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皇帝)의 검(劍) - 96
"과연...... 빙화가 그것을 원할까? 그리고 네가 악마가 되어버린다면 빙화를 해치려 들지도 모르는데...... 그래도 원하느냐? 빙화에 대한 너의 감정이......"
"입 닥쳐. 더 이상 얘기하지마. 어차피 지금처럼 벌레같이 살아갈 바에야 악마가 되는 게 더 나아. 내 길은 내가 선택한다. 그러니 사형이라도 내 앞을 막아선다면 용서하지 않아. 날 도 와줄 수 없다면 잠자코 있어. 내가 어떻게 하는지 보고나 있으라고."
혈수천자는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려 세웠다. 밖으로 나가려는 것 같았다. 막 발을 떼어가 던 그를 향해 토해진 초량의 말이 그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역시나 넌 어리석구나. 그 비급이 네게 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과연 네가 무사할 수 있을 까? 바보 같은 놈."
"뭐, 뭐라고?"
그러고 보니 초량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좋다. 네가 정녕 그것을 익히고자 한다면 나도 말리지는 않겠다. 대신 나와 한가지만 약속 해 다오."
혈수천자는 돌아서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초량의 당부가 이어졌다.
"무슨 일이 있어도 8성 이상은 익히지 않겠다고 약속해다오. 그렇게 하겠다면...... 이 연공 실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해 주마."
진정 의외의 제안이었다. 끝까지 막아서리라 짐작했던 사형이 그런 제안을 해 오자 혈수천 자는 한참을 망설였다.
'하긴 어차피 다른 곳에서는 검황의 눈을 피하기는 힘들 거다. 이곳이야말로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고 도법을 수련할 수 있는 안전지대일지도......'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혈수천자는 돌아섰다. 사형을 쳐다보는 그의 눈에는 복잡한 심경이 드러나 있었다. 초량은 한 숨을 내쉬었다.
'결국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단 말인가? 저 녀석은 빙화의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되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어떻게 해서라도 도법을 완성하려 할 것이다. 이왕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차라리 내 품 아래 두는 게 나을지도......'
★ 어둠을 틈타 대상벌 안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그림자의 몸놀림은 바람인 듯, 흘러 다니는 안 개인양 그 형체가 분명치 않았다.
스스스스
과연 누가 있어 이것을 사람의 움직임이라 하랴?
'으음...... 자운에게 접근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문제는 그녀를 어떻게 데리고 나오느냐는 거다. 그녀를 구출해 나오기 위해서는 우선 그녀를 감시하고 있는 눈길들을 잠재워야 한다.
전각을 빠져 나오는데 까지 최소한 서른 명 이상은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어디까지 나 들키지 않았을 때의 계산이다. 만약 들킨다면 생명은 장담하지 못한다.'
광마존은 극도로 긴장했다. 한 번의 실수로 자신은 물론이요 천향옥봉의 생명까지 위험해 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제 이미 들어와 조사를 마친 이후였던지라 헤매지는 않았다. 곧 장 목표한 지점으로 이동해 갔다. 역시 매복자들은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들이 광마 존을 발견해 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천마잠형술을 극성으로 전개하며 전각의 음 영만을 골라서 이동해 갔다.
'매복하고 있는 놈들의 위치가 어제와 별반 다르지 않군. 그나마 다행이구나.'
전각 내로 스며들어간 광마존은 긴 복도를 따라 천장을 타고 이동했다. 그의 밑으로 이 전 각에 배속된 시비들로 보이는 여자들이 지나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시비들이 지나간 뒤에 도 한참이나 앞으로 전진해갔다. 그가 몸을 멈춘 곳은 복도의 막다른 면을 차지하고 있는 방문 앞이었다. 여전히 그는 천장에 몸을 붙인 채 안의 동정을 살폈다.
'지붕 위에 다섯 놈! 천장에 두 놈! 벽면의 공간 안에 두 명, 바닥에 세 명이 숨어 있군. 역 시 그녀는 철저하게 감시를 받고 있구나.'
그는 어떤 식으로 그녀를 구출해 낼지 다시 한 번 꼼꼼하게 되짚어 보았다. 한치도 어긋남 이 없이 신속하게 처리해야 그나마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
'반각 안에 그녀를 데리고 전각을 빠져나가야 한다. 그리고 대상벌을 벗어나는데 일각......
문제는 처리한 시체들이다. 저 감시하고 있는 놈들을 죽이지 않고는 그녀를 데리고 나갈 수 없다. 만약 시체들이 생각보다 빨리 발견된다면 일은 걷잡을 수 없다. 후우......'
그는 내심으로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바로 그때였다. 저쪽 복도 끝에서 누군가 다 가오는 인기척이 포착되었다.
'이런 제길......'
시비 둘과 한 명의 흑의무사였다. 그들은 곧장 방문 앞까지 오더니 그들 중 한 명의 시비가 입을 열어 안에 있을 천향옥봉에게 고하고 있었다.
"소저,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안에서 별다른 응답이 없자 시비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삼인은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문을 닫고 사라져 가는 모습을 광마존은 멀건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그는 청각을 돋우어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했다.
"소저. 잠시 저와 동행 하셔야 겠습니다."
흑의무사의 목소리인 듯 했다. 그러자 그 뒤를 이어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를 동행하자는 거죠?"
"가보시면 압니다."
"누구의 명으로 온 것이죠?"
그녀는 집요하게 질문했다.
"저를 따라 가시죠. 소저를 만나기를 원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전...... 태공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아요. 그 분이 보냈나요?"
잠시 말이 끊어지는 듯 했고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것 같았다. 광마존은 어찌할까를 망설였 다. 놈을 해치우고 주변에서 감시하는 놈들도 한꺼번에 죽일 수는 있었다. 단지 그렇게 할 경우 약간의 소란은 피할 수 없을 테고 단지 그것만으로도 발각될 가능성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 없이 좀더 기다리기로 했다.
"태공께서 보내신 것은 아닙니다만......"
"그럼, 저는 갈 수 없어요. 가서 태공의 허락을 맡아서 오세요."
그녀는 포로의 신분이었음에도 여전히 당당한 태도였다. 광마존의 입가에 미소가 스쳤다.
"가셔야 합니다. 저로서는 소저를 완력을 동원해서라도 모셔 가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태공 께는 나중에 보고를 올리도록 하죠."
또 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광마존은 그녀가 따라가지 않기를 빌었다.
"좋아요."
'이런. 일이 복잡해지는데......'
잠시 후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좀 전에 들어간 세 명과 또 한 명의 모습이 보였다. 광마 존은 너무 반가운 나머지 하마터면 그녀의 이름을 소리내어 부를 뻔하였다. 그는 그들이 가 는 방향을 따라 천장을 타고 조심스럽게 이동해갔다.
[자운. 나요.]
부르르르
"소저 왜 그러시는지요?"
천향의 옆에서 그녀를 시중들며 따르던 두 명의 시비 중 하나가 급작스럽게 걸음을 멈추며 그녀가 몸을 경련하며 떨자 놀라 물은 것이다. 그녀는 그러나 역시나 노련했다.
"아니에요. 그냥 몸이 안 좋은지 한기가 느껴져서요."
[자운. 지금 나는 근처에 와 있소. 현재 그대가 내공을 모두 잃어버려 전음을 펼치지 못한 다는 것을 알고 있소. 지금 당신을 구출하겠소. 그 동안 고생이 심했겠구려.]
천향옥봉은 정말이지 눈물이라도 쏟을 듯 했다. 꿈에서라도 듣기를 희망하던 정인의 목소리 가 환청인양 들려왔고 그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사지에 들어선 것이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의 일이란 것을 알게 되자 감격에 겨워 복받쳐 왔다.
"잠깐만요."
자운이 갑자기 흑의무사를 불러 세우자 그는 의아하여 돌아섰다.
'아니? 왜 그러지?'
놀라기는 광마존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몸이 좋지 않군요. 다른 때에 가면 안 될까요? 금방 좋아질 듯 한데......"
"소저 갑자기 왜 또 이러십니까?"
"아, 알았어요. 그냥 가죠."
'저 말은 나더러 들으라는 소리가 분명하구나.'
[알았소. 자운. 혹시 그대의 말은 지금보다 더 나은 기회가 곧 있을거란 말이오?]
천향옥봉은 걸어가는 중에 미세하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그녀의 그런 모습을 보고 이상히 여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으음. 알았소.]
할 수 없이 광마존은 그들 일행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전각을 벗어나자 전각사이를 이어주 는 청강석으로 된 길을 따라 일행들은 이동해갔다. 광마존은 주위를 세심히 살폈다. 전각을 완전히 벗어났다 여겨지자 매복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흑의무사는 꽤 먼 곳을 택해 가는 지 바로 근처에 보이는 전각 쪽이 아닌 다른 곳으로 이들을 안내해 갔다. 광마존은 조심스 레 그들을 따르며 자운이 신호를 보내주기만을 기다렸다.
[자운. 그대는 이곳의 상황을 잘 알 터이니 적당한 곳이 나오면 바로 신호를 보내주시오.]
역시 그녀는 또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성미 급한 광마존의 평소 성격에 비추어 지금의 상 황은 대단히 조심스런 결정이었다. 무턱대고 일을 저지르고 보는 것이 아니라 최대한 유리 한 상황에서 탈출의 가능성을 높이고자 하는 것이리라. 하나의 전각을 끼고 돌아가는 곳이 었다. 다른 곳에 비해 반대쪽이 작은 숲으로 되어 있었고 인적이 상대적으로 드문 곳이었 다. 천향옥봉의 눈에서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바로 지금이에요."
두 시비와 앞서가던 흑의무사는 느닷없는 그녀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나 그런 감정 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픽
세 명은 거의 동시라 할 만큼 옆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내 장내에는 광마존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는 해후를 만끽할 생각은 애초에 없는지 서둘러 그들을 숲 속으로 던져 놓기 바빴다.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급히 그녀 곁으로 다가선 광마존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나도 다 알고 있소. 지금은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먼저 여기를 빠져나갑시다.]
"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군요."
[무슨 소리요? 죽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