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누가 포로인가?
파천과 천마는 머리를 맞대고 무엇인가를 숙의하고 있는 중이었다. 둘 간에 오가는 대화의 내용이 무엇인지 천마는 그답지 않게 심각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흐음. 그것도 좋은 생각이긴 한 것 같은데...... 글쎄다. 만약 네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을 경우엔 시간만 낭비하는 꼴이 아니냐?"
천마의 말에 파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지."
"그렇지만 한 번쯤 시도해 볼만은 하겠다. 좋다. 본교의 아이들이 들어오면 시작해 보자."
"그래. 마음껏 한 번 휘저어 봐라. 이것은 순전히 네가 있기에 가능한 작전이다."
파천은 천마를 한껏 추켜세웠고 그 말에 천마는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빳빳이 세 운다.
"그야 당연하지. 까짓 것 한번에 쓸어버려도 되지만 네 뜻이 그렇다면 따라주지.
그럼 무림맹과 마도련의 연합도 어쩌면 조만간 이루어질지도 모르겠구나."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야지. 사황성이 이미 행동을 개시했고 천황부와 혈마천 또한 무림에 들어와 있다. 이제 남은 건 사사혈교와 북해빙궁 그리고 신수궁이군. 그들 마저 들어온다면 무림의 산하(山河)는 하루도 피가 마를 날이 없겠군."
"어찌 보면 너무 오랜 기간 무림은 피를 흘리지 않았다. 이제 새로운 피로 수혈할 때가 온 게야. 강하지 못한 자들은 도태되고 경쟁력이 없는 세력 또한 살아 남을 수가 없는 거지. 시대가 새로운 물결을 요구하고 있는 거다."
"그만 무림맹으로 가야겠다. 그쪽 일도 시간을 다투는 상황이니 더 이상 지체하면 시기를 놓치게 된다. 군사와 광마존 등을 만나보고 곧바로 떠나야겠다."
"누굴 데리고 갈 셈이냐?"
파천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광마존을 제외하고 무영존과 율극을 데려가야지. 너는 개봉까지 함께 갔다가 그곳 에서부터 따로 행동하던가 하고 일단은 우리와 함께 가자."
"그러지."
★ 황하(黃河)의 지류인 하남성 서부 낙하(洛河) 유역에 위치하는 낙양은 중국의 7대 고도(古都)로 꼽히며, 낙하 연안의 소분지로, 예로부터 화북평원(華北平原)과 위수 (渭水)분지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번성했다. 주(周)나라 성왕(成王)이 동방경영의 기지로 축성한 데서 비롯되며, 당시에는 낙읍(洛邑)이라고 불렸다. 그 뒤 주왕조가 낙읍으로 천도한 뒤 동주(東周)의 국도로 번영하였고, 후에 후한(後漢), 삼국(三 國)의 위(魏)·서진(西晉)도 이곳에 도읍하였는데, 후한 때부터 도성의 규모가 남 북 9화리(華里:1화리=0.5km), 동서 6화리였기 때문에 구륙성(九六城)이라고도 불렸 다.
이후 전한(前漢) 때에 낙양으로 칭해지다가, 후한이 국도로 정하면서 현재 명칭인 낙양으로 고쳐졌다. 후에 북위(北魏)가 화북을 평정하자, 효문제(孝文帝)가 산서( 山西)의 대동(大同)에서 이곳으로 천도하여, 구륙성을 중심으로 시역(市域)을 동서 20화리, 남북 15화리로 확장하였다. 수(隋)나라가 중국을 통일하자, 병란으로 황 폐한 북위의 낙양성 서쪽 40리(32화리) 지점에 거의 같은 규모(주위 69화리)의 새 로운 성을 건설하고, 장안의 부도(副都)로 삼아 동도(東都)라고 불렀는데, 현재 낙 양의 전신이다. 낙양은 경제도시로 대운하를 따라 수송되는 강남의 물자 집산지로 번영하였다. 그러나 안사(安史)의 난(亂)이 일어난 뒤부터 쇠퇴일로를 걸어 쭉 지 방도시로 일관하다가 최근에 와서 대상벌이 본거지를 잡으므로 해서 중원 상계의 폭풍의 핵이 되어가고 있었다.
대상벌은 중원거상들의 연합체였다. 그들은 원래가 하나로 뭉치지 못하는 상인들의 특성상 서로가 경쟁의 관계에 있었지만 무림맹의 상권침투에 대항할 목적으로 연 합을 하기에 이르렀다. 특히 최근에는 낙양으로 본거지를 옮김으로 개봉에 위치하
는 무림맹과 치열한 대결구도를 보이고 있었다. 예로부터 밥그릇 싸움만큼 처절하 고 원색적인 것은 없었다. 처음에는 드러나지 않는 가운데 상도를 지켜가며 정상적 인 경쟁을 벌이는가 했더니 작금에 와서는 드러내놓고 무력시위도 불사했다. 물론 그것은 은밀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일인지라 일반인들이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호오, 이것 대단한 규모군. 이리도 호화로운 곳에 틀어박혀 온갖 영화를 다 누리 고 살았나 보군."
스스로를 혈수천자라 칭한 흑의 사내가 뱉어낸 말이었다. 그는 대상벌의 내원으로 들어서고 있는 중이었으며 그 앞서 인도해 가는 이는 예의 흑의경갑을 걸치고 있는 중년사내였다. 등에 독수리가 그려져 있는 것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수하들은 외원에 머물게 하고 내원에 들어서며 걸어 들어오는데 그 규모가 눈길이 미치지 못할 정도로 넓었고 복잡하기까지 했다. 보이는 전각들은 하나같이 크고 웅장해 보 는 이를 주눅들게 할 정도였다. 앞서가던 중년사내는 뒤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갈 길을 재촉해갔다. 혈수천자는 주변을 둘러보며 그 뒤를 따랐다. 가장 안쪽이라 생각되는 전각에 맞닥뜨린 중년사내는 뒤를 돌아보며 혈수천자에게 공손히 말했다.
"이곳에 천무태공께서 계십니다. 들어가시면 시비들이 안내를 할 것입니다."
혈수천자는 고개를 오만하게 끄덕이는가 했더니 주저함 없이 안으로 들어선다. 그 가 사라지고 난 뒤 홀로 남은 중년사내는 나직한 한숨을 토했다.
"이공의 오만한 성격은 여전하구나. 대공께서 이공을 아끼시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 았다면...... 오래 전에 생명을 잃었을 것이다."
그는 할 일을 다 하였다는 듯이 가벼운 걸음으로 모처로 사라져갔다.
"태공, 이공께서 당도하셨습니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시비의 소리 뒤로 또 하나의 소리가 도발적으로 울려 나왔다.
"비키거라."
쾅
문을 힘차게 밀어젖힌 사내는 안에 누가 있건 상관하지 않고 거침없이 들어선다.
혈수천자는 안으로 들어서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몸을 싣고 거만한 자세로 두 발을 탁자위로 걸쳐놓았다. 이어 등을 돌리고 있는 사내를 향해 말했다.
"난초를 돌보는 버릇은 여전하군. 사형, 나를 부른 이유가 뭐지?"
사형에게 반말을 하는 경우란 흔치않다. 오래 전부터의 습관인 듯 그의 입에서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니 둘의 관계가 어떠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 다. 혈수천자의 말에 뒤를 돌아본 사내는 다름 아닌 초량이었다. 혈마천의 대총사 에게서 천향옥봉을 빼내어 갔던 신비인 초량이 혈수천자의 사형이었던 것이다. 그 는 천천히 발을 떼어 혈수천자에게로 다가 왔다. 여전히 그때와 마찬가지로 그의 입 주위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고 꿈결처럼 머물렀다.
"먼길에 고생했다. 내가 너를 부른 것은 사부님의 명을 전하기 위함이다."
"사부님의 명이라고? 내가 떠나올 때만 해도 아무말씀도 없으셨건만 대체 무슨 명 이란 거지?"
초량은 탁자에 올려진 혈수천자의 발을 슬쩍 손으로 밀쳤다.
"혈마천과 우리가 동맹했다는 전갈이다."
"미쳤구먼. 혈마천과의 동맹이라니...... 중원을 혼자 먹어치워도 양에 차지 않는 판에 둘이서 나눠 먹자는 것인가?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결정을 내린 거지?"
초량은 탁자에 놓여 있는 차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따랐다. 그리고 하나는 혈수천자 의 앞으로 또 하나는 자신의 앞에 놓는다. 그의 섬세한 손짓은 여자의 것을 방불케 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알 필요가 없다. 단지 내려진 명에 충실하면 그 뿐이다. 너에게 사부님의 명을 전하마."
혈수천자의 눈 꼬리가 살짝 위로 치켜지며 미세한 떨림을 보였다.
"너는 이후로 내 명령에 따라 중원 상권을 장악하는 일에 일조를 해야 한다. 만약 에 명을 어길 시에는 즉시로 부로 소환된다."
혈수천자는 초량의 말이 떨어짐과 동시에 몸을 일으키는가 했더니 그를 향해 불타 는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건가? 내가 너의 명을 들어야 한다고? 나는 본부의 모든 제자들을 감찰할 수 있는 순찰 총영주야. 그런 내가 너의 명을 들어야 한단 말이 냐? 믿을 수 없다. 사부님이 그런 명을 내렸을 리가 없다."
초량은 느긋한 자세를 잃지 않고 한 모금의 차를 들이키고는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찻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물 흐르듯 자연스런 태도였다. 그의 시선은 일 어서서 으르렁대고 있는 혈수천자에게로 향했다.
"한치의 틀림도 없는 사실이다. 사부님의 인장이 찍힌 명령서를 보여 주어야 믿겠 느냐?"
혈수천자는 알고 있었다. 사형이 저렇게 말할 때는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사형은 거짓을 모르는 사람이었다.
"지랄......"
혈수천자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털썩 자리에 앉고 만다. 초량의 잔잔한 음성은 계 속 그의 신경을 괴롭혔다.
"이후 무림맹과의 싸움은 은밀하게 진행될 것이다. 먼저 우리가 노려야 할 것은 우 선적으로 중원의 상권 장악이다. 이후에야 무림패권에 뛰어든다. 항시 이것을 잊지 말아라. 우리의 최종목표는 무림에만 있지 않다는 것을...... 그래서 너의 힘이 더욱 필요하다. 이후 너는 이곳에 머물며 무림맹의 상권을 와해시키는 일에 주력해 야 한다. 아이들을 붙여 줄 테니 무림맹 하부조직을 쳐봐라. 현재 무림맹은 지부 중심으로 상권에 개입하고 있으니 문제가 있는 지역이나 경쟁이 치열한 곳에 우선 적으로 투입될 것이다. 어떤 불만도 의문도 용납하지 않는다. 지금까지는 사형으로 너를 대했지만 이후에는 상관으로서 너를 대할 것이다. 그러니 너도 착오가 없었 으면 한다. 그만 나가봐라."
초량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언제 그랬느냐 싶게 태연한 신색으로 다시 난초를 향 해 다가섰다. 혈수천자는 그런 그를 향해 증오가 담긴 시선으로 전신을 태워 버릴 듯이 노려보았다. 그는 어금니를 물며 자리에서 일어섰고 아무소리도 하지 않고 몸 을 돌려 세웠다.
"태공. 자운소저를 모셔 왔습니다."
밖에서 들려오는 시비의 목소리는 어색한 침묵을 갈라놓았다. 초량은 공식적으로는 천무태공이라 불렸고 그와 친분이 있는 몇몇은 대공이라 불렀다. 문이 열리며 한 명의 아리따운 여인이 실내로 들어선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에 조금은 초췌한 듯도 보이지만 여전히 자태가 고운 천향옥봉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다. 그녀가 들어서자 초량의 얼굴이 저절로 환하게 밝아지며 부드러운 미소가 묻어났다.
"어서 오시오. 같이 식사라도 할까 해서 오시라 했습니다."
초량의 음성에는 상대에 대한 숨길 수 없는 호감이 드러나고 있었다. 순간 혈수천 자의 얼굴은 묘하게 꿈틀대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서는 천향옥봉 쪽으로 다가가더 니 그녀의 앞을 막아서고 전신을 샅샅이 살폈다. 그의 입은 비틀어지며 묘한 여운 을 남겼다.
"이 년은 또 뭐야? 훗, 이제 보니 사형의 취미가 그새 한가지가 더 늘었나 보군."
혈수천자의 냉랭한 비웃음 섞인 말에 초량은 당황하여 급히 그에게로 다가서고 자 운의 얼굴 또한 상대의 지나친 언사에 곱게 찡그려졌다.
"너, 이게 무슨 짓이냐?"
초량의 손이 혈수천자의 어깨를 움켰지만 그는 손길을 뿌리치며 할말을 마저 하고 있었다.
"사매의 마음이 사형에게 가 있는 것을 알면서 중원에서 계집이나 끼고 있단 말이 지? 이 짓을 하느라 소식 한 장 못 전한건가? 빙화(氷花)가 이것을 알면 어떤 표정 일지가 궁금하군. 그년 미색하나는 일품이구나."
휙
천향옥봉이 손을 들어 눈앞의 무례한 사내의 뺨을 쳐갔다. 그러나 여지없이 그 손 은 우악스런 사내의 손에 사로잡히고 그는 그 상태로 싯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비웃 음을 흘렸다.
"네 년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기막힌 선택을 했다. 천무태공을 품안에 품는다면 세 상 부러울 것이 없겠지. 하하하하"
"이 무례한 놈. 당장 그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천향옥봉의 손목을 낚아챈 혈수천자의 손목을, 다시금 초량이 움켜쥐었다. 초량이 힘을 주자 혈수천자의 손이 슬며시 풀려가고 그제야 천향옥봉은 손을 빼낼 수 있었 다. 그녀는 아픔 때문인지 모욕 때문인지 아미를 찡그렸다. 혈수천자는 여전히 손 목을 사형에게 붙잡힌 채 뒤로 돌아서며 초량을 마주 보았다.
"사형. 다른 것은 다 용서하지만...... 한 가지만은 용서할 수 없어. 빙화를 울린 다면 내가 널 죽일 거야. 이것은 결코 농담이 아니니 명심해 두는 것이 좋을 거다.
흐흐흐"
초량은 사제의 손목을 풀어 주었다. 그의 두 눈에는 의미조차 분명치 않은 아픔이 잠깐 머물다, 그 순간보다 빠르게 사라졌다.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 시 선에는 복잡한 그들의 심경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그것은 당사자들 외에는 파악 하지 못할 색깔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혈수천자는 문을 박차며 밖으 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살핀 초량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자운을 바라봤다. 자운 은 그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탁자로 다가섰다. 그녀가 자리에 앉고 나자 그 또한 그녀의 앞에 마주 앉는다. 채 융화되지 못한 침묵이 둘 사이를 무겁게 짓누르고 그것은 이내 묘한 심경으로 자극을 준다. 견디지 못한 천향옥봉이 먼저 입을 떼었 다.
"공자의 배려에 소녀는 감사할 뿐입니다."
"저야 좋아서 하는 짓이니 너무 마음에 두지 마십시오."
초량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반응을 살펴갔다. 담담한 눈빛을 떨구고는 비어 있는 찻잔에 공연히 머물고 있었다. 초량은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 보려 다시금 입 을 열었다.
"이것도 모두 비급에 대한 대가이니 너무 부담 갖지 마십시오."
"그런가요? 공자께 한가지 청이 있습니다."
의외로 그녀가 자신을 직시해오자 초량은 기쁨을 담고 마주 보았다.
"무엇이든지 말씀하십시오. 불편한 것이 있다면 바로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이제 절 그만 보내 주십시오."
그의 얼굴은 확연하게 빛을 잃고 입술을 열어제치고 흘러나온 목소리는 묵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왜...... 이곳이 불편하십니까?"
"아뇨. 지나칠 정도로 편합니다. 저는 이곳에 있기가 부담스럽고...... 그것보다 더 큰 이유는 저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으음...... 소저는 이곳을 나가는 즉시 혈마천의 촉수에 걸리게 될 겁니다. 신변 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도 가시겠습니까?"
그녀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그리고 당찬 일성을 토해낸다.
"가야 하는 길이라면 가야지요. 이미 한번 죽음을 각오했던 몸. 더 이상 미련 따위 는 없습니다. 죽어서라도 이 두 눈에 담아두고 싶은 사람이 있어...... 그래서 그 렇습니다. 염원이 지나쳐 마음이 타 들어가니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 같지가 않 습니다. 오히려 지나친 환대가 불편하기 그지없습니다."
초량은 실망하는 기색이었다. 스스로도 이런 심경의 상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 금껏 그가 추구하는 가치란 오로지 무공에 대한 성취감 이외에는 없었다. 하나밖에 없는 사매가 연정의 눈길을 보내도 그는 담담하게 외면할 수 있었다. 수많은 미모 의 여성들을 대했지만 그의 마음이 흔들린 적은 맹세코 단 한번도 없었다. 마음이 란 것이 차가운 이성으로도 묶어 둘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괴로움은 더 지극했다.
손만 뻗으면 닿으리라 여겼고 언젠가는 품속에 안겨오리라 생각했는데 그것은 스 스로의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운명이라 여겼기에 그의 기다림은 지루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언제가 될지 모르나 막연한 순간은 반드시 오리라 기대했 건만 이 모든 것이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한바탕 꿈에 불과하단 말인가? 기대는 아픔으로 허물어지고 심장은 요동치는 혈맥의 압력도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 저 바라만 보아도 마음이 푸근했기에 그는 난초를 기르듯 그녀의 자태를 곁에 두고 싶었다. 이 순간에도 그는 그녀의 시선이 전하는 언어를 무시하고 싶었다.
"저는...... 결코 보내드릴 수 없습니다."
초량은 열망의 시선을 외면하며 겨우 이 말을 꺼내놓았다. 보지 않아도 그녀의 실 망하는 모습이 뚜렷하게 눈동자에 각인될 듯 했다.
"소저의 안전이 보장된다면...... 그때는 미련 없이 보내 드리죠. 그렇지만 지금은 ...... 안 됩니다."
천향옥봉의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꽃잎을 떨군 가지가 힘없이 내려앉듯 그녀의 고 개는 한없는 애처로움을 지녔다. 초량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스스로 죄를 지은 것 같아 마음이 아프고 쓰렸다. 그럼에도 그는 마음을 모질게 먹었다.
'아직은 그대의 마음에 나라는 존재가 아무런 비중도 차지하지 못하겠지만 머지 않 은 장래에 그대는 알게 될 것이오. 내 사랑이 결코 그대의 그리움에 못지 않음을..
.... 그래도 떠나겠다면 붙잡지 않으리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나는 그대를 보내줄 수가 없소. 이대로 그대가 떠나버린다면 난 견디지 못할 것 같구려. 미안하오. 자 운.'
서로의 감정에만 몰입되어 있는 둘을 밖에서 들려온 소리가 끌어내었다.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초량은 자리에서 일어서며 자운을 이끌었다.
"식사를 하러 갑시다. 때로는 맛있는 음식이 모든 것을 잊게 해 주기도 한다오."
그는 자신의 말이 얼마나 상대에게 공허하게 들리는지를 알고 있었다. 초량과 자운 은 아직 풀어지지 않은 매듭의 자락을 끌고 실내를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