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쿠사누스, 아난다의 새로운 정체 (105/111)

 쿠사누스, 아난다의 새로운 정체

 꿈결 속을 떠도는 바람의 혼백이라도 움켜지려는 것일까? 파천의 두 손이 연신 허공을 휘젓는다. 

 그를 지켜보는 이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구르는 심정이었다. 허옇게 뒤집혀 가는 눈자위. 거기서 흔들리는 그리움을 발견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고통에 자꾸만 작아지는 몸뚱이, 그것을 주체하지 못해 오돌오돌 떨고만 있는 파천. 그의 모습에서 무언가를 갈망하고 있음을 알아채는 이는 단 하나도 없었다. 과거를 끊어내지 못하고 새순을 돋아나게 하지 못한 연약한 생령이었다. 그렇지만 그 연약함 속에 강렬한 삶에의 열망을 일으키게 하는 특별한 연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영자들은 이 중에 아무도 없었다. 

 파천은 지금 너무도 생생히 보고 있었다. 선혈을 뿜어내며 여전히 갇혀 있는 기억의 파편들과 그로 인해 목 놓아 울고 있는 그리움, 쓰라린 아픔을.

 그리움의 편린들은 흘러내린 피눈물 가운데 번뜩이고, 일그러져 주름진 골마다 깊게 내려앉았다. 이제 과거의 아픈 기억들을 망각의 땅에 묻고 허허로운 허공 중에 뿌려 버려도 좋으련만. 그는 결코 놓지 않으려는 듯 더욱 세찬 몸부림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소리가 그래서 더욱 애처롭다. 

 “이대로......멈......출.......” 이제 다급해진 건 도나투스였다. 다른 선발대원들의 기대에 찬 간절한 시선쯤은 무시하고 배반해도 그만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자신이 전혀 소용됨이 없다면 또 모르지만 지금은 아닌 것이다. 분명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건져 올릴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자신에게 쥐어져 있다. 

 ‘아난다와 아레나를 이곳으로 공간이동 시킨다. 그 방법밖에는 없다.“ 도나투스는 아그립바가 속히 두 영자들의 위치를 파악해 내기만 기다렸다. 

 “아직 멀었느냐?” 아그립바를 채근함으로써 그 역시 어지간히 초조하다는 걸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이제 파천의 꿈틀거림도 멈췄고 간간이 흘려내던 신음소리마저 끊어졌다. 파천의 몸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하지도 못하는 그로서는 섣불리 처방을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으음.” 너울은 더 주먹을 쥐고서 쉴 새 없이 잔 경련을 일으켰다. 그는 속으로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죽지만 마라. 이대로,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지 않은가. 조금만 참아라, 조금만.......’ 파천의 생명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집착이 작은 기적을 이뤄 줄 것을 모두는 바랐다. 

 “드디어 찾았다!” 아그립바의 외침은 모두의 정신을 급하게 깨웠다. 모든 이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아그립바가 눈 앞쪽의 허공을 가리켰다. 

 “바로 여기야.” 아그립바가 가리킨 곳에 희뿌연 연기가 피어나는 듯하더니 그 가운데 선명한 영상을 출현시킨다. 아난다와 아레나, 타이론과 술사들, 라만, 롬멜 기사들, 발락이 뒤엉켜 싸우는 장면은 직접 겪고 있는 듯 생생하기만 했다.

 “큰일이군, 큰일이야. 보아하니 공간결계에 갇혀 있는 것 같은데....... 이를 어쩐다?” 공간결계 안에 갇힌 자를 이동시켜 올 능력은 도나투스에게도 없는 것이었다.

 그의 탄식을 들은 선발대의 얼굴이 절망으로 물들기도 전이었다. 아그립바의 외침이 재차 터졌다.

 “내가 해볼게. 이곳의 상황을 전하고 신속히 결계를 깨게 하는 거야.” 아그립바의 묘안은 그럴 듯했지만 아난다 등이 처한 상황을 고려하건대 마냥 희망을 가지기엔 무리가 따랐다. 꽤나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공간결계를 깨지 못했는데 갑자기 무슨 비상한 묘수가 생기길 바랄 수는 없어 보였다. 

 아그립바가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뭐라고 중얼거리는 걸 보며 도나투스는 혼잣말을 했다.

 “아난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술사들의 능력들이 보통이 아니군. 게다가 타이론들의 수가 셋. 술사들은 결계가 부서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방비막을 겹겹이 덧대고 있는 실정이고. 저 정도면 화신체가 아니고서는 힘들 거야.” 도나투스는 아난다가 지금껏 단 한 번도 화신체를 사용한 적이 없음을 기억해냈다. 프리즈마의 최고급 기술 중의 하나인 화신체의 공격력은 최상위 전사들이라 하더라도 견디기 힘들 정도로 위력적이다. 

 화신체의 특징 중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공격력이 막강한데 비해 제어하기가 수월치 않다는 것. 그것 때문에 지금껏 아난다가 망설였음을 누구보다 쉽게 추측하는 도나투스이기에 절망의 고갯짓은 당연한 것이었다. 

 ‘과연 아난다가 자신의 금기를 깨면서까지 전력을 쏟으려 할지.’ “자, 됐어. 이제 말해 봐.” 도나투스는 촌각을 다투는 일이었기에 예의를 차릴 생각은 없었다. 

 “아난다, 나 도나투스야. 지금 파천이 매우 위험하다네. 나도 어찌된 영문인지를 모르겠으니 자넥 이곳으로 와줘야겠네. 먼저 전력을 기울여 공간결계를 깨트려 주게. 그런 다음 내가 공간이동을 시킬 거야. 알아듣겠나?” 급하게 쏟아낸 도나투스의 말이 자하린 광장 전체를 울리자 결투는 일시지간 멈추는 듯했다. 그러나 이내 술사들의 가공할 공격들이 연달아 펼쳐진다. 

 현재의 상황은 그리 좋지가 않았다. 발락은 타이론 하나와 힘겹게 승부를 결하고 있었고, 나머지 둘은 롬멜 전사들을 압박하고 있다. 라만은 아레나가 결계에 힘을 가하는 걸 막고자 연신 화염을 생성해 퍼붓는 중이었고, 술사 셋의 공격은 고스란히 아난다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이쯤 되고 보니 여유가 없을 법도 했다. 결계 안에서는 바깥을 공격하지 못하니 적들의 공격을 막기에만 급급한 실정이고, 나머지 롬멜 전사들이나 바락은 아난다와 아레나를 도울 여력이 없었다. 

 “뭐 하는 거야? 파천이 죽게 되었다니까. 어서 화신체로 공격하란 말일세.” 도나투스의 다급한 외침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난다의 몸에서 심상치 않은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술사들도 그걸 느꼈는지 다급하게 공격을 이어갔다. 

 “드디어!” 도나투스는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비교적 친분이 두터운 사이였지만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난다의 화신체자 지금 막 박동되려 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선발대원들도 파천의 위급함과는 별도로 약간의 흥분마저도 띤다.

 아난다의 전신을 감싸고 소용돌이치기 시작한 프리즈마는 선연한 황금빛이었다. 얼마나 강력한지 채 도달하지도 않은 술법들이 저절로 와해되고야 말 정도였다. 이렇게 되자 상황은 급변했다. 잠깐의 정적 동안 아난다의 화신체는 완성된 모습을 모두에게 드러내 놓는다. 

 “오.!” “저건 혹시 쿠사누스의 날개?” “날개를 지닌 화신체라니.......” “그렇다면 잠자는 대지와 관련이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돼.” “어찌 저런 일이.......” 선발대의 놀람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아레나는 그걸 보며 충격에 빠져들었다. 

 ‘아난다 수련자가 제왕과 관련이 있다니....... 이걸 누가 믿을까?’ 아난다가 화신체를 사용하지 않은 건 단순히 그 파괴력과 살상력을 저어해서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제왕의 유물은 영자들에게 그 무엇보다 강한 유혹을 던진다. 

 이와는 달리 제왕의 측근들이라 알려져 왔던, 날개를 지닌 화신체 쿠사누스는 모두에게 경계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기억소멸 이전의 생이라 할지라도 그 출신인 영자의 출현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영자들은 아무도 없으리라. 적어도 현 영계에서는 그랬다. 우주에서 날개를 지닌 영적 존재는 천사와 제왕의 측근들이라 알려졌던 쿠사누스뿐이다.

 쿠사누스는 신에게 드리는 제사를 집전하는 제사장이자 제왕의 전사들을 훈련시키고 지휘하는 사령관이기도 했다. 전설의 의하면 당시 제왕에 대한 반란이 있었을 때 메타트론이 한 것이라고는 아흔 아홉의 쿠사누스들을 잠재우는 일뿐이었다. 한다. 쿠사누스들이 제와의 전사들을 지휘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거라는 얘기가 전해진 건 분명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아무도 그들의 실존을 증명하지 못했기에 전설로 치부되어 온 존재들. 지금 눈앞에서 쿠사누스의 하나가 분명한, 아난다의 화신체를 대면하고 있었다. 이들의 심정이 어떨지는 알 만하면서도 모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 소식은 앞으로 전 무한계로 퍼져나갈 것이다. 

 잠자는 대지에 관한 전설들이 분명한 사실에 기초하고 있으며, 그 중 일부는 현 영계에 깊숙하게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 이걸 영자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도 사뭇 걱정되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아난다 또한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에 그렇게도 화신체 사용을 꺼려해 왔던 것이다. 화려한 금빛의 날개는 얼굴과 전신을 모두 가리고 있다. 

 도나투스는 순간 파천의 현 상태를 깨닫고는 아난다를 재촉했다. 

 “아난다, 급해! 대체 뭐하고 있는 건가.” 파천의 생명이 경각에 달렸다는 소리만 듣지 않았어도 아난다가 화신체를 사용하는 일은 없었다. 앞으로 벌어질지도 모를 일을 걱정하고 망설이고 있기엔 파천에 대한 아난다의 애정이 각별한 게 탈이었다. 

 ‘좋아, 이렇게 된 이상....... 망설이지 않는다.’ 아난다는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 위용만으로도 술사들과 라만은 기가 죽을 지경이었다. 진정 아난다 수련자의 전생이 쿠사누스에 맞닿아 있다면 이건 해보나 만라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빌어먹을! 일이 갑자기 꼬이는군.” 라만이 투덜대는 소리가 아난다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아난다는 즉각적으로 전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생명을 건지고 싶다면 어서 이곳을 벗어나라.” 그렇지만 아난다는 진정 수련자였다. 마지막 충고를 잊지 않는 것이 그의 성품을 대변하고 있었다. 술사들은 코웃음 쳤다.

 “잘난 체 마라. 네가 쿠사누스 아니라 제왕 중의 하나라 하더라도 단번에 공간결계를 깨지 못한다. 우리의 영체가 소멸하지 않는 한 결계 또한 무사할 것이다.” 이때 아난다가 아레나에게 손짓을 했다. 

 “날개 안으로 들어오세요. 지체할 여유가 없습니다.” “날개 안으로요?” 그건 자신의 품안으로 안기라는 말과 같았다. 아레나는 선뜻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레나를 두 날개로 감싼 아난다가 마지막 경고를 했다. 

 “난 가능한 한 결계만을 깨트리겠다. 만약 힘을 결집시켜 충돌시켜 오기라도 한다면 안전은 보장하지 못한다.” 태양에 부서지는 푸른 바다 빛. 영락없이 그것을 닮은 아난다의 두 눈에서는 강렬한 기운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화신체가 되고 나서 태도조차 변해 있는 것 같았다. 늘 부드러운 어조만을 사용했던 좀 전의 모습은 온데 간데 없어지고 약간 패도적인 기운마자 느껴질 정도였다. 

 그런 그의 두 날개 표면에서 황금빛 광채가 번개를 무색케 할 빠른 속도로 뿜어져 나갔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다시 날개를 접은 아난다가 맹렬한 속도로 회전하며 떠오른다. 

 파스스스 스팟 번쩍 꽈르르르릉 파천의 주변에서 숨죽이고 상황을 지켜보던 자들이 얼른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광휘로운 빛의 폭발은 태연히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아그립바가 탄성을 발하며 두 손바닥을 소리나게 마주치며 좋아한다.

 “히야, 굉장하다. 발광만으로 저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다니.” 그의 말대로였다. 화신체의 발광은 가장 기초적인 공격 수법이다. 그런데도 광장은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결계가 깨진 게 분명해. 뭐해? 어서 데려 오지 않고서.” “어, 그, 그래.” 잡시 얼이 빠져 있던 도나투스가 정신을 차렸다. 그는 아난다에게 말했다.

 “준비하게. 내가 바로 이곳으로 데려 올 테니.” 도나투스는 곧바로 눈을 감고 집중하기 시작했다. 멀리 떨어진 사물이나 생명체를 자신이 지정한 특정 공간으로 이동시키는 건 대단한 집중력과 프리즈마 운용이 요구된다. 그런데 미처 도나투스가 생각지 못했던 문제를 너울이 지적하고 나섰다.

 “데려 오려면 아난다 님보다 뛰어난 능력자라야 가능한데....... 되겠......습니까?” 술법이든 프리즈마를 운용해 사용하든 너울의 말처럼 대상보다 강한 힘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막 집중해 시전하려 하던 도나투스는 속으로 뜨끔했다. 

 ‘이것 여기서 실패하면 망신인데.......’ 사실 그만 그렇게 생각할 뿐 도나투스가 아난다보다 강하리라 믿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쓸데없이 혼자 심각한 척하지 말고 내 손이나 잡아.” 아그립바가 면박을 주며 손을 내밀자 여전히 두 눈을 꾹 감고 있던 도나투스가 슬그머니 한 손을 내밀었다. 아그립바의 합쳐진 능력으로 아난다와 아레나를 동시에 대려 오려는 의도였다. 

 한편 아난다의 화신체 발광의 여파가 광장에 미친 파장은 대단했다. 멀리 떨어져 있던 타이론과 발락 등은 별로 타격이 없었지만 결계 가까이 서 있던 술사들과 라만은 광장의 끝머리까지 날아가 처박혀 있었다. 

 라만의 합체술은 어느 새 풀어져 볼품 없는 모습들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고, 술사들 역시 몸의 상태가 정상은 아닌 듯했다. 그들은 조금 전의 끔찍했던 충격을 떠올리자 몸서리쳐지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아난다의 공격이 개시되려 하자 경고에도 불구하고 막 힘을 뿌어내려던 참이었다. 그렇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어느새 도달한 강력한 힘에 뭐가 어떻게 되었는지도 모른 채 날아가 버린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의 반응 속도가 조금만 더 빨랐다면 오히려 무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레나는 아난다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이리 늑장을 부리는 거지?” 아레나는 공간이동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아무런 변화도 없자 의문을 드러낸 것이었다. 

 “혹시.......” 그녀의 예상대로 도나투스와 아그립바는 손을 마주잡고도 진땀을 빼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경우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기도 했다. 아난다와 아레나의 더해진 능력치라고 해도 아그립바와 도나투스의 힘이라면 가능할 거라 생각했는데 결과는 전혀 뜻밖이었다.

 “뭐하시는 겁니까? 이렇게 된 이상 아난다 님만이라도.......” “이러다 파천이 죽으면 어쩌지?” 너울과 미타의 우는 소리에 번쩍 정신을 차린 도나투스가 두 눈을 황급히 뜨며 아그립바를 노려보았다. 

 “아난다만이다, 알았느냐?” 그의 입에서 너무도 작게 그 소리가 흘러나온 것은 역시나 지켜보는 이들의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다.

 ‘오늘 여러모로 망신살이 뻗치는군.’ 아그립바가 작은 입을 꼭 다물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환상의 조라 할 수 있는 도나투스와 아그립바의 합쳐진 힘이 아난다의 영체를 감지해 가기 시작했다.

 “됐다.” 아그립바의 외침이 있고나서 곧바로 도나투스의 전신에서 환한 푸른빛이 확 뿜어졌다가 잦아진다. 바로 그때다. 

 스스스스스 흩어진 물방울들이 서로를 찾아 뭉쳐지듯 방 안에 새로운 영체가 자리잡아갔다. 아난다였다. 아난다는 어느새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고 있었는데 다급함으로 얼굴엔 잔뜩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아난다 님!” 미타가 반갑게 반기는 소리에 호응할 생각도 없이 아난다의 손이 파천에게 가 닿았다. 그는 바닥에 누워 있는 파천을 안아 일으키고는 아직 살아 있는지부터 살폈다. 미세하게나마 맥이 뛰고 있자 아난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는 파천을 반듯이 앉게 하고는 뒤에 가 앉았다. 이어 파천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쌌다.

 아난다의 두 손이 빛을 뿜어내기 시작한 걸 보고 나서야 도나투스가 했던 걸 묻기 시작했다.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아난다는 파천의 머리에 놓인 두 손을 내려놓지 않은 채 입을 열어 설명하기 시작했다.

 “누르는 힘과 튀어 오르는 힘이 균형을 이루지 못해 일어난 일일세. 프리즈마를 억제하는 기능을 하는 영물들이 내부에서 분출하는 기운들을 완전하게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일세.” 아난다의 치유를 지켜보던 도나투스가 안심이 되지 않았는지 걱정스레 물었다. 

 “방법이 있는가? 그런 일반적인 치료술로 안정시킬 수 있단 말인가?” “파천 님의 내부에는 이런 일에 대비해 한 가지 안배가 되어 있네. 난 그걸 녹여 경계를 더 튼튼히 하는 방법밖에는 듣지 못했네. 파천님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 나도 정확하게 알 수 없다네. 다만...... 이런 일이 앞으로도 계속 벌어지리란 것만 알고 있지.” 무슨 의미인지를 몰라 도나투스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다. 너울이 짐작 가는 바가 있었던지 자신 없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혹시 무연의 최후와 관련이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무연은 사실상 파천 님과 함께 하고 있는 셈입니다. 마지막 영성까지 파천 님에게 주고서 이 우주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간 것이지요. 수호자님의 안배는 무연의 희생 위에 집을 지은 것이죠. 생령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겠지요.” “완전하게 치유시킬 수는 없나?” “이건 병에 걸린 것도, 다친 것도 아니야. 그래서 잠시 지연시킬 수 있을 뿐이네. 따지고 보면 파천 님은 지금 시한부 생을 살고 있어.” “으음.” 도나투스의 회색빛 눈은 더욱 암울한 색채를 띠어 갔다. 그의 시선은 아직까지 생기를 되찾지 못하는 파천의 얼굴을 놓지 않고 있었다. 

 “무리한 프리즈마 사용이 빚은 일. 최선이라면 이 분이 직접 힘을 쓸 일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거겠지.” “답답한 일이군.” “나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야.” 아난다는 설명을 하면서 치료를 진행시켜 나갔다. 머리 위에 놓인 아난다의 손 때문인지 파천은 마치 찬란한 빛 무리의 관을 머리에 쓰고 있는 듯했다. 얼굴 여기저기 묻어 있는 핏자국이 파천을 더욱 애처롭게 만들었기에 방 안의 분위기는 답답하고 침울했다. 

 “한 가지...... 나로서 이해가 가지 않는 건 너무 이르다는 거야. 아직은 이런 단계에 접어들 때가 되지 않았건만....... 무슨 일인지를 모르겠어.” 아난다 또한 파천의 현 상태가 무엇을 뜻하는지를 정확하게 짚어 내지 못했다. 수호자는 파천이 생령인 점을 염두에 두고 모든 걸 안배했다. 인간이 지닌 잠재된 프리즈마를 모조리 끌어올리는 대신 그것을 조절하는 데 신경 썼고 그것마저 안심이 되지 않아 무연을 통한 마지막 안전 장치를 해두었다. 그건 지금까지의 상황만으로 보건대 성공적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일이 발생하면 안 되는데....... 도무지 모르겠어. 지금의 상태가 되느 건 세 개의 대침이 모두 녹은 이후에나 나타나야 하건만.’ 이때 아그립바가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아레나가 위험하다, 위험해. 이를 어쩐다?” 도나투스도, 아난다도, 선발대 모두도 아그립바를 급하게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자하린에 남겨 둔 아레나를 깜빡 잊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의 발길을 끈질기게 막아서던 결계가 부서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절의 위협은 그대로였다. 비록 아난다의 화신체 발광에 라만과 술사들이 타격을 받기는 했으나 그리 치명적인 건 아니었다. 적들은 아레나와 가린차 등에게 마지막 힘을 쏟아 붓고 있었다. 

 아난다를 이동시켜 오느라 힘을 소진한 도나투스와는 달리 아그립바는 생생했다. 여전히 허공중에 펼쳐놓은 영상은 아레나의 위급함을 알리고 있었다.

 “이를 어쩌지?” 도나투스의 얼굴이 한껏 찌푸려진다.

 “재차 공간이동으로 데려 오면.......” 너울은 말하다 말고 입을 다물어 버린다. 생각해 보니 그걸 누가 시전한단 말인가? 아난다는 파천을 치료하느라 달리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였고, 자신은 일시지간 힘을 사용할 수 없다. 아그립바 혼자서는 아레나를 데려 올 능력이 되지 않는다.

 도나투스가 너울을 가리켰다.

 “너울, 자네가 한번 해보지 그래? 아그립바와 힘을 합한다면 가능할 듯 싶은데.” “저는...... 영물의 힘을 다스리는 법을 모릅니다.” 너울의 목소리는 점차로 기어 들어갔다. 그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했다. 이럴 때 척하니 자신 있게 나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스스로의 말처럼 그는 영물과 힘을 합해 본 경험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영물과 영자들의 프리즈마는 파동의 방법과 흐름이 전혀 달랐다.

 도나투스가 아그립바와 힘을 합할 수 있었던 건 그가 뛰어나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었다. 이때 밖에서 작은 소리가 들려 왔다.

 “제가 한번 해보지요.” 이곳 펠라모의 주인인 앙샹뜨의 목소리였다. 방 안으로 들어선 앙샹뜨의 얼굴은 발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본의 아니게 엿듣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선발대원들은 앙샹뜨와는 다른 이유로 표정들이 변했다. 그녀가 지척에 있었음에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 그러면 되겠군.” 도나투스는 앙샹뜨라면 가능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 때 아난다가 참견하고 나섰다.

 “아레나만 데려 온다면 롬멜 전사단과 발락은 그대로 소멸을 맞게 될 거야. 그건 안 될 일이야.” “그럼 어쩌잔 말인가? 이대로 놔두어도 위험한 건 마찬가지야.” 도나투스는 아난다가 답답하게 여겨졌다. 

 앙샹뜨는 눈앞을 가리고 있는 머릿결을 쓸어 올리며 작게 말했다.

 “아레나 님이라면 충분히 위기를 이겨내실 거예요.” 그러고 보니 아레나만은 협공 속에서도 여유가 넘쳤다. 그녀 혼자 탈출해 오는 거라면 그리 어렵지 않을 듯 싶었다. 이때 아난다가 도나투스를 빤히 직시했다.

 “자네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무슨 소리...... 인가?” 도나투스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심정이었다. 

 “라곤들과의 내기에서 얻은 것 아직 가지고 있지?” “그, 그야....... 그런데 그건 왜 묻나? 설마하니 지금 그걸 내놓으라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나. 생명이 달린 일인데 그깟 돌이 아까울 게 있겠어? 난 자네를 믿네.” 둘 사이의 단편적인 대화만으로는 무슨 의미인지 쉽게 알아챌 수는 없었다. 고운 이마를 찡그리며 혼자 골몰하던 앙샹뜨가 그제가 생각난 것이 있었는지 미소를 지으며 도나투스를 바라본다. 

 “혹시 라곤에게서 마호석을 얻으셨나요?” “으음....... 얻기야 했지. 내가 그걸 얻느라 얼마나 고생한 줄 아는가?” “자, 그만 망설이고 기분 좋게 내놓는 게 좋을 거야. 이런 때가 아니면 자네가 언제 그걸 써 먹을 일이 있겠나.” 도나투스는 펄쩍 뛰며 두 손을 저었다.

 “이것 왜 이래. 내가 써먹을 데가 없어서 가지고 다니는 줄 아는가? 아끼고 아끼느라....... 제대로 사용해 보지도 못한 걸 그렇게 말하는 법이 어디 있나.” 아난다의 미소 띤 얼굴을 대하자 도나투스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말았다.

 “그래 내 네 놈을 만난 것부터가 재수 옴 붙은 거지. 뭐든 가지고 있는 꼴을 못 보니 나 원....... 자, 여기 있어. 구워먹든 쪄먹든 네 마음대로 해라.” 등에 매고 있던 자루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더니 바닥으로 툭 던져 놓은 도나투스. 그래 놓고는 아직도 아까운지 입맛을 쩍쩍 다셨다. 그걸 아그립바가 주워들었다.

 “햐, 맞아. 이게 있었지. 이걸 사용한다면 굳이 큰 힘 들을 필요도 없고 아레나와 나머지 떨거지들까지 데려 올 수 있겠어. 도나투스가 웬일로 이런 큰 선심을 쓰나 모르겠네. 도무지 믿을 래야 믿을 수가 없네.” “뭐야, 이놈아!” 아그립바의 손에 들린 건 갈아놓은 돌멩이처럼 생겼다. 표면에 몇 개의 번쩍이는 보석이 박혀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특징적인 것도 없었다. 그것이 무엇이길래 저리 난리법석을 떠는지를 모르겠던지 너울이 슬쩍 물어 본다.

 “그건 루딘족이 만든 마호석 같은데 어디다 써먹으려고 그러십니까?” 도나투스는 심통이 나 아무렇게나 지껄여댔다.

 “보면 알지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아?” 아그립바가 돌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한 걸음 물러서더니 광장을 주의 깊게 살핀다. 

 “저 중에 한 가지를 가져와야 하는데....... 무엇이 좋을까?” 슬쩍 흘겨보던 도나투스가 광장 한쪽에 널브러져 있는 죽은 영체를 가리켰다.

 “저걸로 하면 되겠군.” “하필이면 시체야?” “지금 이것저것 가리게 생겼어?” “그래, 그러지 뭐. 자 그럼 가져와 볼까.” 아그립바가 손을 휘젓자 광장에 있던 영체 하나가 돌연 사라지더니 방 안에 떡 하니 나타나는 것이다. 처참하게 짓이겨진 시체가 나타나는 순간 아그립바는 신속히 돌을 그 위에 올려 놓았다. 그리고는 큰 소시로 말했다.

 “아레나, 그곳에 이동 문이 생길 거야. 그곳을 통해 탈출해.” 아그립바가 지른 고함은 광장에 그대로 전달되었다. 아레나는 시체가 있던 라만의 뒤쪽에 생긴 이동 문을 발견하고는 안심하는 표정이 된다. 그렇지 않아도 가린차 등을 신경 쓰느라 여간 힘겹지 않았기 때문이다. 

 “날 따라와.” 아레나가 앞장서서 라만을 공격해 들어갔고, 가란차와 발락 등이 뒤를 이었다. 

 술사들과 라만 등도 이동 문이 생긴 걸 보지 못했을 리가 없었다. 

 “보내면 안 된다!” 타이론들은 이동 문 앞에 모여서서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절대로 너희를 이대로는 못 보낸다.” 이때 펠라모 앙샹뜨에 있던 미타가 조바심이 났던지 별 생각 없이 경솔하게 중얼거렸다.

 “하필이면 적진 쪽에 만들 건 뭐람.” 도나투스는 그렇지 않아도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가 미타의 옹알거림에 화가 나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뭐야?” “그, 그렇다는 얘기죠.” 아난다는 광장의 상황을 예의 주시하며 앙샹뜨에게 정중한 청을 했다.

 “앙샹뜨 님 도와 주실 수 있습니까?” “그럼요.” 앙샹드는 전혀 망설임 없이 시원스레 대답하고는 이동 문 앞에 섰다. 양 손에 두개의 파라슈를 나눠 쥐고서 잠시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다시 한 번 광장의 상황을 눈여겨보는 걸 잊지 않는다.

 “그럼 갔다 오겠습니다.” 그녀의 싱그러운 웃음이 보는 이들을 안심시킨다.

 도나투스가 내놓은 건 원래 루딘족이 만든 마호석이라는 것인데 이건 술법을 가둬 두는 역할을 하는 보물이었다. 라곤에게서 얻은 마호석엔 공간이동의 술법이 저장되어 있었던 것이다.

 지금껏 마호석을 통해 이동 문을 만드는 건 라곤만이 해낸 일이기도 해다. 그걸 도나투스가 가지고 있었다. 어떻게 만드느냐에 따라 횟수에 제한이 있긴 했지만 스스로의 영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마호석은 매우 유용한 것이었다. 한 가지 난점이라면 이동문을 만들고자 하는 곳의 사물을 가져 와야만 사용할 수가 있었다. 만약 이 자리에 아그립바가 없었다면 지금처럼 손쉽게 사용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 광장은 한바탕 소용돌이가 몰아치고 있었다. 오히려 아레나 등이 기세등등해 공격해 들어가고 라만 등은 그걸 힘겹게 막고 있는 형세였다. 

 아레나는 파라슈가 아닌 두 손만을 이용해 프리즈마를 뿜어내고 있었는데 그 파괴력이 상당했다. 그녀의 두 손은 프리즈마를 갖가지 형태로 변형시켜 사용하고 있었다. 라만들의 합체가 깨어졌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었지만 여전히 뚫기가 쉽지 않았다. 

 타이론들은 이동 문 앞을 지키고 있었고, 술사들과 라만들이 아레나 등을 굳건히 막고 있었다. 가린차가 화가 나 마구 소리 지르고 발락은 비교적 침착하게 대응한다. 이때 아레나의 머리 속에 한 가지 생각이 번쩍 스치고 지나갔다. 그녀는 가린차와 발락에게 영언 전달을 시도했다.

 [내가 공격하는 틈을 타서 경계가 없는 뒤쪽으로 빠져나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그녀의 생각에도 일리가 있었다. 앞을 꽉 틀어막고 비켜 줄 생각을 않으니 굳이 힘들여 전진할 이유가 없다. 휑하니 빈 뒤쪽으로 도망간다면?

 [대신 내가 여기서 버티며 시간을 벌어 보마.]

 아레나의 제안에 발락도 가린차도 동의하고픈 심정이었다. 그녀에게 빚을 지는 듯해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발락은 성주와 동족들에게 타이론이 적이 되었음을 알려야 했고 가린차 또한 현2재의 전력으로는 명을 완수할 수 없었다. 

 바로 그때다. 이동 문 안에서 무엇인가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그건 아레나와 타이론 등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돌발적인 일이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란 건 변수로서 작용할 공산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다. 그것도 앙샹뜨 정도의 강자라면 더욱 그러하다.

 공간 문을 나온 앙샹뜨는 곧장 두 손에 쥔 파라슈에 최대한의 프리즈마를 결집시켜 후면을 훤히 드러내고 있는 세 명의 타이론에게 집중시켰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크기로 뭉쳐진 검. 기껏해야 다섯 자정 도에 불과했지만 그만큼 정밀하고 강력했다.

 슝슝슝 공기를 가르는 소리는 너무도 빨랐다. 상대들이 그 소리에 반응하기도 전에 앙샹뜨의 공격은 보기 좋게 세 타이론의 배후를 찌르고 잘랐다. 

 “크억, 이, 이게 뭐냐?” 타이론 셋은 부리나케 몸을 빼내며 최대한 호신막을 일으켜보았지만 이미 늦었고, 어림없는 일임을 절실히 느끼는 게 고작이었다. 타이론 셋 중 하나는 등이 패이고 하나는 팔이 잘렸으며 나머지 하나는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미안해서 어쩌죠? 어깨를 노렸는데 목이 잘렸네요.” 앙샹뜨는 진심으로 그들 중 하나에게 사과했다. 그걸 상대가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고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아레나는 앞을 막고 있는 술사들이 잠시 뒤쪽으로 한눈 파는 걸 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다. 

 “바보들, 위험은 뒤에만 있는 게 아니야.” 아레나의 모아 쥔 두 손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갔다. 수십 개로 나눠진 기운은 하나같이 지독하게 빠르고 날카로웠다. 

 “피해!” 술사 중 하나가 다급하게 소리치긴 했지만 그건 거의 본능적인 외침에 불과했다. 그 또한 피하기엔 늦어 버렸으나, 맞받아치기에도 늦은 감이 있었다. 이럴 때는 역시 호신막을 치는 게 빠르겠지만 술사들은 프리즈마 사용에 능숙하지 못하다.

 퍼퍼퍼퍼퍽 라만과 술사들의 전신이 마구 흔들렸다. 잠시 허점을 보인 것이 화근이었다. 그들은 만신창이가 된 신형을 추스르지 못하고 마구 떠밀려가고 있었다.

 아레나는 앙샹뜨와 달리 거기서 멈출 생각도, 사과할 의향도 전혀 없는 듯했다. 피차 적으로 마주 선 이상엔 끝장을 보는 게 그들에 대한 가자 ㅇ정중한 예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평소 지니고 있던 이러한 지론은 지금도 어김없이 발휘되었다. 

 “이걸로 끝내자.” 모아 쥐던 손을 떼어내더니 손바닥이 보이게 펼친다. 그리고는 곧장 원을 그리며 빠르게 다시 모아들였다.

 쾅쾅쾅 콰쾅 뒤로 떠밀려 가던 자들의 주변에서 폭발음이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공기를 응축해서 터트린 것이다. 워낙 지척이었는데다 무방비 상태로 당하게 되니 그것도 상당히 효과적으로 작용했다. 술사들과 라만들은 너무도 무기력하게 허공을 날아다녀야 했다. 그들은 정신을 수습하지도 못한 상태였다.

 그걸 보며 앙샹뜨가 고개를 저었다. 

 “지독하게 빠른 연환공격이네요.” 아레나와 앙샹뜨 사이에 갇힌 타이론들은 잠시 서로를 바라보았다. 상황이 그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함을 알고 있으니 섣불리 공격 하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눈치만 보고 있기엔 그들의 자존심이 허락하질 않는다. 결국 그들은 각오를 새롭게 하며 아레나쪽을 향해 공격해 갔다. 

 영체가 훼손된 상태에서는 과도한 프리즈마를 사용할 수 없다. 견딜 수 있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걸 모를 리 없는 그들이 이런 행동을 취한 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걸 보며 아레나가 코웃음 쳤다.

 “죽기로 작정한 것 같군.” “아레나 님, 굳이 죽일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니 자비를.......” 앙샹뜨의 간절한 청은 채 결말을 맺지도 못했다. 아레나가 파라슈를 빼들어 다가오던 타이론 중 하나의 못을 쳐버렸기 때문이다. 그녀의 공격은 지독하게 빠르면서도 강하고 화려했다.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타이론은 치미는 분노에 판단력마저 상실한 채 전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타이론의 명성이 그냥 얻어진 게 아닌 걸 아레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뒤로 몸을 빼냈다. 상처 입어 제 정신이 아닌 야수들을 상대하려면 좀 더 차분해질 필요가 있었다. 타이론의 전신이 불길에 휩싸인 건 바로 그때였다. 그걸 보며 아레나의 뒤쪽에 있던 발락이 외쳤다. 

 “저들이 죽기로 작정한 것 같은데?” “나도 잘 알아. 동족의 죽음에 분노했다는 건데....... 좋아, 한번 해 보자고. 자, 마음껏 공격해 봐.” 아레나는 파라슈를 손 안에 꽉 움켜쥐고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그녀의 두 눈은 어느 때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발락은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저들은 지금 잠재력마저 끌어올려 극대화 시키고 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할 것은 뻔한 일. 아레나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이건...... 위험하다.’ 발락은 긴장하며 준비를 서둘렀다. 롬멜 전사단들 역시나 깆장의 빛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그만들 두세요. 자신을 해쳐 가면서까지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현재의 분위기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잔잔한 음성은 앙샹뜨의 것이었다. 그녀가 타이르는 말을 타이론들이 받아들일 리는 없었다. 그들은 두 팔을 벌리고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포효했다. 

 “타이론은 한 번 맺은 원한을 잊지 않는다. 아레나, 너는 앞으로 영원히 우리 타이론의 원수다. 뿐만 아니라 타이론은 더욱 적극적으로 선발대 앞을 막을 것이다.” 화르르륵 불길이 거세지며 그들의 형체마저 삼켜 버린다. 그 속에서 확고한 의지가 느껴지는 마지막 말으 흘러나왔다.

 “여기서의 일은 낱낱이 우리 일족에게 전해질 것이며, 그 분노는 너희들을 송두리째 태우리라. 기억해라. 우리들은 이렇게 가지만 이제 시작임을.” “우아아아아아.” 드드드드 쩌저정 하늘을 함몰시킬 듯 한 고함소리에 때맞춰 광장의 바닥이 일부 갈라지며 흔들렸고, 그 사이로 불길들이 거세게 치솟아 올랐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을 포함하고 있는 광장의 공간 여기저기에서 폭발이 연이어졌다.

 콰콰쾅 “아레나, 저들이 더 큰 힘을 끌어 모으기 전에 공격을 서두르자.” 발락의 제안이었다. 가린차는 급히 변하는 주변 상황에 마음이 무거웠다.

 ‘역시 쉽게 당할 녀석들은 아니란 건가? 솔직히 나는 자신이 없다. 아레나, 어쩔 셈이냐?“ 아레나는 불길에 휩싸인 타이론을 쳐다보며 그 제안에 대답했다.

 “아냐, 좀더 두고 보자고. 놈의 능력이 어디까지 미치는지를 말이야.” 이때 광장 구석에 쳐박혀 있던 몇몇의 라만들이 갈라진 땅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비명을 지르는가 하면, 간신히 몸을 추스른 술사들은 서로 손을 맞잡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들 주변으로는 불길이 침범하지도, 땅이 갈라지지도 않는 것을 보니 술법으로 방비막을 쳐놓고 있는 듯했다. 

 앙샹뜨가 슬쩍 그들을 쳐다보는가 싶더니 이내 타이론에게 시선을 돌려 버린다. 그녀는 지금이라도 타이론들이 멈춰 주기를 바랐다. 그들이 마지막 힘까지 쏟아내면 이곳 광장분만 아니라 주변의 건물들도 무사하지 못할 것이고, 관련 없는 일반 영자들까지 피해를 입는 건 당연해 보였다. 

 “그만두세요, 타이론. 역행하는 건 그대들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이롭지 않아요. 그러지 말아요.” 또 한 번의 설득에도 꿈쩍하지 않는 타이론. 사실 그들의 변화는 이제 그들 스스로도 멈출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변화는 제일 먼저 그들을 가두고 있던 불길에서 시작되었다.

 화르르르륵 십여 장이 넘게 치솟은 불길들은 점차 새파래지는가 싶더니 급기야 춤을 추기 시작했다. 생명을 부여받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의 손길은 살아서 광장 전체를 넘실거린다.

 “이것 열기가 만만찮은데.” 가린차는 수하들이 염려되었다. 몇 번의 격전으로 부상을 당했기 때문에 타이론의 마지막 힘을 당해낼지 걱정스러웠다. 그는 수하들을 자신의 근처로 모여들게 했다. 발락의 흑호는 불길이 다가올 때마다 앞발로 휘두르며 으르렁거렸다. 

 이제 타이론들의 영체는 터지기 직전까지 도달해 있었다. 막아 두었던 둑을 터트리기만 하면 그들의 의도대로 될지도 모른다. 둘은 서로 손을 잡았다.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도 그들은 서로의 눈길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말했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다. 우리의 희생으로 망설이던 동족들을 움직일 수 있다면야.” “그래, 선택에 후회는 없어. 단지 아쉬운 건 타이론의 명예에 흠집을 남기게 되었다는 것. 이런 패배는 수치스런 것이다.” “그렇지 않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을 거야. 그들이 움직인다면 말야.” “이제 그만...... 가자.” “편히 안식하라, 형제여.” “형제에게도 신의 축복이 함께 하길.” 우르르르릉 파지지직 불길 사이로 오가는 건 놀랍게도 뇌전이었다. 횡으로 종으로 치닫는 건 뇌전은 움직임을 종잡기 힘들었다. 

 콰쾅 하필이면 발락에게로 뇌전이 향했다. 놀란 발락은 간신히 막아내긴 했지만 여력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날아갔다.

 “빌어먹을.......” 뇌전은 계속 뿜어져 나왔다. 광장 전체에 촘촘한 거미줄을 치기라도 하려는 듯 제 몸을 분열하며 늘여갔다. 아레나는 파라슈를 들어 올려 방호막을 쳐야만 했고 롬멜 전사단은 힘을 합하고도 연신 뒤로 밀려났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처음엔 전면만 막으면 되었지만 점차로 사방에서 몰려들기 시작하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가 되어 갔다.

 “그것 봐. 먼저 공격하자니까.......” 발락은 선공을 하지 않은 걸 후회하며 아레나를 원망했다. 그가 이러는 건 타이론의 의도된 공격이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광장 전체를 감싸는 기운을 감지하자 발락은 끊임없이 구시렁대기 시작했다.

 “광장 전체를 환상력으로 가둬 버렸어. 이제 놈들과 동행하는 수밖에 없다, 제길.” 발락이 하늘로 솟구쳐 오르며 단숨에 타이론들에게 접근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빠지직 “으윽.” 그가 움직이자 곧바로 뇌전이 집중되며 사방에서 몰려왔기 때문이다. 방호막 위를 때렸는데도 그 충격은 대단했기에 다시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롬멜 전사들이 파라슈로 쏘아낸 프리즈마는 중도에서 흔적 없이 사라져 버렸다. 

 “아레나, 어떻게 좀 해봐.” 가린차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웠다. 하긴 언제 전사들이 아닌 칠대부족과 싸워 본 적이 있었던가. 술사들이야 가끔 부딪쳐 보긴 했지만 칠대부족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말로만 들어왔던 그들의 위력을 처음 접하고 보니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앙샹뜨는 파라슈를 흔들어 몰려드는 뇌전을 이리저리 막아내는 아레나를 주의 깊게 살폈다. 놀랍게도 앙샹뜨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녀 근처 일장 주변은 너무나 깨끗했다. 아레나는 지금 타이론들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이깟 뇌전이 저들의 전부는 아닐 거야.’ 남들이 어떤 위경에 처해 있는지는 그녀의 관심권 밖이었다. 그녀는 강함만을 숭상하는 전사들을 경멸해 왔다. 그럼에도 정작 그녀 자신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반응을 나타내고 있음을 스스로는 모르고 있었다. 호기심에 반짝이는 두 눈만 보아도 그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자, 시작해라, 어서! 기다리기 지루하지 않게.’ 이런 아레나의 심정을 알았기 때문일까, 타이론들이 신형이 천천히 흩어져 가기 시작했다.

 “어, 왜 저러지?” 불길 속을 뚫고 그들의 동태를 자세히 살피던 아레나가 놀라 부지불식간에 부르짖었다. 이때 앙샹뜨가 그녀의 궁금증을 풀어 준다. 

 “그들의 자신들이 쳐놓은 환상력에 완전히 동화되어 가고 있어요. 영체는 소멸되었지만 아직은 죽은 게 아니죠. 그들이 안배한 환상력을 깬다면 완전히 죽은 게 되죠.” 그제야 이해한 아레나가 앙샹뜨를 다시 쳐다본다. 

 “그런데 당신은 누구죠?” 자신들을 돕는 걸로 보아 선발대와 관련이 있을 거라 막연히 추측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레나가 처음으로 앙샹뜨에 대한 관심을 나타냈다. 

 “저는 앙샹뜨라고 해요.” 두 여전사는 이런 상황 가운데서도 차분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지켜보는 발락 등은 어이없다는 표정이 되고 만다. 

 “아, 그러세요? 펠라모 앙샹뜨에 대한 명성은 익히 들었죠. 이렇게 만나게 돼서 기쁘게.......” 아레나의 뒷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건 발락이나 가린차, 심지어 앙샹뜨고 마찬가지였다. 아레나는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당신은 우리의 몸이 왜 허공중으로 떠오르는지 알고 있나요.” “타이론의 환상력이 빚어낸 현상이죠. 우리는 가둔 공간이 허공중으로 떠오르고 있어요. 어떻게 할 거죠? 곧 공간 자체가 파괴될 듯한데....... 그 위력은 대단하겠죠. 환상력의 극치 중 하나에 제대로 걸린 셈이에요.” 뇌전은 더욱 기승을 부리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런 게 문제가 아니었다. 아레나는 ‘공간을 파괴한다’와 ‘환상력의 극치’라는 말만 귀로 접수했다. 앙샹뜨의 말대로라면 공간 자체가 파괴된다는 의미였다. 가두고 있는 걸 모두 소멸시키는 힘.

 “이것이 뭔지 안다면 벗어나는 방법도 알겠네요.” 아레나의 태연한 물음에 앙샹뜨는 입을 가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왜 웃죠, 앙샹뜨?” “미안해요, 아레나 님의 여유가 절 유쾌하게 만들어서요.” ‘성격이 별나군.’ 아레나가 앙샹뜨가 그렇게 생각하듯이 앙샹뜨 역시 지금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방법은...... 없어요. 견디는 것 밖에는.” “무식한 방법이군요.” “환상력은 대체로 그래요. 더 큰 힘으로 견디거나 파괴하는 방법밖에는 없죠. 그런데 공간이탈이나 공간파괴력은 부서도 그 위력은 고스란히 받아들여야 하니 소용이 없는 거죠.” “그렇게 잘 아시면서 왜 가만히 있었던 거죠.” “정말 그게 이유의 전부인가요?” “그럼요.” 아레나는 실소했다.

 발락은 아레나 근처로 겨우 힘겹게 다가와선 한다는 말이 이랬다. 

 “어떻게 좀 해봐. 이대로 속수무책으로 당하긴 억울하지 않아?” “나에겐 그런 능력이 없어.” 너무나 간단히 대답해 버린 아레나의 도톰한 입술을 발락은 뚫어지듯 쳐다본다.

 “제길, 이럴 줄 알았으면 가라고 할 때 내빼는 건데.” 아레나는 아직도 신형이 떠오르고 있자 의아했다.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죠?” “모르죠, 멈추는 시점에 터질 거니 미리 준비를 해두세요.” 멈출 때 터진다는 앙샹뜨의 말에 발락과 가린차 등은 기겁했다. 그들은 뇌전이 몰려드는 것도 막기 힘겨운 실정이었다. 그들의 얼굴에 절망이 빠르게 차올랐다. 

 “아까 그 공간이동 문은 어디로 간 거지?”  “그건 저 밑에 있겠죠.” 발락은 태연히 아래쪽을 가리키는 앙샹뜨가 야속하기만 했다. 이때 앙샹뜨가 모두에게 말했다. 

 “모두 이리 가까이에 오세요. 최대한 서로의 힘을 결집시켜 보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겠네요.” 그녀의 제안에 모두는 순순히 따랐다. 그들이 한 곳으로 모여들자 뇌전은 그곳으로만 집중하며 퍼부었다. 그런 건 앙샹뜨와 아레나의 힘으로 충분히 방비할 수 있는 정도였다. 문제는 곧 있을 폭발이었다. 

 “자신 있어요?” 아레나의 물음에 앙샹뜨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한참 머뭇거리더니 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사실은 이번이 두 번째예요. 전에도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죠. 지금의 위력이 그때보다도 대단치 않을 것 같긴해요. 그때는 타이론들보다 숫자도 많았고 더 강했거든요.” “그럼 견뎌냈다는 말이잖아. 별로 대단치 않은가 보지?” 발락은 그나마 안심이 된다는 표정이었다. 

 “호호, 그때 전...... 소멸당했었죠. 견디지 못했어요. 그때는 사실...... 뭔지 몰라 당했다는 표현이 맞을 거예요. 사실 이런 걸 접할 기회는 거의 희박하죠. 영체 소멸을 전제로 펼쳐지는 거니까.” 모두는 아연실색했다. 아레나와 함게 최근래 가장 강한 여전사로 통하는 앙샹뜨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지 않은가. 그런데도 아무렇지 ㅇ낳게 말하는 앙샹뜨느 정말 별종이라 불려도 될 듯했다.

 발락은 침울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이것 이대로 생을 마감하는 것 아냐?” 가린차 역시 낯빛을 굳히며 떠듬떠듬 입을 연다. 

 “역시 이번 일은 맡을 때부터 기분이 안 좋더니.” 앙샹뜨가 그런 그들을 안심시켰다. 

 그렇게 불안해하지 마세요. 당시의 저는 여러분들보다 약했으니까요. 대신 제 옆에는 적들이 생명을 던져서라도 죽이고 싶을 정도로 강자가 있었죠.“ “그가 누구였죠?” 아레나는 진정 궁금했다. 지금의 타이론들보다 강한 자들에게 마지막 수단을 동원하게 만든 장본인이 누군지를.

 “라미레스 수련자님이셨죠.” “아!” “오!” 아레나는 피식 웃었다. 

 “역시 그랬군요. 그 분정도라면 무사히 위기를 넘겼겠군요.” “네. 전 당시에 소멸당해서 몰랐지만 나중에 듣게 되었죠. 이후로 그 분을 만났을 때 절 구하지 못해 아쉬웠다고 하시더군요.” 아레나는 앙샹뜨가 라미레스와 동행할 정도로 친분이 있다는 사실에 내심 놀라워했다. 

 “준비하세요. 시작의 징조가 보이는군요.” 앙샹뜨의 말대로였다. 서서히 떠올라가던 몸이 허공중에 딱 멈추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허공 여기저기에 작은 구체가 생겨났고, 그곳을 향해 막대한 양의 기운이 모여드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앙샹뜨가 빠르게 입을 열었다. 

 “외부의 프리즈마가 압축되고 있어요. 포화상태가 되면 터지게 돼요. 그 순간 최대의 힘을 결집시켜 영체를 보호하세요.” 슈우우우우 프리즈마가 내부로 유입되기 시작하자 압력이 증가되기 시작했다. 움직이는 것조차 힘에 겨울 지경이 되지 그제야 위기감을 실감한다.

 롬멜 전사단은 등을 서로 맞대고 있었으며 발락은 흑호의 등에 밀착해 있었다. 아레나는 두 손을 내려뜨리고 눈마저 감아버렸다. 

 앙샹뜨는 여전히 침착한 아레나를 지켜보며 내심으로 감탄을 연발하고 있었다.

 드드드드드 “폭발하기 직전이에요. 모두에게 행운이 있기를.” 쾅 정적이 찾아왔다. 광장으로부터 백 장 위쯤에서 터졌는데도 불구하고 강풍이 몰아쳐 바닥에 널린 시체들을 휘말아 올릴 정도로 강력했다. 광장의 언저리에 있었기에 공간이 포함되는 걸 면한 라만과 술사들이 하늘을 올려다본다. 

 “저 정도 폭발이라면....... 견디지 못했겠지.” “대단해. 역시 타이론이군.” 그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그 정도로 폭발력은 대단했다. 술사 중 하나의 시선이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이동 문을 주시하다 다시 공중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것도 떨어지지 않는 걸 보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가 보군.” 조금 더 기다려 봤는데도 별 변화가 없자 술사 하나가 동료들을 바라보며 입을 연다.

 “그만들 가지. 이번 일은 성공인지 실패인지 모르겠어.” “실패는 아냐. 아레나와 앙샹드 정도의 거물을 처치했으니 성공이라 해도 무방해.”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상처 입은 몸을 끌고 광장을 떠났다. 그들이 사라진 광장은 바닥이 살라진 채 솟아 나와 있고 여기저기 그을러 있기까지 해 폐허를 방불케했다. 주변의 몇몇 건물들마저 무너져 있어 보기 흉할 정도였다. 

 도나투스는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이런 일이....... 앙샹뜨와 아레나가 저리 맥없이 당했단 말인가? 아냐. 그럴 리가 없다. 아그립바, 추적해 봐, 어서!” “잠깐 기다려 봐. 그렇지 않아도 찾아보고 있는 중이야.” 아그립바의 귀여운 얼굴이 잔뜩 일그러져 있다. 

 “찾기가 힘들어. 쉬운 일이 아니야.” 너울은 여전히 파천을 치료하고 있는 아난다에게 말했다. 

 “제가 가보고 올까요?” “기다리세요. 그리 쉽게 당하실 분들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될 겁니다. 저 정도 공간파괴력이라면 충분히 견디실 겁니다.” 영상에 잡힌 광장에 생명체는 단 하나도 없었다. 

 “시체라도 떨어져야 하는 거 아닌가?” 미타가 진정 궁금하다는 투로 말하자 도나투스가 눈을 매섭게 치뜬다.

 “시체는 무슨....... 견디지 못했다면 가루가 되어도 수십 번은 되었을 터인데.” “그 정도예요?” “보고서도 모르겠어? 안 되겠다, 나라도 가봐야지.” 정말 이동 문으로 향하는 도나투스를 아난다가 말리고 나섰다. 

 “그러지 말게. 괜히 갔다가 봉변 당하지 말고.” “무슨 소리야? 아직도 적들이 있다는 건가?” “아까 그 자들이 안 가고 주변에 남아 있을 거야. 힘을 상실한 자네가 간다면 얼씨구나 싶어서 달려들겠지. 그래도 좋다면 가봐도 좋고.” “이런.......” 아난다는 아그립바에게 이동 문을 거둬 버리라고 했다. 그러자 도나투스는 그럴 필요까지 있냐고 한다. 

 “그래야 저들이 안심하고 다른 곳으로 갈 것 아닌가. 저들은 아레나 님과 앙샹드 님이 소멸한 것으로 보고하겠지.” 아난다는 그들이 살아 있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만 도나투스는 여전히 안심이 안 된다는 눈치였다. 

 아그립바가 이동 문을 거둬 버리자 방 안엔 시체 한 구와 마호석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영사마저 사라진 뒤였다. 

 “잠시 자리들을 좀 비켜 주시겠어요?” 아난다의 요청에 모두는 방 밖으로 나간다. 아그립바만은 나가지 않고 파천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아난다가 물었다. 

 “넌 여기 있으려고?” “그럼. 난 여기 끝까지 있어야 할 의무와 책임이 있다고.” “의무와 책임?” “파천이 지니고 있는 영물의 장차 소유자가 되실 분이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내가 거처로 삼고 있는 집이 이 녀석 거거든.”

 아그립바의 설명을 다 듣고 난 아난다는 한참을 멍하니 쳐다본다. 

 “네 욕심은 끝이 없구나. 신편마저 차지하려고? 하긴 네가 여기 있을 때 대충 짐작은 했다만. 그런데 천마환을 네 거처로 삼은 건 솔직히 의외로군.” “천마환? 그게 내 집의 이름이야?” “라미레스가 인간세에 있을 대는 천마라고 불렸지.” “히야, 멋있는데.” “아그립바, 지금부터는 집중을 해야 하니 조용해 줄 수 있지?” “그야 어렵지 않지.” 아난다는 그제야 파천에게만 집중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파천의 내부에 힘을 보내 무연이 심어 놓은 영력의 일부를 녹이는 작업을 했었다. 그렇지만 지금부터는 그 영력을 빌어 서로간의 균형을 맞추는 일을 해야만 했다. 그건 아난다로서도 여간 조심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지금 파천 님의 경우는 물을 가둬 놓은 둑의 일부가 파손되어 있는 것과 다름없다. 위로 흘러 넘치는 거야 상관이 없지만 둑마저 허물어뜨린다면 결국네 주체할 수 없게 된다. 

 다행히 아직은 부분적으로 조금씩 새어나오는 정도다. 외부와 내부의 프리즈마는 서로 간에 인력과 척력이 동시에 일어난다. 원래의 영체는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양의 프리즈마만 사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파천 님의 경우엔 다르다. 

 자신이 감당할 수 ㅇ벗는 양의 프리즈마를 외부로 끌어들여 사용했다. 이런 상태가 된 건 그것 때문이다. 그로 인해 서로간의 균형이 무너져 이런 지경이 된 것. 당장에 프리즈마를 다스리는 건 어렵지 않지만 문제는 근본적인 대책을 세워야만 한다. 앞으로도 이러지 말란 법이 없으니. 그런데 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걸까?

 파천이 자연검의 경지에 들어서 자연의 기를 끌어들여 사용하는 원리를 프리즈마에 사용했음을 아난다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파천은 자연의 기운과는 달리 프리즈마가 무한정 받아들여도 다스릴 수 있는지 알았다. 그러나 그건 그렇지가 않았다.

 자연의 기운은 기본적으로 인체에 해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프리즈마는 다르다. 담을 수 있는 양만큼만 사용할 수 있다. 인력과 철력이 동시에 작용한다는 건 미세한 불균형에도 깨어질 수 있다는 의미였다. 엄밀히 말하자면 인력과 척력이 동시에 작용하는 건 아니었다. 서로 순차적으로 번갈아가며 일어난다. 

 이러한 상호 교류의 작용을 빌어 물리력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파천이 받아들인 막대한 양의 프리즈마 중 다스릴 수 없는 부분이 인체에 심어진 영물에 영향을 주었던 것이다. 

 그것 때문에 간신히 맞춰 놓은 균형이 무너지며 벌어진 현상이었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한 균형은 스스로도 제어할 수 없었고 견디지 못해 실신했다.

 아난다는 파천의 내부를 다스리며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수호자도 이런 경우가 일어날 거라는 예측을 하지는 못했다. 전혀 고려 하지 않은 부분에서 난관을 만났으니 여간 답답한게 아니었다. 

 도나투스가 열을 내며 말했다. 

 “그것이 무엇이 문제가 된단 말이냐?” “누가 문제가 된다고 했습니까? 단지 염려스러울 따름이라 했지요.” 너울은 괜히 말 한마디 잘못했다 곤경에 처하게 되자 자신의 입을 나무라고 싶은 심정이었다. 

 “네가 걱정하는 게 뭔지는 안다. 아난다의 전생이 쿠사누스라는 게 영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도 잘 알고 있어. 그렇다고 해서 그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마저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리고 솔직히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전설이 어떤 경로로, 누가 퍼트렸는지도 모르는 시점에 무조건적으로 편견을 지니고 있는 건 옳지 않다. 

 쿠사누스가 제왕의 측근이라는 건 사실이겠지만 제왕이 정말로 영자들을 탄압했는지조차 명확하지 않은 이 마당에 그런 얘기가 가당키나 하더냐.“ “왜 저보고 그러십니까? 제가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아니잖습니까. 다른 영자들이 그런 편견을 지닐 가능성이 있다는 거죠.” 너울은 정말이지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이때다. 말 많은 미타가 일방적으로 몰리고 있는 너울을 돕고자 나섰다.

 “너울을 생각을 나무랄 건 못 되는 것 같은데요. 편견이라고 하셨는데 그것마저 증명할 기준이 없잖아요. 현재의 냉엄한 현실은 그것이 일반적인 시선입니다. 선발대를 이끄시는 아난다 님의 전신이 쿠사누스라면 삐딱한 시선으로 볼 자들은 많겠죠. 너울은 그런 점에서 염려가 된다고 했던 거구요. 저도 걱정이 되는걸요.” “뭐야.” “걱정해 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좀 충격적인 건 사실이었어요. 이곳 무한계는 몰라도 천상계만 해도 잠자는 대지가 언젠가는 깨어날 거라며 쑤군거리고들 있죠..

 만약 그들이 우리들 세계로 침입해 들어온다면 그리고 그들이 정말 전설이 말하는 대로 그런 경향의 영자들이라며 우리 세계를 지배하려 들게 분명하죠. 그런 점에서 현 영계에 제왕의 측근인 쿠사누스가 나타났다는 건 그만큼 심각하게 받아들여질 소지가 크다는 거죠. 

 그것도 다른 분도 아닌 아난다 님이 그 장본인이시니.......“ 매우 객관적인 지적이었다. 그럼에도 도나투스는 반박을 했다. 

 “그런 편견들을 지니고 있으니 영계가 이 모양이지. 서로의 입장과 생각이 조금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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