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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대마신 발리와의 결전 (101/111)

 6.대마신 발리와의 결전

 결투의 날이 되었다.

 우리는 원형결투장으로 가기 전에 루시퍼를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선물을 받게 되었다. 전신에 촘촘하게 자라나 있던 가시가 모조리 제거되었고, 더불어 멋들어진 옷을 걸치게 되었다.

 너무 화려해 오히려 우스꽝스러울 지경이었다. 앞뒤로 금박이 대어져 있고 손목과 발목쯤에 색색깔의 구슬들이 매달려 있다.

 이건 해도 너무 하는군. 광대로 만들 참인가?

 루시퍼의 뒤를 따라 원형결투장에 도착해 보니 이미 후끈 열기가 달아 있었다.

 루시퍼가 자리에 앉으며 앞을 가리켰다.

 “밑으로 내려가라, 파천. 네 실력을 마음껏 뽐내 보라.” 루시퍼 옆에는 어제 보았던 어둠의 천사와 적루아, 설란, 환아와 화아, 천아 그리고 발리를 제외한 나머지 대마신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을 차례대로 죽 둘러보다 설란과 아이들에게서 붙박여 떠날 줄 몰랐다.

 “후우.......” 길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루시퍼에게 말했다.

 “내 힘을 돌려 줘야지?” “그래야지.” 천마는 루시퍼 앞에 앉아 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한 가지 청이 있다.”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천마에게로 향했다.

 “뭔가?” “파천이 결투를 벌이기 전에 내게도 기회를 다오.” “그 말은?” “내가 먼저 싸우겠단 말이다.” “누구와 싸우겠다는 거지?” “내가 지목하겠다.” 천마의 갑작스런 제안이었다. 루시퍼는 곰곰 생각하는 것 같더니 흔쾌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좋다, 네게도 기회를 줘야 공평하겠지. 선택해라, 싸울 상대를.” “고맙다. 난 다사와 싸우겠다.” “다사와?” 천마가 지목한 건 역시나 대마신이었다. 예전의 그였다면 아사셀을 제외하고는 그에게 곤란을 줄 만한 상대가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아니다.

 한쪽에 앉아 있던 다사는 천마의 지목에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서며 루시퍼에게 공손하게 말했다.

 “바알세불을 죽여도 됩니까?” “안 돼! 살려라. 앞으로도 그는 본계에 억류되어 있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자, 그럼 밑으로 내려가 보실까?” 다사는 시종 여유 있는 태도로 그렇게 말하고는 천마의 어깨를 툭 쳤다.

 순간 천마가 얼굴을 있는 대로 찡그린다. 놈이 무슨 수작인가를 부린 것 같았다. 앞장서 아래로 내려가는 다사의 녹색 머리칼이 바람에 흔들렸다.

 “바알세불, 그대가 지녔던 힘도 돌려 주지.” 루시퍼는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듯 그렇게 말하고는 행운을 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이게 어디 행운으로 넘어설 수 있는 벽이었던가.

 천마는 전생의 모든 기억을 지니고 있다. 그러니 대마신 이었을 당시에 지니고 있던 마신공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문제는 프리즈마를 일으킬 수 있는 영체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대신 상대의 공격 수법들을 훤히 꿰뚫고 있다는 점에서는 대등했다.

 천마는 나와 제 가족들을 한 번씩 바라고보는 희미한 웃음을 보였다. 곁에 스쳐 지나는 천마의 손을 나는 꽉 움켜쥐었다.

 “조심해라.” “그러지.” 우리 둘의 시선이 잠깐 동안 허공에서 얽혔다 떨어졌다. 그가 아래로 난 계단을 따라 내려가고 나자 나는 망연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뒤에서 루시퍼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도 밑으로 내려가 대기해라. 굳이 여기 있을 필요는 없다.”

 두 사람의 대치는 한참 동안이다 이어졌다. 대마신 중 최고를 다투던 바알세불과 강함만으로 따져 대마신들 중에서 가운데 위치를 차지하는 다사의 대결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의 입장은 예전과는 정반대였다. 천마는 어느 모로 보나 약자였고, 다사는 절대적인 우위를 선점하고 있는 강자. 다사가 입을 열었다.

 “마신공을 쓸 수 없으니 안타깝겠군. 인간의 무공 따위가 내게 통하리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대체 무슨 배짱으로 나와 결투하기를 원한 거냐?” “착각하지 마라. 네가 그렇게 대단한가? 물론 네 말대로 난 마신공을 사용할 수 없다. 그렇지만 만만치는 않을 거다.” “그렇다면 오히려 반가운 일이군. 근래 대결다운 대결을 해보지 못해 늘 아쉬웠거든. 자, 강자의 아량을 베풀어 줄 테니 마음껏 공격해 보라.” 다사는 두 팔을 한껏 벌리고 무방비 상태로 전신을 노출시킨다. 나는 결투장 한쪽에 발리와 나란히 서 있었다. 우리의 관계에 대해서 모르는 자가 본다면 아마 친분 관계가 특별하다 여길지도 모를 정도로 가깝게 서 있었다.

 “다사가 여유를 부리는군.” 발리는 다사에 대한 경쟁 의식이 강한 편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얘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다사가 듣고 있을 텐데도 그는 별로 개의치 않고 그에 대한 험담을 입에 담았다. 작게 속삭였지만 그 소리를 다사가 못 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귀는 발리에게 열어 두고 눈은 다사에게 고정했다.

 “자, 그럼 시작해 보실까. 인간의 무공을 경험해 보는 것도 색다를 거다.” 천마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며 다사의 주위를 천천히 돌았다.

 다사는 팔짱까지 끼고 공격하려면 해보라는 식의 태연한 자세였다. 딛고 선 두발이 철탑의 기둥같이 여겨졌고 앞을 향해 있는 두 눈동자가 어둠을 밝히는 횃불처럼 드러났다.

 두 사람의 대결이 시작되려 하자 장내에 있던 엄청난 수의 마신들과 마인들이 함성으로 그들의 투지를 불러일으켰다.

 “마음먹으면 금방 끝나겠군.” 발리의 그런 추측도 아마도 사실이겠지. 이변이 있을 가능성은 전무하다. 천마, 어떻게 할 셈이냐....... 나야 솔직히 발리에게 작은 상처나마 하나 남길 요량이 고작이었지만 천마는 그런 것을 노리고 이런 대결을 자청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대보다 열등한 실력으로 승부를 뒤집어 묘책이라도 있을까? 지켜보아야 알 일이었다.

 천마는 계속 다사의 주변을 맴돌며 상대를 관찰해 갔다. 그러나 상대가 가만 서 있다 해서 허점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비슷한 실력이라면 어떤 식으로든 허점을 유도해 보겠지만 작은 타격조차 주지 못한다면 그런 건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

 “이건 인간의 무공 중 무형검이라고 불리는 거지.” 천마의 손에서 무형검이 생겨나 전면 일장 정도를 쓸어 갔다. 순식간에 다사가 점유한 공간을 양단해 버린다. 그렇지만 다사는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방금 전 무슨 일이 벌어졌던가 싶었다.

 “느려. 저렇게 느려가지고서는.......” 발리는 그 말을 듣고서야 난 어찌된 상황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다사는 양단해 들어오는 무형검을 피해 공격권을 벗어난 연후 제차 그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움직임조차 포착할 수 없는 빠름이라니. 이건 도무지 어찌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다른 건 없나?” “물론 있지.” 천마는 허공으로 도약했다. 5장여를 도약한 뒤 빠르게 아래로 멀어지며 한 손을 떨쳤다. 

 콰아아아 천마의 손에서는 예의 무형검이 다시금 빛을 뿜었다. 

 “이런 건 흥미 없다고 했을 텐데.” 다시는 긴장조차 하지 않고 한 손을 머리 위로 들어 쫙 펼쳤다. 저걸 잡으려는 심산인가? 아마도 그런 것 같았다. 무형검이 공격을 맨손으로 잡아채려 한다는 건 무림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뼈와 살로 된 인간의 육체로는 견딜 수 없고, 웬만한 기막은 종이 찢듯 파괴해 버리지 않던가.

 천마, 무형검으로는 안 된다. 자연검을 사용해야 그나마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 난 고함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지만 천마가 이미 무용한 공격법을 되풀이하는 데는 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란 생각도 들었다. 싸움에는 천부적인 감가을 지니고 있는 천마다. 그라면 남 모르는 비책이라도 세워 두었을지 모른다. 

 치치칙 천마의 무형검이 빛을 뿜는 순간 다사의 손에서 묘한 소음이 동반 되었다. 달군 쇠를 물 속에 집어 넣는 듯한 소리였다. 

 가로막힌 무형검을 회수하며 천마는 다사 앞에 한 자 거리로 서서 한발을 중심으로 세워 두고 다른 한발을 풍차 돌리듯 휘저었다.

 수십 개의 발그림자가 생겨났다. 나는 순간 당황했다. 저런 타격술을 앞세울 줄은 실로 예상 밖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걸로는 학급마신 조차 상대할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고 보면 처마의 지금 공격은 의문 투성이었다. 

 역시 예측대로 천마의 발그림자는 모조리 가로막혀 전진할 수 없었다. 하긴 막히지 않았다 해도 무슨 위력이 있을까마는. 

 이후에도 천마는 이해할 수 없는 공격들을 퍼부었다. 중원의 잡다한 장법과 지법, 퇴법, 은형술 등을 펼치며 다사의 전신을 노리고 마구잡이로 공격해 들어간 것이다. 다사는 너무도 간단히 그의 공격들을 무력화시켜 버린다. 

 대체 무슨 의도로 저런 하류 공격들을 구사하는 거지. 

 시간은 흘러가고 천마의 손과 발과 전신에서는 수많은 중원의 무공들이 가장 완벽하게 구사되며 다사를 괴롭혀 갔다. 그렇지만 정작 당사자인 다사는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는 듯 아주 느긋한 모습이지 않은가?

 점차 천마의 공격이 속도를 배가했다. 그는 다사의 주위를 맴돌며 현란한 초식들을 이어 갔다.

 “이런 하찮은 공격들이 전부라면 이제 그만 하는.......” 퍽 거의 한 손만을 상대해 천마의 공격들을 모조리 쳐내고 있던 다사의 몸이 순간 움찔했다. 나 또한 보고 있으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퍽 퍽퍽퍽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말이 되는 것이란 말인가?

 천마의 공격들이 다사의 전신에 파고들고 있지 않은가. 천마의 발이, 주먹이, 어깨가 다사의 전신에서 통쾌하게 작렬하고 있었다. 나는 그 이유는 생각해 보았다.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장면들을 이해하고자 머리를 짜내야만 했다. 

 대체 어떻게?

 그리고 대마신 다사가 왜 저리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는 건가? 가만 보니 다사가 일부러 허용하고 있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그 또한 당황했는지 대결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뒤로 슬쩍 물러났다. 

 그 순간 천마의 손과 발이 연속 동작으로 다사의 가슴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었다. 그러자 다사는 처음과 여전히 다름없이 빠른 손놀림으로 천마의 공격을 쳐내려 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천마의 손이 화려한 꽃이 만개하듯 뒤집어지며 위를 발은 아래를 향하며 상하 일직선을 기준으로 해서 서로의 영역을 마구 교차하는 묘한 놀림을 전개하자, 순간 다사의 손은 목표를 잃어버리고 공격을 허용하고 만다. 

 퍼퍽 “아...... 이제 보니.......” 나는 탄성을 흘러냈다. 이제야 천마의 공격이 먹혀드는 이유를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단순한 공격에서의 현란한 공격 그리고 최고키로 근접한 곳에서의 신속한 변화, 예기치 못했던 기묘함에 다사는 순간 당황하며 천마의 공격들을 놓치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리 빠른 손놀림을 지녔다고 해도 근접한 상태에서 전혀 얘기치 못했던 의외의 공격을 당하게 되면 잠시 동안 어찌 방비해야 할지를 모르게 된다. 천마의 지금 공격들은 너무도 단순한 흐름이었지만, 모든 초식들은 제각기 독립되어 있어 서로가 서로의 흐름을 끊어 놓으며 새로운 변화를 낳고 있었던 거다.

 그리고 접근했을 때의 천마는 오히려 일정한 속도가 아닌 가감을 통해서도 상대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것 같았다. 이런 그의 시도는 제대로 먹혀들고 있었다. 수십 개의 손과 발이 허공을 장악한 채 다사의 전신 이곳 저곳을 마구 두드리고 있었으니 말이다.

 현재 천마의 작은 타격에도 바위를 쪼갤 만한 위력이 남겨 있었다. 게다가 점차 시간이 흐르며 그이 손끝에서 무형검이 변형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마지막 타격점에 도달하는 순간, 다시 말해 상대의 전신을 가격하는 순간 그의 손끝에서 화려하게 폭발하는 건 무형검이었다.

 저건 보고 있으면서도 조금은 믿기 힘든 장면이기도 했다. 난 스스로에게 반문해 보았다. 저렇게 할 수 있나?

 대답은 '힘들다‘ 였다. 할 수는 있겠지만 가장 적절한 시기를 포착하기는 힘이 들다. 더군다나 움직이고 방비하는 적의 방해가 따르는 상황에서는, 몸에 주먹을 맞추기만도 벅찬데 타격이 이뤄지는 순간 무형검의 출현이라. 

 거두고 풀어내는 모든 시점이 천마의 계산속에서 척척 호흡을 맞춰 가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역시.......” 천마는 역시 싸움에 관한한 천부적인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수많은 전투 경험과 넓고 깊은 무공에 대한 이해가 저 정도로 완벽한 응용에까지 이르게 한 것이다. 

 관람하는 엄청난 수의 마신들과 마인들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장면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표정들이었다. 그건 대마신들과 루시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천마, 그를 다시 한번 인정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이내 난 한 가지 사실에 생각이 머물자 그리 편한 마음으로 관전하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공격은 먹혀들지만 효과가 없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무형검조차 다사에게는 아무런 위력도 발휘하지 못했다. 천마 또한 그걸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만족하고 있으리라. 나 또한 마찬가지다. 발리를 이길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놈의 고매한 자존심에 작은 흠집 하나만 낼 수 있었도 나는 만족한다. 

 천마의 공격에 다사는 아예 두 손을 거두고 가만 당하고만 있었다. 아니 몸으로 견디고 있었다. 그는 오히려 한껏 미소 지으며 마음대로 해보라는 표정이었다.

 퍼퍼퍼퍽 다사는 여전히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에 비해 천마는 빠르게 그의 주위를 맴돈다. 역시 무리란 말인가? 대마신인 다사의 신체를 훼손시킨다는 건 무공의 위력으로는 불가능한 것인가? 그건 아무리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인가.......

 파슛 한 순간 다사의 전신에서 새파란 빛이 확 뿜어졌다. 그러자 천마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다사는 크게 웃으며 천마를 치켜세웠다.

 “역시 바알세불! 그렇지만 그 정도 힘으로는 날 어쩔 수 없다는 것쯤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이제 그만 접을 때가 된 것 같아.” 나는 다사를 주의 깊게 살폈다. 그의 변화를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 침착하게 주시해 갔다. 이제 곧 놈이 공격할 것이다. 그건 폭풍이 몰아치듯 하겠지. 천마는 뒤로 3장이나 물러선 채 잠시 호흡을 고르며 대비했다.

 그도 아는 것이다. 이 대결은 이 이상의 의미를 획득 할 수 없음을. 도저히 뛰어 넘을 수 없는 간격이 분명 존재했고, 그건 그 자신, 천마가 가장 잘 알고 있다.

 난 어제 천마에게 발리와의 결투에 대비해 마신공의 체계에 대해 질문했고, 그는 간략하게나마 설명해 주었다. 그 역시나 브리트라가 내게 했던 것처럼 프리즈마에서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난 프리즈마가 기를 이르는 것이 아닌가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분명히 다르다. 성질은 비슷한 면이 많으나 가장 큰 차이점이 하나 있다. 프리즈마는 인간이 지니지 못한다는 점. 영체만이 프리즈마를 지니고 사용할 수 있다. 내 생각으로 기는 물질적인 측면에, 프리즈마는 정신과 영의 측면에 해당하는 힘이라 여겨진다.” 그는 마신공의 모든 형태들이 이 프리즈마를 통한 변용에 불과하다고 했다. 프리즈마의 성질은 어느 하나로 규정할 수 없다. 동일한 원형프리즈마와 영자의 수만큼의 개체프리즈마가 서로 작용해 각기 다른 힘의 형태를 지닌다.

 중요한 것은 공격들의 다양성이 아니라 프리즈마의 성격에 대한 이해라고 천마는 덧붙였다. 실제 차원계에 소문난 강자들일수록 단순한 공격 형태를 선호하며 그 순수함과 정밀함에 주력한다고 했다.

 “화신의 경우만 하더라도, 무한계의 이름난 전사인 분트발이라는 자는 전신을 빛의 결정체로 화신해서 주로 타격에 의존한 공격만을 펼치는데도 거신족들마저 쩔쩔 맬 만큼 특별하게 강하다. 이런 자시만의 독보적인 위치를 확보한 영자들은 전 차원계에서 꽤나 많으며 마계 대마신에 해당할 만큼의 강자도 두 손으로 헤아리기엔 무리가 있다.” 막 천마가 그 말을 했을 때 난 궁금해서 이렇게 물었다.

 “그렇다면 마계를 막는 건 그리 어렵지 않겠는데?” “아니, 마계의 무서운 점은 대마신들이 아니라 마력 그 자체다. 그 힘의 원천인 메타트론에게서 공급되는 마력 말이다. 내가 조금 전 말한 건 평상시의 대마신들을 이른 것이고, 마력을 극대화시켜 화신한 대마신은 또 다른 경지를 보이지.

 그것도 그거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차원계는 마계와 같은 잔일한 체계를 지니고 있지 않고, 그들은 어떤 위기 앞에서도 쉽게 단합하지 못할 것이다. 이게 결정적이지.”

 내가 홀로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다사와 천마의 결투는 여전히 진행 중 이었다.

 천마는 자연검의 위력을 조금씩 사용하고 있었으나 그 역시 통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다사는 지금의 결투를 그저 즐기고 있는 것 같았다. 내가 발리를 지목했을 때 보였던 분노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상대의 무력함을 여유롭게 만끽하고 있는 듯했다.

 천마가 낭패를 당하는 상황은 결코 내게도 남의 일일 수 없었다. 난 옆의 발리를 슬쩍 쳐다보았다. 단순 무식하지만 그 공격은 역시 대마신이란 지위에 걸맞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자. 처음의 흥미로워하던 눈길은 간 데 없고 따분하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이제 그만 끝내지, 뭘 저렇게 끌고 있는지.......” 그러더니 혀를 끌끌 찬다. 나는 그런 발리에게 어제의 약속을 상기시켰다.

 “어제 한 약속은 잊지 않았겠지?” 처음엔 내가 무슨 말을 하느냐는 표정이다가 생각났던지 피식 웃었다.

 “나는 한 입으로 두말하지 않는다.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그 다음엔...... 널 처참하게 뭉개 주겠다. 나 발리를 택한 걸 후회하게 해주겠다.” 얼마 전 내 수하들이 이놈에게 당하던 처참한 장면을 나는 다시 한번 떠올렸다. 복수를 해주고 싶은데 힘이 없는 내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무슨 방법이 있겠지, 라고 무작정 희망을 가지고 있기엔 놈은 넘을 수 없는 너무도 거대한 벽이었다.

 다사와 천마의 대결은 마지막을 향해 치닫고 있는 중이었다. 다사가 제대로 된 공격을 펼치기 시작하려는 것 같았다. 수비 일변도였던 그의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번엔 천마가 다급하게 움직이는 게 보였다. 다사의 주위에 검은 먹구름이 생성되더니 바닥에 낮게 깔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걸 보고 발리가 중얼거린다.

 “묶어 놓고 혼을 내려는 모양이군.” 천마 역시 다사가 지금 펼치는 게 무언지 잘 알고 있는지 급히 뒤로 물러서 보았지만 그가 물러서는 만큼 검은 안개가 빠르게 쫓아갔다. 천마의 몸이 허공으로 솟구치다 멈칫하였다. 어느새 위에서도 내리누르려는 안개의 벽이 가로막으며 천천히 하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둘 사이에 갇혀 버린 셈이었다. 저게 뭔데 저렇게 당황하는 걸까? 천마의 손에서 화염이 솟구쳐 안개의 벽을 때렸다. 그렇지만 전혀 요동치지 않고 서서히 진행해 갔다.

 “화력으로 치려는 생각은 좋았지만 역시 힘이 달리는군."

 발리는 또다시 스스로의 관전평을 늘어 놓으며 현 상황을 천마가 해결할 수 없으리란 여운을 남겼다.

 그 순간 천마는 다사를 향해 신형을 빠르게 움직이며 돌진해 들어갔다. 손을 앞으로 내민 채로 허공에서 맹렬한 회전을 하면서 이동해 가는데 손 앞에서 뿜어져 나간 건 역시나 무형검이었다.

 무형검이 손에서 분리되어 다사의 전신을 향해 쏜살같이 다가갔다. 다사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팔을 휘둘렀다. 그러자 상하로 벌려선 안개의 벽이 하나로 합쳐지며 천마를 가두어 버렸다.

 천마가 꼼짝하지 못하고 그 상태로 허공에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안간힘을 쓰며 탈출하려는 게 눈에 보였다. 그렇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안개는 소용돌이치며 천마의 전신을 더욱 세차게 휘감는다.

 가끔은 알고서도 모른 척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더 많은 때에 마음이 조급할 정도로 안타깝지만 도울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손을 내밀 수도, 같은 부둥켜안고 곤란을 나눌 수도 없는 절박한 때에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어야 한다.

 천마의 위급함을 알고서도 나는 그와 같은 심경으로 지켜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참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참견해도 소용이 없는, 더군다나 결투라는 명목으로 치러지는, 그래서 그 누군가에게는 성스런 의식일 수도 있는 명분상의 무거움 때문에라도 나는 가만 서 있어야만 했다. 난 그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치며 그를 복돋아 주는 게 고작이었다. 내 이런 모습이 발리는 이해할 수 없었던지 짧게 한마디 했다.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행동하는군.” 그래, 니 말대로 나는 예상하고 있었음에도 지금 당황하고 있다. 무림의 전설과 신화의 상징이었던 천마. 내겐 스승이요, 친구인 그가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낯선 장면을 연출하고 있고, 게다가 주인공으로 내 눈을 꽉 채우고 있다.

 영원한 패배라고는 모를 것 같던, 그런 일이 그에게만은 일어나선 안 될 것 같던 그가 저리 무기력하게 몰락했다. 거미줄에 걸린 한 마리 나방처럼 가련한 신세가 된 것이다. 곧 나에게도 닥칠 상황이 지금 내 마음을 조급하게 한 곳으로 몰아 갔다.

 다사는 느릿느릿 천마에게로 걸어가 그의 얼굴을 맨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마지막 선고를 했다.

 “네 공격은 솔직히...... 지겨웠어. 이젠 내 차례이긴 한데...... 죽이지 말라고 하니, 흥미가 없다. 난 인간이 죽어가는 장면을 직접 두 눈으로 지켜보고 싶었거든. 영혼이 빠져 나간 육체를 대하는 그 순간을 느끼고 싶었건만...... 아쉽군.” 아쉽다니? 그 말은 단 한 번도 인간을 죽여 보지 않았다는 말일까? 실제 아직 이곳엔 살아 있는 인간이 헤아릴 수도 없이 많다. 그가 원한다면 그런 일쯤 쉽게 해볼 수 있었을 텐데. 난 의아했다. 그가 인간의 생명을 중시하는 존재라면 납득이라도 하겠건만 그는 대마신이다. 그리고 제 입으로도 인간을 죽이고 싶다 하지 않는가.

 “너는 인간들 중 첫째를 다투는 강자. 예전에 대마신이었고...... 너만큼 내 흥미를 돋울 대상은 흔하지 않은데 말야. 바알세불, 이런 꼴이 되고 나니 후회되는가?” “천만에.” “한 가지 묻자. 왜 나와 결투를 하길 원했는가? 날 이길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을 텐데 말야. 이해할 수 없었어. 더군다나 넌 우리들의 능력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왜지?” “그냥...... 내가 아직은 살아 있다는 걸 느끼고 싶었다. 자, 이제 마음대로 해라.” “겨우 그런 이유가 전부인가? 하여간 인간들의 심리 상태는 이해 할 수가 없구나.” 갑자기 천마가 입은 옷과 머리칼이 확 타오르더니 얼굴부터 시작해서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커억.”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목이, 상체 전부가 서서히 타들어 간다. 조금 있자 허물이 벗겨지고 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만해라. 승부는 결정되었지 않느냐?” 내 고함소리에 슬쩍 쳐다본 다사는 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죽지 않는다, 염려마라. 손을 뗀다면 죽겠지만 손을 놓지 않는 한 그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 제 스스로 죽을 수도 없다. 화끈한 열기에 잠시 고통스러울 따름이지. 그래도 대마신에게 도전한 것 치고는 강도가 좀 약하군.” 발리는 내게 그렇게 말하며 조금 있다 네게 진정한 고통을 선사해주마, 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조금 앞으로 나와서 멀리 결투장 상단 쪽에 앉아 있는 루시퍼를 바라보았다. 자연히 내 눈은 그의 옆쪽에 않아 있는 적루아에게로 향하게 되었다.

 그녀는 두 눈 똑바로 뜨고 쳐다볼 수가 없었던지 고개를 숙이고 있고 그녀 옆에서 설란이 어깨를 두드려 주고 있다. 조금만 있으면 설란이 고개를 돌리고 적루아가 보살펴 주는 반대의 상황이 될지도 모르겠구나. 난 큰 소리로 말했다.

 “승부가 가려졌으니 이제 그만하게 하는 게 어떤가?” 대답이 없었다. 죽이지 않기만 하면 다사가 천마에게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것인가.

 “발리, 이제 우리의 승부를 가려야 하지 않겠어?” 나는 발리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렇지만 그 또한 별로 나서고 싶지 않은 기색이었다. 아무래도 같은 대마신인 다사가 하는 일에 아무런 연관도 없이 나서며 제동을 걸기가 껄끄러운 듯했다.

 천마의 몰골은 더 이상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형편없이 변해 있었다. 발끝까지 새카메졌고 모락모락 피어나는 연기마저 보일 지경이었다. 게다가 상 타는 냄새마저 맡을 수 있을 정도니.......

 “지...... 독한 놈.” 이놈이나 저놈이나 마계놈들은 하나같이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긴 인간도 마찬가지겠지.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아마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체념하고 물러서는데 닫혀 있던 다사의 입이 열렸다.

 “재미없어. 그만둬야겠어.” 그가 손을 놓지 안ㄹ는 한 죽지 않는다고 했던가? 그렇다면 손을 놓으면 천마는 이대로 죽을 수 있다는 말이지 않은가? 나는 더 이상 망설일 필요를 못 느끼고 곧장 다사에게로 돌진했다. 손엔 어느새 오행기가 모아져 있었다. 나는 있는 힘껏 오행신주를 던졌으며 그의 주변에 도달하는 즉시 터지게끔 했다.

 콰앙 폭발했다. 나는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행신주의 폭발에 다사를 상하게 하지는 못하겠지만 천마의 몸은 부서졌을 거란 생각에서였다. 이제는 그를 편하게 쉬게 해주고 싶었다. 죽음이 안식이 되어야 하는 현 상황이 야속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곧장 철회되어야만 했다. 당연히 부서져 한줌 가루로 바닥에 수북 쌓여 있을 거란 예상은 빗나가고, 여전한 모습으로 둘 다 건재했다. 땅거죽이 터져 오르고 흙덩이가 치솟았는데도 다사가 서 있던 반장 주변만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놀라고 있을 틈이 없었다. 기회는 그리 자주 오지 않는다는 걸 난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손은 빠르게 휘저어졌고 다사가 쥐고 있는 천마의 몸을 향해 강기들이 돌풍처엄 휩쓸어 갔다.

 뿐만 아니라 나는 천마의 주변 공간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찬가지였다. 지금은 다사와 한 몸인 듯, 아무런 타격도 받지 않은 듯 멀쩡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포기할 수 없다. 오기가 치솟아 올랐다.

 “그만하라.” 다사가 그 말을 하는 순간 내 몸에 놀랄 만한 변화가 즉각적으로 발생했다. 무언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뜨거운 기운이 내 쪽으로 화악 밀려 온다 느끼는 순간이었다.

 휘익 나는 다사가 있는 쪽으로 가던 것보다 배는 빠르게 퉁겨져 나왔다.

 바닥에 처박혔다. 온몸이 저리고 쑤셔 일어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대체 이건 무슨 공격이란 말인가? 나는 만약에 있을지 모를 다사의 공격에 대비하느라 그의 다른 한 손이 움직일 순간을 놓치지 않고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손은 단 한 번도 움직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건 정말...... 너무 하는군.” 겨우 이 말만을 뱉어내고 난 기진맥진해서 겨우 상체를 일으켰다.

 “후우.” 뼈가 상했는지 가슴에 둔중한 통증이 느껴졌다.

 “너는 내 상대인데 왜 나서서 어려움을 자초하는지 모르겠군.” 발리의 말에 나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그럼 너는 네 동료 대마신이 적에게 당하고 있는데도 모른 척하겠는가?” “왜 그래야 하지?” 어이가 없군. 의리라는 것도 없나, 이놈들에겐?

 나는 할 말을 잃고 그저 멍하니 쳐다보다 픽하고 웃으며 일어섰다. 윽, 역시 뭐가 상하긴 상했나 보군.

 나는 고개를 쳐들고 앞쪽을 보다 또 한 번 놀라운 장면을 목격했다. 다사의 손을 감싸고 푸른 기운이 선명하게 일어나더니 점차 천마의 몸을 타고 흘러든다. 몇 차례나 그 기운은 천마의 몸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시커멓게 타서 곧 재가 되어 부서질 것 같던 천마의 몸에 새살이라도 돋았는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더니 혈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 차례다.” 그걸 보며 발 리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털썩 다사의 손에서 떠난 천마의 전신이 축 쳐진 상태로 바닥에 널브러졌다.

 “후욱, 후욱.” 가쁜 숨을 몰아쉬는 그는 분명 살아 있었다. 난 그걸 반가워해야 할지 안타까워해야 할지를 몰라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런 내 어깨를 발리가 툭 쳤다.

 “기다리는 관객들을 생각해서라도 이제 그만 나가자.” 나는 앞서 나가는 그의 뒤를 기계적으로 따라나섰다.

 천마의 곁을 지나치며 그의 상태를 다시 한 번 살폈다. 그는 확실히 무사했다. 기운을 다 쏟아서 힘이 없을 뿐 생생하게 살아 있었다. 나와 발리는 예정대로 결투장 가운데 마주섰다. 내 머릿속은 이 순간 그를 어떻게 하면 상처 입힐까를 생각하느라 한참 분주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발리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마신들과 마인들을 쭉 둘러보고는 두 손을 바닥에 대로 마치 절이라도 하는 양 엎드렸다. 그리고 엉덩이를 뒤로 쭉 빼고 두 손과 두 발로 몸의 무게를 지탱하고는 ‘왈왈’ 짖어댔다. 순간 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세상에 이제 보니 저놈이 약속을 지키느라.......

 “풋, 푸하하하.” 천마가 지독하게 당한 그 상황에서도 여전히 바닥에 엎드린 채 참지 못하고 웃은 게 시작이었다. 나도 그 모습에 참을 수 없는 폭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웃음은 우리 두 사람에게서만 터져 나왔을 뿐 다른 곳은 조용했다. 지나치게 조용한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였다.

 “왈왈.” 그는 한 번으로는 양에 안 찼던지 연거푸 이렇게 짖었다. 그는 우리가 시킨 동작을 정말 전사가 결투 전에 치르는 의식쯤으로 여긴 것이었다.

 “왈왈.” 난 이 순간 발리에게 맞아 죽어도 별로 억울할 것 같지가 않았다.

 “발리, 대체 뭐하는 건가?” 루시퍼가 큰 소리로 그렇게 묻자 발리는 그제야 몸을 일으키더니 당당한 모습으로 말했다.

 “전사의 의식을 치르고 있었습니다. 약속을 했던지라.” 그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한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 넓은 결투장을 가득 채운 마신들과 마인들 모두가 그걸 모를 리는 없었다. 모두들 말은 하지 못하고 제각각 민망한 걸 본 듯한 표정이었다.

 그 중에도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는 치들도 보였다. 감히 대마신을 향해 조롱의 의미가 담긴 웃음을 토해낼 간담이 있는 자가 없었을 뿐이다.

 “전사의 의식? 발리...... 네가 언제부터 투견이었지?” “네? 투견이라뇨? 그게 뭐죠?” 그때부터 여기저기서 더 이상은 참지 못했던지 작게나마 웃음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사가 그런 발리에게 세심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발리, 투견이란 말이야, 뭐냐면 싸움개를 뜻하는 거지.” “싸움개?” 아직까지도 발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그렇게 반문했다.

 “그래, 넌 조금 전 개 흉내를 내고 있었어. 인간계의 개 말이야.” “개? 그게 뭔데?” 그는 개도 몰랐다. 세상에.

 “모르면 다행이고.”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모두들 한참 동안 술렁대기는 했지만 그러내 놓고 비웃지는 못했다. 그래도 명색이 대마신 아니던가.

 “이봐, 개가 뭐지?” 발리는 의문은 꼭 풀고 봐야 하는 철두철미한 성격의 소유자였더란 말인가? 나를 향해 묻고 있으니 대답은 해줘야 한다. 전사가 아니라는 걸 그가 알았으니 어쩌겠는가?

 “인간들에게 농락당한 대마신이라.......” 루시퍼는 혼잣말로 그렇게 중얼거렸지만 그 소리를 나도 들었고 발리도 들었을 것이다.

 “너...... 나는 속였구나.” 그제야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챈 발리가 날 잡아 먹을 듯 이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속이다니, 천만의 말씀. 루시퍼의 말대로 난 투견이 싸우기 전에 행하는 의식을 가르쳐 주었던 건데. 넌 별 불쾌한 기색도 없이 흔쾌하게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난 또 개를 좋아하는지 알았지.” 아직까지도 발리는 개가 무언지, 인간이 개 흉내를 내는 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가 지금 한 행동이 남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등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럼에도 그는 화난 얼굴로 날 노려보더니 살기 어린 눈빛을 했다.

 “네 놈을 용서하지 않겠다.” 언제는 용서할 참이었던가?

 “그래라. 자 시작하기 전에.......” “이놈.” 발리의 몸이 내게로 확 다가왔다. 순간 난 하던 말을 중지하고 얼른 천마잠형술을 펼쳤다. 그런 연후 허공으로 도약해 그의 몸을 뛰어 넘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놈의 손이 내 발목을 확 움켜쥐고 내동댕이 친다. 얼른 신형을 바로 하려고 운기하는데 이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퍼석 꼴사납게 바닥에 내팽개쳐진 난 잠시 그대로 있어야 할 정도로 극통을 느꼈다. 그렇지만 이대로 있다간 놈의 계속적인 공격에 그대로 노출된다. 난 위기감에 얼른 몸을 일으켜 세웠으며 한쪽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퍽 “커억. 우엑.” 어느새 곁에 다다랐는지 발리의 꽉 쥔 주먹이 복부 속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강한 정권은 처음 맞아보았다. 입에서는 한 사발이 넘을 듯한 내용물이 확 토해졌다. 그 순간 또다시 발리의 손이 흐릿하게나마 날 향하고 있다는 본능적인 자각을 할 수 있었다. 나는 뒤로 성큼 물러서며 그 주먹을 피하려 시도했다. 그렇지만 효과가 없었다.

 퍽 나는 연거푸 복부를 강타당하고 무릎을 꿇어야 했다. 내 머리칼 속으로 손을 박아 넣은 발리는 살소를 지으며 번들거리는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타격만으로 네 놈을 요리해 주마. 죽음 직전까지 가게 해주겠다.” “잠깐.” 또다시 주먹을 치켜든 발 리가 동작을 멈칫했다.

 “개에 대해 알고 싶지 않느냐?” 왜 그런 말이 튀어나왔는지 나도 알 수 없다. 그냥 이대로 당하고만 있는 게 억울해서 더 그의 성미를 건드려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말해봐라.” 의외로 발리는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아래로 내렸으며, 내 머리채를 잡고 있던 손도 풀었다. 내심으로 그게 무척이나 궁금했던가 보다. 나는 사실대로 말해 주기로 결심하고 각오를 새롭게 했다. 맷집이 아무리 좋아도 저놈의 주먹은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후우, 사실은 개란 인간계에서 인간들이랑 가장 친한 동물이다. 때로 개들은 인간들을 지켜 주기 위해 싸움을 하기도 하는데, 그런 개들을 우리는 투견이라고 부르지. 그러니까 용기 있는 사람을 가리켜 우리는 투견이라 부리고, 개 흉내를 내는 사람을 우리는 또한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한다.” 나는 되는 대로 지껄여댔다. 놈은 내 말에 반신반의한 표정이더니 정말인지를 알아 보려고 주변을 휙 둘러본다.

 “사실이다.” 다시 강조하는 내 말에 발리는 조금은 믿는 듯한 표정이었다. 역시 지능과 싸움 실력은 그다지 큰 관련성은 없나 보군.

 “그래, 그게 사실인 것 같기는 한데 그래도...... 너는 내게 맞아야 한다. 내가 용기 있는 전사라는 건 마계에서는 다 아는 사실이고....... 오늘의 결투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 너와 싸우는 데 내가 용기를 내야 하다니....... 그래서 모두들 그런 반응을.......” “멍청한!” 다사가 발리를 또다시 자극했다. 멍청하다는 다사의 말에 발리는 고개를 홱 돌려 그를 마주보았다. 두 사람의 눈에서 불꽃이 타오르는 듯했다.

 “저놈이 한 말은 모두 거짓이다. 그래도 대마신이란 위치에 있는 자가 한낱 인간에게 농락당하기나 하고...... 쯧쯧.” “뭐라고?” “저놈이 시킨 짓은 네가 꼴사납게도 마계의 생이나 쟁의 흉내를 낸 것과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결투장에서 말이야. 너는 지금껏 놈에게 속아 철저하게 농락당한 거다. 그것도 모르고 한심한.......” 결정적인 다사의 힐난에 발리의 얼굴이 싸늘해 졌다. 그도 생이나 쟁은 잘 안다. 마계의 마수들이니 왜 모르겠는가. 결국 조금 덜떨어진 그도 개 흉내를 낸 게 어떤 의미인지를 알게 되고야 만 것이다. 어차피 당할 일이긴 했지만 지금부터는 그 강도가 다를 것이라 생각하니 난 약간의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너.......” 이젠 정말 열 받은 것 같다. 아무래도 오늘 그냥 지나가기엔 틀렸다. 에라이, 이렇게 된 것.

 “아까 보니 짖는 게 그럴 듯 하더군. 너한테는 그게 어울려. 되도 않은 감투만 떼버리면 너에겐 어울리는 것 같아.” 나는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그의 성미를 더 자극했다. 이미 불붙은 숲 속에 화약을 있는 대로 집어 던졌다고나 할까.

 “한 번도 아니고 세 번씩이나....... 본능적으로 너도 그게 너한테 어울린다는 걸 알았던 게지. 한 번 더 해보지 그래? 저 많은 수의 마신들과 마인들이 널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저것도 대마신이라고 거들먹거리고 다녔을 거라고 비웃지는 않았.......” 퍼퍼퍽 손이 어떻게 움직였는지 보지도 못했는데 내 몸은 콘 튀듯 허공으로 떠올랐다. 통증이 밀려 오기도 전에 또다시 그의 타격이 이어졌다. 어느 부분을 얻어맞고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동시다발적인 공격이 내게 퍼부어졌다. 난 그럼에도 신음소리 하나 안 내려고 이를 앙다물고 안간힘을 썼다. 놈은 이미 화가 날 대로 났기 때문에 쉽게 멈추지 않을 것 같았다.

 우두둑 뼈가 부서져 나가는 소리가 내 귀에 선명하게 들려 왔다. 어깨뼈가 탈골되고 마구 부러져 나갔다. 피부를 뚫고 솟아 오른 뼈 조각들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것도 만만찮은 경험이었다. 난 허공중에서 바닥으로 떨어지지도 못하고 극한의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이놈...... 너 따위가.......” 발리의 식식거리는 소리가 이따금씩 들렸을 뿐 주변은 조용했다. 귀 안에서조차 피가 흘러 나오는지 멍멍한 게 잘 들리지도 않게 되었다. 그러던 그가 동작을 멈추었다. 지금 내 꼴은 말이 아닐 것이다. 타격이 멈추었음에도 나는 여전히 허공 중에 떠 있었는데 갑자기 날 떠받치고 있던 기운이 사라지자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윽.” 나는 전신이 산산조각 나는 극통을 느끼며 전신을 바들바들 떨었다. 부러진 뼈 때문인지 몸이 제멋대로 꿈틀댔다. 입에서 게거품을 물지 않은 게 다행이다 싶었다. 설란과 환아와 화아가 지켜보고 있으니 그런 몰골을 보일 수는 없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 정신을 더욱 명료하게 깨운다.

 “이대로 두면 넌 죽겠지. 그러니 널 치료해 주마.”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그의 손이 내 전신을 스친다는 느낌과 함께 화끈한 기운이 몸 곳곳에서 한꺼번에 불일 듯 일어났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온몸이 어린 극통이 순식간에 사그라지며 생기가 충만해 갔다. 이놈이 날 괴롭히려 작정했구나. 아, 그들이, 내 친우들이 이런 고통을 겪었구나. 자신의 무력함을 원망하며 원통과 비분에 젖어 한 서린 호흡을 남기고 마수에게 제 살을 내어 주는 비참함을 겪었겠구나.

 나는 또다시 그에게 구타를 당해야만 했다. 놈은 제 상처받은 자존심을 회복하고자 손대면 망가뜨릴 수 있는 장난감을 지겨움이 다할 때까지 두고두고 괴롭힐 셈이었다. 나는 놈의 구타가 점차 교묘해진다는 걸 느끼며 더해지는 고통을 고스란히 느끼고 있을 뿐이었다. 저항은 무모한 것 이전에 그럴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색다른 경험을 시켜 주려 다른 고통을 주기 시작했다. 내 피부를 모조리 한 겹 벗기더니 뜨거운 기운을 불어 넣어 살갗을 그슬리고 혈맥에 얼음을 채워 놓은 듯한 냉기를 밀어 넣기를 반복하는 것이었다.

 벗겨진 피부 때문에 가만있어도 시리고 따끔거리는데, 그런 나를 질질 끌고 다니기도 했으며 환상을 일으켜 괴롭히기도 했다. 그 환상이라는 것이 대부분 기억 중 가장 떠올리기 싫은 때를 재생시키거나 가장 겪기 싫어하는 상황을 연출하는 것이었다.

 순간 그 환상이 환상이 아닌 실제라는 착각 속에서 괴로워하고 분노하며 치를 떨어대었다. 내 몸은 어김없이 제 기능을 되찾아 힘차게 약동했으나 의식도 마음도 점차로 죽어갔다. 분노조차 괴로운 것이 되고 마니 백 년을 살지도 못한 내가 천 년을 권태로 보낸 듯 무력해지기 시작했다.

 천마가 뭐라고 고함을 치는 것 같은데 잘 들리지는 않았다. 설란이 내 앞에서 교태로운 웃음을 지으며 희롱하다 갑작스럽게 내 곁을 떠나며 날 욕하고 조롱하는가 하면, 내 앞에서 벗이 다른 사내를 안는 환상이 펼쳐지는 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프고 슬프게 했다. 웬일인지 분노는 일어나지 않았다.

 “헉헉.......” 난 지쳐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견딜힘이 없었다. 사실 아무 저항 없이 끌려 온 것 일뿐 견디고 참은 것도 아니었다. 발리의 시선은 땅위를 꼬물거리며 기어 다니는 벌레를 보듯 했다. 땅에 드러누워 가쁜 숨을 헐떡이는 내 배를 그의 발이 지그시 밟아 왔다. 무게가 실릴수록 커 가는 압력에 배는 터질 듯했다.

 “이대로 마수들의 밥이 되게 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아쉽군. 네 놈을 두고두고 괴롭혀 주마. 어차피 너는 노예로 일생을 마쳐야 할 테니 시간은 많을 거야. 감히 내게 도발한 것이 얼마나 무모했던가를 뼈저리게 느끼게 해주겠다.” 놈은 아직 루시퍼가 날 풀어 주기로 한 걸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이 지옥 같은 곳에서 풀려날 수 있을까? 홀로 가족을 두고 빠져 나가 본들 무슨 즐거움이 있을까.

 “그만하라. 되었다.” 루시퍼의 소리였다. 난 고개를 들 힘도 없었고 이제 감겨지기 시작한 눈꺼풀을 들어올릴 여력도 없었다. 그만 쉬고 싶은 생각만이 간절했다.

 내 배에 올려진 발이 떼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잠시의 여운이 머문 뒤에 또다시 루시퍼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귀 속을 파고든다.

 “모두 내 말을 귀 기울여 들어라. 그리고 여길 보라. 이 아이들은 내 자식들이다. 장차 마계를 이끌 영도자들이 될 것이며, 차원정벌의 선봉에 서게 될 것이다. 인간계 정벌의 마지막은 선맥을 끊어 버리는 일. 이제 곹 시작 될 것이다.

 그 동안 모든 마계의 마신들과 마인들은 한시도 게으르지 말고 스스로의 힘을 기르는 데 총력을 기울여라. 잠시의 애씀이 영원한 영광을 보장하리라. 내 너희들에게 공언하여 약속하니 우주를 다스리게 하겠다. 더 이상 너희에게 두려움을 줄 자가 없어지게 하겠다.

 “와아아아.” “마계 영세.” “마황 영세.” “정벌의 위업을 이루소서.” “오만한 자의 무릎을 꿇게 하소서.” 저마다의 소리들은 원형 결투장이 떠나갈 듯 요란했다. 눈을 뜨지 않았으나 생생하게 현장의 모습이 그려졌다. 놈들은 광분하여 외침을 토하는데 한참이 지나도 끊어지지 않았다.

 그러던 소리가 한 순간에 뚝 그쳤다. 아마도 루시퍼가 손이라도 들었겠지.

 “여기 두 여인들은 내 아이들의 어머니들. 영광을 함께 누리도록 하리라.” 조용했다. 나는 그 순간 무슨 힘이 솟아났는지 두 눈을 번쩍 떴다. 설란과 적루아를 어떻게 하겠다고?

 “선맥이 정리되는 날, 이들은 새롭게 거듭날 것이며 본 마황의 내조자가 되어 영세토록 영광을 보리라.” 말도 안 돼. 저놈이 설마 둘을 탐낸단 말이던가?

 “존귀한 이들로 인해 본계는 더욱 빛나게 될 것이다.” “와아아아.” 또다시 함성이 이어진다. 난 일어나야 했다. 지금의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에 나만이라도 반박하고 거부해야만 했다. 하늘이시여, 안되나이다. 아이들을 뺏어 간 것만으로도 모자라 이제는 사랑하는 여인까지 내게서 탈취하시려 하십니까. 이것만은, 이것만은 막아 주소서. 내 혼을 가지시고 내 영을 거두시고 저 여인은 불행하게 하지 마옵소서. 제발.......

 “모두 내 뒤를 이을 장자의 말을 들어라. 그의 말이 곧 내 것이니 모두는 삼가 복종하여라.” 나는 상체를 힘겹게 일으켜 앉았다. 눈을 뜨고 멀리 루시퍼 옆에 막 일어서는 환아를 바라보았다. 환호하는 마신들을 향해 손을 들어 화답하고 있는 청년이 진정 내 아들 환이던가.

 “모두 진정들 하라.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다. 장차 세워질 왕국은 모든 것 위에 빼어나게 아름다울지니 세계는 영광을 손수 지어 선물하겠고 영원한 복종을 맹세하리라. 차원정벌의 선봉을 자처하며 이기고 이길 때까지, 왕국이 완성되는 그 날까지 힘을 아끼지 않고 충성하리라.” “와아아아.” 허...... 환아가...... 어찌 저런 말을 한단 말이야. 너는 내 아들. 내 하나뿐인 아들이거늘. 아비가 이 꼴이 되었는데 네가 어찌 그런 짓을 하려 한단 말이냐. 안 된다. 여기 아버지의 비참한 모습이 네 눈엔 보이지 않더란 말이냐? 아들아, 아들아.

 설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루시퍼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어딜 가는 거지?” “작별 인사라도 하게 해주세요. 부탁합니다.” 작...... 별...... 인...... 사? 설란, 너마저? 아니겠지. 아닐 거야.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으아아아.” 심장아 멎어 다오. 눈아, 멀어 버려라. 귀야, 문을 닫거라. 내 저 소리를, 저 모습들을, 저 얼굴들을 보지 않고 듣지 않게 해다오. 견디기 힘들다.

 “그렇게 하시오. 마지막 작별은 해야 하겠지.” 설란이 내게로 오고 있었다. 마지막을 고하기 위해서. 심장에 비수를 꽂기 위해서 천천히 곁으로 다가오고 있다. 여전히 아름다운 자태로, 사랑을 말했던 그 입술로 작별을 고하고자 내게로 오고 있다. 어느새 천마가 다가왔는지 내 어깨를 감쌌다.

 “파천, 잊지 마라, 오늘의 일을. 그리고 어제 내 말을.” 어제 네 말이라면? 탈출을? 그래, 그러자꾸나, 친구야.

 설란은 내 앞으로 와서 섰다. 그녀의 두 눈은 찰랑거리는 눈물로 가득했다. 내 앞에 쭈그리고 앉아 날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따뜻한 손이 볼을 만졌다. 내 입술과 코와 눈두덩을 더듬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술이 이마에 닿았다. 순간 난 감전이라도 되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 이것은!

 나는 입을 벌려 그녀가 전해 준 느낌을 말하고자 했다. 그렇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그녀를 콱 끌어안았지만 입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그녀는 내 품에서 벗어나며 조용히 미소 짓는다. 그녀의 눈은 분명한 언어를 전해 주었다. 안녕이라고....... 이제 그만 헤어질 시간이라고.

 “아...... 아...... 안 돼.” 내 입에서 작게 흘러 나온 소리가 채 퍼져 나가기도 전에 설란이 제 목에 손을 똑바로 세워 갖다댔다. 설란은 지금 얼마 되지 않는 내 공으로 제 목을 꿰뚫어 죽으려 하는 것이었다. 난 그 순간 설란의 죽음을 확신했고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안 돼! 설란!” 난 조금 더 큰 소리로 그녀의 행동을 제지하려 했다. 그 전에 움직인 손길이 있었다.

 푸욱 난 순간 전신에서 맥이 탁 풀어지며 시선이 흐려지는 걸 느꼈다. 나는 얼른 손을 들어 눈 앞을 가린 물기를 닦아냈다. 설란이, 설란이....... 아, 결국 이렇게....... 이렇게 되고 말았구나.

 천마의 세워진 손이 그녀의 심장을 관통해 있었다. 설란의 자살을 눈치챈 천마가 먼저 살수를 쓴 것이다. 내 손이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아직 따뜻한 손에 난 힘을 주었다.

 “설란...... 설란.” 설란은 아직 날 보고 있었다. 가득 찬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녀의 입술이 마지막 말을 만들고 있었지만 소리가 되어 흘러 나오지는 않는다. 나는 그녀의 손에서 맥이 풀리는 걸 느꼈고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심장은 쿵쾅거리고 머리는 어지러웠다. 천마의 손이 심장에서 빠져 나오자 그녀는 힘없이 쓰러졌다.

 난 그녀를 품에 안았다. 이제 다시는 그 어디도 보내지 않겠다. 널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 설란, 설란, 설란이 죽었다.

 “나도...... 나도 사랑하오.” 나는 설란이 마지막으로 만들어 낸 말을 내 입술로 확인했다. 사랑하오, 설란. 그대만을 영원히 사랑하오. 영원히.

 “파천, 이제 그녀를 그만 보내라.” 그 말에 나는 천마가 어제 했던 말을 떠올렸다. 탈출하는 방법. 나는 루시퍼가 내보내 준다고 약속했다. 그렇다면 천마를 탈출시킬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잘 가라, 천마.” 나는 설란을 안고 있던 두 팔 중 하나를 풀어 천마를 향해 빠르게 찔렀다.

 “이놈들 감히 내 앞에서.” “이, 이런.......” 나는 순간 당황해 소리 질렀다. 나와 설란은 어느새 루시퍼 앞까지 이동해 있었다. 루시퍼는 일어나 분노의 일성을 토해 갔다.

 “바알세불, 끝까지 내 앞길을 방해하는구나. 널 향해 베푼 자비가 얼마나 컸던지 기억하지 못한단 말이냐! 널 영원한 형벌 가운데 가두리라.” 나는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그가 태산의 동굴 앞에서 내게 말했던 건 최후의 순간에 자신을 죽여 달라는 것이었다. 어제 그걸 다시 확인시켜 주었는데. 설란의 죽음에 잠시 시간을 지체하는 바람에 모든 일이 허사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아,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천마, 미안하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게 가르쳐 다오. 설란을 잃은 직후라 난 슬픔과 애통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었지만 천마를 죽여주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이 일로 인해 천마가 장차 당하게 될 고통들을 생각하니 미칠 지경이었다.

 드드드드 급작스런 변화에 나는 어리둥절했다. 원형 결투장 전체가 진동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땅 전체가 좌우로 크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쩌저적 땅이 갈라졌다. 그 사이로 나무 같기도 하고 손 같기도 한 짙고 자욱한 안개 기둥들이 솟구치고 천마가 서 있던 땅이 밑으로 쑥 꺼져 버렸다.

 “아.” 나는 탄성을 발했다. 순간 루시퍼 주위에 있던 모든 대마신들이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와 동시에 루시퍼는 적루아를 노려보더니 곧장 천마가 서 있던 허공 위로 빠르게 이동했다. 그러는 와중에 그는 입을 열어 분노 가득한 말을 적루아에게 했다.

 “칠성대덕, 그대가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다니....... 귀계의 수장 중 하나인 그대가...... 후회하게 될 것이다.” 루시퍼의 손이 아래를 향해 쫙 펼쳐졌다. 나는 그 순간 적루아의 음성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말을 하지 못하는 벙어리 적루아의 음성을.

 “평안히 쉬세요. 진실 된 사랑을 알게 해줘...... 너무도 감사해요. 저도 당신을 사랑했어요.” 연이어 벌어진 일련의 일 때문인 듯 루시퍼는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었다. 원형 결투장 전체를 무너뜨릴 듯 계속된 진동은 좀체 멈추지 않았다. 루시퍼는 여전히 허공에 뜬 채 대지를 향해 한 손을 활짝 펼치고 있는 상태였다.

 드드드드 슈슈슈슈 또다시 진동이 어어졌는데 이번엔 꺼져 내려갔던 땅이 거짓말처럼 불쑥 튀어 올라오고 있었다. 그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하늘을 뚫을 듯이 솟아오르던 땅의 일부분이 루시퍼 앞에서 딱 멈췄는데 그 위엔 천마가 피투성이인 채로 누워 있었다.

 땅이 빨아들이며 그를 짓눌러 버렸는지 온몸이 걸레조각처럼 구겨지고 찢어져 있었다. 나는 루시퍼의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유심히 살폈다. 죽었는가, 살았는가? 아, 제발. 이제 더 이상의 비극만은 벌어지지 않기를.

 루시퍼의 양 손이 빠르게 천마의 전신을 헤집고 다녔다.

 “살아나라, 살아나라. 살아나란 말이다. 나 마황 루시퍼의 전능함으로 명하노니 죽은 자여, 살아나라.” 루시퍼가 저렇게 흥분한 모습은 처음 본다. 더군다나 마신들과 마인들이 보는 앞에서. 언제까지나 태연했던 루시퍼가 저렇게까지 당황하는 이유는 뭘까? 그는 분명 죽은 자여, 라고 말했다. 내가 느끼기에도 천마에게서는 그 어떤 산 자의 생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죽은 것이다. 루시퍼가 신이 아닌 이상 죽은 자를 다시 되살릴 수는 없다. 극복할 수 없는 신의 전능 앞에 한없이 왜소해지는 자신을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스스로 전능자라 믿고 있는 자신 앞에서 연약하고 불완전한 인간들이 벌인, 그것도 자신의 허락도 없이 벌인 일을 막지 못한 데 대한 분노일까. 이제 설란도 천마도 편안히 안식할 수 있게 되었다.

 두 사람의 죽음. 나는 슬픔과 애통함을 분노로 바꿔 갔다. 이 모든 비극이 생기게끔 원인을 제공한 마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내 정신과 몸과 뜻과 영혼을 지배해 가고 있었다. 

 이제 이 땅에 살아남은 인간이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인간의 역사가 마지막을 고하고 있었다.

 이 땅에 인간이 살기 시작한 것이 언제부터였는지, 어떤 모습들로 살다 갔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지금껏 번영을 누렸으나 이제 단절을 앞두고 있다. 쇠락이 아닌 완전한 끊어짐의 순간 앞에 나와 소수의 사람들만이 마지막 증인으로 남아있었다.

 잠든 설란의 모습엔 평화가 깃든다. 언제일지 모르나 다시 만날 날을 믿기에. 이별이 영원하지 않으리란 걸 믿기에 그래 잠시 곁에 없다고 안타까워하지 않겠소. 잘 가시오, 설란.

 루시퍼는 잠시 동안의 격정을 가라앉히고 정적에 휩싸인 장내를 천천히 둘러보고 있었다.천마의 시신을 그는 한 손으로 번쩍 들어올렸다.

 “이제부터 마계 전체에 명을 내리겠다.” 급작스런 변화였다.

 천마와 설란의 죽음이 동기유발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중대한 선언을 하기라도 하려는 듯 신중한 모습을 내비쳤다. 이어 큰 소리로 말했다.

 “본계를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인간들 모두를 이곳에서 추방한다. 그들이 그렇게 원하는 죽음을 내리리라. 대신 그들 모두는 다시 우리를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이 지닌 신념과 신에 대한 믿음을 지닌 채 함께 무너져 가는 것을 나는 지켜보리라. 차원정벌을 위해 이때로부터 무기한 전시 체제를 선포하노라. 아민, 마신을 불문하고 모든 마계의 신민들은 전쟁을 수행할 준비를 갖추고 내 명을 기다려라.” “와아아아.” 모두가 그 자리에서 한꺼번에 일어섰다. 그리고 하늘을 찢을 듯한 세찬 함상이 한 동안 이어졌다. 함성이 절정에 달하자 루시퍼의 손에서 거대한 불기둥이 하늘을 향해 타올랐다. 그 순간 천마의 시신이 불에 휩싸여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진다.

 루시퍼의 손에서 불꽃이 사르라지자 함성이 잦아졌고, 그때 루시퍼가 나와 적루아를 향했다.

 “칠성대덕, 네 선택은 무엇이냐? 본계에 대적하려 함인가?” 적루하는 자리에 여전히 흐트러짐 없이 꼿꼿이 앉아 루시퍼의 눈길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네 속단이 귀계와 우리 관계를 그르칠 수도 있음을 너무도 잘 아는 네가 이런 어리석은 결정을 할 줄이야.” 둘은 말로서가 아닌 심령으로 서로 의사를 나누고 있는 중인 것 같았다. 한참의 시간이 더 흐른 뒤에 루시퍼는 그녀를 향해 냉소 어린 표정을 지었고, 뒤이어 날 지목하며 말했다.

 “파천, 날 따라라.” 루시퍼가 하늘에 떠 있는 궁전으로 날아오르자 대마신들과 마신들이 한꺼번에 그 뒤를 쫓았다. 장관이었다. 나는 품안에 있는 설란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이리 주세요.” 난 뒤에서 내 어깨를 잡아채는 손길을 느끼고는 황급히 뒤쪽을 향해 돌아섰다. 환아가 서 있었다. 

 “어떻게 할 셈이냐?” “마지막 도리를 하려 합니다. 그렇지만 이 순간이 지나면 날 낳아 주신 인연도 이것으로 끝이 날 겁니다.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가게 할 겁니다. 주십시오.” 환아의 눈에서 느껴지는 건 허탈감뿐이었다. 슬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아들 환에게 설란을 넘겨주었다. 

 환아는 제 어미를 안은 채 그 자리를 박차고 루시퍼가 간 반대 방향으로 빠르게 날았다. 그때 다급하게 뱉어내는 화아의 소리가 들렸다.

 “태워 버리면 될 것을, 어디 가려는 거야? 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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