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검 6권.1.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96/111)

 황제의 검 6권

 1.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물어도 되겠소?"

 천향옥봉은 그가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왠 지 듣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입은 이미 열려 가고 있었으니.

 "말씀하세요."

 두 사람만을 위한 정적은 광마존마저 잠시 한편으로 밀어 놓는다.

 초량은 그녀에게로 향했던 시선을 잠깐 거두고 하늘을 우러러보았 다. 어둠 가운데 아름답게 빛을 발하는 별들마저 초량의 눈에는 가슴 을 헤집어 놓는 비수처럼 느껴졌다. 함께라는 의미만으로 모든 것을 감내케 했던 대상이 지금은 자신을 낯설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 속에 사랑하는 사람의 안위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자신 따위 는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음을 알았다고 해서 특별히 서글픈 것도 없었 지만 마음이 아린 것만은 부인할 수 없었다.

 초량의 시선이 막 떨어지는 별똥별의 꼬리를 따라 움직여 갈 때 자 운 또한 언뜻 그 시선 자락을 함께 뒤쫓는 것 같았다. 그의 입이 어렵 게 열렸다. 

 "만약……그대의 사랑과 생명을 바꾸어야 한다면 그리 하겠소?"

 망설임 없는 대답이 자운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네."

 초량이 예상한 대로였다.

 "그렇다면, 그대의 사랑과 사랑하는 사람의 목숨을 바꾸어야 한다 면…… 그것도 그리 하겠소?"

 자운은 대답하지 못했다. 초량은 그녀의 망설임에 더욱 가슴 아팠 다. 그 망설임은 그녀의 사랑이 그 만큼 깊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 었기에 그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서서히 풀었다.

 "오늘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소. 나 는 오늘 최선을 다할 참이오. 이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난 결 코 도망가지 않고 받아들이겠소. 그대가 슬퍼하는 것은 보기 싫지만 그대를 잃는 것은 더욱 싫소. 이재…… 난 내 방식대로의 사랑을 하 겠소. 그대가 원하지 않는다 해도……."

 지운은 그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의 상념을 흔들어 깨우듯 누군가가 자신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아!"

 [자운, 내가 지켜 주리라. 내 생명이 다 하는 그 순간까지 난 그대 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오."]

 검황은 돌아가는 상황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이것 봐라. 태공이 저리도 심약한 인간이었던가? 별일이군. 사랑 놀음에 사람이 저렇게 달라질 수 있단 말이지. 저 계집이 태공의 마 음을 송두리째 빼앗았다는 건데……. 결국 태공의 약점은 저 년이로 군.'

 그의 눈알은 민활하게 움직여 갔다. 주변에 있던 일곱 명의 장로들 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들은 검황의 신호에 따라 빠르게 광마존의 사 방을 에워쌌다.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일시 멈추었던 살기가 또 다시 꿈틀거리며 장내를 장악해 갔다.

 "태공, 밤이 길면 꿈도 긴 법이니 어서 빨리 해치웁시다."

 검황의 말에 초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놈을 죽여라."

 검황의 명령이 떨어지자 일곱 장로들이 광마존에게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잠깐, 물러서시오."

 장로들도, 그들에게 대응해 가던 광마존도 주춤거리며 물러섰다.

 '이번엔 또 뭔가?'

 검황은 짜증 섞인 눈길을 초량에게 던졌다. 초량은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이번에는 천향옥봉이 아닌 광마존을 직시했다.

 "그대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하겠소."

 "뭔가?"

 "자운을 보호하면서 우리에게 대항한다는 것은 여러 가지 어려움 이 많을 터. 그녀를 이족으로 보내시오. 그녀의 안위는 내가 책임을  지리다. 물론 당신이 우리를 능히 이긴다면 그녀를 데리고 떠날 수 있을 테지만 그럴 수 없다면 도주를 하든…… 그도 아니면 죽음을 맞든 하시오. 그녀를 진정 사랑한다면 그게 옳을 것이고 또한 그대에 게도 여러 모로 불리하지 않은 제안인 것 같은데……. 그대 생각은  어떠시오?"

 광마존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자운이 광마존의 옷자락을 잡았다.

 "제 걱정은 하지 마시고 소신대로 하세요."

 광마존은 천향옥봉과 초량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저 자의 말이 맞다. 자운을 보호하면서 이들 을 상대한다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그렇다고 저 자에게 자운을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대체 무엇을 망설이는 것인가. 어차피 이런 상황 을 예상하지 못한 것이 아닌데.'

 광마존의 내심은 혼란으로 점차 흔들려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초량을 직시하는 광마존의 눈은 무섭게 불타 올랐다. 자운을 잡고 있 는 손에 힘이 들어간 것도 그때였다.

 "너의 제안은 못 들은 걸로 하겠다. 내가 이 자리에서 죽지 않는 한 은 자운을 내게서 뺏어 가지 못한다."

 광마존의 몸에서는 상대를 질식시킬 듯한 맹렬한 기운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런가? 어쩔 수 없군. 그대가 진정 무사라면……. 그리고 자운을 사랑한다면 최선을 다해 그녀를 지키시오."

 초량의 고개가 다시 끄덕여졌다. 그만을 쳐다보고 있던 장로들이 다시금 앞으로 튀어나간 것은 거의 동시였다. 일곱 명은 방위를 조절 해 가며 광마존을 압박해 왔다. 그들을 간파한 광마존은 왼팔로 자운 의 허리를 두르며 오른손에 쥐고 있는 검을 전방으로 똑바로 세웠다.

 주위에 넓게 포진하고 있는 대상벌의 무사들은 곧 시작될 고수들간 의 격전을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일곱 명 모두가 나이가 몇 살인지 모를 늙은 노인들이었다. 외모로 만 봐도 족히 칠십은 넘어 보였다. 그런데 발놀림은 생각보다 가벼운 것이어서 그들이 진정 땅을 딛고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지경 이었다.

 물 위를 미끄러지 듯한 보법은 현란하지 않으나 장중한 가운데 빈틈이 없었다. 각기 검(劍), 도(刀), 봉(棒), 편(鞭), 창(槍), 륜(輪), 필 (筆)을 무기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오랜 기간 합격술(合格術)

 을 연마한 것처럼 약속된 움직임을 보여 주었다.

 먼저 검을 쥐고 있는 노인이 광마존의 전면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가 움직일 때마다 다른 사람들 역시 그와의 간격에 맞춰 함께 움직 여 갔다.

 '진법(陳法)인가? 그렇지는 않은 것 같지만 그다지 호락호락해 보 이지는 않는구나.'

 광마존은 그들의 움직임만을 예의 주시하고 있을 뿐 먼저 움직이 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정지된 채 그들을 한꺼번에 살피기라도 하듯 허공 중 한 점에 머물러 있었다.

 약간은 지리한 듯한 시간이 흘러 가고, 검을 쥔 노인이 벼안간 대 열에서 이탈하며 앞으로 툭 튀어 나왔다. 땅으로 스며들 듯 무릎을 최대한 굽혔다가 한걸음에 쏘아져 나오며 광마존의 머리 쪽을 향해 검을 쭈욱 찔러 왔다.

 그것이 신호였다. 사방을 에워싸고 있던 노인들이 한꺼번에 광마 존의 전후좌우에서 폭발적으로 쇄도해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 나 자세히 보면 그들의 공격 시점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연속적으 로 이어지고 있었다.

 광마존은 어깨 넓이로 벌리고 있던 양발 중 오른발을 앞으로 내밀 며 일직선으로 선 후 곧장 오른손에 쥐고 있던 검을 힘차게 떨쳤다.

 당연히 오른쪽 무릎은 굽혀지며 탄력을 더했다. 검 끝에서는 푸르스 름한 검강이 스며 나와 검을 들고 찔러 오던 노인의 검과 부딪쳤고,

 연이어 사선 방향과 좌우로 연속해서 휘저었다. 순간 봉과 창으로 찔 러 들어오던 노인들의 공격이 중간에 차단되었다. 그런가 하면 한 발 을 축으로 회전하며 검을 사방으로 풍차처럼 돌리는 광마존의 공격 에 모조리 막히거나 진격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야 만다.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한 번씩 퉁겨 간 노인들의 공격은 또다시 이어지려 했지만 포착하기 힘든 바로 그 순간을 광마존은 어렵지 않 게 이용하여 그들의 박자를 끊어 놓는다. 그러고 나서 이들의 중심 역할을 하는 검을 쥔 노인에게로 향했다. 공간을 단축한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급속히 다가선 광마존의 검이 또다시 빛을 발했다. 손 목을 비틀며 검을 쑤셔 박아 넣자 막았던 검이 반탄력을 이기지 못해 퉁겨 가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그를 따르며 도약했다.

 그의 검에서 검강이 치솟아 나오는 것을 본 노인은 다시 검을 들어 막아 갔다. 광마존은 연속으로 칠검(七劍)을 쪼개어 노인의 전신을 노렸다. 뱀의 혓바닥 같은 기민한 공격에 일순 노인은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광마존은 더 이상 공격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어느덧 격퇴되었던 다른 노인들이 재차 그의 배후를 노 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검을 회수하며 그 힘을 감 소시키지 않고 뒤를 향해 검강을 뿌렸다.

 콰앙 쾅 그들간의 부딪침은 힘과 힘의 격돌이었다. 일곱 명의 절정 고수들 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었다. 그들 모두의 힘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 룬다면 개개인이 지닌 힘의 일곱 배 이상을 낼 것이다. 그러나 이러 한 수치상의 계산은 때때로 실전에서 그대로 적용되지는 않는다. 몇 차례의 부딪침으로 서로간의 힘을 견주어 본 뒤에 그들은 본격적인 공격을 준비했다. 광마존은 한 손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불리함에 더 하여 자운의 안위에 신경 쓰느라 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럼에도 이런 불리함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힘이 그에게는 있 었다.

 '지금 이놈들은 별로 문제될 게 없다. 중요한 것은 저 뒤에 버티고  있는 두 놈들!'

 광마존은 알곱 장로와 대치하고 있는 순간에도 뒤에 버티고 있는 검황과 초량을 신경 썼다. 내뿜는 기세만으로도 그들이 결코 수월하 게 대적할 수 있는 자들이 아님을 알아챈 것이다. 어쨌든 당장에 달 려드는 칼날의 위험은 꺾어 놓아야만 했다.

 "쳐라."

 검을 쥔 노인에게서 공격 명령이 떨어지자 또다시 짓쳐드는 병기 들! 광마존은 검을 땅으로 한 채 손목을 오른쪽으로 비틀며 몸 안쪽 으로 끌어 당겼다. 자연히 팔이 몸 안쪽으로 비틀리는 형상이 되었 다. 그는 그 자세대로 온 힘을 검에 집중시켜 갔다.

 일곱 명의 노인 중 두 명은 도약하여 광마존의 위에서 공격하고 나 머지는 각기 전후좌우와 하체를 휩쓸어 왔다. 완벽하게 그를 포위한 공격이었다. 그들 병기에서는 제각각 날카로운 강기가 소리도 요란 하게 스며 나왔다.

 "이놈들, 모조리 황천 구경을 시켜 주마."

 광마존의 팔이 비틀린 상태에서 힘차게 바깥을 향해 큰 원을 그려 갔다. 뿐만 아니라 검극이 하늘로 향해지며 그 힘을 따라 회전을 하 니…….

 피슈우웅 검강의 폭풍이 회오리 치며 바깥으로 휘몰아쳤다. 일곱 노인은  순간 강기의 폭풍이 밀려옴에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지 함께 힘을  모아 격돌해 가고. 두 상반된 힘은 서로를 만나 부르짖고야 만다.

 콰아아앙 "헉."

 "으음."

 "컥."

 일곱 장로는 동시에 콩 튀듯 사방으로 켝퇴되어 버렸다. 광마존은 그들 중 검을 쥔 자를 끈질기게 따라 붙었다. 발끝으로 땅을 박차며 지면에 갈리듯 공간을 가로질렀다. 검극은 어느새 푸르스름하게 물 들고 동그랗게 망울져 있었다. 검강을 집약시켜 격출하기 전에 나타 나는 현상이었다.

 푸슝 광마존은 손에 쥔 검을 미끄러뜨리며 검 자루의 끝 부분을 손바닥 으로 힘차게 밀쳤다. 순간 검(劍)은 빛이 되어 노인의 몸을 꿰뚫고야 만다.

 퍽 "끄억."

 노인의 목을 뚫어 버린 검을 향해 광마존이 손을 끌어당기는 시늉 을 하자 곧바로 회수되었다. 간신히 몸을 지탱하고 이 장면을 쳐다보  던 여섯 노인들은 자신들의 대형(大刑)이 너무나 쉽게 놈에게 당해 버리자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분명 조금 전 검강은 그들의 상상을 휠씬 상회하는 위력이긴 했다. 그렇지만 이토록 어이없게 죽 음을 당하리라곤 이들 중에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또다시 놈은 검을 들고 미친 듯 이 공격해 오고 있었으니까.

 광마존은 여섯 노인들이 채 신형을 추스르지 못하는 틈을 타 그들 을 한 사람씩 상대하려는 듯해싿. 이것을 자각한 노인들은 적의 의도 대로 될 경우, 전멸을 면치 못하리란 불길함을 느꼈던 탓인지 황급히 그가 움직여가는 곳을 향해 힘을 집약시켜 갔다.

 슈웅 또다시 광마존의 손끝을 떠난 검은 빛살처럼 철봉을 쥐고 있는 자 에게로 향했다. 그 자는 하필이면 자신이 목표가 되었다는 투덜거림 을 가슴속에 간직한 채 두 손으로 봉을 잡고 어깨 위로 올렸다가 힘 껏 내리쳤다. 그의 봉과 광마존이 격출한 검이 마주쳤다.

 콰앙 "컥."

 봉을 쥐고 있던 손아귀가 텨져 나가며 봉이 그의 손에서 튀어 오르 는 순간 광마존의 검은 여지없이 그의 목을 꿰뚫고 말았다. 그 순간 다른 다섯 명의 공격이 광마존에게 퍼부어졌다. 광마존은 펄쩍 뛰어 오르며 두발로 각기 창과 도를 밀쳐내고 다른 한 손으로 전면에 륜을 들고 있는 자를 향해 백옥마강(白玉魔剛)을 뿌렸다.

 두 사람의 공격이 그에게 집중되려는 찰나, 공중에 떠 있던 광마존 의 몸이 그보다 빠른 속도로 바닥으로 떨어지는가 했더니 다시 바닥 을 차며 몸도 일으켜 세우지 않은 채로 앞으로 쭈욱 달려나갔다. 그 순간 이미 그의 손에는 검이 회수되어 빛나고 있었다. 순식간에 일어 난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민활한 동작이었고 인간의 몸으 로는 낼 수 없을 정도의 속도였다.

 이렇게 되자 나머지 두 사람의 공격은 맨땅을 속절없이 때리고야 만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세 사람 역시 또다시 격퇴되어 있었다. 한 번의 공격에 한 명씩 죽여 가는 그의 능력은 가히 고절하단 표현만으 로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간만에 몸을 풀어 보기는 한다만 이런 식이라면 내가 먼저 지친 다.'

 현재 그의 가장 큰 약점이라면 뭐니뭐니 해도 자운을 품 안에 안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실 지금의 공격들은 광마존이 평소에 즐겨 하던 공격 형태라고 볼 수 없었다. 내공을 상실한 자운이 광마존의 움직임 에 받게 되는 충격은 꽤나 클 것이었다. 이런 점을 모를 리 없는 그였 기에 최대한 움직임을 자제하고 있었지만 상대의 숫자가 많기에 어 쩔수가 없었다.

 자운을 품 속에 안고 있으니 천마잠형술도 소용이 없었다. 그러니 불가피하게 지금과 같은 형태의 공격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천향옥봉은 그의 품 속에 얼굴을 묻고 두 눈을 꼭 감으며 밀착시켰다. 그녀의 이마에 어느새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는 것만 봐 도 그녀 또한 힘겨워함을 알 수 있었다.

 '빨리 끝내자. 어차피 뒤에 있는 저 두 놈을 제압하지 않고서는 이 곳을 빠져 나기지 못한다.'

 광마존은 어금니를 힘주어 물었다. 그는 검을 전면에 곧추세우며 두 발을 어깨 넓이로 벌리고 다섯 노인을 향한 시선을 고정해 갔다.

 그의 움직임은 그들에게 강한 위기감을 일깨웠다. 지금까지보다 더 위력적인 공격이 시작되리라는 예감 앞에 그들은 긴장하기 시작했 다. 그때 그들의 긴장을 일시에 깨트리는 소리가 울려 나왔으니.

 "모두 물러서라."

 천천히 장내로 나서는 노인을 일별한 광마존은 검을 다시금 바닥 으로 내려뜨렸다. 검황은 그런 광마존의 자세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 자군. 검에 관한 한 내 누구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지만 그 대의 고절한 수법을 보니 피가 뜨거워지는군. 그 나이에 그 정도의 성취를 이룰 수 있다니……. 솔직히 믿을 수가 없어."

 조금은 거드름을 피우며 앞으로 나서는 검황의 모습에 광마존은 실소를 했다.

 '저 어린놈이 감히…….'

 하긴 검황이 어찌 광마존의 나이를 짐작이나 하겠는가. 외견상으 로 그의 나이 이제 서른을 갓 넘긴 듯하니 검황의 입장으로 보면 새 파랗게 젊은 놈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런 사정들이 야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은 격돌할 준비를 서둘렀다. 검황은 허리에 비껴 맨 검 자루에 손을 갖다 대었다. 아무 특징 없는 광마존의 검에 비하면 지나치게 화려한 검이었다. 검 자루에는 갖가지 문양이 선명 하게 살아 꿈틀대고, 서서히 드러나는 검신 또한 휘황한 빛을 발하는 보검이었다.

 그는 좌수검(左手劍)이었다. 왼손으로 검을 뽑아내는 동작은 누가 봐도 노련한 검사임을 알게 해줄 만큼 절도가 있는 것이었다. 검을 뽑는 것이 뭐 그리 특별할 것이 있겠느냐 싶지만 어떤 일에나 어느 정도의 경지를 넘어서면 자세만으로도 그 사람의 경지가 어떠한지 를 알 수 있는 법이다. 그런 점에서 검황은 검을 뽑는 것만으로는 천 하 제일 검사라 불러도 좋을 사람이었다.

 검을 완전히 뽑아내자 검극을 하늘로 고정하는가 했더니 이내 가 슴 쪽으로 끌어내리며 얼굴의 좌, 우 옆면에 한 번씩 갖다 대었다. 자 기 딴에는 무슨 의미가 있는 행동인지는 모르나 광마존이 보기엔 겉 멋을 부리는 한심한 놈쯤으로 느껴질 다름이었다.

 "내 너를 어리다 생각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상대해 주마. 이왕이 면 나 같은 고수에게 목숨을 잃음도 영광으로 생각한다면 좋겠지만 그것은 힘들겠지. 자, 그럼 시작……."

 "개소리하지 말고 빨리 덤벼라."

 광마존의 이 말을 듣고 태연할 정도로 검황은 품성이 고아한 사람 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는 금세 내면에서 치솟아 오른 살기를 주체 하지 못하고 마음껏 발산되고 있었으니. 그는 곧장 검을 수직으로 세 우며 오른쪽으로 살짝 눕혔다.

 "내 무림의 선배 된 입장으로 건방지고 예의 없는 네 놈에게 따끔 한 훈계를 내리겠다. 먼저 삼초를 양보할 테니 네가 가진 수단을 다 부려 보거라."

 광마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갔다.

 '정말 정신 나간 놈이었군. 정말이지 저런 말을 하는 놈들의 사고 구조는 어떻게 생겨 먹은 걸까?'

 생명을 걸고 싸우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상대 의 지나친 배려를 양보할 광마존은 아니었다. 이게 웬 떡이냐, 하고 받아먹고 싶을 정도였다.

 "허허허."

 광마존은 웃음을 흘리며 검을 앞으로 내밀어 그를 가리켰다.

 '저놈만 죽일 수 있다면 내가 여기서 빠져 나갈 확률은 그만큼 높 아진다. 저놈이 방심하고 있을 때 죽인다. 그 이후에는 저 기분 나끄 도록 잘생긴 놈 하나 정도는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겠고……. 어쩌면 이곳에서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계산을 끝마쳤다.

 [검황, 놈은 무시해서는 안될 절대 고수요. 방심하지 마시고 최선 을 다해도……]

 초량의 전음은 중간에서 멈추고 말았다. 광마존이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음으로. 그는 곧장 발을 빠르게 놀리며 검을 치켜든 상태로 다 가왔다. 검황은 고개를 갸웃했다.

 '저놈의 검은 아까부터 지켜보았지만 그 수법의 형태가 분명치 않 단 말이야. 설마하니 초식의 한계를 넘어선 고수는 아닐진대 그 움직 임을 전혀 예측할 수가 없다.'

 그냥 서 있을 때는 몰랐는데 광마존이 움직이며 다가오자 검황은 상대가 자신이 생각하던 이상의 고수임을 깨달았다. 살갗을 찌르는 살기가 3장 밖에서도 느껴질 정도였다. 자신을 향해 날을 세우고 있 는 검에서는 날카로운 예기가 끊임없이 솟아 나와 피부 안으로 침투 해 들어오는 것 같았다. 검황은 경각심을 일으키며 상대의 움직임에 대응해 가기 시작했다. 그는 곧장 검을 사선으로 비껴 가슴 앞을 보 호하며 그의 발놀림을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 광마존과 대적했던 장로들 다섯은 검황을 바라보며 주의를 주고 싶었지만 그의 자존심을 생각하여 그만두기로 했다. 그 들도 실제 대적해 보고 나서야 상대의 무공이 상상하던 수준을 휠씬 상회하는 것을 알았다. 검황 정도라면 상대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그 리 쉽게 밀리지는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목숨까지 내놓아야 할 상황 으로는 치닫지 않을 것이라고 속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데 상대는 왠지 자신의 진실된 힘의 상당 부분을 감추고 있는 듯도 여겨졌다. 이런 불안감은 그들의 뇌리를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 었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태공과 검황이 함께 상대해야 한다는 건의를 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들은 한 순간도 놓칠 수 없다는 일념 으로 뚤어지게 두 사람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광마존은 이미 상대를 어떤 식으로 몰아 붙일지에 대한 계산을 마 쳐 놓고 있는 상태였다. 그와 검황의 간격이 2장여로 좁혀졌을 때였 다. 그때까지도 검황은 검을 가슴 앞으로 비껴 세우고만 있었다.

 '저놈이 정말로 삼초를 양보할 생각이란 말인가?'

 광마존은 오히려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인가, 그의 입가에는 회심의 미소가 잠깐이나마 어렸다가 사라졌다.

 "타앗."

 얼어붙은 장내의 공기를 일순 뒤집어 놓는 일갈이 광마존의 입술 을 비집고 흘러 나오고, 검에서는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검광이 번 쩍 빛을 발했다. 검극에서 비롯된 검강은 직선을 택해 흘러 나오다 검황의 몸 앞에서 순식간에 여러 갈래로 쫘악 갈라졌다.

 "헉."

 다급하게 헛바람을 집어삼킨 검황은 몸을 비틀며 상체를 흔들었 다. 그의 보법은 뛰어나긴 했으나 광마존의 공격을 무산시킬 정도는 아니었다. 광마존은 순간 검을 앞으로 내밀며 열 십자로 검을 휘둘 렀다.

 콰앙 휘청거리며 물러서는 검황의 눈은 불신으로 가득했다. 눈앞을 가 득 채우는 검강은 또다시 그의 생명을 요구하며 나섰다. 결국 그는 애초의 약속을 뒤집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이 낼 수 있는 최고 의 속도로 연속적으로 삼검을 내리쳤다.

 취리리리 콰앙 연신 부딪치는 충돌음에 따라 검황의 어깨가 함께 춤을 추었다. 상 체, 하체 할 것 없이 폭풍처럼 몰아치는 광마존의 공격은 예리하기도 했지만 강력하기 그지없었다. 검황은 그 공격들을 막기에만 급급했 다. 순간 아차 하는 순간이면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을 입을 수 있다 는 위기감으로 심장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지나친 긴장 때문인지 호흡마저 거칠어지는 듯도 했다. 검강의 흐름은 일정치가 않았다. 채 찍을 휘두르듯이 끝이 갈라지는가 하면, 속도의 가감이 어지럽고 불 규칙적으로 뒤섞이어 예측한다는 것이 불가능했다. 검막을 쳐서 막 으면 더 강한 힘으로 때려 버리고, 초식으로 방비하면 허를 찌르며 위협한다. 현란한 보법으로 피하고자 해도 어느새 상대는 바짝 따라 붙으니 그로서도 이렇게 곤란한 경우는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대결을 주의 깊게 살펴 가던 초량은 이 순간 솔직히 놀라고 있었다. 그가 중원에 들어와서 만난 적들 중에는 혈마천의 대총사가  가장 강했다.

 '저 자, 결코 대총사의 아래가 아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강할 수 도.'

 그는 절로 망설여졌다. 과연 저 자가 함부로 날뛰도록 보고만 있을 것인가, 아니면 검황과 합공을 해서라도 피해를 최소화할 것인가. 결 정하지 못하고 섰다. 연신 뒤로 물러서는 검황 역시 다급한 중에도 내심 염두를 굴렸다.

 '이런 식이라면 놈에게 당할 수도 있게다. 한번 뺏긴 승기를 어떻 게 해서든 가져 와야 한다.'

 그 와중에도 빠르게 눈알을 굴리던 그에게 광마존의 품에 안긴 천 향옥봉이 들어왔다. 광마존의 검이 또다시 검황의 심장을 노리고 들 어올 때였다. 검황은 검을 일시 뒤로 후퇴하며 몸을 좌우로 크게 흔 들었다. 이후 갈라지는 검강을 향해 검을 휘돌려 막고서는, 뒤로 퉁 기는 힘을 빌려 거리를 벌리며 오히려 따라 들어오는 광마존의 왼쪽 가슴을 향해 힘껏 찔렀다. 광마존의 공격이 더 빨랐기에 이대로라면 검황이 크게 낭패를 보는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 순간 광마존은 황급히 뒤로 몸을 빼낼 수밖에 없었다. 검황이 노 리는 부위는 자운의 심장 쪽이었기 때문이다. 놈을 처치한다 해도 공 격은 멈추지 않고 자운을 상하게 할 것이다.

 "이놈 받은 대로 돌려 주마."

 검황은 큰소리를 치며 광마존을 향해 펄쩍 뛰어 올랐다. 허공으로 3장이나 도약한 검황은 검을 수직으로 세우고 있었는데 달빛을 받아 서인지 빛 무리가 사방으로 중첩되며 확산되어 갔다. 이어 그의 검에 서는 눈앞을 어지럽게 하는 검강의 물결이 파도처럼 밀려 가고 있었 으니. 광마존은 감히 태만히지 못하고 검에 내공을 주입했다.

 '천마삼검 이식 천마앙복 변.'

 광마존은 속으로 천마삼검의 이식을 되뇌이며 힘차게 검을 떨쳤 다. 처음으로 근접전이 아닌 검공 대결로 돌입한 것이다. 검황으로부 터 시작된 검의 물결은 광마존의 천마삼검 이식에 모조리 격퇴되어 버렸다. 이식은 변화를 위주로 한 검식! 많은 적을 상대할 때도 효과 적이지만 검황처럼 변환을 위주로 한 공격에 대처하기에도 그만이 었다.

 어깨를 움찔거린 광마존에 비해 검황은 허공에서 몇 장이나 뒤로 달려 가며 몸을 뒤집어야만 했다. 이번의 대결만으로는 내공의 깊 이 면에서 광마존이 앞서고 있음을 말해 주었다. 그것을 느꼈는지 검황의 얼굴로 순간적으로 놀람으로 급변하고. 이를 지켜보던 초향 과 장로들 역시나 불신으로 얼굴 근육이 꿈틀거리고만 있었다. 그 러나 언제나 현실은 냉정한 법이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사 실인 바에야.

 "이놈, 이것도 받아 봐라."

 검황은 여전히 허공에 둥둥 뜬 채 검 자루를 고쳐 잡았다. 그것을 바라보던 장로 중의 하나가 부지불식간에 탄성을 발한다.

 "아, 혹시 천랑검(天浪劍)을."

 검 자루를 거꾸로 고쳐 잡은 검황은 위에서 아래로 검을 찍어 내렸 다. 그러나 지금까지와는 달리 강맹한 한 줄기 검강만이 광마존에게 로 돌격하는데.

 '천마삼검 일식 천마현신 섬.'

 또다시 천마삼검이 발동되었다. 빠르기를 위주로 한 일식은 번개 를 무색케 할 정도로 쾌속했다.

 쇄애애액 쿠우우우 심상치 않은 소음들을 동반한 채 두 사람의 검강은 가운데 지점에 서 격돌했다.

 콰광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검황은 연달아 검을 아래로 향한 채 찍 어 눌렀고 그 속도는 점차 배가되었다. 그런가 하면 광마존의 검 역시 나 빠른 속도로 그의 약점을 찾아 들어갔다. 두 사람의 공격은 점차  위력을 더하고 있었다. 검황의 검은 검풍을 동반하며 뭐운 속도로 광마존을 찾아들고, 광마존의 검 역시 이보다 더 빠르게 검황의 위기 를 부추겨 갔다.

 콰콰쾅 두 사람 사이의 땅 거죽이 뒤집히며 허공을 자욱하게 가두어 버리 고, 어느 지점에선가 몰아치기 시작한 바람이 그것을 다시금 휘말아  올린다.

 두 사람은 벌써 수십 번이나 위치를 바꾸었다. 비교적 광마존보다 자유로운 검황은 기력이 딸릴 때마다 바닥을 차고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고, 가끔씩은 광마존 곁으로까지 접근하여 공격을 하기도 했다.

 광마존 역시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지만은 않았다.

 대결은 그 끝을 알 수 없을 것 같았다. 분명히 검황이 손해를 보는 듯했지만 그렇다고 치명적이지는 않았다. 자존심이 상한 검황의 공 격은 점차로 매서워져 갔다. 간혹 위기에 몰린다 싶으면 천황옥봉을 향해 악독한 살수를 펼치는 걸 잊지 않았다. 수십 합이 오갔지만 확 실하게 상대를 제압할 정도의 겨가는 아닌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구나. 결국은 밑천까지 모두 드러내는 수 밖에.'

 광마존의 눈빛이 일순 번쩍거렸다.

 잠시 호흡을 고르며 서로를 마주보던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새로운공격을 준비했다. 검황 역시 마지막 수를 준비라도 하는지 검 을 다시 고쳐 잡는다. 이번에는 검극을 땅바닥으로 향했다. 그리고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광마존의 시선을 찾아 갔다. 광마존의 검이 서 서히 들리며 허공으로 향한 순간이었다.

 "가라."

 패애애앵 검이 회전을 일으키며 광마존의 손에서 떠났다.

 "이기어검인가?"

 지켜보던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 나온 소리였다. 

 검황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그 또한 검을 허공 중으로 날렸다.

 쾅 콰쾅 허공 중에서 두 검은 불꽃을 피워 올렸다. 한 번 씩 부딪칠 때마다 귀가 멍멍해질 정도의 충돌음이 연신 터져 울렸다. 두 사람을 자세히 살펴보면 검황은 두 손을 앞으로 뻗어 검을 조종하고 있었지만 광마 존은 그렇지 않았다. 순간 광마존이 그에게로 돌격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을 본 검황은 놀라 어쩔 줄을 몰라했다.

 '저, 저놈의 검의 경지가 목어검(目御劍) 이상이란 말인가?'

 그는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찌 저렇게 새파랗게 어린놈이…….'

 또다시 언급되는 광마존의 나이. 자신은 수어검(手御劍)의 경지에 이제 갓 들어섰다. 그런데 상대는 목어검 이상이니 이 승부는 해보나 마나였다. 그가 다급해 하고 있을 때 다가서는 광마존을 향해 누군가 공격을 퍼부어 제지하려 했다. 초량은 손 안에 쥐고 있던 섭선을 활 짝 펼치며 검황을 향해 달려드는 광마존에게로 힘껏 던졌다.

 피리링 기이한 호선을 그리며 섭선은 광마존의 전면을 향해 날아갔다. 광 마존은 한 손을 펼치며 장력을 발출하여 그작스런 공격을 막아냈다.

 쾅 어느새 초량은 검황의 옆에 바짝 다가섰는데 그의 손에는 섭선이 얌전하게 쥐어져 있었다. 광마존은 뒤로 물러서며 초량을 쳐다본다.

 검황과 광마존의 검은 모두 회수된 뒤였다.

 "설마하니 둘이 한꺼번에 덤빌 참인가?"

 검황의얼굴이 수치로 벌개져 가는 동안도 초량의 얼굴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대가 그만큼 강하다면 우리 둘뿐만이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덤벼야 하겠지."

 "그런가?"

 "진정 의외군. 당신이 이정도의 고수일 줄이야. 그대는 대체 누군 가?"

 초량은 진심으로 상대의 정체가 궁금했다. 처음에는 자신이 사랑 하는 자운의 남자라는 것이 그를 파악하는 의미의 전부였지만 지금 은 달랐다. 저 정도의 고수라면 정세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 할 수 없 겠고, 그런 그가 소속되어 있을 조직이 궁금해졌다. 초량은 자신이 아 는 정보를 총동원하여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이 그 이름이라도 들어 본 인물들 중에서 마땅한 고수는 없었다.

 "내가 누구인지는 알 것 없다."

 "자운 소저가 예전에 남도맹에서 혼례를 올린 적이 있었다고 들었 다. 그 상대는 일인지하 만인지상객 담대추광. 듣기로 무림맹의 대령 사인 옥면신룡 문윤의 수하라고 하더군. 난 그대가 그 사람인 줄 알 았건만. 이제 보니 다른 사람이었던가 보군. 적어도 당신의 무위라면 옥면신룡의 수하나 할 사람은 아닐 테니까. 그리고 현재 그 자는 우 리 정보망 그 어디에서도 포착되지 않는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셈이지. 진정 그대가 그 사람인가?"

 "좋을 대로 생각해라. 내가 누구인가는 그다지 중요치 않다. 난 단 지 내 앞을 막는 자들을 죽일 뿐이다."

 초량은 그를 향해 비웃지 않았다. 광마존은 여전히 태연하기만 했 지만 실상 속마음은 점점 타들어만 갔다.

 '저놈이 함께 덤빈다면……. 빌어먹을, 이제는 다 틀린 건가. 아니 다, 아직 낙담하기는 이르다. 최선을 다하면 분명히 기회는 올 것이 고 나는 그 기회를 결단코 놓치지 않는다.'

 "그런가? 그렇다면 더 이상 말은 필요 없겠군. 그리고 웬만하면 자 운 소저는 내려놓는 게 어떻겠는가? 어차피 이번 대결에서 승부는 날 터인데. 자운 소저가 너무 힘겨워하지 않겠는가?"

 초량은 광마존의 품에 힘겹게 안겨 있는 자운을 염려했다. 광마존 은 품속의 자운을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두 눈을 꼭 감고 있 었다. 그는 그녀를 안고 있는 두 팔에 힘을 풀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 이 열리며 그를 올려다본다. 두 사람의 눈길 가운데 많은 대화가 오 갔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고는 광마존의 뒤에 가서 섰다. 그 모습 가운데에는 두 사람간의 절대적인 신뢰가 묻어나 고 있어 초량을 더욱 안타깝게 했다.

 "자, 이제 생사의 갈림길이 우리들의 운명을 저울질하겠지. 우리  는 최선을 다할 걸세. 아무쪼록 그대에게 행운이 있었으면 좋겠군."

 광마존은 그가 진심으로 하는 소리인지 그냥 해보는 소리인지를 분간할 수 없었다. 과연 서로 죽이고 죽어야 하는 적을 앞에 두고 저 런 말을 할 수 있을까. 그는 상념을 털어 버리려는 듯 힘차게 한 발을 내딛었다.

 검황은 좀 전 격돌에서의 위기를 태공 초량의 도움으로 모면했다 는 수치심 때문인지 한마디도 거들지 않고 잠자코만 있었다.

 [검황, 어차피 저 자의 능력이 우리 개개인을 능가하는 이상 합공 은 불가피합니다. 제가 저 자의 주의를 돌리는 동안 허점을 노려 보 십시오.]

 초량의 전음에도 검황은 시큰둥했다. 아직도 그는 자신의 능력이 눈앞의 새파랗게 젊은 놈에게 뒤진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가 않 았다. 합공이라니……. 그는 꿈에서라도 자신이 누군가와 함께 상대 해야 할 정도의 고수가 중원에 있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자신의 무공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 끝까지 닿아 있었건만 수 천명의 수하들 이 보는 앞에서 이런 치욕을 겪을 줄이야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초량이 두 발을 빠르게 놀리며 광마존에게로 향했다. 그가 발을 놀 리는 것은 특이했다. 바닥에 나지막하게 깔려서 허공을 밟고 빠르게 발을 놀리니 바닥에서 먼지가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둘 사이의 간격 을 좁힌 초량은 섭선을 일직선으로 뻗는가 했더니 끝을 휘돌리며 채 이어지지 않은 이지러진 원을 그렸다. 그러자 광마존이 왼손을 뻗어 맞상대해 왔다.

 탁탁탁 손과 부채가 부딪칠 때마다 가슴을 시원하게 두드리는 소리들이 올려 나왔고, 오므렸다 펼쳤다 굽혔다 꺾었다 하는 손목 관절의 놀림 도 그 박자를 따라 경쾌하게 움직여 갔다.

 쉬잉쉬잉 초량이 휘두르는 팔의 속도가 빨라지고 현란해지자 허공을 가르는 소음이 더욱 기승을 부리며 고조되었고, 그에 따라 광마존의 손에서 도 은은한 수강이 휘몰아치며 섭선의 공격을 차단해 갔다. 둘의 발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위치를 바꾸었으며, 그들의 자세 또한 기 묘할 정도로 변화를 보였다.

 뻗어 있던 섭선이 광마존의 손에 막히는 순간, 초량의 손에 있던 그것이 활짝 펼쳐지며 광마존의 목을 그어 갔다. 광마존은 여전히 한 쪽 손에 쥔 검은 사용하지도 않고 발을 뒤로 미끄러뜨리며 허리를 살 짝 뒤로 꺾었다. 그러자 그의 목 밑을 부채가 아슬아슬하게 비켜간 다. 오른손에 쥔 부채를 활짝 펼친 상태에서 초량은 왼 주먹과 두 발 을 동시에 사용하기 시작했다. 가끔씩 가공하다 할 정도의 장력이 왼 손에서 뿜어지기도 했고, 섭선의 끝에서 시작된 강기가 스며 나와 광 마존을 핍박해 가기도 했다.

 결국 이렇게 되자 광마존도 검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검으 로 중단에서 상단으로 부단히 움직여 가며 힘을 싣기 시작했다. 점차 로 그의 검에서는 공간을 송두리째 부셔 버릴 듯한 검강이 용솟음치 며 실타래처럼 풀려 나갔다. 초량은 근접전에서 조금은 양보하여 약 간의 간격을 더 허용하고야 만다.

 광마존의 공격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검을 쥐고 있지 않은 왼손 에서 뿜어지기 시작한 장력은 그 형태나 수법이 눈이 어지러울 정도 로 다양하고 또한 강력했다. 상대하는 초량이나 지켜보고 있던 검황 도 이 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무슨 속셈인지 검황은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 접전 가운데 합류하지 않는다. 점차 초수가 늘어날수록 초량의 동 작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다급해진 초량이 검황에게 전음을 보 내었다.

 [대체 뭐하고 계신 겁니까?]

 '내가 네게 생명의 빛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게끔 너 또 한 위기에 처했을 때 나서려고 그러지. 흐흐, 더군다나 결국 다급해 지면 네가 지닌 최후의 수도 볼 수 있으니 이거야말로 일거양득인데 이런 좋은 기회를 내가 마다할 리가 있느냐?

 초량은 몇번이나 아슬아슬한 위기를 넘기고 있었다. 그럼에도 검 황이 합공을 하지 않자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이, 이놈의 늙은이. 대체 무엇을 망설이는 것인가.'

 광마존의 공격은 시간이 지날수록 다양해져 갔다. 검강의 위력에 다가 간혹 섞어 펼치는 장력을 피하거나 막기 위해서 초량은 진땀을 흘려야만 했다.

 폭풍처럼 몰아쳐 오던 광마존이 한 순간 멈칫거리며 제자리에 멈 추어 섰다. 그것을 본 초량은 무슨 이유인지를 몰라 의구심이 들었지 만 어쨌든 한숨 돌릴 수 있는 기회가 왔으니 다행이라 생각되었다.

 광마존의 시선은 초량이 아닌 검황 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무엇인가 를 염려하는 듯한 눈치였다. 초량은 짚이는 바가 있었다.

 '자운을 염려해서인가? 그렇군. 내가 수비하느라 뒤로 밀려 나오 는 바람에 자운과의 간격이 그만큼 벌어진 거군.'

 검황은 그런 상황 앞에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닫고 는 내심으로 분통을 터트렸다.

 '빌어먹을 병신 놈! 밀어붙이는 김에 확실하게 해야지. 이러면 아 무것도 얻은 것도 없지 않은가.'

 "흠흠, 태공. 이제 몸 좀 푸셨을 테니 같이 저놈을 작살내 보십시 다."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뱉어내는 뻔뻔스런 말에 태공 토량의 얼굴 이 살짝 일그러졌다.

 "그럼 지금까지 내 몸이 풀리길 기다리신 거구려."

 빈정거리는 초량의 말에 검황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둘의 주고 받는 말을 들으며 광마존은 홀로 고민에 빠져들었다.

 '결국 저 영악한 놈이 있는 한은 자운의 안위를 보장하지 못한다.

 더군다나 다른 놈들도 믿을 수 없으니……. 결국은 일정 구역을 벗어 날 수 없다는 결론.'

 이래저래 그에게는 모든 것이 불리했다. 자운의 안위까지 걱정해 야 하는 부담은 광마존에게 여러 가지 불리한 상황을 만들어 갈 것이 다. 지금의 불리한 상황을 모면할 한 가닥 희망이라면 둘 중에 하나 를 먼저 처리하는 것인데, 그건 거의 유일한 방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그리 쉽게 처리할 수 있는 자들은 아니었고, 최소한 수십 합 이상의 겨룸이 있지 않고는 불가능 했다. 그런데다 둘이 한꺼번에 덤비기라도 한다면 생명조차 장담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이런 저런 생각에 몰입해 있는 광마존을 향해 두 사람이 서서히 산 격을 좁히며 다가섰다. 그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며 자세를 바로 잡 았다. 이미 마음속으로는 대비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두 사람이 함께 다가오자 불안감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그의 몸을 긴장시켰다.

 '처음부터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 결국은 어검술을 사용하는 수밖 에는 없다. 그리고 내게는 아직 비장의 수가 있다.'

 그가 지금껏 어검술을 자제해 온 것은 공력 소모가 극심한 터라 오 랫동안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역시나 어검술을 사용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 있으니 그것을 펼친다고 해서 쉽사리 제압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방법이 없었다. 공력 소 모가 많다 하더라도 두 사람을 한꺼번에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 이 거의 유일했다.

 광마존은 서서히 공력을 끌어 올려 갔다. 다가오던 두 사람은 의미 심장한 시선을 서로 교환한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발을 박차며 도약 했고 순식간에 거리를 단축하며 광마존의 좌우에서 합격해 왔다. 그 들의 검과 섭선에서는 동시에 눈을 부시게 하는 빛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각기 광마존의 심장과 머리를 노려 갔다.

 "타앗."

 공기를 가르는 기합성이 광마존의 입에서 허공 중으로 흩어지자 그가 들고 있는 검의 주위로 강기의 륜이 하나 둘씩 생겨나더니 검을 이리저리 흔드는 순간 다가오는 두 사람의 강기를 정면으로 부딪쳐 갔다. 초량은 서번을 활짝 펼친 채 젖은 물기를 털어내기라도 하듯 떨쳤고 검황은 손목을 비틀며 검신을 회전시켰다.

 콰광 또다시 충돌음이 터져 나오며 새파란 불꽃을 피워 올렸다. 힘의 여 파로 바람이 몰아쳐 가며 세 사람의 옷자락을 허공 중으로 휘말아 올 렸다. 그들은 모두 어금니에 힘을 주었다. 이 한 번의 부딪침은 그들 의 생사를 결정할 격전의 시작을 알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충격으 로 반탄되는 바람에 그들의 간격은 조금 더 벌어졌다.

 순간 광마존은 검을 허공 중으로 띄웠다. 그의 검은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기라도 한 듯 공간을 쏜살같이 가르며 재공격을 준비하는 검 황에게로 직격했다. 그 힘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임을 직감한 검황은 전력을 기울여 검강을 피워내었고, 이를 확인한 초량 또한 그가 어떻 게 대비하는 것에는 관심 없이 광마존을 향해 손을 쓰기 시작했다.

 막 광마존의 근처에까지 도달한 순간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 는 것을 느낀 초량은 순간 긴장하기 시작했다.

 '은형술(隱形術)인가? 이, 이것.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호흡을 감추긴 어렵지 않지만 존재감마저 느껴지지 않다니…….'

 그는 순간 당황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손에 쥔 섭선에 힘이 들어 가기 시작했다. 꼼짝하지 않고 주변의 미세한 움직임에도 온 신경을 기울여 보았다. 그렇지만 느껴지지 않기는 매 한가지였다. 그도 은 형술이라면 어느 정도는 펼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이 정도의 은형 술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어서 잠시 어찌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천마잠형술의 위력은 초량 정도의고수마저 그 존재감을 느끼지 못 하게 했다.

 '어딘가 있다. 아무리 뛰어난 은형술이라 해도 움직이는 순간에는  내게 포착될 수밖에 없다.'

 그는 아예 두 눈을 감은 채 기다렸다.

 슈우욱 무엇인가가 다가선다고 느낀 순간 초량의 눈이 떠지며 눈앞을 향 해 섭선을 일직선으로 찔렀다..

 콰앙 "으음."

 그는 순간 뒤로 밀려나는 몸을 두 발로 지탱시키며 묵직한 신음을 발했다. 

 슈우우웅 '빌어먹을, 이런 식이라면 오히려 내가 불리하다. 정말 대단한 자 다. 어검술을 펼치며 동시에 내게 이런 공격을 퍼부을 수 있다니.'

 그는 또다시 발작적으로 두 손을 앞으로 휘저었다.

 콰광 "억."

 소맷자락이 찢어져 펄럭거렸다. 위기감을 느낀 초량은 주변을 빠 르게 맴돌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검황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그 역 시 고전중이었다. 상대의 어검술은 검황보다 더 강하고 세밀했다. 그 는 진땀을 흘리며 정신을 못차리고 있는 듯 보였다. 초량은 무엇을 결심했는지 입술을 질끈 깨문다.

 "좋다, 제대로 한 번 어울려 보자."

 그는 신형을 제자리에 딱 고정시키더니 갑자기 회전을 하기 시작 했다. 거의 형체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회전해 갔다. 바 로 그 순간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장면이 연출된다. 그의 몸 에서 또 다른 신형들이 분리되며 회전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나, 둘,

 셋……. 무려 여덟로 분신한 초량은 사방으로 움직여 가며 회전을 했 고, 그런 가운데 상대의 움직임이 포착되기를 기다렸다. 멀찍이 서 있던 자운은 장내의 상황을 지켜보며 조바심을 내었다.

 두 사람을 상대로 이 정도로 훌륭하게 싸울 줄은 그녀도 생각지 못 했지만 아직은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 자신이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이, 아니 오리혀 짐이 된다는 사실이 마음을 무겁 게 하였다.

 광마존의 상황도 그다지 좋다고만 볼 수 없었다. 지금 그가 펼치 는 무공은 극심한 내공 소모를 가져오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검황을 향한 검을 조절해 가며 그의 허점을 노리 고, 천마잠형술을 극성으로 펼치며 장력을 발출한다는 것은 그를 점 점 지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다른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 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었지만 상대를 손쉽게 제압하기도 어렵기에 장기전으로 갈 수밖에 없다는 불안감이 그의 몸을 한없이 무겁게 만 들었다.

 '저놈이 저런 식의 대응을 한다는 자체가 장기전으로 가자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래 끌어서는 내게 희망이 없다. 그렇다면…….'

 광마존의 결정은 장내 싸움의 형태를 변화시켰다. 그가 검을 회수 하고 장내에 모습을 드러내자 검황과 초량도 의외였는지 멈칫거렸 다. 바로 그때 검황은 고함을 질러대었다.

 "모두 저놈을 쳐라."

 장로들을 바라보며 하는 소리인지라 살아 남은 다섯 명의 장로들 은 얼떨결에 격전장으로 합류하고야 말았다. 그런 그들을 보며 초량 은 언짢은 기색이었다. 그들까지 싸움에 합류시킬 필요가 있느냐는 의미였다. 지금도 그는 약간의 수치심을 지니고 있건만, 이제는 아예 떼로 덤벼야 할 판이지 않은가.

 "비겁한 놈들. 그러고도 너희가 진정한 무사라 할 수 있더냐?"

 광마존의 이런 말은 초량을 더욱 부끄럽게 만들었다.

 "개소리 마라. 승부에 임하면 승리만이 최고의 미덕이다. 승부사 에게 어떻게 이겼냐 따위는 하등 쓸모 없는 헛소리지."

 검황이 해대는 소리가 초량을 위로해 주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이 미 모양새는 그렇게 갖추어져 갔으니 다시 되물린다는 것도 어색했 고, 솔직히 장로들의 합류를 속으로는 조금쯤은 반기고 있는지도 몰 랐다. 광마존은 두 손으로 검을 힘차게 잡으며 한 걸음을 떼었다. 그 리고 그의 입에서는 묵직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내 오늘 여기서 죽어 가루가 되는 한이 있어도 너희들 모두를 저 승의 동반자로 삼고야 말겠다."

 그는 결코 살아날 희망 따위를 말하지 않았다. 그는 가능성 있는 일만 기대하는 사람이다. 좀 전의 두 명만 해도 벅찼는데 나머지 다 섯 노인마저 함께 덤빈다면 살아 남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했다. 그것 을 알기에 그는 차라리 속전속결로 한 놈이라도 머리 숫자를 줄여 놓 는 길만이 조금이라도 가능성을 높이는 것임도 알았다. 그래서일까,

 그는 지나치게 서둘렀다.

 푸확 앞쪽으로 번개같은 동작으로 돌진한 그는 양쪽으로 늘어서 있는 노인들을 향해 검을 힘차게 휘둘렀다. 사방으로 번지는 검강이 채찍 처럼 휘돌려지고 그 사정권 안에는 돌개바람이 휘몰아쳤다. 옷자락 을 펄럭이며 수비 대형을 갖추는 노인들은 이미 각오하고 있던 일인 지라 2, 3인이 한 조가 되어 그의 검을 막아 갔다. 그 틈새로 검황의 공격이 이루어졌다.

 그는 노인들의 머리 위를 뛰어넘으며 힘차게 검을 떨구었다. 3장 이 넘을 검강이 쭈욱 앞으로 뻗으며 광마존을 강타해 갔다. 그러나 그 순간 이미 광마존의 위치는 다른 곳을 점유하고 있었다. 검황의 공격은 맨땅을 잘라 놓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허공에서 몸을 뒤집으며 광마존이 움직여 간 곳으로 재차 공 격해 간다. 그때는 마침 광마존과 초량이 마주치고 있었다. 두 사람 이 반동되어 나오는 틈을 이용하여 검황은 광마존의 배후를 노렸다.

 바로 그때다. 광마존이 몸을 뒤로 팩 돌리며 검을 아래에서 위로 쳐 올렸고 검의 사정권에 있던 노인 하나의 목이 뎅강 잘려 나가고 말 았다.

 쾅 검황의 검과 광마존의 검이 부딪치는 순간 장로들의 공격이 광마 존에게 집중되었다. 광마존은 검을 수직으로 세우며 검막을 펼쳐 고 스란히 타격을 맞아들였다.

 퍼펑 주르르륵 뒤로 밀려난 광마존을 이번에는 초량이 반겨 주었다. 그들의 공격 은 숨 쉴 팀 없이 연결되고 있었다. 광마존은 연속적으로 사방으로 검을 휘둘러대야만 했다. 한 순간의 방심으로도 움직이기 힘들 중상 을 당할 수 있었기에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검황과 초량의 공격이 동시에 광마존에게로 떨어지자 그는 검을 상단으로 누여 힘겹게 막 았다.

 쾅 "으음."

 묵직한 신음성이 토해지며 그는 뒤로 주르륵 밀려나야만 했다.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네 명의 노인들이 그를 배후에서 공격해 왔다. 이 번에는 아예 퇴로까지 차단할 요량으로 공격 범위를 넓게 잡는다. 그 것을 느낀 광마존은 즉시 천마잠형술을 펼쳤다.

 "흥, 이제는 안 통한다. 검이 없다면 모를까, 검의 예기가 느껴지는 이상 너의 위치는 드러난 것이나 다름없다."

 초량의 그 말은 사실이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초량과 검황의 공격 이 그의 위치를 정확하게 찾아들었다. 이래저래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동안도 자운은 가슴만 졸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팩 "꺽."

 광마존의 검이 노인 하나의 배에 깊숙이 박혔다. 그는 그 상태로  옆에서 공격해 들어오는 초량의 공갹을 막아 갔다. 그가 검을 빼내지 않고 옆으로 쓸어 버리자 노인의 옆구리가 터져 나갔다.

 쾅 천마잠형술이 소용없음을 느낀 광마존은 아예 내공 소모를 줄이고 자 전신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이런, 시간이 지날수록 놈은 지쳐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힘 이 넘치기만 하는구나. 이런 식으로 가다가는 우리 쪽의 피해가 막심 하다.'

 벌써 장로들 일곱 명 중에 네 명이나 죽었다. 검황은 초량이 그에 게 덤비는 틈을 빌려 빠르게 노인들의 배후로 돌아갔다. 그의 움직임 을 신경 쓰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발을 박차며 유령처럼 몸 을 솟구친 검황의 목표 지점은 격전장의 바깥쪽이었다.

 "멈춰라."

 검황은 의기양양해져 큰 소리를 질렀다. 그가 고함을 쳐대자 일시 싸움은 멈추고 만다. 그들의 고개가 소리가 들려 온 곳으로 돌아가고 검황을 확인해 갔다.

 "이, 이 비겁한 놈."

 "하하하하, 이 년이 죽어도 좋다념 계속 팔딱거려 봐라."

 검황의 검은 천향옥봉의 목에 지그시 대어져 있었다. 그녀 또한 놀 랐는지 얼굴이 핼쓱해져 버렸다. 그 모습을 본 초량이 막 뭐라고 입 을 떼어 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검황이 먼저 입을 열었다. 

 "태공,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오. 이 모든 것이 쓸데없는 피해를 줄이고자 하는 충정에서 비롯된 것이니 아무 소리 마시기 바라오. 어 차피 승부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하오. 저놈을 이대로 둔다 면 우리 피해도 무시할 수 없고 괜스레 그런 피해를 감수해야 할 이 유가 없소."

 초량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자운을 보 기가 겁이 나는지 의식적으로 그녀의 눈길을 피해 버렸다.

 "자, 이제 검을 버리고 투항하는 일만 남은 것 같은데. 네가 사랑하 는 여자가 네 앞에서 피를 토하며 죽는 모습을 감상하고 싶다면 끝까 지 저항을 하되 그렇지 않다면 순순히 사로잡히는 것이 어떻겠느 냐."

 "저는 상관하지 마시고 이 비열한 악도, 악."

 검황이 그녀의 머리털을 힘껏 잡아 당겼다. 그러자 그녀의 처연한 얼굴이 달빛 아래 쳐들리고야 만다. 그녀의 얼굴엔 체념이 빠르게 tm 쳐 갔다.

 '이 바보 같은 놈, 그렇게도 신경을 써야 한다고 스스로 주의를 주 었건만…….'

 광마존은 스스로를 질책했다. 그의 검은 천천히 바닥을 향해 늘어 뜨려지고야 만다. 힘없이 어깨를 떨군 그의 행색은 조금 전까지 용맹 을 떨치던 모습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이었다.

 검황이 고갯짓으로 장로 중 하나에게 신호를 했다. 살아남은 장로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광마존에게 다가갔다. 아직은 그가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가 다가오는데도 광마존은 꼼짝하지 않아다. 정말 로 모든 것을 포기한 것인가? 자신의 생명을 적들에게 이렇게 허무하 게 내던질 참인가? 그가 급작스럽게 고개를 쳐들자 다가서던 노인이 움질 하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광마존의 시선이 자운을 찾아 갔 다. 광마존과 눈길이 마주친 그녀는 눈빛으로 말했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 제발 여기서 살아 남으라고……. 그 또한 그녀의 무 언의 말을 듣고 있는가, 광마존의 두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떨림의 정도는 그녀에 대한 사랑의 깊이와 비례하는 듯했다.

 "뭐 하는 거냐? 어서 놈을 제압하지 않고."

 검황의 다그침에 또다시 용기를 얻은 노인이 살금살금 다가서기 시작했다. 바로 지척에 다다라도 광마존은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다가서던 노인 또한 적이 안심이 된다는 듯 한숨을 토해내며 그의 몸 의 혈도를 제압하려 손을 뻗었다.

 바로 그 순간 돌아서 있던 광마존의 몸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다 가선 노인의 뒤로 재빠르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의 손은 상대의 목 줄기를 움켜쥐었다.

 "켁."

 불의의 기습을 받은 노인은 속수무책으로 광마존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그는 노인의 목을 움켜쥔 채 검황을 쳐다보았다.

 "어서 그녀를 놔 줘라. 그렇지 않으면……."

 "그렇지 않으면?"

 검황은 빙글거리며 웃었다. 그에 반해 광마존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렇게 멍청한 놈 하나랑 이렇게 훌륭한 인질이랑 바꾸란 말이 냐? 그런 쓸데없는 놈은 있으나마나다. 죽이려면 빨리 죽여라, 흐흐 흐."

 광마존은 잠시 어찌 할 바를 모르고 당황했다.

 "순순히 투항한다면 이 년의 목숨만은 살려 주마. 빨리 선택해라."

 검황의 다그침에 광마존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어찌해야 하는가. 내가 순순히 저들에게 잡힌다면 자운은 안전할 지도 모른다. 최소한 저 녀석이 있는 한은…….'

 광마존의 고개가 슬쩍 초량에게로 향했다.

 '결정을 내려야 한다. 자운이 저놈 손에 있는 한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이렇게 허무하게 포기해야 한단 말인가…….'

 그는 서서히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손아귀에 움켜쥐고 있는 노인 의 목을 쳐다보고는 자운을 향했다. 목에 대어져 있는 검의 서늘함 때문인지 곧 벌어질지로 모를 사랑하는 사람의 불행에 대한 예감 때 문인지 그녀의 얼굴은 점차 빛을 잃고 파리해져 갔다. 광마존의 손에 힘이 가해졌다.

 "켁."

 서서히 힘을 주자 노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어 간다. 점차 압력 에 못 이겨 푸르스름해지는 듯도 했다. 그것을 본 검황의 검이 꿈틀 했다.

 "네가 진정 이 여인의 안위 따위는 상관없다는 말이냐."

 검황은 슬쩍 검에 힘을 주었다. 천향옥봉의 입술이 덜덜 떨리며 경 련하고 그것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어느새 검날은 여인의 목에 선명한 핏자국을 남기고 만다. 가늘게 맺힌 핏방 울이 서서히 가녀린 목을 타고 흘러 내렸다.

 "멈춰, 멈춰라."

 광마존의 발작적인 고함에 검황은 미소를 지었다. 승리자의 미소 였다.

 "흐흐흐흐, 너의 용맹은 대단하다만 이처럼 큰 혹을 옆에 두고서야 소용이 없는 일이지. 참 애석한 일이야."

 짐짓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기까지 하는 검황을 보며 광마존은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힘줄이 툭툭 불거지며 살아 꿈 틀대었다. 내면의 분노가 혈관을 타고 그의 전신을 빠른 속도로 휘감 아 돌았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그의 눈은 자운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 가운데 그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운, 내 그대 마음을 모르지 않지만, 어찌 내가 당신의 생명을 저 버릴 수 있겠소. 이미 여기 오는 순간 생명에 대한 미련은 버렸음이 니. 그대 하나만이라도 살아날 수 있다면……. 보아하니 저놈은 당 신을 사랑하는 것 같고…… 나만 없어진다면 그대는 오히려 안전해 지겠구려.'

 내심으로는 결정을 내렸지만 그리 쉽게 포기할 수 없었던지 잠시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망설였다. 지금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두 가지. 하나는 자운의 생명을 돌보지 않고 끝까지 싸우는 것. 마지막 하나는 저들이 바라는 대로 순순히 사로잡히는 것. 그 어느 것도 쉽 사리 선택할 수 있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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