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문의 연쇄 살인 사건
팽팽하게 감겨 있던 태엽이 느슨하게 풀어진 것 같았다. 바로크는 움직일 수도, 생각도, 판단도 할 수 없는 인형과 다를 바가 없었다. 비행선에서 보여 주었던 날카로움은 무뎌져 보이지도 않았고, 누군가 목에 칼을 들이대도 풀어진 눈은 여전할 듯싶었다.
그를 한 번이라도 대면했던 자라면 의심의 눈초리를 지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파천과 라미레스의 눈길이 의문을 풀어달라 마이어를 중용한다.
마이어는 확실히 당황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애써 태연함을 가장해 보지만 그것이 더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설명을 해줘야 할 것 같은데.” 라미레스의 음성은 비록 나직하고 부드러웠지만 추궁의 의미만은 분명했다.
네 놈이 이렇게 만든 거지, 라는 거의 확신에 찬 파천과 라미레스의 눈길을 마이어는 직시하지 못하고 피하기만 했다. 그것도 잠시, 그는 억울하다는 듯 해명하기 시작했다.
“절 의심하시는군요? 그러나 전 결백합니다. 바로크가 왜 이런 상태가 됐는지......저도 궁금할 따름입니다.” “이 자가 유클릿에 있게 된 경위를 설명해 보게.”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위기에 처했어도 당당할 수 있다는 걸 모두 용기라 불러 줄 수는 없다. 파천은 마이어가 참 뻔뻔하다는 생각을 했다. 발뺌을 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파천은 이 일을 그냥 묵과하지는 않으리라 다짐했다. 결함이 없다면 숨길 것도, 숨겨서도 안 되는 상황이었다. 스스로의 결백함을 증명해 보여야만 했다.
“이번 일을 그냥 넘기지는 않겠고. 바로크의 일을 전체 전사들에게 알리겠소. 그리고 전사평의회가 어떻게 처결하는지를 내 지켜 보겠소.” 파천이 굳이 이렇게 말한 데는 나름의 계산이 있어서였다. 단지 마이어 본인과만 결부되어 있는 일일 경우 그는 어떻게 해서든 더 이상 확대되는 걸 원치 않을 것이다.
이런 경우라면 알고 싶은 걸 듣기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바로크의 일이 외부로 알려지면 괜한 오해를 받게 될 테고 이로 인해 전사의 명예를 실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그의 의형인 유클릿을 무슨 면목으로 대하겠는가?
그러나 유클릿 전사단 전체와 관련되어 있고 유클릿이 직접 개입한 일이라면 상황은 좀더 복잡해진다.
유클릿을 찾아가겠다는 라미레스를 극구 만류한 걸로 봐서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다. 파천은 마이어가 어떤 말로 위기를 모면할지를 기다렸다.
“제발 내 결백을 믿어 주시오. 난 정말 억울할 따름이오.” 마이어는 파천과 라미레스가 찾아와 바로크를 언급한 순간, 올 것이 왔구나, 라는 심정이 되었었다. 지금까지는 이 일로 곤란을 겪은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항상 내심의 불안거리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상세히 털어놓으면 될 것 아닙니까?” 마이어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변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좋소, 말하리다. 바로크와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상처를 입은 상태였소. 의식을 찾지 못하고 저렇게 멍하게 있을 때도 간혹 있지만 다른 때는 비교적 정상적이오. 나 또한 저렇게 된 이유를 알고 싶소.
두 분은 내가 저렇게 만든 게 아닌가 의심하시는 것 같은데, 정말이지 나와는 상관이 없는 일이오. 단지 난 바로크를 보살펴 주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숨기려 한 겁니까? 당신이 결백하다면 굳이 외부에 알려지길 꺼려 할 이유는 없어 보이는데.” “그것만은 절대로 안 되오.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 이 정도 선에서 눈감아 주십시오. 라미레스 님, 절 못 믿습니까? 저는 전사의 명예를 실추시킬 만한 일을 지금껏 해본 적이 없습니다.” 간절한 눈빛에 진실을 담으려고 노력하는 마이어의 모습을 라미레스는 너무도 간단히 외면했다.
“그러니까 얘기해 보라는 거야. 비밀을 요하는 일이라면 끝까지 지켜 줄 테니 안심하고.” 라미레스가 고집을 부리면 웬만해서 꺾을 수 없다는 걸 마이어는 잘 알고 있었다. 비록 직접 겪어 본건 아니지만 의형인 유클릿에게서 수차례 들은 기억이 있었다.
마이어도 더 이상은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았던지 얼굴에 체념의 빛을 빠르게 떠올린다.
“휴우, 대신......비밀은 지켜 주셔야 합니다.” “물론이지. 내 입은 자네 생각보다 무거울 걸세.” 마이어는 입을 열 듯 열 듯 하다 다시 다문다. 마이어의 해명을 기다리다 답답해진 라미레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안 되겠군. 유클릿을 만나서 해결 봐야겠어.” “이, 이것 왜 이러십니까? 제가 죽는 꼴을 보셔야 속이 시원하시겠습니다?” 소맥자락을 붙들고 늘어지는 마이어를 라미레스는 차가운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어쩔텐가?” “알겠습니다. 속 시원히 말씀드릴테니...... 일단은 앉으십시오.” 비밀이 드러나는 것보다 라미레스가 유클릿에게 달려가는 걸 마이어는 더 두려워하는 게 분명했다. 뭔가 있기는 있는 것 같았다.
“사실 처음엔 바로크인 줄도 몰랐습니다. 저 자를 처음 본 곳은...... 칠대부족 중 하나인 벨거서스의 비밀사원에서였습니다. 오대전사단주님들과 핵심인물들이 모두 초청 받은 자리였죠.” “벨거서스가 오대전사단주들을 초청해?” “네.” “별일이로군.” “한 가지 일을 상의하기 위함이었죠. 이건 꼭 비밀을 지켜 주셔야 합니다.” “아, 글쎄 알았다니까.” “아시다시피 칠대부족 간에 왕래가 뜸해진 지 꽤 오래된 일 아닙니까?” “그랬지.” “그들간의 사이는 외부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더 심각한 것 같았습니다. 오죽하면 우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겠습니까?” “빨리 본론으로 들어가지.” 라미레스의 독촉에 마이어가 잠시 뜸을 들였다. 최대한 말을 가려서 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만큼 신중해질 필요가 있었다. 한마디라도 말을 실수하는 날에는 폭탄의 뇌관을 건든 것 같은 일이 벌어지리라고 마이어는 생각했다.
“벨거서스는 당시 위험에 직면해 있었죠. 어찌 보면 별일 아닐 수 도 있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발전되면 벨거서스 자체가 소멸할 수도 있는 위기였습니다.
어떤 경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한 가지 보물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알고 보니 용족의 것이었습니다.
우연히 취득한 것이 용족의 것으로 판명나자 벨거서스는 당황했죠. 돌려주려고도 생각해 봤지만 오해를 사는 게 두려운 듯했습니다.” 그럴 만도 했다. 칠대부족 중 가장 강한 용족은 여타의 여섯 부족과는 비교를 거부할 정도로 차이가 났다. 게다가 성격이 불같고 단순한 면이 많아 그들에게 변명 따위는 통하지 않음을 누구보다 벨거서스가 잘 알았다.
그래서 그 보물을 처리하기 위해 평소 친분 관계에 있던 오대전사단주를 모두 한자리에 불러 모은 것이다. 오대전사단은 경쟁관계에 있으면서도 서로간의 끈끈한 동류의식이 존재했다. 비록 표면적으로는 대립과 대결 중에 있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 단주들과 수뇌부들간에는 친교가 깊다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는가?” “그 보물을 우리가 잠시 맡아 두기로 했습니다. 만약 용족이 이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벨거서스라면 오해를 살 수 있지만 우리라면 그럴 가능성이 희박했죠.” “하긴 그렇겠군. 같은 칠대부족이 아니고는 그것이 용족의 보물인지는 알아보지 못하겠지. 그런데 그 보물이란 게 대체 뭐였는데 그리 호들갑을 떤 건가?” “그건 정말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바로크와는 무관하니 그와 관련된 이야기만 하겠습니다.” 라미레스는 입을 쩍 다셨다.
“전 당시 비밀사원 내를 둘러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참 아름다운 곳이더군요. 혼자서 여기저기 경치를 감상하며 돌아다니게 되었는데 그만......” 그는 길을 잃고 말았다. 마치 다른 세상에라도 온 것처럼 전경이 돌변하는가 싶더니 삐쭉삐쭉한 산봉우리들이 눈앞 가득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그는 운무 가득한 한 산의 꼭대기에 서 있었다. 바로 한걸음 앞에 바닥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절벽이 나타나자 마이어는 어찌된 일인지 연유를 몰라 당황했다.
그는 걸음을 돌이켜 한참을 헤맸다. 시야를 혼란케 하는 짙은 안개와 텁텁한 습기 속에서 헤매길 얼마였던가. 그는 공중을 날아도 보고 사방을 빠르게 살펴도 보았지만 돌아가야 할 비밀사원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저는 그곳이 다른 공간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벨거서스의 비밀사원에 다른 공간의 출구가 있었던 거죠.” “그래서?” 마이어는 겹쳐져 있는 공간의 출구를 찾기 위해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했다.
그럼에도 찾을 수 없게 되자 허탈한 심정이 되어 대체 이곳이 어디인가를 알아보기로 했다. 그러던 그의 눈에 무언가가 잡힌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몇 번을 둘러봤어도 발견하지 못한 것이었다. 교묘하게 위장되어 있었지만 그건 어떤 곳의 입구를 가리기 위해 설치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마이어는 그곳이 비밀사원으로 이어져 있으리라 확신했다.
이끼 가득한 덮개를 열어 제치자 안으로부터 전신을 엄습하는 한기가 몰려나왔다. 마이어는 들어갈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한동안 망설였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음을 깨닫자 선택할 수 있는 건 안을 향해 용감하게 발을 딛는 것뿐이었다.
“길고 긴 통로가 나타났습니다. 안으로 접어들면서 제가 확인할 수 있었던 건 오직 하나, 곳곳에 가득한 오랜 세월의 흔적이었습니다. 한참을 걸어 들어가니 넓은 광장이 나오더군요. 전 그때서야 그곳이 출구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되었죠.” 마이어는 광장 가운데로 나아갔다. 새파란 물이 찰랑이는 연못이 있고 그 가운데 그것보다 훨씬 짙은 색의 파란 불꽃이 수면 위에서 타오르고 있었다. 마이어는 시비한 전경에 잠시 넋을 잃고 쳐다보았다.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마이어는 곧바로 광장 곳곳을 면밀히 살펴보았다. 그가 발견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허탈해진 마이어는 다시 밖으로 걸어나오려고 발길을 돌렸다. 바로 그때였다.
“연못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무엇인가가 튀어나왔습니다.” “뭐였는데?” “모릅니다. 전 지금까지도 그게 뭔지 모르겠습니다.” 마이어가 본 것은 검은 물체였다. 단지 그렇게 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다. 영자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짐승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놈은 움직였으며 또한 말을 했다. 그놈은 새파란 불꽃에 닿아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불꽃 안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가?” “그는 날 살려 주겠다고 했습니다.” “허 참......” 라미레스는 점점 이상하세 흘러가는 마이어의 얘기가 좀 황당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난 어처구니없었죠” 마이어는 괴생명체의 말을 무시하고 밖으로 빠져 나오려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럴 수가 없었다. 괴생명체의 능력인지는 모르나 그는 한발도 떼어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당황한 마이어는 소리치며 저항했다. 그 모든 것이 소용없음을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놈은 날 살려 주는 대신에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습니다.” “혹시...... 그 조건이라는 게 바로크와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맞습니다. 그는 둘을 내게 맡겼습니다. 그중의 하나였죠.” “그 하나는?” “그는 얼마 견디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바로크는 보다시피 조금 이상하긴 해도 지금껏 별탈없이 잘 지내고 있죠.” “그래서 자네는 그 이상한 놈이 시키는 대로 순순히 바로크를 데리고 그곳을 빠져 나왔다는 말인가?” “저로서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거절했다면 난 그곳을 빠져나오지도 못했겠죠.” “자네는 왜 이 사실을 유클릿에게 알리지 않았나? 그 자와의 약속 때문인가?” “그런 이유도 있지만 어쨌든 전...... 비굴하게 생명을 구걸했습니다.” 간략하게 말했으나 그가 그곳에서 어떤 경험들을 했는지 미루어 짐작케 했다.
“유클릿 전사단의 전사로서...... 전 명예를 더럽혔습니다. 전 정말...... 무서웠습니다. 그곳은...... 지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제가 지닌 능력은 그곳에서, 그 괴물 같은 놈 앞에서 아무런 소용도 없었죠. 나는 꿈틀거리는 벌레만도 못했습니다.” 전사들은 고지식하고 단순한 면이 많다. 스스로 표현한 것처럼 목숨을 구걸해서 살아난 것은 그의 입장에서 보면 결코 밝힐 수 없는 치부와도 같은 것이었다.
“그놈이 바라는 건 뭐였나? 단지 바로크와 동행하라는 것뿐이었나?” “네, 데려 가서 수하로 써먹으라고 했습니다. 매우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거란 말과 함께. 지금까지는 바로크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습니다. 알고 있다 해도 별달리 이상하게 생각지도 않았겠지요.” 파천은 바로크를 다시 살펴보았다. 멍한 시선. 파천이 느낄 수 있는 건 바로크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뿐이었다.
“하나가 죽었다고 했죠? 왜 죽었죠?” “나도 모르오.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더니 그냥......죽었소.” “그래서 어떻게 했습니까?” “바로크가 데리고 나갔습니다. 따라가 봤더니 땅에다 붇더군요.” “땅에다 묻어요?” “그렇소.” 영자들은 장례를 치르지 않는다. 죽은 영자를 매장하는 풍습은 없었다. 파천은 좀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어쩔 셈이었소? 이대로 바로크의 일을 묻어 둘 참이었습니까?” “그럼 어쩌겠소? 나름대로 바로크를 치료해 사정을 알아보려고도 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했죠. 그리고 어쨌든 바로크는 내 명령에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능력있고 충실한 수하였소.
그래서...... 더 이상 캐보려는 노력을 중단했던 겁니다. 그 일에 집착할수록 당시의 일이 떠올라...... 중단하게 된 거죠.“ 스스로의 과거와 의지마저 잃고 살아가야 하는 바로크를 파천은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치료할 방법은 없나?” 파천의 물음에 라미레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글세...... 아직은 모르겠는데.” “벨거서스의 비밀사원에 다시 간다면 그 출구를 찾을 수는 있겠소?” “모르겠소. 대충의 위치는 알지만 다시 찾아낼 수 장담하지 못하오.”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었던지라 마이어는 말하면서도 괴로워했다. 그가 염려하고 두려워하는 건 이런 사실이 유클릿에게 알려지는 것이었다.
항상 의제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해 오던 유클릿이다. 만약 그가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실망이 크겠는가? 마이어는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바로크.” 파천이 다시 불렀다. 바로크에게서는 그 어떤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이런 상태가 되는 게 자주 있었소?” “가끔식...... 그리 자주는 아니오. 이러다가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오고는 했소.” “자신이 누군지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겁니까?” “제가 말해 줬습니다만...... 별 관심도 없는 듯했소. 바로크는 지극히 단순하오. 내가 지시하는 것만을 따릅니다. 다른 이들의 명령엔 관심도 기울이지 않소.” “그 이상한 괴물이 바로크를 동행시킨 목적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지 않았소?” “물론 걱정이 되었지요. 그렇지만 지금까지 별탈이 없었기에......” 파천도 그 자가 왜 바로크를 마이어에게 딸려 보냈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답은 나오지 않는다. 지금으로서는 아무것도 짐작할 수 없었다. 그 자의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아보려면 좀 더 시간을 두고 바로크를 지켜보는 수밖엔 없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결과 앞에 파천도 라미레스도 어찌해야 할지 얼른 판단이 서지 않았다. 바로크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니 마이어에게서 때어놓는 것도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끝까지 유클릿에게는 말하지 않고 묻어 줄 작정인가?” “그럴 수 있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별탈만 없다면 그로서는 최상의 선택이자 바람이었다. 마이어는 굳이 일을 복잡하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마이어는 몇 번이고 비밀을 지켜줄 것을 라미레스와 파천에게 간청했다.
문제는 바로크의 옛 수하들이었다. 그들은 바로크가 왜 자신들을 외면하는지를 알고 싶어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바로크 전사단을 예전처럼 부활시키길 원한다.
‘바로크 전사들이 습격을 당했다고 했다. 단순한 우연일까,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사전에 계획된 일이었을까? 만약 계획적인 것이라면 왜 이런 일을 벌이는 거지? 이런 일로 얻는 게 없을 텐데.’ 바로크가 필요했다 해도 굳이 수하들까지 처치할 이유는 없었다. 그들은 아무런 비중도 없는 평범한 전사들일 뿐이다. 아무리 따져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었다.
라미레스가 몇 번이고 바로크의 상태를 알아본답시고 이리저리 주물럭거려 보았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일단은 지켜보기로 합시다. 혹시라도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면 연락을 주십시오.” 파천이 그 말을 끝으로 일어서자 라미레스도 그곳을 나섰다. 그때까지도 바로크의 초점 없는 시선은 여전했다.
파천의 설명을 모두 다 들은 아난다가 심각한 표정을 했다. 라미레스는 더 이상 그 문제로 시름하지 말자고 했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다. 우리가 신격 쓸 일이 아닌 것 같다. 그리고 아무리 바로크 전사들의 처지가 안쓰럽다고 해도 더 이상은 관여하지 말. 쓸데없는 시간 소모일 뿐이야.” 파천은 그렇게 쉽게 마음을 비워 버릴 수가 없었다. 아난다 또한 라미레스와 같은 생각이었다.
“벨거스의 비밀사원에 가보지 않고는 알아낼 수 없을 것 같군요. 아니면 바로크를 치료해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만들지 않고서는.” “벨거서스에 가볼까?” 파천의 급작스런 제안에 라미레스가 손을 저었다.
“그럴 시간 없어. 너는 네 할 일만 신경써. 괜한 일에 관심 갖지 말고.” “이제는 어쩌실 작정이십니까? 메덴으로 가실 겁니까?” 아난다는 쉽게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좀더 상황을 지켜보고 나서 갔다 올 셈이야.” “거길 꼭 가야 하나?” 파천은 메테우스의 석탑에 자신이 꼭 가야 하는가, 의구심을 가졌다. 괜한 시간 낭비인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건 아난다 역시 마찬가지였다. 수호자가 그렇게 시켰다니 잠자코 따르고 있기는 했지만 어쩐지 미심쩍은 부분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라미레스를 의심할 수도 없는 노릇5이었다. 그곳까지 아무런 탈 없이 갔다 올 수 있을까 하는 염려도 내심 걸렸다.
원탁의 허락이 없이는 메테우스의 석탑 근처에도 갈 수가 없다.
메덴의 중심에 원탁이 열리는 거대한 석전이 하나 있는데 그곳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강으로 나갈 수 없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 일대는 감시가 심해 라미레스라 하더라도 감시의 눈길을 피해 쉽게 오가기는 힘들다.
“그들이 허락해 줄까요?” “하게 말들어야지.” 무슨 묘책이라도 있는 듯 자신감을 보이는 라미레스를 파천은 묵묵히 바라본다.
‘풀지 못한 수수께끼들이 그곳에서 모두 풀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호자의 흔적이 그곳에 남아 있다면 가서 손해 볼 건 없다.. 지금은 와서 시간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니다. 확실한 것 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 게 더 중요하다. 무슨 단서든 찾을 수 있을거야.’ 파천은 될 수 있는 한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밤이 긴것 같아도 언젠가는 아침이 오는 법이다.
파천은 라미레스, 아난다가 들어선 곳은 오대전사단주가 함께 모여 있는 실내였다. 그들은 일어서서 파천 일행을 예의를 다해 영접했다.
“어서 오십시오. 지내시기에 불편하지는 않으셨는지요?” 에이어 전사단의 단주 에이어였다. 그는 부드러운 사내였다. 전사에 대해 파천이 지닌 고정관념들은 대체적으로 고집스럽고 괴팍하고 거친 자들의 모습으로 채워져 있다. 물론 앙샹뜨 같은 경우에는 전혀 해당 사항이 없지만 대체로 그렇게 여겨졌다.
그런 점에서 이들 오대전사단주들은 파천의 생각을 송두리째 허물어 버렸다고 할 수 있다.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인상들이 그랬고, 부드러운 표정도 한몫 거들었다. 특히 에이어는 말투까지 정중하기 그지없어 외양만으로는 전사라고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무슨 일로 저희들을 보자고 하셨는지요?” 아난다의 정중한 물음에 유클릿이 대답했다.
“부탁을 드리고자 모셨습니다.” 유클릿은 전체적으로 차가운 인상이었지만 눈빛만은 따뜻했다.
라미레스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부탁이라니? 그대들이 우리한테 부탁할 일이 무에 있다고 그러는가?"
에이어가 설명했다.
“메덴과 중재를 부탁드리고자 모셨습니다.” “중재?” “그들이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변함없이 계획대로 일을 진행시켜 나갈 겁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엔 메덴과 부딪치게 됩니다.
그 결과는 참혹합니다. 모두가 원치 않는 결과를 낳게 될 것입니다. 저희들이 직접 협상을 해야겠지만 아시다시피......그들과는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서로간의 입장 차이가 너무도 분명하기에 타협점은 없다고 불 수 있습니다.” “그걸 알면서 중재를 해달라는 건가? 게다가 우리에게 무슨 역량이 있어 중재를 할 수 있겠는가?” “두 분은 가능합니다. 저희들의 생각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실리보다는 명분입다. 메덴에서 고의적인 핍박만 가해 오지 않는다면 어떤 요구도 수용할 수 있습니다.
단, 대외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건 단 하나, 전사평의회 결성을 메덴에서 묵인해 주고 나아가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는 거죠.” “허 참, 그걸 용납하지 못하겠다는 게 메덴의 입장이거늘...... 협상의 여자가 없지 않은가?” “아닙니다.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게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무한계를 대표하는 게 자신들이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거겠지. 그리고 이 기회를 빌어 그간 별러 왔던 전사들의 기세를 꺾어 놓을 참이겠고.”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평의회가 결성된다고 해도 그들이 지금껏 지녀 왔던 지위가 여전하고 우리 또한 그걸 인정한다면...... 사정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대단한 발언이었다. 자존심 강하기로 치자면 수련자에 뒤질 것 없는 전사들이었다. 그런데도 저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마음을 비웠다는 뜻이기도 했다. 대외적인 적이 출현하지 않았다면 이렇게까지 자존심을 굽힐 자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메덴의 수련자들보다도 어떤 면에서는 더 순수할지도 모른다. 지켜내고 싶다. 오대주사단주의 공통적인 생각이었다. 지금껏 전사들이 서로 분쟁했던 건 힘의 우외를 겨뤄 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상대를 존중하는 방식에도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전사는 겨룸을 통해 스스로가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그들이 생각하는 삶의 본질이 그러했다. 절대로 합쳐질 수 없을 것 같던 전사들이 서로의 뜻을 잠시간 꺾고 서로를 인정하기 시작한 순간 이들은 무한계에 속한 하나의 영자로 돌아온 것이다. 지켜내야 할 소중한 터전을 위해서 전사들은 자존심을 잠시 접어 두기로 한 것이다.
파천은 그들의 눈에서 조금의 거짓도 섞여 있지 않은 진실은 발견했다. 라미레스가 진정 놀랍다는 듯 그들을 칭찬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그럴 수만 있다면야...... 메덴에서도 더 이상의 무리한 요구는 하지 않을 거야. 아암, 그렇고 말고.” “이건 단지 저희들의 뜻일 뿐입니다. 전사평의회 전체의 뜻은 아니지요. 다른 단주들 중에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려는 자들도 상당할 겁니다. 또한 메덴이 압박을 가해 올수록 그들에게 동조하는 자들은 늘어 가겠죠.
그래서 대외적으로는 다른 여타의 조건을 내걸지 말고 전사평의회를 인정한다는 그 한마디만 해주면 됩니다. 그 외에는 내부적으로 뜻을 조율해 메덴의 그 어떠한 요구도 모두 수용할 생각입니다.
수련자를 파견해 감찰을 한다 해도 응할 것이며,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그들의 지시를 기쁜 마음으로 따를 용의가 있습니다.“ “그렇게까지?” “네.” “흐음.” 에이어의 말을 종합해 보면 표면적으로는 메덴이 전사평회의를 인정해 줌으로써 전사들의 자존심을 세워주고 대등한 위치에 서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메덴의 복속되겠다는 뜻이었다. 스스로의 역량을 냉정하게 매우 객관적으로 판단치 않고는 내릴 수 없는 결정이었다.
가장 걸림돌이라 여겼던 메덴과 전사들간의 불화만 잠재울 수 있다면 나아가 일치를 끌어낼 수만 있다면 무한계의 역량은 극대화시킬 수 있다. 지금으로서는 그리 어려울 게 없을 것 같았다.
“좋네. 이일은 내게 맡겨 주게. 어려움이 따를지라도 내 끝까지 성사시켜 보겠네.” 웬만해서는 섣불리 장담하지 않는 라미레스가 큰소리를 치는 건 다섯의 전사단주가 내린 숭고한 결정에 감동했기 때문이다. 가진 게 많을수록 욕심을 버리기는 쉽지 않다. 권력의 장점을 맛본 자가 대의를 위해서라지만 마음을 비우고 남의 밑으로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런 점에 라미레스는 감탄하는 것이다.
“감사합니다. 곧 메덴의 사자가 올 것입니다.” 아난다는 내심으로야 단주들의 결정이 반가웠지만 마음은 여전히 무거웠다. 파천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뜻이 상이한 전사들은 어떻게 다스릴 생각이십니까? 구체적인 대책이 세워져 있는지 묻고 싶군요.” 롬멜이 대답했다.
“결국엔 우리의 뜻에 따라 줄 거라 믿습니다. 평의회를 결성하게 된 건 나눠져 있는 전사들의 힘을 결집시켜 불순한 의도를 지닌 자들을 견제하자는 뜻이었습니다. 그 과정 중에 메덴과는 힘을 합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내려지더군요.
될 수 있는 한 우리의 자존심은 다치지 않는 선에서 원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껏 전부는 아니지만 대게의 수련자들은 전사들을 비난하고 무시해 왔으며, 그것도 모자라 무한계에서 떠나야 할 무리라고 비방해 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대수련자 카포입니다.
이런 사일반적인 시선을 우리들은 못 견뎌 했죠. 일반영자들도 겉으로는 우리를 두려워하지만 수련자들의 그런 영향 때문인지 은연중에 무시하는 경향이 짙습니다.
우리도 잘 압니다. 이렇게 쉽게 전사들이 하나로 합쳐질 수 있었던 이유는 오랜 기간 동안 쌓여온 울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같아서야 메덴과 한바탕 겨뤄 보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지만...... 그건 모두 멸망케 하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을 걸압니다.
우리가 바라는 건 그리 큰 게 아닙니다. 우리를 무한계의 일원으로 인정해 주는 것. 닥친 어려움에 맞설 동료로 기꺼이 받아들여 주는 것.
오만한 메덴의 수련자들이 전사평의회를 인정해 준다면...... 그간의 울분은 다소간 해소될 수 있으리라 봅니다.” ‘전사들에 대한 오래가 상당히 깊다고 볼 수 있어. 아난다조차 선발대가 가장 조심해야 할 자들로 전사들은 꼽지 않았던가? 내가 볼때는...... 오히려 수련자들보다는 전사들이 더 순수한 마음으로 무한계를 생각하는 것 같다.
대의를 위해 욕심을 버리는 저들이야말로 무한계가 필요로 하는 자들이다.’ 파천은 다섯 단주들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이들의 뜻이 아무리 숭고하고 별다른 사심이 없다 해도 앞으로의 난관을 모두 극복할 수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이들 중에 의장이 나와 준다면 모르지만 만약 전혀 의외의 전사가 의장이 되기라도 하는 날에는 모든 건 수포로 돌아갈 공산이 컸다.
의장이 되었다고 해도 사실상 메덴의 명령에 따르는 하부 조직처럼 전사평의회가 운영된다면 전사들은 반발할 것이고, 결국엔 분열이 조장될 것이다.
‘오대전사단의 비중을 감안하면 그런 일은 없겠지.’ 무턱대고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을 단주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간에는 이미 협의가 이루어진 상태지만 측근들에게조차 이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그만큼 전사들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잠시 뒤에 의장 선출을 위한 회의가 열립니다. 오대전사단이 공동으로 단일 대표를 내세우기로 결정했습니다. 별일이 없다면 우리 쪽이 내세운 대표가 의장으로 선출되겠지요.” 엑크하르트의 말은 파천 일행을 놀라게 했다. 누구를 대표로 뽑았는지 궁금했다.
“부족하지만 제가 중책을 맡게 되었습니다.” 에이어였다. 파천은 고개를 끄떡였다. 그라면 적임자란 생각이 들었다.
‘은연중 에이어가 중심 역할을 하고 있었어.’ 에이어는 중부권의 전체 전사들 가운데서도 실력뿐만 아니라 성품이나 지도력에 있어서도 최고로 손꼽힐 만한 인물이었다. 다른 네 명의 단주들이 별 이견 없이 그를 대표로 뽐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점이었다.
“세 분도 참석해 주십시오.” “외부인인 저희가 참석해도 되겠습니까?” 파천의 말에 에이어는 당치도 않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섭섭합니다. 어찌 외부인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라미레스는 겸연쩍었던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긴 한데...... 우리가 수련자임을 잊지는 말게.” ‘굳이 저렇게 말할 건 뭐람.’ 파천은 핀잔을 주려다 말았다.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다행이겠지만 어려움은 많을 겁니다. 여러분들이 뜻을 내비치는 순간부터는 각별히 조심하는 게 좋습니다.” 라미레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거야. 쉽지 않겠지. 그들이...... 아닐세, 그만두지.”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마는 라미레스를 파천은 의혹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전사들 간의 회합이 다시금 열렸다. 전사들을 대표할 의장을 선출하는 모임이었기에 긴장도는 저번보다 더했다.
어떤 이를 의장으로 선출하느냐에 따라 평의회의 성격이 달라지고 위상 또한 차이가 날 거란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전사들은 서로간의 뜻을 조율하느라 분주했다. 회의장 입구에서부터 후끈 달아오른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안으로 접어든 파천이 라미레스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에이어라면 별 반대 없이 의장으로 선출되게겠지?” “두고 봐야지.” 라미레스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파천과 라미레스, 아난다가 회의장에 나타난 걸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자들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는 별 거부감을 나타내지 않았다.
준비된 자리에 않은 파천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슈트레와 눈이 마주쳤다. 슈트레는 어떤 의미인지 모를 웃음을 보내왔다. 파천은 별로 상대하고 싶지 않은 자인지라 냉정하게 무시했다.
오늘 회의의 임시의장을 맡은 룸멜이 자리에서 일어나 아직도 소란스런 장내를 진정시켰다.
“세부적인 절차는 모두 이시리라 믿고 언급을 피하겠습니다. 먼저 후보자를 추천해 주십시오. 평의회 의원 다섯 분 이상의 추천을 받아야 정식 후보자로 등록됩니다.
결격 사유가 발견되자 않는 한 후보 자격에 특별한 제한은 없습니다. 후보로 등록되면 잠시간의 질문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후보자는 이번 회의 내에 추천되어야만 자격이 유효합니다. 이 점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이 회의에 참석하지 못한 후보자라면 대리자로 등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엔 추천한 분들이 보증인이 되시는 겁니다. 후보가 두 명 이상일 경우엔 그들 간의 결투로 결정하며 최후 승리자에 대한 과반수 동의로써 의장 선출을 결정하게 됩니다. 질문 있습니까?“ 슈트레가 일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한꺼번에 그에게로 집중되었다. 옆에 않아 있던 바이롬도 좀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후보자가 둘 이상일 경우엔 그들 간의 결투로 결정한다고 했는데...... 대리자를 내세워도 됩니까?” 파천은 피식 웃고야 말았다 회의장이 소란스러워진 건 당연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의장을 결정할 중요한 결투에 대리자를 내세운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이었던가.
“그건 안 됩니다.” “안 된다고 단정할 일은 아닌 것 같은데요.” 또 하나의 전사가 일어섰다. 그는 슈트레가 않은 곳과는 좀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파천은 기억하고 있었다.
‘저 자는 아까 회의장 입구 쪽에서 슈트레와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던 바로 그자인 것 같은데...... 이것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건가?” 롬멜은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지금 발언을 한 전사는 그와는 그리 사이가 좋지 못한 자였다.
“베롬잔두님, 무슨 뜻이죠?” “예를 들어 롬멜 단주께서 후보로 추대되었다고 칩시다. 결투에 수하 중 하나를 내보낸다면 전혀 하자가 없는 것 아닙니까?” “그럴 일은 없죠. 베롬 단주님은 수하들의 실력이 본인보다 더 출중한가 본데....... 전 그렇지 않습니다.” “하하하하.” “그렇지.” “베롬단주, 말도 되지 않는 소리 말고 그만 앉으시오.” “무슨 소리를 하자는 건지.” 여기저기서 야유 섞인 소리가 나왔지만 베롬은 흔들림 없이 의견을 말했다.
“굳이 그걸 제한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죠. 후보의 상태가 결투를 치를 수 없는 경우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대리자의 자격을 따져 보고 특별한 하자가 없다면 전혀 문제 될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본인이어야 한다는 조항을 붙일 이유가 없다는 것이지요.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베롬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롬멜은 좌우에 않아 있는 네 명의 단주들을 바라보았다. 유클릿이 일어섰다.
“대리자의 자격에 어떤 단서를 달면 되겠습니까?” 베롬은 잠시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막힘없이 말을 쏟아냈다.
“전사여아 합니다. 예를 들어 수련자를 내세운다거나 그런 일은 용납될 수 없겠지요. 두 번째는 아무래도 의장을 선출하는 중요한 결투이니 만큼 신분이 확실한 자여야 합니다. 웬 만큼 알려져 있는 인물이 아니면 곤란하다는 겁니다.
이 두 가지 요건만 갖추어진다면 대리자를 내세운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다고 봅니다.“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의견이군요. 그렇지만 만약에...... 대리자를 내세워 의장에 선출되었다고 했을 때 과연 그 역할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을까요? 누가 그 분을 평의회 의장으로 인정해 주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그 문제는 별개죠. 설마하니 그런 일이야 실제로 있겠습니까? 저는 단지 그럴 수도 있으니 굳이 대리자는 안 된다는 제한을 두지 말자는 뜻입니다.” 이루 분분한 의견이 나왔다.
결국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판단 때문이었던지 대리자로 결투를 수행해도 되는 것으로 결정 나게 되었다. 파천은 왠지 께름칙했다. 그렇지만 괜한 염려이겠거니 싶어 심중에 묻어 버렸다.
“자, 이제부터 후보 추천을 받도록 하겠습니다.” 롬멜의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유클릿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장내는 그가 누구를 추천하기 위해 일어섰다는 것 때문에 긴장감이 더 해졌다. 추천받는다면 모를까, 누굴 추천할 것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었다. 그건 오대주사단주 모두가 해당되는 일이었다. 하긴 스스로를 자천할 수도 있다.
“저는 에이어 전사단주님이신 에이어 님을 추천합니다. 여러 가지를 감안 했을 때 가장 적임자라고 생각합니다. ” 이때다. 엑크하르트와 롬멜, 옥캄이 차례로 일어서서 에이어를 지지하고 나섰다. 장내는 흥분의 도가니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오대전사단이 단일 후보를 내세우고 있지 않은가? 이미 그들 간에 의견 절충을 끝냈다는 걸 의미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다른 이들은 더 이상 추천이 무의미하다고 생각했다. 술렁대는 장내의 분위기를 봐서는 이대로 단일 후보로 결정될 가능성이 컸다. 오대전사단과 맞서기 싫은 이유도 있었지만 괜히 나섰다 망신을 당할게 뻔했기 때문이다.
몇몇 유력한 전사들의 얼굴에 낙담의 빛이 스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더 이상 없습니까?” 롬멜이 다시 한번 확인하고 나섰다. 장내는 조용했다. 스스로를 자천하는 자도 없었다. 더 이상의 후보 추대는 없을 것 같았다.
이때 슈트레가 일어섰다. 과연 누구를? 장내는 긴장이 극도로 고조되었다.
“에이어 님은 전사평의회 의장으로 적임자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단일 후보로 의장이 결정된다는 건 좀 맥빠지는 일이군ㅇ요. 그래서 제가 한분을 추천할까 합니다. 그분은 바로......” 뜸을 들이며 장내를 쓸어보는 슈트레의 입을 향해 전사들의 시선이 일제히 집중되었다.
에이어와 상대할 수 있는 전사는 나머지 오대전사단주가 아니면 힘들다. 그런 걸 감안할 때 그가 과연 누굴 지목할까에 관심이 집중된 것이다.
“바로 슐탄 전사단주님이십니다.” 슐탄.
슈트레는 그를 추천했다. 한쪽에 침묵을 지키고 있던 슐탄은 팔짱을 낀 채 두 눈을 감고 있었다. 별로 놀라는 눈치도 아니었다.
슈트레의 말이 이어졌다.
“한때는 오대전사단의 한자리를 차지할 정도였으니 그 능력은 말 할 것도 없습니다. 실력이나 지도력만 따져도 결코 에이어 님에게 뒤떨어지지 않는 분이라도 생각합니다.” 그러자 북부권의 사단주인 그레엄이 뒤를 이었다.
“저도 슐탄님을 지지합니다.” 지금은 라치오의 동료가 되어 있는 로이의 스승이기도 한 전사였다.
그레엄의 짧은 지지 표명에 이어 여기저기서 사전에 양속이라도 한 듯 추천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이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뜻밖의 일이었다. 한때는 오대전사단의 자리를 차지할 만큼 성세를 구가했다고 하지만 롬멜이 그 자리를 대신한 뒤로 세력은 극히 약해졌고 명성도 퇴색되었다. 바로크를 얻지 못한 것에 분노하여 수하들을 동원해 해체시켜 버릴 정도로 성품도 고약했다.
그런 자를 추천하는 이들이 저렇게 많다는 건 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걸 지켜보는 오대전사단주들은 서로의 얼굴을 찾으며 어이없어 했다.
물론 슐탄의 능력이 크게 뒤떨어지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참 세력을 떨칠 때도 에이어와는 분명한 격차가 있었다. 그런 그가 후보로 나선다고 해서 그다지 큰 불안거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의 분위기는 좀 이해가 가지 않는 구석이 많았기에 불안한 것이다.
라미레스와 아난다는 슐탄의 표정을 주위 깊게 살핀다.
롬멜은 회의를 진행시켜 나가야 했다.
“슐탄 단주께서...... 정식으로 후보에 등록되었습니다. 또...... 없습니까?” 누구보다 롬멜이 착잡한 심정이었다. 자신이 이끄는 롬멜 전사단은 오대전사단 중 가장 최근에 부각된 곳이다. 원래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슐탄을 밀어내고 얻어낸 영예였다. 그러니 어찌 보면 악연이라 할 수도 있는 슐탄이 후보로 나서는 걸 편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 슐탄이 의장이라도 되는 날에는 롬멜이 알게 모르게 받게 될 불이익은 꽤나 큰 것일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슐탄의 성품을 잘 알고 있는 그로서는 괜한 불안감에 착잡해하는 것이었다.
더 이상의 추천이 없자 후보 등록을 마감했다. 롬멜은 선언을 하면서 편치 않은 내심을 그대로 드러냈다.
“후보간의 결투로 의장 선출을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동안 혹시나 있을지 모를 불상사에 대비해 두 후보의 안전을 오대전사단이 공동으로 책임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폐회하겠습니다.” 첫 번째 살인. 전사평의회 의장 후보가 결정되던 바로 그 시간대에 벌어진 일이었다.
엑크하르트 전사단 소속의 한 전사가 목이 잘린 해 회의장과 좀 떨어진 건물 지붕에서 사지를 벌리고 깊숙이 박혀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이 일은 매소 하룬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누구 소행인지 밝혀내기 위해 조사가 진행되었지만 흉수는 좀체 알아낼 수 없었다.
공동 경비를 책임진 오대전사단의 경계가 더 철저해졌고, 수뇌부들은 연일 대책 회의를 열기에 바빴다.
두 번째 살인. 이번엔 슐탄측의 전사가 죽었다. 두 개의 심장 중 프리즈마와 관련이 있는 우측 심장이 적출된 채로 발견되었다. 그 다음에도 살인은 계속 이어졌다.
구구한 억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하룬은 공포와 긴장감에 휩싸여 갔다. 오대전사단의 촘촘하고 삼엄한 경비망을 헤집고 벌어졌다는 점과 기라성 같은 전사들이 운집한 곳에서 보란 듯 벌이고 있는 대담한 살인 행각에 모두들 치를 떨며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흉수는 두려움을 줄 정도로 강자였을 뿐만 아니라 작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정도로 신출귀몰했다. 그런 가운데 의장 후보로 추대된 두 전사들 간의 대결이 점차 가까워져 갔다.
밖의 소식을 알아보러 갔던 앙샹뜨가 내실로 들어서며 심각한 표정을 했다.
“전혀 단서조차 남기지 않다니...... 이대로 끝난다면 미궁 속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크겠어요.” “기강이 해이해져서 그래. 악, 소리라도 지르고 죽어야지 그냥 나자빠지니 무슨 단서를 얻을 것이며 흉수의 꼬리조차 볼 수 있겠어?” 권터는 동의라고 구하려는 듯 주위 동료들을 돌아보았다. 선발대가 모처럼 한자리에 모두 모여 있었다. 좋지 않은 일이 연달아 벌어지고 전체적인 분위기가 뒤숭숭해 파천이 모두를 한자리에 모아들인 것이다. 혹시라도 있을지 모를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 컸다.
“네 말에도 일리는 있다만...... 죽어 가는 마당에 그런 기력이라고 있었으려고. 끽 소리도 못하게끔 간단히 죽여 버린 그놈이 대단하다 할 밖에.” 도나투스의 의견에 파천도 동의했다.
그럼에도 전사들의 대응이 너무 허술했다는 점에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첫 번째야 그럴 수 있다고 치지만 재차 그런 일이 발생하도록 아무도 몰랐다는 점은 납득이 가지 않응 부분이었다.
흉수의 정확한 의도가 무엇인지는 모르나 각기 후보 진영의 전t사들을 겨냥했다는 것도 주목할 점이었다. 라미레스가 혀를 끌끌 차며 한심하다는 투로 말했다.
“전사들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됐어 전사단의 각 수뇌들이 눈에 불을 켤 만도 하지. 의장 선출을 지켜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늦어질 것 같은데? 파천, 어떻게 하지?” 메덴으로 가는 시기에 대한 물음이었다. 이 상태로 그냥 떠나기엔 뭔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이때 아난다가 그 동안의 태도와는 달리 시원스럽게 파천을 재촉하고 나섰다.
“메덴에서 특사를 보내온다고 했으니 일정은 더 늦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여기 일은 우리가 남아서 경과를 지켜볼 테니 두 분은 먼저 떠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아난다의 견해처럼 연달아 터지는 사건에 메덴 특사의 방문까지 겹쳤으니 예정대로 결투를 진행시킬 리는 없었다. 파천은 잠시 망설였다.
“얼마나 걸릴까?” 라미레스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말을 흐렸다.
“글쎄......” “좋아, 아무래도 그래야겠어. 페리칸.” “네.” “너와 카이로는 아난다를 도와 선발대의 안전을 책임진다.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마라, 알겠니?” “존명.” 페리칸의 우렁찬 대답에 선발대원들은 저마다 어색한 표정들을 지어 보였다. 그들은 파천을 대하는 페리칸의 행동과 말이 낯설기만 했다.
천상계에서 온 아리한들은 페리칸의 지금 태도가 신장들이 천추를 대하는 것과 흡사하다고 생각했다. 페리칸의 명성이나 능력, 신분에 비춰 볼 때 상식적으로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파천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따가운 시선을 느끼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왜들 그러지?” 너울이 파천을 빤히 쳐다본다.
“이것 할 말은 아닌데...... 저...... 분이 혹시...... 밝혀져서는 곤란한 무슨 치명적인...... 약점이라도 네게 잡힌 것 아니냐? 그래서 너는 그걸 빌미로......” 그제야 파천은 분위기가 이상해진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이걸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까? 파천은 난감함에 당황했다.
페리칸은 파천의 표정을 살피고는 슬쩍 고개를 돌리며 외면한다. 그를 도와줄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페리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흐릿한 미소가 어려 있다.
카이로 역시 딴청을 부린다. 사정을 잘 알고 있는 라미레스와 아난다도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좋을 대로 생각해. 나도 마땅히 설명할 말이 떠오르지 않으니까.” “참, 그러고 보니 네가 인간세에 있을 때 황제였다고 했던가? 그래도 그렇지, 인간세의 인연을 영계에까지 이어 가려는 건 너무 심한 것 아닐까? 당시의 권세를 여기서까지 행세하려고 하는 건 지나친 처사 같은데.” 너울의 따끔한 충고에 파천은 할 말을 잃었다. 일일이 설명하기도 귀찮고 그럴 필요도 없었던지라 슬쩍 다른 얘기로 넘어갔다.
“그건 그렇고 너울, 대적자의 보진이 남부권을 점령하면 선계와 대치하는 상황이 될 텐데대책은 있나?” “나야 모르지.” 성의 없는 대답에 각시가 덧붙인다.
“대적자의 본진이라도 본계를 침범하지는 못할걸.” 너울 등의 선발대 내 선인들의 실력에 비춰 보면 그 말에 신빙성이 가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 무력을 담당하는 선계의 장수들은 대적자들과 능히 대결을 벌일 수 있을 정도의 강자들이었다.
직접 겪어 보지 않은 파천으로서야 불신의 눈빛을 보내는 건 당연했다. 이때 라미레스가 각시의 말에 무게를 실어 준다.
“그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선계를 치려는 짓은 하지 않을 거다. 앞뒤로 적과 맞서고야 무슨 승산을 기대하겠어? 선계의 수뇌부들이 아무리 다른 이들보다 참을성이 많다고는 하지만 마계를 견제해야 하는 입장인데 그런 눈에 거슬리는 꼴을 주고 보지는 않겠지.
난 지금까지도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과연...... 천상계의 신장들과 선계의 선장들 중 누가 더 강할까, 하는 점이다. 내 생각엔 아마 비슷할 것 같은데 말야.“ 파천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너울과 각시는 그것 보라는 듯 의기양양해져 어깨를 들썩였다. 너울은 표정 관리가 안 돼 연신 득의의 웃음을 흘린다.
밖의 상황이 어떻든 선발대의 분위기는 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져있었다. 태평스러웠고 여유가 넘쳤다. 명칭만 선발대가 아닌 명실공히 그 이름 값에 걸맞는 위용을 갖췄다. 그런 점에서 기인한 자신감 들이었다.
더군다나 가장 큰 장애로 여겨 왔던 전사들의 호의적인 태도도 이들을 안심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결과적으로는 각각의 성향을 지니고 있는 전사들이 평의회라는 이름으로 묶인 게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 된 것이다. 대립과 대치가 지금까지도 여전했다면 선발대의 여정은 결단코 늦출 수 없는 긴장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상황의 전개가 뜻밖으로 잘 풀려 나가는 듯하니 대원들은 조여 놨던 긴장감을 일시에 풀어버렸다.
“흉수는 금방 가려질 거야. 별일이야 있으려고.” 권터의 낙관적인 기대처럼 선발대원들 모두는 이번 사건을 그다지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눈치들이다. 서로 힘을 합하기 위해 모였다지만 얼마 전까지 적으로 마주서 있던 전사들이다. 이런 사고가 일어나는 것쯤 예상하지 못했던 바가 아니었다. 이보다 더 큰 일이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해도 그다지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파천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불길해.’ 그리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하룬의 혼란이 꽤나 심각한 일일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건 그로부터 한참이 더 지난 이후였다.
살인은 멈추지 않고 여기저기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했다. 핵심 전사단들이 머무는 곳이 아닌 외부 지역에서부터 단계적으로 좁혀 오는 듯 판단되는 살행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
연쇄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보아 흉수는 하나가 아닌 게 분명해졌다. 계획적이고 치밀한 살행은 하룬 전지역에 소요를 일으킬 심산으로 저질러지는 듯 보였다.
그렇게 판단되는 근거는 살수의 방법이 지나치게 잔인한 점과 시체를 눈에 잘 뛰는 곳에 전시라도 하려는 듯 갖다 놓은 점을 들 수 있었다.
거의 매 순간을 죽음과 동반하는 싸움터에서 지내온 전사들이라 해도 이런 식의 곤두서는 긴장감은 그리 즐거운 것이 될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분명한 적이라면 벅찰지라도 죽음을 각오하면 그리 큰 두려움을 가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번 경우엔 사정이 달랐다. 모두가 종지라고 여겼던 무리중에 구분할 길 없이 뒤섞인 흉수들로 인해 전사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경계해야만 했고, 한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이런 긴장감이 조는 피로감은 생각보다 큰 것이다.
그나마 위계가 철저한 전사단의 경우엔 동요가 심하지 않았지만 소속이 없는 전사들의 경우엔 반응하는 양상이 달랐다 잦은 충돌로 소란을 일으키기 일쑤였고 별일도 아닌 것으로 생사를 가늠하기도 했다.
하룬의 전체 치안과 경비를 담당하게 된 오대전다산도 중심이 아닌 주변 지역에서 발생하는 문제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었다. 흉수를 색출하기 위해 전사단들의 수뇌들은 연일 회동했으면 대책을 강구했다. 마땅한 묘안이 있을 리가 없었다. 딴에는 경비를 철저히 했음에도 그걸 비웃듯 벌어지는 살수였다.
골머리를 앓던 수뇌부는 결국엔 비상 수단을 강구하기에 이른다. 범인 색출을 전담한 롬멜이 예하 전사들을 동원해 하룬 전 지역을 훑기 시작한 것이다. 롬멜은 이 일을 위해 다른 몇몇 전사단에 도움을 청했고 그들은 순순히 나서서 힘을 보탰다.
신분이 확실치 않은 전사들을 우선적으로 가려냈으면 그들의 행적을 조사했다. 그런가 하면 주위에서 제보 받은 정보들을 토대로 용의선상을 좁혀갔다. 이렇게 해서 좀 더 정밀한 조사가 요구되는 이들은 강제로 잡아들이게 했다.
반발도 만만찮았다. 대다수는 용의자로 지목되지 않기 위해 이들에게 비교적 협조적이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도 꽤 되었으며, 그런 자들 중에는 극단적으로 치열하게 대항을 해오는 경우도 있었다. 하룬의 전사평의회는 시작부터 조짐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 놓지 못해? 롬멜을 불러와. 소속이 없으면 무조건 잡아들이나? 너희들 눈에는 내가 그런 짓을 할 놈으로 보여?” 한 전사가 롬멜 전사들에게 포박당해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대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인지라 전사들의 이목을 한꺼번에 집중시켰다.
“조용히 해라. 수상한 점이 발견되지 않으면 다시 풀어준다.” “닥쳐.” 파라슈의 끝을 저항하는 전사의 복부 깊숙이 찔러 넣었다.
퍽 “헉” 짧은 신음을 지르며 축 늘어진 전사를 롬멜 소속의 전사들이 떠메고 사라진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 여기뿐만이 아니었다.
“네 이름은?” “......”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퍼퍽 “커억.” 팡은 기절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파...... 앙. 팡이다. ” “너는 어디 소속이냐?” 팡은 여기 끌려오면서 몇 번이나 그 질문에 답했었다. 그럼에도 저 빌어먹을 놈이 또 묻지 않는가.
심문을 한답시고 꼬치꼬치 캐묻다가는 의심이 가는 대목이 있으면 자백을 받아내려는 듯 고통을 가했다. 담당한 조사관이 동일한 것이 아니라 몇 번이고 교체가 되다 보니 했던 질문에 또다시 답해야 하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건...... 아까도 물었던 질문인데...... ” “너는 내가 묻는 말에 성의를 다해 짧게 대답하면 된다. 질문은 허용하지 않는다.” 퍽 쇠사슬에 전신을 묶인 채 천장에 매달려 있던 팡은 복부를 파고드는 고통에 또다시 비명을 질렀다. 은빛으로 출렁거리는 사슬을 팡은 가늘게 뜬 눈으로 쳐다본다.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가해지는 고통은 팡을 더욱 비참한 지경으로 몰아넣었다. 죽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그를 점차 나약하게 만들었다.
‘저걸 내 힘으로는 자를 수가 없다. 여기서...... 이렇게 어이없이 생을 마감해야 하는가?’ “소속은?” 의자에 앉은 이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는 팡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는 게 무척이나 즐겁다는 표정이었다.
“소속이...... 있었으면 이렇게 잡혀 오지도 않았겠...... 커헉.” 이번에는 등 쪽이었다. 밀려오는 고통에 팡은 정신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다.
“다시 묻는다. 소속은?” “없...... 다.” “넌 전사가 아니다. 그렇지?” “그렇다.” “하룬에는 무슨 일로 왔나?” “소문을 듣고 왔다.” “무슨 소문?” “선발...... 대가 여기에 왔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찾아 왔다.” “호, 그래? 네가 주로 거주하던 곳은 어디지? 아니지, 네놈의 행색을 보아하니 떠돌이가 분명해 보이는데 일정한 거주지가 있을 턱이 없겠군.” “난 뜰에서 살았었다.” 전사는 팡의 대답이 의외였던지 다시 쳐다본다.
“뜰에서 왔다고?” “그렇다.” “그 먼 곳에서 선발대를 뒤쫓아 여기까지 왔다는 건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역시나 의심스러운 놈이야.” “친구를 만나러 왔다.” 철컹 팡은 심문실의 문이 또다시 열리는 걸 불안스레 쳐다보았다.
‘또 다른 놈으로 교체되는 건가?’ 팡은 자신을 심문하는 자들이 어디 소속의 전사들인지 모른다. 팡도 이번 사건에 대해 들어 알고 있었다. 또한 하룬 전지역에 걸친 대대적인 조사를 담당한 곳이 롬멜 전사단이란 것도 귀동냥으로 들었다. 팡의 눈에 비친 자들은 롬멜 전사는 아닌 것 같았다.
“이봐, 호출이다.” “무슨 일인데 그래?” “외곽 순찰조에 뽑힌 것 같은데......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이놈은 어쩌고?” “나한테 넘겨.” “쳇, 잘만 닦달하면 한 건 올릴 수도 있었는데...... 아쉽군.” 팡은 자신의 얼굴을 노려보는 전사의 눈빛을 외면하지 않고 맞받았다.
“아직도 눈빛이 살아있군. 사전을 봐줬더니 이놈이.” “그만하고 빨리 가보는 게 좋을걸. 늦으면 조장에게 혼날 수도 있어. 에릭이 조장이야.” “헉, 에릭이 조장이라고? 이런...... 진작에 얘기하지.” 전사는 허둥대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새로 들어온 전사는 조금 전의 인물과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얼굴만으로 성격을 판단할 수 있다면 온순하고 부드러운 자여야 했다.
“고생이 많군. 괜히 일이 시끄러워져서 힘없는 너만 고생이구나.” “무슨 말이냐?” “흉수는 강해. 네가 설사 살인을 했다고 주장한다 해도 믿어 줄 이는 별로 없을 거다.” 팡은 그 말에 안심이 되기는커녕 억울하고 분한 생각이 치밀었다. 그걸 알면서도 잡아 두고 괴롭히는 건 무슨 심보란 말인가?
“그런데 왜 내게 이런 짓을 하는거냐?” “우리야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밖에. 제일 만만한 자들을 잡아들여 조사를 하는 시늉이라도 해야 그나마 조용히 넘어갈 수 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설사 눈앞에 흉수가 있다고 해도 우리 정도의 실력으로 잡을 수 있을 것 같나? 어림없는 일이지. 그놈들을 색출하고 잡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