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皇帝)의 검(劍) - 94
낙양의 시진 가운데를 관통하는 번화가인 청향로(淸香路)에는 인간세에 존재하는 모든 상업 형태가 존재한다. 이곳에서 구할 수 없는 것은 다른 곳에서도 보기 힘들다 단언해도 과하지 않을 정도였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서 채워도 채워도 바닥을 모르는 법이다. 재산이 풍부한 사람은 그 사람들 나름대로, 또 상대적으로 빈곤한자들도 최소한의 소비는 하기 마 련이었고 낙양 인근에 사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이곳 청향로에 와서 욕망의 끈을 풀었다.
밤낮이 없다시피 사람들로 가득했지만 청향로를 따라 북으로 조금만 가다보면 인적이 드문 고택들이 즐비하게 자리잡고 있으며 그 가운데 지나치게 큰 장원하나가 퍼질러 앉아 있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것은 거대한 장원의 규모만은 아니었다. 대문상단에 자리하는 빛 바 랜 현판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천하제일가(天下第一家)
칠마저 벗겨져 허름하기 그지없는 대문만 보더라도 이곳이 그리 대단한 곳이 아님은 쉽사리 알 수 있을 것만 같은데 그 의미만은 간단치가 않은 것이었다. 대체 어떤 곳이 길래 천하제 일가라 자칭한단 말인가?
삐이이익
괴이한 소음을 동반하고 힘겹게 열린 대문사이로 허름한 현의(玄衣)를 걸친 육십대나 되었 음직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오척단구(五尺短軀)에 대머리가 훌렁 벗겨졌고 눈은 떴 는지 감았는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작았으며 코는 끝이 비뚜름한 매부리코에다가 입술은 두툼했다. 그는 뒷짐을 지고 밖으로 나오더니 곧장 번화가 쪽으로 방향을 잡고 오리가 뒤뚱 거리는 듯한 걸음걸이로 이동해 갔다. 한 번도 주위로 시선을 주지 않고 오직 앞만 보고 걸 어가고 있었다. 한참을 가니 사람들이 버글거리는 곳에 당도하게 되었고 그의 작은 키는 금 세 오가는 행인들에 가려 잘 보이지도 않을 지경이었다.
"노대야(老大冶) 그 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용케 사람들 틈에서 그를 발견한 화복차림의 사십대 중년인이 그에게 하는 인사였다. 그는 고개를 슬쩍 소리나는 쪽으로 돌리더니 가볍게 끄덕였다.
"그래, 장사는 잘되고?"
"그럼요. 이 모든 것이 대야께서 신경 써 주신 덕이지요."
화복중년인은 노대야라고 불린 볼품 없는 노인에게 지극한 존경의 념을 담은 눈빛을 한 채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근처에서 포목점을 운영하는 장노육과 철기 점을 삼대 째 운영하는 왕일구까지 나와서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인사를 해댔다. 노인은 그들이 하는 인사에 일일이 답하며 거리를 빠르게 지나쳐갔다. 대체 그가 누구 길래 낙양에 서 행세 깨나 한다는 상인들이 하나같이 공손하게 대한단 말인가? 그에게 인사를 하는 사람 들은 청향로에 번듯한 점포를 지닌 상인들만이 아니었다. 거리 곳곳에 자리하는 노점상들 역시나 그에게 대하는 태도가 유별났다. 그들이 그를 대하는 것은 하나같이 상대에 대한 존 경심이 묻어나 있어 더욱 그의 신분이 무엇일지 궁금함을 자아내게 했다. 잰걸음으로 빠르 게 지나쳐가던 노대야의 걸음이 한곳에서 움직일 줄 모르고 멈추었다.
운경다루(雲鏡茶樓)
삼층으로 지어진 다루는 이곳 낙양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 었다. 노대야는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들어서자 다루의 점원으로 보이는 사내가 쪼르르 달려와서는 요란한 인사를 건네었다.
"어서 오십시오. 대야. 이 누추한 곳을 다 찾아주시고......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그런 그를 향해 노인의 두툼한 입술은 충실한 답변을 보낸다.
"너도 잘 있었느냐? 이제 장가갈 나이도 되지 않았나? 그래 마음속에 담아둔 여인이라도 있 느냐?"
"헤헤, 저 같은 놈에게 누가 시집이나 오겠습니까?"
그는 씁쓸한 웃음을 짓고 있었는데 그런 그를 보며 노인은 혀를 끌끌 찼다.
"쯧쯧. 너 자신의 가치는 스스로 만드는 거다. 그런 생각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면 천년, 만년 을 산들 발전이 없을 거다. 사내란 모름지기 야망이 있어야 하는 법이거늘...... 그도 없다면 오기라도 있어야 한다. 잊지 말거라."
"네, 대야."
"명아는 와 있느냐?"
"네. 공자께서는 지금 죽실(竹室0에 들어 계십니다. 어서 가시지요."
"그래 앞장서거라."
운경다루는 총 삼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일층과 이층과는 달리 삼층은 독립된 내실로만 구성 되어 있었다. 이층의 층계를 막 돌아 삼층으로 돌아서던 노대야의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창가에 홀로 앉아 차를 들고 있는 삼십대 초반의 사내가 있는 곳이 었다. 그는 의미심장한 시선을 거두지 않은 채 한참동안이나 사내를 주시하고 있었다. 마침 그 사내도 시선을 노인에게로 향하던 차라 두 사람의 시선은 자연히 마주치게 되었다. 그 사내 또한 노인을 향한 시선을 좀체 거두지 않았다. 잠깐의 시간이 지리 한 듯 느껴질 즈음 에야 노인은 발길을 떼어갔다. 그가 이층에서 사라지자 사내 또한 시선을 창 밖으로 돌려버 렸다. 죽실이란 곳으로 들어서자 세 사람이 황급하게 일어서며 노인을 맞았다.
"어서 오십시오. 할아버님."
굵직한 사내의 음성은 듣기 좋은 저음으로 실내를 울렸다. 노인은 내실의 가장 안쪽으로 가 서 앉았다. 엉덩이를 의자에 대자마자 그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명아야. 그래 알아본 것은 어찌 되었느냐?"
내실에 있던 사내 중 가운데 있는 인물을 향한 물음이었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인상이 었으나 전체적으로 한 마리 웅크린 곰을 연상시키는 사내였다. 특히 굵은 눈썹은 칼로 잘라 놓은 듯 끝이 뭉턱 했는데 그것이 또한 더욱 사내답게 보이게 했다.
"지금 대상벌에는 상당한 수의 전력이 증원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천황부에서 서두르고 있는 듯 여겨집니다."
이들이 대체 누구기에 무림에 극소수만이 알고 있는 천황부의 실체를 입에 올린단 말인가?
"혈마천의 움직임은 없었느냐?"
"네. 수집된 정보에 의하면 천황부와의 동맹으로 그 둘이 함께 움직일 가능성이 많사오나 낙양에 그들의 모습이 보인 적은 없습니다."
노대야는 작은 눈을 더욱 가늘게 뜨며 자신의 손자를 쳐다보았다. 언제나 믿음직하게 여겨 지는 하나밖에 없는 손자였기에 그에 대한 기대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조만간 그들마저 이곳 낙양에 나타날 거다. 무림맹은 아직 대상벌의 실체에 대해 자세하게 알지는 못하고 있는 듯 여겨진다 만은 그들이 상권장악에 대해 지닌 집념으로 볼 때 조만간 이곳 낙양지부에 더 많은 숫자가 증원 될 것이다. 좋든 싫든 그들의 충돌은 불가피 할 것이 고 이에 대한 대비를 우리 또한 해 두어야 한다."
명아라 불린 사내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심려 마십시오. 설사 이곳에서 그들간의 전면전이 벌어진다 해도 피해가 없도 록 하겠습니다."
노대야는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단숨에 목안으로 밀어 넣었다. 적당히 식은 차는 마시기 좋을 정도였다.
"이층에 있는 자를 보았느냐?"
"누구를 말씀하시는지?"
그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아니다."
'그 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자였다. 내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초극고수가 분명하다.
대체 누구일까? 낙양에 온 것으로 보아 대상벌이나 무림맹과 관련이 있는 자인가? 모르겠 군.'
그는 다시 채워지는 찻잔을 들여다보며 홀로 사색에 잠겨 있었다.
"명아야."
"네 할아버님"
"아무래도 우리 생각보다 빠르게 무슨 일인가 벌어질지도 모르겠구나. 그러니 너는 지금 즉 시 비상령을 하달하고 아이들을 대기시켜 놓도록 해라."
"갑자기 왜 그러시는지요?"
"으음...... 너는 시키는 대로만 하거라. 그리고 대상벌에 대해서도 한시도 시선을 늦추어서는 안 된다. 명심하거라."
"네."
★ 광마존의 시선은 창밖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가 이곳에 도착한 것은 어젯밤이었다. 그는 이 미 대상벌에 대해 한차례 조사를 마친 뒤였다. 그의 두 눈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과연 자운을 무사히 구출해 낼 수 있을까? 힘들겠지. 더군다나 내가 알고 있던 대상벌의 전력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곳은 알려진 것과는 달리 용담호혈이었다. 결코 나 혼자 서 자운을 구해오기란 쉽지가 않다. 발각되지만 않는다면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천운이 따라 야만 한다. 천향의 처소는 가장 깊숙한 곳에 있고 주위로는 인의 장막이 펼쳐져 있다. 더군 다나 그녀는 이미 무공을 상실한 듯 보여졌고...... 그렇다면 결론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얘긴데...... 후우, 과연 가능할까?'
그는 마음이 점점 무거워져 옴을 느꼈다. 그가 마음먹어 침투하거나 빠져나오지 못할 곳이 란 거의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무공경지를 봤을 때 그의 앞을 당당히 막아설 수 있는 자라고는 세상천지에 몇 명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천향옥봉이었다. 무공 마저 상실한 그녀를 데리고 나오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작은 실수에도 침입은 알려질 테 고 그렇게 될 경우엔 대상벌에 있는 모든 고수들이 벌떼같이 덤벼들 것이 분명했다. 이런 생각을 하니 마음이 답답해져 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죽음은 두렵지 않다. 단지...... 내 목숨은 이미 내 것이 아니기에 지존께 심려를 끼침이 두 렵고 죄스러울 따름이다. 지금 나의 행동에 후회는 없다. 오늘 밤, 내 생명이 다 한다 할지 라도 나는 웃으면서 죽을 수 있다.'
그는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아먹었다. 그는 좀 전에 자신과 시선이 마주쳤던 노인을 떠 올 렸다.
'대단한 자였다. 이런 곳에 그 정도의 고수가 있다니...... 의외로군. 역시 세상은 넓은 것인 가? 더군다나 낙양 전체에는 대상벌도 아니고 무림맹 고수들도 아닌 신비의 고수들이 곳곳 에 포진해 있었다. 허름한 모습으로 위장했으나 내 눈을 속일 수는 없다. 대체 그들의 정체 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이 이곳 낙양에 있는 이유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결국 대상벌을 노리는 자들인가? 그도 아니면...... 모르겠군. 어차피 나와는 상관없는 자들이니 신경 쓸 일 도 아니군.'
그는 차를 음미하며 날이 어둡기만을 기다렸다. 과연 그는 무사히 천향옥봉을 구해낼 수 있 을까?
★ 혈수천자가 방을 나선 것은 어둠이 자락을 풀어낼 때였다. 그는 처소에서 나오자 바로 자신 의 사형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얼굴은 낮과는 달리 붕대로 칭칭 동여매어져 있었고 그 사이로 두 눈만이 암울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한쪽 소매를 펄럭이며 복도를 지나는데 마주 오던 시비들과 맞닥뜨렸다. 그녀들은 고개를 숙이며 전신을 경직시키 고 있었다. 그것을 본 혈수천자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갑자기 멈추어 서서 자신들을 주 시하고 있자 두 시비는 어쩔 줄을 모르고 바들거리며 몸을 떨어대었고 그것이 또한 혈수천 자의 심기를 건드렸다.
"이, 이것들이......"
와락
"꺅"
시비의 머리채를 움켜쥐어 들어올리자 그곳에는 두려움에 절어 있는 이제 스물이나 되었음 직한 여자아이의 얼굴이 보였다.
"크크 왜 내가 징그러우냐? 내가 무서워? 너희들도 내가 우습게 보이는 거냐? 킬킬킬킬 그 렇겠지. 수하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혼자 살아 온 놈이니 너희들 같은 시비들도 날 우습게 보는 건 당연하겠지."
"그, 그렇지가 않사옵니다."
"어디서 말대답을."
"꺅"
머리털을 뽑아버릴 듯이 잡아당기며 한쪽으로 홱 끌어당겼다. 그러자 그녀는 있는 대로 비 명을 뽑아 올리며 한쪽으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또 한 명의 시비는 그것을 보고서는 자기 도 모르게 바닥에 덜퍼덕 주저 않고 말았다.
"에이...... 빌어먹을"
혈수천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시비들에게 화풀이를 해대는 자신이 초라해졌는지 빠르게 그곳 을 벗어나고 있었고 그때까지도 두 시비들은 얼이 빠져 꼼짝 하지 않고 있었다.
콰당
거칠게 문을 박차며 안으로 들어선 혈수천자는 내실에 아무도 없자 의아해졌다.
"대체 어딜 간 거야? 혹시 또 연공실에?"
그는 사형인 초량이 간 곳을 나름대로 생각해보고는 밖으로 사라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