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루시퍼의 딸 라넷과 파천의 해후
모두가 곁을 떠난 이후로 난 말을 하지 않았다. 루시퍼의 곁에 얌전히 앉아 멍하니 있을 때가 많았다. 그 무엇도 내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심지어 천마가 뭐라고 말해도 대답하지 않았다. 내게서 생명력이 매일 조금씩 빠져 나가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파천, 이틀 남았다. 기운을 차리고 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 천마의 말이 무엇을 이르는지 잘 알고 있다. 대마신 발리와의 결투가 이틀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때 나도 죽겠지. 죽어 그들 곁으로 가겠지. 그들은 이 세상에 없다. 나만 남겨 두고 그들 모두는 떠났다.
지금 행복할까? 아무리 열악하다 해도 이곳보다는 좋겠지. 그래, 그들이 행복하다면 다행이다. 그대들은 행복해야 한다. 그대들은 그럴 자격이 있다. 난 바란 것 없이 소박한 꿈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다. 산에 거처 하나 지니고 소중한 가족들과 가끔 찾아오는 친우들을 벗해 추억을 되살리며 늙어 가고 싶었다.
그것이 그리 큰 욕심이었나. 그래, 마계 놈들의 욕심이 모든 걸 그르치고 말았구나. 이놈들 때문에, 이놈들이 인간계를 침략하고 수탈하고 강제하는 바람에 내 작은 꿈과 모든 이들의 소망이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구나.
그 날 루시퍼는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 갔다. 여전히 목에 매인 사슬은 그의 손아귀 안에 쥐어져 있었다. 그가 저 끝을 놓지 않는 한, 우리들이 늙어 죽지 않는 한은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 이곳이다. 바알세불은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야. 이곳이야말로 내 원대한 계획이 완성되어 가고 있는 곳이지.” 루시퍼의 음성에는 오늘도 즐거움이 충만하다.
지금 그의 곁을 수행하는 건 신비한 여자 한 명뿐이었다. 쿤다리를 타고 있던 여자. 아직까지도 나는 그녀의 이름이 무엇인지 마계에서의 직위가 어떻게 되는지 모른다. 그녀는 밝히지 않았고, 루시퍼 또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온 곳은 공중 궁전의 하층부에 해당되는 부분이었는데 그 규모가 상당했다.
“파천, 이곳이 어떤 데인지 궁금하지 않느냐?” 그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물었지만 나는 그의 질문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다. 대답하기가 귀찮았다.
“마계의 정예들이 키워지는 곳이다. 예전만 해도 마계의 마신들을 작위적인 수단으로 성장시키는 일을 추진하지 않았지. 그렇지만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어. 차원계 전체를 상대하려는 계획이 서고부터 이 일은 당연한 수순으로 받아들여졌고, 그래서 총력을 기울이게 되었지. 자, 봐라. 내 자랑스런 전사들을.” 그의 말대로 넓은 광장엔 수많은 유리로 지어진 방들이 있었다. 그 안에는 어김없이 한 명씩 들어가 앉았다. 그리고 그 광장을 가로질러 다른 골에 가니 그보다 배나 더 큰 광장이 똑같은 전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런 곳은 꽤나 많은 듯 여겨졌다.
“마계마전사들은 특별한 수련들을 거쳐 전투에 가장 최적인 상태로 갈러진다. 저들은 크게 두 부류로.......” 그의 설명대로라면 마전사에도 두 가지 종류가 있었다.
마신이 마전사가 되는 경우로, 그리 일반적이지는 않다. 너무도 혹독한 수련인지라 마신들이 자원해서 할 정도로 매력적이지 않다는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두 번째는 그렇게 수련을 한다 해도 반드시 성장한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부류는 메타트론이 만들고 성장시킨 마전사였다. 마전사로 길러지는 수련의 모든 과정은 전적으로 두 번째 유형의 마전사에 초점 맞춰져 계획되고 고안되었는데, 지금껏 여러 단계를 거쳐 부족 한 부분이 보강되며 실행되어 왔다.
오랜 시간이 경과된 이후 마전사를 육성하기 위한 최적의 조건으로 영혼이 없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대부분의 비율을 차지하는 마전사들이 마수들처럼 창조되기에 이른 것이다.
“마전사는 강하다. 저들에게는 두려움도 없고 최소한의 갈등조차도 없다. 내 명예만 길들여져 있는 저들이야말로 마계의 차원계 일통을 견인할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될 것이다. 내가 왜 저것들을 내게 보여 주는지 아는가?” 괜한 질문을 하는군. 그는 스스로 묻더니 또 곧바로 스스로 대답했다.
“너는 마전사가 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물론 네 의지가 받아들일 경우에 더욱 기능성이 높겠기에 네게 제안하는 거다.” 받아들여지리라 믿는 건가? 그런 걸 기대한다니 너도 어리석군.
“흐음, 물론 거절하겠지. 그렇지만 네가 결투에서 진다면 난 너는 강제로라도 마전사로 삼을 것이다. 잘만 조련된다면 대마신에 육박할지도 모르지. 바알세불, 너도 마찬가지다.” “마전사는 영혼이 있는 자에게는 동의를 구해야만 가능한 걸로 알고 있다. 그런데 어떻게 마전사로 삼겠다는 건지 모르겠군.” “내게 다 방법이 있으니 염려하지 마라.” 루시퍼는 우리 둘을 끌고 다니며 마전사들을 직접 눈앞에서 보게 해주었다. 그들은 벌거벗고 있었는데 쓸데없는 신체기관들이 존재 하지 않는다고 했다. 배를 가르면 그 안에 내장이나 심장, 또는 혈관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었다. 단지 그들의 운동을 조율하는 신경과 몸을 지탱하는 뼈와 그것을 움직이는 힘줄과 근육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이런 것들이 용케도 움직인다는 것만도 신기했다. 놈들은 하나같이 쌍둥이처럼 닮아 있었는데, 피부는 검고 탄력이 있었으며 매우 부드러웠다. 그러면서도 마신갑에 비견될 정도로 질기고 단단하기까지 하니 최적의 조건을 갖춘 셈이다.
그들은 다름 천상계의 공격력에 대비해 각종 마력으로 길러졌고, 상대의 힘을 고려해 여러 강점들을 지니게 되었다. 난 그들을 보고 있어도 아무런 생기를 느끼지 못해 더욱 심한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루시퍼의 말대로 이들이 강할 것이라는 견해에는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루시퍼는 몇 차례의 실패를 거듭하여 마전사를 지금 수준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다고 말하며 감회에 젖어들었다. 나는 그런 태도-여기까지 우리 둘을 데려 와 소소한 설명까지 덧붙이는-에 담긴 저의를 확실히 파악할 수 없었다.
거부의 뜻은 분명히 전달했고, 자의로 그의 뜻에 동조하지 않을 것을 그 또한 인정하지 않았던가? 여기다 얼마 전 그 참살로 인해 마계와 그에 대해 더욱 반감이 커졌을 거란 것쯤 모를 리 없을 텐데 말이다. 결국 그는 우리의 결투 이후에 강제적으로 마전사로 삼겠다는 외지를 지녔고 이를 우리 둘에게 확인시키고자 함인 것 같았다.
의지 밖의 물리적인 행사라면 우리 또한 방법이 없었다. 얼마 뒤에 저 감정 없는 괴수와 같이 변할 거라 생각하니 분노 이전에 허탈한 심경이 되어갔다.
이런 내 기분을 알았는지 루시퍼가 듣기에 따라 교묘한 말을 했다.
“의지는 쓸데없는 것. 신이 피조물에게 타락을 방관하고 더 나아가 조장했다는 비난은 자유의지를 허락함에서 비롯되었다. 그래서 난 단계적으로 자유의지를 제한할 셈이다.” 그의 이런 뜻을 마계마인들은 알고 있을까. 알고 있어도 그리 달라질 점은 없을 터였다. 지금 역시나 본질은 그와 다름없었으니까.
마전사의 수는 내 생각보다 훨씬 많은 듯했다. 몇 곳을 지나쳐 왔음에도 아직도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오늘 너희들을 이곳에 데려 온 원래의 목적이 이곳에 있다.” 큰문은 아름다운 각양의 무늬가 음각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리 문 좌우로 나찰들이 지키고 섰다 루시퍼가 나타난 것을 보고는 재빨리 예를 표한다.
좌우로 열린 안으로 우리를 삼킨 문은 예전대로 입을 오므렸다. 안은 냉기가 꽤나 쌀쌀했다. 하얀 얼음벽들은 매끄러웠다. 안은 내 시선을 끌 만큼 특별한 구조는 없었다. 단지 몇 개의 얼음 기둥이 가운데 둥그렇게 모여 있다는 정도였다.
“자, 저길 봐라, 무엇이 있는지를.” 난 루시퍼가 가리키는 곳을 보다 얼굴을 찡그렸다. 얼음기둥에 조각이 새겨져 있는 줄 알았는데 자세히 보니 그 안에 무언가가 들어있었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 형체가 조금은 분명하게 드러났다. 벌거벗은 사람이 세 명이 기둥 안에 냉동된 채로 보관되어 있었다. 검은 머릿결을 지닌 젊고 아름다운 청년 둘와 소녀 하나.
난 그들이 사람인지 마신들인지를 구분해내지 못했다. 겉모습에서 마신들과 인간의 다른 점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했다. 딱히 이것이다, 라고 할 만한 게 없었다. 난 의아해졌다.
“저 세 명은 너희들이 너무도 잘 아는 인간들이다.” 그의 말 중에 ‘인간’ 이라는 의미를 먼저 구분해내었고, 뒤 이어 ‘잘 아는’ 이라는 단어를 연관지었다. 그리고 ‘세 명’ 이라는 관련성을 참조하고 나니 번뜩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설마.......” 나는 며칠 새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설마, 설마 아니겠지.
“너희 둘의 아들과 딸이다. 장성한 모습을 보니 기분이 어떤가?” 나는 할 말을 잊고 루시퍼를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내 아들 환아와 딸 화아라고? 그럼 옆에 있는 청년이 천아란 말인가? 저런 거짓을 말하는 의도가 뭘까?
그가 한 말을 믿을 생각 따위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렇지만 내 부정은 점차 가파르게 긍정으로 올라서고 있었다.
“정말인가?” 떨리는 음성이 그걸 확인하고자 했다.
“물론이다. 곧 깨어나면 너희가 놀란 만큼 변화되어 있을 것이다. 강하고 아름다운, 그래서 인간이면서 마신의 능력과 마전사의 능력까지 겸비한 가장 완벽에 가까운 인간을 너희들은 보게 되겠지. 그들은 내 후사를 이어 마계를 다스리게 될 것이며, 신의 권능을 훼손하는 일에 앞장 설 것이다.” 난 순간 감당할 수 없는 혼란으로 까마득한 낭떠러지 앞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차라리 그런 낭떠러지가 눈앞에 있다면 곧바로 뛰어내렸을 것이다.
뒤에서 담담한 소리가 천마의 입에서 흘러 나왔다.
“환아와 천아는 그렇다 쳐도 화아의 의지는 어찌할 텐가. 그 아이는 아무것도 습득하지 못한 상태에서 너희들이 주입해 준 것만 지니고 있겠지. 이제는 차원 내의 모든 질서마저 부정하려 하는가?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선택인지는 잘 알고 있을 것 아닌가?” “위험은 어떤 순간에도 함께 한다. 모험을 감행하는 자는 작은 위험 정도에 견지해 오던 태도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리고 그 위험이야말로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이라면 즐거이 행하지 않겠는가.” “천마, 사실이란 말이나? 마황의 말이 거짓이 아닌 진실이란 말이냐?” “그래, 파천 안타깝게도...... 사실인 것 같다.” 이상하게도 그 순간, 루시퍼의 말들이 사실임이 확인되는 순간 내 심장은 평소보다 평온하게 뛰기 시작했다. 그에 대한 원망이나 불평, 불만보다는 이것 역시 내 의지의 소산이 아니라는, 그리하여 아무리 거부하고 거절한다 해도 사실을 돌이킬 수 없다는 절망으로, 체념으로 빠르게 환급되어 굳어 갔다.
난 단지 한마디만을 했을 뿐이었다.
“저 아이들을 저렇게 만든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될 것이다.” 이제 내 가슴은 화석이 되기라도 했단 말이던가. 난 더 이상 울지도 분노하지도 않는다. 모든 걸 받아들인, 그래서 현재의 그 어떤 부조리함도 내 것으로 인정하기 시작한 자의 비참한만을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난 수하들이 한꺼번에 죽는 순간 함께 죽었다. 의지만 살아 있을 뿐 감정을 죽었다. 그런 내가 또다시 획득할 수 없는 가치로 인해 흔들릴 수는 없었다. 난 한 순간을 노리는 맹수가 되어야 한다. 맹수를 사냥하고자 숨죽이고 기회를 엿보는 사냥꾼이 되어야 한다.
“머지않아 저 아이들의 새로워진 모습을 대면하게 될 거야. 가슴 뿌듯한 감동을 느낄 준비나 하고 있으면 된다.
루시퍼는 동조를 구하는 듯한 은근한 말투로 날 환기하려 했다. 그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인지 간파하는 건 어렵지 않지만 아이들 운명의 끝에 무엇이 걸쳐 있는지를 알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마계가 모든 걸 원점으로 돌리는 날, 저 아이들은 모든 영혼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나는 도무지 요령부득이었다. 대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자들, 마계에 발을 들여 놓았지만 여전히 인간인 자. 그런 자들이 내게 필요했고 난 얻었다. 수많은 인간들이 내 의지를 제 의지로 환원시켰으며 그것이야말로 약속의 땅에 이르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모들 차원의 문이 열리는 날, 우주의 영자들은 무엇이 실체이고 진리인지를 깨달을 것이다.” 루시퍼의 안내는 거기서 끝이 났다. 지쳐 허덕이는 나와 천마를 그는 여전히 변함없이 끌고 나왔을 뿐이다.
마계에서의 내 존재는 루시퍼나 대마신, 마신들에게 농락의 대상이 되거나, 그로 아니면 관심과 호기심을 일으키는 의미로서만 존재할 가치를 획득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루시퍼의 처소를 나온 뒤에 나는 발리에게 끌려가 심한 모멸감을 견디고 있어야 했다. 내일이면 그와 생존을 걸고 결투를 하게 됨에도 내게는 적으로부터 최소한의 보호조차 받지 못하고 있었다. 놈은 날 조롱하며 내 선택을 한껏 비웃었다.
“너 따위가 날 지목하다니. 왜 하필이면 나였지? 단지 네 수하들에게 고통을 준 대상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내가 만만해 보여서인가?” 그게 궁금했던 거다. 대마신 가운데 자신을 선택한 이유가 자신이 가장 수월해 보였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성급한 추측이 자존심을 건드렸나 보다.
“무슨 상관인가? 너는 강하니 날 쉽게 제압할 것이고 마음껏 유린하면 그만이지 않은가? 그때 그랬던 것처럼.” “그래, 네 말대로 널 처참하게 뭉개 버리면 되지만 널 그렇게 한다고 해서 상처받은 내 자존심을 회복할 수는 없지. 다른 대마신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생각만 해도 울화통이 치미는군.” 저급한 사고 구조를 지닌 이런 하찮은 자가 마계의 대마신이란 감투를 쓰고 있다는 건 상당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치게 단순하여 쉽게 화내고 분노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대상을 파괴하는 이런 자야 말로 마계에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일 것이다.
이자에 비하면 다른 대마신들은 지극히 이성적이어서 언뜻 마계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겨질 정도였다.
“너를 지금 이 자리에서 처리하고 싶지만...... 루시퍼 님의 명이 있었으니 내 참는다.” 철저한 노예근성으로 무장하기까지 했지 않은가? 난 놈을 좀더 격정 가운데 밀어붙이고 싶어졌다.
“사실 내가 인간인 점을 고려한다면 너는 그리 강하지도 않다. 대마신이라 하지만 어디 그렇게 여겨질 만큼 대단한 구석도 없어 보이고, 생각하는 건 단순하고 행동하는 건 과격일변도니 내가 널 무시하는 건 당연하지 않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화를 삭이느라 그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발리가 강한 건 변함없는 사실이지만 그건 주어진 것이지 그의 재능이나 노력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다.
그는 내게 위해를 가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더욱 분노했으며 애꿎은 기물만 부수었다. 그는 욕을 하거나 조롱하거나 그도 아니면 협박하는 따위로 한참의 시간을 더 소모하고서야 날 내보내 주었다. 난 어디든 갈 수 있었다. 루시퍼에게서 놓이는 순간부터는 잠시 동안의 자유가 주어진다.
루시퍼는 내일의 결투까지 내게 휴식과 더불어 자유를 함께 배려했다. 천마는 여전히 루시퍼와 함께 있었다. 그 역시 실의에 빠져 있었고, 특히 천아에 대한 부분이 큰 영향을 끼친 듯싶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복도를 지나고 있는데 그 신비의 여인이 날 찾아 왔다.
“날 따라 와라.” 그녀는 루시퍼의 최측근으로 분류될 수 있는 인물이었는데 거의 마황의 곁을 떠나지 않는 것 같았다. 항시 그의 곁에서 수행하며 뒤를 따르며 자질구레한 일을 처리했다. 그래서 내가 가장 많이 보고 겪었기에 상당히 잘 알고 있다 생각하는 인물 중 우선 순위에 올라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그녀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건 처음이나 진배없었다. 상당한 대화를 했던 것도 아니었고 그럴 필요도 없었으므로 관계의 변화나 진전 역시 있을 수 없었다.
그녀를 따라 루시퍼의 처소로 향했다.
그의 처소에는 천마와 루시퍼만이 있었다. 그녀는 도착하자 루시퍼 앞에 얌전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파천, 어서 오라.” 이후 그는 우리 둘에게 또다시 잡다한 얘기들을 풀어 놓았다. 슬슬 지겨워져 갈 때쯤이었다.
“이리 오라, 라넷이여.” 그녀의 이름이던가. 그녀의 무릎걸음으로 루시퍼에게로 다가갔다. 극경의 태도였다. 다른 대마신들과 그녀는 동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대마신들 중 그 누구도 루시퍼에게 저 정도로 대하는 자는 없다. 루시퍼에 대한 라넷의 태도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장면이었다.
가까이 다가앉은 라넷은 고개를 들지도 않은 채였다.
“고개를 들라.” 라넷이 아주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루시퍼를 바라본다. 루시퍼의 손이 라넷의 뺨에 닿았다.
“아직도 미련이 남느냐?” “미련은...... 없습니다.” “인간의 사랑이란 하잘 것 없는 것이다. 사랑이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다. 갈구가 사랑으로 오인되고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이 사랑으로 이해된다. 금방 허물어져 변색될 허망함을 쫓느니보다는 영원토록 변하지 않을 실상을 찾아야지. 떨지 마라. 너는 순수했으나 운명이 공평하지 못했던 것뿐이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는 두 사람이 하는 얘기를 귀 기울여 들었다.
“비련은 네게 어울리지 않는다. 화려한 꽃으로 다시 피어나라. 마계가 우주를 다스리게 될 때 네게 인간들의 운명을 맡기겠다. 그들 중 아픔을 주었던 자들을 가려 네 종으로 삼고 영원토록 섬기게 해주겠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대답은 기계적이었다. 그런 걸 루시퍼도 느낀 것 같았다.
“그에게 널 알리고 싶은 거냐?” “.......” 그녀는 처음으로 루시퍼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혼란스러우냐? 처음 네가 날 불렀을 때를 기억하느냐?” “네.” “파천과 천마.” 루시퍼는 웬일인지 천마를 바알세불로 부르지 않았다.
“이 아이가 누군지 궁금하지 않은가?” 난 궁금했다. 천마는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시큰둥한 천마의 말이 루시퍼에게로 전해졌다.
“예연에 마계에 있지 않았으니 이후에 영입된 영자겠지.” “네 말이 맞다.” “마황, 그대의 여자인가?” 천마의 어조가 달라졌다. 옛정 때문이었던지 최소한의 예의를 잃지 않았던 그가 그런 걸 내팽개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럼에도 루시퍼는 개의치 않았다.
난 천마의 말을 다시 곰곰 따져 보았다. 루시퍼는 천사. 딱히 성적으로 분류할 수 없는 존재. 굳이 얘기하자면 양성이라 말할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여자를 둔단 말인가? 그리고 영계에서도, 영자들에게도 남녀간의 사랑이 존재하는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딸이다. 이 아이의 지난 생애들을 살펴보면 참으로 기구하다 할 수 있다. 이런 것만 봐도 신이 공평하다는 건 다 거짓임이 드러나는 거지.” 그러더니 딸 라넷의 지난 생애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금 지난 생애들에 대한 기억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에 초연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루시퍼의 말이 이어지자 그녀의 반쯤 보이는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가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녀는 일흔일곱 번의 현생을 경험했다. 그 동안 그녀 삶의 방향성은 사랑에 대한 갈구에 다름 아니었다. 갖가지 다른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여전한 게 하나 있었으니 상대에 대한 변함없는 헌신적인 사랑이었다.
그런 순수한 사랑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삶은 언제나 불행하기만 했다. 그녀의 염원은 그래서 더욱 불타 올랐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그녀는 생을 거듭할수록 처음보다 더 열정적인 사랑에 목말라 했다.
한 가지 기이한 점은 다른 영자들과는 달리 그녀는 여자로만 태어났다는 것이다. 남자의 사랑에 배신당한 경험들은 집착을 더욱 강하게 해갔고, 본래적인 성정이 투영되어서인지 현생에서의 그녀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가족과 나라와 속한 조직을 배신하는 일을 망설임 없이 해냈으며, 제 생명을 바침까지 스스럼이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삶의 마침은 언제나 비참하기만 했다. 사랑은 완성되지 않았다. 지독하게 따르고 연정을 품었던 상대가 자길 버려두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는가 하면 전쟁터에 나가 전사한 채로 돌아오기도 했다. 다른 여자에 빠져 도망가거나 내친 경우도 여러 번이었다. 심지어 어떤 경우엔 사랑하는 남자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돈에 팔려 가고 치유할 수 없는 상처로 인해 불구자로 삶을 마치기도 했다.
한두 번이 아니라 전부 그런 상황이었으니 그녀의 한이 얼마나 사무쳤겠는가? 그녀는 결국 귀계의 귀령이 되었는데 현생에 나지 않을 때는 항시 인간계를 떠도는 잡귀가 돼 아름다운 사랑을 가꿔 가는 연인들을 시샘하며 그들 간에 불화를 조장하기도 했다.
그런 그녀가 마계와 연을 맺은 건 인간계의 시간으로 지금으로부터 3백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때 그녀는 한 권력자의 집안에 태어났으며 열아홉이 되었을 때 평소 연모하던 남자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남편은 정치의 성취욕이 지나치게 강한 사람이었다. 장인의 권력자라는 사실로 인해 그는 겉으로일지언정 라넷을 상당히 아꼈다.
그렇지만 이것도 잠시, 그녀의 아버지가 반대파의 모함에 말려 한 사건에 연루되면서 모든 것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 때까지 지녔던 모든 권력을 잃게 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야 만다.
그때부터 남편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남편은 용모가 뛰어나고 머리가 명석했으므로 평소 그를 탐내던 사람들이 많았다. 결국 그는 헤어질 것을 결심하고 라넷에게 최후 통첩을 한다. 울며 매달려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당시 라넷은 임신 중이었다. 그녀는 곧 태어날 아기를 위해서라도 그를 잡아야 했다. 그렇지만 이미 돌아선 마음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결국 그녀는 또다시 버림 받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전생을 기억해내지 못했으므로 자신이 이런 경험이 많음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하루아침에 길거리에 나앉게 되자 매일매일 비참한 생활의 연속이었다.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으니 살아남는 일도 수월치는 않았다.
그런 가운데 전남편이 새로운 가정을 꾸몄다는 소식을 접했으며, 산달이 되어 아이를 낳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전남편의 새로운 부인이 그녀를 찾아 왔다. 찾아 온 이유는 한 가지. 아이를 자신에게 달라는 것이었다. 아기를 갖지 못하는 그녀였기에 남편의 아들을 자신이 키우고 싶다고 했다.
라넷은 거부했다. 살아가는 이유가 되어 버린 아들마저 뺏긴다면 자신은 의욕을 잃게 될 거라며 그것만은 안 된다고 강경하게 말했다.
그렇지만 상대는 가지고 싶은 건 꼭 가져야 하는 욕심 많은 여자였다. 거의 빼앗다시피 아들을 데려 갔다. 힘없는 라넷은 매일 남편의 집 앞에서 울며 아이를 돌려 줄 것을 간청했다.
이 소식은 금세 장인에게도 전해지게 되었고, 사위를 불러 소란 없이 해결하라고 지시한다. 라넷의 남편이자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한 그 사내는 야심한 밤에 울다 지쳐 추운 거리에 쓰러져 있는 라넷을 들쳐 매고 숲으로 들어갔다.
그의 손에는 땅을 팔 수 있는 도구가 쥐어져 있었다. 그는 숲에 들어가 땅을 판 위 라넷을 감고 있던 모포 채로 구덩이 안으로 던졌다.
그때 라넷은 깨어나게 된다. 그 남자는 살아 있는 사람을, 그것도 자신의 아들을 낳아 준, 한때는 아내였던 여자를 흙으로 덮었다. 생매장을 시키려는 속셈이었다.
발버둥치며 일어서는 그녀의 머리를, 남자는 잔인하게 손에 들고 있던 흉기로 내리쳤다.
실신한 그녀가 깨어나 보니 어느 허름한 골방 안이었다.
한 명의 노파가 호롱불 아래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자신의 이마에는 붕대가 감겨져 있어 꿈이 아닌 현실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저 노파가 나를 구했나 보구나. 산들 무엇 하리. 죽자, 죽어 원귀가 되어서 아들을 지켜 주리라.” 그런 결심을 하고 집 앞에 있는 나무에 줄을 걸고 목을 매려 했다. 그때 노파가 집 밖으로 나와 하는 말이 이랬다.
“죽을 결심이 있다면 이 세상에 할 수 없는 일이란 없단다. 내가 도와 줄 테니 쓸데없는 짓은 하지 말거라.” 라넷은 노파의 말에 설득돼 죽을 결심을 바꾸게 된다. 그 날 새벽녘에 노파는 라넷의 사정 얘기를 듣고 그녀가 솔깃할 만한 제안을 한다.
“복수를 하고 싶으냐?” “네, 그렇지만 저는 힘이 없습니다.” “도와주세요, 할머니.” “그래 도와 주마. 대신 이 일은 네 결심이 동반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다.”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사악한 남편에게 벌을 내릴 수 있다면 전...... 지옥에도 갈 수 있습니다.” “그 정도의 결심이라면 못할 것도 없지. 좋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하거라.” 노파는 뜬금없이 영계와 절대의 힘을 지닌 존재들에 대한 얘기들을 했다. 그들의 왕이 있는데 ‘마황’ 이라 했다. 그에게 영혼을 저당 잡히고 소원을 빌면 현생에서의 그 어떤 일도 이룰 수 있다고 했다. 대신 그 결과로 넌 영원히 ‘마황’ 의 노예가 되어야 한다고도 했다.
“선택은 자유다. 어떻게 하겠느냐?” “하겠습니다.” 굳은 결심으로 결국 그녀는 노파가 시키는 대로 의식을 치르고 마황에게 소원을 빌게 된다. 그녀의 정성은 40일 동안 쉼 없이 계속 된다.
40일이 지난 어느 날 노파의 말대로 밝은 보름달을 가리는 먹구름과 함께 신비한 일이 발생하고, 기이한 존재가 그녀 앞에 나타난다. 그녀는 이후 그의 도움으로 복수를 하게 되고, 여자의 집안에도 재앙을 내릴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 이 아이는 죽지 않고 마계로 옮기게 되었지. 그 이후 이 아이는 내 딸이 되었다. 그 동안의 원한 때문인지 라넷은 나조차 감탄할 정도로 마계에 적합한 영자로 빠르게 변모되어 갔지.
혹독한 수련을 거친 이후 지금의 자리에까지 오를 수 있었고, 그러던 어느 날 이 아이가 내게 찾아 와 다시 한 번 현생을 겪게 해달라고 했다.
천마, 너도 알다시피 마계에도 일정한 비율로 현생의 기회가 주어진다. 물론 흔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야. 나는 이 아이의 소원을 못 들은 척 할 수 없어 다시 현생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이 아이의 삶은 또다시 고통의 연속이더군. 사랑은 이루어지지도 않고 환란은 끊임이 없었어.
그럼에도 라넷은 너무도 순수하더구나. 난 더 이상 현생을 이어 가는 건 이 아이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다고 판단해 다시 마계로 불러 들였다.” 그의 길고 긴 이야기는 끝이 났다. 난 그녀가 참 기구한 삶들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저 화려하고 아름다운 얼굴 다른 편에 그런 사연이 있을 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이 아이가 바로 너희들도 잘 알고 있는 환사다.” 환사....... 환사라고? 말도 안 돼. 나는 한동안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멍한 상태로 있었다. 분명 처음 본 얼굴이었음에도 낯이 익다고 생각된 건 그런 이유 대문이었다. 실종된 환사가 루시퍼의 딸로 내 앞에 서 있다니.......
설란도 알고 있을까? 나는 이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리고 가슴이 저릿저릿하게 아파 왔다.
“파천! 어떤가, 환사를 다시 만난 소감이?”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녀가 환사라고 해도 예전의 그녀로 느껴지지는 않았고 그녀 또한 마찬가지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넷, 하고 싶은 말이 없는냐?” 루시퍼는 자신의 딸이기도 한 환사, 아니 라넷에게 이렇게 물었다.
“없어요...... 전혀.” 나도 그럼 환사의 삶에 고통을 준 사람 중에 하나란 말인가? 괜히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궁금하기도 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어떤 식으로든 용서를 빌로 싶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그녀에게 잘못한 건 그다지 생각나지 않았다.
그녀가 나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건 나중에야 알게 된 일이고, 또한 그때는 이미 설란이 내 마음 전부를 차지하고 있을 때다.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지 않은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라넷이 날 바라보았다.
“파천, 특별한 의미를 둘 필요는 없어. 부담을 가질 필요도 없고....... 지금까지 너만큼 내게 잘해 준 남자는 없었어.” 그리고는 싱긋 웃었다. 난 그녀의 웃는 얼굴에서 환사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렇지만 그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이 아이에게 현생을 다시 겪게 한 건 다시는 흔들리지 말라는 의미였다. 있지도 않은 사랑의 환상에 매여 있는 것도 보기 싫었고 말이야. 결국 내 예견대로 라넷은 여전히 상처 입은 모습으로 현생을 살아가더군. 신이 특별히 이 아이를 미워한다는 말을 하고자 함이 아니다. 윤회의 가장 큰 모순이 뭔지 아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한 번 길을 잘못 든 자는 역겁이 지나도 선회할 수 없다는 거야. 이런 환경에서 무슨 발전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나라고 해서 윤회를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가능성은 무한대로 열려 있으나 실제로 그 길로 드는 영자는 드물다는 거지.
내가 왜 신의 뜻을 거부하고 인간들을, 영계의 모든 영자들을 그 구속에서 해방시키려 하는지 알겠는가.” 난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지만 일견 그의 말에 수긍이 갔다. 그렇다고 해서 네 방법이 정당화되지는 않는다.
“라넷.” “네.” “이들을 그곳으로 데려 가라. 마지막 기회는 줘야겠지.” “알겠습니다.” 그녀는 다소 밝은 음성으로 그렇게 대답하고는 우리 둘을 밖으로 인도해 갔다, 그녀는 우리 목에 걸려 있는 사슬을 잡지도 않고 그냥 앞서 걸었다. 천마는 혼자 생각에 몰입되어 침묵을 지키고 있었고, 나 또한 별로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가만 따라 가기만 했다.
“파천.” 라넷의 부름에 난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듯 움찔했다. 내가 왜 이러지? 마치 빚진 자의 심정 같은 것이었다.
“지금껏 내가 당한 불행들에 대해서 난 그다지 원망하지 않아. 모든 게 부질없는 거란 걸 깨달았기 때문이지.” “마계에 든 걸 후회하지 않나?” “후회? 아니. 다시 선택하라고 해도 난 마계를 택할 거야. 어쨌든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최초로 손을 내밀어 주신 분이 바로 내 아버지 루시퍼거든. 나는 그 분을 사랑하고 존경해.” 지금 얘기하는 걸 듣고 있자니 환사랑 같이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처음 그녀가 쿤다리를 타고 내 앞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난 그녀를 도도하고 자존심 강하고 냉정한 존재로 인식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또 달랐다.
“지금은 전 우주가 격변에 휩싸여 가고 있지. 그 중심에 마계가 있고, 그 시작을 마계가 했다지만 이건 애초부터 어차피 지펴질 불씨였어. 귀계의 귀령으로 있을 때부터 난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걸 느끼고 있었지. 그게 구체적으로 뭔지 깨닫지 못했는데 지금에 와서야 조금은 알 것 같아.” “그게 뭐지?” 그녀가 앞서 가던 걸음을 잠시 중단하고 날 돌아보았다. 초롱초롱한 눈망울에 확신이 가득 서려 있었다.
“어떤 영자든 단지 피조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구속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선택은 전적으로 개개의 몫이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만 지면 되는 거지. 만약 그 무엇이든 법칙과 원리로 강제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 깨트려야 한다는 거야. 그래서 신은...... 타도해야 할 대상이야.” 엄청난 말이었다. 나는 심장이 두근두근 거렸다. 내가 알던 환사는 분명 아니다. 원래의 그녀라고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환사는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어낼 만한 배포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마계가 승리하면 우리 주장이 진리였음이 드러나겠지만 패배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회복되지 못할 패악의 이름으로 정죄되겠지. 그렇지만 후회는 없어.” 다시 그녀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난 그녀에게 반박해 주고 싶었다. 그 뜻이 옳고 그름을 떠나 방법이 틀렸다면 그건 비난받아야 한다는 것을 난 그녀에게 말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참았다. 그때다.
“넌 그러겠지. 지금 우리가 취하고 있는 수단들이 정당하지 못하니 목표가 아무리 떳떳하다고 옳다 해도 이건 잘못된 거라고.” “그래, 그건 사실이야. 부인할 수 없는.” “그런 면도 있겠지. 그렇지만 최소한의 희생이 불가피하다면 그건 모두가 조금씩 분담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방법들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포기해야 하나? 그럴 수는 없잖겠어?” 나는 슬슬 그녀의 단순한 맹신에 화가 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네가 당한 모든 불행들도 마찬가지 아닌가? 너는 분명 조금 전 그렇게 말했지. 개체를 강제라는 것이 아무리 숭고한 진리의 옷을 입었다 해도 그건 깨트려야 한다고. 지금 너희가 타도해야 한다고 부르짖는 신은 너희들처럼 인간들을 강제하지도 파괴하지도 않아. 그 행위에 대한 대가만 지울 뿐이지. 그런데 너희는 그렇지가 않잖아. 결국 너희가 부정하는 짓을 지금 너희가 행하는 꼴이다. 설마 그걸 모른다고 하지는 않겠지.” 환사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걸었다. 이때 천마가 구시렁거렸다.
“안에 있을 때는 실체를 볼 수가 없어. 밖으로 나와야만 보이지. 제가 입은 옷이 더럽다는 걸 알기 위해서는 옷을 벗어 보아야 잘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지.” 천마가 오랜만에 말을 했다. 그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들의 진정한 의도를 알게 되면....... 글쎄 너희들마저 치를 떨게 될 거다. 본질이 얼마나 추악한지를 알게 된다면. 그들이 꾸미는 음모가 어느 정도를 목표로 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그는 잠꼬대하듯 그렇게 주절거렸다. 천마의 눈은 어디를 보고 있는지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았다. 그는 멍한 시선이 담신 약간 두려운 표정이었다. 그가 환상지대에서 보고 겪은 것이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말하는 사이 목적지까지 다다랐는지 라넷이 신중한 모습으로 말했다.
“너무 놀라지들 말기를.......” 그녀가 입구 쪽에 길게 내려뜨려진 천을 손으로 걷어 올리며 들어서자 우리는 조금씩 간격을 두고 바짝 뒤따랐다. 안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전경은 라넷의 말대로 그리 마음 편히 맞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죽일 놈들.......” 천마가 한 말을 나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뭐라 해야 하나?
“설란, 괜찮소?” 난 먼저 설란에게 그렇게 안부를 물었다. 그녀는 그제야 날 발견했는지 내게로 달려왔다. 내 몸에 돋은 가시가 여전했기에 그녀를 안을 수 없었고 손으로 만질 수도 없었다. 두 팔을 들어 그녀를 제지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그런 것쯤 그녀는 전혀 상관없는지 개의치 않고 내 품으로 달려들려 했다.
“설란, 이러지 마시오.” 그렇게도 참고 참았던 눈물을 그녀는 내 앞에서 마음껏 쏟아내고 있다. 마음이 찢어지는 듯 아파 왔다.
“환아가...... 화아가...... 흑흑흑흑.......” 그녀의 울음은 깊게 패인 내 가슴속에서도 빠르게 흘러내렸다.
적루아가 한쪽에 서 있다 우리들 곁으로 걸어온다. 그녀 뒤쪽으로 두 명의 청년과 한 명의 소녀가 서 있었다. 우리의 아들딸들이었다.
루시퍼가 장성시킨 아이들의 모습은 내게 낯설기만 했다. 검은 흑발들을 가지런히 빗어 묶었고 이마에 보석으로 치장한 가는 줄을 두르고 있었으며, 온몸을 가린 건 번쩍이는 망토였다. 그들의 이마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는 마계의 문신이 눈에 크게 부각된다.
난 설란을 한쪽으로 밀어내며 아이들에게로 걸어갔다. 환아와 천아는 우리 둘이 누구인지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리는 것만으로도 그건 거의 확실했다.
“환아.......” 내 부름에 아들 환아는 고개를 돌려 외면했다. 잠시 그러고 있다가 몸까지 홱 돌려 버렸다.
“오빠, 누구지?” 여자아이였다. 17세 정도 됨직한 용모의 여자아이는 설란을 상당한 부분 닮아 있었다.
“우리들의 아버지다.” “아버지? 마황이 우리 아버지잖아. 무슨 소리야?” “인간이었을 때의 아버지다. 너와 날 낳아 준 부모가 저기 저 두 사람이다.” 환아의 그 말에 나는 목이 메었다. 그래, 네가 우릴 부정하지는 않는구나. 난 은근히 걱정되었었다. 애들이 우릴 알아 보지 못할까 봐. 그렇지만 그런 염려는 쓸데없는 것이었다. 하긴 지금에 와서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인간이었을 때? 흥, 하찮은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은 전혀 없는데 그런 게 무슨 상관이람.” 화아의 그 말에 천아가 움찔 떨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지 마라.” “오빠들 너무 실망인데....... 기껏 인간이었을 때의 기억 때문에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난 가겠어.” 몸을 돌려 사라지려는 화아를 라넷이 불러 세웠다.
“루루.” “왜 그러죠?” “이건 마황님의 명이다. 넌 내가 허락할 때까지는 이곳에서 나가면 안 된다.” “치...... 알았어요. 지겨워도 참죠, 뭐.” 팔짱을 끼며 못마땅한 기색을 하고 있는 아이가 내 딸아이라니. 나는 환아를 다시 불렀다.
“환아야, 이 아빠는 신경 쓰지 마라. 불편하면...... 이만 가도 된다.” 애들은 예전과 달라졌다.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서. 아니면 마계에 종속된 자아에 의해 새로운 선택을 한 것이다. 난 너희들을 탓하지 않으련다. 모두 내 탓인걸.
그때 환아가 다시 날 향해 돌아섰다. 흔들리던 눈동자에 싸늘한 기운이 피어났다. 나만 그렇게 느낀 걸까?
“불편하다뇨. 전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 이리로 와서 앉으시죠. 노예가 되셨다니 조금 의외군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습니다. 마계를 인정하시고 협조하세요. 그렇게 되면 우리와 예전처럼 지내실수도.......” “그만해라, 환아. 그러면 안 돼. 아빠잖아. 널 낳고 키우고 지금까지 사랑을 주신 아빠야. 아빠가 왜 이렇게 되신 줄 모르지도 않을 텐데....... 네가 그런 말을 하면 어떻게.......” 설란은 말을 하다 또다시 울었다.
“아이, 듣기 싫어. 그만 하란 말야. 왜 자꾸 울고 그래?” 루루라는 새 이름을 가진 화아가 짜증난다는 듯 제 엄마 설란을 몰아붙였다.
“가자, 여기 더 있어 봐야 좋은 꼴 못 보겠다. 저 아이들은 이제 더 이상 우리 자식들이 아니다. 그만 가자, 어서.” 천마는 허탈한 심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어딜 가자는 거지? 우리가 갈 데가 있었나? 가족들이 여기 있는데....... 이곳이 우리 집이지 않던가.
“천마, 마지막...... 일지도 모르니....... 조금만, 조금만 더 있게 해다오.” 난 겨우 입을 열어 이렇게 말했다.
적루아가 천아에게로 다가가더니 가만 두 눈을 들여다본다. 그리고는 손을 내밀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마도 무슨 말인가를 전음으로 하고 있는 듯싶었는데 나와 천마는 들을 수가 없었다.
천아의 손이 적루아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이러지 마세요. 전 더 이상 어리석었던 예전의 천아가 아닙니다. 마계 마황 루시퍼 님의 아들 세라핀입니다. 당신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예전처럼 인정 할 수는 없습니다.” 아직은 한 가닥 정리가 남아 있었던지 꼬박꼬박 존대를 했다.
“언제까지 여기 이러고 있어야 하죠, 라넷님?” 화아가 지겹다는 듯 그렇게 말하자 환아가. 나섰다.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제 어머니입니다. 어버지...... 께서 말씀하시길 어머니는 변함없이 어머니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지만 파천...... 당신께는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겠군요. 지금까지의 구질구질한 인간적인 인연은 오늘로서 끝을 내도록 하죠. 다음부터는...... 마계에 예속된 노예로 대하겠습니다.” “불칸, 정말이야? 아버지가 그렇게 말씀하셨단 말야?” “그래, 저 두 분은 여전히 우리들의 어머니다. 세라핀, 너도 명심해라.” “알았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불칸, 루루, 세라핀이라니.......
그 이름들이 주는 낯설음만큼이나 아이들은 우리들에게서 멀리 벗어나 있었다. 뭘 기대할 수 있으리요. 그렇지만 잠시라도 좋으니 아이들의 얼굴과 음성만이라도 좋으니 이 자리에 더 있고 싶었다.
“가자, 가. 환사, 아니 라넷. 우리 그만 가게 해다오. 저 꼴을 보고 있을 수가 없구나. 제발 부탁이다.” “좋다, 그렇게 하도록 해주지. 불칸, 루루, 세라핀. 너희들은 이만 가도 좋다. 곧장 수련관으로 가라. 대마신들이 너희들을 기다리고 있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라넷 님. 그리고 어머니.” 불칸이 그 말을 하고 밖으로 나가자 두 아이들도 뒤를 따랐다. 내 옆을 스쳐 지나던 환아가 잠깐이지만 멈칫 서려다 가던 길을 계속 갔다. 화아는 경멸 가득한 시선으로 날 보다 모질게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이들이 떠나 간 빈자리에 우리 네 사람은 망연자실한 시선을 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시간을 잠시 주지. 마지막일 테니 대화할 시간을.” 설란이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려는 라넷을 불러 세웠다.
“환사,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환사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침묵하더니 설란을 향해 돌아서서 또박또박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몰라서 묻나요? 예상은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닌가요? 그럼.” 설란은 휘청거렷다.
“설란.” 난 그녀를 불렀을 뿐 잡지는 못했다. 대신 적루아가 곁에 와 그녀를 부축한다.
“언니, 괜찮아요?” “네.” “그 동안 마음 고생이 심했겠구려.” “아니예요. 저보다는.......” 그녀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또다시 울었다. 울지 않기 위해 그렇게 힘겹게 참아내더니만 이제는 더 이상 견딜 힘이 없는가 보구려. 그렇겠지. 왜 그 마음을 모르겠소.
“울지 마시오. 더 이상 흔들리지 말고 마음을 모질게 먹어야 하오. 이제 우리에게 잃을 것도 없으니 마음 편히 먹고....... 그리고 힘을 내 견디고 또 견디오.” 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견디라니, 될 말인가. 매 시간이 고통인데 그건 너무 무리한 요구였다. 그렇지만 견디지 않으면 또 어쩔 것인가.
설란과 적루아에게 대하는 걸 보아 마계에서 두 사람만은 제대로 대우해 줄 요량인 것 같았다. 그 이면에 아이들을 배려하려는 이유도 있는 것 같았고, 적루아 같은 경우엔 귀계의 수장이기도 한 칠성 중의 하나이기 때문인 듯도 싶었다.
마계에 강제적으로 귀속시키려는 시도만 없다면 그녀들만이라도 이대로 있어 주었으면 하는 게 솔직한 내 바람이었다. 그녀들마저 험한 꼴을 겪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
우리들의 만남은 지극히 짧았다. 밖에 서서 대기하고 있던 라넷이 곧 들어와 우리를 재촉했기 때문이다. 못 나눈 얘기도 많았건만 어쩔 수 없이 헤어져야만 했다. 라넷의 뒤를 따르며 난 그녀에게 물었다.
“두 사람은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인가?” “걱정하지 않아도 돼. 굳이 원하지 않는다면 귀계로 전향하지 않아도 그만이고. 그래도 대우는 여전할 테니. 귀계가 곧 우리와 동맹관계가 될 테니 칠성의 하나인 그녀를 괜히 자극할 필요도 없고. 이해가 가나?” “그래......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정말 다행일까? 모르겠다.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길도 보이지 않는 흑암 속을 더듬고 지나다 그 더듬을 것마저 없어져 버린 심정이었다.
“내일 결투가 있기 전까지는 자유다. 어디를 가더라도 상관없다. 대신 아래로는 내려가지 마라. 가고 싶은 데로 가고 머물고 싶은 곳에서 머물러라.” 라넷도 우리 둘을 남겨 두고 떠났다. 나와 천마는 복도 한 편에 주저앉아 넋을 빼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이 모든 게 꿈만 같다.” “꿈이라면 좋겠지. 후우.......” 천마의 한숨소리. 내 마음도 함께 쓸려 간다.
“그래, 꿈이라면......” “내일의 결투는 이기기 힘들 테고....... 우리는 언제까지 이런 모습으로 살아 있어야 할까? 이제 미련은 없는데.......” “나도 그래. 그렇다고 방법도 없으니...... 탈출은 생각하기도 힘들고. 루시퍼가 금제를 풀어 주지 않는 한 이곳에서 빠져 나가는 건 꿈속에서조차 불가능해.” “결국...... 여기서 탈출할 방법은 하나뿐이군.” “탈출할 방법이 있다는 말이냐?” 나는 혹시 누가 들을 새라 작게 말했다.
“그래 있다. 전에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어라. 그리고 내일이면 모든 걸 알게 된다. 힘을 되찾는 순간 말야.” 나는 천마의 의도를 확인하고자 입을 달싹였다.
“더 이상 묻지 마라. 그 길마저 막힐 수도 있다.” 그는 감시의 눈길을 염려하는 것 같았다. 주변에 감시하고 있는 마신이 없으리란 법은 없다. 현재의 우리 두 사람의 능력으로는 감시하고 있다 해도 알아챌 수는 없었다.
“동굴 앞.” 천마는 저 앞에서 마신들이 다가오자 그 말만을 짧게 내뱉었다. 동굴 앞이라니. 무슨 말일까? 난 천마가 한 그 말을 몇 번이고 되풀이 해 읊조렸다. 동굴 앞이라고? 아, 천마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난 그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히쭉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렇지. 그 방법밖에는 없지. 뭐, 좋다. 그렇게 하도록 하자. 제지당하지 않으려면 기회를 잘 살려야겠는데.” “그래, 그런데 아직은 이대로 탈출할 수 없어.” “그렇지. 그놈 발리에게 작은 상처나마 입혀 분을 풀지 않고서는 나도 못 떠난다.” 우리 둘은 서로만이 아는 내용의 대화를 계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