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검 9권
49인의 중원 용사
-무황벌, 중원의 식탁에 둘러앉다-
혈마의 말에 장내는 싸늘하게 냉각되어간다. 영원한 마의 조종이라 불리는 천마! 그 이름 이 주는 무게감은 이들 새외 무림인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혈마는 전신을 경련하며 쉽 사리 격정에서 빠져 나오지 못했다. 붉게 물든 시선에 살기와 더불어 마기가 동시에 뿜어져 나왔다. 그는 거친 호흡을 토해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어찌 이곳에 있단 말이냐? 섭천교의 유일한 후계자인 네 놈이...
본교의 천적인 네 놈이 어찌 이 자리에 있지? 더군다나 그럴 듯한 감투까지 쓰고서.... 이놈!
아직도 그 날의 원한을 잊지 못하고 있는데.... 크크크크, 잘 되었다. 이 자리에서 널 죽이리 라. 애써 찾아갈 수고를 덜어 주었으니 고맙다 해야 하나. 내 너를 죽여 그간의 원한을 갚 아야겠다."
혈마는 지옥마황이 천마라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반면 마전주와 내밀원주는 혈마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정이었고 교주가 들어앉아 있을 가마 안에서는 그 어떠한 반응도 없었다.
장내 인물들은 이 돌발적인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그들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는 것은 놀라움과 호기심 때문이기도 했지만 두려움을 끝끝내 감추지 못한 때 문이기도 했다.
천마는 붉은 머리털을 출렁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보일 듯 말 듯 걸렸으나 의미를 유추하기는 어려웠다. 그는 혈마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유연한 시선은 거기서 당혹감이라고는 찾아보려야 찾아 볼 수 없 었다.
"역시..... 넌 나를 알아보는군. 나 또한 널 즉시 알아보았지. 그래, 네 말대로 난 천마다. 당 시에 네 부활을 막고 또다시 기나긴 잠을 자게 했던 그 천마가 바로 나다."
"오오!"
"정말 천마였다니...."
"으음...."
장내는 순간 또 다른 의미의 흥분으로 덮여갔다. 본인이 시인을 한 이상 지옥마황이 천마의 화신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자연스럽지 못했다. 천마가 아무렇 지도 않게 정체를 드러냈던 거이다. 혈마는 묘한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그렇지만 얼굴 전체 를 뒤덮은 살기만은 아직 여전했다.
"대단한 자신감이구나. 어떻게 네가 이 세상에 다시 출현했는지는 모르지만 이 자리가 그리 만만한 자리는 아닐 게다. 크크크... 다시 기어 나온걸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그럴 수 있으면 그래 보든가. 예전에도 그랬지만 넌 내상대가 아니지. 괜히 헛 힘 써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이다. 넌 영원히 내 뒤꽁무니나 쫓아야 한다. 아직도 그걸 깨닫지 못했다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야."
"천만에! 그때와 지금은 다르다. 이제야말로 완전한 각성을 이룬 이상엔 너 정도는....."
"천번 만번 각성을 한다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 한심한! 괜히 내가 천마인 줄 아 는가. 시험해 보고 싶으면 해봐라. 대신..... 세상 구경은 더 이상 할 생각을 말아야 할 것이 다."
혈마는 자신감 넘치는 대답에 약이 올랐다. 물론 그의 말대로 무림에서 차지하는 비중으로 따지자면 상대가 될 리 만무했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다. 몸을 휩싸고 돌던 분노는 이제 더 이상 억눌러 둘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조금만 더 건드리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는 서서히 힘을 집중해 갔고, 상대의 반응을 유심히 주의하던 천마 역시 신중해져 간다.
둘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몰랐다. 천마에 대한 혈마의 감정은 억겁의 세월을 갖다 놓아도 사그러들 수 없는 것이었다.
천장 만장 치솟은 살기는 죽어서도 꺼지지 않을 듯했다.
마전주와 내밀원주의 얼굴 또한 이 순간 묘해져 있었다. 무림 제패의 공로자이자 동지였던 상대였다. 그가 자신들로서도 융합될 수 없는 필생의 적으로 밝혀졌으니 아무리 나이를 많 이 먹었다 해도 감정의 기복마저 숨기지는 못한다.
장내 인물들 대부분의 얼굴을 서서히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적개심 정도였다. 그들이야 그 와 무슨 특별한 원한 같은 게 있을 리 없었지만 얼마 전 등장한 천마교와 그들의 위력만으 로도 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 천마교의 창시자인 천마 역시나 적이 분명했고, 마주친 이상 죽여야 할 상대였다.
그들 얼굴엔 또 감출 수 없는 긴장감도 보였다. 천마에 대한 전설 중 열에 하나만 사실이 어도 그 무공이란 하늘을 뒤덮고도 남을 것이었다. 이곳이 자신들의 터전이고, 교의 핵심 고수들이 모두 포진하고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천마의 받아치는 말이 끝나고 혈마가 움직여 간 것은 거의 동시였다.
피슉 인간의 시력으로는 분간조차 할 수 없는 전광석화 같은 몸놀림에 이어 대전을 울리게 하는 폭발음이 연이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천마의 몸 역시 일순간 모두의 시선에서 사라졌다. 두 사람은 분명 대결을 시작한 것 같 건만 그 형체는 쉽사리 잡히지 않았다. 공수를 주고받는 형태가 기존 무공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을 초월해 있었다.
혈마는 전신을 도로 변형시킨 채 혈영뇌전도법을 펼치고 있었고, 천마 역시나 잠형술로 몸 을 숨긴 채 무형 검을 만들어내 공격했다. 두 사람의 공격은 쉽게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주 변에 있던 자들이 한쪽으로 다급하게 물러서고, 마전주와 내밀 원주만이 가마를 보호하며 격전을 유심히 살폈다.
"크카카카, 역시 천마구나. 예전에도 이 무형 검에 내가 당했었다만.....이제는 그리 만만하 지는 않을 거다."
혈마의 목소리는 점차 마기에 젖어 본연의 이지를 잃어 가는 듯했다. 지나치게 흥분한 탓 인지 목소리는 희열에 들떠 있었다. 이에 반해 천마의 목소리는 여전히 잔잔하였다.
"혈영뇌전도법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위협이 될 수 있지만 내게는 얘들 장난에 지나지 않 지. 그걸 아직도 깨닫지 못하다니 한심하군."
천마의 앞에는 어느새 무형검 십여 개가 형체를 이루고 정렬해 있었고, 혈마의 도 또한 허 공에서 더욱 붉은 빛을 발하며 뇌전을 일으켰다. 탄자지간에 쏘아져 나가 모든 것을 파괴시 키는 위력은 두 사람 모두에게서 비롯될 것이다. 장내는 모두 숨죽이고 곧 벌어질 대결에 집중했다.
그때 잠자코 사태만 살피던 가마 안에서 혈마의 행동을 제지하는 엄중한 소리가 흘러나온 다.
"호교대법사는 멈추시오."
잔잔한 음성은 감히 범접치 못할 위엄이 스며 있었다. 이 자리의 그 누구도 그 소리를 무 시할 수 있는 자는 없었다. 호교대법사인 혈마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까마득한 옛날부 터 호교대법사였다고는 해도 교주의 권위마저 무시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막 움직여가던 혈마의 몸이 멈칫거린다.
천마는 조금 의외라는 얼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럴 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표정이 엿보이기도 했다. 모든 시선들이 가마로 집중되자 안에서는 예의 신비한 목소리가 음률처럼 잔잔하게 흘러나온다.
"천마"
"말하라"
이제 모든 것이 들통난 마당에 교주라고 해서 존대를 할 천마가 아니었다.
교주나 혈마, 두 명의 전주 역시나 이런 태도에 별달리 생각하는 눈치가 아닌 듯했다. 하 기야 지금에 와서 그런 것이 문제될 것은 없지만 뻔뻔하기로 치자면 역시 천마를 당할 자가 없음을 다시 한 번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우리 자리를 옮겨서 좀더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누어 볼 생각은 없는가? 분명히 있을 법 한 데."
"으음···."
"교주,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요? 저놈과는 대화 따위가 무의미하다는 걸 모른단 말이 요?"
혈마는 길길이 날뛰었다. 마전주와 내밀 원주는 어린아이처럼 흥분하는 태도에 눈살을 찌 푸렸다. 그렇지만 그들 역시 교주의 반응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우지는 못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교주는 이렇지 않았다. 매사에 신중하긴 하지만 이런 일까지 신중을 기할 사람이 아니 었다. 저기라면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그가 조금은 뜻밖의 제안을 하고 나선 것이다.
천마는 시종 담담한 신색으로 일관하며 교주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좋소, 이 자리서 결말을 보자고 해도 망설일 이유가 없지만 대화를 하자면 그 또한 거부 할 내가 아니오."
조금은 어투가 달라져 있었다. 그러자 가마 안에서 호탕한 대소가 터져 나온다.
"하하하하, 역시 무림사 최고의 마존이라 그런지 여유가 있구려."
"흐음."
스스스스 가마가 저절로 허공에 떠오르며 대전 밖으로 흘러 나가자 그 뒤를 마전주와 내밀원주, 천 마가 따른다.
두 사람은 천마를 경계했다. 상대가 언제 손을 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뒤에 혼자 남 은 혈마만이 붉게 충혈된 두 눈을 희번덕이며 제 분을 못 이겨 씩씩대었다. 눈앞에서 일행 들이 사라지자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도 뒤를 좇아 빠르게 대전을 빠져나간다.
상황이 생각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자 대전에 남은 나머지 인물들은 이 경악할 사태를 두고 의견을 나누느라 웅성거렸다. 다만 적루아만이 혈마가 사라진 곳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배시시 웃고만 있었다.
긴 통로를 거쳐 그들이 도착한 곳은 무황성 최심처였다. 이곳은 무황이 교주를 위해 마련 해 둔 곳이기도 했다. 대전이라 부르기엔 작지만 방이라 할 수 없을 거대한 내실 가운데 가 마가 자리하고 그 주위로 천마와 마전주, 내밀원주가 앉았다. 가장 늦게 들어온 혈마는 내 실로 접어들며 그 즉시 고함을 질렀다.
"저놈과 한 자리에 마주 앉을 수는 없소."
"끄응"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 고집 부리지 말고 거기 앉으시오."
교주의 말에 혈마는 잠시 망설이는 듯하다가 천마 맞은편에 가서 철퍼덕 앉고야 말았다.
그는 천마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천마는 그런 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줄곧 가마에만 머물렀다.
씩씩거리는 혈마의 거친 호흡소리만 없다면 실내는 텅 빈 것처럼 조용할 것이었다. 이런 침묵에서도 천마의 태도에는 여유가 넘친다.
가마 안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 소리가 조금만 늦었더라도 혈마가 다시 발작 을 일으킬 뻔했다.
"우리 좀더 솔직해지는 게 어떻겠소. 내가 알기로 그대 또한 우리와 무관한 사이는 아니 고…. 반목해야 할 이유도 없는 걸로 알고 있는데."
반목해야 할 이유가 없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혈마를 비롯해 나머지 두 전주도 교수 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 무관한 사이가 아니다란 말이 주는 여운이 꽤나 오랫동안 갈 것 같았다.
"흐음, 역시 교주는 알고 있었구려."
"당연히 알고 있었소. 나 또한 그 사실을 알고는 조금은 의외였소. 일월교의 생사대적이라 할 수 있는 섭천교의 유일한 후계자인 그대와 우리가 그런 관계로 묶여 있다는 사실이…….
천마!"
"말하시오."
"당신이 우리를 찾아 온 시기가 좀 늦은 감이 있었소. 내가 그 사실을 안 것이 꽤나 되었 던 것 같은데 말이오. 대체 어찌 된 거요?"
"그건……사정이 있었소. 그리고 무황벌의 배후가 확실하게 그대들인지 확신도 서지 않았 고."
"흐음, 그렇다면 더는 묻지 않겠소. 그렇지만 이젠 힘을 합해야 할 때가 오지 않았소?"
혈마와 두 전주의 얼굴은 풀 길 없는 의문으로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있다는 표정들이었 다. 전혀 예기치 못했던 방향으로 급선회해 가는 상황이 그들로서도 받아들이기가 심히 괴 로웠다. 특히 혈마는 당장이라도 살수를 전개해야 직성이 풀리겠단 표정이었고, 지금의 이 런 묘한 대화를 용납할 수 없어 했다.
"교주,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요? 저런 놈에게 힘을 합하자고 한 거요? 대체 그 이유가 뭐요? 아니, 그 이유가 뭐든 난 받아들일 수 없소. 저 놈과 나, 둘 중에 하나는 이 자리에서 죽어야 하오. 반드시!!"
평소 교주를 대하는 태도와 너무도 달라 이 정도 수준이면 거의 과격한 것이나 다름없었 다. 내밀원주와 전주는 단 한 번도 그가 이러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 또한 잠시 넋을 잃고 쳐다본다. 궁금하긴 매한가지였다.
혈마가 자리를 벅차고 몸을 일으키자 천마를 제외한 두 사람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가마 쪽만 쳐다보기 바쁘다. 내밀원주는 혈마의 태도가 결코 위협이나 하자는 것이 아님을 직감 하고는 급히 입을 열었다.
"교주, 대법사의 말이 맞소. 어서 타당한 이유를 설명해 주시오. 어이해 그런 말을 하시는 거요?"
그렇지만 더 이상 가마 안에서 말이 나오지는 않았다. 그는 아마도 천마의 다음 말을 기다 리고 있는 듯했다. 천마는 장내의 분위기가 어떤지는 관심도 없었다. 그는 무언가에 온통 정신이 빼앗겨 있는 것 같았다. 가마 안에서 다시 흘러나온 말은 장내 인물들을 더욱 혼란 스럽게 만들고야 말았다.
"천마는……따지고 보면 우리와 남일 수 없다. 자세한 건 말할 수 없지만 그렇게만 알고 있으면 된다."
교주의 말은 점점 더 물음표만 낳고 조바심만 나게 만들었다. 말할 수 없다니……. 그리고 그렇게만 알고 있으라니 숨이 막힐 것처럼 갑갑했다. 그들로서도 최소한의 알 권리는 있었 고, 이것이 충족되지 않는 한 현 상황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기는 힘들었다.
"어서 말해 보시오. 어쩔 참이오? 이제는 색깔을 분명히 해야 하는 것 아니오? 만약 계속 망설이고 어쩡쩡한 자세를 견지한다면 그쪽의 의견이 그런 걸로 판단할 수밖에 업소."
천마의 입가가 한쪽으로 슬쩍 말려 올라갔다 내려온다. 모든 게 마땅찮다는 표정이었다.
"난…‥아직 모든 걸 결정한 것은 아니오. 그렇지만 내가 당신들의 편에 서 있음은 분명하 오. 그러니 내게 이래라 저래라 하지말고 기다리시오. 어차피 나 하나쯤 없어도 대세엔 별 영향이 없을 테니……."
"그 말은 맞소. 천마, 당신이 우리 앞을 막아서지 않는 것만 해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지.
굳이 우리 일을 나서서 해달라고는 말하고 싶지 않소만……그런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고도 그대가 무사할 수 있을 거라고 보지 않소이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난, 그게 좀 걱정이 돼 서 말이오."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오."
혈마는 두 사람이 주고받는 대화 중에 단 한마디도 끼어 들지 못했다. 이것이 억울하고 분 한 것일까. 그건 아니었다. 어쨌든 지금 교주의 말을 종합해 보면 천마를 죽여야 한다는 자 신의 생각은 씨도 먹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미묘한 상황 자체를 혈마는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무슨 소리들을 하고 있는 거지? 저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이 우리편이란 건가? 그리고 교주의 말은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뜻이지 않은가? 대체 내가 모르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야?'
거품처럼 부푸는 혈마의 내심 따위는 교주에겐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는 한마디 일러두지 않을 수 없었다.
"잘 들으시오. 세 사람은 천마를 우리의 조력자로 인정하고 실례를 범하는 일이 없었으면 하오. 만약 이를 어기고 경솔하게 행동하는 이가 있다면…… 내 교주로서 결코 이를 묵과하 지 않을 거요."
'빌어먹을 교주가 저렇게까지 얘기했다면 이미 끝장난 일이다.'
혈마는 교주를 충심으로 섬겼다. 그가 단순히 일월교를 총괄하는 교주라는 이유도 있었지 만 그의 강함과 지혜로움을 스스로도 인정했기 때문이다. 솔직히 내밀원주와 마전주는 그다 지 눈에 차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생각하는 그들은 풋내기 정도에 불과했다.
"알겠습니다."
"명심하겠소."
내밀원주와 마전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인정하고 나섰지만 혈마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대법사께서는 왜 아무 말도 없으시오? 설마 인정하지 않겠다는 거요? 해묵은 감정으로 대 사를 그르치겠다는 거요!"
순간 혈마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지고야 만다. 어찌 그걸 해묵은 감정 정도로 치부할 수 있 다는 말인가, 라는 심정이었다. 그렇다고 교주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싶지는 않았다.
"알겠소. 그렇지만…… 천마가 우리편이라는 것을 어찌 믿을 수 있소? 이놈의 후예들은 중 원 편을 들고 있소이다. 그런데 이놈이 여기 웃는 얼굴로 있어 본들 어찌 같은 길을 걷는 놈이라 할 수 있겠냔 말이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우리들 중 그 누구도 용납하지 못할 겁니다. 나 또한 마찬가집니다.
또 하나, 그놈의 섭천교 때문에 번번이 본교의 대업이 방해를 받았던 걸 잊지 마셨으면 하 오. 내가 아는 천마는 결코 우리와 하나가 될 수 없는 놈이오. 지금 잠시 우리와 같은 길을 가겠다 한다지만 그건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단 말이외다. 만약 나중에 가서 그가 배신을 하 면 그땐 어쩔 거요?"
"그건 염려 마시오. 그럴 일은 만에 하나라도 없으니. 그는…… 결코 그럴 수 없소. 다 이 유가 있어 그러는 거니 나중에 모든 의문이 풀릴 거요. 그러니 날 믿고 이 정도 선에서 물 러서 줬으면 좋겠소."
교주의 말은 결정적이었다. 내밀원주와 마전주이 얼굴에서 의문이 사라진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혈마는 여전히 물고 늘어졌다.
"그 이유가 뭐요?"
"말할 수 없다고 하지 않았나! 혈마, 그대가 감히 내 권위에 도전하는 건가!"
싸늘한 음성, 뒤이어 가마 안에서 비롯된 기운은 장내를 휘돌며 혈마를 압박했다. 급작스 러운 교주의 태도에 혈마는 식은땀을 흘렸다.
"알겠소. 우매하고 어리석은 본인은 이만 나가 보겠소."
그 말을 끝으로 혈마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내밀원주와 마전주 역시나 고개만 까닥거리고는 밖으로 사라졌다. 이제 실내엔 단 두 사람 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오. 저들이 모든 걸 알게 되면 과연 어떻게 반응할지도 모르겠고. 아직은 인간의 감정이 남아 있는 위인들이라……."
천마는 상대의 말에 묵직한 침음성을 토했다.
"난 교주를 조금은 이해할 수 없소."
"뭐가 말이요"
"사실 따지고 보면 내가 완전히 당신들의 편이란 확신은 없지 않소?"
"그야 그렇지요."
"그런데 날 믿는단 말이오? 어찌 보면 품안에 비수를 받아들이는 어리석은 일일 수도 있건 만."
"하하하하. 난 당신을 믿는 게 아니오. 나나 당신이나 스스로 모든 걸 결정할 수 없는 입장 이지 않소? 내가 믿는 건 당신의 배후가 지닌 의지요. 그대를 보낸 것이 우리 일을 방해하 라고 보냈을 리는 없을 거요. 물론 아직까지는 그 입장이 채 정리되지 않았을 수도 있지 만……."
'으음. 저놈은 많은 걸 알고 있구나. 대체 저놈의 위치가 어느 정도이기에 그런 것마저 알 고 있단 말인가?'
"본 계와 그대의 천주는 사실 여러 번 회동을 했었소. 이런 일이 대외적으로 알려진 적은 없지만 엄연한 사실이오. 그대가 섬기는 천주의 의향이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오직 당신의 행동으로만 천주의 의도를 판단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시오. 당신이나 나나 개인 의 주관이나 의지 같은 건 필요 없는 존재들이지 않소? 무엇을 선택하든 그대의 자유이지만 당신이 취한 행동에 대해서만은 책임을 져야 할거요. 이건 나 또한 마찬가지요. 나 또한 지 난날 본교와 있었던 불편한 관계를 알고 있소. 그대가 우리와 한배를 타길 희망한다면 그 일은 애초에 있지도 않았던 것이 되어 내 기억에서도 사라지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난 최선을 다해서 그대를 죽일 거요. 가능하다면 난 그대를 인간으로서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영혼을 소멸시키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을 거요. 잘 판단해서 결정하시오."
교주의 말을 듣는 내내 천마에게선 표정의 변화라고는 찾아 볼 수 없었다.
"이만 나가 봐도 되겠소?"
한참이 지나고 나서 한 말이라고는 이게 전부였다. 교주 역시나 짧게 대답했다.
"그러시오."
서슴없이 돌아서 나가는 천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천지를 떠나 보낼 듯 내리는 비도 멈추는 때가 있기 마련이고, 한여름 찌는 폭염도 시들해 지기 마련이다. 때는 절로 시절을 좇아 옷을 갈아입고, 그 모습은 여러 갈래로 삶을 달리 조명한다.
금방이라도 중원의 역사가 마감할 것처럼 여겨지던 긴박감도 시간이 지나며 느슨해졌다.
난을 피해 산을 찾았던 자들도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어디에서도 중원무림인 들을 찾아볼 수는 없었으니.
아침저녁으로 우짖는 새소리는 어제와 다름없건만 소리를 듣는 자들의 심사는 예전 같지 않았다.
중원 땅에 발을 대고 사는 자들의 시선은 일제히 무창으로 향했다. 무황성이 각 무왕부주 들을 불러들인 지도 꽤나 지났다. 그들은 다시금 무왕부로 돌아가지 못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중원인들은 염려와 근심 섞인 시선으로 무왕성을 주시했다.
금방이라도 군대를 동원할 것 같던 황실은 잠잠히 사태를 관망했다. 더 이상 민간인들의 피해가 전해지지는 않았으나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중원무림맹과 신수궁, 야림과 천마교의 공격이 있는 지도 몇 달이 흘러갔다. 매섭고 찬 삭 풍이 북으로부터 몰아쳐 중원 대륙을 할퀴어댔고, 사람들은 딱딱한 각(殼)과 같은 자신만의 거처 속으로 스스로를 감금시켰다.
거리는 한산했으며, 그나마 드문드문 오가는 행인들은 굼벵이처럼 몸을 오므려 골목으로 사라져 갔다. 어느 거리든 이런 스산한 전경만이 전부였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살풍경이기도 했다. 이 겨울을 무사히 넘기기가 쉽지 않으리란 예감은 서서히 믿 음으로 굳어졌다.
예감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 각 무왕부의 움직임이 은밀한 가운데 분주해져 갔다. 사람 들의 관심은 또다시 시작될 혈난의 강도에 맞춰졌고, 차라리 중원측이 맞대응을 하지 않았 으면 하고 바라게 되었다. 대항하지 않는다면 무황성측에서도 더 이상의 탄압은 없으리라 여긴 것이다.
그나저나 중원무림맹은 어느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걸까. 한 순간에 전 무왕부를 쓸어버릴 것 같았던 천마교 움직임 역시 그 어디에서도 발겨되지 않았다.
바다는 검푸르다. 달빛 아래 출렁이는 수면 위로 한 움큼의 별무리가 간격을 벌리고 섰다.
밀려오는 바닷물 위로 별은 안겨 있다간 가파르게 허공으로 치솟고는 파도로 부서져 내렸 다.
길게 이어진 모래사장에 보이지도 않을 족적을 남기며 그림자 하나가 서성였다. 그의 시선 은 바다를 향해 있다가 막 부서져 내리는 파도의 몸짓을 담는다.
보이는 것을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가슴에 담고 있는 사내. 그는 긴 한숨으로 토하 며 또다시 발길을 떼어 갔다. 달빛에 보이는 사내의 머리는 반짝이는 금발이었다. 저 멀리 바다 너머를 향해 가는 시선엔 안타까움만이 출렁이고, 배어 있던 까닭 모를 아픔이 저절로 스며 나왔다.
"이대로 물러설 수도…… 그렇다고 무작정 몸을 내던질 수도 없다. 힘으로 제압하기엔 그 들은 너무 강하다."
"여기 나와 계셨군요. 그런 줄 모르고 온 궁내를 뒤졌습니다."
"광마존인가?"
홀로 달빛 아래 서성이던 자가 알면서도 상대를 확인한다.
"예. 무슨 근심거리가도 있으신지요?"
스스로 말해 놓고 보니 쓸데없는 짓을 했음을 깨달았다.
"왜 근심이 없을까. 중원을 저들에게 내주고 무작정 떠나셨으니…… ."
파천의 목소리는 은은한 파도 소리에도 쉽게 잠겨들고 만다.
"모두 잘들 견뎌 주어 고마울 따름인데 내게 무슨 근심이 있겠는가."
"저희들은 지존의 명에 죽고 살뿐입니다. 모두 한결같이 죽기로 작정하고 전 잠재력을 짜 내고 있으니 너무 심려 마십시오."
"그래. 내가 왜 그걸 모르겠는가. 내 요구가 얼마나 무리한지를 나 또한 잘 알고 있어."
"아닙니다. 결코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단지 지존께서 요구하신 시간이 저들을 초조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파천은 광마존이 이런 말을 할 정도라면 수하들은 오죽할까 생각해 보았다. 역시 이건 애 초부터 무리한 계획이었는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달리 다른 방도가 없으니 그로선 최선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천마교와 전 중원의 무왕부 급습 이후, 파천은 중원무림맹의 상대적 열세를 깨달았다. 무 황성 배후의 중원 입성을 알게 되자 파천은 전 중원의 힘을 또다시 지하로 잠적시켰다. 이 후 그는 여러 날을 고만한 끝에 중원과 천마교의 최정예만을 이끌고 신수궁으로 들어왔다.
목적은 소수 정예의 육성이었다. 기존 최고수들을 자신이 직접 수련시켜 단시일 내로 원하 는 수준에 도달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런 계획의 배후에는 거대한 두 세력의 전면전으로는 얻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이 크게 작용했다.
사실상 천마교까지 가세한 중원의 힘은 새외의 힘과 백중지세라 할 만했다. 그러나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대륙은 이 두 힘의 격돌로 만신창이가 될 게 불 보듯 뻔했다. 미증유의 두 세력이 충돌한다면 이 땅에 남아나는 것이 무어가 있을까.
파천은 힘의 이면을 들여다보며 끔찍해 했다. 내 것을 찾기 위해 남과 싸울 수는 있고, 더 군다나 그것이 강탈당한 권리라면 망설일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그 결과가 정작 빼앗아 와 야 할 것마저 파괴시킨다면 그건 무의미했다. 전쟁이 종결되고 연기가 걷히면 중원에 풀 한 포기 하나라도 제대로 남아 있을 거라고 그 누구 장담하겠는가.
파천은 결국 무의미한 싸움을 계속해 나가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고, 결국 다른 방도를 궁 리하고 말았다. 또한 무황성의 배후에 도사리는 자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 는 파천으로서는 굳이 그들이 원하는 함정 속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파천의 결단은 어쨌든 순리를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적은 마냥 기다리기만 하는 어설픈 집단이 아니었다. 다른 대안을 빠른 시간 내에 도출하지 못한다면 힘을 끌어내 기 위한 음모는 다시 시작될 것이었다.
그는 곧장 중원무림맹과 천마교에서 최정예만을 추렸다. 절정의 고수만을 뽑아 적들의 수 뇌를 직접 공략하겠단 전략이었다. 지금 신수궁에 모여 수련을 쌓고 있는 인물들은 최고수 들인 만큼 소수에 불과했다. 어쩌면 이런 노력마저 물거품이 될지 몰랐지만 어쨌든 지금으 로서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수밖엔 없었다.
파천은 자신을 빤히 쳐다보고 있을 광마존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들이 우리가 숨죽이고 있다고 달라질 건 없으리란 것이 마음 에 걸립니다. 우리의 움직임이 그들을 신중하게 만들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애초 에 계획했던 대로 움직일 것이고,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중원에 돌아갈 겁니다. 이런 이 유로 중원무림맹의 인물들 사이에 동요가 있는 건 사실입니다."
"그래서…… 어차피 피할 수 없으니 맞대결을 하자는 것이냐?"
"……"
"당장에 입게 될 피해는 어떤 경우에도 피할 수 없다. 그럴 바에는 확실한 수를 준비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우리 힘이 그들을 완전하게 제압할 정도로 강하지 않은 이상엔 달리 도 리가 없는 거지."
파천도 이 점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천마교의 힘이 가세한 이상 무황 성을 압박하는 게 그리 힘겹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핵심 정예는 중원측이 열세인 건 부인할 수 없었고, 이것이야말로 대세를 결정하게 될 것이었다.
그들의 노림수가 중원 지배 따위가 아님이 밝혀진 이상엔 더 이상 미적거릴 이유가 없었 다. 맞대응은 그들을 이롭게 하고, 더욱 세상을 혼란스럽게 만들뿐이었다.
"이 겨울이 다 가기 전에 그들 앞을 막아서야 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승산이 없어. 더 이 상의 질주를 허용한다는 건 그 또한 우리에겐 부담이 되고.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길은 여러 갈래지만 다 가볼 수가 없지. 가보지 않고서도 그 길이 어떠하리란 것은 예상할 수 있는 일 이고, 무엇이 최선일지 가려내는 것이 우리 몫이다. 그리고……그 길을 묵묵히 가면 된다.
뒤돌아보지 말고……."
광마존은 파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파도가 쓸려 가고 쓸려 오는 것처럼 묵묵 히.
두 사람이 바다 건너 중원의 미래를 걱정하던 그 시각. 중원의 하늘 아래에선 다른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대시진이었던 무창에 사람이 줄기 시작한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무황성이 처음 들어서자 인구 유동에 변화가 생기긴 했다. 그러나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 다. 그런데 중원무림맹과의 치열한 접전이 끝나고부터 빠져 나가는 사람들로 비어져 갔다.
수대를 정착해 왔던 자들도 가업을 버리고 떠나는 심정이고 보면 작금의 무창 사정이 어떠 한지는 쉽사리 짐작하고도 남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짐을 꾸려 사라지는 행렬이 이어졌다.
난이 나도 크게 나지 않고서는 볼 수 없는 전경이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밤거리를 채울 만 한 사람의 수는 되었는지 북쪽 대로의 흥동가는 오늘도 밤손님을 받느라 분주하다.
시끌벅적 시장통만은 못해도 요염한 여인네의 웃음소리가 거리를 채워가고, 코를 간질이는 분 내음이 가득한 거리. 여기에 몇 사람이 새롭게 발을 디뎠다고 해서 별다른 관심을 기울 이는 사람은 없었다. 더군다나 돈을 뿌려대는 남자들도 아닌 여인네들인 바에야.
"흥, 이곳이 바로 남자들이 북적대는 곳인가 보군."
짤랑짤랑한 여인의 목소리에 아직은 젊음이 물씬 풍기는 풋풋함이 묻어 있었다. 쟁이 너른 모자에 면사를 내려뜨려 그 용모를 제대로 알아 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백의를 입고 있는 반면에 주위의 일곱 여인들은 흑색경장을 걸쳤다. 그녀들은 면사 같은 걸로 얼굴을 가리지 않았기에 그 아름다운 용모가 훤히 드러났다. 그들은 백의녀를 보호하기라도 하듯 가운데 둘러싸고 걸었다.
용모는 제각기 달랐지만 하나같이 백설같이 뽀얀 피부를 지닌 미인들이었다. 차가운 얼굴 엔 인간의 감정이라고 생각되는 그 어떤 느낌도 매달리지 않았으니 이것만 보아도 그녀들의 심성이 어떠할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오늘은 저곳에서 묵어야겠다."
백의녀가 가리키는 곳은 이곳 무창의 북대로 홍동가에서도 가장 큰 기루였다.
거리를 오가던 술꾼들은 그들의 용모에 해벌쭉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으니 여기선 좀체 볼 수 없는 진풍경이었다.
남자들이 이곳을 찾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허나 여인네들이, 그것도 무더기로 홍등가를 찾은 것은 조금은 의외였다. 그들을 부르는 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잠깐만 내 말을 들어 봐라. 내 너희들을 보아하니 청학루에 몸을 의탁하러 온 기녀들로 보이는데 굳이 오늘 들어갈 일이 무어 있겠느냐? 내 오늘 너희들을 후한 값에 하루 동안 살 생각이니 사양치 말고 나를 따르도록 하거라."
보아하니 돈푼 꽤나 있을 것처럼 생긴 사내였다. 불룩 튀어나온 배를 자랑스럽게 내밀고,
화려한 의복이 소매 자락을 펄럭거리며 거들먹거렸다. 백의녀의 면사가 나풀거리며 잔잔한 일성이 흘러나왔다.
"치워라."
무슨 말인지 채 알아듣지도 못한 중년인을 향해 흑의경장녀 중 하나가 손을 슬쩍 내뻗었 다.
"컥, 이런……."
'이런 개죽음을 당하다니'라는 말을 하다 만 것 같았다. 그는 가슴을 움켜쥐고 뒤로 날아가 한쪽 벽에 머리를 처박고는 비명횡사하고야 말았다. 급작스런 살인을 목도하자 곳곳에서 비명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까악, 살인이다. "
"사람이 죽었다."
비명과 고함소리들은 여자들만의 것은 아니었다. 급작스런 소란에 기루에서 튀어나온 취객 들도 보였다.
"기어 나오는 수컷들은 모조리 죽여라."
또다시 백의녀의 입에서 살인 명령이 하달되었다. 일곱 명의 흑의녀들은 빠르게 주위로 흩 어지며 손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들의 손에서는 강한 살인 강기들이 쏘아져 대항도 하지 못 하는 사내들을 무참히 죽여 갔다.
"마녀들이다."
"컥"
"캑"
우수수 떨어지는 낙엽을 보는 듯했다. 그녀들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목표로 한 자를 죽여 갔다. 거리에서 호객 행위를 하다 그 끔찍한 모습을 대한 기녀 하나가 너무 놀란 나머 지 실신을 하기도 했고, 먹은 술로 더부룩한 속을 달래던 행인은 볼일 보던 그 자세로 머리 가 으깨어져 죽었다. 그런가 하면 단지 집에 가기 위해 이 거리를 지나던 노인네 역시 안면 이 뭉개지며 숨을 놓은 불운을 겪기도 했다.
그녀들은 예외 없이 남자들이라 판단되는 자들은 모조리 죽였다. 일이 이쯤 되고 보니 기 루 안에서도 바깥의 소동을 알게 되었고, 잡다한 일을 처리해 주고 돈푼 깨나 얻어 쓰는 건 달패들이 목에 힘주고 나오다 죄다 꺾여 죽는 비참함을 맛보기도 했다.
"남자로 태어난 것이 무슨 크나큰 권력이라도 얻은 듯 유세를 떠는 인간들은 모조리 죽여 버려라. 살아 있어 보았자 아무 유익이 되지 않는 것들이니 죽여 거름으로라도 써야지. 호 호호호."
백의 면사녀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교소는 소름끼치도록 사악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 아도 꽁꽁 얼어붙은 대기가 부서져 떨어질 것만 같았다. 그녀의 웃음소리는 일곱 마녀들이 연출하는 처참한 지옥도를 더욱 살풍경하게 만들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힌 백의녀의 입에서는 쉴새없이 웃음소리가 이어지고, 그 소리가 잦 아들기도 전에 장내엔 피가 가득했다. 시체 사이를 걸어가던 백의녀는 여자의 시체가 눈에 띄자 그 앞에 멈추어 선다.
"쯧쯧, 조심하지 않고……. 괜히 사내놈에게 들러붙어 있다 봉변을 당했군. 안으로 들어가 자."
마녀들은 대답도 없이 묵묵히 백의녀 뒤를 따랐다. 그녀들은 발을 떼지도 않고 움직여 가 고 있었다. 자세히 보면 허공에 두 치 정도 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녀들은 무림 고수 였던 것이다. 이런 고수들이 왜 아무 저항할 힘도 없는 민간인들을 도륙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들이 기루 안으로 들어섰는데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인적 뜸한 묘역에 들 어선 것 같은 적막감만이 공간을 지배했다.
복도로 들어선 백의녀는 주욱 늘어선 방들 사이를 거닐며 삿갓을 벗어 들었다. 면사 아래 가려 있던 얼굴은 분명 천향옥봉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를 따르는 여인들은 현천마녀들임에 틀림없다.
그녀가 언제 하남무왕부를 떠나 왔을까. 지금 무왕은 무황성에 들어가 있다. 그렇다면 그 녀는 그를 뒤따라 온 것일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도 숨어 있는 쥐새끼들이 많군. 내가 무창에 발을 디딘 기념으로 오늘은 이 정도에서 그만두지. 어서 잠자리를 마련해라."
천향옥봉의 명령이 떨어지자 그녀들은 일제히 움직여 사방으로 흩어졌고, 방들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다. 아무도 머물지 않은 깨끗한 방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앞으로 걸어주며 현천마녀들이 열어 놓은 방안을 슬쩍 쳐다보다가는 눈살을 찌푸린 다. 남녀가 부둥켜안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가 하면, 아직 옷도 걸치지 못한 채 나신으로 있 기도 했고, 술을 먹다 구석에 쭈그려 고개를 처박은 자들도 있었다. 안에는 아직도 상당한 수의 남자들이 있었다. 천향옥봉의 두 눈이 샐쭉해지며 묘한 빛을 띠어간다.
피슉 한 명의 점잖게 생긴 노인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두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으악"
노인은 처참한 고통에 비명을 냅다 지르며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천향옥봉 자운이 손을 들고 노인 쪽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 불결한 두 눈을 모두 파내고 골을 바수어 버려야겠지만 눈 하나로 봐주마. 흥."
그 말을 끝으로 더 이상 관심을 보이지 않고 문 앞을 떠나 버렸다.
그녀는 현천마녀들이 서 있는 방으로 들어섰다. 기루 안에 웅크리던 기녀들과 손님들도 대 부분 밖으로 도망간 뒤였고, 넓고 큰 전각에 그들 8인 만이 남았다. 천향옥봉은 옆에 서 있 는 현천마녀들은 신경도 쓰지 않고 옷을 훌훌 벗어 던졌다.
그러자 옆에 있던 현천마녀 중 하나가 재빨리 옷을 받아 챙긴다.
"수욕을 좀 해야겠으니 너희들도 그만 가서 쉬어라."
"아닙니다. 여기 있겠습니다."
그들은 벙어리가 아닌 듯했다. 기계적인 수하의 대답을 귓가로 흘리며 천향옥봉은 욕실로 들어섰다. 이미 욕조 가득 뜨거운 물이 찰랑대고 있었다. 그녀는 한 발을 담그며 밖을 향해 소리 질렀다.
"근처에 쥐새끼들이 또 있을지도 모르니 샅샅이 뒤져봐라."
단지 하루 머물 곳을 얻어내기 위한 무자비한 살육이었던가. 그것도 민간인이 대부분이었 고, 노소를 가리지 않은 만행. 도저히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그들은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않은 것처럼 태연하고 평온해 보였다.
천향옥봉은 욕조 안, 뜨거운 물 속으로 전신을 가라앉히고는 두 눈을 살짝 내리 감았다. 추 운 겨울날 뜨거운 물로 몸을 데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무척 만족스러웠다. 옆에 두 명의 수하들이 내려다보고 있었고, 나머지 인원들은 주위를 경계하거나 조사하러 나갔 다.
천향옥봉은 손바닥으로 수면을 탁탁 쳤다. 그녀는 흡족했던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 다. 시체가 즐비한 전각 안에서 이런 여유를 느낀다는 것만으로도 이미 정상적이라 할 수는 없었다.
콰앙 펑 "이것들, 비키지 못하느냐!"
밖에서 들려 오는 둔탁한 소리에 천향옥봉은 고개를 갸웃했다. 분명히 어디선가 많이 들었 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현천마녀들이 앞을 막아서고 공격을 가하는 것 같았다. 그 녀들의 공격 가운데서 여유를 보일 인간은 흔치 않다. 천향옥봉은 이후 들려 온 좀더 또렷 한 소리를 듣고서야 누가 왔는지를 알았다.
"이년들! 너희 주인의 사부가 바로 나다. 아무리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해도 감히 내게도 공격을 퍼붓는단 말이더냐!"
하남무왕인 혈마천주가 기루를 찾은 것이다. 원래는 자운을 이곳으로 부른 사람이 바로 그 였다. 마침 자운도 따분하여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좀이 쑤시던 참이기에 그의 부름에 순순 히 응해 여기 무창까지 이른 것이다. 그런데 마침 찾은 곳이 홍등가 중심지일 줄이야. 그리 고 이런 참극을 벌일 줄이야. 하남무왕까지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그를 들여 보내라."
현천마녀들은 일순간에 뒤로 물러섰다. 그녀들을 힐끔 쳐다본 혈마천주는 입맛을 쩍 다셨 다.
'잘만 되었으면 저것들을 내가 부릴 수 있었을 텐데…….'
아깝기는 했지만 지금 와서 한탄을 해본들 소용이 없었다. 혈마천주는 현천마녀들 사이를 지나서 복도로 들어섰다. 소리가 난 곳으로 가니 두 명의 현천마녀가 앞을 가로막는다. 상 무룡은 어이가 없었다.
"일수면 나자빠질 것들이 용기가 가상하군. 비켜라. 네 주인을 해롭게 할 사람이 아니다."
그 말에도 그녀들은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상무룡을 노려보기만 했다.
"비켜서도 된다."
천향옥봉의 명이 있고 나서야 그녀들은 옆으로 물러섰다. 그렇다고 상무룡에 대한 경계마 저 완전히 풀어 버린 것은 아니었다. 어느새 다섯 현천마녀마저 방안으로 들어와 상무룡을 경계하고 섰다. 상무룡은 그녀들이 자신을 둘러싸듯 주위에 얼쩡거리자 짜증이 났다.
"어서 이 얘들을 물리지 못하겠느냐. 성질대로라면 혼을 내주었으면 좋겠군."
"사부,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날 부른 용건이나 말해봐."
되바라진 자운의 말에 상무룡의 얼굴이 일순간에 확 일그러지고 말았다.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여전히 그 걸쩍지근한 반말에는 기분이 언짢았다. 의자에 앉은 상무룡은 욕실 을 향해 빠르게 입을 열어 갔다.
"너를 급하게 이리 오라고 한 건 네 도움을 얻기 위해서다."
"도움?"
"그래, 조금이라도 날 사부로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날 좀 도와다오."
"대체 뭘 도와 달라는 거지? 난 사부가 하는 일엔 도무지 관심이 없어."
"자운아, 그러지 말고……."
상무룡은 자리에 일어나 욕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천향옥봉은 사부가 욕실 안으로 들 어와도 그다지 당황하는 것 같지 않았다. 수면 아래 잠긴 그녀의 몸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으 므로 상무룡의 얼굴은 상기되어갔다.
"나가"
자운은 뱉어내듯 짧게 말했다. 그녀의 음성엔 불쾌한 기색이 가득했다.
"내가 지금껏 네게 공들인 것을 조금이라도 알아 준다면……네가 내 요구를 뿌리치지는 못 할 거다."
"나가라고 했잖아. 나가, 나가란 말야."
피융 천향옥봉의 손가락이 욕조의 물을 몇 방울 퉁겼다. 그렇지만 그 작은 물방울들은 더 이상 물방울이 아니었다. 딱딱한 강기막에 둘러싸인 그것은 위협적인 무기가 되어 상무룡의 두 눈을 향해 쏘아졌다. 상무룔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손바닥으로 눈을 가렸다. 강기막에 둘 러싸인 물방울을 간단하게 해소하며 상무룡은 더욱 앞으로 나섰다.
"후후, 이제 보니 네가 아직 부끄럼을 타는가 보구나. 예전의 너는 그렇지 않았는데 말이 다. 하하하"
"나가지 못해!"
자운이 발끈하여 외치는 소리에 상무룡은 두 손을 내저으며 뒤로 물러섰다.
"하하하, 알았다. 네 알몸이 하도 눈이 부셔 내 잠시 실수를 했구나."
그러고는 욕실 입구까지 물러섰다. 자운은 욕조 안으로 더 깊이 잠겨들며 그런 사부를 올 려다본다. 그녀의 두 눈엔 따분한 일상을 견디지 못하는 권태로움이 가득했다.
"내가 뭘 도와 주길 바라지? 내게 아무것도 바라지 마. 사부랍시고 내게 뭔가를 요구한다 면 난 어쩌면 사부도 죽일지 몰라."
"허허허허, 네가 날 죽일 정도의 고수가 되었다면 그것 또한 나로서 즐겁고 기분 좋은 일 이지. 내 웃으면서 죽을……."
"좋아, 그럼 죽여줄까?"
빤히 올려다보며 태연하게 하는 말에 무진장한 살기가 뻗쳤다. 상무룡은 순간적으로 등줄 기가 뜨끔해짐을 느꼈다.
'저 녀석의 실력은 이미 나와 필적할 것이다. 게다가 아픙로의 성장 속도를 감안한다면 좋 은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
상무룡은 빠르게 염두를 굴렸다.
"이런, 넌 사부가 농담을 하는 것도 구분하지 못하는구나. 하하하하."
"헛소리 하지말고 밖에 나가서 기다리고 있어. 금방 나갈테니."
"그, 그래."
등을 보이며 돌아서는 상무룡의 얼굴은 이미 무참히 구겨져 있었다.
현천마녀에게 둘러싸인 채 홀로 무료함을 달래 가던 상무룡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 자를 맞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부는 아마도 그 밖엔 없을 듯했다.
마주 앉은 두 살마은 잠시 말을 꺼내지 못하고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름다운 제자의 얼굴 에 고정된 시선엔 자애함이 가득했지만 그 모든 것이 꾸민 것임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자운아"
"말해."
"너도 알다시피 이미 세상은 무황성의 것이 되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일월교의 것이 된 것이지."
"일월교?"
"그래, 일월교!"
"그들은 강해?"
상무룡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녀의 관심이 어디에 초점 맞추어져 있는지를 깨닫 자 그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나무랐다.
"그럼! 그들은 강하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 강하다. 그들보다 강한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 하지 않을 거다."
"사부보다 강하겠군, 그럼."
"그야……그렇겠지."
말해 놓고 보니 참 비참하단 생각이 들었다. 한때 자신은 중원 전체를 정복하려는 야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욕망의 소유자가 그 모든 야심을 접어야 했던 시기는 지금으로부터 이십 년도 채 안 되었다.
일월교의 내밀원주와 몇 명의 수하들이 자신을 찾았고, 그들에게 인간으로서 겪을 수 없는 치욕을 당하고서야 충성을 맹세했다. 복날에 개를 잡는다 해도 그렇게 두들겨 패지는 않을 거란 생각을 하며 그는 저항 없이 맞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혈마천주쯤이나 되는 자신이 뭇매 때문에 굴복 당할 정도로 연약할 사람은 아니 었다. 내밀원주가 보여주는 한 수는 그가 생각해 오던 무공에 대한 상식선을 완전히 넘어서 있는 것이었고, 그 앞에서 자신은 한낱 벌레처럼 무력하다는 것을 절감한 것이 결정적이었 다.
내밀원주는 자신에게 충성을 요구하는 대신 달콤한 약속을 했다. 장차 일월교가 지배하는 새로운 세상에서 무한한 권력을 맛보게 해주겠단 것이었다.
그 선택의 폭이 죽음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바에야 그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죽거 나 충성을 맹세하거나, 그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짧은 시간 안에 결정되 었고 지금까지 그는 그 결정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이 강하냐는 자운의 질문에서 문득 과거의 치욕적인 순간을 떠올리던 상무룡은 얼굴에 씁쓸한 미소를 짓고야 말았다.
"강하기야 하지. 나 같은 건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렇단 말이지?"
천향옥봉의 얼굴에 호기심이 가득해졌다.
'이 아이라면 어쩌면…….'
상무룡이 자운에게 거는 기대는 대단했다. 그녀의 현 능력은 나이와 수련 기간을 간단하게 비웃어 버릴 수 있는 것이었고, 그것은 거의 초자연적인 것에 가까웠다.
"내게 원하는 게 뭐야?"
"넌 나와 함께 무황성으로 들어가야 한다. 지금 무황성 내는 몇 개의 세력 구도를 보이고 있다. 다시 말해 조직 개편이 이루어지고 있는 셈이지. 몇 개의 분파로 나누어지고 있는데 어느 줄을 잡느냐에 따라 앞으로 선홍빛이 될 수도 있고 칙칙한 어둠 가운데로 내몰릴 수도 있다. 내가 완전하게 자리를 잡는 순간까지만 내 곁에 있어다오. 네가 옆에 있다면 아주 든 든할 것 같구나"
그가 이렇게 절실해진 이유는 며칠 전에 있었던 일 때문이었다. 일월교주는 전 수뇌부를 모아놓고 충격적인 선언을 했다. 그것은 듣기에 따라 조직 내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혼란의 조짐은 여러 군데서 동시적으로 포착되기 시작했 고, 내심 불안을 느끼는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일월교주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 인지 모르지만 그의 말은 간단했다.
"강하면 살아 남고, 살아 남은 자만 최후에 웃을 자격이 있다. 그 자격 검증을 지금부터 치 르도록 한다. 모든 제한은 지금부터 전면적으로 철폐된다. 모든 선택과 결정은 개개인에게 로 돌아간다. 조직을 일으켜 무림을 쓸어버리든, 아니면 조직 전체를 장악하든, 서로를 힘으 로 굴복시켜 수하로 심든, 서로 연합을 꾀하든지 너희들 마음대로 하라. 단, 나는 일정수가 남을 때까지 지켜보기만 하겠다. 거기서 살아 남은 사람은 영원토록 영화를 누릴 것이다."
그 말은 전 무황성을 숨가쁘게 변화시켜 갔다. 각 무왕부들은 이해 관계에 따라 '헤쳐 모 여'를 거듭했다,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 모를 상황으로 치달아 갔다. 아직 중원 무림의 목줄 을 끊어 놓지도 못한 채 이런 혼란을 유도하는 교주의 저의가 궁금했지만 일단 그들 모두에 게 당장에 시급한 지상 명제는 살아 남는 것이었다.
이런 시점이었기에 혈마천주 역시 다급했고, 자신의 자세와 수하들을 독려하는 한편으로 적과 아군을 재빠르게 분류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비교적 내밀원과 친밀한 관계에 있었 다. 이런 점을 그는 부각시켜 나갔으며 더욱 더 그 친밀도를 높여 나갔다.
뿐만 아니라 가능하다면 마전 계열과도 어떤 연결점을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한 명의 조력 자라도 아쉬운 이때에 천향옥봉 같은 강자를 옆에 둘 수 있다면 그로서는 천 리 길도 마다 할 입장이 아니었다. 조금은 다루기 곤란한 점이 없지 않았지만 그 정도는 애교로 봐 줄 수 도 있었다. 그래서인지 상무룡의 두 눈엔 간절한 염원이 더욱 강하게 뿜어져 나왔다.
"이 사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탁하마. 제발 날 도와 다오."
무릎이라도 끓을 태세였다.
'어느 놈 하나 만만한 놈이 없다. 그리고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기도 하다. 결국 살아 남으 려면 철저하게 자신만을 믿어야 한다. 이런 시점에 자운만큼 확실한 애도 없지. 일단 승낙 을 얻어낼 수만 있다면 최소한 배신은 모르는 야지 않은가!'
"그러니까……내가 사부 옆에서 사부 편을 들어 달라는 건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런 배은망덕한 계집!'
속으로야 욕을 하든 자근자근 씹어 삼키든 겉으로 드러난 표정엔 온화함만 넘실대었다.
"하하하, 네가 그래야 할 이유는 없지만……어차피 너도 그 소용돌이에 휩쓸릴 텐데 이왕 이면 같은 편이 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어쨌든 너와 나는 사제지간이고 우리가 서로의 목숨을 노린다면 이처럼 비극이 또 어디 있겠는냐."
"흐음……. 생각해 보니 그것도 재미있겠어. 깔깔깔."
'이, 이년을 정말이지 찢어 죽이고 싶구나.'
"왜? 날 죽이고 싶어? 할 수 있으면 한번 해봐."
'귀신 같은 년'
상무룡의 얼굴에 부는 춘풍은 얼굴 여기저기에 꽃을 흐드러지게 피운다.
"허허허, 그럴 리가 있겠느냐. 세상에 제자를 죽이는 사부는 없단다."
"좋아, 사부가 마음엔 안 들지만 죽이는 것도 귀찮고…… 내게 무공을 가르쳐 주었으 니……. 좋아, 그렇게 하지. 내가 뭘 어쩌면 되지?"
태양은 지난 밤 어둠 속에 어떤 일이 있었던가는 아랑곳없이 밝게 대지를 감싸기 시작했 다. 신수궁이 위치한 섬들에도 빛은 찾아 왔다. 이 아침에 가장 바쁜 하루를 준비하는 사람 은 파천이었다.
그는 새로운 하루를 준비하느라 여러 날과 다름없이 분주했다. 그가 이곳 신수구에 데려 온 사람들은 몇 명되지 않았다. 이들의 어깨에 장차 중원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은 수련 을 시키는 파천이나 묵묵히 그를 따르는 인물들 모두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신수궁의 연무관엔 오늘도 변함 없이 수련자들이 좌정하고 앉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새 벽녘이면 나와 좌정하고 하루의 수련을 준비했다. 그들 중에는 광마존도 끼어 있었고 신수 궁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외에도 천마교의 4마존과 4후, 4화, 12마공자들의 얼굴이 보 였고, 반가운 소군의 얼굴도 그들 가운데 있었다.
중원무림맹을 대표한 인물들은 오련회주인 창천신검 남궁휘와 구정련주이자 소림사 방장인 지우, 그리고 칠기 중 일인들인 화산파 장문인 매화일검 채정익과 무당장문인 송학자, 소림 의 지청대사, 개방의 태상방주인 개왕 등이 보였고, 이외에도 정도사령대의 두 부령사들이 태산에서 내려와 합류해 있었다.
마도련측에서는 대총사 상천일과 한당, 녹림총수인 흑사신 황보염과 동정십팔채 총채주인 탁찹천황 거여패가 함께 했다. 야림에서는 천(天), 지(地), 인(人) 삼살(三殺)이라 불리는 초 특급 살수를 보냈다. 그들은 중원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은 신비인들이었는데 가공한 살수 들이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았다. 그들이 풍기는 기운은 결단코 무림칠기의 아래가 아니 었다.
옛 남도맹의 제이인자였던 천인환도 구령진과,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북검회에서 생존한 최고수인 철혈검객 표행수가 비장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파천은 그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는 모습들엔 결연한 의지 가 엿보이는 것 같았다. 단지 율극만이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간간이 실눈을 뜨며 주위를 둘러볼 뿐이었다.
파천을 제외하고 총인원 마흔 일곱이었다. 이들 중에 가장 강한 고수는 신수궁주와 광마 존, 율극이었고, 비교적 약하다 할 수 있는 인물은 흑사신 황보염과 탁탑천황 거여패였다.
소군은 어느새 그들보다도 강해져 있었다. 파천은 이들의 수련기간을 짧게는 일년에서 길게 는 삼 년으로 잡았다. 이건 최소한의 시간이기도 했다. 그 동안에 만약 중원이 견뎌내지 못 한다 하더라도 그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모질게 마음먹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그가 신수궁에 들어온 지도 벌써 삼 개월이 지났다. 제일 먼저 그는 자신이 알고 있는 모 든 무공을 이들 모두에게 익히게 하는 데 주력했다. 이미 어느 정도 기반들은 갖추고들 있 었으므로 파천이 전수하는 무공을 그들은 솜이 물을 빨아들이듯 쉽게 받아들이는 것 같았 다.
문제는 그 다음에 일어났다. 파천이 원하는 수준은 이기어검의 심어검 정도의 수준이었다.
이미 신수궁주는 무형검을 깨달은 상태였고, 광마존은 심어검에 도달해 있었으며, 율극 또 한 그 정도의 수준이었기에 문제가 없었지만 이들 셋을 제외하고는 이기어검의 목어검 수준 조차 도달가히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파천은 이후 한사람씩 달라붙어 그들을 집중적으로 수련시켜 갔다. 천마교 출신들은 비교 적 빠르게 익혀 갔지만 그 외에는 더디기만 했다. 파천은 그 이유가 무얼까를 고민하기 시 작했고, 결국엔 기존의 무공에 대한 굳어버린 시각 때문이라 단정하게 되었다.
그는 수련을 시키는 내내 자연의 기를 스스로 이용하게끔 하여 체질을 개선시키는 데도 게 을리 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틈틈이 깨달은 바를 그들에게 설명하고 무공의 증진에 필요 한 여러 가지 수련법을 개발해 혹독하게 다루기 시작했다. 과연 어느 정도의 성과가 있을지 는 그조차 장담하지 못하는 일이었지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은 다하고 있는 셈이었다.
중원에 있는 제갈초홍으로부터 가끔 연락이 오기도 했는데 그 내용들은 하나같이 그를 조 급하게 만들었다. 특히 황군의 개입이 곧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은 파천을 당혹스럽게 만 들었다. 현 상황에서 황군이 개입한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욱 혼란만 가중 시키고 세상을 적시는 피의 양만 늘어날 뿐이었다.
백만의 황군은 오만의 잘 훈련된 무림인들을 당해내지 못한다. 황군에도 고수들은 있지만 그들의 비율은 무림 조직보다 상대적으로 낮았다. 결국 대부분은 신체 건강한 일반인보다 조금 나은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숫자의 월등함이 줄 이익이란 그다지 크지 않을 것이었다.
이런 사실을 황실에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이 개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