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급변하는 무림정세!
대륙을 질타하는 영웅도 세월이 흘러 기력이 쇠하면 젊음을 한쪽에 놓아버리고 조용히 생을 마감할 준비를 한다. 권불십년(權不十年)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으니 세상을 떨어 울리는 권력도, 제 모습을 온 천지에 뽐내는 화사한 꽃잎도, 세월이 지나면 영락(榮樂)이 쇠 하고 그 모습이 참으로 초라해지는 것이다. 달도 차면 기우는 법이요. 가는 걸음도 끝은 있 기 마련이다. 이것이 순리라는 이름으로 운명지어졌다면 너무 가혹한 일일지도 모르나 그 역시 인간사의 자연스런 이치이니 그 누가 이를 부인하고 거절할 수 있으리요.
그런 점에서 무림이란 세계 역시 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누천년을 이어오는 문파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고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것과는 달리 성세를 그 동안의 세월동안 누리 어 오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었다. 시대에 우뚝 선 거대방파도 천하제일을 외치며 번성을 누 렸으나 그들이 지금껏 존재하기란 쉽지 않다. 모가 나면 정을 맞는 것이요. 제일이라 외치 니 타도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은 쉬이 식지 않는 것이어서 하늘 끝까지 치솟아 오르고 싶어하고 올라간 자를 끌어내리고 싶어한다. 그곳에 서 보는 행운을 누리는 자는 그 또한 생명이 길지 않으니 이 모든 것이 수레바퀴처럼 끊임없이 돌아가는 이치이다. 정상에서 땅으로 곤두박질치고 다시 정상으로 올라가고, 끊임없는 순환을 통해 명맥을 이어가면 그것이 곧 전통이요, 또한 생존 이라는 이름의 저력이 되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범주에서 전통을 지닌 문파란 무림의 세계에서는 많지가 않으니 정파의 기둥이 라 할만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마도에서는 세외삼세와 지금껏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천외의 하늘이라 일컬어지는 천마교 정도이리라. 불같이 일어나는 왕조 또한 길어야 500년 을 넘기기가 힘이 드는 세상이고 보면 천년을 넘게 이어온다 함 자체만으로도 참으로 위대 하다 아니 할 수 없다.
북검회와 남도맹이 수세대만에 이루어진 세력이라면 구정련과 오련회는 기나긴 역사 속에서 꺾어지지 않는 생존의 저력을 움켜쥔 세력이라 할 수 있다. 현 중원의 정도를 지탱하는 네 축의 한곳인 남도맹이 지금 풍전등화의 급박함을 호소하고 있었으나 하늘도 바라보지 않고 땅도 헤아리지 않으니 그 누가 있어 그들의 위급을 다스릴련가? 때로는 불요불굴(不撓不屈)
의 의지만으로도 되지 않는 일이 세상에는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이다.
중원마도중흥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 난 마도련의 기세는 그 탄압의 세월만큼이나 거센것이 었고 그들이 암흑의 지저에서 얼마만큼 절치부심(切齒腐心)하며 이날을 기다려 왔는지를 알 게 해준다.
마도8문중 하나인 녹림의 3700명과 천인대 1000명, 그리고 외당의 일부인 1000명, 4개지 단의 1000명이 가세한 세력은 순식간에 무창의 남도맹을 짓밟아간다. 그들이 들이닥친 때 는 자시가 넘은 시간이었던지라 경비무사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깊은 수면에 잠겨 있었다. 이런 차에 그들의 기습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너무나 시기적절한 것이었다. 게다가 주력 중 상당수가 무림맹에 차출되어 간지라 그다지 저항이 완강하지 못했다.
광마는 파천의 특별한 지시를 수행해야 하기 때문에 선두에서 질주했다. 무영존이 그 뒤를 받치고 있었고 단장화는 이번에 함께 오지 못했다. 이미 그녀는 지존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서 쌍노를 만나러 간 것이다.
"으악"
"꺽"
"막아라."
여기저기서 참혹한 단발마의 비명소리가 이어졌다. 녹림의 한 고수는 칼을 상대의 뱃속에 찔러 넣고 얼굴을 디밀고는 잔인한 흉소를 흘리기도 했고 천인대원들 중에서도 적의 수급을 손에 쥐고 앙천광소를 터뜨리는 자들도 보였다. 참으로 아비규환의 지옥도가 인세에 펼쳐진 것이다. 피에 굶주린 악귀들을 한꺼번에 세상에 풀어놓은 것처럼 잔악한 행동들이었다. 마 도련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그들 또한 평범한 한 명의 무사에 불과하지만 밖으로 나오면 얘기가 틀려진다. 스스로의 마성을 억누르고 있던 울타리가 치워지자 마음껏 발산하는 것이 다.
광마는 그런 것에는 아랑곳없이 안쪽으로 날아들었다. 파천의 지시는 그에게 그 무엇보다 우선 시 된다. 지존이 내린 명을 다시 한번 떠 올려 보았다.
"광마, 너는 다른 것에는 신경 쓰지 말고 사자도왕 만을 챙겨라. 이유야 어찌 되었든 그자 또한 내 수하다. 그러니 어떤 일이 있어도 사자도왕의 죽음만은 막아라."
광마존은 조급해졌다. 그가 과연 살아 있을까? 혈마천의 주력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 다. 그들은 이미 이곳을 벗어난 것이다. 그들이 어찌 이렇게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으나 그들이 남도맹 내에 없는 것만은 확실해 보였다.
사자전으로 들어가는 그의 심장은 다급함으로 심하게 떨려 나왔다. 사자전의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이것은 심상치 않다.'
콰앙
문이든 벽이든 앞을 막아서는 것을 모조리 깨부수고 들어갔다. 그리고 예전에 한번 와봤던 사자도왕의 처소를 향해 빠르게 접어들었다.
콰당
문짝이 박살나며 방안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세......세상에"
광마존의 얼굴은 놀람으로 굳어지고 얼른 안쪽으로 들어갔다.
오! 이럴 수가!
사자도왕은 그곳에 있었다. 칼을 가슴에 박고 희미한 웃음을 짓고 있다. 아직 숨이 끊어지 지는 않았으나 도저히 회생할 수는 없어 보였다.
"후후 이렇게 끝나야 하다니...... 내 인생에 후회는 없으나, 못내 아쉬운 것이 있구나. 허허 허허 인생을 다시 살수만 있다면......"
죽음을 앞둔 인간의 당연한 마음이리라. 그 누구도 이런 마음이기 쉬울 터! 사자도왕은 눈 을 들어 광마존을 쳐다보았다.
"그대는 마도련의 인물인가? 혈마천에 마도련까지...... 너희들이 가질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 늙어빠진 몸뚱아리가 전부겠지."
그는 진정 광마존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긴 그가 광마존을 보았을 때는 20대의 청년의 모습 이었으니 몰라 보는것도 당연하리라. 바로 그 순간이었다. 광마존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 는가 했더니 일인지하 만인지상객 담대추광으로 변한다. 그것을 보고 사자도왕은 심히 격동 을 일으켰다.
"그대는...... 소맹주가 아닌가?"
그랬다. 어쨌든 그는 남도맹의 소맹주의 신분이었다.
"대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유가 무엇이오?"
"허허허 스스로 목숨을 끊어? 난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야."
"그렇다면?"
"놈이 왔다가 갔지."
"놈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것이오?"
광마존은 말을 하며 사자도왕의 상세를 살펴보았다. 도를 뽑는 순간 그는 죽을 것이다. 가 망이 없다. 그저 편안하게 갈 수 있게 도와 주는 것이 고작이리라.
"무림맹주 독고한천. 혈마천의 이총사이기도 하지."
"으음..... 쥐새끼 같은 놈"
광마존이 이빨을 갈아 붙였다.
"천향은 어디에 있소?"
그 말에 사자도왕도 놀란다.
"그 아이가...... 지존께 가지 않았나?"
"뭐요? 여길 떠났단 말이오?"
파천은 광마존에게 그녀에 대한 얘기를 일부러 숨겼다. 그러니 그가 그녀에 대해 모르는 것 은 당연했다.
"그래. 여길 떠났지. 아마도 그 아이도 잡혔나 보군......"
"이런 빌어먹을......"
광마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더니 본래의 용모로 돌아왔다. 그가 다급해한 것은 내심 으로 그녀의 안위여부가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광마존은 눈앞의 사자도왕을 측은하게 쳐 다본다.
"마지막으로 할말은 없소?"
"...... 지존께 한마디만 전해주게."
"무엇이오?"
"무림을...... 무림을 살려달라고......꼭 전해주게."
그는 그 말을 끝으로 고개를 꺾었다. 그의 마지막 말은 무슨 의미였을까? 당금의 무림의 위 기를 절감하고 있는 그였기에 무림을 구해달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가 파천이 어떤 사람인 지 완전하게 알지는 못한다 해도 순수한 정파인은 아니리라 여겼을테고..... 그런데도 구해 달라가 아니라 살려달라? 무림을 살려달라...... 광마존만의 생각인지는 몰라도 그 말에 다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처럼 들렸다.
광마존은 밖으로 나왔다. 마음이 무거웠다.
★ 무림이 발칵 뒤집혔다. 세상에 이런 일은 결단코 벌어지지 않으리라 여겼던 자들은 그 소 식에 할말을 잃고 진위여부를 알아보느라 여기저기 뛰어다니기도 했다.
두 가지 소식!
그것은 표면적으로는 조용한 무림에 일대 경종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첫 번째 소식 은 마도련의 강남무림 장악에 대한 것이었다. 하룻밤 새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4만 명의 마도련 고수들이 8로에 걸쳐 무림맹 지부와 소속 문파들을 휩쓸 어버린 것이다. 그들의 기습은 놀랄 만큼 신속했고 또한 잔인했다. 그들에게 항복하며 투항 의 의사를 표시한 문파들의 수장들도 어김없이 목이 잘렸고 대항하는 세력은 모조리 황천행 이 되었다. 마치 정도의 씨를 말리기라도 하려는 듯이 거침없이 휩쓸어버린 그들의 무력에 하늘도 놀라고 땅도 잠잠했다.
그들은 곧바로 무창과 악양에 세력을 정비하여 무림맹의 공격에 대비했다. 그들의 숫자는 삼일이 지나기 전에 6만을 헤아리기 시작했다. 곳곳에 숨어 지내던 마도인들까지 가세했으 며 정파의 허울을 쓰고 지내던 투항한 세력들까지 어울리니 능히 무림맹과 일전을 결할 정 도의 세력이었다.
두 번째 소식은 좀더 충격적인 것이었다. 청해 사황성의 사천침략이 그것이었다. 그들은 2 만의 무사들을 이끌고 단 하루만에 사천성 서부지역을 거의 장악했으며 송번에 본거지를 두 고 호시탐탐 사천성 성도를 노리고 있다 전해졌다. 그들과 일전을 결하기 위해 사천성의 전 정파들이 성도에 집결하였다 한다.
이 두가지 소식은 무림에 엄청난 파장을 던져 주었다. 소문으로만 들려오던 세외세력들의 중원침략이 드디어 사실화되었고 여기에다 정도에 눌려 지리멸렬했다 여겼던 마도련이 다시 금 일어섰다. 이런 혼란은 순식간에 전 무림을 흉흉하게 만들었으며 곳곳에서 마인들이 출 몰하여 인심을 어지럽혔다.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렀는데도 무림맹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취 하지 못하고 있었다.
★ 마도련의 본거지가 된 악양, 특히 동정호 일대는 그야말로 용담호혈이 되었다. 6만을 헤아 리는 마도련의 인물들 중 자그마치 4만이 이곳 동정호 일대에 포진하고 있었다.
파천은 광마존과 무영존 그리고 율극을 마도련에 남겨두고 독고무만을 데리고 마도련을 떠 났다. 그가 떠나며 율극에게 신신당부를 하고 광마존에게도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것을 명 했으나 왠지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악양중심부에 이른 파천은 객점으로 발걸음을 돌렸 다. 이미 그의 계획대로 정도사령대의 사령들은 무림맹으로 가고 있거나 이미 도착한 이들 도 있을 것이다. 이미 강남이 마도련의 손아귀에 들어 온 이상 이곳에 어물거리다가는 어떤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천마서생의 모습을 하고 있는 파천과 30대 장한의 평범한 인상의 독고무가 천평루로 들어 섰다. 정오가 된 시간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많았다. 무림인들은 거의 보이지가 않았다. 그는 점소이의 안내를 받으며 이층으로 올라섰다. 파천은 이층에 올라서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층에는 일층과는 달리 상당수의 무림인들이 보였고 그들 중 일부가 추태를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하하하 그래. 그래. 잘한다. 이 어르신이 너의 생명을 살려 주는 것이니 이정도 재롱이야 당연한 것이지. 그렇지 않은가?"
텁석부리 장한이 주변의 일행들에게 하는 말이었다.
"그렇지요. 형님! 이제 우리들 세상이 왔는데 지난날의 수모를 마음껏 풀어야지요. 이놈들이 그 동안 우리들을 못살게 군것을 생각하면 단칼에 베어버려도 성에 차지 않지만...... 우리가 어디 그놈들과 같습니까?"
말을 한자는 쥐눈을 한 호리호리한 장한이었다. 그들의 앞에는 일남일녀가 두려움에 젖어 떨고 있었고 텁석부리 장한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중의 이십대 사내는 옷을 거의 다 벗고 중요부분만을 간신히 가린 모습이었다.
파천과 독고무가 한쪽 구석에 가서 자리를 잡고 간단한 요깃거리를 시켰다. 그리고는 그들 이 하는 짓을 유심히 살폈다. 텁석부리 장한이 다시 말했다.
"네가 생각할 때 우리 어르신들이 잘못을 한다고 생각하느냐?"
"그.....그럴 리가 있습니까? 대협들은 제가 보기에도 광명정대하신 분들....."
"그래? 후후 그렇다면 너는 우리들에게 무엇으로 보답을 할 참이냐?"
"보, 보답이라니요?"
"허, 이놈이 말로는 우리를 치켜세우면서 정작 행실은 이에 못 따르는 놈일세. 둘째야."
"네 형님!"
쥐눈을 한 사내였다.
"나는 낯간지러워 말못하겠으니 네가 대신 얘기해라."
그 말을 하고는 다시 자신의 자리에 가서 앉는다. 사내는 가까이 다가오더니 벗고있는 젊은 이의 엉덩이를 툭툭 차며 한바퀴 돌았다.
"살이 토실토실한 것을 보니 그동안 호강했나 보군. 네 보기에 우리들이 어떠해 보이느냐?"
"네? 대협들은 광명정대....."
"이자식이 틈만나면 그 소리네? 너는 그 말 밖에는 모르느냐? 잘 봐라. 우리는 그동안 너희 들 정파놈들이 핍박을 하는 바람에 못 먹고 못 입어서 여러 가지로 부실하단 말이다. 그러 니 우리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보시를 좀 하거라."
결국은 돈을 내라는 말이었다.
"물론입지요. 그런 것이라면 얼마든지......"
그리고는 그는 벗어 둔 옷가지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준다. 은자와 전표였다. 언뜻 보 기에도 은 열냥 정도에 전표도 은스무냥짜리가 다섯장은 되어 보이니 상당한 액수였다.
"후후 보아라. 너는 이렇게 많은 돈을 품속에 넣고 다니는데 나는...... 하나도 없잖아?"
그리고는 옷을 소리나게 털어 보인다.
"그러니 네가 우리에게 적선을 한다해도 그리 억울해 할 것은 없다. 알겠느냐?"
"네. 네. 대협"
참으로 재수없는 사내였다. 그는 이곳 악양의 정도문파 중 하나인 자경문의 제자였다. 혈겁 에서 다행히 목숨을 건진 그는 장래를 약속한 여자를 데리고 북으로 갈 요량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우매하게도 먼길을 떠나기 전에 요기라도 든든히 할 생각을 갖고 천평루에 들어 왔 다가 그를 알아보는 사람 때문에 신분이 들통나고 마침 이곳에 있던 마도인들에게 이런 봉 변을 당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들이 자신들을 죽이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 여기고 있 었다. 2층의 손님들 중 절반은 무림인들이었고 그들은 모두 마도인들이었다. 며칠 사이에 이곳 악양에는 마도련에 가입하기 위해서 찾아오는 마도인들로 북적거렸다. 이들도 그들 중 의 일부였다.
"되었다. 그만해라."
텁석부리 장한이 쥐눈의 사내에게 하는 말이었다. 소득이 있으니 그 정도면 되었다는 말일 게다. 그럼에도 쥐눈의 사내는 뭐가 아쉬운지 물러서지 않고 두 명을 유심히 살폈다. 바닥 에 무릎을 꿇고 있는 두명 중 여자의 용모를 살펴가던 사내는 음심이 동하는지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표정을 통해 그가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알게된 젊은이는 내심 불안해 져 왔 다.
"보아하니 북으로 도망 갈려고 하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너를 살려두면은 또 다시 우리를 향해 칼을 겨눌 것이 아니냐?"
그 말에 젊은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이미 알아 차렸다. 그렇다고 약혼녀를 사내들에게 넘겨 줄 수도 없었다. 이들에게 대항해 보았자 죽음만을 당할 뿐이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래서 너를 병신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너를 위해서도 우리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구나."
그 말에 젊은 사내도 놀랐지만 그의 약혼녀가 더 놀라는 모습이었다. 병신의 여자가 되기는 싫은가 보다.
"나으리. 제발 한번만 살려 줍쇼. 저 같은 한심한 놈을 죽여 보았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 까? 그러니......"
"어허 이 놈이 언제 내가 너를 죽인다 했느냐? 병신을 만든다 했지. 그러니 마음의 각오를 해 두거라."
"제발 나으리. 무림에 다시 발을 들여놓는 일은 추호도 없을 터이니 제발......"
젊은 사내는 울먹이며 호소한다. 그러자 옆의 여자가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그녀 또한 무림인인지라 그의 이런 모습이 역겹다 여겨졌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살아나는 것이 우선이니......
텁석부리 장한은 둘째가 하는 짓을 보고 어느 정도 그의 내심을 알아채었다. 그의 시선도 다시 한번 여자를 살펴보았다. 그다지 뛰어나다 할 수는 없었으나 새하얀 살결과 늘씬한 몸 매가 품어봄직한 욕심을 주는 여색이었다. 그래서 그도 말리지 않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주 변에서 식사를 하는 다른 마도인들도 이들의 행동이 재미있는지 입가에 웃음을 담고 지켜보 고만 있다. 독고무가 파천을 쳐다보았다.
"저대로 두실 겁니까?"
"두지 않으면? 식사나 빨리 하거라. 먼길을 떠나야 하니."
이들은 곧바로 무림맹으로 갈 셈이었다. 어차피 파천이 있어야 무림맹의 다음 행로를 결정 할 수 있다. 그래서 가는 것이다. 파천도 지금 저들이 하는 행동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말리고 싶지도 않았다. 저들은 저런 식으로 지난날의 울분을 토해내는 것이다. 그 런데, 파천이 보아 넘길 수 없는 장면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쥐눈의 사내는 젊은 사내를 쳐다보며 여자를 요구하는 눈치를 노골적으로 보내었다. 젊은 사내가 그것을 모를리 없었다. 그럼에도 시침 뚝 떼고 엉뚱하게도 울며 불며 사내에게 매달 린다. 살려 달라고......
'호, 이자식 봐라. 그냥 곱게 봐 줄려 했더니 안 되겠군.'
"그래서 말인데. 우리 형님이 아직 여자가 없다. 보아하니 너는 아직 처자식을 거느릴 처지 도 아닌 것 같고, 또 병신이 되면 그것도 힘들 것 아니냐? 그래서 너를 살려 줄테니 대신 네 여자를 우리에게 넘겨라."
참으로 수치를 모르는 자의 말이었다. 그 말에 텁석부리 사내는 흐뭇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 덕이고 남자는 난처한 기색이었으며 여자의 안색은 새파래졌다. 구경하는 자들은 일이 점점 흥미로워진다는 듯이 눈에 생기를 담고 쳐다보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대협! 제발...... 그것만은..... 제가 가진 것을 모두 드렸는데 어찌 제 여자까지 내 놓으라 하 십니까?"
"싫으냐?"
냉랭한 물음에,
"싫다기 보다는......"
말을 흐리는 사내의 말에 여자는 고개를 홱 돌려 사내를 쳐다본다. 어찌 저런 태도를 보일 수 있단 말인가?
'옳다구나. 이제 되었다'
"둘 중에 하나만 선택해라. 여자냐? 네 생명이냐?"
뜨거운 여자의 시선을 느끼면서도 사내는 모른척했다.
'빌어먹을 놈...... 어쩔 수 없지. 여자는 또 만나면 되지만, 생명은 하나밖에 없는 것이니'
그렇다고 입 밖에 꺼내기가 힘이 들었는지 쭈뼛거리고만 있다. 그의 표정만 보아도 그가 지 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결정했으면 어서 가지 않고 뭘 하는 거냐?"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내는 옷을 주섬주섬 주어 입기 시작하더니 여자 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벌떡 일어선다.
"그럼 소인은 이만......"
인사까지 꾸벅하고는 사라져가려 한다. 여자는 배신감에 온 몸을 떨어 댈 뿐이었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여자의 눈에 원한의 빛이 떠오르고,
"잠깐만요."
"응? 왜 그러느냐?"
"저도 한 말씀드리지요. 내가 당신의 여자가 되겠으니 한가지 청이 있어요."
여자의 말에 텁석부리의 눈이 화등잔만해지며 얼굴에 화색이 돈다.
"그것이 정말이냐?"
"네."
입술을 꼬옥 깨문다.
"하하 한가지 아니라 두 가지라도 들어주마."
"저 놈을 죽여주세요."
이 순간 모두의 얼굴은 놀람으로 굳어지고 장내는 싸늘하게 냉각되어 간다. 그 말에 가장 놀란 사람은 밖으로 나가려던 여자의 정인이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지만, 이렇게 즉각적으로 돌아 올 줄이야 그도 몰랐을 것이다.
"다, 먹었으면 그만 가자."
파천이 독고무에게 하는 말이었다. 독고무 또한 여자의 그 말에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다가 파천의 말에 정신을 되찾는다.
"지금 가시려고요?"
"뭐, 볼 것 있다고 여기서 머뭇거리겠느냐?"
그리고는 일어선다. 독고무는 결과를 보지 못해 아쉽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그들이 마악 자 리에서 일어섰을 때였다.
"흐흐흐 들었느냐? 죽어줘야겠다."
텁석부리 장한이 젊은 사내에게 하는 말이었다. 온 몸을 와들와들 떨어대는 그의 모습만 보 아도 그가 얼마나 겁을 집어먹고 있는지를 알게 해 준다. 텁석부리 장한이 도를 꺼내었다.
스릉
보기에도 섬뜩한 살기가 그를 더욱 공포 속에 몰아 넣고, 파천의 시선이 그들을 다시 한번 쏘아보더니,
"정말 짜증나는군. 그냥 가려고 했더니 꼭 뒤를 안 닦은 것처럼 찜찜하니......"
그러더니 그들에게로 성큼 다가선다. 웬 젊은 놈이 이쪽으로 다가서자 텁석부리 장한의 일 행들은 의아하여 쳐다본다.
"야, 너 더 이상 지저분한 짓 하면 죽여 버린다."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오히려 권태감에 찌들은 듯한 음성이 파천에게서 흘러 나왔다.
텁석부리의 일행인 세 사람은 서로를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린다.
"이 녀석 우리가 누구인 줄 알고."
"네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 짜증나게 만드는군. 마도를 일으켜 세운 것이 너 희들 같은 쓰레기들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함이 아니었다. 이런?"
말하기조차 귀찮다는 생각이었는데 그만 상대를 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 다.
"이런 죽일 놈이"
텁석부리가 도를 휘둘러 왔다. 파천이 슬며시 손을 흔들자 도가 사내의 손에서 빠져 나오더 니 어느새 파천의 손에 들려진다. 그것을 보고 있던 장내의 모든 인물들은 파천이 가공한 고수임을 그제야 깨닫고 두려움을 나타내었다.
"너, 너, 너!"
세 명을 차례대로 지명하자, 그들은 움찔하며 놀란다. 그들 또한 상대가 보통의 고수가 아 니라 여긴 것이다. 이들의 눈에도 파천이 조금의 재주를 믿고 까부는 자신들과는 차원이 다 른 고수로 여겨진 것이다.
"네?"
"마도련에 가입하러 왔나?"
"네"
세 명이 동시에 대답했다.
"난 천마서생 파천이다."
진정 세상에 태어나서 이렇게 놀라 본 기억이 있었던가? 장내에 있던 모든 무림인들은 바닥 에 무릎을 꿇으며 절을 해댔다. 그가 마도대공으로 마도련의 전권을 휘두르고 있음이 이번 의 강남무림 제패를 통해 전 무림에 알려진 것이다. 그러니 스스로 마도인이라 생각하는 그 들이 이런 태도를 보임은 당연한 일이었다.
"너희 세명!"
"네. 대공"
그들은 두려움과 존경이 담긴 목소리를 흘려 내었다.
"너희들의 마도련 가입을 허락하겠다."
그들의 얼굴은 환하게 밝아졌다. 그리고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넘쳐났다. 주변의 사람들은 그들을 부러움이 담긴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모두 일어서라."
"존명!"
금새 그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가 있었다. 시시껄렁한 삼류 마도인에서 마도련의 정식 무사가 되는 순간이었으니 어찌 그들의 목소리가 달라지지 않을 손가? 그들이 일어서자 여 전히 귀찮다는 듯이 파천이 뱉어내는 말!
"마도련에는 너희들 같은 쓰레기들은 필요가 없으니 참살하겠다. 마도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갖고 이만 죽어라."
그 말을 하는 순간 그들은 잘못 듣지 않았나 해서 스스로를 의심해 보았으나 그것이 엄연히 사실임을 깨달아야만 했다. 파천이 손에 들린 도를 슬쩍 그었고 그 순간 벌린 입이 채 다물 어지기 전에 그들의 목은 뎅강 잘려져 객점의 바닥을 굴러다닌다.
쾅
파천이 벽을 향해 도를 집어 던진 것이다. 자루까지 깊숙이 박히며 내는 소리였다. 그리고 는 더 이상 용무가 없다는 듯이 몸을 휙 돌려 장내를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고 나서도 한 참동안이나 객점 안은 조용했다.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마도대공을 보았다는 사실도, 방금 일어난 살인도, 그러나 그들 눈앞에는 엄연히 그 결과물이 굴러다니고 있었으니...... 파천이 나가는 모습을 유심히 살피는 인물이 하나있었다.
젊은 사내와 여자는 함께 그곳을 벗어났다. 그 후 사내와 여자가 어찌 되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