 보인다. 둘은 5장여를 떨어진 상태로 내공을 끌어 모 으더니 서로를 마주본다. 아마도 다음의 격돌은 지금까지와는 사뭇 다르리라 누구라도 쉽게  예측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대총사는 거검(擧劍)한채로 양발을 넓게 벌리고 선다. 포접(抱摺:검을 잡은 손을 배꼽부위로  끌어당기며 검극을 세우는 자세)에서 향발(向發:포접의 상태에서 그대로 밀어내는 자세, 주 로 검강 같은 내공이 많이 필요한 공격을 사용할 때 취하는 자세중 하나)로 이어지자, 그의  몸을 감싼 공기가 무섭게 떨려가며 부딪혀 깨어지는 소리들이 났다.

 옷자락은 터져 나오는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펄럭이다 못해 빳빳하게 곤두서는 듯했고 어두 움마저 진저리를 치며 밀려가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본 초량은 섭선을 한 몸으로 모아 쥐 고는 거두발세(擧頭發勢)의 용력으로 한껏 힘을 북돋았다. 그의 몸 주위로는 순식간에 금광 이 스며 나오는가 했더니 그것은 이내 두껍게 일신을 채우며 시야를 가리고 만다.

 천지함몰의 양세(兩勢)가 그들의 중간지점에서 부딪히자 우르릉대는 소리가 만들어졌고 서 로의 기세를 밀어내며 불꽃을 피워 올린다.

 파지직

 쿠쿠쿠쿠

 힘의 충돌이 워낙에 거세었는지라 회오리가 휘말리며 기괴한 소리를 동반해내고 보는 사람 으로 하여금 절로 오금이 저리게 하였다. 이것을 어찌 인간의 힘이라 할 수 있으리요? 아직  격돌하지도 않은 기세만으로도 초가집정도는 단박에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역시...... 사형은 그 동안 몰라보게 강해졌구나. 그런데, 대체 저 녀석은 누구기에 저리도  강맹하단 말인가? 결코 사형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듯 하니...... 참으로 모를 일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중원의 고수들이란 흔하지 않다. 더군다나 저 정도의 고수를 길러 낼만한 곳이 라고는...... 도무지 모르겠군.'

 솔직히 이총사는 그때까지만 해도 젊은 놈의 실력을 은근히 깔보고 있었고 제까짓 놈이 날  뛰어봐야 자신의 삼초지적도 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사형과 격돌하는 기세를 보 아하니 내공만으로도 자신의 아래는 아닌 것 같지 않은가? 그럼에도 그는 사형의 승리를 흔 들림 없이 확신하고 있었다.

 이총사의 감상이야 어떻든 둘의 대결은 시작되고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한번에 승부를  보려는 듯이 온 힘을 짜내는 것처럼 보였다.

 "하앗"

 누구의 입에서 먼저 기합성이 터져 나왔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검과 섭선 은 동시에 손을 떠났다. 번개가 쳐서 이쪽 하늘에서 저쪽 하늘을 한번에 관통하듯이 두 기 운은 하나는 검을 빌려, 또 하나는 섭선을 빌려 쏘아졌다. 금황색과 묵청빛에 쌓인 채, 빛  무리를 이끌고 서로를 향해 공간을 질타하며 쏘아진 것이다.

 "오, 이기어검이다."

 그 외침이 없더라도 장내에 있는 인물들은 이미 충분히 놀라고 있었다. 그들이 알기로는 검 의 최상승 경지라 여기고 있는 이기어검! 그것을 보았음에 아마도 그들은, 무사로서의 자부 심을 지니고 평생을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첫 격돌음은 공간자체를 모아 쥐었다 한꺼 번에 터뜨리는 듯이 굉장한 것이었다.

 콰앙

 콰앙

 검이 부딪히며 내는 일반적인 "채앵"하는 소리가 아닌 포탄이라도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나고  일부의 사람은 귀를 틀어막기까지 한다.

 검과 섭선은 직접적으로 부딪히지도 않고 기운과 기운이 만나며 지르는 소리였다. 두 기운 은 멈춤이 없이 연속적으로 엉키었으며 옆에서 보기에는 한 무더기의 빛 무리가 뭉쳐 있는  것처럼 보였다.

 쾅 쾅 쾅

 그때마다 두 사람은 움찔거리며 몸을 떨어댔다.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져 오기 때문이리라. 

 점차 약해져야 할 격돌음이건만 오히려 더욱 승하여 맹렬해져가니 그들의 내공의 깊음을 짐 작케 한다. 그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서로의 간격을 좁히며 뛰어들어간다. 자연적 검과  섭선은 기회를 엿보아 틈을 노렸다. 그들은 손에서 장력을 발출 하여 또 다른 대결을 펼치 며 여전히 검과 섭선을 조종했다.

 "좋구나. 이제야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났도다."

 대총사가 내지르는 소리에는 희열이 가득 담겨 있었다.

 "자, 받아라."

 대총사의 손에서 발출된 경력은 초생달 모양을 하고서 상대를 향해 진격했다. 초량도 이에  질세라 손을 뒤집었다. 금황색 기류가 용트림을 하며 뛰쳐나가더니 대총사의 장력과 마주쳤 다.

 펑

 둘은 허공 중에 자유로이 떠도는 나비의 몸짓인양 또 다시 몸을 뒤집어 서로를 쳐간다.

 펑 펑

 어느새 물러서 있는 그들의 손에는 자신들의 무기가 들려져 있었고 그것은 재차 출격을 준 비했다.

 "이번엔 좀 다를 것이오."

 "기대하지"

 초량은 섭선을 활짝 펼쳤다. 한철로 대를 대었고 교룡피를 잇대어 몸을 입혔다. 이 부채 하 나의 가격만으로도 한 식구가 평생을 호의호식할 수 있을 정도의 귀물이었다. 초량은 한소 리 낭랑한 기합성을 토하며 허공 중에 몸을 띄었다. 구름속을 노니는 천년학인가? 승천하는  용의 자태인가?

 옷자락을 펄럭이며 달빛아래에서 춤을 추는 모습은 천상의 신인이 하강한 듯 선경을 연출하 고 부채의 그림자가 온 허공을 수놓으며 가득 채워갈 때 꿈속에서나 봄직한 황홀경을 이끌 어 낸다. 느릿하게 물결치는 선영(扇影)들이 하나로 모아지는 듯, 재차 뜀뛰며 몸을 갈라 가 는 듯, 대총사의 주위를 엄밀하게 감싼다. 그는 탄성을 발했다.

 "오, 참으로 대단하구나!"

 진정으로 그는 이 순간이 즐거웠다. 대체 얼마 만에 느껴보는 절정의 행복감이란말인가? 그 는 무공에 미친 자라 할 수 있었다. 더 강해질 수만 있다면, 더 강한 자와 대결할 수만 있 다면 그는 생명도 아깝지 않은 것으로 버릴 수 있다 여겼다. 그는 절로 흥이 났다. 손안에  쥐고 있는 것이 검이 아니라 현을 타고 오르는 술대(거문고등을 탈 때 튕기는 막대)로 여겨 졌다.

 초량의 선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그 또한 검무를 추기 시작했으니...... 굵직한 선이 힘차고  내뻗고 휘돌리고 찔러가는 검선이 참으로 절묘하고 명쾌했다. 그러나 둘의 춤은 단순한 춤 이 아니었다. 갑자기 대지를 휘말아 올리는 듯한 강풍이 몰아치고 그들의 검과 섭선에서는  만년거암마저 깨부수고야 말, 거력이 끊임없이 솟구쳤다.

 쾅 콰앙 푸앙

 그 부딪힘의 소리마저 일정한 박자감을 주는 선율처럼 느껴지고 그들은 몰아의 경지에 빠져  들어갔다. 이것을 어찌 생사대적을 마주한 비무라 하겠는가?

 천향옥봉은 두 눈에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담고야 만다. 그녀의 심정은 다른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서로의 입장이야 어떻든 한 명의 무인으로서 눈 앞의 두 사람의 대결은 경 이를 넘어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진정 무학의 경지가 어디까지 이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들 평생에 이런 대결을 본적은 단연코 없었고 이후에도 몇 번이나 볼 수 있을지 장담 할  수 없었다.

 둘의 대결은 점점 생사의 경계마저 넘어서고 있었고 한 폭의 그림 속에 어울려 가는 선인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었다. 시간도 공간도 정지하고 둘이 뿜어내는 무인의 혼에 갈채를 보낸 다. 뿌옇게 밝아오는 여명과 혼재된, 마지막 어둠의 자락을 갈라가는 검강이 초량의 섭선에  막히며 주저하고, 검신을 타고 오르며 무찔러 가는 선강의 꿈틀거림이 빛 무리를 이끌어 낸 다.

 둘의 승부는 쉽사리 나지 않을 듯 했다.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누구하나 우세를 득(得)

 하지는 못했다. 둘은 슬그머니 대결을 멈추고 만다. 치열하게 박투를 벌였건만 그 누구도  호흡이 거칠어진 사람은 없었다.

 "진정 감탄할 만한 솜씨이군."

 초량을 치켜세우는 말에 그 또한 응대를 하였다.

 "오히려 대인의 검예가 놀랍기만 하군요. 제 편협함이 오늘에서야 제대로 상대를 만난 것  같습니다. 무림오천과 겨루어보기를 원했었는데, 대인이야말로 그들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초량은 무림오천 중의 일인인 무림맹주였던 자를 쳐다보며 그 말을 이었다.

 "어떤가? 우리의 대결을 좀 더 미루는 것이?"

 초량은 한 참을 생각한다. 그 누구도 승리했다 말하지 못할 대결이었다. 물론 끝까지 간다 면 둘 중의 하나는 생명을 장담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누가 되었든지 간에......

 "어쩔 수가 없군요. 나중을 기약할 수밖에"

 이렇게 되면 천향옥봉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천향은 그대가 데려가게......"

 의외의 말이었다.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건만 상대는 너무나 담담하게 그 말을 뱉어낸다.

 '역시......'

 "대인의 넓으신 마음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초량의 포권에 대총사는 슬쩍 천향옥봉을 쳐다보았다. 천향옥봉 역시 의외의 결과에 어리둥 절해 있는 모습이었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요."

 이총사가 나서며 하는 말에 대총사의 고개가 소리나는 쪽으로 돌아갔다.

 "무엇이 말이 되지 않는단 말이냐?"

 "사형이 진 것도 아니거늘 어찌 자운이를 저 놈에게 준단 말이오? 사형이 무슨 자격으로 그 렇게 결정하는 거요?"

 "내가 이기지 못했으니 조건은 충분한 셈이다. 아무 소리 말거라."

 "그럴 수 없소이다. 저 놈들이 누구인지 알고 저 아이를 넘겨준단 말이오?"

 "누구이든 상관없다. 이미 결정 난 것이니 더 이상 언급하지 말아라. 네가 제지하고 싶거든  나를 이겨야 한다."

 "이......이이...... 분명히 이것은 이적행위요. 대사형이 가만히 있을지 모르겠소이다. 이번 일 로 사형은 모든 것을 잃을 것이오. 두고보시오. 내가 가만히 넘어가지 않을 테니......"

 "마음대로 하거라. 나에게 잘못이 있다면 대가를 치르면 그뿐...... 초량공자! 데려가시오."

 초량은 대총사를 바라보며 진심으로 감탄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는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말했다.

 "대인의 양보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럼."

 초량은 천향옥봉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수하들이 천향옥봉의 주위를 둘러싼 다. 마치 그녀를 보호라도 하려는 모습들이었다. 신속한 그들의 모습은 일류급 이상의 고수 들임을 알게 해준다.

 휘리릭

 이총사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가긴 어딜 간다는 것이냐? 그 년을 놔두고 가라."

 그에게서 살기가 흘러 나와 일단의 무리들의 발목을 잡아갔다.

 "여락! 비키지 못하느냐?"

 대총사의 호통이 울렸지만 여전히 이총사 상여락은 꿈쩍도 하지 않고 오히려 비웃음을 흘린 다.

 "웃기지 마시오. 사형이 하시지 않겠다면 내가 하오. 날 제지한다면 진정 사형을 배신자로  인정하겠소."

 "으음"

 대총사 또한 할 말을 잃은 듯 대꾸를 하지 못한다.

 "하하하 무림맹은 어떻게 하시고, 이런 곳에서 핏대를 올리시는 거요? 무림오천의 일좌씩이 나 차지하신 분이 체면이 말이 아닙니다 그려."

 그의 조롱 섞인 말에 상여락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지고,

 "이 놈! 말을 함부로 하는구나. 얘들아. 어서 이놈들을 쳐라."

 그의 명이 혈마천의 수하들에게 떨어진다. 그럼에도 그들은 대총사의 눈치를 보며 머뭇거리 고만 있었으니,

 "이, 이놈들이? 사형 정말 이럴거요?"

 "너 혼자 하겠다면야 말리지는 않겠다만 수하들을 이 일에 끌어들이지 마라."

 "뭐야? 이런......"

 그는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눈만 부릅뜨고 있다. 어쩌겠는가? 수하들과 함께라면 저들에 게서 천향옥봉을 빼내는 일이 어렵지 않겠으나 혼자라면 얘기가 틀려진다. 조금전 대사형과 의 대결을 보았는지라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때를 알고 물러섬이 진정 현자라 할 수 있었 다. 애초에 대총사의 결정이 내려졌을 때 가만히 있기라도 했다면 체면치레는 할 수 있었겠 지만 지금 물러선다면 손상된 체면은 복구하기가 힘이 든다. 이미 망신은 당할 데로 당한  터라 더 이상 떨어질 체면도 없었지만 그는 망설였다. 그때다.

 "비키시오. 지나가게......"

 하필이면 그가 있는 쪽으로 초량이 수하들을 이끌고 다가오지 않는가?

 '이 놈! 아예 망신을 주려 작정을 하였구나. 할 수 없다.'

 "내 이 수모는 잊지 않고 있으마"

 잔뜩 힘을 주며 하는 말이었다. 그리고는 슬그머니 자리를 비켜주는데......

 "후후 내 기억하고 있으리다."

 조롱과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그리고는 이총사의 곁을 스쳐 지나며 장내를 유유히 벗어난 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었다. 다 잡은 고기, 그것도 팔뚝만한 황금 잉어를 놓친 듯 해 마음이 저려왔다. 상여락의 곱지 않은 시선이 사형인 대총사에게 가서 꽂힌다.

 "기억하여야 할거요. 천주의 출관 이후에 내 분명히 오늘 일을 거론할 테니......"

 "후후 알았다. 기대하고 있지."

 "설마 그 비급이 몰고 올 파장을 몰라서 한 짓이오?"

 "너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구나."

 "무슨 말을 하는 게요?"

 "독을 품은 가시가 달린 장미는 관상용이지 품속에 품을 것은 못된다. 그리고 만약 내가 천 향을 끝까지 고집했다면 결과는 어찌 되었을 것 같나?"

 "당연히 우리들이......"

 "주위를 살펴보아라. 마혼대의 기운이 느껴지나?"

 "사형이 나타났을 때에 이미 알고 있었소이다. 그 놈들이 이곳에 함께 왔다는 것을......"

 "녀석들에게서 전음이 왔었다. 화룡림 주위에 신비인들이 포위망을 구축하고 있다고......"

 "뭐요? 그렇다면?"

 "그래. 우리가 그들에게 질리도 없지만 이긴다는 보장도 없지. 필요도 없는 한 권의 비급으 로 그 정도의 모험을 할 정도로 난 어리석지 않다."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간 상여락이었으나 그럼에도 그는 용납할 수 없었다. 늘 이런식  이었다. 자신을 깔아뭉개며 뒤통수를 쳐대는 놈의 처세는 그에게 항상 달갑지 않은 것이었 고 사형에 대한 적개심만 부추기고 있었다. 이총사 상여락이 사형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어느새 해가 비추어 온 세상에 빛이 충만했다.

 ★ 초량은 화룡림을 벗어나자 곧 바로 북으로 방향을 잡았다. 화룡림 밖에는 거의 천을 넘어서 는 무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고 그들이 숲 밖으로 나오자 무사들 중의 최선두의 한 명이 이 곳으로 뛰어 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 자의 말이 사실이었단 말인가? 나는 허장성세에 불과한 줄 여겼건만...... 이들이 대체 누 구인가? 그리고 내가 이들을 따라가는 것이 합당할지.....'

 "천무태공(天武太公)을 뵙습니다."

 그는 가까이 오자마자 무릎을 땅에 대며 조아렸다. 극경의 자세였다. 천향옥봉은 내심 의아 함을 드러냈다.

 '천무태공이라고? 무림에 그런 직위를 가진 문파는 없는데?'

 그녀는 점점 미궁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 했다.

 "수하들을 모두 물리라. 그리고 특별한 명이 있기 전까지는 대기하고 기다리도록. 세력을 북 쪽으로 이동시키고 내 명을 기다리고 있어라."

 "존명! 이공께서 중원으로 들어오셨다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그 아이가? 으음...... 알았다. 그만 가 봐라."

 "존명"

 사내는 그 말을 하고서는 무리들에게로 다시 돌아간다. 그들은 하나같이 좀체 보기 힘든 경 갑(輕鉀)을 걸친 자들이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등에 독수리가 새겨져 있었는데 마치 살 아서 날개 짓을 하듯이 생생한 문양이었다. 그들은 말을 몰아 북쪽으로 사라져갔다. 일천  기마대가 움직이는 소리는 한 동안 귓가를 맴돌 만큼 굉장한 것이었다.

 "자, 우리도 가볼까?"

 그는 한쪽에 매어져 있는 말을 끌어오게 했다. 수하들이 끌고 온 말은 모두 열한필이었다.

 "소저는 나와 함께 타고 갑시다."

 초량은 수하가 건네주는 말고삐를 잡으며 천향옥봉에게 말했다.

 "공자께 한가지 청이 있는데 들어 주실 수 있는지요?"

 "무엇이오?"

 "먼저 저에게 사흘 간의 말미를 부시면 안되겠습니까? 이후 비급을 가지고 공자를 찾겠습니 다."

 눈을 똑바로 뜨고 초량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 점 흔들림도 없었다.

 "하하하하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하는 게요? 당신은 나와의 계약을 이행할 의무가 있는  몸이오. 안되오."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천향옥봉의 얼굴에는 안타까움이 간절했다. 그렇다고 이들에게서 벗어날 자신도 없었기에  그녀로서는 어쩔 수 없었다. 천향옥봉을 이끌어 자신의 앞에 태운 초량은 힘껏 외쳤다.

 "자, 가자. 할 일이 많다."

 히히히힝

 앞발을 번쩍 들어 한번 구르고는 이내 백마는 땅을 박차며 앞으로 뛰어 나갔다. 순식간에  그들은 먼지구름만을 남겨둔 채 지평선을 넘어가 버린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누군가가  장내에 나타났다. 거지였다. 허리에 결을 두른 개방도였다. 그는 히죽거리며 웃었다.

 "히히 천향옥봉이 잡혀갔다고 보고를 해야 하나? 아니면 잘 생긴 놈을 따라 갔다고 해야 하 나? 그나저나 요즈음 왜 이리 수상한 놈들이 많이 보이지? 전부 모르는 놈들뿐이니?...... 내 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그는 길게 하품을 하더니 터벅터벅 걸음을 떼었다. 그의 입에서는 연신 괴상한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덩실덩실 춤까지 추는 품이 영락없는 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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