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제(皇帝)의 검(劍) - [77]
검에서 검강을 뻗치기란 쉽지가 않은 일이다. 적어도 내공이 3갑자 이상이라야 흉내라도 낼 수 있는 경지이니 이 정도만 되어도 일류고수로 불리기에 부족하지 않다. 무림을 행도 하다 보면 사실 이 정도의 고수를 만나기란 쉽지 않다. 단지 무림맹이나 마도련 같은 곳은 정도 와 마도 문파들의 연합체 성격이 강한 단체였으므로 각 문파의 최고수들이 상주하기 마련이 고 그런 곳에서야 검강을 일으키는 고수를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다.
지금 마도대종사의 앞을 엄밀히 막아서고 있는 자들은 검강이 한자나 치솟는 자들이었으므 로 최소한 200년의 내공을 지녔다는 말이다. 금석도 두부 베듯이 잘라내는 경지의 고수들 인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율극이 맨몸으로 부딪혀 간다.
캉
캉
이것이 무슨 요상한 소리란 말인가? 분명히 그들의 검은 검강으로 잔뜩 기세를 올리고 맨살 을 내리쳤건만 불똥이 튀면서 반탄 되어 나오니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렇다고 맥 놓고 감탄이나 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재차 뒷사람들이 검으로 율극을 찔렀다. 적어도 이번에는 이 요상한 놈을 격퇴시키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멈추게 할 수는 있으리라 여겼다.
쾅
"헉"
"끄억"
그들은 자신의 애검과 함께 뒤로 날려가고야 만다. 자세히 보니 율극의 몸 주위로는 희뿌연 안개가 감돌고 있었고 그것은 검으로 내리 칠 때마다 그의 몸을 더욱 엄밀히 감쌌다. 율극 이 나가던 기세를 멈추지 않고 마지막 다섯명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들은 이미 검강을 일으키며 한꺼번에 그에게 직격하고 있었기에 자연 즉 율극의 장력과 부딪혔다.
콰앙
천번지복할 굉음이 울려 나오며 검이 산산조각나 흩어졌다.
"으윽"
"컥"
"캑"
누가 더 고상한(?) 비명소리를 지르는가를 내기라도 하듯이 함께 울려 나온 소리였다. 어느 새 율극은 그들의 사이를 지나치며 대종사의 지척까지 이른다. 율극의 손이 내밀어지고 대 종사가 몸을 허공으로 띄우고 율극이 지나친 다섯명의 신비인의 몸이 우수수 조각나 흩어진 것은 동시의 일이었다. 구음진경의 무공이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이런 것을 알리 없는 장 내의 인물들은 지금까지 그저 바보라고만 알고 있었던 자가 기절초풍할 위력을 발휘하자 은 근히 그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우와 잘한다."
"대단하다. 저럴 수가?"
"역시 대공의 수하는 뭔가 달라도 다르구나."
그들의 시선은 대종사의 육장과 율극의 장심이 밀착하는 것을 빠르게 따라갔다. 한 순간도 놓치면 천추의 한을 남기기라도 하는 듯이 조바심을 내는 모습들이었다.
콰앙
"으윽"
누가 비명을 지른 것인가? 누가 격퇴된 것인가?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그것 하나였다. 이 결과에 따라 자신들의 생명도 좌우되는 것이었기에 관심은 지대했다. 율극은 한 걸음 물러 나 있었고 대종사는 태사의를 넘어뜨리며 뒤로 날아가 간신히 몸을 지탱한다.
"야호, 대종사 저것 별것 아니구나."
"끝내준다."
광마존 또한 놀람의 눈으로 다시 한번 율극을 쳐다본다. 대체 어떻게 그만이 내공을 상실하 지 않았는지 조차 알지 못했으나 율극이 생각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이 왜 이리도 기쁘단 말 인가? 저 정도라면 쉽게 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쩌면 율극의 말처럼 모두 죽일 수 있을 지 도 몰랐다.
대종사는 눈앞의 괴물같은 놈을 쳐다보았다. 그는 아직까지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빌어먹을...... 이게 무슨 개망신인가?"
그는 허리춤에 매어져 있는 검을 끌렀다. 검신이 붉은 빛이 나는 것이 보검임에 틀림이 없 었다. 그는 검집을 한쪽에 팽개치고 두 손으로 검자루를 힘주어 움켜 쥐었다.
"내가 방심했구나. 다시 한번 해보......"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눈앞의 괴물 같은 놈이 또 다시 덤벼들었던 것이다. 손을 앞으 로 쭉 밀어내는 상대의 장심 에서는 구름기둥 같은 장력이 돌풍처럼 밀려나온다. 아직 근처 에 다다르지도 않았는데, 한기가 밀려오는 것이 극음의 무공인 듯했다.
"받아라. 놈! 탈명검 염화탈명(炎火奪命)"
그의 검에서는 시뻘건 화염이 솟구쳤다. 언젠가 무창의 비무에서 4룡중 한 명인 탈명화룡이 전개한 바로 그 검법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화염은 당시보다 더욱 거센것이었다.
두 가지 각기 다른 성질의 기운이 부딪히자 심상치 않은 충돌음이 일어난다.
쾅
콰콰쾅
그들은 연속적으로 부딪혔으나 누구도 승기를 잡지는 못했다.
'빌어먹을 저 놈이 여유를 주지 않으니, 혈마환살검을 쓸 수도 없고...... 뭐 저런 놈이 다 있 냐?'
그는 다급했다. 수 천 번의 비무를 겪어 보았다 자부하는 자신이었지만 눈앞의 상대는 모두 지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 자였다. 정묘한 초식을 지닌 것도 아니고 그저 장심에서 희뿌연 극음의 강기 만을 뿜어 낼 뿐이었다. 그러나 어찌나 그 위력이 극심한지 슬쩍 스치 기만 해도 옷자락이 부서져 나간다. 그러니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는 날에는 어찌 손써볼 여 유도 없이 한 조각 빙편으로 화할 판이다. 결국 그는 비교적 빠르게 전개 할 수 있는 탈명 검과 간혹 장력을 발출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자신이 가장 자신 있게 펼칠 수 있는 비장의 무기인 혈마환살검은 시도조차하지 못한다.
"죽어라."
놈은 그 소리만을 내 지르며 육장을 휘둘러 온다. 어찌나 몸놀림이 빠른지 눈 앞이 어질어 질했다. 점차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음에도 놈은 한시도 쉬지 않고 죽어라 공격을 해댔다.
놈은 지치지도 않는 진정 괴물이었던 것이다.
'좋다. 이렇게 된 것 할 수 없다.'
쾅
또 한번의 격돌로 뒤로 성큼 물러서며 상대가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오른손으로 검을 쥐고 왼손을 품속으로 넣는다. 놈은 역시나 그 지겹도록 본 수법을 무식하게 휘둘러 오며 공격을 했다. 스치면 죽는다는 생각밖에 없었는지라 극도로 조심했다.
"이놈 이제는 죽어라."
대종사의 검이 화염을 뿜어내며 구음마장과 충돌해가고 품속에 들어갔던 왼손이 밖으로 나 오며 무엇인가를 홱 뿌렸다.
"억"
처음으로 율극은 신음을 발하며 뒤로 물러서고 그는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온 몸에는 빽빽하게 작은 침들이 박혀 있었다.
"하하하하 네가 용빼는 재주가 있어도 살아나지 못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시독탈명침(屍毒 奪命針)이라는 것......"
득의한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어가던 대종사가 멈칫 하더니 놀라 입을 딱 벌린다. 율극이 하는 짓을 보라. 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침들을 뽑아 쥐더니 한 손에 쥐고 힘을 준 다. 그리고는 손을 벌리자 무엇인가가 손바닥에서 또르르 굴러 떨어진다. 그것은 얼음덩이 였다. 침들을 한데 모아 한꺼번에 얼려 버린 것이다. 그리고는 손으로 침이 박혔던 몸을 슥 슥 문지르더니 대종사를 쳐다보고는,
"이놈 죽어라"
지겹도록 들은 그 말을 또 다시 뱉어내며 두 손을 들어 공격해 온다.
"뭐, 이, 이런 놈이 다 있냐?"
그는 순간적으로 뒤로 물러서고, 공격의 기회를 놓쳐 물러서고, 반격을 하기가 엄두가 나지 않아 물러서고...... 계속 물러서고 있었다. 이제는 대전의 아래쪽으로까지 밀려나며 대전을 한바퀴 돌아갔다. 마치 모두에게 좀더 자세히 보여주기 위해 선을 보이는 듯 했다.
율극의 구음마장이 대종사에게 다가오면 간신히 탈명검을 발휘하며 뒤로 물러선다. 벌써 이 러기를 수십차례, 보는 사람도 슬슬 지겨워오기 시작했다. 당하는 사람이야 똥줄이 탈만큼 다급할지는 몰라도 보는 사람은 빨리 어떤 식으로든 결말이 났으면 하고 바라는 심정인 것 이다. 결국은 그가 밑으로 도망가는 바람에 입구를 막고 있던 혈마천의 수하들까지 몇사람,
개죽음을 당하고야 마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었다.
군사가 마안대장에게 전음을 보내었다.
[쉽사리 끝날 것 같지는 않군요. 저자들을 마안대장이 모두 죽여요.]
[네?]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이미 영주의 명이 떨어졌으니 더 이상 살려 둘 필요가 없어 보이 는 군요. 어차피 저 괴물은 좀더 두고 상대해야 할 것 같으니......]
[알겠습니다.]
마안대장은 회색의 야행복 같은 차림을 하고 있었고 두 눈만 빠끔히 내어놓았다. 그가 좌중 의 인물들에게 다가선다. 광마존과 무영존은 그들을 은근히 감시하고 있었으므로 지금 그들 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 지를 알아챈다.
"율극아"
광마존의 음성이 토해지자, 그렇게 미쳐서 광분하던 율극의 신형이 거짓말처럼 딱 정지한 다. 그리고는 소리가 난 쪽으로 돌아본다.
"광마 형! 왜 그러지?"
아직은 정신이 나간 것이 아니었나 보다. 율극이 이쪽으로 쳐다보자 좌중의 인물들에게 다 가서던 마안대장의 걸음 또한 동시에 멈추고, 그러는 사이에 대종사 혁우종은 한숨을 돌리 고 있었다.
'무식한 잡것'
이것이 율극을 바라보는 대종사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싸우고 싶지 않은 상 대였다. 이렇게 악착같이 덤벼드는 놈은 머리털 나고 처음이었다. 설사 존마전을 나가 악양 땅을 벗어난다 해도 저 놈은 악착같이 따라 올 놈으로 보였다.
"저 연,놈들을 먼저 죽여라."
광마존이 군사와 마안대장을 가리키자 마안대장은 흠칫하여 한 걸음 물러섰고 군사 제갈초 홍은 그 예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두려움에 잠겼다. 보아하니 대종사조차 저 괴물로부 터 자신들을 보호해주지 못할 것임을 알고 있는 두 사람인지라 그 다급함은 대단한 것이었 다.
"저것들 먼저 죽이라고?"
"그래. 쟤네 들이 이 형을 죽이려고 하는구나."
"그래?...... 알았어."
천연덕스럽게 대답하고는 대종사를 보며,
"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라. 갔다와서 죽여 줄 테니......"
"허허허허 참으로 이런 꼴을 당하게 될줄이야."
율극은 귀찮다는 듯이 두 사람에게 다가선다.
"이 놈! 어딜 가느냐?"
등뒤에서 대종사가 검으로 율극을 찔러왔다. 그러자 율극은 손을 뒤로 휘둘러 장력을 쏘아 내더니 반탄되는 힘을 빌려 순식간에 두 사람에게로 다가선다. 다급해진 두 사람은 대종사 쪽으로 몸을 피하고 그 뒤를 다시 율극이 쫓고, 참으로 진풍경이 펼쳐진다. 분명히 서로의 생명을 뺏기 위한 진지한(?) 몸짓들이었건만 보는 사람들은 왜 이리 웃기는지? 결국은 대종 사의 뒤까지 무사히(!) 도망간 군사와 마안대장은 안도의 한숨을 쉰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에 불과 했으니, 곧 바로 율극의 무지막지한 공격이 시작된 것이다. 처 음에는 비등하게 대결을 하는 듯 하더니 곧 바로 뒤로 쫓겨나기 바쁘다. 그 바람에 뒤에 숨 어 있는 두 사람의 생명은 더욱 위험해 지기 일쑤였다. 까딱 재수 없으면 그대로 생명줄을 놓아야 할 판이었다. 대종사가 어느 방향으로 도망갈지는 그들도 예측이 불가능했기 때문이 다.
마안대장은 둘이 격돌하는 틈을 타 대종사의 뒤에서 옆으로 빠져나가 보았다. 그랬더니 아 니나 다를까 저 무식한 괴물 같은 놈은 자신을 먼저 죽이려고 덤비지 않는가? 왜 그런 명을 내려 이런 위험을 자초하는지? 군사에게 욕이라도 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순간 대종사 또한 스스로를 한탄하고 있었다.
'바보 같은 놈. 아까 기회가 왔을 때에 혈마환살검을 끌어올리는 건데......'
참으로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한 노릇이었다.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자신이 죽는다는데에 별 다른 변수는 없어 보였다. 간혹 차라리 그냥 죽을까 하는 유혹마저 들 정도니 저 놈의 끈질 김이 얼마나 공포심을 주는지를 알 것이다.
'그래. 그 방법이 있었군. 마안대장으로 하여금 다시 시선을 끌게 하고 그 사이에......'
[잘 들어라. 지금 다시 한번 놈의 관심을 끌어라. 그 사이에 내가 혈마환살검을 끌어올릴 것이니.]
이것은 분명히 나가 죽어 라는 명령이었다. 마안대장이 전음으로 즉시 대종사에게 대답한 다.
[싫습니다. 뻔히 죽을 줄 알면서 그런 위험을 자초할 수는 없습니다.]
참으로 황당한 대답이었다.
[야. 이놈아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우리 모두다 죽는단 말이다.]
[그렇다고...... 알겠습니다.]
[지금이다 튀어나가]
마안대장은 순간 옆으로 전력으로 튀어나갔고 금새 율극은 그를 죽이기 위해 따라붙는다.
바로 그 때였다. 대종사의 검에서 심상치 않은 변화가 감지되기 시작했다. 왼손바닥을 검자 루 아래에 받치고 검극을 일직선으로 허공으로 세웠다. 얼마의 시간이 흘러가자 그의 검에 서 검은 안개가 흘러나오며 바닥에 깔리기 시작했다. 탈명화룡이 펼쳤던 혈마천 삼대마공 중 하나라는 혈마환살검이었다. 대종사의 뒤에 있던 군사는 안도의 탄성을 발한다.
"아, 이제 되었다."
그녀는 안심이 되었다. 혈마환살검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그녀는 알고 있었다. 언젠 가 무창에서 옥면신룡의 수하라는 자에게 대총사의 이제자 장도일이 한번파해 당하기는 했 으나 그 자는 혈마환살검의 오의를 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눈앞의 영주라면 장도일 보다 는 뛰어 난 고수이다. 게다가 혈마환살검만을 익혀 왔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이 검법에 집착을 보여 왔었다. 그러니 저 미친놈을 때려잡기에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한 편 옆으로 튀어나간 마안대장은 죽어 라고 도망가기 바빴다. 감히 자신의 실력으로는 맞 상대한다는 자체가 불가능함을 알기에 그나마 빠른 경신재간을 믿고 도망을 갔다. 꽤나 넓 은 존마전 안이었지만 오늘따라 왜 이리 좁게 여겨지는지? 따라가던 율극이 제자리에 딱 멈 추는가 했더니 서서히 한 면으로 그를 몰아갔다. 언제든 장력을 발출 할 준비를 갖추고 있 는지라 쉽사리 도망가지도 못했다. 정면으로 마주보고 서서히 다가오니 그 어디로도 발을 떼어 놓기가 쉽지 않았다.
'아, 이제는 꼼짝없이 죽었구나. 저 빌어먹을 영주자식의 말을 듣는 것이 아닌데...... 쳇 지 가 군사에게 마음이 있으니 나에게 이런 역을 시킨다는 것쯤 모를 줄 알았느냐?'
피슉
율극은 몸을 움츠렸다 순간적으로 공간을 단축하더니 손을 떨쳤다. 이미 그 어느 곳으로 도 망쳐보아도 장력의 사정권 안에 들어감을 절감한 마안대장은 이대로 개죽음을 당할 수 없다 는 듯이 힘껏 두 손을 펼쳤다. 그의 장력이 괴물 같은 놈의 흰색 기류에 닿자 소리 없이 소 멸되고 그것은 곧장 눈앞을 뒤덮었다. 등줄기가 시원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으로 끝이 었다. 손을 펼친 그 자세대로 마안대장은 얼음덩이가 되었고 점차로 미세한 균열을 일으키 는가했더니 우수수 떨어져 바닥을 뒹군다.
"히히 한 놈 죽였다."
율극은 뒤로 돌아서서는 광마를 향해 한 번 웃어주고는 곧 바로 대종사쪽으로 몸을 솟구쳤 다.
"으응?"
율극이 고개를 갸웃했다. 눈앞에는 시커먼 연기가 흐르지도 않고 뭉쳐 있었고 그 위로는 검 극이 삐죽하니 솟아 있었다. 종이배를 접어 물위에 띄어 놓은 듯이 안개를 따라 흔들리고 있었고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몇 개에서 수 십 개의 환영을 만들었다. 집중하여 보면 볼수 록 환각이 심해져서 어느 것이 진짜인지를 알 수 없게 했다. 점차로 그 숫자는 급속도로 늘 어가는가 했더니 눈앞을 가득 채운다.
"율극. 조심해라. 사정보지말고 뭉쳐 있는 안개를 때려라."
광마존은 이미 한번 상대해 본 경험이 있기에 그 검법의 위력을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정 상적인 상태라면 능히 저 정도야 상대할 수 있었으나 지금의 그로서는 군사 제갈초홍도 이 길 수 없었다. 광마존의 말이 있었음에도 율극은 고개만을 갸웃거리며 신기하다는 듯이 쳐 다보고만 있다.
"크크크크 이제 네 놈을 죽여주마!"
그 음성은 분명히 자신감에 넘치는 대종사의 음성이었다. 순간 율극의 얼굴에 이채가 떠오 르고,
"아, 그곳에 숨어 있었구나. 죽어라."
율극의 손에서 또 다시 쏟아지는 구음진기! 그러자 허공을 떠돌던 검극이 순간적으로 사방 으로 흩어지며 여러 겹으로 겹쳐지고 수 백 개나 되는 형상으로 다시 분리된다. 율극이 쳐 낸 장력은 이미 그 변화에 묻혀 소리 없이 소멸된 뒤였다. 율극은 이상하다는 듯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상하네? 왜, 아무런 소리가 안 나지?"
무언가 부딪혀야 정상이건만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음이 이상했나보다. 서서히 검극이 다가 서고 있었음에도 율극은 멍청하니 움직이지도 않는다.
광마존은 애가 탔다. 그가 상대해 보았던 탈명화룡보다는 강한 고수였지만 자신이 상대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고 여겨졌다. 문제는 율극이 자신의 능력을 사용할 줄을 모른다는 것이 다. 지나치게 정직한 공격만을 펼치는지라 능력에 비해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을 일깨워주고 싶어도 율극의 지능수준이 떨어지니 방법이 없었다.
"크크크크 네 놈의 재롱은 여기서 끝이다. 더 이상은 요행수를 바라지 마라."
피슛
순간적으로 무엇인가가 번뜩인다 여겼건만 이미 율극의 상체가 길게 찢어졌다.
"아악...... 아프다."
피가 흘러내린다. 율극은 그것을 보다 본능적으로 손을 갖다 대었다. 그의 손에서는 하얀서 리가 맺혀 가고, 그가 손을 떼자 상처는 아물어 있었다. 파천으로 하여금 감탄을 쏟아 놓게 만들었던 바로 그 수법이었다. 상처를 내기도 힘이 들었지만 상처를 낸다 하여도 금방 아물 어 버리는......
"오, 저럴 수가?"
"어찌 저런 일이?"
장내의 인물들에게서 부지불식간에 터져 나온 감탄성이었다.
"정말 괴물 같은 놈이구나. 살려두어서는 안 될 놈이다."
검극이 다시금 움직임을 보였다.
피슛
움직인다 느낀 순간 어느새 번뜩 빛을 발한다. 수십 개의 검극이 한꺼번에 물밀 듯 쏘아졌 다가는 뒤로 물러선다.
율극은 상처로 괴로워했다. 그도 아픔을 느끼기는 매 한가지였다. 어찌 손쓸 사이도 없이 상처가 생긴 것이다. 이번에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검극이 또 다시 움직임을 보이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율극은 두 눈을 부릅뜨고 검극을 노려보았다.
피슛
본능적으로 율극은 몸을 비틀었다. 새하얀 검강이 십자형태로 그의 상체를 그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몸을 틀어 회전을 시키며 손을 뒤집었다.
쾅
피슛
대종사는 끈질겼다. 연이어 공격이 터져 나오고 율극의 몸에는 여기저기 큰 상처들이 생겨 났다. 채 아물기도 전에 갈라지는 살들인지라 이미 상체는 피로 흠뻑 젖어들었다. 뒤로 연 신 물러서는 율극은 보기에도 안쓰러워 보였다. 능력을 지니고는 있으되 사용할 줄 모르는 지라,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주었다.
"켈켈 이제는 목을 잘라주지. 네가 목이 잘리고도 살아 있을지 궁금하구나."
광마존은 모든 희망을 버렸다. 율극이 놈보다는 강했다. 그런데도 그 강함을 사용할 줄 모 르니 소용이 없었다. 율극의 단순한 공격은 자신보다 훨씬 하수인경우에만 소용이 있었고 비슷하거나 격차가 심하지 않으면 되려 당하기 십상이었다.
'담대추광! 이 미련한 놈. 이 까짓 암계에 당하다니, 그러고도 네가 천마교 제이인자라 할 수 있단 말이냐?'
그는 안타까웠다. 어찌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이 원망스러웠다. 율극의 죽음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자신을 스스로 저주했다. 여태껏 무림에 나와서 자신으로 하여금 전력을 기울 이게 만든 사람은 없었다. 그가 전력을 기울인다면 파천을 제외하고는 당해낼 사람이 과연 전 무림을 통틀어서 몇이나 있겠는가? 그처럼 강한 무공을 지니고서도 이리 허무하게 암산 에 당한 자신의 경솔함을 탓해 보았으나 소용이 없었다. 심지어 파천마저 그런 곤란을 겪었 다면 과연 그가 믿을 것인가?
그것은 무영존 또한 마찬가지이리라. 이제 곧 천마교가 무림에 등장 할 것이고 11명의 동생 들과 함께 무림을 질타할 수 있을 텐데...... 모든 것은 물 건너 간 것이다.
"켈켈 죽어라"
"으악"
"꺽"
"끄악"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이 동시에 질러대는 비명소리라? 그것은 분명히 율극의 것이 아니었 다. 좌중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돌아갔다. 입구 쪽 이었다. 어느새 그곳을 지키고 있던 혈마천의 수하들이 난자되어 입구 쪽에 어지럽게 널려 있다. 그리고 그곳을 향 해 들어서는 두 사람!
광마존의 얼굴에 감동이 물결치고 눈이 빨갛게 충혈 된다. 제일 먼저 소리친 사람은 의외로 율극이었다.
"대장!"
순간이다. 대종사의 검극이 빛을 뿜었고 한눈 팔고 있는 율극의 목을 쳐간다. 그러나 그 순 간 그 빛보다 배는 더 빠른 움직임이 있었고,
사람들은 이 순간 눈앞에서 무엇인가가 번쩍 한다고 여겼을 뿐이었다. 입구로 들어서는 두 사람중 한 사람이 그곳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어이없게도 율극의 목에 대어져 있는 검 을 맨손으로 잡고 있었다.
"장난질은 여기서 끝이다. 제 죽을 때를 알지 못하는 놈은 살아 있을 가치가 없지."
분명히 사리에 맞지 않는 말이었다. 그 말을 한 사람은 붉은 머리칼에 푸른 얼굴을 하고 하 얀 눈빛을 지닌 진짜(?) 괴물이었다. 율극이 바로 눈앞에 있는 그를 보고 두려워하는 것만 봐도 그것은 여실히 증명되는 사실로 여겨진다.
"지존!"
"대공! 무사하셨군요."
"대공"
장내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릎을 꿇었다. 그들의 목소리는 은은하게 떨려 나왔다. 예전에 는 두려움으로 떨었지만 지금의 떨림은 그런 의미는 결단코 아니었다.
"모두 살아 있었구나. 정말 고맙다 살아 있어 줘서......"
감동의 물결이 존마전을 장악해간다.
"파천 이 녀석 어떻게 할까?"
어느새 검은 안개는 완전히 걷혀 있었고 천마의 손에는 대종사가 멱살이 틀어 잡혀 꿈틀대 었다. 천마가 이미 어떻게 손을 써 놨는지 그는 축 늘어져 있었으나 정신은 말짱해 보였 다. 파천은 존마전의 바닥에 꿇고 있는 자들을 한 사람씩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는 그들 사 이를 거쳐서 넘어져 있는 태사의를 일으켜 그곳에 앉았다.
"그 놈을 이리로 데려와라."
율극은 천마의 옆에 서서는 주눅이 들어 그 얼굴만 쳐다보았다. 율극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 자 머쓱해진 천마 왈,
"뭘 보냐?"
율극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다시 고개를 쳐들고 보니 괴물은 사라지고 없었다.
어느새 대장 앞에 가서 미꾸라지 같은 놈을 내동댕이치고 있다. 율극은 눈앞의 여자를 보았 다. 아무도 자신에게 관심을 갖지 않자, 제갈초홍은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우물쭈물하고 있 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율극과 눈이 마주쳤다. 율극이 자신을 보며 하는 말,
"뭘 보냐?"
제갈초홍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으나 대공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조용히 무릎을 꿇었다.
현명한 그녀는 모든 것이 틀어졌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제 자신의 생명조차 저자의 손에 쥐 어진 셈이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나니 이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지금 죽음 을 맞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