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그들은 내 아버지의 사자다 (100/111)

 5.그들은 내 아버지의 사자다

 우리는 복도를 미친놈처럼 뛰어다니기도 하고 큰소리로 웃기도 했다. 속에 있는 울분을 마음껏 토해내려고 고함을 지르고, 노려보는 마신들을 향해 욕을 퍼붓기도 했다. 그렇지만 루시퍼의 명이 전체에 하달되었는지 날뛰는 우리를 아무도 제지하거나 윽박지르지 않았다.

 우리는 어슬렁거리며 한 곳으로 들어갔다. 하급마신들인 나찰들 몇이 둘러앉아 있다가 멀뚱한 시선으로 우리를 주시한다. 

 “병신들, 루시퍼의 뒤나 닦는 한심한 놈들. 그런 주제에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놈들의 엄한 눈길이 우리 둘을 빠르게 훑는다. 그렇지만 지금의 우리에게 무서울 건 아무것도 없다. 이 자리에서 당장 쳐 죽여 준다 해도 고마워 할 판인데 못할 말이 어디 있으리. 우리는 작정하고 놈들을 약 올리기 시작했다.

 “네 놈들 백날 정성 들여 봐야 결국은 도로아미타불이다. 결국 헛짓거리인 셈이지. 알겠느냐, 이 멍청하고 단순한 놈들아.” 내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지 한동안 자기들끼리 마주보며 멀뚱거렸다.

 “둔하긴...... 그러니 맨 날 그 모양 그 꼴이지. 하급마신 나찰들인 네 주제들이 불쌍하구나.”  그 말대로였다. 이런 놈들에게 화풀이 해봐야 별로 시원한 감도 느낄 수 없었다. 흥미를 잃은 우리들은 그곳을 나와 아수라들의 처소로 발길을 돌렸다. 금방 찾을 수 있었다. 그들 역시나 우리가 마음대로 지껄이는 소리에 열 받아 어쩔 줄 몰라 했지만 그게 전부였다.

 가만 듣고 있다 한 놈이 버럭 소리를 지른다. 

 “네 놈들의 처지를 그새 잊었느냐! 노예 주제에 어디서 감히 그딴 소리들을 하는 거냐?” “허, 이놈 보게. 루시퍼의 명을 길에 굴러다니는 개똥 취급하는 놈일세. 그래, 너 아주 용감하구나.” 내가 한 말의 의미를 깨달았는지 얼굴만 찌푸릴 뿐 달리 대꾸를 하지는 않았다.

 “역시 네 한계는 거기까지야. 내가 힘만 있다면 널 한 손으로 떡 칠 텐데. 루시퍼에게 감사해라.” “으으, 이놈들이...... 갑자기 실성을 했나?” “하긴 전쟁터로 내몰려 초라한 모습으로 고꾸라질 놈이니 내가 오히려 불쌍하게 생각해 줘야겠지.” “야, 야, 이놈아.” 얼굴에 잔뜩 인상을 쓰는 놈의 뒤통수를 탁탁 치자 더 이상은 참지 못하겠던지 벌떡 일어섰다.

 “자, 쳐봐, 쳐보라고.” 천마가 얼굴을 디밀며 약을 올린다. 호, 이것 봐라. 의외로 재미있는데.

 “병신, 치지도 못하는 놈이 무게만 잡고, 대마신 놈들은 어떨까나?” 천마는 내 말에 반색하며 한껏 기대된다는 표정이었다.

 “그것 재미있겠는데, 이런 배포 없는 놈들 상대하지 말고 그쪽으로 가보자. 탐색전도 겸할 겸 말이다.” 우리 둘은 서로 마주보고 낄낄거리며 그곳을 나왔다. 뒤에선 애꿏은 기물들이 부서지는 소리들이 뒤늦게 들렸다.

 “그래서?” 역시 이놈은 만만찮다. 아직까지 그가 말을 한 건 별로 들어 보지 못한 것 같았다. 천마까지도 그만은 어려워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아사셀.

 대마신들 가운데서도 은연중에 수장 노릇을 하는 인물이었다. 이마에 선명한 뱀의 형상이 새겨져 있는데, 그 모양은 저번에 보았던 어떤 사내의 것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두 마리의 뱀이 입을 맞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차하여 꼬리를 물고 있다. 어찌 보면 찌그러져 겹쳐진 두 개 원의 형상을 하고 있는 셈이었다.

 ‘그’ 의 설명으로는 마계의 고유한 마력이 상승에 달할수록 입을 맞대고 있던 뱀의 형상이 변형을 한다고 했다. 저 자처럼 저렇게 꼬리를 입으로 물고 있을 정도면 더 이상 변형될 수 없을 정도로 극한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그 다음엔 루시퍼처럼 아예 그 형상이 사라지고 새로운 문양이 나타난다.

 그의 붉은 눈빛은 착 가라앉아 있었는데 내 영혼까지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루시퍼와 싸운다 해도 그다지 뒤질 것 없다고까지 알려져 있는 인물이 바로 그였다.

 “그냥 그렇다는 거지.” “파천이라고 했지? 이렇게라도 해서 네 분이 풀린다면...... 그것도 괜찮겠지.” 이놈은 그다지 재미가 없다. 제일 먼저 이놈을 찾는 게 아닌데,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너와 루시퍼가 싸운다면 누가 이길까? 혹시 네가 더 강한 것 아닌가?” 내 말에 그는 고개를 가만 가로 저었다.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와 루시퍼가 싸울 일은 없다. 왜냐면 난 그의 수하이니.” “그래도 알고 싶지 않은가?” 내가 이런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천마는 주눅이 들었는지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솔직히 알고 싶다. 그러나...... 포기했다.” 의외의 대답이었다. 역시 이 자는 루시퍼와 싸워 보고 싶었던 거다. 정말 자신을 밑에 둘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이 있는지 확인해 보고 싶었던 거다.

 단지 메타트론의 후광 때문에 인정하고 있기엔 그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겨우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닌 듯 했다.

 “너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루시퍼는 더 강하다. 물로 나보다 더 강하다. 이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한 번쯤 싸워 보고 싶다. 싸움을 해본 지가 하도 오래라서....... 예전이 그립다. 권태로움. 영원한 시간은 날 지치게 만든다.” “그렇겠지. 당신은 다른 차원계에조차 소문이 나 있을 정도로 싸움광이었으니. 좀이 쑤시고 답답하겠지.” “바알세불, 난 네가 나를 치고 올라올 거라 믿었었지. 만약 지금까지 네가 마계를 떠나지 않고 남아 있었다면 아마도 그렇게 됐을 확률이 더 컸겠지. 참 안타까운 일이야.” “그렇지 않소. 난 그보다 더 많은 걸 얻었으니 말이오.” “얻어? 네가?” “그렇소. 마계엔 희망이 없소. 산 자도 없소. 모두 죽은 것이나 다름없소. 살아가는 이유가 없으니 시간이 흐르는 게 권태로운 거요.” “무한계는 재미있나?” “내겐 분명한 목적들이 있어 흥미로웠소. 그 모든 게 말이오. 자유. 그것 한가지만으로도 마계 전체의 가치보다 우월하다 느꼈소.” “그런가? 자유라.......뭐,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마계는 때가 차면 결국 신의 분노를 피할 수 없고, 영원토록 고통 중에, 형벌 가운데 자유를 박탈당한 채 지내야 할 거요.” “그래서 우리가 힘을 모으지 않는가. 이 전쟁은 우리들의 승리로 맺음 될 거다.” “스스로를 속이려니 무척 힘들겠구려. 당신도 잘 알고 있지 않소? 천궁의 벽은 높소. 당신들 타락한 천사들만 인정한다면 그리고 신 앞에 고개를 숙이고 형벌을 자청하다면 마계는 구원받을 수 있소. 당신도, 나도 알고 있는 사실이오.” “그렇지. 그러나 이제는 너무 늦었다. 이젠 루시퍼도 메타트론님도 중단할 수가 없다.” “그런 또 무슨 소리요?” 난 둘의 얘기가 워낙에 심각했기 때문에 그 사시에 끼여들 수가 없었다.

 “그건 몰라도 된다. 어쨌든 예전이라면 이런 우리의 시도가 무모하다고 나 도한 인정했겠지. 그렇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쩌면...... 우리가 신이 될지도 모른다.” “후후후...... 재미있구려.” “그래, 지금은 마음껏 우릴 비웃어도 좋다. 그렇지만 나중에 가서 지금의 내 얘기를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저 자신감은 괜한 오기는 아닌 것 같다. 저번에 루시퍼도 그러더니만. 대체 뭐란 말인가? 뭔가가 있기는 있다. 그게 뭘까? 이들이 말하는 변수란 게 대체.......

 “그만 가라. 수련 시간이 되었다.” “아직도 변함없구려.” “권태를 이기는 내 유일한 방법이자 낙이다.” “가자, 파천.” “이대로?” “그래, 여기서 더 까불다간 내일 결투에 성한 몸으로 나서지도 못한다.” 천마의 그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리고 대마신들 중 아사셀과 메피스토만은 그다지 루시퍼를 겁내지도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 그의 명이라고 해서 다른 나찰들이나 아수라들처럼 절대적으로 지킬지도 의문스러웠다.

 우리가 그 다음에 찾은 곳은 메피스토의 처소였다. 메피스토는 무한계의 사악한 정령들인 라곤을 한때나마 다스린 적이 있었기에 특별히 ‘라곤의 왕’ 이라 불리는 자였다.

 이 자 역시 강하기로는 아사셀에 그다지 뒤질 것이 없다 자부하는 인물. 특히 영체환승이나 사악한 술법에는 따를 자가 없다고 알려져 있었다.

 그 역시 아사셀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격동시켜도 그리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귀찮다는 듯이 우리 입을 다물게 만들었기 때문에 꿀 먹은 벙어리마냥 그 자리에서 멍하니 있다가 나와야만했다.

 “역시 이런 일엔 발리가 최고다. 그놈은 단순해서 데리고 놀 만하지.” 그 다음에 찾은 곳은 브리트라의 처소였는데 그는 어찌나 우리를 환대해 주는지 원래 우리가 지니고 있던 목적마저 잊게 만들었다.

 “하하하, 그래서 이렇게 돌아다니시는 군요. 그것 재미있겠는데요? 그래, 반응들이 어땠습니까?” 우리보다 한 술 더 뜨는 이 자 앞에서 뭐라 할 말이 없었다.

 “뭐, 그렇지요.” 난 또 그렇게 존대를 하고 말았다. 아자에게서는 묘한 매력이 풍긴다. 상대를 한없이 편하게 해주는 힘.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 무서운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천마에게 깍듯하게 바알세불 님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제가 아수라였을 때 바알세불 님은 제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죠. 마계 사상 최초로 인간으로서 대마신이 되신 분이니까요.” “흐음, 그랬겠군요.” “또 그 성품이 지극히 담백해서 따르는 마신들도 많았지요. 그러다가도 한 번 떨치고 일어서면 다른 차원계가 벌벌 떨 정도였습니다. 그때는 정말 좋았었는데 말이죠.” “흐음, 재밌었겠군요.” 나는 그의 말에 장단을 맞춰 주고 있는 꼴이 우습기도 했다.

 “그 가시....... 불편하시죠?” “고통스럽지만 면역이 되어서 그냥.......” “제가 제거해 드리고 싶지만....... 루시퍼 님이 펼치신 것이라...... 죄송합니다.” 저렇게까지 말하니 천마에 이어 나도 말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브리트라.” 천마가 신중하게 불렀다.

 “왜 그러십니까. 바알세불 님?” “혹시 마계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하는 이유를 알고 있나?” “저도 잘은 모릅니다. 자세하게 아는 건 아사셀 님까지일 겁니다. 하여간 무슨 변수가 생겼다는 것 정도만 귀동냥해서 알고 있습니다.” “마신들이 전에 없이 자신감에 넘치는데.......혹시 그걸 노리고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닐까?” “그건 아닐 겁니다. 어차피 운명을 같이하는데 굳이 속일 이유는 없지요. 게다가 최근래에는 메타트론 님 곁을 지킨다는 어둠의 천사들의 왕래가 빈번하지요. 뭔가 진행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았습니다.” 대마신들에게 조차 감추고 진행시키는 게 대체 뭘까? 난 저번에 환상지대에서 메타트론에게서 들었던 걸 다시 떠올려 보았다.

 “혹시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에 대해서 압니까?” “네?” 브리트라만 아니라 천마도 흠칫 놀란다. 나는 둘의 똑같은 반응에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건 신들은 표현하는 말이다. 그런데 그건 왜?” “신들이라니?” “원래 스스로 존재하는 이들은 여럿이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 중에 신으로서의 완전성을 획득하신 분은 단 한 분뿐이셨죠.” “흐음, 그럼 나머지 존재들은?” “그건 알 수 없다. 인간이 창조되기도 전의 일이라....... 그때는 다른 차원계가 있지도 않았다. 천사들은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 그런데 갑자기 그건 왜 묻지?” “아니...... 그냥.” 브리트라는 날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신중한 어조로 물었다.

 “혹시 환상지대에서 들은 건가요?” “네.” “아마도 비밀차원에 대한 얘기들인 듯하군요.” “비밀차원이라면.......” “바알세불님도 아실 겁니다.” “그건 신빙성이 없는 그냥 하는 소리들에 불과하다. 그런 게 있다고는 믿을 수가 없지. 아무도 보지 않았으니 믿기엔 좀.......” “그런가요?” “비밀의 차원이라.......” 분명 메타트론도 그런 의미의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여기엔 뭔가 상관관계가 있고, 이들 마계가 자신감을 갖게 한 동기 부여도 이와는 무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지금의 마계는 뭔가 붕 떠 있는 느낌이야. 알맹이는 허전한테 껍질만 요란하게 번쩍거리는 느낌도 들고. 인간계에 대한 이런 침략도 예전이라면 생각해 볼 수도 없는 부분이고.

 게다가 메타트론이 그걸 허락했다는 점도 이해가 가지 않아. 그는 루시퍼와는 달리 그리 폭력적인 존재가 아니지. 그는 이상향을 꿈꾸는 몽상가에 가깝지, 이런 혁명적인 강제 진압을 선도할 위인은 아니거든.

 그가 이런 성향을 지녔었다면 진작에 다른 차원계에 혼란이 있었겠지.“ “그건 저도 동의하는 부분입니다. 이번 인간계에 대한 건 메타트론님의 직접 지시라기보다는 루시퍼님의 독단적인 결행이 더 크게 작용한 듯싶습니다. 물론 그에 대해 확증할 만 한 건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만.......” 브리트라와 대화를 하고 있다 보면 도무지 그가 마계의 대마신인지 천상계나 선계의 핵심인물쯤 되는 건지 헷갈릴 때가 많았다. 지금도 그랬다. 저런 말을 버젓이 하고 있는걸 보면 오히려 우리 쪽에 더 가깝게 느껴지지 않는가?

 “이번 인간계에 대한 탄압은 마계 내에서도 그리 크지는 않지만 불만이 잠재되어 있습니다. 인간계는 어쨌든 모든 영자들에겐 고향과도 같은 곳이고, 그리도 마계 입장에서 본다면 권태를 씻어 줄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와도 같은 곳이기 때문이죠.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 불안해하는 자들도 꽤나 됩니다.” 마계에 속한 자들이라고 무조건 강성일변도만 있는 건 아닌 게 확실했다. 그렇지만 그건 일부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대세에 영향을 줄 만큼 크지 않은 힘에 불과할 것이다.

 “이젠 돌이킬 수도 없게 되었지요. 아마도 신의 분노가 때가 미치기 전에 내리지 않을까....... 이런 우려까지 듭니다.” “끝까지 잠잠하고 있지만은 않겠지. 먼저 어긴 건 마계니 항의할 건덕지도 없고 말야.” “후우, 결국 제2의 영계전쟁이 벌어지게 되는 거겠죠. 그 중심에 나도 함께하고 있고 말입니다.” “전쟁이 아니라 반란이라 해야 옳지. 왜, 두렵나?”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겠죠. 다들 태연해 하고는 있지만 두렵고 불안한 건 누구나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 와중에도 무슨 대책이 있을 거라는 희망의 소리들도 높죠.” “마계는...... 이제 건너서는 안 될 강을 건너고야 말았어. 시간을 돌이키지 못하는 한 이건 치명적이야. 다른 차원계를 상대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천궁은 글쎄......” 부정적인 천마의 여운에 브리트라가 지금까지와는 달리 반발의 의미를 지닌 쐐기를 박았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길 겁니다. 지면 모든 걸 잃게 되니...... 운명을 걸고 한번 해봐야죠. 그리고 절망적이지는 않을 거란 확신도 들고요.” 어쨌든 그 역시 마계의 주역 중 하나의 축임을 다시 상기시키는 말이었다.

 “두 분께도 행운이 있기를 바랍니다.” “고맙네.” “그럼 이만 가보겠소.” 브리트라와는 간단한 수인사까지 나누고 헤어졌다.

 이후 우리는 네 곳을 더 돌아다녔다. 다사와 타루나, 찬드라. 그리고 발리까지.

 역시 발리가 제일 흥미로운 반응을 나타냈는데 그는 내일을 기대하라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그것만으로는 화가 삭지 않았는지 불길을 일으켜 우리를 위협하거나 우리 몸에 갖가지 제약을 가하며 입을 막아 보려 했다. 그럴수록 우리 입은 더욱 쉴 새 없이 퍼덕거렸다.

 “이런다고 내가 널 겁먹을 줄 아느냐! 이번에는 널 어쩌지 못하겠지만 내 영혼이 살아 숨쉬는 한은 오늘의 원한을 잊지 않겠다.” 내가 바락바락 질러대는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지금까지와는 태도를 달리해 은근한 어조로 말하기 시작했다.

 “네 아들놈이 마황님의 양자가 되었다던데, 아비 구실도 못하는 놈의 소리를 내가 귀담아 들을 필요는 없지. 조만간 제 여자까지 빼앗기고 피를 토하며 분노에 떨 놈들이 입만 살아가지고.

 오늘이 지나면 너희에게 더 이상 이런 소리를 나불거릴 기회는 사라질 거다. 차라리 빨리 다른 차원에 대한 정벌이 시작되길 빌어라. 그 전에는 내 너희들의 본분인 노예로서 충실할 수 있도록 온갖 고통과 모욕을 선사해 주겠다. 흐흐흐.”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맞는 소리군. 아비 노릇도 못하는 놈이라.......

 “발리, 너는 예전에 나를 똑바로 마주보지도 못하지 않았더냐? 이제는 기세가 등등하다만....... 내가 만약 다시 마계로 복귀하면...... 여유 부릴 때가 아닌 것 같은데. 홧김에 내가 복귀할 마음이라도 먹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느냐!” 오, 이건 제대로 먹히는 것 같은데. 놈의 얼굴이 꽤나 복잡한 빛을 드러내지 않는가?

 “흐음, 정말인가? 복귀할 마음이 있나?” 그는 불안했던지 벌써부터 천마의 눈치를 슬쩍슬쩍 살피는 것이었다. 역시 이놈은 다른 대마신들과는 뭔가 다르다. 달라도 한참 다르다. 이놈에게는 무게감이라는 게 없었다. 자기보다 약자에게는 잔인함을 뽐내며 군림하지만 조금만 강한 기색이 보이면 바로 꼬랑지를 내린다.

 게다가 평소 때 보면 루시퍼에 대한 충정이 지나쳐 아첨까지 일삼으니 다른 대마신들과도 그다지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는 못했다. 모두에게 따돌림 당하지만 정작 자신만 모르고 있는 꼴이었다. 제 잘난 맛에 산다지만 이놈은 그 도가 좀 지나쳤다.

 “복귀시켜서 네 놈을 골탕 먹일 수 있다면...... 못할 것도 없지.” 나 또한 정말이지 그런 생각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저놈이 당하는 꼴을 볼 수 있다면 천마에게는 미안하지만 잠시 그렇게 해줬으면 하는 바람까지 들 정도였다.

 “흐음, 뭐 그거야....... 바알세불, 이러지 말자고. 다 같이 마계를 위해 일해야 할 우리가 아닌가? 같이 뜻을 모아 힘을 합해도 모자랄 판에 이런 분쟁을 좋지가 않아. 루시퍼 님이 아시면 곤란해진다네.” 이놈은 육식마수인 몰스보다 지능이 더 떨어지는 놈이 분명했다.

 “네가 날 위해 번거로운 일을 해준다면 생각해 보지.” “번거로운 일?” “그래, 두 다리와 두 팔로 엎드리고 ‘왈왈’ 이라고 해준다면 말야.” “왈왈? 그건 또 뭐지?” “흐음, 그건 이를테면 ‘나는 당당한 전사다, 그리고 당신을 전사로서 예우한다.’ 라는 인간계의 표현 중 하나다. 어떤가? 가끔 그렇게 해준다면 이를테면 내일 결투하기 전에라도 한 번 그렇게 해준다면 내 다시 생각해 보지.” “정말이지?” “그럼, 너와 난 그리 사이가 나쁘지 않았잖아. 너와 사이가 안 좋은 다사를 내가 지그시 눌러 주지.” “호오, 그 말 꼭 지켜야 하네.” “그럼, 내가 이래 보아도 신의 하나로 지금까지 버텨 온 몸 아닌가?” “그렇지, 자네의 신의는 내가 보장하지. 좋아, 다른 것도 아니고 그런 뜻이라면 멋있을 것도 같군, 다리와 팔로 엎드리고 왈왈. 알았어.” 허, 말이 안 나오는군. 진작 이렇게 슬슬 달래 가며 놀릴 걸 그랬군. 이 놈은 내 생각보다 훨씬 덜 떨어지는 놈이었어.

 이번엔 내가 그에게 말했다.

 “그리고 이왕이면 너와 나 사이에 실력 차가 많이 나니까 내 공격들을 다 받아 주고 난 연후에 멋들어지게 공격하다면 더 위풍당당할 것 같은데....... 그게 강자의 도리고 말야.” “내가 네 말을 들을 것 같으냐. 곧바로.” “허어, 이것 왜 이러나. 파천과 나는 친구라고. 친구의 부탁인데 그까짓 것쯤 못 들어 주나?” “흐음. 좋아, 까짓 그러지 뭐.” “역시 자네는 말해 보니 통하는군.” “그런데 언제 대마신으로 복귀할 생각인가?” “그야 빨리 해야겠지.결투가 끝나는 대로 추진해봐야겠지.” 보고 있던 내가 정말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천마는 진지하게 말했다. 발리는 당연히 의심을 하지 않았는지 고개를 크게 끄떡이며, 짐짓 호탕한 웃을 흘렸다.

 발리와의 이런 웃지 못할 촌극은 예기치 못한 것이었다. 어쩌다 보니 이렇게까지 진행된 것인데 그의 처소를 나오며 우린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할 지경이었다. 저런 바보, 멍청이, 석두를 연발하며, 발리 같은 놈들만 마계에 가득하다면 요리하기 쉬울 것이란 말을 덧붙였다.

 이런 발리와는 달리 다사나 타루나, 찬드라 등은 참 대하기 껄끄러운 존재들이었다. 먼저 그들의 처소에 들어서기부터 힘겨울 정도로 경계가 철통같았고, 겨우 어떻게 통과하다 해도 혼쭐이 나서 되돌아 나와야만 했다.

 우리를 만나는 것 자체를 거부한 다사나, 마력을 써서 비참하게 만들었던 타루나, 다짜고짜 구타를 해온 찬드라까지 성질이 지랄 맞은 놈들이었다. 대마신 일곱을 모두 만나 본 솔직한 소감은 세상엔 별의 별 놈들이 다 있다는 것과 마계 역시나 그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루시퍼의 처소로 다시 돌아와 보니 우리 먼저 방문한 자가 있었다. 천마는 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 자는 우리를 손으로 가리키며 루시퍼에게 물었다.

 “저 자들입니까?” “맞아.” “역시 예사롭지 않군요.” 우리의 무엇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 걸까? 상대는 마신들의 복장도 아니었고 대마신들 중의 하나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란 말인가?

 “바알세불은 잘 알지?” “그의 본 모습은 알고 있습니다만....... 저 모습은 생소하군요.” “그렇겠지. 자, 너희들 이리로 와 봐라.” 집에 손님이 찾아와서 아이들을 내보이며 소개하는 듯한 루시퍼의 다정스런 어조에 나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심한 거부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우리들은 어쩔 수 없이 체념하며 그 앞에 얌전한 아이가 되어 꿇어앉아야만했다. 은연중 그가 힘을 실어 왔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 소개를 하자면.......” “나는 이름을 버린 자다, 이리 와보라.” 그가 루시퍼의 말을 중간에서 가로챈 것은 좀 의외의 장면이었다.

 아사셀도 저런 짓은 하지 않는다. 이것만 보아도 저 자는 마계에 속한 자는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루시퍼가 입을 열어 그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했다.

 “내 아버지의 사자다.” 그럼, 어둠의 천사들이라는.......

 어둠의 천사.

 이들은 엄밀히 말해 마계에 속한 자들은 아니었다. 첫 반란을 주도했던 옛용과 메타트론을 지지했던 천사들로, 마계의 마황인 루시퍼가 아닌 메타트론에게만 속해 있는 타락한 천사들이었다.

 그들은 모두 한 가지 모습으로만 나타난다고 하더니, 내가 보니 역시 그랬다. 눈만 빼꼼 드러낸 채 전신에 검은 갑옷을 걸쳐있다. 가슴 중간에 날개 두 개가 교차해 새겨져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으며, 갑옷위에 망토를 걸친 것 역시 이채로웠다.

 근래의 마계에 두각을 드러낸 두 인물 중 하나이기도 했다. 하나는 브리트라였으며, 나머지 하나가 메타트론의 사자로서, 마계가 인간계를 침범하게끔 조장한 모든 계획의 입안자. 지금의 모든 사태를 뒤에서 배후 조종한 이번 사태의 원흉인 셈이었다.

 눈빛은 선한 인간의 눈을 보듯 평범한 가운데 따뜻하게까지 느껴졌다. 동공에 세 개의 점이 새겨져 있었는데 흑색과 적색과 황색이었다.

 “현재 인간계의 상황에 대한 소식이 전차원계에 널리 퍼졌습니다. 이제 선맥을 정리하시고 인간들을 완전하게 구별하여 처리하십시오. 이후 차원정벌을 시작하시면 됩니다.” 그의 어조는 상당히 정중했으나 느낌은 지시를 내리는 듯했다. 그러나 의아한 건 루시퍼의 태도였다. 마치 당연하다는 듯 별 반감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 전에 이 자들을 통해 메타트론 님의 뜻을 좀 더 강하게 담아 세상에 내보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경우에도 이들을 죽이는 일은 삼가 주십시오. 인간인 채로 이들은 시험대에 오르게 될 것이고, 신의 뜻과 주님의 뜻이 둘 중 하나의 운명에서 매듭을 지을 것입니다. 그리고 선맥을 치기 전에 저들 중 파천이란 자를 먼저 놓아주십시오.” “놓아주라고? 그건 안 돼.” “하셔야 합니다. 주님의 뜻입니다. 거절하시진 않으시겠죠?” “아버지가 왜 그런 지시를 내리신단 말인가? 이건 혹시 자네의 독단적인 결정 아닌가? 내가 모르는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아니야?” “그럴 리가 있습니까, 저는 주님의 사자일 뿐. 그런 권한은 애초에 지니지도 못했습니다. 주님의 의지는 이고 마계 전체를 항시 주시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마십시오.” “으음.” “하여간 제가 아뢴 말씀대로 하셔야 합니다. 저 자는 풀어주어도 별 장애가 되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기대하지도 않았던 더 많은 소득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소득이라니?” 날 가지고 저들끼리 마음대로 지껄여대는 걸 들으며 모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어둠의 천사가 하는 말대로라면 난 풀려질 것이다. 이 답답하고 지겨운 곳에서 떠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의외의 결정이었다.

 여길 나갈 수만 있게 된다면 난 곧바로 장삼봉 진인을 찾아 갈 것이다. 그리고 선계에서 시키는 대로 모든 일을 처리할 생각이다. 이제 내 목표는 이들에게 복수하는 것으로 확실하게 굳어 있었고, 이건 변치 않을 맹세가 되었다.

 “굳이 소들이라면 이 자를 통해 선계나 천상계의 움직임을 미리 내다볼 수 있고, 그들의 움직임을 미리 끌어낼 수도 있습니다.

 우리 입장에서는 그들이 먼저 움직여 주는 것이 여러모로 낫습니다. 우리가 치고 나가면 결국은 천궁을 미리 끌어내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지금 단계에서는 아직은 모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를 통해 선계와 천상계를 끌어들여 어떤 식으로든 그들이 먼저 본계를 향해 진군하게 하고, 그런 연후에 우리가 차원계를 동시적으로 장악하게 되면 천궁의 움직임을 잠시간이라도 묶어 둘 수 있습니다.

 게다가 장막 뒤의 그들 역시 무슨 이유인지 이 자에 대한 관심이 지극합니다. 그러니 그렇게 하셔야 합니다.” 나를 풀어 주라는 메타트론의 사자의 말도 얼른 납득이 가지 않았으면, 곧 풀어 줄 상대를 앞에 두고 비밀스런 자신들의 의도를 마음껏 드러내는 것도 이해되지 않았다.

 여러 가지 복선이 안배되어 있는 것 같은데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어쨌든 여길 빠져 나갈 수 있게 된다면 나로선 환영할 일이다. 난 루시퍼가 과연 승낙할지에 대해 관심이 집중되었다.

 “흐음, 저놈은 영원토록 곁에 두고 노예로 부릴 참이었는데....... 아버지의 뜻이 그렇다면......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바알세불은 아직 쓸모가 많으니 잡아 두십시오. 언젠가 크게 쓰일 테가 있을 겁니다. 그리고 천상계 내의 미묘한 갈등 역시 저 자를 통해서만 알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이미 계약을 파기했어. 타협점은 없어진 셈이지.” “아닙니다. 그들 뒤에는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무언가가 있습니다. 단지 처음의 우리 예측대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아무리 분석해 봐도 그들이 단순히 그런 이유만으로 우리에게 먼저 제안을 해왔을 리가 없습니다.

 이건 함정일 수도 있고 우리 행동을 예측한 고단수의 계략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대체 내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시는가?” “그 분은 우주에 널리 운행하시며, 신의 뜻을 살피고 계십니다. 이 곳 마계에도 계시고 다른 여러 곳에 동시에 계시지요. 주님이 마음먹은 일은 장차 그 윤곽이 제대로 드러날 때가 올 것입니다.

 그 전에 마황께서는 주님의 지시를 신속하게, 정확하게 완수하고 지가디시기만 하면 됩니다. 영광은 주에게서 마황께로 내려질 것입니다.” “그래야지. 나 또한 그 날을 손꼽아 기대하고 있네.” “염려 마십시오.” “그나저나 저놈과 대마신 하나와 내일 결투를 벌이게 해놨는데 그도 철회해야 만 하는가?” “흐음, 그야 상관은 없겠지요. 그럼 저도 그때까지 여기 머물다 가지요.” 졸지에 마계에서의 방출이 정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의 말을 정리해 보면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나를 미끼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기도 했고, 다른 차원계의 전체적인 움직임을 판단할 요량으로 관찰할 셈인 것도 같았다.

 “귀계는 거의 정리가 되어 가고 있고 점차 우리 뜻에 동조하는 자들의 세가 강해지고 있습니다.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천상계는 워낙에 뿌리가 깊고 탄탄해 흡수하는 데는 무리가 따르지만 적절히 분열시키면 힘들이지 않고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선계와 무한계는 그다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니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어도 무방하리라 봅니다.” “그렇지만은 않아. 선계도 그리 무시할 수준은 아니야. 전면전이라면 모르되 그들이 지닌 자원을 무한계나 다른 차원계에 합병시킨다면 꽤나 번거러워 지는 게야. 그래서 내가 저번에 인간계를 칠 때 동시에 선계를 복속시키자고 한 거고 말일세.

 그리고 무한계 또한 귀찮은 놈들이 득실대지. 지금이야 구심점이 없어서 잠잠하지만 그놈들 모두가 힘을 합하기라도 한다면 여간 성가신 게 아니겠지.” “거기에 대해 여러모로 판단해 본 결과 장기적인 대세에는 그다지 크게 영향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주시하고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에는 천궁의 개입과 그 시기입니다.

 천궁의 개입을 지연시키는 게 최대의 관건이겠지요. 이를 위해서도 동시적인 공세와 단계적인 병합을 적절히 섞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천궁이 어떤 결정을 할지에 대한 어떤 성급한 추측도 불필요합니다.

 만약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지금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 이를테면 우리가 두어야 할 수는 여전히 진행시켜야 한다는 걸 명심하시구요. 그리고 나서 여러 변수까지 포함시켜 점차 수의 확장을 도모해 간다면 우리의 천궁을 극복하게 될 겁니다.” “흐음, 좋아. 이놈을 풀어 놓고 관찰하는 것도, 이 두 놈을 통해 얻을 걸 얻는 것도 다 좋다고 치자고. 그리고 장막 뒤의 그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것도 다 좋아. 그런데 말이야. 영 탐탁지 않은 것이 있어.” “무엇이온지요?” “어둠의 천사들, 바로 자네들의 활동 범위야. 우리 솔직하게 얘기하자고. 너희들은 지금까지도 날 완전하게 인정하고 있지 않아. 아버지의 후사로 결정되고 길러진 나야. 그럼에도 너희들은 날 향한 존경은 고사하고 최소한의권위조차 받아들이지 않아.” “그럴 리가 있습니까?” “난 마계 마황 루시퍼야. 내 아버지 메타트론을 제외하고 날 향해 고개를 빳빳이 세울 자는 아무도 없어, 안 그런가? 마계 내에 그대들의 수족이 얼마인지 내가 알게 뭔가? 

 그렇지만 말야. 오늘처럼 이런 식이면 곤란하다는 게지. 너희들의 오고감을 내가 이후에야 알아야 하고, 마치 적진을 감시하듯 마계의 동대를 감시하고, 여전히 대마신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아수라들에게 두려움을 심어주고.......

 차라리 아버지 메타트론께서 오셔서 그리 하셨다면 난 모든 걸 받아들이겠지만, 너희는 아냐. 난 아버지를 못 뵌 지 오래되었다. 그 분이 어디서 무엇을 하고 계신지 무엇을 도모하고 무엇을 추진중 이신지 정도는 나도 알아야 하는게 아닌가? 그런데.......” “그건 다름이.......” “내 말 끝나지 않았으니 더 들어. 그런데 너희들은 날 제쳐 두고 아버지의 뜻이라며 날 마음대로 부리고 있어. 마계 마황인 날 허수아비로 만들어 가고 있단 말이야. 너희의 아버지에 대한 충정은 이해가 가지만 날 무시하는 건 용서가 안 돼.

 알겠나? 이건 경고라고 생각해라. 지금은 확증이 없어 그만두지만 만약 너희의 실수든, 의도적으로 날 고립시키려는 움직임이든 포착되기만 한다면 난 망설임 없이 너희들을 쓸어 버릴 거야. 아버지께 벌을 받는 한이 있어도 말이지.” “명심하겠습니다. 경고라니 깊이 기억해 두겠습니다. 그러나 이것 한가지만은 저희들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희는 루시퍼 님이 태어나시기도 전에 주, 메타트론 님의 수족이었던 천사들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루시퍼 님은 주님의 아들이란 의미 이외에는 없습니다. 지금까지 그랬듯이; 우리의 주님은 단 한 분. 메타트론 그 분뿐이십니다.

 루시퍼 님도 기억해 두십시오. 우리들을 마계의 권한 아래 두려 하지 마십시오. 어둠의 천사들의 힘 전체를 마계의 전력과 맞먹습니다.

 만약 우리가 작은 이해의 차이로 골이 깊어지고 대립하게 된다면 애초에 모든 계획을 백지화시키고 신 앞에 무릎 꿇는 게 훨씬 현명할 겁니다. 우리 쪽에서 먼저 루시퍼 님을 배반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결단코 없을 테니 그 점은 염려 마십시오.” 가만 듣고 있자니 당당하기 그지없지 않은가? 그 누가 감히 루시퍼 앞에서 저렇게 당차게 말할 수 있겠는가.

 메타트론의 사자라는 어둠의 천사.

 그는 자기 할 말을 조금의 위축됨도 없이 모두 뱉어내고는 루시퍼의 강렬한 눈길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대마신 아사셀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당당했다. 내 입장에서는 우리를 앞에 두고 벌이는 묘한 신경전이었던지라 흥미롭기도 했다.

 이건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닌 듯 했다. 해묵은 감정이란 작은 이해를 마주한 입장의 차이에서 시작되지만 때로 그로 인해 모든 걸 포기하고서라도 해결하고 보자는, 무조건적인 감정 대립으로 이끌게도 하는 것이다.

 내 경험에 비춰 보면 이건 거의 확실한 것이었다. 인간인 내가 보기에 절대자로 보이는 그들에게서 그런 단초를 발견했다는 건 내게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고, 저들의 반대편에 서 있어야 할 내 자리에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무게를 실어 주는 것이기도 했다. 역시 그냥 죽으라는 법은 없는 건가 보다.

 급작스런 메타트론의 사자의 등장으로 인해 내 삶의 최대 위기에 한 가닥 서광이 비치는가 했더니, 흔들림 없는 견고한 벽에도 미세하나 균열이 있을 수 있겠다는 가능성을 발견했지 않은가?

 “더 이상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잠시 이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뜻대로 하게.” “감사합니다, 그럼.” 그는 우리 둘을 가만 쳐다보다 사슬을 손에 잡고 밖을 향해 나갔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사슬을 잡고 끄는 건 마찬가지군.

 그는 자신의 처소에 이르자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이나 정적을 즐겼다. 그리고는 깊은 시선으로 우리 둘을 주시하며 무겁게 입을 열어갔다.

 “바알세불, 너에게 부탁하고 제안했던 천주와 직접 타협을 한 게 바로 나다.” “그런가?” “너는 우리로서도, 마계로서도 그리고 다른 차원계로서도 큰 변수다. 네가 지닌 비밀은 여러 인물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지. 어떤가? 네가 지닌 모든 비밀과 너에게 자유를 주는 조건과 교환할 생각은 없는가?” “없다.” 천마는 오래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즉시 말했다. 단호했다.

 “그럼 네가 최후로 만난 자가 누구인지 말해 줄 수 있는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영원한 비밀이란 없다. 심지어 신의 비밀조차 엿보게 된 우리들이 너에 관한 것쯤 풀어내는 건 그리 어렵지도 않다.” “그럼 알아서 풀어 보든가.” “흐음, 타협할 여지는 없다는 거군.” “그렇지. 역시 똑똑하시군.” “그럼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자. 이건 대답해 줄 수 있으리라 여겨지는데. 너는 정말 마계를 떠난 게 맞는가?”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난 천마를 빠르게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 관자놀이가 꿈틀대며 한동안 말을 못했다. 그러더니 어이없다는 투로 이렇게 말했다.

 “이젠 별별 수를 다 쓰는구나. 그건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날 궁지로 몰아넣는다고 해서 너희들이 얻을 건 없다. 파천의 입을 통해 날 어렵게 하려 했다면 그건 지나치게 앞선 계산이다.” “결국 우리가 직접 알아내길 바라는 거군. 좋아, 시간이 걸리더라도 널 하나하나 차례대로 벗겨주마. 네가 인간계로 간 건 사실은 우리들의 뜻도 천상계의 뜻도 아니었지.

 부정할 텐가. 널 마지막에 만난 자의 뜻이었겠지. 그리고 너는 그자의 뜻대로 움직여 가는 거겠지. 아무도 네 행보를 예상하지 못하지만 난 금방 알아낼 수 있다. 신이었나?” “몰라, 난 지금 네 얘기가 무슨 말인지조차 모른다네.” “부정해 봐도 소용없어. 신이 아니라면 마황이었나? 아니면 천궁의 천사? 이 셋 중에 하나겠지?” “애써 바야 소용없다.” “네 입이 무겁다는 건 나도 잘 안다. 어느 날 마계를 떠난 것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행보가 그 자의 뜻에 따른 거겠지. 그리고 천상계 또 하나의 네 조력자 역시 마찬가지일 거고.

 조금씩 좁혀지는 망 속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궁금하군. 먼저 천상계의 네 조력자부터 가려내 주지. 그러고 나서 네 입을 통해 직접 듣겠다. 그때까지는 이곳 마계에서 고생 좀 하고 있어야겠다.” “솔직히 너희들의 능력은 내 인정하지만 그리 쉽지는 않을 거다. 적어도 너희들보다 몇 단계는 상위에서 노니는 자들도 있기 때문이지. 난 이번 환상지대에 들고 나서야 모든 걸 알게 되었다.

 확신이 더욱 굳어졌지. 난 흔들림 없이 이 일을 진행시켜 나갈 거고, 너희들은 너희들 나름대로 일을 추진해 가겠지. 누가 먼저 목표점에 도착해 있을지 경쟁해 보는 것도 좋을 거야.” 내 머리는 혼란으로 잔뜩 헝클어져 갔다. 천마가 지닌 비밀이 있다는 건 알았지만 그 정도의 비중이 있을 줄이야. 그리고 나한테도 밝히지 않고 감춰야 할 만큼 그 비밀을 손에 쥐어 준 자에 대한 신뢰가 깊다니.

 머리 쓰는 것만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고 싶지 않았던 난, 순간 바보가 된 심정이었다. 두 사람의 팽팽한 대립은 즉시 내게로 옮겨졌다.

 “파천, 넌 네 갈 길로 가라. 그리고 할 일을 해라. 너를 통해 여러 시도가 주어질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똑바로 가기만 하면 된다. 마계에 대한 복수든, 네 의문을 풀기 위함이든 상관없다. 적어도 마계에서만은 당분간 널 막지 않을 거다.

 그렇지만 다른 곳에서 널 치는 것까지 막아 주지는 못한다. 좀 혼란스럽겠지. 누가 적이고 누가 아군인지 말이야. 한 가지 충고를 할까?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되는 시기가 오더라도 안심하지 마라. 네 적은 의외의 곳에 웅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 마계가 모든 국면을 주도해 간다면 넌 오히려 단순하게 목표를 향해 나가도 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한 번쯤 주변을 의심해 보는 것도 좋을 거야. 너를 둘러싼 음모 또한 만만치 않을 테니 말이야.” 이 자는 또다시 자신들과 마계를 구분해서 말하고 있었다. 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마계가 주도해 간다며 단순해지지만 다른 곳이 우위를 점한다면 한 번쯤 주위를 의심해 보라고?이걸 곧이곧대로 받아 들여야 하는가?

 하긴 아직은 이런 의문에 골머리 싸맬 이유가 없다. 여길 나간 것도 아니고 눈앞에 닥친 것도 아니니. 그렇지만 지금 내가 받은 정신적 충격은 꽤나 큰 것이었다.

 “그럼 이만들 나가 보라. 내일 결투에 행운이 있기를 빌겠다.” 천마가 그런 그에게 말했다.

 “너희가 준비를 해왔듯 너희의 움직임을 예상하고 준비해 온 쪽도 있다. 그리고 너희가 생각하듯 그렇게 단순한 건 아닐 거야. 지켜보아라. 국면이 어떻게 숨 가쁘게 달라지는지를. 작은 틈새를 비집고 자리 잡을 변수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지를 말이야.

 내게 그 희망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텨내지도 못했을 거다. 최우에 웃는 자가 승자. 그건 우리가 될 것이다.” 자신감 넘치는 천마의 말에 그 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눈으로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밖으로 나온 뒤 나와 천마는 당연히 그래야만 할 것처럼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갔다.

 어색한 침묵이 흐른다. 서로를 속이고자 함은 아니었지만 상당한 비밀들은 간직하고 있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나 또한 ‘그’에 대한 언급을 천마에게 해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를 나무라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다그쳐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공유하지 않고 홀로 간직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서로가 나눌 진실은 상황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로 흐른다. 진실을 많은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변명은 서로를 더 궁색하게 만들 뿐이다. 서로가 느끼는 감정과 판단이 우리에겐 더 진실이 가까웠으며, 이는 신뢰에 기초하고 있었다. 그거면 족하다.

 “천마, 난 말이다. 요즘 들어 이런 생각이 든다.” “뭐지?” “너와 내가 만난 게 우연이 아니라면....... 누군가의 의도로 인해 맺어진 것이라면 그는 무슨 생각으로 이런 관계를 지어줬을까 하고.” “거기에 대한 네 생각은?” “부족한 부분을 채우려는 의도였겠지. 서로를 의지하가고. 혼자 바라보기엔 너무 막막하기에 의지하며 견디라고.” “그것도 맞는 얘기다.” 이제 나는 떠나고 천마는 남게 되는 것인가?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지?” “그래, 그러니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너무 마음 쓸 것 없다.” “생각해 봤는데 그걸 말하는 거라면.......” “어차피 방법은 그것밖에는 없다. 망설이면 마지막 기회조차 잡지 못한다.” 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천마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나 혼자서는 갈 수 없어. 너도 마찬가지일 거다. 그래, 같이 가는 거다. 같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