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2.어둠속의 동맹 (82/111)

 82.어둠속의 동맹

 어둠이 스물 거리며 피어나는 곳에 그 어둠을 살라먹는 미세한 빛 무리가 뭉쳐 있 다. 허공을 부유하는 혼백의 움직임인양 그것은 신비한 감을 불러일으키고 동화되 지 아니하고는 견디지 못할 이질감을 장내에 선사했다. 끈적끈적한 습기는 어디에 서 시작되었는지도 모를 불쾌감마저 끌어내니 이런 곳에 사람이 존재하기는 힘이 들어 보였다. 정체도 분명치 않은 메케한 냄새마저 한몫 거들고 있어서 그것은 더 욱 극명하게 분위기를 사이 하게 만들었다.

 금면탈의 괴인은 그곳에서 이각을 버티었다. 나무로 대충 짜 놓은 듯한 아귀가 잘 맞지 않는 의자가 삐거덕거리며 비명을 질러댔고 간간이 들려오는 소리라고는 천장 에 맺힌 물방울들이 물웅덩이에 떨어지는 소리가 전부였다. 그는 전면을 바라보았 다. 분명히 그 빛은 눈앞에서 비치고 있었지만 그것의 정체는 확연하지 않았다. 놀 랍게도 그 빛은 신화경에 이르렀다 자부하는 자신의 무공을 비웃을 만큼 위력적이 었다. 그의 인내심은 남다른 데가 있었기에 심적인 동요를 내색하지 않았으나 그 또한 인간인 바에야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었다. 막 그가 입을 떼어 가는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대가 혈마천의 사자인가?"

 저것을 사람의 음성이라 할 수 있을까? 고저가 분명치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의 것이 라 여겨지지 않는 한기가 감도는 음성이었다. 그럼에도 그 의미만은 분명히 전달되 었기에 금면탈의 괴인은 분명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렇소. 본좌가 바로 혈마천의 사자요."

 "혈마천이 여기에는 무슨 일이지? 대단한 배짱이구나. 아무리 사자의 임무를 띠고 왔다고는 하나 단신으로 여기 올 생각을 하다니...... 그래 무엇 때문에 왔는가?"

 "그대의 신분을 먼저 밝혀주시오. 나는 부주가 아니면 상대하지 않소."

 "이제 보니 죽고싶어 찾아 온 자였군. 부주님은 너 같은 애송이를 만나실 분이 아 니시다. 할말이 있으면 나에게 하면 된다."

 "애송이라? 천황부가 이렇게 무례한 곳 인줄 알았다면 나는 오지 않았을 것이오."

 "하하하하 어처구니없도록 대담한 자구나. 좋다. 본좌는 본 천황부의 오황 중 하나 인 암흑마황(暗黑魔皇)이다. 무슨 용건으로 왔는가?"

 "으음...... 좋소. 나는 혈마천의 대총사요. 귀부와 본천과의 동맹을 제의하는 바 이오."

 "동맹?"

 "그렇소."

 "하하하하하하"

 웃음소리는 끊어지지 않을 듯 했다.

 "뭐가 그리 우습소?"

 "뭐가 우습냐고? 무림에서의 동맹이란 비슷한 세력간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 혈마천이 감히 우리 천황부와 동격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 무림에서는 철저히 강 자존의 법칙만이 존재하지. 너희 혈마천이 우리 밑으로 들어오겠다면야 말리지는 않겠지만 감히 동맹이라니...... 일고의 가치도 없는 말이군."

 철저히 무시하는 그 말에도 대총사는 이렇다할 반응을 보이지는 않았다.

 "지금 무림의 상황은 설명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고 있을 것이오. 과연 천황부 단일 세력으로 무림을 독패 할 수 있겠소? 중원무림의 저력은 대단한 것이오. 거기다 사사혈교와 사황성, 북해빙궁까지 패권을 노리고 있소이다. 당신들 천황부가 얼마 나 강한지는 모르나 결코 당신들 힘만으로는 두 개의 세력도 감당하지 못할 것이오 . 결국 동맹을 맺지 못하는 세력은 철저하게 무너지고 말 것이오."

 "네 말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구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직 우리 를 긴장시킬 수 있는 세력이란 전설의 천마교 뿐이다. 그들이 다시 무림에 등장하 지 않는 한은 무림은 우리들 차지가 될 것이다."

 "그렇소? 천황부는 참으로 답답한 곳이었군. 사황성이 이미 중원에 들어와 있음은 알고 있을 것이오. 뿐만 아니라 곧 이어 북해빙궁도 들어 올 것이고 신수궁과 사사 혈교도 잠자코 있지만은 않겠지. 그럼 그들 모두를 천황부 혼자만의 힘으로 상대할 수 있으리라 여기오? 독불장군은 없소. 만약 귀하가 생각하는 것처럼 천황부가 그 리 강하다면 아마도 제일 먼저 제거될 것이오. 그래도 자신 있다면 이 제의는 없었 던 것으로 할 수밖에...... 우리와 동맹을 맺고자 하는 곳은 얼마든지 있으니.....

 ."

 대총사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한 점 망설임도 없이 몸을 돌려서 발걸음을 떼어갔 다.

 "잠깐만 기다려 봐라. 성격이 매우 급한 자군. 동맹의 조건은 무엇인가?"

 대총사는 몸을 돌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동맹할 의사는 있는 것이오?"

 "조건을 들어보고 결정하겠다."

 스스로를 암흑마황이라 자칭한 자의 말에 근거하면 그 자의 직위와 권한이 천황부 내에서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해 준다. 이런 중차대한 일을 결정할 수 있 을 만큼......

 대총사가 몸을 돌려 세웠다.

 "아주 간단하오. 첫 번째는 불가침 협정이오. 무림의 여타 세력이 괴멸 될 때까지 서로를 침범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필요하오."

 "흐음...... 그것은 당연하겠지."

 "두 번째는 공동전선 형성이오. 아, 물론 우리가 동맹하고 있음은 다른 세력에 알 려져서는 곤란하오. 다만 서로의 의견을 조율하여 중원 제패까지의 기나긴 여정동 안 모든 작전은 공동으로 하게 될 것이오. 이를 위해 서로간의 긴밀한 연락이 요구 되오."

 "흐음 그리고?"

 "정보 공유요. 적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귀 세력과 본 혈마천의 세력편성까지 서로 가 알 수 있어야 하오."

 "뭐? 그것은 조금 무리가 있지 않나?"

 "이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요. 서로의 세력 편성에 대해서 알게 되면 상대의 움직임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이고 그것만이 서로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이어가게 할 것이오."

 "그런가? 좋다. 그 다음에는?"

 "마지막으로 모든 적들이 소멸될 때까지 각자 세력의 일부를 상대 진영에 두어야 하오."

 "무엇이라고? 으음...... 그것은 곤란하다."

 "왜, 곤란하다는 것이오?"

 "왜, 곤란하냐고? 그것을 몰라서 하는 말인가? 너희가 우리 세력을 먼저 제거하고 우리 쪽에 심어둔 세력을 통해 내부 혼란을 기도한다면 우리로서는 달갑지 않기 때 문이지. 그런 불안을 지니고서야 어찌 동맹관계가 유지될 수 있겠느냐?"

 "그것은 피차 마찬가지 아니겠소? 어차피 서로간의 동맹관계는 다른 세력들이 괴멸 되기 전까지는 좋든 싫든 유지해야 할 것이오. 정보공유에도 충분히 이바지 할 것 이고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한다면 상대의 급작스런 배신을 경계할 수도 있소이다."

 "으음..... 좋다. 대신."

 "무엇이오?"

 "우리도 한가지만 요구하지. 우리가 조사해 본 바로는 중원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은 세 명이다."

 "세 명?"

 "그렇다. 그 놈들만 제거된다면 무혈입성도 꿈만은 아니지. 어차피 우리 두 세력을 제외하고는 사사혈교나 경계할 만한 상대지. 중원의 무림오천 중의 삼인인 장삼봉 과 옥면신룡, 그리고 천마서생만 제거한다면 중원제패는 훨씬 앞당겨질 것이다. 그 래서 그들 셋을 혈마천이 제거해 준다면 동맹을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너희들의 요 구를 모두 수용하겠다."

 대총사는 어이가 없었다. 대체 뭐 하자는 수작이란 말인가?

 "그것을 지금 말이라고 하시오? 천마서생은 내가 지닌 정보로는 이미 중원마도를 한 손에 움켜쥐었소. 옥면신룡 또한 정도무림맹의 실질적인 지도자요. 게다가 무당 의 장삼봉 진인은 신룡과 같아서 그 흔적을 찾기조차 쉽지가 않소. 그들 세 명은 중원의 실질적인 힘 그 자체요. 그런 그들을 우리더러 제거하라는 말이오? 그것이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오? 그것을 그리 쉽게 처리할 정도의 힘을 갖고 있다면 귀부와 동맹 따위를 제안 했겠소이까?"

 스스로 생각해도 조금은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이 들었는지 암흑마왕은 양보를 했다 .

 "그럼...... 셋 중에 하나라도 제거하는 성의를 보여라. 그러면 동맹을 하겠다."

 '약아 빠진 놈. 좋다. 일단은 네놈들이 하라는 대로 따라주지. 그러나 모든 일이 우리 뜻대로 이루어진 다음에는 네놈부터 죽여주마.'

 "좋소. 천마서생을 죽여주겠소."

 "그러면 우리의 동맹은 성립된 걸로 하지. 빠른 시일 내에 천마서생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기대하겠다. 후후후 우리 두 세력의 연합이라면 무림을 집어삼키는 것은 시간 문제 겠군."

 '어이가 없는 자다. 어느 정도의 자신감을 지니는 것은 모르겠으나 이것은 좋지가 않다. 아직 중원 무림의 진정한 저력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는 듯 하니...... 이것 이 과연 잘하는 짓인가? 사형은 하필이면 이들 천황부와 동맹을 맺으라고 하시는 것인지......'

 ★ 산서성 태원에는 세 명의 유명인사가 있다. 그 하나는 세상의 모든 이치를 꿰고 있 다 하여 만통대로(萬通大老)라 불렸고 또 하나는 그의 손에서 만들지 못하는 것이 없다하여 신장대로(神匠大老)라 하였으며 마지막으로 세상에 모르는 무공이 없다하 여 무불무학자(無不武學者) 만공대로(萬功大老)라 하였다. 이 세 사람은 산서무림 의 자랑이자 정도 무림의 명숙들이기도 했다. 어떤 자리에 간다 하여도 이들에게 상석은 언제나 예비 되어 있을 정도로 그들의 명성은 대단한 것이었다. 이들은 비 슷한 나이에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는데 언젠가 한날 한시에 은퇴할 것을 결정한 적이 있었고 오늘에야 그것을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태원에 이렇게 많은 무림인들이 모여 든 것은 처음이리라. 현 무림의 상황이 그리 태평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평소에 이들과 친분이 있는 무림인들이나 문파에서 사람 을 보내왔고 산서에 적을 두고 있는 무림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앞으로 이들이 은퇴후의 남은 여생을 보내게 될 은현장은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혼잡했다. 흔히 무림에서 은퇴식을 하는 것은 삼생의 복을 타고나야 가능하다 했으니 이들이야말 로 만인의 축복을 받기에 어색하지 않았다.

 은형장의 총관 강호충은 몰려드는 인파에 머리를 흔들었다. 금분세수가 무림에 흔 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충분히 예상한 바였으나 이 정도로 성황을 이룰 줄은 짐작하 지 못했기 때문에 당황되었다. 은현장의 수하들이래 봐야 100명을 헤아릴 정도니 족히 3000명을 넘어설 것 같은 군웅들이 몰려들자 그들의 노고가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니었다. 장내, 외에 차양을 치고 자리를 마련하기 바빴고 음식을 조달하기도 벅 찼다.

 "총관나으리 음식이 떨어져 가는데요."

 총관은 머리를 짚었다. 시비들의 우두머리 격인 수운이는 평소 그 하는 행사가 치 밀하고 또한 총명하여 총관의 신임이 두터운 아이였다. 그녀는 총관을 빤히 쳐다보 며 신속히 대책을 세워 줄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너는 아이들을 데려가서 성내의 식당에서 음식을 주문해 오너라. 술이야 얼마든지 조달할 수 있을 거고...... 돈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요리사들을 초빙해 오고 식당에서 쓸 음식재료들을 모두 사 오너라. 어서 서둘러라."

 "네, 알았습니다."

 수운이 뛰어 가는 것을 본 총관은 어질어질함을 느껴야만 했다.

 '아직 은퇴식은 두 시진이 더 있어야 시작될 터이고 모르긴 몰라도 밤새도록 잔치 가 벌어질텐데 큰일이군. 게다가 무림대파에서는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으니......

 '

 그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도처에 차양이 쳐져 있었고 자리를 깔고 앉은 무림인 들이 술을 들이키며 왁자하게 떠드는 모습들이 눈에 들어왔다. 바깥 상황도 이에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쪽에는 방명록을 기재하는 수하들의 모습도 보였지만 이미 등재하는 것을 포기했는지 손을 놓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무림인들이 몰려 온 것이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항상 이 런 은퇴식에는 평소 사이가 좋지 않거나 은원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찾아와서 행패 를 부리기 마련이었고 그것을 잘 수습해야 은퇴를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세 장주님이야, 무림에 은원을 쌓은 적이 없으시니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만 에 하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다 해도 하객들이 이리 많으니 잘 무마가 되겠구나 .'

 총관은 또 다시 바쁘게 뛰어 다녀야만 했다.

 은현장 유일의 대전이라 할 수 있는 경천전(敬天殿)에는 산서무림의 중소 문파들의 문주들이 자리해 있었다. 기껏해야 10명이 채 안 되는 수였기에 대전이라 하기에 조금은 비좁은 곳이지만 그리 썰렁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렇게 은퇴식을 축하 해 주기 위해 왕림해 주셔서 저희들은 몸둘 바를 모르겠군 요. 아무쪼록 마음껏 즐기시기를 바랍니다."

 만통대로 기문선의 훌렁 벗겨진 대머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빛을 발했다. 인자한 두 눈에는 흡족함과 함께 어딘가 불안한 기색이 엿보이고 있었다. 두 사람과 나란히 앉아 있는 두 명의 장주 역시 마찬가지인 듯 했다.

 덜컹

 문이 심하게 요동치며 열렸고 그 사이로 총관이 다급한 신색으로 들어서자 만통대 로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무슨 일이냐?"

 총관은 숨을 고르며 무슨 말인가를 하려 했지만 터지느니 거친 호흡소리뿐이었다.

 이를 본 만통대로의 꾸짖음이 있고 나서야 그는 말문을 틔었다.

 "지금..... 밖에...... 괴인들이 와서 난동을 부리고 있습니다. 장주님들을 데려 오지 않으면 이곳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리겠다며......"

 "무엇이라고?"

 만통대로는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고 총관의 말에 반문을 한 이는 옆의 만공대로 추자승이었다. 세 명의 장주들은 빠르게 시선을 교환했다. 이런 그들의 모습을 살 피던 장내의 귀빈들의 얼굴에는 의아함이 가득했다.

 산서 무림의 기둥 중 한곳인 철혈장 장주인 호아검(虎牙劍) 진표율이 앞으로 나섰 다. 그는 자신의 허리에 매어진 검 자루를 한번 툭치며 점잖은 음성을 발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별일 아닐 겁니다. 여러분들은 여기 계십시오. 저희들은 어찌 된 연유인지를 알아 보고 오겠습니다."

 세 명의 장주는 총관의 뒤를 따라 바깥으로 사라져갔고 호기심을 억누르지 못한 호 아검도 그들의 뒤를 따랐다. 그들이 밖에 나와보니 은현장 바깥에서는 팽팽한 긴장 감이 흐르고 있었다. 삼십여명은 족히 될 인원들이 윤기가 흐르는 흑마에 올라탄 채 기세등등하게 군웅들을 쳐다보고 있었고 많은 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기세가 워낙에 흉험했는지라 아무도 그들을 제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들 앞에 는 은현장의 호장무사들이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지만 볼품 없는 모습들이었다.

 [자네의 점괘가 오늘도 적중했군. 나는 오늘만이라도 틀리기를 바랬건만......]

 만통대로에게 전음을 보낸 이는 은현장의 세 장주 중의 일인인 신장대로 호만득이 었다. 그의 전음에 얼굴에 수심을 드리운 만통대로가 전면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장내에 나타나자 중인들이 한 쪽으로 길을 틔어 주었다.

 만통대로는 눈앞을 쳐다보았다. 인원은 서른 명에 불과 했으나 그들이 내 뿜는 기 운은 삼백 명 이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무리 중 최선두에 서 있는 젊은이에게 가서 멎었다. 분위기로 보나 그들이 서 있는 위치로 보나 그가 저들 무리의 수장으로 여겨졌다. 흑마보다 더 짙은 흑의무복에 눈빛이 날카로운 자였다. 전체적으로 한 자루 날선 칼을 보는 듯한 예리한 기도를 풍기고 있었다.

 그는 오만한 시선으로 세 명의 장주를 쓸어 보았다.

 "그대들이 이곳의 장주들인가? 오늘 은퇴식을 한다는....."

 군더더기가 없는 음성이었다. 인간의 정이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함이 어떠한 것 인지를 보여주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무례하구나. 감히 무림 말학 주제에 대 선배에게 이 따위 버릇없는 언사를 하다니 ......"

 철혈장주의 호통소리였다. 그의 말에 호응하는 소리들이 군웅들에게서 터져 나왔다 .

 "어서 말에서 내리지 못할까?"

 "어디서 굴러먹던 놈들이냐? 정체를 밝혀라."

 말 위의 흑의 사내는 그런 군웅들의 반응에 그저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장내는 급작스럽게 조용해져 버렸다.

 만통대로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그렇소이다. 우리들이 이곳 은현장의 세 장주요. 그러는 귀공은 대체 누구시오?

 그리고 이곳에는 무슨 용무로 오셨소?"

 "알 것 없다. 우리는 먼길을 왔다. 우연히 이곳에서 은퇴식을 한다기에 찾아 왔을 뿐이다. 우리 일행들이 쉴 곳을 마련하고 접대를 해라."

 그 말을 들은 장내의 모든 인물들에게서는 하나같이 잘못 들었지 않나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저 자는 항상 명령만을 내려오던 자다. 그리고 멀리서 왔다는 것을 보니 새외의 인물이기 쉽다. 오늘은 길보다는 흉이 많겠구나. 오늘 처신을 잘못하면 큰 어려움 을 겪게 되리라.'

 만통대로는 조심스럽게 사내를 올려다보며 입을 떼어갔다.

 "들어오시오. 그 정도야 못하겠소? 원래 잔치 집에는 손님이 많을수록 좋은 법이니 ...... 총관. 어서 안내하거라."

 "네, 장주님."

 "잠깐."

 이번에는 또 뭐란 말인가? 세 장주의 얼굴에 불안이 스쳐갔다.

 "나는 번잡한 것을 싫어한다. 장내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내 보내거라."

 그 말은 분명 억지였다. 이런 말을 태연하게 뱉어내는 사람에게 좋은 낯으로 대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통대로의 얼굴은 변화가 없었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오늘은 우리 세 늙은이들의 은퇴식이오. 그리고 여기 계신 분들은 부족한 저희들 의 은퇴를 축하해주기 위해 오신 분들이오. 이런 분들을 나가라 할 수는 없소이다.

 그러니 귀하께서 양보를 해 주셨으면 좋겠소."

 그가 이렇게 까지 저자세로 나오는 이유를 사람들은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 다.

 "좋아. 내가 양보하지. 은퇴식은 내일로 미뤄라. 우리는 하루만 이곳에 있다 가겠 다."

 "이런 발칙한 놈. 네 놈이 뭐 하는 놈인지는 모르겠으나 참으로 오만함이 하늘에 미치는 놈이구나."

 철혈장주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대로하여 외쳤다. 흑의사내의 시선이 그에게 머물 렀다.

 "죽고 싶은가 보군."

 그 한마디가 전부였다. 순식간에 장내는 차가운 살기가 피어나고 삼십여명의 무사 들의 눈이 차갑게 빛나기 시작했다.

 "장주. 이 놈들을 그냥 놔 둘 참입니까?"

 철혈장주의 말이었다. 그는 상대들의 기세가 만만치 않자 이렇게 말을 돌린 것이다 . 그러나 여전히 그 또한 기세를 죽이지 않고 마주 쏘아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세 명의 장주는 참으로 난감했다.

 '이 일을 어쩐단 말인가? 만약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저들은 살수를 펼칠 것이고...... 저들은 결코 만만한 자들이 아니다. 이 많은 군웅들 앞에서도 한치 의 흔들림도 없는 것만 봐도 저들이 어떤 자들인지는 알 수 있다.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이제 하루만 지나면 무림과의 연을 마치고 여생을 편히 지낼 수도 있겠건만 하필이 면 마지막에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그들이 어떤 대답을 하느냐에 따라 장내 의 분위기는 달라 질 것이다. 흑의인들의 요구를 들어 준다면 은퇴를 축하해주기 위해 이곳에 모인 군웅들에게서 비겁한 자로 낙인찍힐 것이고 자존심을 세우고 강 경하게 대한다면 이곳은 금새 피바다가 될 것이 분명했다. 어느 쪽도 그들이 원하 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할 참이냐?]

 만공대로가 만통대로에게 물어오는 전음이었다.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자.]

 이것이 만통대로의 최후의 결정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억지요. 안 되겠소. 그냥 돌아가 주시오."

 만통대로의 그 말에 장내의 군웅들의 얼굴에 떠 오른 것은 당연하다는 표정들이었 다. 이제는 과연 그들이 어떤 태도를 보일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어리석은 자로군. 그깟 자존심 때문에 죽음을 자초하다니...... 얘들아 장내를 정 리해라."

 "존명"

 "존명"

 삼십명의 흑의무사들이 동시에 대답을 하는가 했더니 허리에 차여져 있는 도를 뽑 아들고는 산지사방으로 튀어나갔다. 그들은 순식간에 무리 중에 섞여 들어갔고 그 들의 도는 불을 뿜었다.

 "끄악"

 최초의 비명성이 터져 나온 이후 연이어 여기저기서 비명성이 이어졌다.

 "이 놈들."

 철혈장주가 그런 흑의인들 중 한 명에게 검을 빼들고 덤벼들었다. 세 명의 장주와 은현장의 수하들도 무기를 빼들고 달려든다. 장내는 일 순간 아수라장이 되고 말았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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