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제(皇帝)의 검(劍) - [78]
태사의에 전신을 묻고서 파천의 시선이 눈 앞의 사람들에게로 향한다. 시간이 조금만 늦었 거나 천마가 없었다면 자신을 비롯해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을 생각 하니 아찔하기까지 했다. 지금껏 스스로 그 얼마나 오만했었던가? 세상에 두려운 것이 없었 고 그 모든 것이 스스로에게 갖추어져 있음이 당연하며 오히려 부족한 감이 있다 여겼다.
어려운 일도 없으며 어떤 일도 할 수 있다는, 그래서 마치 신이라도 된 양 우쭐하여 행동하 지 않았던가?
그런 그가, 이제는 죽었다. 이미 자신은 죽은 것이라 여겼다. 스스로 죽음을 이겼다면 모를 까? 천마에 의해 죽음에서 구해진 주제에 더 이상 내세울 것이 없다 여겼다. 스스로 죽음을 예감하며 느꼈던 절망감, 그리고 비애감, 삶에 대한 아쉬움, 또 다시 반복된 박탈감까지......
'그래 이 모든 순간이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삶인 것을, 나의 삶이 결코 나의 것은 아닌 것 을...... 나를 위해 대신 죽은 그들의 여망과 그들에게 진 빚으로 여분으로 주어진 삶이었음 을, 나는 잊고 있었다. 바로 저 얼굴들! 이제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이다. 쓰러지면 안 된다.
파천! 너는 이제 혼자가 아니다. 죽음도 너를 쓰러뜨리지 못하게 하라. 운명도 너를 비켜가 게 만들란 말이다.
정신 차려야 한다. 또 다시 패배할 수는 없지 않겠느냐? 내가 지닌 것으로 세상을 이기리 라. 운명이란 놈을 꺾어버리고 새로운 세상을 펼쳐 보이리라. 더 이상 저들이 괴로워하거나 노여워 할 일이 없는, 불안에 떨지 않아도 좋은 그런 세상을 만들리라. 나는...... 어떻게 되 어도 좋다. 그리 할 수만 있다면 악마가 되어도 좋으리라. 영원히 지옥 불 속에서 고통을 당해도...... 나는 만족할 수 있다.'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다시는 이런 실수는 하 지 않으리라. 그의 시선이 무릎 꿇려 있는 두 사람에게 머물렀다. 제갈초홍은 고개를 떨구 고 있었지만 대종사의 눈빛은 여전히 오만했고 살기를 담고 있었다. 결코 쉽게 꺾여질 위인 은 아니었다. 그를 보고 있자니 왠지 모를 측은함이 밀려왔다. 파천은 그를 처음 본다.
마도대종사 혁우종! 마도의 하늘이라 불리는 자! 무림오천의 일인이자 정도의 득세 가운데 서도 지금껏 마도련을 지탱시켜 왔던 자! 전설이 눈앞에 있었다. 그런데 왜 이리 초라하게 느껴지는가? 적어도 그가 예상한 대종사 혁우종은 이보다는 거대한 인간이어야 했다. 사람 이라면 아무리 보잘것없어 보이는 자라도 향기라는 것이 있고 그 사람 특유의 기운이라는 것이 있다. 그 사람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한 분야에서 일가를 이룬 사람이라면 적어도 범인과는 다른 그 무엇인가가 있기 마련인데 지금 눈앞의 혁우종에 게서는 그런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파천이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는 다시 군사 제갈초홍에게로 시선이 옮겨간다.
"군사!"
여전히 그의 입에서는 군사라는 호칭이 흘러 나왔다. 힘겹게 들려지는 얼굴에는 자책감과 수치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그녀의 얼굴을 더욱 강하게 지배하는 부피는 모든 것을 털어 낸 자의 담담함이었다. 아무런 욕심도 없기에 기대치도 없고, 그러니 절망하지도 않는, 모든 것을 감수 할 준비가 되어 있기에 두려움도 없는, 그런 모습이었다.
"할말은 없는가?"
제갈초홍의 눈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그녀의 입 또한 몇 번인가 달싹이려다 멈추어버 린다.
"마지막으로 할말이 있으면 해도 좋다."
'마지막'이라는 말이 왜 이리 가슴을 뛰게 한단 말인가? 이미 그는 두 사람을 죽이기로 작정 한 듯 했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었으므로 특별히 억울하지는 않았지만 역시 아직 젊은 나이 의 그녀였기에 아쉬움이 남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대공을 처음 봤을 때, 제 느낌은 솔직히...... 뭔가 일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예감이었죠.
내가 본 당신은 결코 2인자로 머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깐요. 마치 잠룡을 대하듯 이...... 저는 그때 이미 오늘을 예감했는지도 모르죠. 지금...... 아쉬움은 남을지언정 후회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런가? 혈마천에서의 너의 지위는 어떻게 되지?"
또 다시 듣는 말이었다. 그가 혈마천을 언급하자 그녀는 애써 놀람을 감추고 태연을 가장했 다. 광마존이 혈마천을 입에 올렸을 때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찌 저자가 혈마천의 존재를 알고 있단 말인가? 정작 지금 그것을 다시 한번 확인한 것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그 녀는 내심으로 거듭 놀라고 있었다.
"역시 대공은 많은 것을 알고 계셨군요. 우리는...... 아니 나는 대공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 고 있지 못했고 지금까지도 저는 대공을 모르겠어요.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 되었는지......우 리가 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겠죠? 저는...... 대총사의 제자입니다."
그녀의 말은 파천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제갈초홍의 말이 주는 여운은 대총사가 옆에 있는 혁우종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 그럼 이자가 대총사가 아니란 말인가? 대총사는 대체 누구지? 나는 마도대종사가 대 총사라 여겼건만......"
"이분은......"
"초홍! 그만 두지 못하느냐? 적에게 우리의 모든 것을 낱낱이 밝힐 셈이냐?"
혁우종의 질책이었다. 그녀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드러낸다.
"더 이상 무슨 미련을 가지는 거죠? 모든 것을 포기하세요 사형!"
"너, 너!"
파천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빛내며 태사의에서 몸을 일으키고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혁우종에 게 다가선다. 그러더니 오른 손을 뻗쳐 혁우종의 머리털을 움켜잡았다. 혁우종의 앙 다문 입술 사이로 상처 입은 야수의 울부짖음이 새어나온다.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가는가 했더니 순간적으로 그의 목 부분을 움켜쥔다. 그리고는 그 의 얼굴에서 무엇인가를 홱 벗겨 내었다. 인피면구였다. 너무나 정교한 것이었기에 지금껏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것이다.
지켜보고 있던 자들의 입에서 탄성이 토해졌다.
"너는 누구지?"
역시 예상대로 혁우종은 말이 없었다. 인피면구 사이로 드러난 얼굴은 의외로 젊은 삼십대 중반의 사내였다. 선이 굵고 야무지게 생겼으나 입술이 얄팍한 것이 편협한 성격임을 말해 준다.
파천은 그의 머리털을 움켜잡았던 손을 풀며 몸을 돌려 태사의에 다시 가 앉았다. 그리고는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다. 한참이 지난 뒤에,
"제갈초홍, 나의 의문을 풀어줄 생각은 없나?"
그녀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그녀가 기억하기로 대공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 적이 거의 없었 기 때문이기도 했고 그가 요구한 것이 너무도 달콤한 유혹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의 물 음에 충실하게 답한다면 어쩌면 살아 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녀는 그것을 알고 있었다.
파천의 눈은 또한 그것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런 이유보다도 더욱 그녀를 끌어당기는 것 은 상대에 대해 확인 할 수 없는 미묘한 감정이었다.
"맹목적인 충정만이 최고의 가치는 아니다. 때로는 길이 아니라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버릴 줄도 알아야 한다. 너는 현명한 여인이다. 그 누구보다...... 나의 의문에 답해 줄 생각은 없 나? 강요하지는 않겠다. 스스로 선택해라."
"이 빌어먹을 놈! 우리를 어서 죽여라. 패한 무사에게 수치는 주지말고"
"내가 언제 너에게 수치를 주었지? 너희들은 너무나 비겁한 부류들이다. 결코 무사라고 할 수 없는 무리이지. 그렇지 않은가? 무상지독이란 산공독을 사용한것도 그렇고, 나를 암격한 무리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도망간 이총사가 실패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아직 소식을 전 하지 않은 것만 봐도, 너희들에게는 신의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바람에 일이 수월해 지기는 했지만 말이다."
파천이 지금까지의 정황으로 판단한 추측이었다. 그리고 이것은 거의 틀림이 없을 듯 보였 다. 그의 말을 듣고서야 그제야 지금의 상황이 어찌된 연유인지를 깨달은 제갈초홍은 어이 없다는 표정이었다. 대공이 이 자리에 나타난 것은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고 설사 일이 틀어졌다 하더라도 최소한 그것을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어야 옳 았다. 그랬다면 최소한 이런 상황만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역시 그랬군요...... 좋아요. 대답하겠어요."
"초홍 너, 설마......"
"그래요.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이는군요. 서로를 믿지 못하고 서로에게 신뢰를 주지 못한 다면 그 조직은 무너질 수밖에 없어요. 적어도 그 자가 우리의 사숙이라면 더욱 이럴 수는 없어요."
파천은 그녀의 말로 간접적으로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제갈초홍의 말대로라면 저 녀석은 제갈초홍의 사형이 분명하리라.
제갈초홍은 분명한 어조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대총사의 삼 제자입니다. 그리고 제 옆에 계신 분은 대 제자죠. 무창 남도맹의 비무에 서 죽은 사람은...... 제 바로 위의 사형이고요. 마도련의 대종사는 이미 오래전에 저희들의 사부님이자 혈마천 대총사에게 죽음을 당했습니다. 사부님은 혈마천주의 사제죠. 그 동안 사부님이나 사형이 대종사의 역할을 대신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사부께서 마도련을 비우는 시간이 많아 지셨기에 대사형이 그 역할을 담당해 오고 있었죠."
한번 토해지기 시작하자 일사천리로 쏟아진다. 그 모습을 제갈초홍의 사형이란 녀석이 넋을 놓고 쳐다본다. 그녀는 혈마천의 일급 정보에 거의 근접해 있다. 그러니 그녀가 입을 열기 로 마음먹는다면 혈마천이 받는 타격이란 일만의 수하들을 잃는 것 만큼이나 극심할 터였 다.
"네, 네가 배신을?"
제갈초홍이 그런 그를 쳐다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배신이라고 하셨나요? 이미 저는 많은 것을 알고 있어요. 지난날 우리 집안의 혈사가 북검 회주에 의해 저질러 진 것이 아니라, 바로, 이총사 그 사람에 의해서 저질러 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교묘하게도 당신들은 내게 모든 것을 속였고 저를 이용해 왔어요. 내가 영원 히 이 사실을 모를 거라 믿었겠지요? 언제든 내게 힘이 생기는 날을 기다려 왔어요. 전 그 렇게 어리석지 않기 때문에 헛되이 목숨을 상납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어찌, 어찌 네가 그 사실을 안단 말이냐? 대체 누구냐? 네게 그것을 알려준 사람이?"
파천은 둘의 말에 두 귀만 활짝 열어 놓으면 되었다. 그가 물어보지 않아도 많은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오니 말이다. 예전에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무상신검에 대한 지나친 적의를 느 낀 적은 있었지만 이런 사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대대로 정도세가인 제갈가의 후예 가 마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이었구나 생각하니 왠지 그 또한 씁쓸한 일이었다.
제갈초홍은 자신의 사형을 외면하며 파천을 쳐다본다.
"혈마천의 세력은 북검회와 남도맹, 그리고 마도련에 각기 침투해있었지만 그것은 수뇌부에 지나지 않고 그 또한 얼마 전에 지위를 박탈당하고 도주했지요."
"그런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음에도 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리고?"
"구대문파를 비롯한 정도대파들뿐만 아니라 중원의 거의 모든 대문파들에는 간세가 숨어 암 약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들의 신원은 알고 있느냐?"
그녀는 망설임 없이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제갈초홍의 사형이란 자는 그런 그녀를 보며 얼 이 빠져 그저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네."
"그래? 그것 잘 되었구나. 흐음...... 혈마천이 그 정도로 중원에 깊숙이 들어 와 있다는 말이 지? 좋다. 광마!"
"네"
"이 놈을 뇌옥에 가둬라."
"존명!"
광마존의 지시에 따라 천인대장 이시명과 부하들이 얼마 전까지 마도대종사 행세를 하던 자 를 질질 끌고 밖으로 사라져 갔다.
어느새 존마전은 말끔히 치워져 있었고 전 마도련의 간부들은 아래쪽에 포단을 깔고 앉았 다. 중앙의 태사의에는 파천이, 그 옆에는 또 하나의 태사의가 놓여 있었으며 그곳에 천마 가 자리했다.
"그들이 사용한 무상지독의 효능은 하루동안이다. 그 동안에는 내공을 사용하지 못하므로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앞으로 마도련은 당분간 이곳 지하의 총단과 무창, 악양의 세 곳으로 분산 배치하라. 그리고 지도부는 여전히 이곳 지하에 머물도록...... 특별한 명이 있기 전까지는 당분간 대외적인 활동을 자제하며 세력정비에만 신경을 쓰도록 한다."
"존명"
"이 일의 책임자는 광마로 할 것이며 무영과 한당, 그리고 황보염이 이를 보좌한다."
"존명"
우렁찬 대답이었다.
"공석인 마안대장에는 대종사의 삼 제자인 도무방이 맡도록 해라."
"존명"
도무방이 앉은 자리에서 머리를 숙였다. 파천은 갑자기 피로감이 몰려왔다. 그동안의 긴장 이 일시에 풀어지는 현상이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전면을 바라보며 조용한 일성을 흘렸다.
"오늘은 이것으로 하고 모두 처소로 돌아가서 쉬도록 해라."
"존명!"
"대공!"
군사 제갈초홍이었다. 그녀의 부름에 파천이 의아하여 쳐다보고,
"왜 그러지?"
"마도련에 숨어 있는 간세들부터 처단하심이...... 지금 여기 있는 분들이 처소로 돌아갈 경 우 어쩌면 적의 암격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곳에 죽은 놈들말고도 혈마천의 인물들이 있단 말인가?"
"네! 그다지 많은 숫자는 아니나, 그 중에는 초특급 살수도 끼여 있습니다. 지난날 장웅을 살해한 자들 중에 하나입니다. 그자는 혈마천에서 키운 살수 중 다섯 손가락에 꼽히는 인물 입니다."
"그런가? 그럼 그 일은 군사와 여기......"
천마를 쳐다보다 뭐라고 소개해야 할지를 몰라 머뭇거린다.
"난 마천이라 한다. 파천과는 친구사이이다."
천마가 먼저 선수를 치고 나왔다. 마천과 파천이라...... 독고무가 죽었으니 더 이상 그 앞에 서 머리를 숙이기가 귀찮았던 것이다. 마천이라는 이름은 천마를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좌중의 인물들은 그때까지만 해도 대공의 옆에 있는 인물에게 계속 신경이 쓰이던 차였다. 머리털 나고 저렇게 공포스러운 외모의 소유자를 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 기도 했고 대종사를 다루는 그의 가공한 무공 또한 호기심을 자아내게 한 것이다. 대공의 옆에 태사의를 마련하여 함께 앉아 있는 것으로 봐서는 결코 그의 수하가 아님은 알았으나 친구라는 말에 왠지 어울리지 않음을 느껴야 했다. 절세 미남자와 거의 괴물에 가까운 야수 가 친구라니 어딘가 어색했던 것이다.
"끙...... 그래 여기 마천과 군사가 모든 일을 책임지고 처리하도록 해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처소에 돌아가서 휴식을 취해도 좋다."
"존명."
천인대와 마안대는 군사와 마천이라 불리는 자와 함께 마도련내에 있는 적의 간세를 소탕해 나갔다. 워낙에 소리없는 움직임이었기에 대부분의 마도련 고수들은 이를 눈치채지 못했다.
심지어 존마전에서 일어 난 일조차 그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으니 더 이상 말해 무엇하겠는 가?
주점은 오늘도 만원이었다. 오늘따라 장노인의 몸놀림이 뭔가 이상함을 느낀 사람은 많지 않았다. 술을 주문하거나 안주를 시켜도 듣지도 못하고 멍하게 있을 때가 많았다. 포경호는 그런 장노인을 보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도련에 들어온 이후 자신은 이곳 주점에서만 일했다. 한때는 청운의 꿈을 안고 가입한 곳이었으나 그를 소개했던 고향 선배 가 비밀지단에서 활동하다 불의의 사고로 죽고 난 뒤에는 그 꿈마저 접었다. 그저 하루하루 를 주점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며 보내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한가지 불만이라면 이곳은 외부와 차단된 곳이라 여색을 가까이 하기가 힘이 들었다. 이곳 에 여고수들도 있으나 주점에서 허드렛일이나 하는 그에게까지 차례가 넘어오지는 않았고 각 당주나 향주급 이상의 처소에서 일하는 시비들 정도나 어떻게 수작을 부려보는 것이 고 작이었다. 그것 한가지를 제외하고는 비교적 편안한 생활이었고 스스로도 만족하고 있었다.
또한 가끔씩 도박판이 벌어지면 끼어 들어 한몫 잡거나 옆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 다.
이런 그를 가장 아껴주고 위해주는 이는 뭐니뭐니해도 주점의 책임자인 장노인이었다. 사실 책임자라고 해봐야 달랑 두명이 전부인 주점에서의 직책에 불과하지만 하급무사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었으므로 그는 때로는 아버지처럼 때로는 형님처럼 모든 사람들을 차별 없이 대 했다. 포경호는 그런 그를 보고 있으면 괜히 존경심이 치밀고는 했다.
"그래서 말입니다. 외당의 심향주 처소에 아앵이가 말이죠. 양다리를 걸치다 호되게 당했다 는 것 아닙니까? 킥킥 그년이 얼굴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서는...... 참으로 웃기는 계집이죠.
얼굴 반반한 것 하나 밑고 아랫도리를 휘돌리더니...... 언젠가는 꼬리가 밟힐 줄 알았죠."
포경호는 빠른 손놀림으로 설것이를 했다. 주점에 사람들이 가득 할 때는 그가 하는 일은 오로지 설것이 하나였다. 그릇수가 그다지 풍족하지 못하기에 빠르게 그릇을 준비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술을 주문하고, 갖다 먹고, 갖다 놓는 것까지 스스로 알아서 하기 때문에 그 다지 많은 손길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장노인은 새우와 돼지고기를 함께 볶으며 포경호의 말을 듣는 것 같았다. 지금쯤이면 한마디쯤 참견이 있거나 아니면 맞장구를 쳐주기 마련인 데 역시나 장노인에게서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오늘은 참 이상하단 말이야. 대체 무슨 일이지? 계집들처럼 생리를 하는 것도 아닐거고......
에라이 모르겠다. 신경 끊자. 이 복잡한 세상에 남의 일까지 신경 쓰면서 살 수는 없는 법 이지. 아암...... 빌어먹을 계속 신경이 쓰이네. 주점에 달랑 둘이서 일하는데 계속 저러면 참 으로 심각하겠어.'
포경호는 씻어낸 그릇의 물기를 닦아내며 선반 위에다 올려놓았다. 그는 힐끔거리며 장노인 을 쳐다보았으나 역시나 그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밖이 갑자기 소 란스러워졌다. 대체 무슨 일이지? 또 누가 싸움이라도 하나? 포경호는 하던 일을 멈추고 밖 을 내다보았다.
"아니, 저 분들은?"
포경호의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분명히 제일 앞장서서 안으로 들어 오고 있는 여자는 몇 번 보지는 못했지만 마도련의 군사가 분명했다. 저런 최고위급 고수가 곳 주점을 찾는 경우란 거의 없는데...... 하긴 전번 에는 대공까지 오셨다 갔으니...... 포경호는 아직도 그 날 을 잊지 못한다. 소문으로만 듣던 마도대공을 코앞에서 보았으며 그의 안주를 직접 챙겨주 기까지 했으니 그로서는 잊을 수가 없는 날이었다.
제갈초홍 일행이 주점 안으로 들어서자 주점 안에 있던 인물들이 일제히 일어서더니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한다.
"군사를 뵙습니다."
군사 뒤로 보이는 자들은 천인대원들과 마안대원들이 분명해 보였다. 그들의 기세는 대단했 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그리고 이곳에는 무슨 일이지? 괜히 상관도 없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안해하는 모습들이었다. 그들 모두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군사 바로 뒤에 서 있는 괴인에게 집중되더니 떨어질 줄을 모른다. 순간이라도 시선을 떼면 죽을 것만 같은 묘한 두려움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아무리 하급무사들이라고는 하나 평생을 피 밭에서만 굴러 온 자들이었고 본능적으로 고수 를 알아보는 눈들은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도 판단이 불가능한 고수로 보였고, 그들이 알기 에 마도련 내에 저런 고수가 있다는 말은 들어보지 못했던 것이다. 그들은 새로 영입한 고 수일거라고 쉽게 생각했다. 바로 그때였다. 그들을 더욱 경악하게 하는 말이 군사에게서 터 져 나왔으니,
"들어가시죠. 이 안에 있습니다."
"그래?"
군사가 오히려 깍듯하게 예를 표하자 장내 인물들의 허리도 자연히 한번 더 굽어지고야 만 다.
"모두 내 보내라."
"존명! 주점에 있는 자들은 모두 처소로 돌아가라. 다시 한번 말......"
더 이상 말을 이을 필요가 없었다. 우당탕탕 하는 소음과 함께 한꺼번에 몰려 나가기 시작 했고 그들의 지금의 몸놀림만으로는 일류 고수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았다. 천마는 주점의 한자리에 가서 앉았다. 군사가 주방 쪽을 쳐다본다.
포경호는 밖으로 뛰어나가야 할지 가만히 있어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하고 허둥댔다. 돌아가 는 분위기가 왠지 이 자리에 자신이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잔뜩 무게만 잡고 홀로 심각해져 있던 장노인이 자신을 쳐다보더니 심각한 얼굴로 말 했다.
"너는 여기 가만히 있어라. 그리고...... 그 동안 고마웠다."
그 말을 하고서는 몸을 홱 돌려 천장의 한곳을 뜯어낸다. 그러자 그곳에서 장검이 한 자루 튀어나오지 않는가? 그는 검자루를 꽉 쥐고는 밖으로 나갔다. 그 모습을 본 포경호는 아무 소리도 못하고 어리둥절해서 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모든 것이 갑자기 혼란스러워 졌 기 때문이다.
"군사가 이곳엔 무슨 일이오?"
그의 말은 결코 존대가 아니었다.
"모든 것은 끝났어요. 당신의 역할도......"
동시에 끝난것이죠. 라는 말은 입안에서만 맴돌았다. 혈마천의 인물들 치고 그를 두려워하 지 않는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다. 그보다 강하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나 그의 검을 두려워한다. 그녀 또한 그가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섯명의 혈살수! 그들은 혈 마천에서 오마혈수(五魔血手)라고 불린다. 오로지 천주나 총사들의 명에 따라 살수를 펼치 는 자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눈앞의 노인이었다. 그는 침착한 얼굴로 군사와 천마를 쳐다 보았다.
"보아하니...... 의외의 변수가 있었던 모양이군. 게다가 그대가 배신을 한 것 같고......"
그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루종일 그를 불안하게 했던 것이 실체를 드러낸 꼴이었 다. 그는 천마를 바라보고는 두 눈을 감는다. 죽음을 예감하는 것인가?
'도저히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자가 아니다. 결국 내 지겨운 삶도 이곳에서 마감을 하는가 보군.'
그의 눈이 다시 뜨여 졌을 때 그 안에는 비장함만이 가득 물결친다. 천마가 조용히 몸을 일 으켰다.
"말은 필요 없겠군. 고통 없이 죽여주마."
"한가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뭐냐?"
"대체 당신은 누굽니까? 하늘 아래 당신 같은 사람이 있는 줄 알았다면 난...... 살검을 잡지 는 않았을 것이오."
"후후 대답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지옥에 가서 의문을 해결하도록......"
장노인의 검이 주인의 마음을 헤아리기라도 하는 듯이 검집을 어렵게 빠져나온다. 그다지 특별할 것도 없는 평범한 청강장검이었다.
장노인은 뒷걸음치며 스스로 간격을 벌렸다. 어떤 식으로든 일초의 승부면 족할 것이다. 삶 에 미련 따위는 없었다. 살수로서의 삶은 스스로가 원해서 걸은 것이 아니었다. 그가 철들 기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이미 살수였다. 그렇게 운명지어졌기에 그것을 거부할지, 아니면 묵묵히 받아들일지 만을 선택하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받아 들였다.
'대형! 당신이 보고 싶군요. 당신의 용기를 당시에는 어리석다 여겼건만, 죽음을 앞둔 지 금...... 당신의 그 용기가 위대하다 여겨지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후후 당신의 싱그러운 미 소를 다시 한 번 볼 수 있다면......'
"하앗"
장노인의 청강장검은 변식을 무시하고 곧장 직격하여 찔러 온다. 언뜻 그가 노리는 부위가 상체의 중완혈을 노리는 듯 했으나 위로 거궐에서 옥당, 자궁혈까지 아래로 음교, 기해혈을 한꺼번에 노리는 듯 심한 상하의 떨림을 보인다. 촌음에 쾌참하는 빠르기였으므로 웬만한 고수라면 당황하여 손도 쓰지 못할 정도로 위력적인 검법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검 끝에서 는 예리한 검강이 뻗치고 있었음에야...... 천마는 그런 그의 검격 안으로 오히려 뛰어들더니 손을 뻗친다.
순간 장노인의 얼굴에 어이없어 하는 빛이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진다. 도무지 상식에 어긋 나는 행동이었기에 제갈초홍등도 적이 당황하는 듯 했다. 이변이 없는 한 장노인의 검은 마 천의 손을 찢어 놓으며 상체에 깊숙이 박혀 들리라. 천마의 손이 기묘한 호선을 그리며 마 치 허공에 그림이라도 그리려는 듯 언뜻 화려하게 움직이고 장심을 장노인의 검극을 따라 내리누르며 검신을 타고 올라간다. 순간 천마의 손에서 서로의 움직임을 분간 할 수 없는 강렬한 빛이 폭사되니 주위에 있던 자들의 눈이 절로 감겼다.
"꺼억"
"잘가라. 죽음은 너를 편안하게 할 것이다."
천인대원들과 마안대원들의 입에서 감탄성이 토해졌다.
"오, 저럴수가?"
"대체 어떻게 저런......"
천마의 손은 장노인의 심장에 깊숙이 박혀 있었다. 장노인의 떨리는 눈이 천마의 눈을 마주 보다가, 그의 어깨로 떨어지고, 다시 팔로, 마지막으로 자신의 몸 안에 감춰진 손을 찾아간 다. 서서히 감겨지는 두 눈을 억지로 치켜 뜨고 그는 간신히 이 말을 뱉어내었다.
"내 죽음이...... 이리도...... 화려할 줄이야. 고맙소. 진심으......로"
천마의 손이 빠져나오자 의지할 곳이 없어진 장노인의 몸이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죽은 것 이다.
"가자."
천마가 할 일을 다 하였다는 듯이 휘적휘적 밖으로 사라져간다. 군사는 다시 한번 장노인을 쳐다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천인대원들이 그의 시체를 수습하는 모습이 보였다.
포경호는 한 방울의 눈물만을 흘렸다. 그를 위해서는 그것으로 족하다 여겼다. 자신마저 감 쪽같이 속인 그의 처사에, 앞으로 그 누구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의 삶은 지금까지와는 달 리 고단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