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제(皇帝)의 검(劍) - [80]
[ 비 무(比武) ]
천마는 한쪽에 서서 파천의 몸에서 일어나는 심상치 않은 변화를 눈 여겨 보았다. 언젠가 부터 시시각각으로 돌변하는 모양새를 나타냄에 따라 천마의 안색도 그에 맞춰 점점 호응을 빨리 하였다. 파천의 몸은 여전히 공중에 떠다니고 있었고 모공에서 뻗어 나오던 칠채서기 는 점차로 그 농도가 짙어져 나중에는 그 모습마저도 완전히 삼켜버리고 만다. 삼일이라는 시간이 사람의 전 일생에 비추어보면 너무나 짧은 순간이기는 했으나 파천의 삶에서 이 삼 일이 갖는 의미가 어느 정도의 중요한 비중을 지닌 것인가를 잘 알고 있는 천마였기에 그 초조함과 기대는 남다른 것이었다.
누구나 무공의 진전에 따라 몇 번의 변화를 갖기는 하지만 지금 눈앞에 보이는 파천의 변화 는 일반적인 무공의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기도 했다. 삼일간이나 무념의 상태로 공중부양을 하는 것도 그랬고 모공을 통해 칠채서기를 뿜어내는 것도 그랬다. 이 모든 것이 초마의 정 경에서 진경으로 들어서는 현상임을 모르는 일반 무림인들이 보았다면 기이한 괴사쯤으로 여길만한 일이었다.
'진경에 들어간다 함이야말로 인간이 이를 수 있는 무학의 끝에 이름과 동일하다. 공경은 자연검의 경지, 나 또한 그 초입에서 머물다 말았다. 만가지 상념에서 한줄기 빛을 부여잡 는 것만큼이나 어렵고도 힘든 일이지. 때로는 인간의 의지만으로도 이룰 수 없는 일은 있기 마련이고 무학에서도 마찬가지다. 하늘은 사람을 낼 때 그 사람이 쓰일 수 있는 그릇을 정 해 놓았거나 아니면 그 그릇을 스스로 만들 능력을 부여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이에는 하늘의 도우심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무림역사상 초마의 진경에 든 자가 과연 몇이나 되겠는가? 너의 검에 대한 이해만은 이미 나를 앞질렀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런 너이기에 만 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도 스스로 무겁다 여기면 안 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파천의 몸에서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오오!"
천마의 입에서는 부지불식간에 절로 감탄사가 새어 나오고 그의 눈은 놀람으로 한껏 커져 간다.
모공을 들락거리던 칠채서기는 모조리 파천의 몸으로 스며들어가고 순식간에 빛이 강해지며 파천의 몸을 가리고 있던 옷이 재가 되어 바스러졌다. 그리고 땀이라도 흘리는 것처럼 모공 에서 새어나오는 것이 있었으니 금빛으로 번들거리는 끈적끈적한 액체였다. 순식간에 파천 의 몸은 금색으로 칠한 듯 빛을 발했고 심지어 머리털까지 밝게 빛났다.
"저, 저것은 설마? 전설의 금강신(金剛身)?...... 어찌 금강신이 지금에 나타난단 말인가? 그 럼, 파천이 바로 그분? 말도 안 된다. 아직 그분은 세상에 나타날 때가 아니라 하지 않았는 가? 이것이 어떻게 된 것이지?"
놀람이 커서일까? 입까지 벌리고 입가로 고인 침이 턱 아래로 흘러내릴 지경인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음에야.
한시진 정도가 일각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파천의 몸은 더 이상 빛날 수 없는 화려한 금빛 으로 번쩍이고 있었으며 그런 상태로 서서히 바닥을 향해 내려온다. 천마는 조심스럽게 파 천에게로 다가갔다. 완전히 바닥에 내려온 파천의 몸에서는 더 이상의 변화는 없어 보였다.
천마는 그런 그를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파르르 떨리는 파천의 눈꺼풀이 새로운 순간을 예 고하는 듯 했고 시간을 단절하고 있던 현실의 벽을 다시금 의식 속으로 연결시켜주기 위함 인 듯 했다. 파천의 눈이 어렵게 떠지고 몸 전체를 짙게 장악하고 있던 황금빛 물결은 한 겹 피부 속으로 도사리기라도 한 듯이 은은하게 빛날 뿐이었다. 그러나 머리색깔만은 여전 히 짙은 금발의 상태였다. 자신을 내려다보던 천마와 눈이 마주친 파천은 싱긋 미소를 지었 다.
"내가 얼마동안이나 이러고 있었지?"
멍청한 모습으로 파천을 내려다보고 있던 천마는 그 말에야 정신을 가다듬고 겨우 대답을 한다.
"삼일하고도 세 시진이 지났다."
"삼일? 그래? 잠깐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흘렀단 말인가?"
몸을 툭툭 털어 내며 상체를 일으키던 파천은 자신의 몸이 달라진 것을 보고는 의아하여 천 마를 쳐다본다.
"대체 내게 무슨 일이 벌어진 거냐?"
옷은 사라져 벌거벗었고 피부는 은은한 금색으로 빛났다. 파천이 놀라는 것도 어쩌면 당연 한 일이었다. 천마 또한 그런 파천의 반응에 아는 것이 없기는 매 한가지인지라 입 주위를 불뚱거리며 얼버무린다.
"네가 모르는데 나라고 아는 것이 있겠느냐?"
파천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몸을 벌떡 일으킨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벽장에 가서 흑삼 한 벌을 꺼내 입었다. 옷을 입으며 파천이 다시 말을 꺼냈다.
"삼일이나 지났다고? 어이가 없군. 그리고 이 꼴은 또 뭐야?"
벽장한쪽에 설치된 동경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천마의 얼굴이 푸르고 머리털이 빨갛다고 나무랄 것이 없었다. 자신의 모습을 보라. 금발에 금색 피부에 눈동자까지 금색으로 빛나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사람의 모습이라 할 수 있으리요?
천마가 파천에게 넌지시 운을 떼어본다.
"너 혹시 그 동안 어디 갔다 온 것 아니냐? 누구를 만나고 왔다던가?"
"그것은 또 무슨 소리냐? 내가 이 방에서 나간 적이 없거늘 누굴 만나고 와?"
태연한 그 모습에는 한 점 거짓도 엿보이지 않는다. 천마는 점점 더 혼미 속을 걷는 듯 어 질어질했다.
"잠깐 명상에 잠겨 있었을 뿐이고 그 다음에는 잠시 졸았던 것 같고...... 그리고 꿈을 꾸기 는 했지."
"꿈? 자세히 말해 봐라."
천마의 지나친 반응에 파천이 뒤를 돌아본다.
"너, 왜 그래? 뭔가 아는 것이라도 있어? 냄새가 나는데?"
"내가 알기는 뭘 안다고 그러냐? 그냥 꿈을 꾸었다니...... 궁금해서 그러지."
천마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가며 파천의 추궁하는 듯한 눈길을 피한다. 옷을 모두 걸친 파천 은 한쪽에 놓여 있는 천마검을 집었다.
"천마!"
"왜?"
"우리 비무나 한번 해 볼까?"
"뭐?"
천마는 파천이 설마 그런 말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는지라 다소 과장된 몸짓을 취했 다.
"싫어?"
"싫다기보다는...... 까짓 거 좋다. 그런데 어디서 하지?"
"어디는...... 존마전에서 하면 되지."
그 말을 끝으로 할말 다 했다는 듯,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는 파천. 그런 그를 보며 천마의 표정이 기이해진다.
'자식, 네가 아무리 강해졌기로서니 나를 이기겠냐? 나는 이미 예전의 구성(九成)을 회복하 고 있단다.'
어깨를 곧추세워 쭉 뻗으며 파천의 뒤를 따르는 천마의 걸음걸이에는 자신감이 가득 넘치고 있었다.
★ 존마전으로 통하는 모든 입구가 봉쇄되었다. 마도련의 새로운 지배자로 등극한 마도대공의 명에 따라 천인대원들이 존마전 밖을 폐쇄한 것이다.
존마전의 대전에 마주 선 파천과 천마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파천이 손에 든 천마검을 천마 에게로 휙 던졌다. 얼떨결에 검을 받아 쥔 천마는 무슨 의미인지를 몰라 파천을 쳐다보고,
그런 그를 향해 파천이 입을 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검이 필요 없다. 그러니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 뿐이다."
그 말에 천마는 심각해진 얼굴로 검을 내려다보다가 다시 파천에게로 검을 던진다.
"나 역시 검이 필요 없다. 그리고 이 검은 이제 너의 것이다. 나와의 인연은 1700년 전에 다했다. 그것을 다시 나에게 돌려줌은 그 검과 나에 대한 모독이다. 그러니 받을 수 없다."
"그래? 그럼 할 수 없군."
파천은 검을 한쪽 구석에 세워 두었다. 둘은 이내 5장거리를 격하고 마주섰다. 서로에 대해 서 너무나 잘 알지만 어떻게 보면 너무나 모르는 두 사람일지도 모른다. 천마가 아는 무공 은 파천도 알고, 파천이 아는 무공 중 가장 강한 것은 천마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두 사람 모두 초식이나 독문기공(獨聞氣功)에 의지하는 수준을 넘어서 있었고 그 이후의 서로의 경 지나 기예가 어느 정도인지는 짐작만 할 뿐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무림사에서 가장 강하다 고 인정받는 천마와, 이 시대 최강자라 해도 부족하지 않은 파천의 대결! 이것은 고금에 다 시없을 명승부가 될 것이 틀림없었다. 천마는 이미 어느 정도 자신의 옛 실력을 되찾아가고 있었고 파천은 초마의 진경에 들어섰다.
"천마! 최선을 다해야 할거다. 나는 이미 새로운 경지로 들어섰고 그것마저도 극복한 듯 여 겨진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천마 너라도 쉽게 나를 상대할 수는 없을 거다."
'아니 저 녀석이?'
천마는 은근히 자존심이 상해 왔다. 그래도 명색이 영세제일존(永世第一尊)이자 고금제일인 (古今第一人)이라는 자긍심 하나로 살아가는 자신이건만 나중에야 모르지만 아직은 파천도 자신의 상대는 아니라 여기고 있었기에 파천의 그 말은 그의 자존심을 건들고도 남음이 있 었다.
"너, 내가 공경의 초입까지 간 것을 알고 있지? 난 이미 자연검의 요체를 깨달았다. 이제 겨 우 무형검의 끝을 본 너와는 다르다는 말이지. 괜히 나를 격동시켜 창피나 당하지 말아라."
역시 천마는 무공에 대한 자부심만은 설사 그 상대가 파천일지라도 한발도 물러설위인은 아 니었다.
"후후 시작해라. 자연검이니 우주검이니 하는 것도 모두 너의 개념이지 세상사람들은 모르 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검의 극의(極意)에 이르기 전에는 그곳으로 이르는 길은 수 없이 많은 법. 너의 검이 최고라고 여기다가는 오늘 나한테 분명히 패한다."
더 이상의 말은 둘 사이에 필요가 없었다. 둘은 곧장 상대의 기운을 살피기 시작했다. 둘은 무턱대고 공격을 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생사를 건 싸움이 아니기에 서로의 기예를 겨루 는 선에서 마무리되어야 할 비무, 그러니 상대가 패배를 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짜내기에 여념들이 없었던 것이다. 천마에 의해 파천을 둘러싼 공간은 수 만개의 선으로 분할 된지 이미 오래였다. 파천이 움직임을 보이는 순간 천마의 무형검은 빛을 발할 것이다. 그것은 파천도 마찬가지였다.
"후후후후"
파천은 낮은 웃음을 흘리며 앞으로 걸어갔다. 파천의 최초의 한발이 떼어지며 몸이 물결치 며 움직이는 바로 그 순간, 천마의 손에서는 눈을 멀게 할 검강이 열 줄기나 폭사되었다.
무형검이었다. 그것도 극의에 달한 무형검! 파천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방위를 차단하고 순간을 만분(萬分)할 속도로 검의 폭주는 이루어졌고 그 어디로도 피할 수는 없어 보였다.
파천의 몸은 순간 좌우로 쫙 벌어지며 분신(分身)들이 수 십 개로 늘어나고 천마의 검이 파 천을 뚫어가자 그 공격권에 있던 분신들이 차례로 소멸했다.
"응?"
천마의 놀람의 탄성을 묻어버리며 파천의 기이한 공격이 시작되었다. 좌우에 각각 하나씩만 남은 파천이 천마를 가운데로 두고 양손을 활짝 펼쳤다.
"우르르르릉"
금빛으로 온몸을 장식한 금룡(金龍)들이 둘의 손에서 십 여 마리씩이나 한꺼번에 튀어나오 는 것이 아닌가? 그것들의 움직임은 직선이 아닌 제각각이었다. 입을 벌리고 곧장 천마를 물어뜯으려고 덤비는 놈이 있는가 하면 바닥을 낮게 날아오는 놈이 있고 공격은 관심이 없 는 듯이 배후로 돌아가는 놈도 있었다. 마치 모두 살아 있는 진짜 용들 같았다. 모두 스무 마리의 용이 존마전 안을 가득 채운 모습은 실로 대단한 위용이었다.
"대단하다. 파천"
천마는 천마군림보를 밟으며 12지신으로 몸을 늘이더니 한 줄로 늘어서서는
"바람이 일어나 공간을 삼킬지라."
콰아아아아
고오오오오
기이한 소리들이 존마전을 울리고 사방에서 몰려든 바람이 몰아치며 용들사이를 누볐다.
콰광 콰앙 콰콰쾅
실로 대단한 격돌음 이었다. 얼마나 충격의 여파가 컸던지 이 큰 존마전 전체가 무너질 듯 이 진동을 보였다. 바람은 그저 바람이 아니라 검강을 함유한 바람이었다. 용도 그냥 허상 이 아니라 무형검의 다른 형태였다. 그 둘이 부딪히고 있었으니 존마전이 이 정도로 흔들리 는 것은 당연했다. 지금의 공격도 그들이 전력을 기울이는 것은 아닌 듯 했다. 둘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로에 대한 감탄과 이 비무 자체에 대한 즐거움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하 천마 설마 이것이 네 밑천의 전부는 아니겠지?"
"물론이다. 파천 너도 어서 비장의 무기를 꺼내놓지 않으면 써볼 기회도 없이 패하고 말 것 이다."
콰광
연신 충돌하고 있었지만 두 힘은 한치의 양보도 없이 맞물려서 부딪히고만 있었다.
'파천녀석! 이 기회에 한번 꺾어보지 않으면 나중에는 영영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 이 번에 확실하게 꺾어버리고 이후에는 핑계를 대며 거절하면 되니깐....킥킥 나는 영원한 승자 고 여전히 영세제일존이고 고금제일고수가 되는 것이다.'
천마가 내심으로 염두를 굴리며 계산을 끝내더니 드디어 비장의 수를 공개하기 시작했다.
"파천 조심해라. 한번도 써 보지 않았던 비장의 수법이다. 이름하여 파멸(破滅)의 검(劍)이 다."
천마의 몸이 순간 대전의 천장까지 치솟더니 가부좌를 틀고 허공 중에 멈춘다. 그 상태로 하나밖에 없는 손을 가슴 쪽으로 깊이 끌어들였다가 순간 아래 방향으로 장심을 활짝 폈다.
"우우우우우우웅"
이미 장내에는 용도 바람도 사라졌다. 오로지 허공에 떠서 가부좌를 틀고 있는 천마와 아래 쪽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파천이 있을 뿐이었다. 천마의 손이 펼쳐져 있었지만 장내에는 기이한 소리만이 울릴 뿐 어떤 변화도 없었다.
"야, 이 바보 같은 놈아! 잘못하면 죽는다. 빨리 수비를 하던, 졌다고 하던지 빨리 결정해 라."
천마의 다급한 소리와는 달리 장내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파천은 전면을 살피다 놀라 한 걸음 물러섰다.
"이, 이런 일이?"
무엇인가가 꿈틀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공간이었다. 공간이 스스로 움직 이며 파천에게로 다가오는 것이다. 파천은 뒤로 몸을 빼내며 일검을 쳐내었다. 파천이 쏘아 낸 무형검은 흔적도 없이 공간에 저절로 갇혀서 소멸되고 만다. 마치 공간을 접어가며 점점 거리를 좁혀오는 듯했다. 그 속도가 그리 빠르다 할 수는 없었지만 워낙에 거대한 공격범위 를 지녔는지라 도저히 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어 보였다. 천마가 힘을 빼내지 않는 한은 저 괴물 같은 이상한 놈은 공간을 집어삼키며 전진할 것이다.
"좋다. 그럼 나도 비장의 수를 보여주지."
파천은 더 이상 물러서지 않고 한 손을 천장으로 향해 빳빳이 세웠다. 그는 천천히 손을 아 래로 내리 그었다.
대체 무슨 짓이란 말인가? 12개의 무형검을 모두 발출하여 검폭을 해도 시원찮은 판에 손 을 아래로 내리긋는 동작이라니? 천마도 고개를 갸웃하다가 놀라 가부좌를 풀어 버리고 만 다.
"이, 이런?"
대체 무엇을 보았기에 그가 이렇게도 놀란단 말인가? 파천은 분명히 손을 위에서 아래로 천 천히 내렸을 뿐이다. 그것도 단 한번!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파천의 손은 계속해서 내려 쳐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여전히 그의 손은 천장을 가리키고 있을 뿐 한치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음에야. 그의 모습은 점점 더 크게 보였고 그의 손은 더욱 더 커졌으며 내려치는 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나중에는 빠른 것인지 느린 것인지 정지되어 있는 것인지도 분간 이 되지 않았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손 하나 밑으로 긋는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만은 현실은 그렇 지가 않았다. 마치 거대한 도인지 검인지도 명확하지 않은 집채만한, 아니 존마전을 가득 채울? 그것보다 더욱 거대한, 그래서 볼 때마다 부피가 더 커지는 검이 천천히 공간을 양단 해 온 것이다. 그리고 천마가 떨쳐낸 파멸의 검을 간단하게 두 쪽으로 잘라내고 있지 않은 가? 처음에는 파천의 검도 그 공간에 갇히는 듯 했다. 그러자 더 큰 검이 그 공간을 다시 쳐오고 그것마저 갇히자 더 큰 검이...... 결국 공간은 두 쪽으로 갈라졌고 천마는 그 충격으 로 뒤로 주루룩 밀려난다.
아무런 소리도 없었다. 이 모든 것이 천마에게는 환상처럼 여겨졌다. 그 짧은 순간에 일어 난 일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진 것인가? 파멸의 검은 물론 불완전하긴 하나 자연검의 요체를 담고 있거늘? 어찌 이리 맥없이 무너진단 말인가? 조금 전 그것은 뭐였지?'
천마는 도저히 당면한 현실을 믿을 수 없었다. 파천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천마! 결국은 비겼구나."
이것은 또 무슨 소리인가?
"치워라. 승부는 진실 된 것이다. 어줍잖은 동정심이라면 사양하마."
"너 동정심이라고 했냐? 나한테 그런 것이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있는 사실을 그대로 말 했을 뿐이다. 너는 아직 예전의 너에 비하면 불완전하고 파멸의 검도 그래서 완전하게 펼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렇지가 않다. 그러니 내가 약간의 우위를 점했다고 내가 이겼다 고 말할 수는 없겠지. 그리고 너의 몸 역시 팔이 하나 없다. 그러니 이 승부는 무승부다. 그 러나 너무 좋아하지 마라. 언젠가는 너를 꼭 꺾어 보이마. 약속하지."
그리고는 빙긋 미소짓는다. 파천 특유의 화려한 미소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현기증이 나 게 할 정도였다. 그 모습에 천마 또한 피식 웃고는,
"좋다. 나도 너와의 승부를 이 정도로 시시하게 끝내고 싶지는 않았다. 다음 번에는 코를 납 작하게 눌러주마. 아마 밤마다 악몽을 꾸게 될 거다."
이런 그의 말과는 달리 그의 내심은 다른 것이었으니,
'내가 골이 비었냐? 너하고 다시 비무를 하게? 어이구 이게 무슨 개망신이냐? 저 괴물 같은 놈! 어느새 이 정도로 강해졌단 말이지? 그래 끝없이 성장해라. 킥킥 비무야 이렇게 어물쩍 넘어갔다가 나중에야 핑계를 대고 내 쪽에서 피하면 그만이지.'
참으로 천마다운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실 엄밀히 말해 파천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게다가 천마는 살심이 동해야 제 실력이 나오는 인간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지금의 패배가 천마 의 전부의 실력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적어도 그에게는 아직 공개하지 않은 비술이 수 십 가지는 더 있었으니 말이다.
★ 방으로 다시 돌아온 파천은 천마와 마주 앉았다. 이미 한차례 그를 보기 위해 수하들이 다 녀간 뒤였다. 그의 달라진 모습에 모두 놀라며 어찌 된 영문인지를 물었지만 파천도 모르니 대답할 말이 없었다. 결국 머리만 싸매다 모두 쫓아 버렸던 것이다.
"파천! 아까 네가 꾼 꿈에 대해서 얘기 해 봐라."
"꿈? 몰라. 잘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단지"
"단지?"
"누군가를 만난 것은 확실하고 그 사람과 대화를 나눈 것 같아. 주로 그 사람은 내게 말하 고 나는 듣기만 하고, 그러더니 무슨 말인가를 하며 내 머리를 만졌는데 불로 지지는 듯이 뜨거워졌지. 그리고는 옷 한 벌을 내게 툭 던져 주더군."
"그리고?"
천마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금빛으로 빛나는 그 옷을 입었다. 그게 다야."
"기억나는 말은 하나도 없니?"
"기억나는 것? 으음...... 아 하나 있다."
"뭔데?"
"시간이 차면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다. 이 한마디가 전부다."
천마는 그 말을 다시 되뇌어 보았다.
"그리고는 없냐?"
"옷을 주며 이것은 선물이다라고 한 것, 그러고는 없어. 정말이야. 무지하게 많은 말을 들었 던 것 같은데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그런데 왜 그렇게 내가 꾼 꿈에 관심이 많아?"
"관심은? 네가 언제 꿈 얘기를 한 적이 있었냐? 그러던 네가 갑자기 꿈을 꾸었다고 하니 궁 금해서...... 그래서 그랬지."
얼버무리는 천마를 의미심장한 눈길로 쳐다보는 파천과 그런 그의 눈길을 피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천마!
"파천, 무림맹으로 가야지. 여기서 더 있을 이유가 없잖아? 이제부터야말로 머리터지게 싸워 야 할 것 아니냐?"
파천은 결국 천마가 무엇인가를 숨기고 있다는 심증만을 지닌 채 자리에서 일어선다.
"가야지. 중원을 먹느냐? 먹히느냐의 대장정이 바야흐로 이제 시작이다. 최상의 전력과 최고 의 호기를 버려 둘 수는 없지.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