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금와전장의 표물!
"이게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이냐?"
군사 제갈초홍이 시비를 향해 하는 말이었다. 시비는 그녀 앞에서 몸 둘 바를 모르 겠다는 태도였다.
"광마께서 언제 이곳을 나가셨지?"
"저...... 그것이...... 저도 모릅니다."
제갈초홍은 눈앞의 서찰을 보며 손을 떨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그 서찰을 읽어갔 다.
(군사에게 나는 그녀를 구하러 가오. 지존께는 알리지 말았으면 좋겠소이다. 내가 그녀를 구 해서 돌아온다면 모를까? 그렇지 못할 경우엔 지존께 이 서찰을 보여도 무방하오.
많이 고민하고 망설였지만 어쨌든 그녀는 나의 유일한 내자요. 그녀의 어려움을 몰 랐다면 모를까, 알고 있는 이상엔 어쩔 수가 없었소. 이대로 수치를 안고 살아갈 바엔 죽는 것이 낫겠다 여겼소. 이미 내 생명은 지존의 것이니 이런 나의 선택이 불충인줄은 아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 자신이 아닌 내가 책임져야 할 사람을 위해 생명을 걸고자 하오. 지금 생각하니 그 동안 지존께서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길을 걷고 계셨나를 조금은 알게 된 것 같소. 책임져야 할 사람이 많다는 것은 때로 죽 음보다 더 힘든 고통을 주는 것인가 보오. 운이 좋다면 살아서 다시 만날 수 있겠 지만 그렇지 못할 경우라면 죽어서도 지존께 죄를 청하겠소. 그대를 믿고 떠나오.
지존께는 알리지 말았으면 좋겠소. 그대가 우리 사람이 되었음이 나는 자랑스럽소.
그럼. 나중에 봅시다. 지옥이든 이 땅에서든......
광마존)
제갈초홍은 얼마 전 파천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았고 그 대가로 그는 파천의 실체를 어느 정도나마 알게 되었다. 이것은 어느 정도는 그녀가 파천의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가 천마서생이자 옥면신룡이며 무림을 도모하는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을, 물론 그녀가 아는 것은 이것 외에도 많았지만 그가 천마교의 지존임은 알지 못했다. 그녀는 진정으로 파천을 주군으로 섬겼고 광마존을 상관으 로 받들었다. 그녀의 내심은 지극한 혼란으로 수습이 되지 않았다. 지금의 사태가 광마존에게 일러 준 천향옥봉에 대한 정보 때문이라 생각하니 스스로를 자책하는 마음이 불 일 듯 일어났지만 지금에 와서 후회해 본들 소용이 없었다.
'대공께 알려야 한다. 그곳에 혼자 침입해서 천향옥봉을 구해내서 살아 올 가능성 은 전무하다. 광마존님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그곳은 역시 용담호혈! 결 코 단신으로 생명을 장담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빨리 알려야 한다. 만약 그 분에 게 무슨 일이 있게 된다면 천추의 한을 남기게 된다.'
그녀는 빠르게 실내를 벗어났다.
★ 낙양의 교외에 자리한 허름하나 거대한 장원은 사람들에게 현천장(玄天場)이라 알 려진 곳이었다. 송시대의 거유(巨儒) 중 하나인 담사우라는 학자가 당대의 정권을 주물럭거리던 거물들의 음모에 희생되어 낙향하게 되고 그는 이상을 펼치지 못하는 자신의 시대를 한탄하며 스스로 칩거하여 이곳에서 인재를 길러내는 일에 전력을 경주하게 된다. 이후 현천장은 낙양 뿐만 아니라 근처의 천리이내의 인재들이 모여 드는 이름난 서원이 되었고 그 명성을 드날렸었지만 지금은 그 이름뿐이 전해지고 있는 낡은 장원에 불과했다. 한때 하남성의 거상 중에 하나인 송백유가 담사우를 흠모하고 기리고자 현청장을 인수하여 그의 거처로 삼은 적도 있었지만 가세가 기 울면서 금와전장에 담보로 잡힌 것이었다.
이곳은 현재 천마교 마황천위대 1600명이 머무는 마의 성지로 화해 있었다. 그런 이곳에 세 사람이 들어섰다. 그들이 들어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자 그곳 장원은 겉으로 보기엔 달라진 것이 없었으나 하늘을 충천하는 마기가 일시지간 하늘을 진 동했으니 그들은 다름 아닌 천마와 무영존, 그리고 율극이었다.
천마의 시선은 줄곧 흔들림 없이 고정되어 좌중을 압박했다. 전설의 천마조사를 맞 대면하고 있는 천마교의 제자들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있었다. 율극은 여전히 천마의 뒤에서 제멋대로의 자세로 한 손가락을 코에 넣었다 빼었다를 반복했다. 12마공자 중의 대형인 무영존만이 천마의 뒤에 시립해 있었고 마황천위대의 소대장격인 12마공자의 나머지 인물들과 단장화를 비롯한 사화 역시 나 맨땅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바닥과 눈과의 거리가 한치를 벗어나면 큰일이라도 날 듯이 움직임에 변화가 없었다. 천마가 흐뭇한 미소를 지우지 않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모두 고개를 들라."
그의 명이 있고나서야 간신히 고개를 들어 전면을 바라보지만 그들의 시선에는 여 전히 숨길 수 없는 두려움에 묻어나 존경심이 마음껏 발산되고 있었다. 청면(靑面)
에 적발(赤髮), 거기다가 외팔이란 외형상의 두려움뿐만 아니라 만마를 앙복케 한 다는 패도적인 기세에 그들은 침을 삼키는 것조차 조심스러워했다. 그런 그들을 향 해 천마가 입을 열어 위엄스런 모습을 보였다.
"너희들은 자랑스런 나, 천마의 후예들이다."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후예들이 자랑스럽다는 것인지 모호한 말로 일장연설을 시작했다.
"이 하늘아래에서 너희들을 곤란하게 할 자들은 많지가 않다. 이제 너희들과 나는 비밀리에 한가지 임무를 수행케 될 것이다. 내 명령에 따라 한치의 오차도 없이 일 사불란하게 움직여 줄 것을 다시 한 번 당부하며 만약...... 명령을 무시하고 개인 행동을 하거나 실수가 보일 시에는 가차없이 그 책임을 묻겠다. 너희들은 생각 따 위를 할 필요도 없고 명령에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필요 없는 살생은 피하되 맡겨진 임무를 위해서는 이 땅의 천자라 하더라도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어야 한 다. 한 시도 잊지 마라. 너희들은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천마교의 제자들임을."
"존명."
"무영존을 비롯한 16명의 소대장들은 즉시 회의실로 집결하라."
"존명."
★ 어둠 속에서 입을 떼어 말하는 이의 음성은 나지막했지만 사충길은 결코 그렇게 생 각할 수 없었다. 그는 한마디라도 놓칠 새라 주의 깊게 들었으며 그의 얼굴엔 숨길 수 없는 비장감이 표출되고 있었다.
"너를 빼내는데 들어간 돈은 무려 금300냥이나 된다. 이 일이 우리가 의도한대로 무사히 끝난다면 남겨진 네 가족들에게 금1000냥이 돌아갈 것이다. 물론 잘 할 수 있겠지?"
사충길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호언장담을 했다.
"염려 마십시오. 지금껏 나로 인해 가족들이 당한 고통을 이 정도로나마 보은할 수 있다는 것이 저로서는 기쁘기 한량이 없습니다. 어차피 사형수로 죽음을 앞두고 있던 놈이 가족들을 위해 죽을 수 있다면 뭐든 마다하겠습니까? 염려 마십시오. 나 으리."
"그래. 일이 끝나는 즉시 가족들에게 돈이 지급될 것이다. 너는 아무런 걱정하지 말고 일을 잘 마무리짓도록 해라."
"알겠습니다요."
★ 대하표국(大河驃局)은 무림맹이 상권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전만 해도 명실공히 중원최대의 표국이었다. 중원 12개성에 24개의 분국을 거느리고 총 칠천명이 넘는 표사를 거느린 거대조직이었다.
표국이라 함은 표물을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운송해주고 그에 대한 대가를 받는 집 단을 말한다. 험난한 강호에서 표국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무력이 요구되고 이런 것을 충족시키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들여서 고수들을 확보해 두어야만 했다.
보통의 중, 소 표국의 경우에는 국주 밑에 총표두 하나와 대표두 둘, 표사 30에서 60명이 일반적인 수준이었고 이외에 물건을 나르거나 험한 일을 도맡아 하는 쟁자 수들이 수십 명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이에 비해 대하표국은 분국만 해도 분국주 밑에 총표두가 하나 대표두가 열명 표사가 200명이나 되었다. 쟁자수는 보통 표사 의 두배의 숫자였다. 그러니 분국의 인원만 해도 쟁자수까지 포함한다면 육백명이 넘는 대인원이었다. 이런 분국이 중원각지에 스물네곳이나 있으니 그 거대함은 말 할 나위가 없었다.
대하표국의 총국주는 한때 무림의 초절정 고수였던 청룡검객(靑龍劍客) 구기자(歐 企仔)라는 인물이었다. 지금 나이 칠십을 바라보는 그는 서른 살 때부터 40년 간 대하표국을 지금의 성세로 키워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대하표국은 중원 거상들 의 연합체인 대상벌과 불가분의 관계 가운데 있었다. 원래가 여러 명의 거상들이 출자한 자금으로 세워진 곳이었고 지금에 와서도 대상벌의 물자유통과 호송을 책임 지는 그들의 발 노릇을 하고 있었다. 무림맹이 중원 각지에 흩어져 있는 지부의 인 력을 동원하거나 중,소 표국을 흡수한데 비해 대하표국은 그 체계가 비교적 잘 잡 혀 있는 곳이라 할 만 했다. 특히 최근에는 마도련이 강남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무림맹의 표물운송에 차질이 빚어지고 있었기에 그들의 활동영역은 더욱 확대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대하표국 광동성 광주분국주 추혼살검(追魂殺劍) 반백수(潘白手)는 이번 표행을 준 비함에 있어 만전에 만전을 기하였다. 그가 대하표국의 분국주가 된 이후로 지금처 럼 거액의 표물운송은 처음이었고 그런 만큼 분국의 절반의 인원이 동원된 적도 처 음이었다. 그가 친히 표물운송을 진두지휘하고 총표두와 대표두 다섯명에 표사 백 명, 쟁자수 스무명이 동원되었다. 그들이 운반하는 표물은 금와전장 광주지점에서 선금으로 금 오백냥이나 주고 의뢰한 것으로 표행이 무사히 끝나고 나면 나머지 금 오백냥을 완불하기로 계약이 체결되었다.
합계 황금 천냥의 표행은 흔한게 아니다. 분국주 반백수가 생각하기에도 지금까지 그가 광주의 분국주로 있은 이후 최고의 금액이 금 300냥이고 보면 그가 친히 나서 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들이 운송하는 표물은 사방이 밀폐된 검은 마차 다섯 대였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원래는 계약을 체결할 때 표 물의 내용물을 명시하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이번에는 금와전장 측에서 내용물을 밝 힐 수 없다는 단서를 다는 바람에 반백수는 흔쾌히 승낙을 하고 말았다. 만약 그럴 일이야 없겠지만 불상사가 생겨 마차를 탈취 당하게 되면 그 배상액으로 금 이천 냥을 물어주게 되어 있었다. 그 내용물이 그 정도의 가치가 있거나 그렇지 않은 것 은 하등 이유가 될 수 없었다. 계약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고 계약을 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표행을 성공시키면 되는 것이다. 다행인 것은 광동이나 복건성에서는 그들의 표행에 위협이 될만한 요소는 거의 전무한 실 정이었기에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금와전장에서 파견된 두 사람이 그들과 동행했다. 중요 표물일 경우엔 의뢰자도 동 행하는 것이 보통의 경우였다. 그들은 분국주와 말(馬)머리를 나란히 하고 이런 저 런 대화를 나누었다. 분국주 반백수는 표물이 무엇인지 궁금하여 그들을 유도해 봤 지만 입에 자물쇠라도 채워 놓았는지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다. 다섯 대의 마차를 앞뒤로 감싸고 표사 100여명이 주위를 경계하며 전진했고 쟁자수 스무명은 다섯 대의 마차와 그들의 표행기간동안 필요한 물자를 싣고 있는 수레를 모는 마부가 되 어 있었다. 이번 표행의 특징이라면 짐을 부릴 필요가 없었으므로 쟁자수의 숫자가 스무명 밖에는 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이번 표행은 비교적 수월한 것일 수도 있었다. 복건성 건영까지는 지금과 같은 속도라면 이틀을 꼬박 달려야 할 거리였다 . 반백수는 일행을 독려하며 속도를 높였다.
'이번 표행이 끝나면 향월이를 데리고 항주쯤이나 가서 유람이나 해야겠다. 흐흐 이 계약의 금액이 얼마인지는 오직 나만이 알고 있으니 금 백냥 정도를 내 수중에 넣어도 아무도 모르리라. 연이어 이런 일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반백수는 만면에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침 일찍 떠난 일행은 늦은 중식를 숲에 서 하게 되었다. 이번의 표행은 그다지 먼 거리가 아니었으므로 음식과 물을 분국 을 떠나며 준비해 왔다. 그들은 마차를 한곳으로 몰아 놓고 그 주위에 둘러앉은 채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식사 중에도 10여명의 경계병력을 세워둠을 잊지 않았다.
반백수는 두 사람의 금와전장 인물들과 함께 식사를 하며 넌지시 운을 떼어 보았다 .
"근데 한가지 물어 봅시다. 금와전장은 웬만한 표물들은 자체 해결하는 걸로 알고 있는데...... 대체 저것이 무엇이길래 우리에게 의뢰를 한거요? 뭐, 우리야 이런 거액의 표행을 해서 좋지만...... 궁금해서 그럽니다."
금와전장에서 파견 나온 두 사람은 분국주 반백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중에 하나가 입을 떼었다.
"알려고 하지 마시오. 우리도 모를뿐더러 알아도 대답을 드릴 수 없소이다."
'쳇, 혹시 저 안에 금덩이라도 가득 들어 있는 것 아니야? 하긴 금와전장에서 이 정도의 대규모 표행을 작정했다면 그럴 공산이 크긴 하지만...... 저 안에 정말 금 덩이가 가득하다면 마차 다섯 대분이면...... 후유 이것 살 떨리는군.'
반백수는 침을 삼켰다. 한 때 그는 젊은 시절 녹림에서 활동하던 때가 있었다. 물 론 그 당시에는 하급무사에 불과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가 좋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대하표국의 광주분국주를 맡으면서부터는 표물운송비의 일부를 은밀 히 착복하여 적잖은 재산도 모을 수 있었다. 지금의 그의 생활은 남부럽지 않았다.
광주에서만은 그 또한 유명인사였고 적잖은 재산으로 행세 깨나 하며 풍족하게 살 고 있었다. 나이가 들수록 재물에 대한 집착이 강해져 근래에는 분국의 운영비에서 도 어느 정도는 그의 호주머니로 들어오고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 그이고 보면 이 번의 표행에서 얻어지는 대가는 근래에 보기 드문 큰 덩어리이고 그의 생활을 더욱 윤택하게 해 줄 것이 틀림없었다. 그가 이런 생각에 골몰해 있는 동안 표사들의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금와전장의 두 사람은 어느새 식사를 다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 모습이 표행을 재촉하는 것 같아 반백수는 기분이 언짢았다.
"자, 모두들 빨리 먹고 갈 채비를 서둘러라."
반백수의 외침이 있자 총표두와 대표두들이 분주히 표사들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또 다시 표행을 서둘렀다. 최소한 오늘밤에는 광동의 끝자락쯤에 위치하는 조주까지는 가야했기 때문이다.
표행은 순조로웠다. 지금쯤이면 언제나 그렇듯 표행이 시작될 때 가지게 되는 불안 감은 어느 정도 떨칠 수 있었다. 하긴 지금과 같은 대규모 표행에서 곤란한 일을 겪을 리는 없었다. 녹림도들이 마도련에 합병된 이후로는 표물을 탈취 당할 위험요 소는 상대적으로 줄어들었고 기껏해야 표물 의뢰자와의 이해관계에 있는 자들이 공 격을 하는 정도였다. 금와전장이 의뢰하고 대하표국이 운송하는 표물에 손을 댈 만 큼 간덩이가 큰 조직은 강호를 통틀어도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것이다. 두 곳 다 무 시할 수 없는 힘을 지닌 곳이기에 공개적으로 표물을 노리지는 않을 것이고 정체를 감춘다하여도 그 정도의 무력을 동원할 수 있는 곳이라고는 무림맹과 마도련 정도 일 것이다. 두 곳 모두 표물을 털 정도로 궁핍하지는 않으니 이번 표행은 이미 안 전성을 확보해 놓고 있는 셈이었다.
'마도련과 무림맹이 치열한 대결구도를 보인 이후로 차라리 표행은 더 순조로웠다.
지금과 같은 예민한 시기에 주위의 시선을 집중시킬 행동들은 자제하기 마련이고 이도 저도 아닌 낭인들이나 이름도 없는 문파들 따위는 감히 우리 표물을 노리지는 않는다.'
그들은 추호도 걱정을 하지 않았기에 신경이 느슨해져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이들의 모든 시선을 한 곳으로 잡아두는 일이 발생했다. 흔히들 표물을 노리는 자 들이 나타나기 전에 가장 흔하게 보이는 조짐이 길에 장애물이 놓여 있을 때였다.
반백수는 손을 쳐들었다. 그의 신호에 따라 표사들은 한 동작으로 표물 주위를 더 욱 엄밀히 감싸며 주위를 경계해갔다. 위로 쳐든 손을 앞으로 몇 번인가를 기울이 자 뒤에 있던 대표두 하나와 표사 다섯이 눈앞에 보이는 장애물 쪽으로 기민하게 움직여갔다. 길을 막고 있는 것은 통나무들이었다. 그것들은 전면을 통째로 막아서 있었고 누가 봐도 누군가 의도적으로 길에 놓아두었음을 알게 해줬다. 일행과 떨 어져 앞서 나갔던 여섯 인물들은 통나무와 그 주위를 조사하고 일행 중에 몇은 길 가로 경사지게 올라간 비탈위로 뛰어 올라갔다. 사방을 살펴가는 그들의 움직임은 오랜 표행으로 다져진 익숙한 동작들이었다. 그들의 하는 양을 살펴가던 반백수는 조진천 대표두의 이상이 없다는 수신호에 따라 손바닥을 안쪽으로 해서 바깥으로 까딱거렸다. 빨리 장애물을 치우라는 의미였다. 표사들은 내공을 운기해 통나무들 을 한쪽으로 밀어붙였다.
'이상하군. 분명히 누가 의도적으로 한 일일텐데 아무런 이상이 없다는 것이......
이것 꼭 소시 적에 내가 써먹던 방법 같아 찜찜하군.'
그들은 또 다시 길을 재촉했다. 한 참이 지나가자 조금 전까지 지니고 있던 긴장감 은 흔적 없이 소멸되고 일행가운데는 또 다시 느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모두 멈춰라."
반백수가 또 다시 손을 쳐들며 하는 말이었다.
"대체 어떤 놈들이 이런 장난질을 치는 거냐?"
그는 어이가 없었다. 이번에는 그다지 크다 할 수 없는 작은 바위들을 길 복판에 수북히 쌓아 둔 것이 아닌가? 그는 또 한번 주위를 조사케 해 보았으나 아무런 흔 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짧지 않은 시간동안 여러 번의 장애물을 만나야 만 했다. 그렇다고 그 장애물이 그들이 치우기 곤란할 정도로 대단한 것도 아니어 서 금방 일행은 전진할 수 있었다. 이런 식으로 몇 번인가 반복되자 그들은 은근히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조주까지는 40리쯤을 남겨 둔 지점이었다. 어느덧 날은 어 둑어둑해지고 있었기에 일행의 움직임은 좀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눈앞을 어지럽게 이어져가던 길은 나지막한 언덕배기를 힘겹게 걸치고 있었다. 저곳을 넘어서면 저 멀리 조주가 보일 것이다. 그들은 힘을 내었다.
푸확
촥
느닷없이 땅바닥이 갈라지며 흑의 복면인들이 튀어나온 것은 반백수가 하품을 하며 찔끔 흘러나온 눈물을 손등으로 닦아 낼 때였다.
히히히힝
"으악"
"꺽"
순식간에 복면인들은 표사들을 아래에서 위로 양단해 버렸다. 숫자는 오십여명에 불과했지만 그들의 움직임은 너무나 의외의 순간에 치러진 급습이었는지라 채 방비 하지 못하고 쓰러져 갔다. 반백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모두 마차를 보호하라."
그의 외침이 있기도 전에 총표두를 중심으로 대표두들과 표사들은 마차 주위로 몰 려들며 수비진형을 갖춰갔다. 그러나 이때는 서른명정도의 사상자를 낸 이후였다.
무엇보다 반백수를 놀라게 한 것은 상대들의 무공이었다.
'이 놈들. 보통내기들이 아니다.'
그는 생각을 채 마무리짓지도 못하고 적들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챙
챙
"으악"
여기저기서 터지느니 표사들의 비명성이었다. 금와전장의 인물들 또한 생각지도 못 한 기습공격에 적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모두 전력을 다하여 상대해라."
반백수의 핏대 올리는 명령이 없어도 그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문제는 적들이 그들보다는 더 강했다. 그들 중의 일부가 몸을 허공 중으로 날리는가 했더니 마차 의 마부석으로 곧장 다가갔다. 그것을 본 반백수는 다급해졌다.
"이놈들."
그 중의 몇을 향해 청강검을 휘둘렀다. 검기가 치솟으며 적의 목을 그어갔지만 그 의 검을 맞아들인 것은 상대의 목이 아니라 등이 안쪽으로 굽은 기형도였다.
"이제보니...... 너희들은."
그는 그 도를 보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빌어먹을, 이 놈들은 마도련 놈들이구나. 저 월도는 녹림의 일파인 적월파의 독문 병기다. 저들이 왜?'
그는 상대가 마도련의 고수들이라는 것과 더군다나 그가 옛날에 몸을 담기도 했었 던 녹림의 인물들이라는 점에 크게 놀랐다. 일류고수라고는 할 수 없으나 시시껄렁 한 일반 녹림도보다는 강한 표사들도 녹림의 정예 중에 하나인 적월파의 고수들에 게는 속수무책이었다. 그것을 본 반백수는 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놈들. 마도련의 고수들이 표물을 노린단 말인가?"
괜한 소리에 불과했다. 이미 시작한 살행은 멈춤이 없었고 이대로 가다가는 전멸이 불을 보듯 뻔해 보였다.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대로 가면 표물을 탈취당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전멸을 당하게 된다. 그는 선택을 해야만 했다. 끝까지 표물을 지키다가 허무하게 죽어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뿐인 목숨을 건지기 위해서 도주라는 의미 있는 결단을 실행할 것인가? 역시 그가 광주에 남기고 온 것은 이럴 때 긴요하게 작용되었다. 그는 삶에 아쉬움과 미련이 많은 사람이었다.
"모두 표물을 버려 두고 퇴각하라."
반백수의 용기 있는 결단이 끝나고 고함을 쳐대는 순간, 이미 쟁자수는 모두 죽었 고 총표두와 대표두 다섯 중에 넷 표사 스무명만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그의 지시가 이렇게 반가울 때가 또 있었을까 싶게 그들은 신속하게 격전장을 빠져 나갔다. 의외로 녹림도로 여겨지는 적들은 그들의 앞길을 막아서지 않았다. 마치 도망가기를 바란다는 듯이 지켜보고만 있었다. 반백수는 도망을 가는 와중에도 고 개를 돌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는 한 명의 복면인이 허공으로 쳐든 도로 금와전장의 인물들을 단칼에 베어 넘기는 장면이 크게 부각되었다.
'멍청한 놈들.'
그는 금와전장의 두 인물을 속으로 비웃었다. 아무리 임무도 좋고 재물도 좋다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살아 있을 때의 문제였다. 죽고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표국의 특징이 일반 무림인들과 다른 점은 여기에 있었다. 표행 도중 만나는 적들 중에는 표사들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벅찬 상대들도 있기 마련이다. 이럴 때 그들 은 순순히 표물을 포기하고 물러선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의 생명이 표물보다 중 요해서라기 보다는 최소한 손실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적들이 더 강하다면 이미 어 떻게 해도 표물은 그들의 것이 된다. 그럴 바에는 표사들의 생명이라도 건져 표국 에 이익이 돌아가게 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잃어버린 표물의 배상액은 표국에서 하게 되지만 이것은 차후 그 표행에 참여한 표사들의 녹봉에서 일정부분을 제하기 도 한다. 이런 일이 빈번하지는 않지만 간혹 일어날 때는 표물을 강탈한 곳을 아는 경우 일정액을 헌납하고 표물을 되받아 오거나 그도 아니면 다른 대가를 지불하여 원만하게 해결하면 되는 것이다. 만약 상대를 모를 때는 그야말로 고스란히 배상 액을 물려주게 될 판이다. 이런 이유로 전체 표국의 년간 순이익의 이할 정도는 언 제나 배상준비금으로 예비 되어 있었다. 대하표국의 표사들이 꽁지가 빠지게 장내 를 도망가고 나자 장내에 있던 오십여명의 인물들은 마차를 몰아서 장내를 빠져나 갔다. 그들은 한 참을 달려가다 양 갈래길이 나오자 조주 쪽이 아닌 다른 곳으로 방향을 잡았다.
"후하하하 역시 우리는 이게 천성에 맞아. 녹림도의 본분은 어디까지나 남의 물건 을 강탈하는 것이지. 이 얼마 만에 느껴보는 희열감이란 말인가?"
제일 앞서가는 마차에 타고 있던 인물에게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그의 옆을 달려 가던 복면인이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조장, 정말 저 마차에 금괴가 가득 들어 있을까요?"
그의 눈자위엔 숨길 수 없는 탐욕이 번들거렸다. 조장이라 불린 사내는 그를 바라 보며 심드렁하게 대꾸한다.
"그야 모르지. 우리야 시키는 대로 하는 것뿐이니."
"헤헤 저 중에 일부를 슬쩍해도 별로 표도 안 날것 같지 않습니까?"
"이런 썩을 놈이 있나. 허튼 소리 마라. 만약 발각 나는 날에는 우리는 모두 죽은 목숨이다. 네 목숨하고 금괴를 바꾸고 싶다면 그렇게 하던가."
"워워.."
"히히히힝"
"뭐야?"
조장의 옆에서 말을 몰아가던 복면인이 말고삐를 당기고 마차를 끌던 두 마리의 말 이 앞발을 들며 급정거를 하고 조장이란 사내의 입에서 다급한 외침이 터져 나온 것은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자욱한 먼지가 피어오르며 그 사이로 보이는 것은 검은 장포를 바닥까지 늘어뜨린 괴인들의 모습이었다.
"뭐, 뭐냐? 저것들은?"
길을 가로막고 있는 사내들은 십 여명에 불과했으나 그 풍기는 분위기들은 예사롭 지가 않았다.
"비켜라. 웬 잡것들이 감히 마도련의 앞을 막아서는 게냐?"
그는 간담이 서늘해져 와 엉겁결에 마도련의 이름을 내세우고야 말았다. 이곳은 강 남이고 적어도 강남에서는 마도련의 이름 앞에 꼬랑지를 빳빳이 세우고 덤빌 놈들 은 많지 않을 것이었다. 때때로 일반적인 통념이 통하지 않는 경우란 비일비재한 법이다. 그런 점에서 눈앞의 괴인들은 복면인들의 조장에게는 의문스런 인물들이었 다. 나이가 몇인지 뭐 하는 놈들인지 어디 문파 소속인지도 분명치 않은 인물들은 자기들처럼 복면 따위로 얼굴을 가린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그가 보기에 그들은 모호하게만 느껴지니 그 이유가 분명치 않았다.
"누, 누구냐?"
괴인들의 무리 중 한 명에게서 스산한 음성이 발해진 것은 조장의 말이 막 끝났을 때였다.
"모두 죽여라."
촤악
마치 날개를 접고 웅크리고 있던 독수리가 날개를 펼치고 비상을 하는 듯한 동작들 을 보이며 그들은 순식간에 다가왔고 다가왔는가 하고 느꼈을 때는 공격이 시작되 고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모두 쳐라."
조장 또한 몸을 날리며 월도를 휘둘렀다. 상대는 검은 손을 쳐들어 도와 부딪혀 왔 다.
촹
"꺽"
그는 그 순간 가슴이 답답해져 오며 하체에 힘이 쭉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
그는 끝끝내 어떻게 된 상황인지도 알지 못하고 지옥으로 달려가고 말았다. 맨손과 부딪히는 순간 도는 산산조각나 깨어졌고 그 순간 푸르스름한 강기가 허리를 잘라 버린 것이다. 상대는 그가 상상한 수준의 고수가 아니었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소 리 없는 침묵을 한 겹 두른 괴인들은 기이한 공격으로 녹림의 고수들을 길가에 흔 들리는 갈대처럼 손쉽게 꺾어가고 있었다.
"으악"
"사, 사람도 아니다."
"꺽"
팡
손에서 장력이라 여겨지는 검은색을 띈 묵장이 파공성을 동반하고 몰아치는가 하면 낫같이 생긴 괴병기를 휘둘러 목을 자르고 분명히 돌이나 쪼면 딱 좋을 정으로 골 수를 헤집는가 하면 형체도 분명치 않은 유령같은 자가 흡반처럼 몸을 조여 뼈들을 부셔놓고 있었다. 그들의 무공은 도저히 자신들이 감당할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이들의 싸움은 일방적이었고 대하표국의 표사와 다른 점이라면 한 명도 살려두지 않으려 한다는 것과 녹림고수들 역시 단 하나도 도망치려는 사람이 없다는 정도였 다. 어쨌든 순식간에 열 명에게 오십명은 마치 유흥거리라도 제공하는 듯이 너무나 쉽게 목숨을 헌납하고 말았다.
"흔적을 지우고 마차를 끌고 간다. 이것 너무 실망인데...... 중원의 고수들이 이 정도 수준이라면......"
"모두 가자."
두두두두두
그들은 정적만을 장내에 남겨두고 순식간에 장내에서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