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皇帝)의 검(劍) - 98
그는 다가오는 놈의 머리통을 오른발로 짓밟으며 몸을 띄우는가 했더니 곧장 허공으로 도약 하며 직선으로 공간을 이동해갔다. 이것은 위험천만한 방법이었다. 포위망이 단지 한 겹에 불과하다면 손쉽게 빠져나갈 수 있겠으나 지금의 포위망은 어디까지 이어졌는지도 모를 정 도로 넓었다. 그런 그들의 위로 뛰어 넘어가 봤자 공격은 피할 수 없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공격에 대해 거의 무방비 상태나 마찬가지일 뿐만 아니라 방어하기도 수월치 않은 법이다.
그럼에도 그는 더 이상 시간만 허비하며 망설이고 있을 수가 없었기에 이 방법을 택한 것이 다. 갈라진 고목의 옆에 있는 또 하나의 나무위로 쏜살같이 올라섰으며 가지 끝을 밟고 또 다시 도약해갔다. 그런 그에게 쏟아지는 것은 화살이나 암기들이었지만 그다지 위력이 없었 기에 손을 한 두 번 휘젓는 것으로도 방비할 수 있었다.
피융
뒤통수 쪽에서 느껴지는 살기를 감지하자 광마존은 습관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챙
'으음?'
그는 손아귀에 은은하게 전해지는 충격을 느끼고는 심중에 놀람을 나타내었다. 대체 어떤 놈이 이 정도의 위력을 지닌 화살을 날린단 말인가? 그의 눈은 빠르게 그 놈을 찾아갔다.
저 멀리서 몇 명의 노인들이 바람을 가르며 공간을 단축해 오는 것이 비치고 있었다. 광마 존은 개의치 않고 허공에 멈추었던 몸을 재차 뽑아 올렸다.
파앙
"이것은?"
이번엔 앞쪽이었다. 그가 한 눈 판 사이에 다가선 것으로 짐작되는 세 명의 늙은이들이 다 짜고짜 공격을 해 댄 것이다. 검을 수직으로 세워서 황급하게 내리쳤다. 검강이 앞으로 쭉 뻗어가며 그들의 장력과 부딪힌다.
쾅
광마존의 몸이 움찔하며 뒤로 날려갔다. 그래봤자 몇 장에 불과했지만 아무리 불의의 기습 에 미처 대비하지 못해서였다지만 그로서는 보기 드물게 만나는 강자들이었다.
'호, 이것 봐라. 역시 물렁하지만은 않다는 말인가?'
정말이지 품안에 천향옥봉이 없다면 저런 놈들은 일 검에 도륙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는 신중을 기하려 그들의 존재감을 인정하기로 했다. 그는 더 이상 허공에 있지 못하고 바닥으로 내려서야만 했다. 그가 떨어져 내리자 주변에 있던 놈들이 벌떼같이 위로 솟구치며 공격해댔다. 광마존의 얼굴에 비웃음이 서린다.
"이놈들. 역시 네놈들은 개떼습성이 있는 놈들이었구나. 좋다. 이 놈들 모조리 쓸어버리겠 다."
순간 그의 검이 손을 떠났다.
"이기어검이다. 피해라."
누군가의 입에서 토해진 소리가 아니어도 눈이 있으니 모두 보았을테고 자신들로서 감당하 지 못한다고 판단한 놈들이라면, 더군다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이 아깝다면 물러설 것이 틀 림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한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진정 그들은 죽음마저 도외시하는 기계 적인 감정의 소유자들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무모한 일을 할 수 있단 말 인가? 광마존의 검이 빛에 휩싸여 빛을 이끌고 빛처럼, 자신을 향해 튀어 오르는 인영들을 갈라버린 것은 짧다고만 할 수는 없을 지리한 장면을 연출하는 듯도 했다. 그 모든 찰나의 순간들이 시간 안에서 일시적으로 정지한 듯한 모습들 가운데 무리들의 머리와 배와 몸통과 허벅지를 한 순간에 꿰뚫어버렸고 폭죽이 터져 나가듯 그들의 몸은 파편이 되어 대지에 흩 어져 갔다. 피가 튀고 살이 터지며 뼈가 바수어지는 광경인지라 참혹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힘들 지경이었다. 비명도 터져 나오지 않았다. 얼마나 흉폭하고 빠른지 지나쳤다고 느낀 순 간 의식마저 빼앗아 가버린 것이다. 비명은 언제나 산 자의 것이다. 죽은 자는 더 이상 아 픔을 호소하지 못한다. 육신이 있고서야 비명을 지를 수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않겠는 가?
"저, 저것은 혹시 검폭?"
가까이 다가온 노인 중 하나가 부지불식간에 터트린 감탄성인지 신음성인지 성격이 분명치 않은 말이었다.
"검폭이 분명하다."
이기어검으로 펼치는 검폭이라면 그들로서도 감당할 수 없다. 막무가내로 덤벼드는 수하들 보다는 좀더 신중하고 영악하고 자신의 목숨이 언제나 최고덕목의 가치로 자리잡혀 있는 자 들은 때로는 더 강한 자 앞에서 물러설 줄도 아는 위인들이었다. 그들은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이 훌쩍 공간을 넓히며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 사이를 충성심만으로 무장한 충실한 수하들이 메우고 있었다. 광마존의 손이 그들을 가리키자 검은 여전히 빛에 휩싸인 채 그를 중심으로 큰 원을 거리며 돌아갔다. 점점 그 원은 커져 갔으며 그런 가운데 사육된 본능에 충실했던 대상벌의 수하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낙화하고야 말았다. 부서져 가는 영혼들 은 구천을 맴돌다 어디로 떨어질 것인가? 또 다시 우매함에 미련이 남아 인간으로 환생할 것인가? 그것은 누구도 모를 일이었지만 광마존은 언뜻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스스로도 죽을 것이기에 그들의 죽음 앞에 기쁘지도 그렇다고 안타깝지도 않았다. 현실은 그들을 적으로 불러주었고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죽는 관계로 설정해 놓았기에 그 역시나 자신의 역할에 충실할 따름이었다.
검이 광마존의 손에 안착하자 적이란 이름을 지닌 대상벌의 수하들은 잠시의 순간에 느꼈던 절망감 앞에 몸서리치며 떨고 있었다. 스스로 검을 쥐었기에 누굴 탓할까 만은 노력으로도 넘을 수 없는 절대의 위력 앞에서 절망함은 당연했다. 그들의 상식선을 넘어 서 있는 무공 은 그들이 보기에 천신이 하강한 듯 악마가 세상을 어지럽히려 내려온 듯 여겨졌기 때문이 다. 눈앞에 있는 저 자가 정말로 인간이라면 자신들의 보잘것없는 무공이 너무나 천박하게 여겨지지 않겠는가?
"당신은 대체 누구요?"
노인 중 하나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광마존은 자운을 품에서 내려 앞쪽으로 세웠다. 여 전히 그의 품에 반쯤 안기다시피 하고 있었다. 광마존을 좀더 넓게 포위한, 아니 사실은 좀 더 멀찍이서 포위하고 있다는 말이 어울릴 그 들 무리중의 하나가 천향옥봉의 얼굴을 보고 는 부르짖듯 말했다.
"그대는 바로 혈마천의 배신자......"
노인 중 하나가 눈썰미 좋은 녀석의 말을 받았다.
"저 년이 그럼 포로로 있다는 그 년......"
말하다 말고 다물어 버림은 그 역시나 본능에 충실하기 위함이었던가? 광마존의 시선이 자 신에게 머문 것을 느끼고서도 끝까지 그 말을 이어나갈 자신은 없었다. 광마존은 너무 시간 을 지체했다 여겼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개들은 늑대를 포위하는 짓은 하 지 않는다. 그렇지만 굶주린 개떼들은 늑대를 공격하고 그들의 비어버린 속을 채우기에 주 저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상이 호랑이라면 얘기는 틀려지는 것이다. 개떼들이 아무리 굶 주렸다고 한들 호랑이를 공격할 정신나간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굶주림 이전에 호랑이가 지닌 범접치 못할 위압감에 굴복 당하는 것은 개로서 지닌 본능이자 자연의 법칙이기도 하 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인간사회에 적용시킨다 함은 무리가 있겠으나 지금의 상황은 분 명 그런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수천 명의 무사들이 한 명의 호랑이 같은 고수 앞에서 감히 공격하지 못하고 주저하고 있으니 말이다. 지금의 상황은 최소한 표범 정도의 조력자가 나 서지 않는 한 이들의 얼어붙은 심장을 녹이지는 못할 것 같았다. 이런 점에서 어쩌면 표범 이상일지도 모르는 두 마리, 아니 두 명의 인물이 등장하고 있었으니,
화르르륵
옷자락을 날리며 장내에 떨어져 내리는 두 명의 인물이 있었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출발했 으나 한곳에 떨어져 내렸다. 그들은 초량과 검황이었다. 이곳 대상벌에서 최고의 지위를 지 니고 있는 두 명이 동시에 장내에 나타난 것이다. 그들이 장내에 나타나자 광마존도 경계를 하기 시작했다.
"자운! 그대가 왜 거기에 있소?"
초량의 음성은 여전히 부드럽기 그지없었다. 듣는 사람 중에 백이면 백 누구나, 사랑하는 연인사이에서나 할 수 있는 어조로 생각할 정도였다. 천향옥봉은 초량을 똑바로 응시했다.
"저는 태공께 분명히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제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고...... 죽음을 각오 하고서라도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고요. 그 분이 절 데리러 오셨군요."
"하하하하하하"
초량의 웃음은 티 한 점 묻어 있지 않은 맑은 공명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내면을 헤아릴 줄 아는 이들은 그가 얼마나 괴로워하는 지를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렇소? 그럼, 지금 무척 행복하겠구려."
"네 그래요. 전 행복해요. 세상에 나보다 행복한 여자는 드물 거예요. 어떤 여자가 목숨을 건 사랑을 받아보았겠어요? 그런 점에서 저는 무척 행복하답니다. 그리고 이 분이 제 남편 이란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군요."
그녀의 한마디 한마디는 초량의 가슴을 후벼파는 것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얼굴은 훈 훈한 춘풍이 불어오고 불어갔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축하한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태공 대체 뭐 하는 겁니까? 저 년이 보아하니 혈마천의 배신자란 계집이 분명한 것 같건 만......"
그는 더 이상 말을 꺼내놓지 못했다. 초량이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데 상처 입은 야 수의 눈이 저러할까?
'저, 저놈. 어떤 짓도 저지를 수 있는 눈이다. 괜히 성미 돋우었다가는 나랑 붙자고 덤빌지 도 모르겠군. 저 침착하기 그지없는 놈이 저런 모습을 보일 때도 있다니, 그저 이럴 때는 입다물고......'
"흠흠...... 태공께서 할 말이 많으신가 보구려. 마저 하시구려."
초량은 그에게 감사한다는 표시로 고개를 까닥거려 주었다. 그리고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 천향옥봉을 더욱 깊숙한 시선으로 주시하기 시작했다.
"먼저 축하드리오. 그대가 그토록이나 기다리던 정인을 만났으니 나로서도...... 기쁘기 한량 없소이다. 그러나...... 내 개인적으로야 얼마든지 소저와 공자를 축하해주고 싶고 보내드리 고도 싶으나...... 공과사는 구분해야 하는 자리에 있는지라...... 미안하오. 이것은 진심이오."
천향옥봉은 그의 진심을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가 진정 그의 마음을 안다고 한다 면 그것은 어줍잖은 동정에 지나지 않는 것이요. 뻔한 거짓말에 불과하다. 어찌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자들이 서로의 입장을 알 수 있겠는가? 서로를 향해 서지 않고서는 바 로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겠지요."
자운의 말에 이어 광마존이 나섰다.
"그래서 내 앞을 막겠다는 것이냐?"
다짜고짜 반말을 해대는 광마존을 초량은 쳐다보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시선 속에는 자운 이라 불리는 천향옥봉의 모습만이 그득 차 있을 뿐이었다.
"당연하지. 이곳이 네 놈 맘대로 왔다가 맘대로 갈 수 있는 곳이라 여겼단 말인가? 내 분명 히 확언하건데 네 놈은 이곳에서 반드시 죽을 것이다."
더 이상은 인내력의 한계를 느낀 검황이 나서며 한 말이었다. 광마존은 주위를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좀 전에 미친 듯이 덤벼들던 놈들 뒤쪽으로 또 다시 수 천 명의 인원들이 증원 되어 있었고 그들은 결코 좀 전에 그에게 손쉽게 당하기만 하던 무리들과는 다른, 제법 그 럴싸한 기도를 풍기는, 고수라고 불릴 만한 놈들이었다. 그런 점에서 그가 탈출할 수 있는 확률은 그 만큼 줄어든 셈이었다. 결국은 이들의 대가리인 것 같은 저 두 놈을 해치우지 않 고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었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 쉬었다. 그렇지만 자운이 실망 할 것이 두려워 감히 입 밖으로 내뱉지는 못했다. 여전히 초량의 시선은 자운에게 못 박힌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광마존은 기분이 그리 썩 좋지는 않았다. 자신의 여자인 자운을 쳐 다보는 것도 부족해 자운이 스스로 남편이라 했음에도 자신은 안중에도 없이 그녀만을 뚫어 질 듯이 쳐다보고 있지 않은가?
'뭐, 저런 놈이 다 있지?'
그는 분위기로 보아 새로이 장내에 나타난 두 놈이 대등한 지위에 있거나 늙은 놈이 젊은 놈을 어려워한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이 자신이 불리한 입장에 있을 때는 결국 적 진의 수장을 베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되었고 그런 판단이 서자 곧 바로 움직였다. 그는 무 릎도 굽히지 않고 순식간에 앞으로 돌진해 갔다. 그러나 그는 곧 바로 뒤로 퉁기듯 물러나 야만 했다. 기분 나쁜 늙은 놈이 그가 움직이자 곧 바로 천향에게로 다가서는 듯한 몸짓을 취했기 때문이다.
'저 놈은 아주 야비한 놈이다. 그렇지만...... 전세를 이용할 줄 아는 영악한 놈이기도 하다.
이것 어려운 싸움이 되겠구나.'
결국은 자운이 있는 한 그는 섣불리 공격하거나 피할 수도 없다. 그녀를 품안에 안고서 저 둘을 한꺼번에 상대하기는 그 조차 벅차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직접적으로 부딪혀 본 것 은 아니지만 그 둘은 지금까지 상대한 그 어떤 자들보다 강한 놈들이 분명했다. 비교적 격 전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일곱 늙은이들더 어느새 초량과 검황 옆으로 다가와 있 었다. 그들은 천황부의 장로들 중에 이번에 검황이 데려온 7인들이었다. 그들 역시나 그리 만만치 않은 자들이었으나 광마존의 극강한 무위에 눌려 있는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