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마계 회의 (102/111)

 7. 마계 회의

 루시퍼와 대마신들과 전 마신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었다.

 궁전의 중앙에 위치하는 대전은 원형결투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거대했다. 그 장소로 어두의 천사와 함께 들어섰다. 한참 루시퍼의 말이 이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제일 중앙에 바닥에서 3장은 됨직한 높이로 용상이 꿈틀거리는 형상으로 서 있고, 그 머리 부분에 좌석이 설치되어 있었다. 거기 루시퍼는 앉아 있다.

 그의 주위로 일곱의 용상이 더 보였는데 루시퍼가 앉은 용상보다는 반장 정도가 낮았다. 그곳엔 일곱 명의 대마신들이 당당한 모습으로 자리했다.

 “선맥을 치고 나서 본계를 정비할 잠시의 시간을 갖겠다. 그런 연후 차원정벌을 시작한다. 마지막까지 긴장을 늦추지 마라. 그리고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라.

 본계로서는 최초이자 마지막 전쟁이기도 하니 아쉬움과 후회가 없도록 전력을 기울여야 하리라. 마신들은 내 아들들과 딸들, 그리고 대마신의 지휘 아래 한 치의 흔들림 없이 하달된 명을 완수하라.” 그의 준비된 말은 작은 부분도 놓치지 않고 세세한 부분에까지 미쳤으며 망설임 없이 하달되었다.

 가끔씩 대마신들이 하나씩 제안을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 루시퍼 혼자서 회의 아닌 회의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나와 어둠의 천사는 대회의장 입구에서 그런 루시퍼를 바라보며 조용히 서 있었다. 많은 계획들이 세워졌으며 구체적인 지시가 내려졌다. 현 마계에 사로잡혀 있는 노예 신분인 저항자들에 대하 처리도, 선맥에 대한 공격도, 선계와 천상계와 귀계와 무한계에 대한 기본적인 대책도 얘기되었다.

 나는 아직도 그런 말들을 태연하게 할 수 있는 루시퍼를 이해할 수 없다. 내 생각으로는 적이 들어서는 안 될 것 같은 중요 사안도 상당했기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단순한 자신감으로 이해하기엔 무리한 점이 뒤따랐다.

 루시퍼의 말을 계속 이어졌다.

 “이제 몇 가지 먼저 처리해야 할 사안에 대해 언급하겠다. 먼저 칠성대덕, 그대는 본계와 귀계가 현재 연합하고 있는 과정 중에 있음을 잘 알고 있다. 더군다나 내가 저번에 특별히 부탁한 적도 있었지. 귀계와 본계의 연합은 이제 기정 사실화 되어 가고 있음에도 그대는 자신의 본분을 잊고 이와 같이 반역적인 행동을 했다.

 묻겠다. 그대는 본계와 대적하려 하느가?

 용상 아래쪽에 적루아가 앉아 있다가 루시퍼의 말에 고개를 가만 끄덕였다.

 “귀계의 칠성 중 육좌 모두가 날 돕는다 해도 말인가?” 역시 적루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결정은 확고하여 더 이상 번복함이 없을 듯싶었다. 그럼에도 루시퍼는 또다시 확인하고자 했다.

 “귀계 전체가 그대를 반역자로 선포한다 해도 말인가? 그 동안 귀계에서 그대가 누렸던 모든 권리를 제한당하고 박탈된다 해도 말인가?” 적루아는 전혀 동요됨이 없었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만이 지금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이기라도 하듯 단호하기만 했다.

 “좋다. 그대에 대한 처리는 어차피 귀계에 일임해야겠지. 결정이 내려지기 전까지 그대에 대한 지금까지의 예우를 유지하도록 하지. 무척 어리석군, 칠성대덕.” 이때 아사셀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웬만해선 잘 나서지 않는 그였기에 약간 술렁이는 분위기도 형성되었다.

 “마황,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뭔가, 아사셀.” “귀계와의 연합은 결정된 것이요?” “아직은 아니다. 그렇지만 조만간.......” “그렇다면 현재까지는 귀계 역시나 우리 마계의 적이군요. 그렇다면 당연히 그는 포로로서 대우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가 괜히 트집을 잡자고 하는 이유가 뭘까?

 “이제는 전시 체제를 유지해야 합니다. 적에 대해 아량을 베푸는 따위의 여유를 부릴 단계는 지났습니다. 그 동안 마신들 사이에서 여러 불만들이 있었다는 걸 마황께서도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불만? 지금 불만이라고 했나? 무슨 불만이 있다는 거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먼저 마황의 후사를 독단적으로 결정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휘권의 일부나마 넘겼다는 사실이죠.

 그들은 마신들의 입장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낯선 존재들. 그런 그들을 상관으로 섬겨야 하는 마신들의 입장을 헤아리셔야 할 겁니다.

 또 하나, 마신들의 편제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마신들의 단 두 직급에 좀더 체계적인 위계가 요구된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대마신 브리트라가 오래전부터 마황께 건의 드린 것이기도 하죠. 아수라와 나찰들은 전시가 되면 마신갑을 착용합니다. 서로의 구분이 모호한 상태에서 효과적인 전투를 기대하기란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생각엔 지금 당장 차원정벌을 시작하는 데는 무리가 뒤따른다는 것입니다. 오랜 기간동안 정성들여 온 마전사 육성이 완전한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이상입니다.” 아사셀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들이기도 했다.

 루시퍼가 아사셀의 제언에 잠시 생각하는 누치더니 받아들일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을 구별하여 말하기 시작했다.

 “그대의 사려 깊은 제안을 잘 들었다. 먼저 내 아들들과 딸들에 대한 부분만은 아무런 반대 없이 따라 주었으면 한다. 그 부분에 대해서만은 앞으로도 더 이상 말하지 말길 바란다. 마신들 간의 위계는 좀더 심사숙고하여 될 수 있는 한 그대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매듭짓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출정의 시기에 대해서는....... 내가 지금 정벌을 선언한다 해서 곧바로 일어날 일은 아니다. 그대 말대로 마전사가 곧 완성되고 그 이후에나 가능하겠지.

 뿐만 아니라 여러 변수를 고려해야 되기 때문에 실제 차원정벌의 최초 전투까지는 아직 상당한 시간이 더 소모될 것이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지금 이 시간 부로 전시 체제로 돌입된다는 것, 이것 한 가지다. 별다른 장애가 없다면, 그리고 판단하기에 시기가 적절하다면 우리는 지금이라고 다른 차원계를 복속시킬 수 있다. 그렇지만 아직 더 기다려야 할 이유가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한다. 그 점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그 때 브리트라가 일어나며 루시퍼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더니 제 의사를 말해 갔다.

 “존경하는 마황이시여, 우리는 마황의 신하들. 감히 마황의 결정에 반대하거나 반발하고자 하는 마신은 단언하건대 단 하나도 없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마황의 명령에 따라 차원정벌에 나설 것이며 그 모든 영광을 마황께 돌릴 것입니다.

 대마신 아사셀 님이 말씀하신 의도로 제 생각으로는 좀더 신중하게 대사를 진행시켜 가자는, 그 한가지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제가 하나 더 첨언하고자 합니다.

 다른 것이 아니라 본계의 첫 번째 정벌 대상이 선계라는 게 과연 최선책인가 하는 점입니다. 실제로 객관적인 전력만으로 따진다면 귀계와 선계는 차원계 중에서도 가장 미약합니다. 그들은 본 마계에 그다지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적은 결국 천상계가 될 것이며, 가장 큰 변수는 무한계라고 생각합니다. 무한계는 구체적인 구심점이 없어 결속하지 못하지만 그 전체의 힘을 고려한다면 가장 껄끄럽습니다. 귀계와 우리와 연합하여 선계를 견제해 주고, 우리가 천상계와 힘을 겨루고 있을 떄 무한계가 힘을 더한다면 심히 곤란한 일입니다.

 우리는 최후까지 천궁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 전력의 상당 부분을 손실 없이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는 부담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하고 자는 말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비중을 두고 먼저 처리해야 할 부분은 무한계에 전력을 침투시켜 그들의 분열을 더욱 부추겨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연후에 귀계가 선계를 견제하고 우리가 천상계를 친다면 별 손실 없이 전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브리트라의 그 말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었던지 루시퍼가 고개를 끄덕이는가 하면 다른 마신들도 동조하는 분위기였다.

 “좋다. 그건 좀더 연구해 볼 가치가 있는 것 같군. 구체적인 방안이 마련되면 내게 보고하라.”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때다. 루시퍼가 내가 있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에 대한 말들이 흘러 나왔다.

 “나는 생각하기를, 저기 파천과 바알세불을 차원정벌이 끝나는 시점까지 본계의 노예로 두려 했다. 그런데 그럴 수 없게 되었다. 그를 본계에서 내보내기로 하였다.” 웅성웅성 잠시 소요가 있고 난 후 발 리가 자리에서 발딱 일어서더니 흥분해 소리쳤다.

 “그건 안 될 말씀입니다. 저놈을 놔주다니요?” “그렇습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저놈은 제가 알기로도 다른 차원계의 사주를 받았습니다. 그를 통해 천상계나 선계가 무슨 일인가를 꾸미고 있다는 걸 우리 모두가 알고 있거늘. 그들의 뜻대로 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찬드라까지 내 방출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때 브리트라가 날 돌아보며 천천히 말한다.

 “저 자 하나만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그저 조금 강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더군다나 이곳 인간계에서나 힘을 쓰지, 다른 영계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지요. 

 허나 그럼에도 염려되는 건 다른 차원계들이 저 자를 상당히 중요시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굳이 장애가 될 일을 방치할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좋은 건 역시 위험 요소를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 품에 있는 한 저 자는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그게 가장 좋지요. 우리가 그를 데리고 있어 봐야 득이 되지 않지만 손해 볼 일은 없지요. 그렇지만 그를 내보내면 어떤 변수가 되어 우리 앞을 가로막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도 내게 친절하고 사려 깊게 행동하던 그도 이런 예민한 부분에 직면하게 되자 결국 제 잇속을 챙기고 있었다. 그는 날 적 이상으로는 보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게 지극히 당연했다.

 이때 메피스토가 자기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또다시 덧붙여 말하려는 발리를 제지했다.

 “제가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자의 전생은 저로서도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마치 이번 생이 처음이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저 자가 오행기를 모아 새로운 물질을 생성시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물질 생성은 상당히 높은 수준의 영자들만이 구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자는 인간으로 그 일을 해냈습니다. 이런 걸로 보아....... 보낸다면 필시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왜 그런 결정을 하셨는지는 모르나 그건 그리 환영할 일은 아니군요.” 모두 반대하는 분위기다. 이러다 마계를 빠져 나가지 못하는 건 아닐지. 난 은근히 걱정되었다. 

 “내가 한마디 하겠소, 여러분.” 어둠의 천사, 메타트론의 사자가 앞으로 나서며 그렇게 운을 떼가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우리들이 서 있는 쪽으로 몰려들었다.

 “이 결정은...... 메타트론 님이 내리신 겁니다. 그래도 반대하시겠소?” 조용했다. 아무도 나서서 대꾸하는 이가 없었다.

 “주님의 뜻입니다. 무슨 의도인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저는 단지 전언하는 사자에 불고합니다.” “다 들었겠지? 내 아버지의 명이다. 불만은 용납하지 않는다. 그를 보내기로 하겠다, 살아 있는 채로 말야.” 나는 그의 최후 결정을 듣고 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다. 여기서 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회의는 한참이나 더 진행되었고, 여러 가지 사안들이 논의되고 결정되었다. 그걸 듣고 있는 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는 점차 불안감이 증폭되었다.

 내가 장삼봉 진인을 찾아 가려 하는 건 이들 마계에 복수하기 위함이다. 진인은 날 데려 가려는 이유가 광명을 가져오게 하려는 것이며, 그게 필요한 건 다른 차원계들을 움직이게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럴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들이 차원정벌을 나선다면 굳이 광명을 가져오지 않아도 다른 차원계들은 어느 입장이든 나설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더 이상 날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광명을 얻어야만 한다. 내 힘으로는 이들을 상대할 수 없다. 필연적으로 광명을 내 손에 쥐어야만 한 가닥 희망이라도 바랄 수 있다. 그래야만 다른 차원계들을 움직여 이들을 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내게 있어 광명은 복수를 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또 한 가지 염려는 만에 하난 행운이 따라 광명을 손에 쥐게 된다 해도 마계를 처단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기인하는 것이었다. 이들은 차원계 전체와의 전면전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 난 루시퍼 앞에 여전히 편치 않은 심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는 홀로 사색에 잠겨 나에겐 아무런 관심도 없어 보였다. 나 또한 갖가지 생각들에 머리가 복잡하기만 했다. 결국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차원 침략을 결행한다 해도 결국 광명은 필요하다는 것과 이것저것 따져 볼 것도 없이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광명이 어느 정도의 권위와 효력을 발휘할지는 나로서도 알 수 없었지만 만약 그걸 얻어 무한계나 귀계마저 마계와 싸우게 할 수 있다면 그 가치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되었다.

 그리고 아무리 마계가 자신한다고 해도 전 차원계를 상대로 승리 할 수는 없으리란 생각도 더불어 들었다. 그래, 어차피 길은 하나다. 가지 않으면 멈춰 있을 수밖에 없다.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파천. 왜, 고민되나? 복수는 하고 싶은데 힘이 없으니 그렇기도 하겠지. 너무 안달하지마라. 그들이 무슨 제안을 할지는 모르지만 결국 네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리 많지 않을 거야.

 난 한 가지 무척이나 궁금한 게 있다. 널 죽이면 나중에 과연 어떤 모습으로 내 앞에 나타날지...... 난 그게 궁금했다. 그래서 몇 번인가 그런 충동을 느끼기도 했었지. 기껏 아라한 정도겠지만. 그러니 더 이해가 가지 않아. 네 어떤 점이 그들로 하여금 필요로 하게 했는지. 널 곁에 두고 그 의문을 풀어 보고 싶었는데 좀 아쉽군.” 나도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네 놈의 그 잘난 면상을 한 번쯤 시원하게 후려쳐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나도 아쉽기만 하다.

 “한 가지 고백할 게 있다.” 느닷없는 소리였다. 난 그가 할 말이 무언지 궁금했다. 숨죽이고 그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는데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저 불칸입니다.” “오, 들어와라. 파천, 그 얘긴 잠시 있다 해야겠군.” 환아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애는 슬쩍 나를 쳐다보았을 뿐 이내 루시퍼에게 시선을 고정하고만 있었다. 녀석의 그런 태도가 난 야속하기만 했다.

 너무 변해 버린 내 아들 환아. 그렇지만 난 아직까지도 환아를 낯설게 쳐다볼 수 없다. 너는 날 거부할 수 있어도 난 널 포기할 수 없단다.

 “그래, 어머니를 땅에 묻고 왔다고?” “네.” “서운하더냐?” “아닙니다.” “그래야지. 마신들이 너희들을 아직까지도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음을 들어 알고 있겠지?” “네, 들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말 안 해도 잘 알고 있을 거다. 너희들은 아직 미완성이다. 내가 널 부른 건 그래서다. 환상지대로 다시 들어가 수련을 계속하라. 자신감이 생기지 않으면 나오지 마라. 지금 너희들의 힘은 대마신에 미치지 못한다. 그들에 필적할 만한 실력을 갖추기 전에는 나오지 마라. 알겠느냐?” “네, 알겠습니다.” “루루와 세라핀에게도 그렇게 전하는 것 잊지 말고.” “명심하겠습니다.” “너희들에 대한 계획을 전면 수정했다. 너희들은 앞으로 마신들이 아닌 마계전사들을 이끌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욱 강한 마력을 연성해야 한다. 명심해라.” “잘 알겠습니다.”  “하고 싶은 얘기는 없느냐?” “없습니다.” 간단한 질문과 대답만이 서로 오갔다. 난 환아와 나누고 싶은 얘기들이 많았지만 그럴 수 없어 안타까웠다. 

 환아는 역시 내게 단 한마디의 말도 건네지 않고 멀어져 갔다. 환아가 사라지자 루시퍼가 다시 날 향했다.

 “고백할 것이 있다, 파천.” “.......” “궁금하지 않나?” “말해봐라.” “사실 몇 번인가 네게 마력을 걸어 두려 했었다. 그건 네 마음속을 헤아리기 위해서였지.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게 잘 되지 않더군. 인간에게 마력으로 물리력을 행사하는 것이 아닌 영혼을 통제하는 건 그리 쉽지 않아. 그렇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지.

 그런데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때부터 네게 대한 의문이 더 강해지더군. 어떤 힘이 내 마력에서 널 지켜내는지가 너무도 궁금했다. 너는 분명 보통의 인간이다. 물론 평범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가 보기에 특별할 것도 없지.

 네가 영자였다면 더 쉽게 마력을 걸 수 있었겠지만 인간이라 힘든 거라고 스스로 위로했지만 솔직히 지금까지도 그 일은 내게 큰 의문으로 남아 있다.” 그의 말대로라면 나 또한 의문이 들었다. 그가 마음먹었다면 적루아나 천마나 설란에게도 마력으로 마음속을 살필 수 있었을 테고, 그랬다면 우리 의도가 미리 발각돼 루시퍼를 속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왜 그러지 않았을까? 난 그 이유를 루시퍼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그건 내 자존심 때문이었지. 너희들을 마력으로 강제하거나 감시하는 일은 내 스스로를 초라하게 만드는 일. 그런 짓까지 해야 할 만큼 난 약하지 않다. 내가 뭐가 무서워 그러면서까지 작은 일에 집착해야하는가, 라는 그런 생각 때문이었지.

 그런데 지금에 와서는...... 솔직히 후회가 되기는 하는군. 예전에 난 아버지 메타트론과 이런 말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 분은 내게 말씀하셨지. 인간계를 지배하고 다스릴 수는 있어도 그들 모두에게 순종을 끌어낼 수는 없다고.

 그때 나는 자신 있게 말했었다. 해보이겠노라고. 그 분은 그러시더군.

 ‘결국 거부하는 인간들 모두를 넌 죽일 수밖에 없을 거다. 죽이거나 강제로 제압하는 수밖에 없지만 결국 그건 네 스스로 그들에게 진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도 말씀하셨지.

 ‘너는 인간계를 차지하겠지만 인간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때 나는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거라 큰소리를 쳤었다.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게 아버지의 예견대로 된 셈이군.” 메타트론.......

 그는 무서운 자다. 그런 예지력의 소유자가 달리 대책을 세워 놓지 않았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쩐지 내 모든 의도나 행동이 그가 바라는 대로 진행되어 가는 게 아닐까, 라는 의문마저 들었다.

 “내일 이곳을 떠나라. 이제 떠나면 언제 다시 보게 될지 모르겠군. 파천, 이왕이면 강자가 되어라. 그래서 다시 만났을 때 내가 감탄할 수 있게 말이다. 이렇게 보낸 걸 후회하도록.”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지. 그리고 나도 한 가지 부탁을 하마.” “뭔가?” “아이들을 잠시 네게 맡기마. 그렇지만 반드시 데리러 올 것이다. 그 아이들이 내게 칼을 겨눈다 해도 나는 반드시 돌아온다. 그리고 예전의 아이들로 돌려놓고야 말 테다.” “하하하하.”  “지금은 네가 웃지만 그때는 내가 웃으리라. 기억해 둬라. 내 영혼이 소멸되지 전까지 난 네 적이다. 내 이름은 파천! 이 이름을 기억해서 지우지 마라.” “좋아, 그렇게 하도록 하지. 아직도 아쉬움이 남는군. 네가 고집을 버렸다면 아주 이상적인 관계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말야. 다시 보게 된다면 나 또한 널 최선을 다해 제거해 주지. 그리고 네 신념이 틀렸다는 걸 보여 주마. 그만 가 봐라.” 루시퍼의 처소를 나서는 순간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건 환아가, 화아가, 천아가 내 앞을 막아서고 검을 겨누고 있는 장면이었다.

 루시퍼의 처소를 나서는 순간 사실상 난 자유의 몸이 돈 셈이었다. 그의 최후 선고가 내려진 이상 누구도 내 앞을 막아서지 않을 것이었다.

 내 예측은 정확했다. 어딜 가든 어디서 무얼 하든 그들은 방관자로 지켜보았고 결코 간섭하지 않았다. 

 난 나중을 위해서라도 최대한 많은 것을 보고 알아 두어야 했다. 나중에 마주설 때가 되면 이 모든 건 싸움을 위한 훌륭한 정보가 되어 바탕을 튼튼하게 해 줄 것이며, 승리할 여건을 더욱 확고하게 해줄 것이다.

 예전엔 궁전에서 나가는 걸 막았던 그들이었지만 지금은 그러지 않았다. 이대로 마계의 영역을 벗어난다 해도 그들은 막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땅으로 내려 와 마인들을 살피기도 했고, 그들의 규모를 가늠해 보려 애썼다.

 여기저기서 인간들을 처형하는 장면이 목격되었고, 그럴 때면 그 자리에 서서 꼼짝하지 않고 진행되는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관찰했다. 내 속에 커 가는 분노의 나무에 물을 주고 거름을 주었다. 더욱 빠르고 깊게 뿌리를 내려 온 마음속을 가득 채우길 바랐다.

 그 어느 것도 막아서지 않았지만 금지된 곳은 여전히 존재했다.

 마전사들이 있는 곳이나 마신들이 수련하는 장소만은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나는 어느 정도 꼼꼼하게 살펴보다 나도 모르게 한 곳으로 가게 되었다. 기억으로는 아이들이 처소로 삼고 있는 구역이었다.

 내일 환상지대로 들어간다고 했으니 오늘이 아니면 당분간 만날 수 없겠구나. 나는 몇 번인가 망설이다 결국 그 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환아가 날 보더니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환아가 아무리 장성하고 마계의 표징을 이마에 지니고 있다 해도 여전히 내게는 사랑스럽기만 한 어린아이였다.

 “환아.” 환아가 뒤로 돌아서서 작게 말했다.

 “그 이름으로 날 부르지 마세요.” “그럼...... 뭐라고 불러야 하지? 내 눈엔 여전히 넌 환아인데...... 어떻게 불러야 할까.......”  “그만 가십시오. 당신과 나는 이제 아무런 관계도 아닙니다. 저는 마황님의......” “그만, 그만해라. 그래, 가마. 대신 이것 한 가지는 말하고 싶다. 아빠는...... 널 사랑한단다. 지금도 마찬가지고 언제까지나 널 사랑하는 마음만은 변치 않을 거다. 다시 돌아오마. 그러니 너도 포기하지마라.

 아빠와 엄마는 너희들을 원망하지 않아. 기다려다오. 반드시 다시 찾아오마.” 환아는 내 말에 대답하지도, 무시하거나 막으려 들지도 않았다. 그냥 뒤돌아서서 가만있었을 따름이다.

 “내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화아와 천아를 잘 보살펴라. 서로 의지하고 힘을 합해 잘 견뎌내거라. 그럼 못난 아빠는...... 이만 가마.” 환아는 끝끝내 날 돌아보지 않았다. 그곳을 걸어 나오는데 갑자기 뜨거운 눈물이 왈칵 솟아 나왔고 가슴에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후우, 그래. 네 선택이었다 해도 그것 역시 널 지켜 주지 못한 아빠의 잘못이지. 아직 어린 네가 감당할 수 없는 선택에 놓이게끔 한 것만으로도 내 잘못이지. 그래, 그렇다 말고.

 내게 오늘은 분명 새로운 의미의 날이다. 절망만 가득하던 곳에서 작은 희망을 향해 떠나게 되었으니 어찌 평범하다 할 수 있으리오.

 루시퍼가 발리에게 명해 날 마계 영역 밖까지 안내해 주라고 했다. 난 그런 친절까지 바라지 않았으므로 몇 번이나 거절하고 사양했으나 평소 나라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던 발리까지 흔쾌히 나서서 어쩔 수 없이 그의 뜻을 따라야 했다.

 처음 이곳에 오던 날이 다시 떠올랐다.

 이들에게 사로잡혀 당했던 온갖 수모와 고통까지도 너무도 생생하다. 수많은 죽음들. 그들의 비참했던 마지막 순간들은 아마 영원토록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나는 뒤로 몇 번이나 돌아다보았다. 그곳에 남겨 둔 추억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곳에 남겨 둔 소중한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과 적루아를 저곳에 두고 나오는 심정은 그래서 착잡했다. 발리가 그런 날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인 건 마계의 궁전들이 깨알같이 작게 보일 때였다.

 “그 동안 고생이 심했어.” 이놈이 갑자기 왜 이리 친한 척하는 걸까? 대답하지 않을 자유 정도는 마계에 있을 때부터 보장받고 있던 거라 난 익숙하게 권리를 행사했다.

 “난 네놈이 그냥 싫다. 처음 볼 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 게다가 인간인 주제에 물질 생성의 수준에 올랐다니...... 솔직히 네 놈을 보는 즉시 죽여 버리고 싶었어.” 특별한 놈. 그래 최소한 내 기억에서만은 네 놈은 아주 특별하게 남게 될 거야. 네가 ‘왈왈’ 짖던 것과 수하들을 고통 중에 조롱하던 걸 잊지 않으마. 그리고 그런 기회가 내게 허락된다면 배나 더한 고통을 선물 해 주마. 그동안 제발 만수무강해라.

 “잘 가라. 메타트론님의 명이라니...... 널 산채로 내보내라니....... 이대로 보낸다만...... 내 기억으로는 죽이지만 말라고 했던 것 같아서 말이야.” 콰악 놈은 갑자기 달려들며 내 목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빠르게 내 전신을 훑었다. 순간 전신 몇 곳에 거의 한꺼번에 몰려드는 고통을 느꼈다. 놈의 손이 훑은 곳은 두 손목과 발목 쪽이었으며, 그곳에서 핏줄기가 끊임없이 흘러 나왔다.

 “힘줄을 끊어 놓았으니 앞으로는 움직이는 게 그리 쉽지는 않을 거야.” 휙 난 속절없이 날려가 쩍쩍 가라져 먼지만 날리는 바닥에 처박혔다. 먼지가 풀썩 날려 내 몸을 덮었지만 나는 움직이지도 못했다.

 "이놈! 이런 짓을.......“ 난 느닷없는 기습에 방비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당한 게 억울해 미칠 지경이었다.

 “잘 가라. 선맥의 후예들이 있는 곳까지는 꽤나 멀 텐데. 그곳까지 가려면 고생 꽤나 하겠어. 하긴 먹을 게 없으니 곧 굶어 죽을지도 모르겠군. 운이 있다면 벌리고 있는 네 입으로 벌레라도 기어들지 모르지.”  발리는 자기 말대로 그 말만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동을 해서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목을 움직여 손목 쪽을 보았다. 고통이 문제가 아니었다. 손과 발을 사용하지 못하니 장백산까지 가는 건 불가능했다. 금응을 불러 용케 그곳까지 간다 해도 이 지경이 되어 무얼 할 수 있겠는가. 나는 큰 소리로 악을 써댔다.

 “이 빌어먹을 마계 놈들아. 이럴 거면 그냥 죽일 것이지, 풀어 주는 심보는 또 뭐냐! 믿었던 내가 어리석었다. 칵, 퉤.” 내 소리가 저 멀리 궁전까지 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손과 발을 움직이지 못하지만 몸을 움직일 수는 있다. 자연의 기운을 빌려 허공을 날아 금응의 등에 타오르기만 하면 된다.

 그렇지만 과연 마계 지척인 이곳에 금응을 불러내도 될지 걱정이다. 그리고 아직까지 금응이 살아 있는지조차 확신이 서지 않았다. 만약 금응이 마수들에게 당했다면 장백산까지 가는 건 그야말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도착하기 전에 죽을지도 몰랐다.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일단 일어나 앉기로 작정했다. 주변의 기운을 모아 몸을 허공중으로 띄워 올렸다. 똑바로 떠오르던 몸이 비스듬히 기울어지다 바닥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정말 꼴이 말이 아니군. 놈이 따라나선다고 할 때부터 짐작했어야 하는 건데.” 발리가 독단적으로 행한 일일 가능성이 컸다. 루시퍼가 이런 짓을 명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적어도 그는 이리 치졸한 방법을 쓰지는 않을 것이다.

 “금응을 불러내야 하나? 후우, 어쩔 수 없군. 방법은 그것뿐이니.” 이 상태로 자연의 기운을 빌려 장백산까지 날아가기엔 신체에 무리가 많이 따랐다. 그리고 출혈 또한 문제였다. 금응을 타고 가면 내 힘으로 가는 것보다는 빠를 것이다. 나는 한 가지 생각이 번쩍 떠올랐다.

 “그래, 차라리 그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장백산으로 바로 갈 게 아니라 다시 마계로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그들은 이런 상처쯤 아무렇지도 않게 치료하곤 했다. 더군다나 루시퍼가 알게 되면 오히려 발리 그놈을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다.

 “일석이조로군. 설사 발리의 독단적인 행동이 아니라 하더라도 마황은 어쩔 수 없이 나를 치료해 줘야만 한다. 스스로 뱉은 말은 공식적으로는 지켜야 하니까. 그게 조직을 다스리는 자가 수하들에게 보여야 할 모습이기도 하고.” 나는 결국 그렇게 빠져 나오길 원했던 마계로 다시 들어서기로 결심하고. 자연의 기를 받아들여 몸을 허공중으로 재차 띄웠다.

 “다시 돌아갈 필요 없다.” “누구?”  “나다. 어둠의 천사.” 이 자가 어떻게? 그리고 왜?

 “내가 치료해 주지.” 그가 내 앞에 나타난 것보다 그가 한 말이 나는 더 반가웠다. 세상에 이놈을 보고 반가워하게 될 일이 있을 줄이야.

 “그렇게 해준다니...... 고맙다고 해야 하나?” “그럴 필요 없다.” 그는 손을 내밀지도 내 몸을 만지지도 않았다. 그저 손목과 발목을 잠시 쳐다보았을 뿐이었다. 

 “이제 괜찮을 거다. 자, 떠나라. 가서 네 갈 길을 가고 할 일을 하라. 속히 행하라.” 병 주고 약 준다더니 딱 이짝이군. 그래, 네 말대로 내가 네게 빚을 진 건 아니다.

 “이것 봐, 어둠의 천사.” “말하라.” “날 통해 무얼 얻으려는지는 모르지만 그리 쉽지는 않을 거야. 네 놈들의 의도를 아는 이상엔 말야.” “상관없다.” “그래, 나중에 보자고. 그럼 이만 헤어질 때가 된 것 같군.” 나는 그 자리를 신속히 벗어났다. 그리고 동쪽으로 방향을 잡고 전속력으로 신형을 쏘아갔다.

 오랜만에 세상에 나왔음에도 난 그리 반가운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보이느니 허허벌판이요, 메마른 대지뿐이었다. 게다가 사람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지 않으니 심정이 오죽하겠는가. 이 넓은 땅덩어리에 나 홀로 살아남았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사무치는 외로움이 밀려들었다.

 청해를 벗어나는 순간 나는 곧바로 금응을 호출했다. 내 염려와는 달리 금응은 건재했다.

 이 녀석이 지금껏 어디서 무얼 먹으며 살아남았는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금응은 오랜만에 만나게 되어서인지 유난히 친근하게 대했다. 나는 금응의 등에 타올라 하늘로 힘껏 날아오르게 했다. 금응은 내 급한 마음을 알아챘는지 전속력으로 장백산을 향해 날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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