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제(皇帝)의 검(劍) - [79]
【 또 다른 깨달음 】
서로를 찾는 눈길들 사이로 따스한 정이 오간다. 어찌 보면 뭐 그리 대수로울 것 있냐고 생 각할 수도 있지만, 죽음의 위기는 서로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우기에 부족하지 않았고 내부 에서 잠잠히 숨죽이고만 있던, 그래서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던 바를 명확한 의식의 표면까 지 밀어 올리는 역할을 했다. 서로가 보잘것없는 우연으로 죽어야 할 존재들이라고는 생각 지 않기에, 충정과 애정이 뒤숭숭하게 섞이어 확산될 힘을 갖지 못한 감정의 상태를 현실의 것으로 만들어 준 것이다.
하늘을 꿋꿋이 떠받치고 살아 있다는 자체가 때로는 무한한 감동을 줄 때가 있다. 파천도 죽음을 직감하는 순간 이들을 떠 올렸고 광마존과 무영존도 다르지 않았다. 뻣뻣한 사내들 인지라 잘 내색하지 못할 뿐 그들의 눈빛은 분명히 예전과 다른 제 색깔로 채색되고 있었 다.
천마는 괴이한 그 눈을 들어 그런 그들을 쳐다보더니 입을 씰룩거리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파천이 뱉어내는 말에 밀려 뒤로 미루어지고 만다.
"고생했다. 그리고...... 부탁하건대 모두들 죽지 마라!"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리요? 그것이면 족한 것을. 광마존은 아무리 기억 쪽으로 몸을 구 부려 보아도 이런 가슴 뭉클한 얘기를 들은 경험을 찾아 낼 수 없었다. 예전의 천마교 시절 의 좋지 못했던 기억을 생각 앞에 가져와 봤다. 오로지 무공일도에만 정진하다 오히려 욕심 이 화가 되어 심마에 들게 되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삶의 질곡을 그에게 경험하게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들은 나에게로 향한 분노와 살기를 마음껏 뿜어내고 있었다. 한 때는 친인들 이었기에 어찌 된 연유인지를 알았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들의 이유 있는 적의를 온몸으로 감당해야했고 가슴 깊이 서글픔을 접으며 뇌옥에 가두어졌다. 나는 그 순간 모든 상황을 거부라도 하려는 듯, 천마비고에 스스로를 가두었다. 적어도 그 순간,
저들의 차가운 시선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로 여겨졌기에 비고로 도망치듯 들어갔지 만 그 뒤로도 그때의 기억은 오랜 시간동안 상처로 들러붙어 있었다.
이런 자신의 삶 가운데 파천을 만났다는 것은 인생의 새로운 전기를 부여해 주었다. 천마교 에서도 이미 그런 상황을 경험한 바 있었고 앞으로도 그러리라 짐작 해 본다. 설사 한줌의 흙으로 피와 함께 뒤섞인다 하여도 그것을 거부하지는 않으리라. 지금의 이 감동만으로도 충분했다. 지존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분이시다. 그런 그가 저 한마디를 해내기 위해 얼마만한 심적 격동을 겪었으며 죽음의 결정을 거부하는 처절한 몸부림이 있었는지가 짐작 되어 온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파천이 그간의 얘기를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몇 번인가 가슴 밑바닥에서 울 컥 울컥 치솟아 오르는 격정과 적에 대한 분노를 애써 눌러 두어야 했고, 이것은 아마도 그 들을 만났을 때 무서운 힘으로 돌출 될 것이다. 옆에 있는 마천이란 분이 천마이리라 짐작 은 했지만 그의 입으로 재차 확인되자, 그리고 더 이상 독고무와 공유되지 않는 몸이란 사 실에 그들은 다시 한번 예를 표해야만 했다. 완전한 천마의 부활을 바라보는 그들의 심정은 또 다른 신선한 충격으로 떨려왔다.
"무영은 마황검위대가 중원에 들어오면 그들과 합류한다. 단장화와 함께 비교적 중원의 상 황에 밝으니 진두지휘함에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존명"
"광마는 아까도 얘기했다시피 마도련을 책임진다. 청면마왕이 영입한 마도인들과 함께 유기 적으로 연계하도록."
"존명."
"율극아"
"응 대장"
"으음?"
파천의 반응이 있기 전에 이미 천마의 꽉 쥐어진 주먹이 율극의 머리를 사정없이 내리친다.
꽝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머리에 구멍이 날 정도로 강한 타격이었으나 율극은 살짝 얼굴을 찡 그렸을 뿐이었다.
"야 이녀석아. 파천이 동네 골목대장이냐? 지존이라고 불러라."
"씨이 형아는 뭔데 나를 때려?"
지금 율극의 표정은 참으로 기이한 것이었다. 천마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하는 기색과 한 대 맞은 것에 대한 분노가 함께 떠올라 교묘히 섞이어 있었다.
"형아라고? 햐. 이놈봐라. 말도 제대로 못하는 늑대새끼 같았던 놈이 이제는 아예 같은 서열 로 놀려고 그러네. 형아 라고 그랬냐?"
"그래 뭐......"
"형아라? 으음...... 요걸 어떻게 요리하지?"
그런 둘을 쳐다보며 파천이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둘이 형제간으로 지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겠다. 아주 잘 어울리겠는데?"
"뭐야?"
정색을 하는 천마와 그런 그를 보며 감히 드러내놓고 웃지 못하는 광마와 무영은 고개를 숙 이고 있었지만 천마는 알고 있었다. 저들의 입이 씰룩거리고 상체가 들썩거리는 것이 웃음 을 억지로 참기 위함임을...... 천마가 다시 한번 율극을 노려본다. 멀뚱거리며 쳐다보는 그 에게서 뭘 바란 다는 자체가 무리임을 천마는 뒤늦게 깨닫고는,
"그래. 네 멋대로 살아라. 너한테 뭘 바라겠냐? 대신 나를 지금부터 마천님이라고 불러라.
알았지?"
"싫어. 형아라고 부를래."
천마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저으며,
"그래, 알았다. 네 마음대로 해라. 국자로 똥을 푸든 개밥그릇을 제상에 올리든 말이다."
율극의 고집을 꺾기란 어려워 보였다. 파천은 율극의 천진한 행동과 천마의 가식없는 행동 이 왠지 닮아 있다고 여겼으나 그것을 입 밖으로 꺼내놓지는 않는다. 분명 천마는 기분 나 빠 할 것이 분명했으므로.
"여기 일이 마무리되었으니 난 천마와 율극을 데리고 개봉으로 떠나겠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라도 개방을 통하여 연락을 취해라."
"존명!"
"네, 알겠습니다."
"천마!"
"왜?"
"너, 그 모습 좀 바꿀 수 없겠냐?"
"왜?"
몰라서 물어? 라고 쏘아 붙여주고 싶었지만 간신히 참았다. 괜히 천마의 기를 죽일(?) 필요 는 없었다.
"눈에 좀 거슬려서 그래. 그 모습으로 무림맹에 들어 갈 수는 없잖아?"
"얼굴은 바꿀 수 있지만...... 머리칼은 나도 어쩔 수 없다."
천마는 내 모습이 어때서? 라고 생각하는 듯 했다. 예전의 나약한 인상의 독고무보다는 지 금이 훨 낫다 여기는 그였다.
"앞으로 천마 네가 할 일이 많을 것 같다. 아무래도 네가 나서주면 여러 가지로 마음이 놓 이지."
"내가 너를 도와 주는 거야 당연한 일이지. 언제든 말만해라. 황제의 목이라도 따 오라 면...."
말을 하다가는 순간 실수임을 절감한 천마가 끝말을 흐렸다. 슬쩍 쳐다본 파천의 얼굴은 그 다지 변화가 없었다.
"무영!"
"네. 지존"
"너는 가서 제갈초홍을 불러 오라."
"존명!"
무영이 밖으로 사라져가고 장내에서는 또 다시 천마와 율극의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진다.
점차로 천마에 대한 율극의 경계심이 허물어지자 그의 입에서는 천마를 당황하게 만들만한 지껄임이 연신 쏟아졌기 때문이다.
★ ★ ★
"부르셨습니까?"
"거기 앉아라."
"네"
"한가지 물어 볼 것이 있다."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제갈초홍은 두 눈을 고정하고 파천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대총사는 지금 어디 있지? 왜 그가 이번 일에 개입하지 않은 것인가?"
제갈초홍은 반짝이는 눈을 더욱 빛내며 파천을 뚫어지게 쳐다본다. 그리고 작고 예쁜 입술 을 벌려 오물거리며 말을 만들어 나갔다.
"사부님은...... 달단으로 가셨습니다."
"달단이라고?"
"네!"
"왜지?"
"달단에는 전설적인 무문인 천황부가 있지요.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혈마천의 대표자격으로 그들과 협상을 하러 가셨을 겁니다."
천황부와의 협상이라고?
"혈마천이 천황부와 동맹이라도 맺을 참인가?"
"제 생각이기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높습니다. 혈마천은 오래 전부터 천황부와 사사혈 교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고 오로지 상대는 그들 뿐이라 여겨왔습니다. 지금 중원 의 상황이 겉으로 드러난 것으로는 사황성을 비롯한 세외삼세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으나 사 실상 그들보다도 혈마천, 천황부, 사사혈교의 힘이 훨씬 강대하니깐요. 이미 오래 전부터 혈 마천은 중원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천황부 또한 모종의 움직임을 보인 것으로 알고 있습 니다. 오로지 사사혈교만이 아직 이렇다할 움직임이 없습니다."
그녀는 끝까지 혈마천이라고 불렀다. 이제 그녀의 마음속에서 완전히 정리 된 것인지 아니 면 의도적으로 나타내려 하는 것인지는 모르나, 어쨌든 지금 그녀의 모습만은 파천등에게 내가 당신들의 편입니다, 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는 행동이었다.
"군사."
"네"
"무상지독이란 것, 지금도 가지고 있나?"
"네...... 아직 소량이 남아 있기는 합니다만......"
"그것을 나에게 다오. 아무래도 성분을 검사하여 이에 대한 해약이라도 만들어 놓아야 할 것 같다."
"이것은 혈마천의 천년연구의 결실입니다. 그리 쉽게 해약을 만들지는 못할 것입니다."
"후후 그럴지도 모르지만...... 나에게는 이 땅 최고의 신의가 있다. 그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이다...... 그런데 어찌 너희들은 중독이 되지 않았지? 미리 해약을 복용한 것이 아니었나?"
"아닙니다. 이것은 해약이 없습니다."
그녀는 품속을 뒤져 작은 옥병 하나를 꺼낸다. 한 손에 들어 갈 정도의 크기였는데 위 부분 의 마개를 여니 미세한 구멍들이 여러 개 뚫려 있었다.
"이것을 사용하는 방법은 일반적인 용독(用毒)과는 틀려서 공기 중에 흘려 보내는 것은 동 일하지만...... 내공을 사용하여 옥병에 진기를 주입하면 무취(無臭) 무색(無色) 무형(無形)의 상태로 독기가 스며 나오고 일정한 특정인이나 특정지역만을 중독 시킬 수가 있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수법이었다. 무형지독의 용독이라 해도 대부분 미세한 분말 형태나, 아니면 진기로 공기 중에 흩어서 일정한 지역전체를 중독 시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것은 100명이 한데 섞여 있어도 특정한 인물만 중독 시킬 수 있다 하니 어찌 놀라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파천은 심각한 표정이었다.
'이것의 해약을 만들지 못하면 엄청난 희생이 따를 것이다. 아무리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다 해도 내공을 상실한다면 소용이 없는 법이니...... 이것이 가장 시급한 일일지도 모르겠 구나.'
파천은 제갈초홍이 내민 옥병을 품속에 갈무리한다. 만약 의노가 무상지독의 해약을 만들지 못한다면 전력을 기울여서라도 혈마천부터 붕괴시켜야 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서 무상지독 을 탈취하지 못한다면 승부는 해보나마나 일 것이다.
★ ★ ★
파천은 처소에 홀로 있었다. 무림에 발을 디딘 이후의 지난날을 되짚어 새겨 보았다. 짧은 기간동안 그는 몰라보게 달라졌으며 여러 가지를 거의 동시라 싶을 정도로 다양하게 겪었 다. 무림에 대해 거의 백지였던 그가 거대한 장막 뒤에서 무림을 움직여 가는 주재자로 변 화했고 천마와 혜능의 이입을 통해 얻어진 무공에 대한 지식이 더할 수 없이 풍성해졌으며 그 깊이도 더해졌다. 처음에는 괴팍하고 잔인하기만 했던 그의 성격이 점차로 필요에 의해 조절하는 모습을 보이는 가 했더니, 천마와 혜능의 분리를 통해 원래의 성품이 조금씩 개입 을 하기 시작했다.
'무림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강함과 교할함인 줄 알았는데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오히 려 작은 술수는 큰 힘을 내지 못하고 간교는 큰 생각을 이기지 못한다. 어쨌든 내게 지금 가장 시급한 것은 스스로를 완성시켜 가는 것이다. 완전해지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내가 지 닌 것을 최대한 완성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스스로 강하지 못하면 아무도 나를 지켜주지 못하고 그 결과는 때로 불시에 좌절을 안기고, 일어서서 굳건하지 못하면 나를 따르는 자들 을 지켜주지 못한다.'
파천에게 이번 일은 너무나 많은 것을 남겨 주었다. 무림에 대해 만만하게 생각하던 오만함 을 일시에 무너뜨려 버렸고 아무리 분명한 일도 재삼 재사 확인하고 또한 적의 간교에 놀아 나지 않을 정도의 조밀한 체제를 구축하고 있어야 함을 일깨운 것이다.
파천의 눈이 공간을 차단하며 서서히 감겨졌다. 몸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생각을 하나로 했 다. 스스로 몸을 살피고 마음을 견정(堅正)케 했다. 그러고 나서야 내공을 살핀다. 여태껏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일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음에야 더 크고 진실 된 것을 보 는 힘이 생기겠는가? 지금까지 그의 무공의 경지를 이끌어 온 것이 견문각지(見聞覺知)의 형태였다면 이제는 견성성각(見性成覺)의 마음으로 본성을 살피는 것에 힘을 써야 함을 느 낀 것이다. 내부를 천착(穿鑿)하지 않고는 제대로 된 무학의 경지를 이룰 수는 없는 것이다.
관절의 형태를 알지 않고서는 몸의 움직임을 이해하기 힘들고 경맥의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 고서는 내공을 논할 수 없다. 무학의 본질을 알아 가는 것도 중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 몸과 정신을 바로 알아 충분한 터전을 마련하는 일은 더욱 중요한 일일 것이다.
상념은 불 일 듯 일어나다가 죽은 듯 고요해지고 다시 만방으로 퍼져 나갈 듯 또 다른 상념 들을 불러일으킨다. 꼬이고 뒤섞이어 혼잡해지고 겹겹이 쌓여 정심을 뭉개어 버린다. 그런 가 하면 더 깊이 그 가운데로 이르지 못하게 포위하고 위협하며 때로는 미혹을 일으키고 흔 들어 놓는다. 점차로 생각은 꼬리를 이어 잡념으로 분산되니 그 안에서 순간을 빌어 제 모 습을 보이는 것은 하나같이 지난날의 아픔, 고뇌, 외로움, 절망과 같은 부정적인 생각들뿐이 었다. 그것에 집착하니 더욱 강한 힘으로 이끌어 들이고 분노와 살심을 일으켜 이제 정념은 게으르게 쳐져 버리고 만다. 이런 식이라면 백날 해 보아도 소용이 없다.
파천은 내심을 추스르며 다시 한번 다잡아 일으킨다. 그리고 조용한 가운데 여든 한자의 천 부경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참으로 신기한 것이 그렇게 날뛰던 잡념들이 어느 순간엔가 제 위치로 소멸되어 가고 점차로 적정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소리조차 이르지 못하고 느낌조차 그와는 상관이 없어지고 오로지 무한의 념(念)의 세계만이 그 큰공간을 잔뜩 벌리고 그를 맞아들인다. 그는 어느새 그 가운데 좌정하고 그제야 내공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단전의 내 공은 회복되어 있었으므로 동시간에 기운은 사지백해에 충만하고 경맥과 혈도를 힘차게 흘 러 다닌다. 특별한 의식의 집중 없이도 그 힘은 제 갈 길을 알아서 휘돌아 가리라.
'단전의 내공이 소멸되고도 경맥에서 발원된 힘이 일어났었다. 그 정체는 뭘까?'
파천은 이것의 원인을 알아내는 일이야말로 그 동안, 그의 경지를 막아서고 있던 핵심적인 문제의 해결책이라 여겼다. 초마의 정경에서 진경으로 들어서지 못하는 이유가 그 상관관계 를 알지 못하는데서 기인하는 듯했다.
'단전의 내공이란 우주의 기를 몸에 받아 들여 유형화 시켜 놓은 것이다. 그것은 우물물을 퍼다가 독에 부어 놓은 것처럼 언제든 사용하기 위함과 같다. 문제는 경맥에서 저절로 일어 나는 힘이다. 무상지독에도 소멸되지 않은 내공. 엄밀히 말해 그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그 렇다면 우주의 기를 일시에 차용한 것인가?'
점점 생각은 그 골을 깊이 하고 끝간데 모르고 깊어지고 넓어지더니 어느 순간 빛처럼 그의 상념을 뒤흔들어 버린다. 마치 막혔던 둑이 일시지간에 터져 나가는 듯한 희열감이 밀려 왔 다.
'그래 바로 그것이다. 학문을 익히는 자가 책을 보고 사물을 연구하며 듣고 알아가는 것은 단전에 쌓아 놓은 내공과 동일한 이치이다. 그 자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 진리까지, 즉 모든 가능성을 포함한 학문의 대상들은 마치 무한한 우주의 기와 일맥상통한 다.
경맥에 흐르는 내공이라 함은 학자가 학문이 깊어지고 지식이 늘어갈수록 그와 연관되어 늘 어나는 학문에 대한 익숙함, 경험, 처세, 이해력 등과 같은 경우이며 내공을 받아들이고 그 양과 질을 조정하는 익숙함. 그것이 바로 경맥에서 스스로 반응하여 힘을 일으키고 우주의 기와 교통하는 근저를 확대시켜 준다. 몸 안에 쌓아놓을 수 있는 내공의 양에는 한계가 있 다. 그러나 경맥을 통해 일으킬 수 있는 힘의 양에는 한계가 없다. 스스로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기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결국은 더 나은 경지로 나가기 위해서는 내공을 쌓아나가는 것뿐만이 아니라 경맥을 흐르는 기의 힘과 경맥 자체를 더욱 정밀하고 강하고 익숙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마치 평생을 학문에 정진한 식자(識者)가 순간의 깨달음을 통한 각자(覺者)의 지혜에서 오는 일언(一言)
을 감당하지 못함과 같다. 이 이치야말로 무한의 경지로 들어서게 하는 첫 씨앗이다.
아이는 아이의 몸을 지니고 그 연륜만큼의 생각과 행동을 한다.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처럼 행동하면 그 자체가 성숙되지 못한 것과 같이 깨달음의 깊이로 들어선 자가 여전히 단전에 주(住)하는 내공에 집착함은 이와 마찬가지일 것. 벗어야 한다. 새로움을 보기 위해서 낡은 몸을 스스로 깨는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면 더 이상의 정진은 없다. 인간의 몸이 소우주이니 이곳에서 생멸(生滅)이 일어나고 천지기운이 서로 화합한다. 마음을 얻어 몸을 세우고 몸을 비워 기에 나가며 그 기로서 만상(萬象)을 보아야 한다.'
파천은 더욱 깊이 잠겨 들어갔다. 그는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나 그의 몸에서는 점차로 칠채 서기(七彩瑞氣)가 일어나 그의 모공을 통해 왕래하고 그의 몸은 저절로 허공 중에 떠다니고 있었다. 얼굴은 더 할 수 없이 고요하고 평안해 보였다.
그가 방안에 틀어박혀 이 깨달음의 순간을 음미하고 있을 때에 몇 명이 그의 처소를 방문했 다가는 그냥 돌아가고는 했으며 언젠가부터 천마가 그 방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지켜 서 있 었다. 파천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더 할 수 없는 흐뭇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역시 너는 대단한 녀석이구나. 평생을 통하여 겨우 들어선 이치를 몇 번의 깨달음으로 이 르다니...... 괜히 심술이 돋는데? 그래. 파천 너야말로 무학의 끝을 볼 수 있는 유일한 인간 인지도...... 너를 세상에 보낸 신의 뜻을 너는 잊지 말아야 한다. 언제일지 모르나...... 네 어 깨에 짊어져야 할 것은 더욱 크고 무거운 것이니...... 지금쯤 혜능은 네가 마지막으로 품어 야 할 씨앗을 만들고 있겠군.'
무슨 의미일까?
천마는 꼬박 3일을 파천의 곁을 지키고 서 있었다. 하나는 그를 보호하기 위함이었고 또 하 나는 도저히 그곳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 감동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