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3. 사황성의 도발! (83/111)

 83. 사황성의 도발!

 흑의인들은 평화로이 풀을 뜯는 양떼 무리에 뛰어든 한 무리의 늑대와 다름없었다.

 한번씩 검을 찌르거나 휘두를 때마다 어김없이 터져 나오는 단발마의 비명은 언제 나 군웅들의 것이었다. 검법은 기이하도록 빠르고 악랄했다. 철혈장주는 막 한 명 의 심장에서 검을 뽑아드는 흑의인의 배후를 노렸다. 검기가 상대에게 뻗치자 그 자는 어느새 그것을 느끼고 뒤로 검을 쳐 올려왔다.

 챙

 "허억"

 철혈장주는 검을 통해 전해지는 충격에 하마터면 검을 놓칠 뻔하였다. 그의 손아귀 는 어느새 찢어져 있었고 뒷걸음치며 물러서는 그를 흑의인은 따라붙으며 악랄한 초식을 전개했다.

 '대체 이놈들이 누구기에 일개 수하마저 이 정도란 말인가?'

 그의 놀람은 당연했다. 물론 중원무림 최 고수들의 집단이라 할 수 있는 무림맹의 고수들에게야 비견할 수 없다지만 산서 무림에서 한 소리 한다 할 수 있는 자신이 고 보면 상대의 강함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기도 했다. 철혈장주는 뒤로 물러서 며 알 수 없는 적에 대한 공포심을 지녔다. 흑의인의 검이 재차 중단을 향하여 찔 러 들자 감히 태만하지 못하고 전력을 기울여 막아갔다.

 챙

 챙

 "으음"

 역시나 상대의 검기는 자신으로서도 감당하기 벅찰 정도였다. 거대한 철벽을 두드 리는 듯한 타격이 전해져 왔다. 불안이 엄습했다. 도저히 건드려서는 안될 사신들 을 맞닥뜨린 것 같았다.

 "이놈"

 한소리 노호성을 발하며 몸을 빼어 올렸고 전신내공을 검에 집중했다. 석자에 달하 는 검기가 피어나고 호아검은 이내 상대의 심장을 노리고 삼 검을 격출했다. 이번 에야말로 적에게 손해를 입힐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너무나 어이없이 허물어지고 있었으니, 어느새 그의 전후 좌우에서 네 명의 흑의인들이 몰 려들며 검을 뻗어 온 것이다.

 "끄억"

 믿을 수 없었다. 호아검의 심장과 목과 등, 그리고 복부에는 네 자루의 검이 들어 왔다 빠져나가고 그곳에서는 도랑을 흐르는 물줄기처럼 세차게 피가 쏟아져 나왔다 . 점점 의식은 흐려지고 몸이 무너진다 여겼다. 그것이 끝이었다. 흑의인들의 공격 은 끊임없이 군웅들을 휩쓸어갔지만 누구하나 그들을 제지할 만한 고수는 없었다.

 군웅들 역시 한 자루 검에 인생을 맡겼으니 만큼 저항이 만만치 않았으나 그것은 공연한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점차로 비교적 격전지에서 먼 곳으로부터 도주하 는 자들이 속출했다. 삼 천명 대 삼십명의 싸움이건만 그들은 그 무엇보다 자신들 의 생명만이 소중했고 자신이 죽은 이후에 찾아올 승리에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자 들이었다. 끝까지 물고늘어진다면 자신들의 승리가 분명하겠지만 그들이 느끼는 공 포심은 이를 떨쳐버리는데 탁월했다.

 "하하하하 모두 죽여라. 중원의 잡것들을 하나도 살려 두지 마라."

 여전히 말에 탄 채 허리를 젖혀가며 웃는 흑의인을 향해 은현장의 세 장주는 서로 의 시선을 부딪히며 맹렬히 몸을 날려갔다. 그들의 공격은 그 분노만큼이나 거센 것이었지만 흑의인은 단지 흘끔 시선을 주었을 뿐이다. 그의 시선은 냉막함을 유지 하며 마치 벌레를 쳐다보듯 경멸을 담고 있었다. 만통대로는 한자에 불과한 판관필 을 꺼내 들었고 만공대로의 손엔 단창이 쥐어져 있었다. 셋 중에 가장 빠른 신법을 지닌 신장대로는 검을 쥐고 어느새 상대 가까이 도달했다. 머리위로 솟구친 검극 을 몸을 허공에 띄운 채로 아래쪽으로 힘껏 내리그었다. 신장대로는 비웃음을 흘리 는 상대의 얼굴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말 위에 오만하게 앉은 청년은 자세도 흐 트러뜨리지 않고 한 손을 쳐들었다. 손안 가득 붉은 기운이 스미는가 했더니 공기 를 찢는 파공성이 터져 나왔다.

 팡

 "꺽"

 신장대로는 속절없이 퉁겨갔다. 그러나 그는 역시 노련했다.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 며 자세를 바로 하고 땅에 착지하는가 싶더니 곧 바로 상대에게로 짓 쳐간다. 그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만통대로의 판관필과 만공대로의 단창이 상대의 장력에 격 퇴되어 뒤로 물러나고 바로 그 순간 상대의 몸이 흐릿해지며 시야에서 사라짐을… … 그는 고개를 돌리며 상대를 찾았다. 만통대로와 신장대로 역시 한곳에 떨어져 몸을 겨우 가누며 흑의사내를 찾고 있었다.

 '이 놈이 대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신장대로는 빠르게 주위를 훑어보았다. 주위에 늘려 있는 시체들은 하나같이 자신 들의 은퇴식을 축하해주기 위해 온 하객들이었다. 서른명의 흑의인들은 도주하기 시작한 군웅들을 따라 붙으며 도륙하고 있었다.

 "중원의 버러지들. 내가 너희에게 진정한 하늘이 어떠함을 알려주마. 지옥에 가서 염라대왕이 누가 보냈느냐고 묻거든 혈수천자(血手天子)님이 친히 손을 쓰셨다 하 거라."

 세 사람은 소리의 출처를 향해 빠르게 고개를 들었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허공 중에 떠 있는 흑의사내에게로 몸을 솟구쳤다. 그는 허공을 밟고 두 손을 하늘로 뻗 고 있었는데 손안에는 태양을 방불케 하는 륜이 빛 무리를 끌고 맹렬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아래쪽을 향해 가볍게 손을 떨쳤다. 그러자 손안에서 회전하던 두 개 의 륜이 기이한 소음을 동반하고 각각 만통대로와 만공대로에게 쏜살같이 달려오 는 것이 아닌가? 만공 대로는 빛 무리를 창으로 갈랐다 여겼고 만통대로 또한 판관필로 쳐내었다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은 그들의 생각을 여지없이 배반하고 창 이 부서지고 머리통이 갈라졌으며 심장을 관통하여 등짝이 박살났다.

 두 사람은 비명도질러보지 못하고 호흡을 놓아버렸다. 신장대로는 혼신의 기력을 짜내어 흑의사내에 게로 검을 찔러갔다. 필살의 의지가 실려 있으니 만큼 그 위력은 만만치 않았지 만 상대는 여전히 비웃음으로 무참히 그의 내심을 갈가리 찢어 놓았다.

 "으악"

 만통대로와 만공대로를 관통한 두 개의 륜은 어느새 호선을 그리며 신장대로의 어깻죽지를 스쳤고 두 팔은 검을 쥔 채로 몸에서 분리되어 버렸다. 그는 땅 바닥을 구르며 버둥거려보았지만 그럴수록 피는 더욱 빠른 속도로 몸 안에서 빠져나갔다.

 마지막 부여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더욱 조여보았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옆으로 가로누운 그의 시선에는 지난 세월을 함께 한 두 친우의 처참한 주검이 비치고 그 앞에는 그 보다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자신의 두 팔이 검을 꽉 쥔 채로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고통이 밀려왔다. 그 고통보다 더 강하게 그를 이끄는 것은 억 울함이었고 흐려지는 시선을 가리는 것은 눈물이었다.

 '이렇게 가야 하다니…… 인생이 이리도 허무한 줄 알았다면 나는…… 검을 잡지는 않았을 것이다. 내가 지금껏 한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무엇을 위해 검을 쥐었고 무엇을 위해 그리도 처절하게 투쟁을 하였던가? 이런 처참한 죽음을 맞기 위해서라 면…… 후후후'

 "후후하하하하하"

 생명을 유지하는 마지막 기력을 그는, 한 움큼의 웃음으로 소비하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다가선 혈수천자는 그런 그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그의 입가엔 경멸의 미 소가 떠나지 않고 매달려 있었다.

 "미친 놈. 너희들 같은 쓰레기들을 치우기 위해 내가 친히 나서야 하다니…… 이제 중원은 깨닫게 될 것이다. 하늘은 마냥 푸르지만은 않고 하늘이 분노하면 어떤 저 주가 내리는지를…… 내가 곧 하늘이니."

 그는 발을 들어 신장대로 머리위로 갖다 대었다. 그리고는 지그시 힘을 주며 입 을 열었다.

 "하늘의 위대함을 너희는 뼈저리게 느끼게 될 것이다."

 빠각

 또 하나의 고귀한 생명이 사라져 감을 알리는 소리였다. 머리가 터져 뇌수가 흘러 나오자 혈수천자는 신발바닥을 만공대로의 옷에다 쓱쓱 문질러 닦았다. 그는 시선 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시체들 사이로 흘러내린 피가 바닥을 적시고 불어오는 바람결에 비릿한 혈향이 섞여 요동을 친다. 시선의 끝에는 그의 수하들이 보이고 그들은 피 묻은 검을 들고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혈수천자는 말에 올랐다.

 바로 그때였다.

 두두두두두

 주위에 늘어선 흑의인들은 경계를 하며 고개를 들어 지평선 쪽을 쳐다보았다. 족히 삼백 기는 넘을 기마대가 빠른 속도로 다가왔다. 한 호흡으로 질러대는 소리 마냥 말발굽 소리는 듣기 좋은 박자감을 지녔다. 그들이 가까이 다가오자 흑의무사들의 경계가 오히려 풀어지는 것이 아닌가? 그들은 제각기 말에 올라 혈수천자의 뒤로 도열했다.

 "사형의 수족들이군."

 잔잔하게 흘러나온 말은 눈앞에 다가오는 기마대가 결코 외인이 아님을 설명해주었 다. 무리 중에서 한 명이 혈수천자 앞으로 나서고 말에서 뛰어내리며 한쪽 무릎을 땅에 대었다.

 "이공의 중원 입성을 경축 드립니다."

 "사형이 보내서 왔나?"

 "네, 그렇습니다."

 "괜한 수고를 했구나. 나는 당분간 중원을 홀로 주유할터이니 너는 신경 쓰지 말고 돌아가거라."

 흑의경갑을 멋들어지게 걸친 중년무사는 고개를 들며 혈수천자를 쳐다보는데 그 눈 에는 난색을 표하고 있음이 금방 드러났다.

 "안 됩니다. 태공(太公)께서 이공(二公)을 꼭 모시고 오라 하셨습니다."

 혈수천자의 눈이 꿈틀거리는가 했더니 그의 전신에서는 마주보기 힘들 정도의 살기 가 피어나며 상대를 압박했다.

 "네가 언제부터…… 내 말에 토를 달았나? 감히 너 따위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하다 니…… 죽고 싶나?"

 중년무사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그것이 아니오라…… 태공의 명에 의하면 혈마천과의 동맹 건으로 이공을 꼭 모시 고 오라 하셨습니다. 이것은 천황의 명이기도 합니다."

 혈수천자의 살기는 잦아들고 의문을 드러내었다.

 "사부께서? 으음…… 혈마천과 동맹이라고? 어이가 없군. 그 따위 쓰레기들하고 동 맹을 했다는 말인가? 좋다. 가자. 지금 사형은 어디 있나?"

 "태공께서는 낙양에 머물고 계십니다."

 "낙양? 흥…… 금방 중원을 접수할 것처럼 큰 소리를 치더니 지금껏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군. 아무리 사형이라고는 하나 직무유기가 발견된다면 그 또 한 용서할 수 없는 일. 사형 내 그대의 오만한 얼굴에 언젠가 비굴한 웃음이 떠돌 게 해주지."

 그는 눈앞의 사내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이 말을 뱉어내었고 많이 보아왔던 일을 대하는지 중년무사 역시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혈수천자는 300기마대의 호위를 받 으며 남쪽으로 말을 몰아갔다.

 ★ 사천성 송번에 웅크리고 있던 사황성이 행동을 개시했다. 그들은 오천 기마대를 끌 고 사천성 성도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들의 최선두에는 사황성의 중원무림 제패의 야심의 결정체이자 회심의 걸작인 제혼혈강시(制魂血畺屍) 500구를 앞세웠다. 금방 피구덩이에서 건져 올린 듯 붉은 색으로 물들어 있는 혈강시들은 보기만 해도 전 의를 상실케 하는 사이함을 풍겼다. 이미 무림에서 강시가 사라진지는 오래 되었다 . 워낙에 그 제조방법이 까다롭고 그런 것에 비해서는 큰 효과를 볼 수 없기 때문 이었다.

 강시란 특이한 술법이나 약물로 제조하는 것이 일반적인 상례이고 그 피부와 뼈가 보통의 인간들보다는 강하다. 뿐만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에 고통을 느끼지도 않는다. 이런 이유로 예전에는 곧잘 사용되기도 했으나 지금은 대부분 사라졌다 할 수 있었다. 가장 큰 이유는 무림인들의 일반적인 내공의 증진에 있었 다. 강시가 견딜 수 있는 한계는 검기 정도였으므로 검강을 시전 하는 고수에게는 한낱 팔딱거리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공격목표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들기는 하지만 스스로 판단하여 공격을 변환하거나 수비를 하는 등의 꾀를 부리지 못하기 에 돈만 많이 들었지 그 효용성에 있어서는 영 젬병이었다.

 그러나 두 종류의 강시만은 지금도 공포의 대상이었으니. 그 하나는 한때 마교에서 사용한 적이 있다는 묵혈강시(墨血薑屍)이고 또 하나는 배교에서 창안한 제혼혈강 시다. 이 두 강시는 다른 것들과 달리 살아 있는 인간의 의식을 제압하여 강시로 만든 것이기에 그 활용에서 탁월한 점이 있었다. 더군다나 원래 지니고 있던 무공 을 그대로 사용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판단을 내리기도 하며 일반 강시에 비해서 피부의 견고함이 극히 뛰어나 검강을 시전 하는 고수라도 단번에 처리하기는 힘들 었다. 이런 제혼혈강시가 무려 500구나 된다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절정 고수 500명을 앞세운 거나 다름없었다.

 역시 그 효과는 금방 드러났다. 오련회의 제선분타는 송번에서 성도로 가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사황성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던 오련회 측에서는 전력의 일할을 배치시켜놓았다. 지금 성도에 집결한 오련회를 주축으로 한 무림맹 전력은 거의 2만에 육박하고 있었고 여기에다 사천성 각지에서 몰려든 중, 소문파들까지 하면 3만을 훌쩍 넘겼다. 제선분타의 삼천 고수가 사황성의 5천5 백 명에게 초토화 된 것은 고작 반 시진하고도 이 각에 불과했다. 칼과 검을 퉁겨 내는 혈강시들은 평생을 피 튀기는 격전장에서 잔뼈를 키워온 강호인들 마저 공포 감을 느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삼천 고수들이 펼친 구궁멸혼진(九宮滅魂陣)

 은 500 혈강시들이 휘두르는 손속에 너무나 어이없이 무너지고 그들이 최후까지 저 항을 포기하지 않았음은 오로지 대지를 적시며 흐르는 혈하만이 말해 주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반 시진만에 제선분타가 괴멸되었다니?"

 오련회주 창천신검 남궁휘의 외침은 너른 전청을 빠르게 오가며 울려나왔다. 모두 의 심정은 동일하게 불안으로 뒤덮여가고 초조감이 빠르게 의식을 지배해오기 시작 했다. 그런 차에 남궁휘의 외침소리가 이런 그들의 심경을 더욱 압박해오며 지금의 당면한 현실이 얼마나 심각함을 일깨워주고 있었으니…… 팽가가주이자 오련회 장 로이기도 한 붕산신권 팽호우가 앞으로 나서며 불같은 성격을 주체하지 못하고 그 대로 드러내었다.

 "회주. 이 이상 지체하다가는 한 번 제대로 싸워 보지도 못하고 사천성을 내주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차라리 분타의 전력을 후퇴시켜 일전을 결하는 것이 나을 듯 합 니다.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최후의 순간까지 놈들과 생사를 결해야 합니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모용세가주인 신산귀검 모용중일이 앞으로 나서며 배배꼬인 수염자락을 비틀어가며 어렵게 입을 떼어갔다.

 "제선 분타가 그리 쉽게 허물어 진 것은 제혼혈강시 때문이라 합니다. 마땅한 대책 이 없는 한은 전면전을 벌인다 하여도 승산이 없습니다. 차라리 사천성을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확고한 대책을 세운 연후라야 싸움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신중을 기하여야 할 것이오."

 팽장로는 모용가주의 평소 신중한 성격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지금의 그 말은 듣 고 있자니 울화가 치밀게 할 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용가주. 대체 지금 사천성을 내주자는 말이 그리 쉽게 나오시오? 이곳을 내주고 물러서면 우리가 어디로 간다는 말이오? 어차피 상대해야 할 적이라면 이곳에서 승패를 결해야 할 것이오."

 팽장로의 시선은 모용중일에게서 떠나 남궁휘에게로 전해졌다.

 "회주.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제선분타가 무너졌다면 곧 바로 조양입니다. 그 다음엔 공지와 천면, 이후엔 이곳까지 몰려 들것입니다. 그러니 분타의 전력들을 천면분타까지 후퇴시켜 장우평이나 함량산에서 저지해야 합니다. 어차피 무림맹에 서는 더 이상의 지원이 불가능하다는 전갈이 왔고 우리를 도와줄 만한 다른 조력자 들은 전무한 실정입니다. 회주! 용단을 내리십시오."

 전청에 모인 오련회 소속 문파들의 수장들은 회주 남궁휘가 어떤 결정을 내릴 지에 주목했다. 그들의 심정 또한 두 사람의 장로의 의견에 별반 다르지 않았고 비슷한 비율로 나누어져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을 바라보며 남궁휘의 입이 벌어졌다. 고 른 치아가 드러나며 말을 만들어가고 있다.

 "지금의 우리들의 전력이라면 그들을 막아낼 수 있소. 그러나…… 우리 또한 타격 이 극심할 것이오. 모용가주의 말처럼 우리는 현명한 선택을 해야 하오. 사천성을 내주는 것쯤 그리 문제될 것이 없소. 크게 보고 길게 보아야 하오. 작금의 무림 상 황으로 봤을 때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고 우리가 상대해야 할 적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소. 5500의 사황성의 전력 또한 그들의 전위에 불과하오. 그런데 그런 그들을 막고자 오련회 전체의 힘을 소비한다면 후세의 무림사가들은 우리를 비웃을 것이 틀림없소이다. 분하고 억울하지만 일단은 후퇴하며 방법을 찾아봅시다. 당문주!"

 남궁휘의 눈이 빠르게 사천당문주 독수만리 당천익을 찾아간다. 그는 한 걸음 나서 며 회주의 부름에 답했다.

 "네."

 "제혼혈강시의 약점이 무엇이오?"

 사천당문은 독술과 암기술에 있어서는 중원최고의 문파라 할 수 있었다. 여기에 더 해서 강시제조에 대한 식견 또한 풍부하기에 회주가 물어본 것이다. 그는 머뭇거렸 다. 몇 번이나 자신을 바라보는 좌중의 시선을 부담스런 눈길로 마주 대하다가는 한 숨을 토해내며 그들의 기대를 깨뜨리는 것이 죄스럽다는 표정으로 이어지고 만 다.

 "회주, 안타깝게도 제혼혈강시는 약점이 없습니다. 최소한 삼갑자 이상의 내가고수 가 전력을 기울여 타격을 가한다면 신체를 훼손시킬 수 있을 뿐입니다. 결국은 사 지를 잘라내어 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방법뿐입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에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리고 만다. 남궁휘는 몸을 젖히며 천장을 쳐다보았다.

 "삼갑자 이상의 고수라? 후후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강한 물건이군. 결국은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모두 잘 들으시오. 순간의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맞대응 하다가는 대세를 그르칠 수 있소. 지금 이 시간 부로 오련회의 전 주력은 성도를 버리고 중 경으로 물러날 것이오. 분타에 즉각 연락을 취해 필요 없는 손실을 최소 화 하시오 ."

 팽장로는 당치않다는 표정이었으나 그 또한 어쩔 수 없음인지 수긍을 하는 것 같았 다. 그는 회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중경까지 물러섰음에도 그들이 진격을 멈추지 않으면 어쩌실 참입니까? 더군다나 중경은 배후에 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잘못하면 떼죽음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멈춤이 없이 우리를 따라 붙는다면 우리 또한 죽음으로 그들을 저지 할 것이오. 그곳이야말로 우리가 물러설 수 있는 한계지점이 될 것이니 모두 그렇 게 각오를 다지시기를 바랄 뿐이오. 회의는 이것으로 마치고 즉각 준비를 서둘러 주시오. 한 시가 급합니다."

 "알겠습니다. 회주."

 "존명."

 그들은 빠르게 흩어져 갔다. 전청을 빠져나가는 인물들의 부산한 움직임을 주시하 며 남궁휘의 입에서는 그만이 들을 수 있는 작은 한 숨이 새어나왔다.

 "후우…… 좋지가 않다. 모든 것이 우리의 예상보다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 더군 다나 이제 시작이니, 한바탕 혈풍이 몰아친 뒤에도 과연 정도무림은 명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내심은 이 순간 형언할 수 없는 불길함에 몸서리치고 있었다. 아득한 지경에 서 일시에 몰려든 먹구름은 앞뒤를 분간치 못하게 만들었고 스스로 우월함에 사로 잡혀 마도를 짓밟아 오던 자신들의 행태를 비웃기라고 하는 듯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이 밀려들었다.

 ★ 오련회 제선분타의 괴멸과 무림맹 서부세력의 후퇴에 대한 소식은 전 무림에 급속 히 퍼져갔으며 한번이라도 검을 잡아본 자라면 가슴을 두드리는 긴장감에 안, 팎을 단속하기에 이르렀다. 죽음을 직감하는 인간은 항시 주위를 둘러보기 마련이다.

 이런 점에서 이 시대의 무림인들은 불행한 자들이었다. 식솔을 둔 자들은 그들에게 화가 미칠까봐 조바심을 내었고 떠돌이 낭인이라 할지라도 평소와는 다른 기색들 을 보였다. 한 가지 공통된 분위기라면 모두의 마음속에 중원을 지켜내어야 한다는 절박감이 빠르게 확산되어 가며 사소한 이익을 위해서도 서로 반목하던 문파들 간 에도 하나라는 동질감이 모두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한가지 다행이라면 사황성의 진격은 성도에서 더 이상 이어지지 않고 소강상태를 맞이한 것 정도였다.

 ★ 광마존은 하루 종일 울적해 있었다. 지존의 명에 의해 존마전에 갔다 온 이후로 마 음은 더 무거워져만 갔다. 자신의 처소로 향하던 발길을 멈춘 광마존은 걸음을 돌 려 군사의 처소로 다가갔다.

 "아니 웬 일이세요?"

 군사 제갈초홍은 급작스런 광마존의 방문에 의아함을 드러낸다. 자리를 권하고 차 를 따라준 이후에도 그녀의 맑은 두 눈은 분명한 목적을 지니고 왔을 광마존의 내 심이 궁금하여 뚫어지게 쳐다본다. 광마존은 찻잔을 들어 몇 모금을 들이킨 이후에 도 여전히 망설이며 입을 떼기에 주저하고 있었다.

 "말씀하세요. 제게 하문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지?"

 광마존은 용기를 내어 제갈초홍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군사."

 "네."

 "다른 게 아니라, 한가지 알고 싶은 것이 있어서 이렇게 왔소이다."

 그녀는 광마존의 다음 말을 침묵으로 재촉했다.

 "군사는 모든 정보를 총괄하지 않소?"

 "그렇죠."

 "혹시……"

 다시 찻잔을 잡아가는 광마존의 손길은 그가 하려는 말이 얼마나 뱉어내기 힘든 것 인지를 여실히 나타내고,

 "남도맹을 빠져나온…… 천향옥봉의 소식을 알고 있소?"

 전혀 의외의 질문이 광마존의 입을 빠져나오자 일시지간 제갈초홍은 분명치 않은 심경을 얼굴에 새겨갔다. 천향옥봉의 성격은 항시 상대의 말이나 태도에서 그 사람 의 진의를 캐내는 데에 익숙해져 있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이런 그녀의 습성이 발 동된 것이다.

 '이 분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극히 잔인하고 차가운 사람이라 여겼는데……'

 그녀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호기심보다 같은 여자로서 느끼는 흐뭇함에 절로 가슴이 따뜻해져 왔다.

 '설마, 사랑…… 이라는 건가? 이 무시무시한 괴물 같은 사내가 천향옥봉을?'

 "알고 있어요."

 그녀는 순순히 인정했다. 이후의 일이지만 대공이 천향옥봉의 위기를 일부러 외면 했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는 그녀였지만 왠지 눈앞에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사내 의 눈을 보고 있자니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원래가 혈마천의 소속이었던 그녀 인지라 천향옥봉에 대해서는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더군다나 마도련의 군사라는 위치에서 얻어지는 정보 중에는 그녀에 대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내게 가르쳐 줄 수 있소?"

 제갈초홍은 고민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녀의 입은 순순히 열리고야 만다. 이 후 대공의 질책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마저 감수하게끔 하는 강한 설득이 그녀를 끌어 당겼다.

 "그녀는 지금…… 천황부의 중원 세력에 납치되어 있어요. 좀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대상벌의 본거지에 있는 셈이죠. 그렇지만 그녀의 현 상태가 어떤지는 전혀 알 수 가 없습니다."

 "납치…… 라고 했소?"

 "명확하지는 않지만 그들과 함께 사라진 것은 분명해요."

 "으음…… 그럼, 대상벌의 본거지는 어디요?"

 "낙양입니다. 사실상 대상벌이란 세력 역시도 천황부의……"

 그녀의 말은 이어지고 있었지만 광마존의 귀는 그것을 포착하기를 허용하지 않았다 . 홀로 생각에 잠겨 있었으며 이내 몸을 일으키고야 만다.

 "고맙소. 이만 가 봐야겠오이다."

 "네에? 네. 그러세요. 살펴가세요."

 제갈초홍은 돌아서 나가는 광마존의 등에서 자신만의 착각인지 모르지만 사내의 진 한 고독과 슬픔을 읽고 있었다. 그가 완전히 실내에서 모습을 감춘 뒤에도 형용할 수 없는 잔잔한 감동에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상대가 다름 아닌 광마존이 었기에 그것은 더욱 더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