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환상지대에서 만난 마계의 지배자 (97/111)

 2. 환상지대에서 만난 마계의 지배자

 아수라들을 가까이서 대해 보니 별반 인간과 다른 점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숨쉬는 것마저 거북한, 섬뜩한 기운이 느껴진다는 정도였다.

 한 명, 한 명이 나와 대등하거나 강할 거라고 했다. 천마의 말대로 쉽게 극복할 수 없는, 예사롭지 않은 기도가 느껴졌다. 대마신들과 달리 이들은 전부가 한 번쯤은 인간이었던 영자들이다. 제 의지로 마계를 선택한 자들. 마력을 얻고 힘을 얻는 대가로 상당한 것들을 포기한 셈이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마계 마신들은 윤회에서 제외된다고 한다. 그건 메타트론과 운명을 함께 한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이는 정한 기한이 지나면 운명의 마침을 해야 하는 꽤나 절박한 처지라는 말도 된다. 신을 극복하고 영원성을 획득하거나, 영원한 형벌에 처해지거나. 그래서 몸부림은 더 처절하다.

 특별한 경우....... 마계에 속한 자이지만 현생을 획득하는 것으로, 한정적으로 허용되어 왔다. 마계는 이 기회를 통해 인간계를 변질시키고 혼란을 초래하고, 신과 인간을 떼어 놓는 여러 시도들을 펼쳐왔다. 이런 현생을 원하는 자들은 마계 내에서 생각보다는 많은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다.

 변화 없는 단조로움은 꽤나 지겨운 것이다. 천 년, 만 년, 아니 수십만 년을 그렇게 지내왔다면, 그 삶이 얼마나 무미 건조할가?

 그러고 보니 이들에게는 파동치는 생기가 그다지 느껴지지 않았다. 감정마저 석화된 자들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이나 진배없는 것이다.

 마신들은 마력 생성 과정에서 저마다 다른 특징들을 보인다. 대마신들의 본신이 용이듯 이들도 각각 다른 화신체를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나름대로 상당히 독특하다.

 화신했을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하며, 그때가 오히려 실체에 가까운 모습일 것이다. 지금 내 좌우를 포위하고 걷는 자들은 인간처럼 느껴졌지만 화신했을 때는 전혀 다를 것이다.

 꽤나 멀리 온 것 같은데도 이들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환아가 있던 곳과 점차 멀어져 간다 생각하니 마음이 착잡했다.

 “어디까지 가는 거냐?” 옆에 바싹 붙어 걷는 아수라에게 물었더니, 나를 슬쩍 쳐다보며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서궁의 심처로 가고 있다. 그곳에 네가 보고 싶어 하는 자들이 머물고 있다.” 무의식적으로 그의 이마를 살폈다. 역시 예의 붉은 뱀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었다. 두 마리가 서로 꼬리를 맞대고 교차했는데 입이 꼬리를 물고 있지는 않았다.

 네 명의 아수라들은 이후 단 한마디도 없이 나를 목적지까지 수행했으며, 나는 또 다른 아수라들에게 인도되었다.

 “날 따라 와라.”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군. 이 넓은 곳에 대체 얼마나 많은 마신들이 있다는 말인가?

 궁전 중에서도 외곽 지역인지, 나찰들이 자주 눈에 띄기 시작했다. 내 옆의 아수라들을 향해 그들은 정도 있는 동작으로 예를 표했다. 하던 동작을 멈추고 한 팔을 가슴 앞에 횡으로 눕혀 고개를 숙였는데, 약간의 긴장감마저 엿보였다. 기다란 복도의 양편으로 오가는 나찰들은 누구나 할 것 없었다.

 “자, 이곳이다. 널 데리러 올 때까지 자유롭게 행동하되 이곳을 벗어나지는 마라. 그리고 충고하건대 행여나 이곳을 빠져 나갈 궁리 따위는 하지 않는 게 좋을거다. 단언하거니와 불가능하다. 자, 들어가라.” 그그그긍 높이 3장은 됨직한 거대한 문이 위로 천천히 올라갔다. 그 뒤로 보이는 건 넓은 광장과도 같은 내실.

 문이 천장으로 밀려 올라가고 드러난 전경은 또 한 번 날 놀라게 했다. 탁 트인 시야에 제일 먼저 잡힌 건 중앙에 설치된 분수대였다.

 그 주위로 과실이 열린 작은 나무들이 보이고, 중간 중간에 초지가 보인다. 그런가 하면 한쪽엔 대리석과 비슷한 재질로 만들어진 거대한 욕조가 조형되어 있었다.

 그리고 원형으로 이루어진 광장의 외곽. 그 안으로 움푹 패인 공간들은 한쪽이 개방되어 있다. 그곳엔 각기 하나씩의 침상과 의자와 탁자가 보인다. 문이 밀려 올라가자 초지 곳곳에 있던 자들의 얼굴이 보였다.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파천!” 천마가 제일 먼저 소리쳤다. 그리고 그 뒤로는 30여 명이나 되는 천인들이 날 보며 눈물을 글썽거린다. 그들 중에 설란도 보였다.

 “지존!” 광마존이 앞으로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거의 대부분의 인물들이 고개를 떨군다. 한 걸음을 내딛자 등 뒤에서 문이 다시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모두 무사한가?” “무사하긴 하지. 파천, 여길 무엇 하러 찾아 온 거냐? 네 얼굴을 보여 주면 우리가 반기기라도 할 거라 생각했냐? 하긴 나 같았어도 왔겠지만. 바보 같은 놈. 결국...... 이렇게 될 줄 알았다. 한심한.......” 천마, 자네 말대로일세. 오지 않을 수가 없었어. 이렇게 될 줄 알았지만...... 오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네. 어쩌겠는가, 원래 미욱한 놈인걸.

 천마가 곁으로 다가왔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지. 잘왔다, 파천.” 힘없는 목소리.

 천마의 곁을 지나쳐 설란이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녀는 상심이 컸던 탓인지 얼굴이 해쓱해져 있었다.

 “화아는?” 난 먼저 이렇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품에 화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그녀는 고개를 떨구었다. 난 어찌된 영문인지를 깨닫고 그녀를 다독였다. 울지 않으려고,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어깨를 들먹이며 참는 설란을 대하자 난 말할 수 없는 비감에 잠겨 들었다.

 “놈들이 환아와 화아 그리고 천아를 뺏어 갔다.” 천마의 낮은 목소리에 난 더욱 힘주어 설란을 안았다.

 “이건 내 탓이오. 미안하오, 설란. 내가 힘이 없어...... 아이들을 지켜 주지 못했구려.” 난 더 이상 그러고 있을 수 없었다. 우리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설란을 품에서 떼어내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잘못된 사람은 없는가?” “안타깝게도 단 한 놈도 죽지 않았다.” 천마는 내가 바다로 떠난 이후의 일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대마신하나까지 포함된 아수라들과 나찰들의 급습. 천마는 그들의 전격적인 출현에 대항 한번 못해 보고 포로가 되고 말았다고 했다. 놈들은 아이들을 인질로 해서 항복을 권유했고, 결국은 이곳까지 끌려 왔다는 것이다.

 “우리를 이토록이나 극진하게 대하는 게 아무래도 무슨 속셈이 있는 것 같아.” 자리를 잡고 앉은 뒤에 곧바로 천마가 한 말이었다.

 “우리를 설득하기 위해서겠지.:

 “그렇겠지.” “그런다고 우리가 뜻을 꺾으리라고 보는.......” 광마존의 뒷말을 끊으며 천마가 빠르게 입을 놀렸다.

 “이놈들이 무슨 수작인가를 부리긴 할 것 같은데 도무지 짐작 가는 바가 없다.” “쉽게 죽이지 않을 테고, 자유롭게 풀어 주지도 않을 테니, 결국은 노예로 전락되는 일만 남은 것 아닌가? 아직은 미련을 버리지 않고 설득하겠지. 그러다 쓸데없는 짓이라 판단되면 가혹하게 대할 거다.” 난 모두에게 루시퍼와 나눴던 대화 내용을 간략하게 털어 놓았다. 대마신과 결투하게 되었다는 얘기에 천마는 이마를 짚었다.

 “아수라도 아닌 대마신이란 말인가?” “.......” 난 희박한 가능성을 그나마 높여 볼 요량으로 누가 가장 약하냐고 물었다. 고개를 가로젓는 천마의 표정을 보자 가뜩이나 절망에 사로잡힌 내 의식은 숨 가쁘게 포기 상태로 접어든다.

 “부질없는 짓이다. 냉정하게 말해서...... 너와 내가 함께 덤빈다해도 대마신 중 하나를 이길 수 없다.” 으음, 꼭 그렇게까지 내 투기를 꺾어 놔야 속 시원한가.

 “그래도 난 악착같이 싸울 거다. 내 숨이 붙어 있는 한 놈들에게 굴복하지 않는다. 설사...... 아이들을 앞세워 협박한다 해도.”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말은 그렇게 하지만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대부분의 수하들은 딴 곳에 감금되어 있는 것 같아. 어디에서,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도 알 수 없고.” 여기 있는 자들은 서른 정도. 어떻게 알아냈는지 핵심 인물들만 추려 놓았다.

 잠시 뒤 우리는 바닥에 대충 둘러앉아 이런 저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잠시 겪어 본 것이지만 마신들은 상대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습니다. 형님과 대경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율극마저 이럴 정도니 다른 사람들은 말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신수궁주는 원래 심한 부상을 당했다고 한다.

 “대마신이란 자의 손길이 스친 순간 거짓말처럼 상처가 아물더군요.” 신수궁주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술회하자 옆에 있던 광마존이 가담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들의 공격력은 성질이 조금 다른 듯 여겨집니다. 저희들이 사용하는 무공과 뭐가 다르다 딱 꼬집어 설명할 수 없지만 분면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천마가 광마존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크게 다르기도 하고 비슷한 점도 있지만 그들이 사용하는 다양한 공격 기술들엔 너희들에게 없는 게 있지. 바로 마력이다. 마력 생성의 비결은 모두 메타트론에게서 나왔다. 단순한 물리력에도 그의 숨결이 담겨 있다. 그래서 무서운 것이다.

 그리고 너희들이 겪어 본 자들은 아수라까지였지. 대마신과 루시퍼의 힘은 그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그리고 메타트론과 그의 곁을 따르는 어둠의 천사들. 이런 여력까지 합한다면 전차원계에서 마계를 능가할 곳은 없다. 물론 천궁은 예외로 쳐야겠지만.” 결국 다르니 어쩌니 해도 근본은 동일할 것이다. 그 어떤 범상치 않은 존재라도 힘을 근원적으로 창조해서 사용하는 예는 없다. 원래 있던 것을 제 몸과 뜻에 실어 잠시 사용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마계의 마력이란 것 역시나 큰 범주인 우주의 아주 작은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단지 좀더 핵심에 근접한 걸일 따름이겠지.

 “마음의 준비를 해둬라. 이제 줄을 일만 남았다.” 한껏 비장하게 말했으나 천마의 그런 어조가 달리 비감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죽음을 각오한 지 오래인 사람들인지라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을 뿐이다.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들이 쉽게 우릴 죽여주지도 않을 것 같다. 자신들의 뜻에 반대하는 자들을 최대한 이용하겠지. 아마도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라도 극심한 도통을 주겠지. 참을 수 없을 만큼 말야.” 신수궁주를 치료해 준 것만으로도 그들의 의도는 분명하지 않은가.

 잠시 뒤 우리 모두는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손을 맞잡았다. 그다지 큰 슬픔이나 아쉬움은 없었다. 비교적 오래 산 자들이나 아직 젊은이들이나 한결같이 가벼운 표정이었다. 그들 모두에게 난 진심으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 동안 못난 이 사람을 용남해 주고 따라 주어 너무도 고맙게 생각한다. 죽어 서로 만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난 그대들을 잊지 못할 것이다.

 모두들...... 고마웠다. 내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대들을 섬기며 살고 싶다. 이건 진심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 모두 당당함을 잃지 말자. 그리도 가능하다면 저 세상에 가서 다시 한 번 보는 것도 좋겠지.” 마음 여린 이들은 눈시울이 달아 오른 걸 보이고 싶지 않은지 고개를 넌지시 돌린다. 우리들 모두의 마음이 이 순간 하나인 것을 마주 잡은 손길로 느낄 수 있었다.

 천마가 내 말을 이었다.

 “고통을 참지 못하겠거든 곁에 있는 자들에게 부탁해라. 죽여 달라고.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다. 노예가 되어 온갖 조롱을 당하느니 죽어 복수를 꿈꾸는 게 낫지. 가능하면...... 견디는 데까지는 견뎌야겠지만 그건 쉽지 않을 거야. 나 또한 마찬가지지, 그건.” 설란이 그런 천마의 말을 부정했다.

 “그건 옳지 않아요. 남에게 짐을 지우는 일. 그냥 참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엇어요. 힘들겠지만 견뎌야 해요. 저는 아직 믿고 싶어요. 희망은 아직 살아 있다고....... 그렇게 믿고 싶어요.” 설란의 말처럼이면 얼마나 좋겠는가.

 얼마 뒤 우리는 여기저기로 흩어져 휴식을 취했다. 나와 천마와 적루아와 설란은 나란히 앉아 얘기들을 더 나누었는데 그 중 태반은 아이들에 대한 염려였다.

 “마황 루시퍼가 그런 말을 했다면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아마도 아이들을 제 마력으로 장성시키고 전사로 키울지도 모른다.”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라.” 힘없는 내 대꾸에 천마가 고개를 저었다.

 “즉시 그렇게 하겠다는 의미다. 며칠 뒤라도 넌 아이들이 서인이 된 걸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즉시라면.......” “루시퍼의 능력은 다른 존재들과 차원이 달라. 일반적인 아수라들과 나찰들을 가리켜 마계전사라고 부르지는 않아. 그들은 그저 마신이라 불리지. 그렇지만 이놈들 마계전사라는 놈들은 좀 다른 성질을 지닌 것들이다. 마수를 메타트론이 창조해 냈듯이 그들 역시 마찬가지지. 영혼이 없는 생명체다. 전투 목적으로 만들어지고 훈련된 놈들이라 순수한 공격 의지만 지니고 있고.

 그들 모두에게 명령할 수 있는 권한자는 역시 메타트론과 그의 대행자인 루시퍼. 마계 전사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마지막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수련중일 거야.

 내가 예전 대마신으로 있을 때 메타트론을 수행하던 어둠의 천사들이 있었다. 그놈들의 머리에서 나온 계획들이 지금까지의 마계의 행보라고 보면 된다. 그놈들은 메타트론과 루시퍼 사이를 오가며 여러 가지 악독한 계책을 풀어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마계전사의 양성이었지.

 한때 마계에서 마신들이 자주 다른 차원계를 넘나드는 일이 있었다. 그들 앞머리엔 항시 그놈들이 버티고 있었지. 그들은 주로 무한계를 드나들며 우주를 떠도는 방랑자들을 잡아 오곤 했다. 목적은 마계전사의 수련 상대로 삼기 위해서였지. 마신들이 상대하기엔 너무 위험한 놈들이기 때문이었어.”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천마가 얘기하는 내내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끔찍하고도 잔인한 예감. 이 모든 상황을 깰 수 있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단 하나밖에 없었다. 그건 계획이 아니라 그저 필사적인 시도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야겠다고 마음먹자마자 곧바로 천마에게 전음을 보냈다.

 [천마, 탈출을 시도해 보자.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포기해라. 불가능해.]

 [해보지도 않고 포기하기엔 너무 이른 것 같은데...... 한번 해보자.]

 천마는 잠시 생각하는 눈치더니 결국엔 내 뜻에 따라 주었다.

 [좋아. 까짓 해보는 거야! 어렵지 않으니까.]

 나는 모두에게 전음으로 탈출할 것을 지시했다. 우리들은 잠시 동안 계획을 짰다. 우리 뜻대로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있었다. 지금 그런 가치야말로 우리에겐 가장 큰 희망이기도 했고.......

 쾅쾅 “이 문 좀 열어 봐라. 마황에게 할 말이 있다. 내 말 안 들리나?” 천마가 출입구를 주먹으로 때리며 고함을 질렀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천마잠형술이라면 그 어디든 미세한 틈만 있어도 드나들 수 있다. 그런데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문에는 그럼 틈조차 없었으며 마력으로만 열리고 닫혔다. 결국 마신들을 불러들이는 수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스르르릉 “왜 이리 시끄러운가? 무슨 일이냐?” 아수라 하나와 나찰 둘이 안으로 들어섰다. 천마가 문 앞에 서 있었고, 내가 문 옆에 그리고 광마존과 율극, 신수궁주 등이 벽 좌우로 늘어서 있었다. 마신들이 안으로 들어선 이후 그들 등 뒤의 문이 천천히 내려와 닫힌다.

 “마황에게 우리를 데려다 달라. 전할 말이 있다.” “안돼. 내개 해라.” “그 말 책임질 수 있나? 나중에라도 후회할 일 만들지 말고 우리를 마황에게로 안내해라.” “으음.......” 너희들이 스스로 결정할 문제는 아닐 테니 고민해 봐야 결론은 하나. 결국 우리 말에 따르게 되어 있어.

 “좋다. 대신 너희 둘만 나와라.” 나와 천마만을 가리켰다.

 “그러지.” 아수라가 앞장서고 나찰 둘이 우리 뒤에 바짝 붙어 섰다.

 [문이 열리는 순간 동시에 공격한다.]

 나는 수하들에게 머리 언질을 주었다.

 그르르릉 문이 열리는 순간 나와 천마는 약속대로 아수라를 먼저 덮쳤다. 나는 놈의 옆구리를 강타했고 천마는 뒤통수를 노렸다.

 쉬쉬쉭 퍼억 뒤쪽에서도 수하들이 나찰들을 공격하는 소리가 들린다. 아수라는 우리 둘의 공격에 무릎을 꿇으며 무너졌다. 그렇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은 듯 보여졌다. 순간 나는 소리쳤다.

 “모두 뛰어 나가.” 문이 천천히 내려오는 게 보였기에 다급해진 마음에 소리 질렀지만 수하들은 어느새 밖으로 뛰어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와 동시에 웅크리고 있는 세 마신들을 오행신주로 가둬 버렸다.

 마지막으로 천마가 적루아와 설란을 데리고 문 밖으로 나가는 걸 확인하고 나 또한 그들 뒤를 따랐다. 나와 보니 수하들의 모습은 그 어느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천마가 눈짓으로 따라오라는 시늉을 하더니 앞장서서 움직여 갔다.

 나는 설란을 옆구리에 끼고 잠형술을 사용해 천마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긴 복도 끝에 양쪽으로 갈라지는 지점이었다. 우리는 거길 막 돌아섰다. 그러나 우리는 가던 걸음을 멈추고 그 자리에 멈춰서고 말았다. 복도 전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마신들과 그들 앞에 뒹구는 수하들이 보였다. 뒤쪽을 돌아보니 그곳 역시나 마찬가지였다. 대충 헤아려 봐도 수하들 중 벗어난 자는 하나도 없는 것 같았다. 역시 힘들단 말인가.......

 “어리석은 짓을 벌였어. 감시의 눈길이 있음을 알지 못했단 말인가?” 아수라가 한심하다는 투로 빈정거렸다. 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천마에게 말했다.

 “이렇게 된 것....... 끝까지 가는 거다. 어떠냐, 천마?” “나야 언제든 환영이다.” “포기하지 않을 셈이냐?” “우리에겐 포기란 없다. 천마, 시작하자.” 나는 설란을 적루아에게 넘기고 곧장 앞을 행해 뛰어들었다. 천마잠형술을 극성으로 끌어올리고 바닥을 박차고 천장 쪽으로 붙었다. 그 상태로 전진하며 두 손을 휘저었다. 복도 전체를 날려 버릴 셈이었다.

 “무형검에 오행의 기운을 담는다. 가라.” 화악 복도 전체를 통째로 무찔러 가는 거대한 강기의 폭풍은 거세게 밀려갔다.

 “어리석은 짓.” 아수라 둘이 앞으로 나서는 게 보였다. 과연.......

 츠츠츠츠 놈들의 전면에서 부챗살처럼 퍼져 오르는 것이 보였는데 그 역시나 복도를 꽉 틀어막아 왔다.

 피시시시 믿을 수 없었다.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나며 내가 쏘아낸 무형검이 흔적도 없이 흔적도 없이 소멸되는 것이 아닌가. 빌어먹을.......

 천마는 그들 가운데로 뛰어들어 근접전을 펼칠 참인 것 같았다. 금세 아수라 하나와 얽혀 타격을 주고받는다. 이렇게 된 것 망설일 이유가 없다. 모두 쓸어 버린다. 오행신주를 최대한 빠르게 만들어 허공 중 에 띄우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앞에 십여 개의 오행신주가 떠다니게 되었다.

 “천마, 물러나라.” 천마는 힐끔 쳐다보더니 약간 놀란 표정을 하고는 황급히 뒤로 빠졌다. 그 순간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앞을 행해 오행신주를 전진시켰다.

 “모두 산산조각 내주마.” 파앗 오행신주가 아수라와 나찰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는 순간 오행의 기운을 묶고 있는 고리를 한꺼번에 풀어 버렸다.

 “이러면 곤란합니다.” “이럴...... 수...... 가.......” 어느새 나타난 대마신 브리트라의 두 손 안에 오행신주가 가득 들어 있었는데, 그곳 주위엔 미세한 막이 형성되어 있었다. 순간 그 안에서 화려한 빛의 대폭발이 일어났다.

 화악 눈이 부실 정도의 폭발. 오행신주가 터진 것이다. 그렇지만 주위엔 아무런 변화도 없다. 브리트라가 쳐놓은 작은 막 안에서 폭발력은 빠져 나오지도 못한 것이다. 허탈하고도 허탈했다.

 “궁전을 파괴하는 것, 마신들을 다치게 하는 것, 모두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다시 돌아가세요.” 그가 손을 슬쩍 흔드는 게 보였다. 그러자 그때까지도 바닥에 엎어져 있던 수하들이 하나 둘씩 일어났다.

 “이번 일은 없었던 걸로 할 테니 다시 돌아가세요. 이분들을 처소로 모셔라.” “네.” 마신들이 우르르 몰려 와 우리들 모두를 양쪽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잡고서는 원래 있던 곳으로 데려 갔다. 나는 더 이상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그들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루시퍼가 준 기한이 다 지났다. 그는 나와 천마를 함께 불러들였다. 역시나 미로 같은 복도들을 지나쳐 한참을 걸어가게 되었다. 며칠 전 환아가 머물던 곳과는 다른 지역인 것 같았다.

 천마도 구조를 모르는 걸로 보아 이곳은 새롭게 지어진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거대한 건축물을 지을 수 있다는 건 상식 밖의 일이다. 하긴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들 중 내 상식으로 이해되는 게 단 하나라도 있던가.

 “자, 이 안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 동안과는 달리 우릴 안내한 아수라가 깍듯하게 존대를 했다. 이 순간이 지나면 자신들보다 상급자가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때문일까.

 “어서들 오라.” 안으로 들어서자 루시퍼가 두 팔을 벌리며 환대했다.

 커다란 내실에 그 홀로 있었다. 나와 천마는 별 반응 없이 안으로 더욱 깊숙이 접어들었을 따름이다. 나 같으면 머쓱하겠군. 그러나 그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걸 과시하듯 자리를 한쪽 손으로 가리키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자, 그곳으로 앉지.” 두 개의 좌석이 마련되어 있었는데 각기 양옆으로 벌려 놓아 나와 천마는 서로 마주보는 위치로 앉게 되었다. 천마는 시종일관 무거워 보이는 얼굴에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좋은 시간들 보냈나?”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고 그는 넌지시 이런 말로 화제를 풀어 나갔다. 난 대답하고 싶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부담이 컸다. 그는 바로 루시퍼였다. 대신 천마가 대답했다.

 “덕분에.......” 오가는 말들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그들도 알 것이다.

 “바알세불, 아니 천마. 이렇게 불러 주는 걸 원한다고 했던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그대는 엄밀히 말해 아직까지 천상계 사자 신분이기도 해. 물론 서로를 침범하지 않고 존중하고 인정할 때까지 얘기지만 말이야.

 자네가 인간계에 들어온 이유를 망각하고 나의 뜻과 자네를 보낸 자의 뜻에 역행하는 순간 그 자격은 박탈되었네.” “굳이 상기시켜 줄 필요도 없소.” 천마는 루시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잊지는 않았다. 그 모습이 내게는 부자연스런 조형물의 배치를 보듯 낯설게 비쳐졌다.

 “왜 그런 선책을 했는지는 굳이 묻지 않겠어.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니 새삼 들출 가치도 없고. 간단하게 질문할 테니 자네도 짧게 대답해 주게.” “물을 필요도 없소. 난......다시 마계에 속하고 싶지 않소. 그렇다고 적으로 삼고 싶은 것도 아니오. 그 야심만 거둔다면.” 천마와 루시퍼 그리고 천상계에 관련된 미묘한 관계는 아직 나로서도 채 파악하고 있지 못한 부분이었다.

 판단되기로 예전에 물밑 거래가 있었던 듯싶었다. 그것이 외부에 떳떳하게 밝힐 수 있을 만큼의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어 끝까지 천마에게 물어 보지 않았고, 그 또한 내게 먼저 선뜻 말해 주지 않았다.

 그 미묘한 관계에 대한 언급이 루시퍼의 입에서 또다시 흘러 나오자 난 궁금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 라면 알고 있을까?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건가? 적도 싫지만 동조도 않겠다. 방외자로 남겨 달라...... 이런 의미인가?” “그렇소, 대신 단서가 있소.” 루시퍼는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이어질 다음 말을 기다렸다. 포로 주제에 단서까지 단다고 비웃는 것 같았다.

 “내 가족과 친구들을 풀어 주시오. 그리고 우리를 자유롭게 내버려 두시오. 우리를 건들지만 않으면...... 나 또한 가만있겠소.” “하하하하.” 그때서야 루시퍼가 참고 있던 웃음을 한꺼번에 터트렸다. 천마는 비교적 담담한 시선으로 루시퍼의 웃음을 받아들였다.

 “흐음, 재미있군. 재미있어.” 난 둘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 서린 기류를 감지하고 가만 지켜보았다.

 “바알세불, 너는 본 마계에서도 특별한 위치까지 올랐던 무시할 수 없는 강자였다. 그렇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며, 나와 마계의 울타리 안에 있다는 걸 전제로 할 때의 위치다.

 아직까지도 난 너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 그 정도로 넌 탐나는 강자다. 앞으로 차원 정쟁에서 너의 가치는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겠지.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 내 밑에 두고 싶어.

 그렇지만 냉정하게 말해 너 하나쯤 없다고, 아니 네가 적의 전력 한 자리를 차지한다 해도 달라질 건 없다. 시간이 나에 대한 두려움마저 지워 버렸다면 애석한 일이군.

 잘 들어라, 바랑세불.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다. 다른 대마신들 모두가 반대하고 마계 전체가 거부한다 해도 난 널 받아들일 수 있다. 마계는 전차원계를 다스릴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다. 현실을 거부하지 마라.” 루시퍼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위엄을 보였다. 날 바라보고 있지 않음에도 동공이 터질 듯한 압력이 느껴졌다. 침이 마르고 목이 탔다.

 “쓸데없는 짓이란 걸 잘 알고 있지 않소? 관두시오. 어차피 필요 없는 말들일 뿐이니.” 천마는 시선을 모질게 거두어들인다.

 “좋아, 그렇게 하도록. 선택에 후회가 없기를 바랄 뿐이다. 파천, 너도 바알세불과 동일한 입장인가?” 난 고개를 슬쩍 돌려 외면했다.

 “너희들은 왜 그리 어리석은가. 너희는 욕심도 없나? 신을 극복하고 싶지도 않은가. 왜 스스로 신이 되려 하니 않는가? 굴종이 지겹지도 않은가? 날 봐라. 난 강하다. 그래서 아름답다. 난 신이 누리고 있는 모든 영광을 탈취할 것이다.” 스스로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는 저 자신감. 신과 자신을 대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저 자존심이 숨 막히도록 두려웠다. 천마가 갑자기 열이 올라 큰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요? 인간계를 지배한다고 신을 극복할 수 있소? 그대들은 왜 천궁을 향해 공격하지 않고 힘없는 인간들을 상대로 횡포를 부리는 거요?

 당신들의 심보를 내 말해 볼까! 어차피 길이 안보이니 도박을 하는 심정이기도 하겠지만 망하는 김에 같이 뒤집어쓰자는 것 아니오? 빌어먹을, 한때 대마신이었던 나마저 속이려 하다니.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건 하나도 없구려.” 한바탕 쏘아붙인 천마는 속이 후련한지 호흡을 가다듬고 진정하는 기미였다. 의외인 건 천마의 과격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루시퍼는 차분하기 그지없다는 점이었다. 오히려 미소가 더 짙어졌을 따름이었다.

 “네 말에도 일리는 있다. 그렇지만 상황은 달라졌다. 예전에 보이지 않던 길이 지금은 보이기 시작했지. 신의 완전성에도 변수는 있었던 거야.” 천마는 흠칫했다.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님을 직감적으로 느낀 듯 했다.

 “그 변수가 뭐요?” 나 또한 궁금했다. 루시퍼는 내 물음에 미소로 답을 대신했고 쉽게 가르쳐 주려 하지 않았다. 천마는 그런 태도에 비웃음을 날렸다.

 “흥, 변수가 뭐든 대세를 뒤집기엔 역부족일 거요. 잠시의 득세로 기고만장해 오판하는 거겠지. 설사 천궁의 천사들 모두가 당신들의 손을 들어 준다 해도 신을 극복하기는 불가능한 일. 충고하건대 하루 빨리 꿈에서 깨어나라고 말해 주고 싶소.” “바알세불, 난 네 그 직언이 그립다. 너만은 예전부터 달랐지. 그런 네가 내 곁에 있어 준다면....... 좀더 시기를 앞당길 수도 있을 텐데.” “내 할 말은 다 했소. 죽이든 살리든, 노예로 삼든 알아서 하시오. 가자, 파천.” 자리에서 일어서던 천마가 엉거주춤한 자세로 동작을 멈췄다.

 “내 얘기 아직 끝나지 않았다.” 누가 뒤에서 어깨를 짓눌러 앉힌 듯 천마는 제자리에 다시 맥없이 털썩 주저앉았다. 저항해 보려고도 하지 않고 빤히 루시퍼를 쳐다보고 있는 천마.

 “좋아, 좋아, 다 좋다. 결정을 존중해 주지. 너희가 원하는 대로 이 순간부터 적으로서 예우해 주마. 너희들은 나의 포로이자 노예다. 노예에겐 노예에게 어울리는 옷을 입혀야겠지. 그리고 노예의 가족이나 수하들 역시 노예! 지금껏 누리던 특별한 권리는 지금 이 시간 부로 박탈한다.” 언제 우리가 지녔던 권리가 있었던가? 어쨌든 루시퍼의 최후 선고가 내려진 셈이었다. 앞으로 그가 우리를 어떻게 대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죽이시오.” 나는 솔직한 바람을 그에게 말했다. 죽여 준다면 그의 발에 입맞춤이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단지 그 눈물나게 고마운 배려에 그렇게 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예들에게 그런 은혜를 내릴 성싶으냐. 이놈들을 끌고 가라. 측근들도 함께 데려 가라. 의식 집전 전에 내게 데려 오라.” 스르르릉 문이 열리며 아수라들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루시퍼가 우리를 보며 귀찮다는 표정으로 손을 슬쩍 흔들었다. 그러자 괴목의 잎으로 만든 옷들이 가루로 화해 사라지며 그 자리를 다른 것들이 메우기 시작했다. 어이없게도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전신 이곳저곳에 촘촘한 가시가 돋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헉.” 순식간에 발바닥을 제외한 목 아래 전체 부위에 가시가 가득해졌다. 피부를 뚫고 솟아나는 가시들이 주는 고통에 본능적으로 온몸을 비틀었다.

 “이것도 있어야겠군. 너희는 노예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자들로 구분되었으니 말이야.” 촤르르륵 빛나는 사슬을 몸에 두르며 꽤나 멋질 것이다. 갑옷을 치장하거나 장신구로 사용되기도 하니. 그런데 그것이 목에 걸리면 모양새가 이상해진다. 아수라들은 나와 천마의 목에 방금 생겨난 사슬의 끝을 두 손으로 휘어잡고 힘을 주었다.

 “빌어먹을 악마새끼. 이런다고 널 무서워할 줄 알았더냐!” 내 입에서 거친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 순간이 너무도 분하고 치욕스러웠다. 루시퍼가 그런 나를 향해 손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잠깐, 그놈에게서 회수해야 할 것이 있다. 마신주는 너의 것이 아니니 내가 거두어도 불만은 없을 거야, 그렇지?” “컥.” 뱃속이 터지고, 창자가 꼬이고 찢어지는 것 같은 새로운 극통이 시작되었다. 난 내 배를 내려다보았다. 솟아 나와 있는 가시들이 한쪽으로 밀려나며 시선이 머문 곳이 부욱 찢어졌다. 이어 붉은 마신주가 뭉쳐서 흘러 나오더니 루시퍼의 손 안으로 사라졌다.

 구멍 난 배에서는 이상하게도 피조차 흘러 나오지 않았다. 그 순간 거짓말 같은 일이 또 벌어지기 시작했다. 주먹 두 개가 들락거릴 수 있을 정도로 뻥 뚫렸던 상처 부위가 금세 아물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재차 가시들이 메워 갔다.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에 돋아 있던 가시들이 손바닥을 파고 들며 상처를 냈다. 이렇게 된 것 이판사판이란 생각이 들었다. 진작에 싸움을 걸어 보고 싶었지 않았던가. 나는 오행신주를 일대에 생성시키기 위해 기운들을 모아 갔다. 그런 움직임을 알아차린 천마가 날 향해 빠르게 말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파천. 그런 게 통할 상대가 아니다.” “호, 흥미롭군. 오행의 기운을 모아 공격한다더니 역시 이채로워.” 루시퍼는 가까이 다가오며 그렇게 속삭이듯 말하곤 한 팔을 쭉 뻗었다. 나는 순간 손 안에 뭉쳐진 오행의 기운을 루시퍼의 상반신을 행해 터트리고자 손을 휘저었다.

 “이게 어찌 된 일.......”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분명 손 안에 오행기가 가득 모이는 것을 느꼈는데 손을 벗어나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만 것이다.

 그는 당황하는 날 보며 히죽 웃었고, 팔을 뻗어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서 번쩍 들어 올렸다. 꼼짝할 수 없었다. 전신은 나의 통제를 벗어나 전혀 기능하지 않았다. 가시들이 휘어지며 다시 몸을 파고들었을 뿐만 아니라 루시퍼의 아름답고 가는 손가락도 목 안으로 한 시쯤 파고 든 것 같았다.

 “커컥.” 숨이 막혀 왔다.

 “이대로 죽었으면 하고 바라겠지. 그렇지만 내가 허락하지 않는 한 그리 쉽게 죽을 수도 없다. 물론 자살하는 건 어렵지 않아. 지금이라도 이 순간이 치욕스럽다 여겨지면 자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네가 자초하지 않았느냐? 기대하고 있어라. 너와 약속했던 결투는 어김없이 마련해 줄 테지. 이겨라. 그러면 널 노예에서 풀어 주지. 네가 패한다면 넌 영원히 내 노예로 살아야 할 것이다. 후후.” 휘익 슬쩍 흔든 루시퍼의 손길에도 난 한참을 날아갔다. 순간 몸을 바로하며 바닥에 착지하려 했다. 내 본능이 시킨 행동이었다. 그런데 그리 쉽지 않았다. 어찌 된 연유인지 마음과는 달리 육체는 속수무책으로 바닥에 쑤셔 박히듯 내동댕이쳐졌다.

 “결투 이전까지 너희 둘의 힘은 모두 회수되었다.” 난 믿을 수 없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내공이 사라졌다면 또 모를 일이되, 난 자연의 기운을 빌려 쓴다. 그런데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고통 이전에, 치욕 이전에 이해할 수 없는 현 상황이 더욱 충격적이었다. 내 힘은 차원을 달리하는 절대의 힘 앞에 한없이 왜소하게 찌그러져 버린 것이다.

 “놈들을 끌고 가 수하들에게 보여라. 내 뜻에 거역하는 자들의 비참한 말로를 모든 사람들이 보고 알게 하라.” 아수라들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난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꿈속을 헤맸다. 그들이 목에 채워진 사슬을 손아귀에 감아쥐고 힘을 주었음에도 현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 이젠 정말 끝이란 말인가....... 희망 따위는 없다. 저런 자를 상대로 무엇을 어떻게 도모하겠는가.

 천마와 난 그놈들에게서 개처럼 끌려 갈 수밖에 없었다.

 천마는 쇠사슬이 목을 조여 오는데도, 바닥에 끌려 피부가 벗겨지고 있음에도 눈을 감고 가만있었다.

 루시퍼의 면전에서 벗어나자 그들은 더 심하게 우릴 대하기 시작했다.

 “인간들 주제에 감히 마황님께 그런 불경스런 언사를 사용하다니. 너희들을 찢어 죽이고 싶지만 그게 너희를 도와 주는 거라 참는 줄이나 알아라.” “바알세불 나리, 이런 시절이 올 줄은 몰랐을 거요. 난 또 우리들을 배신하고 떠나기에 꽤나 떵떵거리고 사시는 줄 알았더니만 이 비참한 꼴이 뭐요, 그래?” 아수라 하나가 초라한 몰골로 질질 끌려 가는 천마 옆구리를 두 발로 번갈아 가면 툭툭 차거나 발바닥으로 짓이기며 희롱했다. 기나 긴 복도를 우리는 그렇게 끌려갔다. 오고 가던 마신들은 우리 꼴을 보고서는 낄낄 거리며 조롱을 퍼부었고, 좀더 심한 경엔 직접 물리적인 고통을 가하기도 했다.

 전신에 촘촘히 돋아난 가시 때문에 가만두어도 고통스러운데, 발로 짓이기며 좋아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다 쳐도, 한때는 상관으로 섬겼던 천마에게조차 그렇게 대하는 걸 보면 이놈들은 최소한의 정리조차 가지지 못한 놈들이 분명했다.

 긴 복도를 지나 온 시간이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지루하게 느껴진 것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 정도 수치쯤이야 백 번, 천 번이라도 이겨낼 수 있다. 고통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지금은 정말이지 살이 터지고 뼈가 꺾이는 고통보다도 내겐 더 참기 어려웠다. 천마와 나는 목에 쇠사슬을 감고 온몸에 가시를 박은 채 친인들 앞에 섰다. 난 똑바로 그들을 마주볼 수 없었다.

 “놈들도 포박하라.” 아수라 하나의 명에 나찰들이 빠르게 움직이며 수하들을 제압해 갔다. 설란이 크게 부각되며 내 시선을 아프게 찔렀다. 그녀는 잠시의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으려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렇지만 난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설란이 겪고 있을 슬픔과 좌절을.

 나찰들은 손에 들고 있던 사슬로 수하들을 하나 남김없이 모조리 묶었다. 현장을 지휘하던 아수라가 설란과 적루아에게 다가서며 친절한 태도로 말을 건네는 게 보였다.

 “두 분은 절 따라 오시지요.” 그녀들을 무리 중에서 구분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전 가지 않겠어요. 우리도 묶어 주세요.” “그럴 수 없습니다. 두 분을 따로 모시라는 명이 하달되었습니다. 따르지 않으면 강압적으로 시행할 수밖에 없습니다.” 설란은 날 쳐다보았다. 나 또한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리 둘은 서로를 마주볼 뿐 말로 서로의 감정을 표현하지는 않았다.

 “가시지요.” 아수라의 요청에 그녀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고 잠시 뒤, 두 사람의 모습은 우리들 시야에서 사라졌다. 마지막이 아니길.......

 비명은 광장 전체에 끊이지 않고 울려 퍼졌다.

 “이놈들 차라리 죽여라. 이까짓 고통으로 끄억.......” 잔인한 놈들. 상상하는 것과 실제로 겪는 건 엄연히 다르다. 놈들은 우리들을 한곳에 몰아 넣고는 광장 벽면에 설치된 사슬에 전부 묶었다. 무엇을 알아내거나 얻기 위한 고문이 아니기에 그들이 가하는 고통은 더욱 참기 힘든 것이었다.

 수하들은 고문이 진행될수록 배가되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나 또한 살과 뼈로 이뤄진 인간이기에 고통스럽기는 매 한가지였다.

 놈들은 매우 능숙하게 고통을 이끌어냈다. 게다가 출혈이 심하거나 고통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신체 상태가 악화되면 그들이 지닌 마력으로 생생한 새 몸으로 만들어 놓으니 미치고 환장할 일이었다.

 쇠꼬챙이가 몸 안으로 들어와 이리저리 들쑤시고 다녀도, 살이 한 움큼씩 떨어져 나가도 놈들은 기이한 마력으로 원래대로 돌려 놓고는 했다. 세포 하나하나가 살아 생생한 고통을 예민하게 느껴 가자 나는 점차 지쳐 갔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조차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죽음이 안식으로 여겨져 갈구하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어느 정도 지나자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도 잊어 갔다. 그리고 그 고통에 점차 익숙해져 가는 과정을 겪으며 어딘가로 끊임없이 흘러 다니는 의식의 흐름마저 귀찮아져 갔다. 놈의 손에 새롭게 들린걸 보며 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그 순간에도 수하들의 비명은 두 귀를 통해 너무도 선명하게 들려 왔다.

 “그건 또 뭔가? 이정도 고통에 굴복할 줄 알았다면....... 날 몰라도 너무 모르는군.” 놈은 내 말에 얼굴을 꿈틀하며 킬킬거렸다.

 “오만한 놈. 좋아, 넌 특별히 전 단계들을 생략하고 강도 높은 고통을 질길 수 있게 해주마. 인간의 육체가 얼마나 나약한 건지 생생하게 체험하게 해주겠다. 고매한 의지로 견뎌보도록.” 놈의 손에 들린 건 정사각형 함이었는데 뚜껑을 열어 내 눈앞에다 디밀어 보였다. 작고 투명한 벌레들이 그 안에서 서로의 몸을 타넘으며 꿈틀되고 있었다. 놈은 함을 뒤집어 내용물을 내게로 확 부어버렸다.

 “조금만 그다려 봐라. 이번엔 그리 만만하지는 않을 거야.” 난 벌레들이 몸에 돋아난 가시들 틈에서 꿈틀거리는 걸 지켜보았다.

 화악 순간 벌레들의 몸에 불이라도 붙은 듯 벌겋게 달아올랐다. 피부를 통해 전해져 오는 열기가 꽤 뜨거웠지만 이번엔 차라리 견딜 만했다. 그러나 그건 내 착각이었다.

 “헉.” 나도 모르게 헛바람을 집어삼키며 벌레들의 움직임에 온 신경을 집중시켰다. 벌레들이 피부 속을 파고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전신이 불구덩이에 들어앉은 듯 뜨거워지기 시작하며,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되는 고통이 전신 곳곳에서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불에 달군 쇠꼬챙이로 쑤시는 것과는 또 다른 성질의 고통이었다. 벌레들의 움직임은 교묘하기 그지없었다.

 “어떠냐? 그놈들은 점차 네 몸 깊숙이 파고들며 갖가지 고통을 줄 것이다. 그렇다고 널 치명적인 상태로 몰고 가지는 않으니까 걱정 말라구.” 이, 이...... 악질들. 그래. 이제야 마계 놈들 답구나. 그렇지만 내 몸을 톱으로 켜고 갈가리 찢고 불로 태운다 해도 그건 잠깐의 고통. 아무것도 바라지 않게 된 내가, 모든 걸 체념한 내가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겠다.

 까무러치기도 여러 번. 놈은 그런 내 의식을 끌어내어 또 다른 고통을 준비했다. 붉고 부픈 가루를 몸 이곳 저곳에 뿌리는 순간 그곳이 시커멓게 변해 가며 썩어들어 갔다. 살이 썩어 고름이 질질 흘러 내리고, 터질 듯 퉁퉁 부어올라 이내 피가 쏟아져 나왔다.

 뼈가 허옇게 드러날 정도가 되자 놈은 새로운 걸 내 몸에 끼얹었다. 금세 내 몸은 얼어붙기 시작했다. 놈의 고문은 집요했다. 그럼에도 난 비명을 지르지 않으려 입술을 자근자근 씹었다. 입술은 터지고 갈라져 너덜너덜해졌을 것이다.

 그런 날 나 자신도 이해할 수 없다. 대부분의 수하들이 나와 마찬가지 상황이겠지. 수하들의 비명도 들리지 않는다. 내가 내뱉는 거친 숨소리만이 천둥처럼 들릴 뿐이었고 간간이 뒤섞여 들려 오는 건 마신들의 고함소리. 그게 전부였다.

 점차 의식이 흐릿해져 가는 걸 의식할 수 있었다. 졸렸다. 검은 구름이 몰려 오고 그 가운데 번쩍이는 섬광이 날 향해 내리꽂힌다. 난 피할 수 없다.

 “헉.” 무엇인가가 내 몸을 강하게 때리는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기절했던가?

 “파천, 너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이구나. 저놈의 눈을 뜨게 해 날 보게 하라.” 파지지직 “끄억.”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전신을 한꺼번에 관통하는 기운은 잠시 동안이지만 정신을 맑게 해주었다. 조금 전 들렸던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시금 말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파천과 바알세불, 눈을 뜨고 나를 보라.” 나는 힘겹게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저놈은 발리라는....... 대마신 하나가 나와 천마의 중간쯤에 서서 한 손을 턱밑에 대고 우리들을 한참이나 찬찬히 살핀다.

 “너희 고집에 비해 육신은 하잘 것 없으니 보기 애처롭군. 이 정도 쯤에서 그만 두 손 드는 게 어떤가? 쓸데없는 고집 부려 봐야 돌아가는 건 고통뿐일 텐데. 너희 수하들 모습을 보도고 이렇게 고집을 부릴 참인가?

 파천 그리고 바알세불, 너희 둘에게는 좀더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다. 환상지대에 들 수 있는 영광을 부여해 주겠다. 놈들을 그곳으로 들여보내라.” 아수라들과 나찰들은 우리 두 사람을 사슬에서 떼어내어 한곳으로 끌고 갔다. 발리의 이어지는 말이 작게나마 뒤쪽에서 들려 왔다.

 "극복한다면 너희들을 조금은 존경해 주지.” 어둠 속에 우리 두 사람은 간단히 던져졌다. 거기엔 어떤 거부의 몸짓도 가능하기 않았다. 여기 들어와 모든 것들이 그랬듯이. 그 어둠 속에서 ‘그’ 의 경고가 끊임없이 내 의식을 어지럽혔다.

 [조심해라, 파천. 마음을 정갈하게 하고 복수심이나 원망이나 좌절 등의 부정적인 생각들을 모조리 지워 버려라. 분노는 잠재우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라. 그리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마라.]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고? 너 같으면 그게 가능하겠는가. 같이 들어 온 천마는 어디 갔는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천마, 어디 있나?” 대답이 없었다.

 [그는 네 곁에 있지만 서로를 느낄 수는 없다. 이곳 환상지대는 메타트론의 순수 마력이 숨쉬는 곳. 이겨내지 않으면 마성에 젖어들게 된다. 아무도 널 도와 줄 수가.......]

 ‘그’ 의 소리가 뚝 끊어졌다. 그 순간 어둠 가운데 한줄기 빛이 내게로 뻗어 왔다. 난 눈이 부신 나머지 두 눈을 감아 버렸다.

 “어서 오라, 파천. 위대한 천사여. 그대를 만나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 왔던가. 눈을 뜨고 나를 보라.” 난 갑작스런 목소리가 시키는 대로 살며시 눈을 떴다. 아름다움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것이 어떤 아름다움이든 그 성질의 바탕에는 조화와 균형이 존재한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절대 중도만이 절대의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눈앞의 존재는 그런 절대의 아름다움에 가장 근접한 형태를 지니고 있었다. 물결치듯 흘러내린 금발은 아무 흠도 없는 얼굴 주위에서 잔잔하게 흔들렸다.

 두 팔을 활짝 펼친 자의 등 뒤로 무지개 빛이 스며 나와 그이 형체를 어둠과 더욱 분명하게 구분 지었다. 내가 잘못 본 것인지 투명한 날개가 흔들렸다. 빛의 투사 각도에 다라 날개의 형태는 시시각각 달라져 보였다.

 “그대는...... 누군가?” “오랜 친구인 나 메타트론을 벌써 잊었는가? 참으로 애석한 일이야.” 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저 자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면, 그리고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일이 이곳의 이름처럼 환상이 아니라면 난 지금 놀라운 일을 체험하고 있는 것이다. 신에게 대항한 천사로 이곳 마계의 영원한 주인이라 불리는 존재를 만나고 있다니. 그런데 저 자가 날 알고 있는가.

 “신뢰는 굳어 흔들림이 없었는데....... 왜 너는 날 부정했던가?” 무슨 의미일까? 우리 줄 사이에 무슨 신뢰가 있었더란 말인가?

 “지금 모습은 네게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구나. 위대한 전사, 너 자신을 찾고 싶지 않은가. 원한다면, 날 부정하지 않는다면 넌 예전의 너로 돌아갈 수 있다. 아름다운 영혼과 강한 팔과 세계를 헤아리는 지혜까지.......

 모든 걸 되찾고 싶지 않은가. 나와 함께 했던 세월을 되찾고 싶지 않은가. 저 아름다운 하긴 산과 파스 강에서의 추억을 떠올려 보라.

 네 안에 영면하고 있는 시간들은 긴긴 잠에서 일깨워 내게 입 맞추라. 순수하고 아름다운 지혜로 빛나는 대지를 감싸게 하자. 모든 영혼들이 우리에게 절하고 받들게 하자. 수많은 세계들을 다스리고 그 안에 우리 이름이 거룩되게 하자. 약속은 지금도 변함없고, 그때와 다름없이 난 널 향해 있다.” 혼란스러웠다. 먼저 그가 하는 말들을 난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다. 나를 향해 끊임없이 속삭이는 제안. 그럼에도 내 마음이 이유 없이 흔들려 가고 있다는 사실이 다소 충격적이었다. 

 “날 알고 있나?” 겨우 이렇게 물어 본 뒤에 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물론, 너는 날 부정해도 난 그럴 수 없다.” “난 누구인가?” “모른단 말인가, 네가 누구인지. 진정 그걸 모른단 말인가. 저길 봐라.” 화악 메타트론이라 짐작되는 그 자의 반대편 어둠이 활짝 열리며, 또 다른 세계사 펼쳐졌다.

 대륙이었다. 거대한 균열 이루에 바다가 대륙을 삼켰다. 수많은 사람들이 절규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크고 강한 날개를 지닌 붉은 새들이 하늘을 떠다니고 있고, 그들은 인간들을 태워 태양을 향해 솟아오르고 있었다.

 전신에 날카로운 무기들을 지닌 자들이 새를 타지도 않고 공중에 떠다니고, 그들을 절규하는 인간들을 서슴없이 베고 있었다. 산이 쪼개지고 골짜기가 메워지는 혼란 가운데서도 그들은 서로를 향해 죽음을 내리는 일에만 열중했다.

 손에 화륜을 든 자가 태양 가운데서 뚝 떨어지듯 땅으로 내려왔다. 그 뒤를 이어 산 같은 크기의 거인들이 또한 땅으로 내려왔다. 그들은 인간들 편에 서서 침략자들을 처단해 갔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대륙을 모조리 바다 속으로 침몰해 버리고, 그 위에는 작은 섬 하나만 남게 되었다.

 “저곳에 너와 내가 있었다. 멸망과 태동이 하나였던 저 자리에 우리가 함께 있었다. 자, 보라.” 섬이 계속 자라나 높게 우뚝 솟아올라 산맥이 되고, 그곳을 중심으로 새로운 대륙이 웅장한 자태를 내보였다.

 처음 그곳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단지 사람과 비슷하게 생긴 존재들이 가득 찼다. 그들 역시 싸움을 했다. 휘젓는 손에 불길이 일고, 숲이 새카맣게 타들어 간다. 머리에 거대한 뿔을 지닌 과수들을 부려 전차를 끌게 하고, 장창을 손에 들고 평원을 질주하는 모습들도 보였다.

 그들은 큰 도시들을 산 위에 가지고 있었고, 바다 속에도 궁전들을 지었다.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들은 다른 존재들을 위해 일을 했다. 사람들은 노예인 것 같았다.

 “저곳에도 우리는 있었다. 사람들에게 지혜를 주었고 반역을 가르쳤으며 그리고 승리하게 했다. 저 순간에 우리는 참으로 기뻤다. 기억나지 않느냐.” 사람들과 기이한 존재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사람들 손에는 하나같이 불붙은 막대기가 쥐어져 있었는데 가만 보니 검이었다.

 그들은 철갑으로 몸을 보호했으며 견고한 방패를 지녔으며, 빠르게 달릴 줄 알았다. 그들은 진형을 갖춰 강한 자들을 이겨 나갔다. 그들 위에는 항시 륜이 떠다니고 있었는데 기이한 존재들은 그 륜을 향해 원망의 소리들을 했다.

 ‘왜, 우리가 멸망해야 합니까?’ 라고 묻자 륜을 타고 하늘을 나는 자가 말하길, ‘신의 뜻이다’ 라고 응답했다.

 사람들은 이겼으며 승리의 환호를 지르며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그 앞에 머리 숙여 절했다. 륜을 타고 인간들을 이끈 자가 또다시 말하길.

 ‘너희의 소망이 이뤄졌다. 번영하여 이 땅을 지배하라.’ “너는 모든 걸 망각했구나. 또 다른 세계를 보자. 네가 나를 기억할 때까지.” 새롭게 펼쳐진 전경은 아름다웠다. 얕은 산들 가운데 평원이 펼쳐져 있고, 사람들이 모여 도시를 이루었다. 그들은 아침마다 일어나 높은 산을 향해 절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곳에 위치한 산은 가장 높았는데 그 앞에 탑들이 세워져 있었다.

 탑에는 매일같이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을 그곳에 두고 마음에 담아 두었던 소원을 빌었으며, 어린 아이의 배에 칼을 꽂은 후 그 피로 단을 닦았으며 슬픔을 감춘 채 절을 했다. 죽은 아이들을 버려 두고 그들은 발길을 돌려 제 갈 길들을 갔다.

 얼마 뒤 산에서 어떤 존재들이 내려와 그 아이의 배에서 칼을 빼내고, 입김으로 죽어가던 아이를 살려냈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안아 하늘을 행해 번쩍 들고는 그 자리에서 즉시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른 뒤 아이들은 커서 그 산중에 으뜸인 자들이 되고, 또다시 탑에 바쳐지는 아이들을 거둬 키웠다.

 산 아래 사람들 간에 싸움이 벌어졌다. 그들은 두 무리로 나뉘어 서로를 죽였다. 강한 자들이 모든 걸 차지했으며 제일 먼저 한 일은 탑을 부수는 일이었다. 산에 있던 자들이 분노하여 큰 새들을 타고 사람들이 살고 있는 도시로 내려왔다. 승리에 취해 자축하던 사람들은 대항했지만 상대가 되지 않았다.

 산에서 내려온 무리 중에 한 존재가 불타는 륜을 발로 밟고 허공에 떠 있었다. 그는 죽어가는 인간들을 향해, ‘너희 교만함이 멸망을 부추겼다’ 라고 했으며, 그는 하늘로 솟구치더니 땅을 향해 불덩이들을 비처럼 쏟아냈다. 한 사람도 생존하지 못했다.

 “저 자리에도 우리는 함께 있었다. 기억해 보라.” “쓸데없는 짓이다. 네가 만들어 낸 환상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다. 대체 내게 원하는 게 뭔가? 무얼 말하고자 하는가?” 메타트론은 기이한 표정으로 날 한참이나 관찰하더니 낙담한 듯 힘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진정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넌 모든 걸 잊었구나. 수많은 세월을 우리는 함께 했다. 이건 진실이다.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물었는가.

 난 널 원한다. 네 용맹과 지혜와 강력한 힘을 원한다. 너와 내가 힘을 합한다면 우리가 신이 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가 멸망시키거나 존재케 했던 세계들을 생각해 보라. 신의 의지만이 우리와 함께 했을 뿐 실제로 우리가 모든 걸 해냈다.

 아직 모르겠는가. 비밀의 장막 너머에 너와 내가 원하는 성스런 힘이 존재한다. 신을 침묵케 했던 그 힘을 우리가 가질 수만 있다면 우주는 우리 품에 들어올 것이다. 신은 그걸 두려워한다. 창조주를 부정하는 피조물들의 반란을.

 난 모든 준비를 끝냈다. 너만 동의한다면 성공은 확실하며, 신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다. 무엇을 주저하는가, 나와 함께 하자.” “네가 동참하지 않는다 해도 뜻은 이루어질 터. 그렇지만 안타깝다. 모든 걸 얻어도 너를 잃으면 아쉬움이 크겠지. 한 가지만은 기억하라.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 이 내게 말했다. 신의 비밀을 주면 힘을 주겠다고.

 난 동의할 참이다. 그 힘은 날 더욱 아름답고 완전하게 할 것이며, 모든 존재들 위에 내 이름이 빛나게 만들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난 신으로 불려질 것이다. 아무것도 내 앞을 거스를 수 없고, 그 무엇도 날 가로막지 못한다.

 너는 모든 걸 버렸지만 난 모든 걸 가지겠다. 기억하라, 내말을. 너는 나그네가 되었지만 나는 왕이 될 것이다. 너는 인간이기를 원했지만 난 신이기를 원한다. 그리고 새로운 세상을 창조하겠다. 따르는 이에게는 영광을, 대적하는 자에겐 영원한 형벌을. 나의 뜻이 곧 진리가 될 날이 임박했다.” 개소리하고 있군. 이놈이나 저놈이나 허황한 건 마찬가지야. 루시퍼란 놈이나 아비라는 놈이나 과대망상증은 똑같아. 그나저나 날 이곳으로 들여 보낸 이유가 궁금했다.

 발리라는 놈이 내 앞에 척 나타나는 순간 긴장했었다. 그놈이 내게 보였던 적의를 느꼈기에 각오를 단단히 했었다. 그런데 환상지대라는 곳이 이런 데라니.......

 “날 어떻게 할 셈인가? 루시퍼는 노예로 삼는다 했으니 넌 벌레로 여겨 짓이기겠구나.” “어리석은 질문이군. 네가 날 대적한다 해도 난 개의치 않는다. 신의 뜻이 네게 머물러 있다면 난 널 통해 시험해 볼 것이다. 신의 완전성은 이미 훼손되기 시작했다. 그것은 너에게서 비참한 모습으로 마칠 것이다.” 또 저놈의 모를 말만. 원래 저놈들의 대화법이 저런 건지....... 기가 찰 노릇이다. 의문은 점점 더 증폭되어 갔지만 풀 길은 요원했다.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법이 없으니 더 했다.

 “빌어먹을.” 작게 이런 말이 내 입에서 흘러 나왔다.

 “네가 어떻게 하든 무슨 욕망을 가지고 있든 그런 걸 일일이 내게 설명하지 않아도 돼. 난 너희들의 노예니까. 세상을 말아먹든 너희가 신이 되든, 날 영원히 저주해 고통 중에, 형벌 중에 머물게 한다 해도 나는 작은 저항의 몸부림조차 하지 못하지.

 그렇지만 난 너희들을 부정하고 거부할 수 있다. 그것만은 내 자유다. 이 의지마저 제어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라. 그 전에는 내 입에서 너희들을 인정하는 단 한마디의 말도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가라. 가서 네 할 일을 하고 갈 길을 가라. 아무도 네 길을 막지 않을 것이며, 널 가두지 않을 테니.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명심해라. 좌절과 실의에서 더 이상 가망 없음을 깨달았을 때 그때라도 가던 길을 돌이키면 언제든 받아 주겠다.

 너를 향한 내 뜻은 항상 열려 있음을 잊지 마라.”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빛도 거두어졌다. 또다시 어둠이 시작된 것이다. 난 어둠 속에 홀로 남은 채 가만 웅크리고만 있었다. 천마는 여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환상지대라는 말처럼 이곳은 단지 내 의식이 만들어 내나 또 하나의 환상일지도 모른다.

 조금 전 들었던 말들과 보았던 장면들을 떠올리며 난 중얼거렸다.

 “내 갈 길을 가라고 했던가? 막지도 가두지도 않는다고? 내가 처한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결국 이 모든 게 환상이었단 말이지.......” [환상은 아니다. 네가 만난 건 메타트론의 의지지.]

 ‘그’ 의 출현에 조금 전 상황을 다시금 생각해냈다.

 “조금 전은 왜 그랬지?” 말을 하다 만 것을 두고 이른 것이었다.

 [그의 마력을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 자의식과 내 의식이 완전한 합일을 이루지 못했기에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 알려 줄 것이 있다. 나는 앞으로 더 이상 널 도울 수가 없다. 일정한 때가 차 내 도움이 필요하게 되면 난 다시 네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때까지 너는 홀로 모든 걸 이기고 견뎌내야 한다.]

 환상지대는 한참이나 더 지나서야 열렸다. 천마와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를 느끼지 못했다는 걸, 밖으로 나온 뒤 그의 말을 듣고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나보다 더 얼이 빠져 있었다. 그가 나와 같은 걸 보고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역시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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