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영계의 이방인을 둘러싼 모험 (104/111)

 도서명 : 황제의 검13

 저자명 : 임무성

 영계의 이방인을 둘러싼 모험

 선인들은 소소한 몇 가지 당부만으로 파천을 배웅했다.

 “안으로 들어가시면 마중하는 이가 있을 겁니다. 얻음과 얻지 못함은 그대의 노력 여하에 달린 것. 부디 원하는 걸 얻으시길 바랍니다.” 파천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 곰곰이 짚어 보았지만 언뜻 떠올라 주는 건 없었다.

 광명을 얻기 위한 여정 중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을 갖추는 것. 그것이 지금의 그가 원하는 단 하나의 바람이었다. 선인들이 떠나간 빈자리. 거기를 쳐다보던 파천은 크게 숨을 들이키고는 각오를 새롭게 다지며 돌아섰다. 

 “부딪혀 보면 알 수 있겠지.” 의문은 접어두기로 했다. 맑은 수면처럼 매끄러운 문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차가웠다. 손을 갔다대면 철썩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힘을 주었지만 꿈쩍하지 않는다. 체중을 실어 다시 한 번 두 손으로 힘껏 밀었다. 그런데도 여전히 요지부동이다. 시작부터 난관에 부딪힌 것이다. 

 “열리기는 하냐?” 선인들의 특별한 언급이 없었던 걸로 보아 문을 여는 데 별 어려움은 없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건...... 그래, 그거였군.” 습관이란 이처럼 무서운 것이다. 지금까지 그가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사실들을 일순에 부정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아니,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육체가 아닌 정신의 의지로 물리적인 힘을 일으킨다는 건 생각해보면 무척이나 까다롭고 번거로운 일이었다. 매번 이런 식이라면, 더군다나 절체절명의 위급한 상황에서 지금처럼 당황하게 된다면 종말은 너무도 쉽게 찾아 올 것이다. 광명을 가져오기는커녕 어느 이름 모를 낯선 곳에서 생을, 운명을, 뜻을 접어야 할지도 모른다.

 “정신을 차려라. 지금부터 넌 혼자다. 작은 실수 하나로도 끝장난다.” 파천은 재차 스스로에게 강한 암시를 주었다. 의지로 구슬을 굴렸듯 문을 여는 거라며 주문을 걸어 보기도 했다. 

 스르르릉 얼음이 미끄러지듯 부드러운 열림. 파천은 생각보다 쉽게 열리는 문을 대하고는 약간은 허탈한 심경으로 안을 살펴보았다.

 그는 신중하게 한 발을 들여놓으며 정면을 뚫어지게 주시했다. 시간이 빙결된 듯 그를 맞이하는 새로운 공간은 그 어떤 작은 움직임도 보여 주지 않는다. 들리는 건 작게 뱉어내는 자신의 숨소리뿐. 하얀 설원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이 들도록 온통 하얀색으로 도배된 전경이었다. 

 중앙에 늘어진 가지를 흔들고 있는 건 이름 모를 생명체. 나무였다. 외양은 그러하지만 그것이 진정 나무인지도 모를 일이긴 했다. 파천은 조심스레 그것 주위를 돌며 자신의 방문에 누군가 반응해 주기를 기다렸다.

 “아무도 없소?” “오심을 환영합니다.” 기대하지 않은 대답에 파천은 화들짝 놀랐다. 소리의 출처를 찾고자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그곳에는 자신과 나무 한 그루뿐이었다. 

 ‘그렇다면...... 저 나무가 말을 한 것인가?설마...... 아니겠지.’ 그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대체 어디에 있소?” “나는 파천 님의 앞에 있습니다.” 진정 그러한가? 나무가 말을 하는 사태는 결단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오랜 경험을 통해 얻는 깨트려지지도, 깨트려져서도 안 될 것만 같은 지식은 그렇게 속단해 버렸다. 그것은 여전히 관성으로 굴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단단하게 굳어 버린 지식을 파천은 다시금 꾸짖었다. 그리고 다시 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말을 한 것이요?” “놀라셨습니까?” “조금은......” “파천 님을 기다리며 이곳을 지킨 지 오래되었습니다. 다시 만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 파천은 나무가 말을 한다는 사실에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그 의미를 되씹어 보지 못했다. 나무는 분명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쁘다고 하지 않았던가? 두고 볼 일이었다.

 “한 가지 묻겠소. 여기는 뭐 하는 곳이며 이곳에서 내가 할 일이 무엇입니까?” “파천 님이 하실 일은 여기서 저와 잠시 시간을 보내는 겁니다.” 수양버들을 연상시키는 가지들엔 하얗게 눈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가지가 이리저리 흔들린다. 파천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잠시 뜸을 들이며 기다렸다.

 “저는 무연(無緣)이라 합니다. 제 아래에 앉으십시오.” 일단은 의문을 접어 두고 그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한 아름이 넘음 직한 둥치 앞에 좌정하고 앉았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제가 시키는 대로 하십시오. 여긴 지니고 있는 생각들을 있는 그대로 반영해 주는 곳이기도 합니다. 여정을 하는 동안 생길지도 모를 궁금증들과 스스로의 미숙한 점들을 부분적으로나마 이곳에서 해결하실 수 있을 겁니다. 현재 파천 님의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대침 가운데 하나는 제 뿌리의 일부분입니다. 집중하는 순간 저와의 영적인 교감이 가능하도록 해줄 것입니다,” 파천은 마음을 가라앉히고 눈을 감았다. 현재 당면한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라는 의문이 쉴 새 없이 솟구쳐 올랐지만 억눌러 둘 수밖에 없었다. 이곳이 어떤 곳이든 여기서 자신이 무엇인가를 얻어 가야한다면 그 부분에 집중하는 게 최선이란 생각이 들었다.

 스스로의 부족함을 너무도 잘 아는 그였다. 작은 하 s가지라도 얻어 채워야 한다는 부담감이 현재의 그를 집중케 하는 원동력이기도 했다.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소리인 양 무연의 말들은 심중에서 일어나 사방으로 메아리쳐 간다. 하나라도 놓칠세라 집중에 집중을 거듭했다.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건 어렵지 않았다. 생각보다 더욱 선명한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마치 멀찍이 떨어져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몸의 중심에 기운을 떠올려 보십시오. 사방에서 몰려드는 기운도 동시에 느껴 보세요. 보이십니까?” 몸은 빙글빙글 돌아가며 자세하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더 상세하고 분명한 모습이었다. 파천은 자신의 몸 중심을 관통하는 핏줄기와도 같은 붉은 기운을 보았다. 사방에서 푸른 기운들이 대응하며 맞대하고 있는 것도 보였다.

 ‘대체 저것들이 무언가?’ “머리에 무엇이 보입니까?” “작고 가는 푸른 막대 세 개가 보이오.” “몸에 담은 건 스스로의 억제된 프리마즈요, 밖에 있는 기운들은 우주의 원형프리마즈입니다. 세 개의 대침은 원형프리마즈를 이용해 만든 영물들로서 양자를 연결해 주는 기능을 합니다. 사용하는 양이 늘어남에 따라 대침들은 내부에서 녹아 점차로 작아지게 됩니다. 결국에는 모두 녹아들게 되고 그 순간 억눌려 있는 내부의 프리마즈가 폭발을 일으키게 되겠죠.” “그럼......어떻게 되는거요?” “......” “완전하게 소멸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제가 알고 있기로는......” 파천은 일시지간 충격 속에 빠져 헤어나오지 못했다. 선인들이 자신을 속였다는 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장차 이르게 될 스스로의 비참함에 마음이 울적해진 것이다.

 ‘소멸. 소멸이라는 건가? 육신의 죽음이 아닌 완전한 소멸. 프리즈마를 계속 사용하다가는 결국엔......’ 그렇다고 그걸 겁내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므로 대침들이 완전히 녹기 전에 파천 님은 원하는 걸 이루셔야만 합니다.” 결국에 대침들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해 파천의 머릿속에 넣어진 셈이었다. 프리즈마와 감응하는 것 한가지와 분출하는 프리즈마를 억눌러 두는 기능. 무연의 말대로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만 있다면 자신은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걸 어떻게 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파천은 똑똑히 보고 있었다. 몸 전체를 가득 채우고 맹렬히 들끓고 있는 거대한 기운들을. 지금껏 살면서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새로운 형태의 기운이었다. 

 의지로 운신하고 사물을 움직이는 등의 아주 초보적인 프리즈마 운용과 머릿속에 박힌 대침들의 영향으로 잠재되어 있던 프리즈마가 격발한 것이다. 마치 용트림을 보는 듯 장관이었다.

 ‘내 작은 몸 안에 저리 큰 힘이 꿈틀대고 있었단 말인가?’ “지금 파천 님의 내부에서 끊임없이 움직이는 프리즈마는 매우 불안정합니다. 이는 달리 말해 그만큼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이 크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프리즈마를 안정시켜 의지로 자유자재 조율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현재 파천 님은 육신을 지닌 상태이기에 프리즈마는 의지의 측면과도 결부되어 있지만 이와 더불어 감정에도 쉽게 동요합니다. 특히 분노는 치명적일 수 있습니다.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세요. 제가 돕겠습니다.” 파천은 차고 시원한 기운이 외부로부터 몸 안으로 파고 들어옴을 느꼈다. 실제로도 피부를 뚫고 몸 안으로 유입되고 있었음에도 그는 전혀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무연의 수많은 가지들이 파천의 전신을 촘촘하게 그리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점차 파천은 전신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른다는 느낌에 당황하는 빛을 띠었다. 

 “내 몸이 왜, 왜 이러는 거요?” “프리즈마의 움직임을 느껴 보십시오.” 파천의 다급한 외침에도 무연은 태연하기만 했다. 보이기는 해도 힘의 실체가 느껴지지는 않는다. 보이는 것 역시나 확연하긴 했지만 마음에 비춰지는 모습일 뿐 눈에 보이는 건 아니었다.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럴 테지요. 이치적으로는 갓 태어난 아이에게 뜀박질을 시킴과 다름없지요. 유감스럽게도 파천 님에게는 현 상황을 단계적으로 타개해 나갈 시간적 여유가 없습니다. 제가 도와 드릴 테니 더욱 집중해 보세요. 무엇이든 좋습니다.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걸 떠올려 보십시오. 도움이 될 겁니다.” ‘가장 소중한 것이라면...... 내게 가장 소중한 건 설란과 두 아이다. 그들이 보고...... 싶다.’ 그들을 떠올리자니 심한 갈증이 일어나는 걸 느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움의 파고가 높아갈수록 의지의 견고함도 더해갔다. 

 파천은 너무도 그들이 보고 싶었다. 따뜻한 체온을 다시 한 번 느껴 보고 싶었다. 눈을 맞추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결국 파천의 생각은 현 상황을 초래한 루시퍼에게로 이어졌고 이는 파천으로 하여금 분노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게 했다. 

 수하들의 비참했던 죽음은 그를 격정 가운데로 몰고 갔다. 그 순간 프리즈마가 거세게 물결치는 걸 파천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너무도 거친 움직임에 스스로도 불안할 지경이었다. 살갗을 뚫고 나올 것만 같은 불안감은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이었지만 파천은 그런 걸 사리 있게 분별할 지식은 갖추고 있지 못했다.

 “분노를 잠재우세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 때로 전투력을 배가시켜 주기도 하지만 결국은 스스로를 망치게 합니다. 특히 파천 님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지요.” 무연의 말에 파천은 끝을 모르고 치솟아 오르는 감정의 고삐를 한껏 비틀어 쥐었다. 금세 식지는 않았지만 다소 차분해져 갔다.

 “알고 보면 이 또한 마음을 다스리는 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의지는 결국 마음에 터를 잡고 있으니 시작은 그곳으로부터입니다.

 마음은 욕망의 싹이 움트는 근원이기도 하며 욕망을 다스릴 의지가 피어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한 존재의 의지는 비록 전체 우주에 비하면 미미한 것이나 순수한 의지는 우주를 한 순간에 관통할 정도로 강한 것입니다.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면 프리즈마에 대해 더 이상 정진할 이유가 없습니다. 역사상 완전자들의 공통점은 마음을 온전히 굴복시켰다는 것일 테지요. 그들은 인간으로서 완전자에 들었고, 그런 그들을 모든 영자들이 스승이라고 불렀습니다.

 메타트론도 루시퍼도 그런 그들을 유혹하거나 무릎꿇리지 못했습니다. 마음은 신에게 이르는 유일한 밧줄입니다. 마음은 우주를 닮아있지요. 이 안에서 모든 모양을 만들어 운명을 결정하게 됩니다. 모든 조화가 이 안에서 시작되고 끝을 맺습니다.” 뜬구름 잡는 소리라고 일축할 수만은 없었다. 끊임없는 반복. 파천이 지금껏 수없이 들어 왔던 말들은 하나같이 닮은꼴들이었다. 각기 다른 사람들에게서 들었고, 다른 책들에서 보았고, 다른 상황 가운데서 깨달았던 것들이지만 그 뜻은 하나로 이어지고 있었다.

 ‘마음에서 시작해서 마음에서 마친다. 마음은 우주다. 마음은 신에게 이르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 결국 모든 인간들은, 영자들은 신이 되기 위한 과정 중에 있다. 이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며 무수한 세월을 통해 인고의 노력으로 점차 닮아 가는 것이다.

 마음에 신이 있고 마음에 길이 있으며 그 가운데 참된 내가 있다. 눈을 떠야 한다. 시간도 공간도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마음속에 있다. 처음에 굳게 닫혀 있어 보이지 않으나 분명히 실재하는 것을 움켜쥐어야 한다. 그 길에 이르기 위해서는 먼저...... 비워야 한다. 비울때 그 안에 담긴 빛나는 순수한 결정체를 얻을 수 있으며, 그 순간 완전의 길에 좀더 가깝게 이르게 된다.’ 파천은 완전히 비운다는 것이 가능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일월교의 난을 평정하고 태산에 칩거한 십 년의 세월 동안 그는 스스로 꽤나 성장했다고 여겼으며 어떤 어려움에도 흔들리지 않을 부동심에 한 걸음 다가섰다 여겼다.

 그러나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친인들의 고통과 불행과 죽음 앞에 그는 분노하는 자신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만 했다. 

 ‘비움과 채움은 같은 것이다. 충만하게 하든 공허하게 하든 같은 결과에 이른다. 그러나 채우기가 더 힘이 든다. 그래서 방법은 비우는 것뿐이다.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기 위한 첫발은 잘 보고, 잘 알고, 잘 판단하는 것이다. 

 마음이란 것도 결국 나란 놈이다. 멀리서 날 바라볼 수 있다면, 객관적으로 날 평가할 수 있다면, 그르고 바른 것을 스스로 분별하고 비울 것은 비우고 채울 것은 채울 수 있다면, 마음이란 놈은 점차로 극복된다. 그렇지만...... 그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파천의 이런 생각은 모든 영자들이 고민하는 것이기도 했다. 완전에 이르기 위한 여정은 대다수의 영자들에게 불가능한 것으로,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곳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래서 실망하고 좌절하다 포기하는 자들도 속출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야 하는 길. 이것이 현존재들의 숙명이었다.

 ‘현생을 살아갈 때는 그리 절실하지 않다. 이는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죽어 영자가 되면, 영계에 속한 자가 되어 자신이 걸어가야 할 길을 깨닫게 되면 스스로 처절한 고통으로 짐을 지운다.

 감내하지 못할 무게. 마계에 스스로 속하길 원한 자딜은 이 길을 포기한 자들이다. 과연 이들뿐일까? 대다수의 영자들 또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시간을 소모하고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지금 얻어야 할 것은 이런 완전자에 이르는 건 아니다. 프리즈마의 성질이 그러하기에 이를 위한 수련의 일환일 따름이다. 더 이상은 사실 욕심이다.’ 파천은 끝없는 생각들의 이어짐 가운데 갈팡질팡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스스로의 무력함에 그는 차라리 개운함을 느꼈다.

 ‘그래, 새롭게 시작하는 거다. 지금까지 내가 지녔던 모든 걸 벗어 버리고 벌거숭이로 뛰쳐나가는 거야. 가장 뒤쳐지도 약하고 모자란 지금의 나를 인정하자. 그러나 내 안에 이 모든 상황을 한순간에 역전시킬 거대한 가능성이 숨쉬고 있음을 신뢰하자.

 마음속에 모든 게 있다고 했다. 완전자들이 마지막으로 현생을 살아야 했던 데에는, 가장 연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야 했던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이런 점에서 나는 다른 뛰어난 영자들보다 오히려 더 높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래 믿자. 날 믿자. 이제 잃을 것도 없으니 내 집착을 끊어버리면 무에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자 홀가분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파천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파천은 자신의 변화를 A처 알아채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무연의 말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이제부터 서서히 외부의 프리즈마를 유입시켜 보세요. 느낌을 가질 수 없다 해도 확신을 지니고 몸 안을 가득 채운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서로 만나 뒤섞여 자연스레 움직임을 보일 때까지 중단 없이 시행하십시오. 끝없는 인내야말로 원하는 것을 얻게 해줍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파천은 그의 지시대로 충실히 따랐다. 변화는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무연의 말대로 확신을 지녀갔다.

 파천은 지치지도 않고 그 자리에 부동의 자세로 좌정하고 있었다. 시간의 흐름도 잊고 집중해 있는 그의 열심을 깨트릴 건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런 그와 무연을 조용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너울과 각시 그리고 깨끗한 얼굴을 지닌 젊고 수려한 용모의 소유자였다. 너울이 옆에 있는 자를 보며 공손하게 말했다.

 “어떻게 보십니까? 파천이 과연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을까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용모만큼이나 깨끗한 음성이었다. 푸른 의복을 걸친 무한계의 수련자였다. 너울이 입을 열었다.

 “짐작이 가지 않는 녀석입니다.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런가 하면 또 다른 모습을 보이니 말입니다.” “그럴테지요. 원래가 그런 분이십니다. 거칠고 투박한 듯 보이지만 사실 그 누구보다 깨끗하고 순수한 심정을 지니신 분입니다. 장점은 뭐니 뭐니 해도 한번 결정하며 절대로 굽히지 않을 정도로 의지가 강하다는 점일 겁니다. 아마도 이런 점 때문에 선택된 것이겠지요.” “파천의 전생은 비밀계약의 당사자이신 아난다 님도 모르시는 겁니까?” “네, 저도 모릅니다. 사실 이 일에 제가 동참하게 된 것이나 일곱 영자 중에 포함된 것도 제안하신 분의 뜻에 공감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그 분의 예측은 하나도 어긋나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졌지요. 우리들의 임무는 무한계의 끝까지 저 분을 보호하는 일입니다. 그 이후 어떻게 될지는 저로서도 알 수가 없습니다.” “흐음...... 도무지 저는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아난다 님 같은 무한계의 이름난 수련자를 단지 조력자로 삼아야 할 만큼 파천의 가치가 대단한 것인지. 그리고 그 제안자가 누구길래 천상계의 천주들과 선계의 노군까지 동조하게 만드는 건지. 도무지 모를 일입니다.” 아난다는 싱그러운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아난다.

 이 이름을 모르는 영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무한계가 아무리 넓고 영자들의 수가 많다지만 그들 가운데 특별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곧 수련자들이었다. 

 수련자들의 출신은 다양했다. 천상계의 아라한이나 귀계의 귀령, 선계의 선인, 무한계의 강성한 일곱 부족, 심지어 마계 출신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이들은 그 어디에도 귀속되어 있지 않으며 마계를 제외한 각 차원계를 자유롭게 거닌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고급영자들이며, 이름난 현자들이며 누구보다 강하다 할 수 있었다. 이런 특별한 지위는 다른 영자들이 그렇게 인정함으로 자연스레 획득된 것이었다. 마계를 떠났던 천마, 즉 라미레스 역시나 파천에게 오기 전까지는 수련자의 신분이기도 했다.

 “아난다 님.” 각시가 아난다를 빤히 올려다보며 운을 뗀다.

 “말씀하세요.” “비밀계약의 당사자들인 나머지 다섯 영자들은 누구인지요?” “저도 모릅니다. 라미레스 님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만 알고 있습니다. 그 이외에는......” 사실 아난다는 알고 있어도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모르는 건 사실이었다.

 “하여간 이번 여정이 그리 힘들지는 않을 것 같군요. 아난다 님이나 라미레스 님 같은 고급영자들이 함께 수행해 주신다면 한결 쉽겠지요.” 너울의 속단에 아난다는 고개를 천천히 가로 저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 쪽의 준비가 철저하듯이 저쪽의 준비 또한 대단하겠지요. 게다가 우리는 훤히 드러나 있지만 어둠 속에 숨어 있는 적들은 알 수가 없습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저와 라미레스 님을 제외하고는 누가 이 일에 관련된 영자들인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점입니다. 이런 이유로 무리 중에 적이 포함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적아를 구분치 못하니 혼란이 발생할 여지가 큰 것이지요.” “아...... 생각해 보니 그런 점이 있었군요. 그건 그렇고 천상계에서 파견 나온 아라한들이 곧 도착할 거라더군요. 제 판단에는 그들과 우리 선계의 선인들과 일곱별의 영자님들이 모두 합세한다면 웬만한 적들은 지레 겁을 집어먹을 것입니다. 파천이 짐이 된다 하더라도 이번 여정은 반드시 성공할 것입니다. 꼭 그래야만 합니다.” “그렇게 되어야겠지요.” 너울의 확신에 찬 소리에도 불구하고 아난다의 얼굴에는 변화가 없었다. 그의 시선은 단 한순간도 파천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시작이 그랬듯이 결국 열쇠는 파천 님과 이어져 있습니다. 마계의 준동이 반란으로 끝날지 혁명으로 기억될지는 말입니다.” “혁명이라......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너울은 아난다의 말에 묘한 이질감을 느끼고 반발했다. 각시는 그런 너울을 보며 가볍게 웃었다.

 “역사는 승자에게 관대한 편이야. 더군다나 이번 마계의 시도는 단지 영계에만 국한된 게 아니잖아. 신과 기존 질서에 대한 그들의 전면적인 부정이 어떤 식으로든 결실을 맺게 된다면...... 혁명이라고 불릴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반대편에 서 있는 자들은 남아 있을 곳이 없게 되고...... 우주는 그들 중심으로 재편되겠지. 저울질하는 자들은 무게감이 있는 곳에 설 것이야. 승부는 더 빠르게 결정나겠지.” “설마......” “최선을 다해 봐야지요. 냉정하게 따져 보면 천궁이 끝까지 개입을 하지 않을 경우 우리가 이길 확률은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절망적인 아난다의 어조에 너울은 강하게 반박했다.

 “그건 우리 쪽의 분열 때문이지 않습니까? 수습되기만 한다면 마계가 감히 이런 시도를 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럴지도 모르지만 그 분열의 중심에 메타트론이 있으니 쉽지 않은 일이지요.” “으음.” 너울은 입을 꾹 다물어 버리고 만다.

 무연의 가지들을 몸 안에 받아들인 파천은 가사 상태에 들어 있는 중이었다. 그렇지만 그의 의식만은 그 어느 때보다도 명료하고 뚜렷했다. 흐름은 부단히 이어지며 수많은 양상을 낳고 있었다.

 그는 의식이 마련한 이공간에 실재하는 듯한 착각 속에서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의지가 만들어낸 환상세계는 실제에서 벌어짐직한 다양한 전투의 유형을 미리 겪어 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무연의 도움이 빚어낸 결과였다.

 그를 지켜보고 있는 영자들고 파천이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이 구체적으로 어떠한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실전에서 어느 정도의 도움이 될지도 판단할 수 없었다. 그들이 알고 있는 건 이 모든 것이 미리 안배되어 있었다는 것과 파천을 어느 방향으로든 변모시킬 것이라는 점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아난다의 말은 의미심장했다.

 “바닥까지 추락한 이는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위로 향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는 다시 힘을 내 위로 오르거나 그 자리에 가만히 있거나...... 겠지요. 파천 님은 목표에 대한 성취욕이 대단하신 분. 저 분의 변화를 기대해 봐도 좋을 듯 싶군요.”

 뜰의 중심부는 고탑이 원을 그리듯 빙 둘러 서 있다. 그 사이로는 원래 넓은 터가 자리 잡았었다. 원래 비어 있던 광장에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작고 나지막한 단층의 건물들이 빼곡이 들어차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가득 메우고 말아 공터는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변했다.

 마주보고 있거나 나란히 서 있는 단층 건물들은 특이한 다른 고탑들에 비해 특징 없이 단조로운 형태로 지어졌다. 그러나 그 용도만큼은 결코 특징 없다 할 수 없었으니.

 처음에는 영계의 각지를 여행하는 나그네를 위한 휴식 공간으로 가치를 부여받았다. 지금도 물론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는 있었지만 다른 목적에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뜰의 심장부를 차지하고 있는 건 의외로 주점들이었다.

 거리엔 꽤나 많은 영자들이 오가고 있다. 오늘따라 평보보다 뜰에 더 많은 영자들이 모여들고 있으며, 그들 모두가 더욱 부산하게 움직이고들 있었다.

 그런 동태는 이곳에 오랜 기간 상주하던 영자들이 아니고서는 쉽게 구분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오고가는 영자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는 두 인물이 있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흐르는 것 같은데?” 밴살렛은 뜰의 최근 분위기가 예전과 달라진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다지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아무리 따져 보아도 자신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라치오, 너 정말 이 일에 관여할 생각이었냐? 농담이 아니었어?” “난...... 두 번 말하지 않는다. 내키지 않으면 나서지 않아도 돼.” 퉁명스런 라치오의 중얼거림은 밴살렛의 속을 뒤집어 놓기에 족했다.

 “그게 나한테 할 소리냐? 집어 치워. 만약 내가 위험한 일을 도모한다면 넌 손놓고 가만있을 수 있어? 우리는 친구다. 솔직히 말리고 싶지만 네가 한다면 나도 한다. 그러니 다시는 그런 소리 마라.” 라치오는 밴살렛이 유난히 크게 강조하는 ‘친구’라는 말에 그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럼 따라와.” 짧게 뱉어내고는 등을 보인 채 앞서 걸어가는 라치오.

 그런 그의 등 뒤에서 밴살렛은 한숨을 푹 내쉰다. 고맙다느니, 진정 우리는 친구라느니 따위의 말을 기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냉정 일변도인 라치오의 태도는 매번 겪을 때마다 할 말을 잃게 한다. 

 “하긴 누가 널 말리겠어.” 리치오의 뒤를 따르는 밴살렛은 지금 편한 심정일 수 없었다. 이게 어디 보통 일이던가! 이번만은 말려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은 가득 차 있었다. 본능적인 위험 신소가 번뜩이며 경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도 묵묵히 뒤를 따르고 있었고 그런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했다. 

 리치오와 밴살렛이 들어선 곳은 주점이었다. 술을 마시는 게 목적은 아니다. 두 인물은 탁자에 마주앉아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주점 안은 영자들이 내뿜는 긴장감과 열기로 가득했다. 그들은 늘상 웃고 떠들고 마시고 있었지만 예전과는 어딘가 다른 상이한 모습들을 보였다. 

 사람들이 술을 마시는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영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역시 기뻐할 일이 생기거나 슬픈 일을 당할 때, 진지한 대화가 필요할 때, 그도 아니면 새로운 누군가를 사귀기 위해서 술을 마신다.

 영자들이 마시는 술은 단 하나뿐이었다. 영계 어디를 가도 술은 이것 뿐이다. 호릅나무의 뿌리 중에서도 가장 끝 부분만을 잘라서 즙을 내고 오랜 기간 동안 숙성시킨 술로 ‘망각의 기쁨’이란 의미를 담아 ‘부르’라고 칭한다.

 영자들은 아무것도 먹지 않고서도 살 수 있다. 부르는 영자들 중 일부만이 마신다. 부르를 마신다는 의미는 일부 시각에서 완전자로의 수행을 포기한 것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주점이 부르를 마시는 장소라는 점에서 선계의 뜰, 그것도 중심부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구석이 많았다. 

 오늘도 변함없이 주점에는 영자들의 시름이 주렁주렁 익어 가고 있었다. 밴살렛은 라치오가 손에 들고 오는 부르를 쳐다보며 예전 무한계의 중부권을 떠들썩하게 했던 수련자, 카포의 말을 상기했다. 글고 조금 큰 소리로 주변 영자들이 들을 수 있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살을 도려내고 피를 짜내어 하루하루 죽어 가는 자들이 있다. 전사와 사냥꾼 그리고 술사들이다. 그들은 부르를 마시며 즐거워하고 있지만 머릿속은 매일 썩어 들어가고 매일 도려내지고 있다. 

 퇴보는 그들의 유일한 자랑거리이며, 포악은 스스로를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완전자가 되고자 하는 자라면, 가능한 한 그들을 만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며, 어울리는 건 꿈에서라도 선택에서 제외하라.” 밴살렛의 중얼거림에 앞에 앉으려던 라치오는 흠칫했다.

 탕 밴살렛 앞에 부르를 소리나게 내려놓는 라치오의 표정이 찡그러졌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카포이며, 습관처럼 ‘언젠가는 그 잘난 놈의 머리통을 열어 보겠다.’고 말해 왔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라치오의 눈마저 곱지 않은 표정에 부합했다. 뜬금없이 왜 그따위 위인이 생각없이 지껄였던 말을 따라서 주절거리냐는 질책 어린 시선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 말야...... 바른 말이지.” 밴살렛은 부르의 쌉쌀한 맛을 즐기며 입라고 흘러내린 술을 손등으로 쓱 문질러 닦았다. 바로 그때 밴살렛의 뒤에서 큰 소리가 울려나왔다.

 “정신 나간 놈! 제 놈도 주점에서 주둥이를 열어 부르를 들이키는 주제에 그따위 말을 잘도 지껄이는구나.” 밴살렛은 소리가 들려 온 곳을 향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 사로잡힌 자를 확인하고 나서야 천천히 긴장을 풀어 간다.

 “너였군, 붐바. 나도 카포를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가 한 말만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야.” 붐바는 큰 몸을 일으켜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라치오와 밴살렛쪽으로 몸을 굽혀 털이 수북한 팔을 탁자에 올려놓으며 히쭉 웃었다.

 “밴살렛, 사냥을 접더니 고상해졌구나. 고매하신 수련자들이 지껄이는 소리를 흉내내는 걸 보니 말야.” 밴살렛의 손과 입은 그런 와중에도 쉬지 않고 부르를 몸 안에 채워갔다. 두 영자간의 묘한 긴장감을 모두는 흥미롭게 관찰하고 있었다. 이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밴살렛은 뒤로 한껏 몸을 젖히며 엉뚱한 소리들을 해댔다.

 “역시 이 맛은 일품이라니까. 끊을 수 없는 유혹이 깃들었으니 당장 소멸한다 해도 어찌 그 손길을 마다하리요. 카포는 어찌 보면 참으로 불행한 위인이야. 그렇지 않나, 붐바?” 밴살렛의 슬쩍 치켜뜨는 눈매가 순간 매섭게 번득였다. 붐바는 처음의 기세등등하던 태도를 약간 누그러뜨렸지만 자기 체면은 여전히 세우고 싶은 것 같았다.

 “라치오, 밴살렛. 너희들이 여길 떠나지 않고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건 좋은데...... 한 가지 충고하지. 너희가 그동안 뜰의 영자들 사이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던 건 순전히 운이 좋았기 때문이야.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제 너희들 시대는 갔어. 그러니 이런 점을 인정하고 아무 일에나 끼어들 생각은 버리는 게 좋아.

 너희들이 아무리 용기가 있고 경험이 많은 노련한 전사와 사냥꾼들이었다지만 우리는 숫자가 많아. 이미 이번 일은 존경하는 슈트레님이 맡으신 일이다. 또한 남부권 최대의 전사단인 바이롬이 선점을 선언했다는 것도 충고로 말해 두지. 주제를 알면 신상에 이로울 거야.” 라치오는 바이롬이라는 말에 흠칫했다. 약간은 신중한 태도로 붐바에게 물었다.

 “바이롬이...... 나섰다는 게 사실인가?” “아직 몰랐었나? 아, 그러고 보니 예전에 너 또한 바이롬에 몸담은 적이 있었지? 그럼 누구보다 잘 알겠구나, 그들의 무서움을.” “뭐, 뭐야?” “바이롬은 지금 외부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을 텐데...... 이상하군. 아직 전쟁은 끝나지 않았고, 그들의 적이 그리 만만한 게 아닌데도 다른 곳에 눈을 돌린다는 건가? 더군다나 파견 나간 핵심 전력도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걸로 아는데 말야.

 아무리 생각해도 네 말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어. 그리고 말야, 바이롬은 네 생각처럼 그리 대단한 전사단이 아니다. 남부권에서야 큰 소리를 치지만 당장 중부권에 갖다 놓으면 하루아침에 해체될 정도로 약해.” 밴살렛이 라치오의 말에 맞장구를 치고 나선다.

 “생각해 보니 그렇네. 그럼 뭐야? 이 덩치만 큰 머리 빈 놈이 우리 둘을 농락하며, 그것도 모자라 공갈 내지는 협박을 하고 있었다는 말이냐?” “너, 너 말 다했냐?” “붐바!” 착 가라앉은 라치오의 음성은 듣기에 따라 섬뜩하게 느껴졌다. 붐바는 순간 자신이 왜 이 골치 아픈 놈들 앞에 자신있게 나섰나, 후회막급이었다.

 “저기 흥미로운 시선으로 우릴 주시하고 있는 친구들을 믿는 거라면 넌 지금 착각을 하고 있는 거다. 아무도 네 위기를 도와 주지 않을 거야. 적어도 나 라치오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자들이라면 말야. 어떤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냄새 나는 몸뚱이를 좀 치워주지 않겠나?” 붐바는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명백한 경고임을 잘 알고 있었다. 

 하루 전이었다면 그는 결코 지금과 같은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주인으로 섬기는 슈트레가 많은 수의 전사들을 끌어들였다는 것 때문에 한껏 어깨에 힘이 들어간 지금의 상태가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는 이대로 물러서면 자신의 체면이 상당히 손상된다는 데에 생각이 머물렀다. 그렇지만 솔직하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뒤로 물러서고 싶은 맘이 더 간절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의 위기를 구해주는 손길이 있었다.

 “별일 아닌 것 같고도 재밌게들 노는군. 도무지 이해들을 못하겠어. 인간계의 꼬마 한 놈이 겨우 생명만 부지한 채 기어들어 온 일로 왜 이리 들썩대는 걸까? 모두들 지나치게 흥분하고 있어. 뭔가 변화를 기대한다면 너무 어리석은 소망이 아닐지......” 라치오는 여전히 태연했지만 밴살렛의 이마엔 한껏 주름이 잡혀갔다.

 “라치오, 그렇지 않은가? 마계가 인간계를 작살낸 건 이미 기정사실이고...... 머지 않아 영계 통일에 나설 거라는 건 바보가 아닌 이상에는 누구나 짐작하고 있는 일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이 일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이상한 일이지 않은가? 하긴 희망을 갖기엔 지나치게 썩었는지도 모르지만......하나로 힘을 합해도 위기를 타개할지 의문인데 이해에 얽매여 당장의 위급함을 외면하고들 있으니......

 지금 너희들 또한 마찬가지야. 이 격변의 시기에 자신들의 욕망이나 채우려고 혈안들이 되어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다. 차라리 도망을 가는 게 현명하지. 하긴 도망갈 데도 없지만서도......” 밴살렛은 허파에 바람이 차도록 마음껏 웃었다. 그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연다.

 “너 또한 마찬가지면서 잘난척 하지 마라. 네가 한때나마 수련자 뱅골의 길잡이 노릇을 했지만 지금은 어떠냐! 그때 모아들인 루딘을 모두 탕진하고 떠돌이로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것 또한 다시 기회를 잡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부정할 수 있느냐, 루카!” 루카는 의외로 순순히 긍정하고 나섰다.

 “그래 맞아, 네 말대로다. 난 지금 슈트레 님의 길잡이로 계약된 상태고, 언젠가는 다시 수련자의 길잡이가 되고 싶은 바람이 있다. 그런데 말야. 이런 생각이 들더군. 마계의 침략이 시작되고 나면 이 모든 게 무슨 소용인가 하고 말야.

 중부권을 돌아보면서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지. 중부권에 뻗어있는 마계의 손길은 시기가 그리 멀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고 있거든. 벌써 발 빠른 놈들은 마계 편에 서기로 결정하고 있는 듯한 눈치고. 

 이런 시점에 그 꼬마를 통해 무언가를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치들이나 혼란의 와중에 제 잇속을 챙기려는 놈들이나 매 한가지지. 

 누가 누굴 나무라겠어?

 라치오, 네가 품고 있는 뜻을 내 맞춰 볼까. 넌 지난날 손상당한 명에를 보상받고 싶어한다. 너는 사실 바이롬에 몸담고 있기에는 지나치게 야심이 강했고 실력이 출중했지. 그럼에도 바이롬이 널 제명함으로써 넌 전사단에 쫓겨나 홀로 떠도는 처량한 신세로 전락해버렸다. 넌 그들을 비롯해 널 조롱하고 비웃은 자들을 심판하고 싶겠지. 

 지금까지 힘이 없어 변방이나 마찬가지인 이곳에 정착해 근근히 버텨나가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겠지만 이제 네가 원하던 그때가 온거야. 네가 원하는 건 혼란이지 않던가? 적아가 구분되지 않는 혼란이야말로 네 명성을 새롭게 부각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테니 말야. 내 말이 틀렸나?” 루카는 양 갈래로 땋아 내린 은발의 끝을 슬쩍 손끝으로 비틀었다. 그는 라치오의 눈을 뚫어질 듯 노려보며 자신의 생각을 확인하려 했다. 그렇지만 그의 기대는 쓸데없는 짓이었다. 라치오는 여전히 태연한 신색으로 입술 끝에 부르를 살짝 축였을 뿐이었다.

 “아주 재미있는 추측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내가 원하는 건 단순한 혼란이 아니다.” 주점 안에 있던 사십여 영자들의 시선이 일제히 라치오의 입으로 집중되었다. 심지어 밴살렛까지 친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내가 원하는 건 혼란이 아니라...... 혁명이다.” “혁명?” 여기저기서 소란스럽게 웅성거리는 모습들을 무시하며 라치오는 제 말을 이어 갔다. 

 “바이롬에서 제명당한 건 전사로서의 명예를 실추시켰기에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일이었다. 그 동안 숨죽이고 있었던 건 힘이 없어서라기보다는 내 흥미를 끌 만큼 특별한 일이 없엇기 때문이고.” “네가 말하는 혁명이란 게 뭐냐?” “내가 그것까지 네게 시시콜콜 말해 줘야 하나? 뱅골의 길잡이, 너는 자격이 없다. 뱅골이라면 몰라도 말야.” “감히......” “슈트레가 무슨 생각으로 전사들을 끌어 모으는지는 모르나 조심하는 게 좋을 거야. 정확한 정보통에 의하면 선계와 천상계에서 선별된 선발대가 네가 우습게 여기는 그 꼬마를 보호한다고 들었다. 포장만 그럴싸한 전사들로는 원하는 걸 얻을 수는 없을 거야. 

 더군다나 너희들이 원하는 게 잠자는 대지의 유물이라면 더더욱이나 그렇지. 또 모르지. 페나인 전투의 최후 생존자쯤 되는 전사들이라면 상황은 달라질 여지도 있겠어.” 루카는 라치오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적어도 저놈에게는 상당한 수의 동지들이 있고, 그들을 통해 비교적 정확한 정보들을 얻는 것으로 알고 있다. 선계와 천상계의 강자들이라면...... 힘에 벅찰지도...... 계획은 변경되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어차히 부딪쳐 봐야 알 수 있다. 미리 겁을 먹고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는 거야. 어차피 슈트레로서는 한계가 있다. 나는 그를 적절히 이용하면 그만이야.’ “이 근처의 주점들에만도 상당한 수의 전사들이 모여들고 있다. 물론 내 자신이 그들을 전사들로 인정하는 건 아냐. 어찌 보면 불쌍한 친구들이지. 힘없고 배경 없고 운도 따라주지 않으니 오죽 답답하겠는가? 하지만 말야, 지나친 욕심은 그들이 누리는 최소한의 권리마저 뺏어 갈 거다. 

 네 말대로 이미 판은 벌어졌다. 분홍빛 미래가 아니라 살육이 넘쳐나는 치열한 지옥 판이겠지만. 너희의 의도가 무엇이건간에 그리 쉽지는 않을 거야.” 라치오의 단정하는 듯한 말투에 몇몇 영자들의 표정이 급변했다. 

 밴살렛은 그런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그 순간 밴살렛은 자리에서 슬쩍 일어나더니 주점 밖으로 나간다. 그의 등 뒤를 루카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슈트레에게 가서 일러라. 꼬리를 일찍 드러내면 잠자는 대지의 유물은커녕 너희들의 왕을 맞아들이지도 못하고 고꾸라질 거라고.”  라치오는 잔에 남아 있던 절반가량의 부르를 단숨에 들이키고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에게 루카의 빠른 질문이 이어졌다.

 “무슨 말인가? 제왕의 검은 알겠는데...... 우리들의 왕이라니?” “설마 몰라서 내게 되묻는 건가? 한 가지 충고하마. 너희들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야심을 품은 자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지. 천상계와 선계의 힘은 약화된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며 움츠리고 있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내 생각에 지금의 선발대는 진정한 선발대로 볼 수도 없을 거야. 아마도 적들을 가려내기 위한 미끼 정도겠지. 잊지 말라. 무한계가 예전에 누구의 지배를 받았던가를. 그들은 너희들보다 치밀하고 또한 강하다. 그걸 잊어버리는 순간 어리석은 자들의 종말은 소리없이 찾아오게 될 테니. 하하하하.” 라치오마저 주점 밖으로 사라졌다. 루카는 자신만의 생각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었다. 그런 그의 중심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가 출입구쪽에서 들렸다. 

 “슈트레 님의 초청으로 오신 분들에게 알리오. 지금 즉시 입궁하라는 말씀이 계셨소이다.” 그 말에 십여 명의 영자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 중에는 루카도 끼어 있었다. 

 너울과 각시 그리고 아난다가 한자리에 앉아 있다.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여러 가지 얘기들을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결국은 중부권의 판도가 이번 일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겠군요.” 너울의 말에 아난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중부권은 예로부터 영자들의 첨예한 욕망이 가장 치열하게 대립하던 곳입니다. 분쟁은 도를 지나쳐 서로의 영역을 인정하지 않는 선으로까지 치달았고, 결국 일치를 끌어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미세하게나마 살아 있던 천상계의 영향력도 상당히 약화되었고, 그 틈을 타 마계의 끄나풀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나 무엇이 쭉정이고 알곡인지를 가려낼 수도 없는 상황이니......” “흐음, 심각하군요. 예전에 수행을 나갔을 때만 해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잠자는 대지의 유물이 그 정도로 강한 유혹을 줄지는...... 조금 뜻밖이군요. ” “단지 그것만이 이유는 아닐 겁니다. 그건 어쩌면 핑계에 불과하겠지요. 드러나지도 않는 제왕을 검 따위로 생존을 걸고 싸울정도로 유치한 자들이 아니니까요.” “그렇지만 대다수 영자들은 중부권의 혼란이 그것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지 않습니까. 너도 나도 보물을 차지하려고 눈들이 벌게져 있으니 생각해 보면 참 한심한 일이지요. 아무리 힘을 숭상하는 시대가 되었다지만 도에 지나친 감이 많습니다. 정확한 출처도 모르면서 소문에 따라 움직여가는 자들을 보면...... 세월의 무게가 아무짝에도 쓸모없지 않은가라는 회의감마저 듭니다.” “욕망은 그처럼 제어하기가 쉽지 않은 일이지요. 제왕의 검이 지닌 유혹은 심지어 수련자들이나 천상계 천주들에게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그런 점에서 선계가 신편을 선뜻 파천에게 내어 주었다는 건 저로서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부분입니다.”  “아니 그 말씀은 그럼...... 신편이 잠자는 대지의 유물 중 하나라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너울은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에 무척이나 놀라고 있었다.

 “아직 모르셨나 보군요. 네, 선계의 신편은 잠자는 대지의 유물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게 전설이 아니라...... 사실이라는 ......” “전부는 아니겠지만 일정 부분은 사실에 기초하고 있겠지요.” 너울이 받은 심적인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파천의 팔 안으로 들어간 신편이 모든 영자들이 그렇게도 가지길 원하는 것 중 하나라는 사실과 그런 보물들이 실재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무한계의 사정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 앞을 막아설지 지금으로서는 짐작조차 가능하지 않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자들이 적이 되어 나타난다 해도 전혀 놀랄 일은 아닐 겁니다.” 이때 각시가 입을 열었다.

 “차라리 천상계와 선계의 대규모 최정예를 선발해 이번 일을 수행하게 하면 별 문제가 없을 듯한데요.” “과연 그럴까요?” 아난다의 의문 섞인 되물음에 마음의 동요를 진정시킨 너울이 대신 답했다. 

 “그건 안 될 소리야. 무한계는 자유지역이다. 대규모 병력이 투입된다면 무한계 전체가 반발하게 될 거고 그건 우리가 바라는 게 아냐. 몇몇 중부권의 영향력 있는 인물들 역시나 지금은 우리와 우호적인 관계에 있지만 그 순간 그들은 적으로 돌아설 것이다.” “제대로 보셨습니다.” 아난다는 너울의 진단에 동조했다.

 “이번 여정에 특별히 신경 써야 할 부분 중 하나가 그들 간의 분쟁에 어떤 식으로든 개입해선 안 된다는 점입니다. 혹시 불순한 의도가 있는 자들이라도 먼저 이빨을 드러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지요. 

 세력간의 미묘한 흐름을 잘 읽고 그에 따라 지혜롭게 대처해야 불필요한 사고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습니다. 두 분도 아시다시피 무한계에는 수많은 부족이 거주하고 있고 그들은 저마다 다른 이상을 표방합니다. 

 특히 중부권은 전사들의 각축장이 된 지 오래입니다. 전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자들이 이런 기회를 놓치려 하지는 않을 겁니다.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우리들 일행에 대한 도발이 전사로서의 명성을 높여 준다고 여기는 자들도 분명히 나올 테니 말이죠.” “그 말씀은 우리 앞을 막아선다고 해서 반드시 적은 아니라는...... 그런 뜻도 되겠네요.” 이래저래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전사들의 속성상 아무런 의도없이 싸움을 걸어올 수도 있다. 대다수의 영자들이 그러하듯 그들 역시나 완전자로 이르는 여정을 포기한 지 오래다.

 그들의 관심은 오직 하나. 최고의 강자가 되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이런 호기를 마다할 리 없었다. 수련자까지 포함된 천상계와 선계의 특별한 일행에 대해 전사의 업을 진 자들이 이를 별 호기심없이 지나칠 리는 만무했다. 

 아무리 따져 보아도 어려운 일이었다. 더군다나 중부권의 치열한 전투를 매일같이 겪고 있는 전사들이라면 아무리 선계와 천상계의 선발대라 하더라도 곤란을 겪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여기다 조직적인 도발이 더해진다면 어떤 상황이 초래될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에 대한 대비책이 튼튼하게 잘 마련되어 있다 해도 돌발적인 변수는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셈이었다.

 “아난다 님.” “이번 여정에 특별히 포함시켰으면 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그라면 우리 일행에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혹시...... 들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곳 뜰에 유명한 여전사가 하나 있지요. 평소에는 아름답고 지혜로운 여인이지만 싸움에 임하면 그 누구보다 용맹스런 전사가 됩니다. 뿐만 아니라 무한계의 전체 지역의 세세한 부분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 길잡이로 삼아도 좋지요. 그녀는 또한 중부권에 동지가 많아 여러모로 도움이 될 겁니다.” “호, 그런 여전사가 있었습니까?” 아난다는 자신이 들어본 이름 중에 해당자가 있는지를 짚어 보았다. 쉽게 떠올라 주지 않았다.

 “춤추는 여전사 아레나입니다. 해세시의 꺼지지 않는 불꽃을 삼켜버린 대단한 여자지요.” 아난다는 그런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음을 상기해냈다.

 “지금 그녀가 여기에 있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흐음......” 아난다는 신중한 성격이었다. 사실상 이번 선발대를 조직하고 결성하는 일을 혼자 도맡아하다시피 하고 있는 그였기에 그 책임은 더 막중했다. 아무리 신원이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자라고 해도 재삼재사 따져 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너울 님, 그녀가 우리 일행에 동참하겠다고 했습니까?” “아직은 물어 보지 못했습니다. 아난다 님의 허락이 떨어지면 설득해 볼 생각입니다.” 아난다는 너울이 어떻게 그녀를 알게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선인과 전사가 친구가 되지 말란 법은 없지만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아난다의 의중을 눈치 챘음인가? 너울이 머리를 긁적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사실...... 이건 부끄러운 일이지만 예전에 제가 무한계 수행을 나갔을 때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습니다. 중부권을 넘어 막 북부권으로 넘어가던 지점이었는데 사냥꾼들의 급습을 받았지요. 그때 그녀가 나타나 도움을 주었습니다. 만약 그녀가 없었더라면 전 그때 죽음을 맞았을지도 모릅니다.” 영채소멸을 시키지 않고 죽음만을 내리는 사냥꾼은 악질적인 부류이다. 그들은 떼로 움직이며 홀로 움직이는 영자들을 노린다. 나그네가 지닌 모든 것을 갈취하고 나서 흔적 없이 죽이는 자들이다. 그리고 나서는 영체를 떠메고 어딘 가로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 봉변을 당하려는 시점에 그녀의 도움으로 위기를 모면했으니 그 고마움이 이만저만 큰 것이 아닐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두 영자들은 서로의 상이점에도 불구하고 쉽게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지금까지 그 인연을 이어오는 중이었다. 너울의 설명에 아난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좋습니다. 그녀가 허락한다면 우리 일행에 포함시키도록 하겠습니다. 그런 분이라면 되려 우리 쪽에서 부탁을 드려야 할 입장이군요.” 진정한 조력자라면 많으면 많을 수록 좋다. 그럼에도 일정 수로 한정시키는 건 그걸 가려내기가 쉽지 않기에 위험성을 줄이기 위함이었다.

 “감사합니다. 아마 그녀도 흔쾌히 허락할 것입니다. 모든 이들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는 일에 전사로서 동참할 수 있다는 건 영광된 일이기도 하지요. 특히 그녀는 호기심이 왕성하고 의기가 투철하니 이번 일에 아주 적임자입니다.” 너울은 뭐가 그리 신이 나는지 계속 떠들어댔다.

 아난다는 지그시 미소만 짓고 있을 따름이었고, 그런 둘을 바라보던 각시는 홀로 다른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녀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파천 님이 지금 겪고 있는 마지막 과정에 굳이 필요가 있을까요?” 급작스런 각시의 말은 너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너울은 각시에게 쏘아붙이듯 퉁명스레 말했다.

 “다 필요가 있으니 마련되었겠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툭 뱉어내는 너울의 말에는 별 소리 다한다는 각시에 대한 질책이 다분히 섞여 있었다. 이번 일을 계획하고 진행시켜 가는 배후에는 선계와 천상계의 최고 책임자들이 있었지만 실제로 입안하고 실행하는 주재자는 아난다였다. 그런 그를 앞에 두고 각시가 의문스런 표정으로 말하는 것이 너울은 겸연쩍었던 것이다.

 아난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친절히 답변했다.

 “도움이 될 수도, 시간만 낭비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파천님이 겪고 있는 혼란은 그를 더욱 성숙시킬 것이고, 가상의 수련은 그를 더욱 강하게 할 것입니다.

 실제로 흐른 시간과 그가 느끼는 시간과의 차이는 대단한 것이지요. 하루가 십 일이 될 수도 일년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동안 그가 어느 정도로 성장할지는 저로서도 장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나빠지지는 않겠지요.

 기다리면 알게 될 겁니다. 진정 그 분의 예측대로일지는......” 아난다의 마지막 말은 너울과 각시가 듣기에 매우 모호한 말이었다. 아난다가 지칭하는 '그'가 자신들이 생각하는 수호자를 가리킨다는 걸 어렴풋이 짐작했다. 아난다의 꿈꾸는 듯한 표정에 너울과 각시는 열려던 입을 다물고 말았다.

 페나인 전투의 여전사 아레나

 선계의 권역에 근접하는 뜰이라 그런지 수련관들도 품위가 있고 조용했다. 대낮부터 수련관에서 땀을 흘리고 있을 영자들은 드물 것이라 예상했던 밴살렛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에 압도되고 말았다.

 “이건 생각보다 더 대단한데?” 밴살렛의 눈앞을 가득 메우고 있는 건 수련을 하고 있는 영자들의 진지한 모습들이었다. 뜰의 특성상 각종의 이종족들이 뒤섞여 있었는데 그들의 태도에서는 하나같이 진지함만이 감돌았다. 

 안으로 깊숙이 접어들자 여러 영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백여 명은 넘음직한 영자들을 앞에 두고 큰 소리로 강연을 하고 있는 자를 밴살렛은 주의 깊게 살폈다.

 자신보다 머리통 하나는 더 클 듯한 체구에 선계 특유의 흰옷을 걸친 투박하게 생긴 위인이었다. 두 눈은 횃불처럼 빛나고 수염은 가슴을 뒤덮을 정도로 길고 탐스러웠다. 입을 열 때마다 수련관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큰 소리가 흘러나온다.

 밴살렛은 여기저기 앉아 강연을 경청하고 있는 무리들의 맨 뒷자리에 가서 앉았다.

 “지금까지 영계가 혼탁해진 것은 다른 누구를 탓할 바가 못 되요. 욕망을 다스리지 못한 개개인의 잘못이 빚어낸 일임을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요. 자신이 먼저 바로 서고, 남을 꾸짖어 바른 길로 인도하며, 부족한 자를 채워 주고, 약한 자를 보살피며 나아가 큰 뜻을 품고 정진하는 것이야말로 영자들의 본분일진데, 하나같이 사리사욕에 얽매어 본래의 자신을 잃어버리고 욕심을 채우는 데만 급급하니 지금과 같이 혼란한 시대가 도래한 것입니다.

 흔히들 선계와 천상계에 이 모든 책임을 전가하려는 자들도 보았습니다만 어찌 우리들의 무관심만이 잘못의 전부일 수 있겠소.

 물론 선계와 천상계가 제 수련에만 급급한 나머지 무한계나 귀계에 등한시해 왔음에 잘못이 없다고 말하고자 함은 아닙니다. 인간일 때는 몰라 정진을 하지 못하고 새롭게 영체를 입어 새 삶을 사는 우리들은 알면서도 하지 못하니 무엇이 더 어리석은 일입니까!

 수련은 영혼을 살찌우는 일이요, 욕망을 거세하여 장차는 완전자에 이르는 도리이건만 이를 망각하는 힘을 얻는 데만 급급하니 이 또한 잘못이징. 수련을 함이 어찌 남을 억압하는 데 쓰일 것이며, 힘이 있다 해서 어찌 제 욕심을 채우는 데 사용될 수 있겠소이까?

 마계가 영계를 하나로 통일하여 왕국을 세우겠다 선언하고 나선 지금에도 뜻있는 몇몇 영자들을 제외하고는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으니, 장차 닥칠 위난에 무엇으로 대처하겠습니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지금의 위기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고 말입니다. 모두들 자신들을 다시 한 번 돌아봐 주십시오. 우리들 모두 애초 목표는 하나였습니다. 우리 모두의 관심은 유일했습니다. 완전한 길로 들어서기 위해 용맹정진 하던 때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그 길이 험난하고 멀어 포기한 때를 다시 떠올려 보십시오. 악마는 다른 특정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옥은 바로 우리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니 세상이 악마가 날뛰는 지옥이 된 것이 아닌지요.

 다시 돌아가야 합니다. 처음의 모습으로, 순수한 열정만으로 자신을 다스려 가던 그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영력을 키움에 우선 순위를 두지 말고 영격을 세우고 완성시켜 가는 데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본계가 마련한 수련관에 드실 때는 새로운 비결이라도 얻지 않을까 하는 한 가닥 기대를 품고 오셨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런 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찬을 수 없을 겁니다. 힘을 지닌 자가 그 힘으로 의로운 일을 행함은 당연한 일입니다. 불의한 일을 하기 위해 힘을 얻고자 노력함은 자신만이 아니라 남까지 망치는 일입니다.” 이때다. 잠잠하던 무리 중에 하나가 일어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그 듣자니 너무 고리타분한 소리만 하는구려. 수련관을 잠시 이용함에 이런 번거로운 절차를 꼭 밟아야 하는 거요. 했던 얘기들을 재차 늘어놓는 게 지겹지도 않소? 사실 우리 중에 누가 그걸 모르는 이가 있소이까. 알지만 되지 않는데 어쩌란 말이요?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당신 말대로 사는지가 궁금해지는구려.” 온몸이 긴 털로 가득 덮여 있는 바이사인이었다. 성미가 급한 그들의 특성을 고려하면 지금까지 듣고 있었던 것만으로도 대단하다 칭찬해 줄만 했다.

 그의 말에 동조하는 듯 여겨지는 비웃음이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터져 나온다. 이와는 반대로 그를 비난하는 소리도 적지 않았다. 선인은 침착하게 바이사인에게 말했다.

 “귀하의 질책에 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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