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바로 거신족 콴의 카이로다
흔적이 발견되었다. 위급을 알리기 위해 남긴 것이 아닌 평소 습관대로 의미 없이 찍어 놓은 손바닥 자국이 발견된 것이다.
카이로의 마지막 자취로 추정되는 손바닥은 하룬 서북부 허름한 신전의 벽면에서 선명하게 찍혀있었다.
신전 주위는 어느새 몰려든 전사들로 물샐 틈 없을 정도로 엄밀하게 포위되었고, 거기 함께 한 선발대원들 역시 숨죽이고 긴장의 빛을 지우지 않는다. 신전 내부나 주변에서 이들과 구별되는 생명의 온기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파천은 라미레스에게 모종의 의미가 담긴 눈짓을 했다. 벌써부터 일대의 음파를 차단시켜 놓고 있던 라미레스는 신전의 중심부를 차지하는 석단을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역시 결계겠군. 이 근처 어딘가에 놈들이 숨어 있다는데 내 전부를 걸어도 좋아. 내 직감은 틀린 적이 없거든.” 라미레스가 자신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파천 역시나 동일한 판단을 내리고 있던 중이었다.
“하늘로 솟구치지 않은 이상 땅으로 꺼졌겠군. 이 바닥 아래야.” 파천의 손바닥이 차가운 신전의 바닥에 맞닿았다. 몇 장 아래쪽에 빈 공간이 확인된다.
파천의 고개가 끄덕여지자 둘러선 자들의 눈빛이 매서워졌다. 사냥의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누군가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순간 공격은 시작될 것이다. 그러나 그리 쉽게 내려진 결정은 아니었다. 먼저 고려해야 할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닌 까닭이아.
“먼저 선발대원들의 안전이 확보되어야 한다. 공격은 그 이후다.” 적의 숫자를 얼마나 죽여 놓는가보다 친인들의 안전이 우선인 것이다.
“내가 하지.” 파천은 누가 이 일을 맡을 것이냐고 묻지 않았다. ‘내가 하겠다.’ 파천의 자신감 있는 말에 아난다와 라미레스가 흔쾌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페리칸 역시 마찬가지였다. 카이로의 실력이 어떠한지를 익히 알고 있기에 우려를 지울 수 없다. 카이로를 무력화시킬 정도의 적이라면 페리칸 자신으로서도 단독으로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난다가 반대하고 나섰다.
“안 됩니다. 저와 라미레스님이 맡겠습니다. 파천님은 추후 저희의 신호를 기다렸다 움직이십시오.” 이때 파천과는 일면식도 없던 불칸마저 아난다의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다.
“이런 위험한 일은 경험이 많은 라미레스에게 맡기는 게 여러모로 좋은 듯 하군. 자네가 사로잡히기라도 하는 날에는 여간 골치 아픈 게 아니거든.” 파천이 위험해지는 건 그도 참견하고 나서야 할 입장이었다.
고집부리지 마라. 너 같은 애송이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불칸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파천은 피식 웃었다.
"라미레스. “ “.......” “네 생각도 동일한가? 묻자. 적들에게 침투를 감지당하지 않고 대원들을 구해 놓을 자신이 있나?” “그건......” “라미레스는 그런 식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전격적으로 몰아쳐 한번에 적들의 숨통을 끊어놓지 은밀한 잠입은 영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었다.
“궁지에 몰린 놈들이 무슨 짓을 벌일지는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일. 거추장스러운 포로 들쯤 죽인다 해서 아쉬워할 놈들이 아니다.
침투는 은밀해야 한다. 들어서고 나섬이 발각되지 않아야 한다. 대원들의 안전이 확보된 뒤라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 “ 라미레스는 파천의 눈을 직시했다.
“자신 있냐?” 파천은 살짝 고개만 끄덕여 주었을 따름이다.
하지만 라미레스에겐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소중한 친인들의 목숨을 담보로 되도 않을 일에 객기나 부릴 파천이 아님을 믿는다. 그러나 어떻게? 종내 이 의문만은 거둘 수 없다. 그럼에도 그는 파천의 손을 들어 주고 있었다.
“좋아, 그렇게 하지. 네가 해라. 내가 도울 일은?” “뒤처리를 부탁하마.” 둘의 대화는 종결 되었다. 둘 사이에 내려진 결정을 번복시킬 정도로 영향력을 행사할 자는 이 중에 없었다.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아난다는 뭔가 할 말이 남아 있는지 입을 달싹거리려다 관둔다.
파천은 깊이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사념이 침투하지 못하는 명상 중에라도 들어가는 것처럼 의식을 깊이 침잠시켰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 새로운 가능성이 숨쉬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것은 아직 실현되지 않은, 현현되지 않은 가능성에 불과했다. 형상을 가지게 하는 건 전적으로 자신의 몫이다. 한계가 없는 무한한 가능성은 언제라도 열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감은 눈을 살짝 떴을 때 파천의 신형은 빛을, 형체를 잃어갔다. 모두의 시야에서 희미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실존하고 있던 형체가 공간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파천은 완벽한 상태로, 여전한 모습으로 그 자리에 엄연히 존재했다. 그랬음에도 주변에 있는 누구 하나 그런 하천을 발견하거나 인식하지 못했다.
감각으로 잡아내지 못하는 속임수 정도의 저차원적인 술수는 아니다. 공간에 완벽하게 동화되어 그 무엇으로도 특별한 개체로 구분해 내지 못했다.
이제 파천이 스스로 자신을 구별해내지 않는 한 그 누구도 그를 다치게 할 수 없었다. 수호자가 제일 먼저 가르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파천은 배운 것을 매우 적절하게, 너무도 훌륭하게 활용하고 있었다.
모두는 예기치 않는 급작스런 변화에 당황했다. 특히 라미레스와 아난다 등 파천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자부하는 이들의 놀라움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몰간은 자신이 이해하는 범주 내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해석하려 했다.
“공간이동을 했나? 그렇다면 어리석은 선택이로군.” 아난다의 두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그건 아닌 듯합니다. 아마도 파천님은 ...... 여기 어딘가에 우리와 함께 계실 듯.” 모두는 완벽하게 동일한 표정을 지었다. 불신. 라미레스 또한 그건 마찬가지였다.
“파천.” 그래서 파천을 부르는 라미레스의 음성이 조심스럽다. 믿기 힘든 사실을 확인하고 인정하는 것은 때로 두려움을 안겨 준다. 그것이 대상이든 현상이든 자신이 지닌 지식 범주 안에 있기를 바란다.
“이제야 자신감이 생겼다. 모두들 내가 신호를 줄 때를 기다리고 있어라.” 파천의 생동감 있는 음성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그건 충격이었다.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온 데 대한 충격은 한동안 모두에게 침묵을 강요했다.
파천은 그곳을 떠났고 이내 지하로 스며들어갔다.
그러나 남은 이들은 그가 사라졌는지 아직도 그들과 함께 동일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이 없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라미레스가 혼란스러워하는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리라.
미로와 같은 지하석로를 질주하는 이가 있었다. 매우 빠르고 신속한 움직이었지만 그건 단지 본인만 느끼고 인식하는 부분이었다. 강물이 바닷물에 뒤섞인 이후에 그걸 따로 구별해낼 방법은 없다. 파천의 존재 형태는 그렇게 이해될 수 있었다.
수호자가 파천에게 말하길, ‘원령의 본성과 본질을 즉각적으로 구별해내지 못하는 한 널 발견하거나 상해할 수는 없다. 내가 알기로 그 정도의 능력자는 전 우주를 통틀어도 열을 넘지 않는다’ 라고 했다.
수호자의 그런 단언은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포함시킨 범위에는 신과 천궁의 천사들까지였으니 어느 정도로 탁월하고 신묘한지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이것도 한 가지 약점이 있었다.
위험에 부닥쳤을 때 제 몸 하나를 빼낼 수는 있지만 이 상태로 적을 공격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원령을 완전하게 이해하고 다스리고 제어하고 활용할 수 있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어쨌든 파천은 수호자의 가르침을 완벽하게 구사하고 재현해내고 있었다. 꿈결 같은 가르침이었으나 수도 없이 반복된 훈련의 성과와 덕분이었다.
파천은 생명체의 기운을 포착함과 동시에 그곳으로 움직여 갔다.
미로 곳곳에서 상당한 수의 적들이 발견되었다. 그들은 파천을 느끼지 못했지만 파천은 그들을 자세히 살필 수 있었다.
‘이들이 바로 아바돈의 삼군 중 프뉴마 군인가? 아바돈. 그 실체는 잘 모르나 이들만으로도 어떤 곳일지를 짐작케 하는군.’ 파천은 프뉴마 군이 전사들보다 한 수 위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들 중 가장 약하다 할 수 있는 자들도 전사단들 중 가장 뛰어난 오대전사단의 전사들과 비슷한 수준들로 느껴졌던 것이다.
파천의 눈에 비친 지하석로는 프뉴마 군이 오래 전부터 이곳 하룬에 주둔하고 있었음을 알게 해주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탈출로가 확보되어 있었고, 하룬 전역의 주요 지점을 은밀하게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마련되어 있었다.
점차 심처로 접근해 들어갈수록 파천의 마음은 무거워져만 갔다. 아바돈이란 이름의 무게가 새롭게 파천의 뇌리에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빠르게 복도를 지나쳐 가던 파천이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강한 기운. 이 자는...... 다르다.’
프뉴마 제3지원대장인 다이모니온은 요즘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다. 그건 바로 조직 내에서의 자기 입지가 확실치 않다는데서 기인하는 근심이었다. 특별한 이유도 없이 자꾸만 한직으로 밀려나는 듯한 느낌이 확신으로 바뀌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도 않았다.
‘이번 일만 해도 그렇다. 아무리 이곳 하룬이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라지만 날 두고서 그노시스를 다시 파견하다니. 더군다나 본군도 아닌 에레츠 군의. 이건 날 모시하는 처사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대로 중심에서 밀려날 수는 없다.
바시류스께서 약속하신 걸 기다리고만 있기엔 내 위치기ㅏ 불안하다. 이번 하룬의 일만 잘 마무리돼도 날 그노시스로 승격시킬 수밖에 없을 터. 이번이 다시 올 수 없는 마지막 기회다. ‘ “헤가스토스.” 다이모니온의 부름에 직속 부하인 헤가스토스가 장내에 부리나케 나타났다. 그는 석전 입구에서부터 무릎걸음으로 기어오고 있는 중이었다.
"부르셨습니까? “ “지금 즉시 포로들을 본대로 보내라. 그리고 곧 합류할 프뉴마 제2지원대를 맞을 채비를 하라. 전사평의회를 접수하고 메덴으로 진격한다.” “명령대로 이행하겠습니다.” 헤가스토스라면 아바돈 군에서 제테오, 헤데오스, 싸나토스, 이아오마이를 예하로 둔 중간 지휘관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상위자인 다이모니온을 대한 태도는 극경의 실례를 보여주는 듯했다.
이처럼 상하가 엄격한 곳이 아바돈이었다. 한 직급 위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모습들이 아바돈에서는 당연한 것아, 무엇보다 직금의 고하에서 오는 권한의 극심한 차이 때문이었다. 그냥 넘길 수도 있을 사소한 잘못에도 즉결 처분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이 상급자에게 주어져 있기에 가능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삼군 중 동일한 군에서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막 헤가스토스가 석전에서 물러 나오는 순간이었다.
“일을 망칠 뻔했군.” 부드러운 음성. 잔잔한 물결 위에 바람이 스며든다. 그 순간 아름답게 퍼져가는 동심원이 언뜻 연상된다고 헤가스토스는 생각했다.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헤가스토스가 뒤를 돌아보았다. 신비한 분위기의 사내가 입가에 흐르고 있는 미소를 반쯤 손등으로 가린 채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당신은?” “날 모르나?” “혹시.......” “프뉴마 제3지원대장, 내가 알기로 네 직급은 다이모니온인 것으로 알고 있다. 맞나?” 그는 바로 치앙마의 친위대와 함께 하룬으로 온 그노시스 헤이룬이었다.
그가 누군지를 알게 된 다이모니온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움직였다고는 하지만 보여지는 건 검은 안개가 뭉쳐있다 꿈틀대는 정도였다.
“그렇습니다, 그노시스.” “날 맞는 태도가 시원찮군. 너희 프뉴마에서는 그런 식으로 행동해도 아무 일 없는지 몰라도 내 앞에서 그런 태도는 좀 곤란해.” “무슨 말씀이신지.......” “그노시스 헤이룬은 검은 안개가 뭉쳐 흐르는 의자를 향해 똑바로 걸었다. 그의 입가에 항상 머물러 있던 부드러운 미소가 싸늘해졌다.
“모르겠다면 알게 해줘야겠지만....... 그럴 기회는 또 있겠지. 지금 내게 그리 많은 시간이 없는 것을 넌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아직도 이해가 안 가나, 다이모니온?” 아니모니온은 대답하지 않았다 짙고 두터운 안개를 뚫고 자신의 두 눈을 직시하고 있다는 느낌에 그는 눈길을 아래쪽으로 주었다. 그리고 의지 앞에서 물러나 한 곁으로 섰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취해지는 행동에 스스로도 흠칫 놀란다. 조금 전까지 다이모니온이 앉아 있던 자리에 그노시스 헤이론이 앉았다.
그때까지도 어색한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하던 헤가스토스를 향해 그노시스가 짧게 질문했다.
“현재 포로의 수는?” “서른 정도입니다.” “그들 중 마신으로 적당한 자는 얼마쯤 되리라 생각하나?” “제 짧은 소견으로는 다섯 정도입니다.” “그럼 그 나머지는 모두 죽여라, 다이모니온.” “예.” “제2지원대는 하룬으로 오지 않는다.” “무슨 말씀이신지.......” “계획이 변경되었다.” “그런 지시를 받은 적이 없습니다만.......” “그래? 그럼 내가 지시를 내래지. 제2지원대는 오지 않는다. 넌 지금 곧장 제3지원대를 수습해서 하룬 남부 외곽지역으로 이동해 다음 명령을 기다린다.” 다이모니온은 급작스런 작전 변경에 적잖이 당황했다.
도무지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적어도 그는 그 정도는 알고 있어도 충분한 지위에 있었다. 그런데 눈앞의 그노시스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왜? 내가 설명을 해줘야 하나?” “그렇게 해주시면 이해가 빠를 것 같습니다.” “좋아, 설명해 주지. 그다지 쓸모 있어 보이지는 않으나 당장 부릴 수족이 너뿐인 듯하니 어쩔 수가 없겠군.” 이건 명백한 모욕이었다. 다이모니온은 속으로 분을 삭이고 있었다.
“네 계획은 아마 이런 것이었겠지. 전사평의회 지도부를 네 꼭두각시들로 구성해 메덴과 전쟁을 벌인다. 메덴이 승리하겠지만 그 이후 약화된 전력의 메덴은 그리 신경 쓸게 못 된다. 맞나?” “......네.” “첫 번째 네 시도는 빗나갔다. 처음엔 널 존중하는 의미에서 그 계획대로 움직였지만 보다시피 결과는 우리가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이후 너는 프뉴마 사령부에 지원 요청을 했고 제2지원대가 오기로 되어있었다. 순전히 네 독단으로 내려진 결정이었지.
넌 아마도 전사평의회의 현 지도부를 암살하고 그 자리에 우리 쪽 인물들을 심으려고 했겠지만 그건 시작도 하기 전에 암초에 부딪혔다. 넌 멍청한 짓을 했다.
그 표정은 도무지 수긍할 수 없다는 뜻인가? 지금 이 위의 상황이 어떤지 아는가? 네가 사로잡은 포로들로 인해 전사평의회 정예들과 선발대가 모조리 동원되었다. 그들은 이곳 상황을 대충 파악하고 있을 터. 곧 대대적인 공격이 시작되겠지. “ 다이모니온은 즉시 헤가스토스를 바라보았다.
“확인된 바 없습니다.” “그노시스 헤이룬은 정황 파악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수하들을 한심하다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실이다. 넌 너무 서둘렀고 뒤처리도 서툴렀다. 가만 내버려뒀으면 선발대는 이곳 하룬을 떠났을 것이다. 그 이후 일을 도모해도 늦지는 않았을 터.” “그들을 두려워하십니까?” “내가 두려워하는 건...... 실패다. 적어도 나 헤이룬이 개입돼 일에 실패란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 위에 누가 와 있는지 아는가. 라미레스와 불칸, 몰간, 페리칸 등등 그 외 이름만으로도 무한계를 쩌렁쩌렁 울렸던 인물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
내가 왜 지금껏 숨죽이고 기다리고만 있었는지, 네가 조금만 주의 깊었다면 이따위 쓸데없는 짓을 벌여내 분노를 사는 일만은 하지 않았을 텐데....... 참 안타까운 일이야.
짧게 말하지. 즉시 수하들을 이끌고 하룬 남부 외곽 지역으로 빠져나가라. 이후 내 명령을 기다려라. “ “싸워 보지도 않고 도주한다는 건 아바돈의 수치입니다.” “후후.......” “싸우겠습니다.” “네 자체가 아바돈의 수치다. 라미레스는 나도 버거운 상대. 아니 세 분의 하기오스 사령관님들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정면 대결에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 그만큼 그는 강하다. 그뿐이 아냐. 너는 페리칸이나 아난다 정도도 상대하지 못한다. 그런데 싸워? 하하하하.......” “전 그노시스님이 판단하는 것보다 훨씬 강합니다. 마계 대마신바알세불이라도 전......두렵지 않습니다.” “지금 항명하는 거냐?” 다이모니온은 전신을 심하게 경련했다. 항거할 수 없는 압력이 목을 조여 왔기 때문이다.
“죄, 죄송.......”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노시스는 오히려 웃었다. 차가운 웃음 속에 살기가 번뜩인다.
“난 두 번 용서하지 않는다. 앞으로 조심하도록.” “네.......” 그노시스는 그 말을 끝으로 바람처럼 실내에서 사라졌다.
다이모니온은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숨을 가다듬었다. 잠시 꿈을 꾼 듯도 했다. 얼이 빠져 있던 것도 잠깐, 참을 수 없는 모멸감에 이가 부서져라 갈아붙인다.
“날 감히.......” 헤가스토스는 굳이 다이모니온의 명령을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은 조용히 물러날 때다. 괜히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죽는 것만이 바랄 수 있는 전부임을 그는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헤가스토스가 물러 난 뒤에도 다이모니온은 분노를 다스리지 못했다.
파천은 석전을 빠져 나오며 조금 전 보았던 그노시스를 떠올렸다.
‘묘한 분위기의 사내야.’
파천은 그다지 많이 헤매지도 낳고도 카이로 등이 감금되어 있는 곳에 당도할 수 있었다. 모두가 무사한 걸 확인하자 가슴을 쓸어 내렸다.
파천은 먼저 카이로에게 자신이 왔음을 알렸다.
[나다.]
카이로는 반가움을 표현하지 않았다. 말을 할 수도, 영언을 전달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두 눈이 번쩍 떠진 건 당연했다.
‘지존, 오셨군요.’ [견딜 만하냐?]
카이로는 주변의 시선을 받지 않으려고 천천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파천이 어디 있는지를 찾아내려고 애썼지만 허사였다. 그 어디에서도 파천은 발견되지 않는다.
[보아하니 프리즈마가 억제되어 있는 듯한데....... 수갑 때문이냐?]
카이로의 고개가 또다시 끄덕여지는 걸 확인한 파천은 수갑의 재질을 알아보고자 손을 갖다대었다.
‘이게 무엇이길래 혹시 내힘으로 파괴시킬 수 없는 게 아닐까?’ 괜한 걱정이 앞섰다. 이걸 수호자가 보았다면 혀를 끌끌 찼을 것이다.
파천은 스스로가 지닌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수호자의 안배가 자신을 어느 정도로 변모시켰는지, 얼마나 강해졌는지를.
파천은 수호자를 따라다니며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가장 핵심적이고 쓸 만한 건 열 두 가지 정도였다. 그 모두가 무공이라 불러도 좋을 형태를 지니고 있으나 그 위력만은 전혀 달랐다.
그 모두가 사실은 마지막에 만났던 두 절대강자들에게서 얻은 것이다. 수련자가 파천의 마지막 수련을 그들에게 일임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파천이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위력의 힘이었다.
파천은 그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건 모조리 얻어냈다. 하지만 그것이 실전에서 어느 정도의 위력을 나타낼지는 아직 미지수였다.
파천은 현재의 상태로 수갑을 깨뜨릴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힘을 사용하자만 은신을 풀어야 한다. 그 순간은 지극히 짧아야 하며 적들이 방비하기 전에 친인들을 자유롭게 해야만 했다.
숨을 고르고 준비하던 파천이 긴장의 빛을 띠었다. 조금 전까지 석전에 있었던 헤가스토스가 장내에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는 수하들에게 빠르게 지시했다.
“저놈, 저놈, 저놈.......을 빼고는 모두 죽여라.” 그가 지명한 건 카이로와 아레나, 라치오, 쿤사였다. 그 나머지를 모두 죽이라는 살명이 떨어진 것이다. 파천은 다급해졌다. 이렇게 된 이상 이제는 머뭇거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가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바로 그 순간 파천의 신형이 모두의 눈앞에 확연하게 드러났다. 다가오던 적들이 놀라 멈칫하고, 아레나 등의 얼굴에 반가움과 놀람이 교차라는 바로 그 순간, 파천의 손에서 빛이 번쩍였다.
열개의 손가락 끝에서 솟아 나온 가느다란 실과도 같은 프리즈마. 은빛색의 프리즈마는 수갑을 휘감았다.
파슛 휘리리링 제왕력의 다섯 번째 기술이었다.
그때까지도 어찌된 연유인지를 몰라 멍청하게 굳어있던 헤가스토스가 흐트러진 정신을 수습하고 파천의 등을 향해 공격을 집중시켰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주변에 있던 싸나토스와 이아오마이들도 파천에게 파상적인 공격을 퍼부었다. 카이로의 두 눈이 있는 대로 커졌다.
“지존!” 다급한 외침. 자신의 안위보다도 파천을 먼저 살피는 카이로의 외침에 파천은 웃음으로 화답했다.
카이로를 안심시키기 위함만은 아니었다. 자신감. 파천은 이제 알게 된 것이다. 자신이 지닌 힘이 어느 정도인가를.
파천의 신형을 감싸고 푸르스름한 빛이 머물고 있었는데 그건 호신을 목적으로 펼친 것이었다. 아직 미약하나원령을 호신으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이다. 이것 또한 제왕력의 하나였다. 두 가지를 동시에 펼침에도 전혀 힘겨워하지 않는다.
"이제 자유롭게 됐으니 좀 거들어도 좋을 것 같은데. “ 파천의 능청스런 말처럼 어느새 수갑들을 가루가 되어 흩어져 버린 뒤였다.
금제 당했던 프리즈마를 마음껏 유동시킬 수 있게 된 여덟 명은 성난 사자와 같았다. 특히 카이로의 분노는 그들 중 으뜸이었다. 그는 거신족 본연의 모습으로 화신을 시도했다. 그의 몸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헤가스토스는 그걸 발견하고 짧은 외침을 토했다.
“거신족 콴!” “이놈들, 내가 바로 콴의 카이로다. 날 건드린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그의 신형은 어디까지 커질 참인지 멈춤이 없었다. 발을 딛자 바닥이 움푹 꺼졌고 실내가 견디지 못하고 터져 나갔다. 그의 머리와 어깨는 이미 땅 위로 올라간 뒤였다.
카이로의 두 손이 휘저어지자 거대한 웅덩이가 생겨났다. 마침 그들이 있던 위치가 하룬의 대광장 지하였던지라 지상으로 보이는 카이로의 상체를 전사들은 경악스런 눈길로 쳐다본다.
멀리서 이 광경을 본 라미레스가 활짝 웃었다.
“성공했나 보군.” 불칸은 의외라는 낯빛이었다.
“저건 거신족이잖은가?” 거신족이 설마하니 선발대 중에 있을 줄이야, 라는 의미가 내초되어 있었다.
“자, 우리도 시작하지.” 라메리스의 그 말이 신호였다. 하룬에 침투해 있던 아바돈의 프뉴마 제3지원대를 향한 전사평의회와 선발대의 대공세가 시작되었다. 그건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폭풍과도 같았다. 정상적으로 부딪쳐도 상대가 되지 않은 전력 차였다. 더군다나 기선마저 제압당한 프뉴마 제3지원대는 허둥대며 지리멸렬해 갔다.
카이로는 신체 그 자체가 흉폭한 무기였다. 그의 발에 밟히고 짓이겨진 자들만 해도 부지기수였다. 파천은 멀찍이 떨어져서 선발대와 전사들의 활약상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그의 곁으로 라미레스가 다가온다.
"첫 번째 결전치고는 너무 싱거운데. “ 라미레스는 파천에게 묻고 싶은 게 수두룩했다. 그렇지만 그는 끝내 입을 다물었다.
파천은 나란히 선 라미레스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복잡한 상념이 잠시 파천의 얼굴을 스친다. 잠시 뒤, 라미레스가 입을 열 때는 어느 정도 정황이 정리가 되고 난 뒤였다.
“이들의 수뇌는 어차피 잡을 수 없을 거다. 도주하기로 마음먹으면 그런 쪽으로는 우리보다 몇 수 위인 놈들이거든.” 파천은 뇌리에 깊이 각인된 인물에 대한 궁금증을 그냥 묻어 두지 않는다.
“그노시스 헤이룬을 아나?” “갑작스런 파천의 질문에 라미레스가 영문을 몰라 했다.
“그런 자를 봤어. 그 자가 이곳의 책임자야. 내 생각엔 아직 이곳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것 같은데.” 파천은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을 가감 없이 전했다.
“하룬 남부지역이라. 이들은 전면정도 불가할 놈들! 곧 대군이 지원될 거다. 하룬을 지켜내기가 쉽지 않겠어.” “아바돈....... 이들은 대체 어떤 자들이지?” “절대악. 그것 말고는 달리 표현할 말이 떠오르지가 않는군. 아바돈의 세 명의 총수 하기오스들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들의 양자를 자처한다. 그 외에는 그다지 상세하게 알려진 게 없다.
대신....... 예전 큰 전쟁을 벌인 적이 있고, 무한계의 강자들 중 상당수가 이들과 씻지 못할 원한을 맺었다는 것 정도. “ “마계와 연계할 가능성도 있나?” “글쎄....... 마계가 궁지에 몰리지 않는 한은 그런 최악의 수를 두려고 할까? 대적자들이라면 이들과도 힘을 합할 수 있겠지만 마계는 입장이 좀 다르지.
마계는 원칙적으로 아바돈을 인정하지 않아. 물론 메타트론의 입장이지. 루시퍼가 메타트론의 아들임을 부정하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을 거야. “ “메타트론이 아바돈을 적대한다?” “내가 알기론 그래. 구체적인 이유까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알려져 있지 메타트론은 복잡한 자야. 그를 이해하기란 불가능 해. 그의 충실할 수하들인 어둠의 천사들까지도 말야. 그의 진면목은 그래서 늘 신비에 묻혀 있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하룬이 장차 위험에 처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방치해 두고 떠나야 하나?” “.......” 굳이 대답을 원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이미 답은 내려져 있는 물은. 저기 멀리서 환한 얼굴로 다가오는 선발대원들의 모습이 보이기까지 파천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광명....... 광명이면 될까? 이 답답한 가슴이 그것으로 채워질까?’
라미레스의 예측대로 하룬의 남부 지역으로 대군이 압박해든 것은 아바돈과의 첫 번째 결전이 있은 얼마 뒤의 일이었다.
그들의 주축은 의외로 대적자의 진영이었다.
이미 무한계 남부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대적자들의 대군의 하룬이 지척으로 보이는 곳까지 진격해 들어온 것이다. 그들 중에 아바돈이 포함되어 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정황으로 보건대 그들이 서로 동맹했음을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일의 진척이 예상보다 빠르게 전개되자 메덴도 당황했다. 특사를 파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수련자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고, 그 중의 일부를 하룬으로 급파했다.
파견대의 지휘자는 카포였다. 전사들과 수련자들의 연합군은 이렇게 해서 과정을 생략한 채 떠밀리다시피 모양새를 갖추게 되었다.
“저들의 전력을 감안할 때 지금 정도면 거의 엇비슷할 것으로 추정됩니다. 문제는 아바돈의 주력 부대. 그들이 도착하고 나면 우리 쪽이 열세를 면치 못합니다.
전사평의회의 참모 역학을 맡고 있는 롬멜의 진단에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그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 전에 메덴의 주력이 마저 합류해야만 합니다. 아바돈의 주력이 어느 정도의 전력을 보유하고 있는지 현재로서는 정보를 갖고 있지 못한 상태입니다.
그것만으로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만 어쨌든 우선적으로 메덴의 주력이 합류한 연후에야 천상계와 선계의 협을 요청하는 것이 제대로 된 순서일 듯합니다.
카포가 못마땅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직 그들에게서는 연락조차 없고. 우리가 현재 처한 상황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도 말이오. 그래서 말인데...... 이 시점에 우리의 태도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고. 그들의 도움이 없어도 우리 자체 전력만으로 먼저 전쟁을 수행할 태세를 갖춰야 하오.
우리 무한계가 들러리 역할을 할 수는 없는 것 아니겠소. 우리 쪽에서 먼저 요청을 하면 그 관계가 끝까지 지속될 터. 머리를 숙이고 들어갈 필요야 없지. “ 지금 그런 것 따위가 무슨 문제이겠는가? 파천은 조금 엉뚱한 카포의 의견에 참견하고 나서려다 그만두었다. 지금의 자신은 어쩔 수 없는 방외자일 따름이다.
이때 라미레스가 불칸과 몰간을 슬쩍 일별한 뒤 입을 무겁게 떼 갔다.
“천상계와 선계는 마계와 귀계 연합군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전쟁에 개입하지는 않는다.
소수 정예 정도는 보내 중 수 있겠지. 우리가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카란과 메테우스 그리고 그 추종자들, 칠대부족까지 나타나야만 어느 정도 전력의 균형을 맞출 수 있다.
문제는 마계의 침략 시점이 언제인가 하는 점인데....... 솔직히 우리 쪽에 남아 있는 잠재 전력까지 포함시킨다 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는 게 내 판단이다.
아바돈의 주력이 어느 정도인지 드러난 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들이 만약 마계와 엇비슷한 전력이라면 우리는 참담한 패배를 면치 못할 것이고, 그럴 경우 영계는...... 마지막을 고하게 되겠지.
거기다 잠자는 대지의 제왕들 역시나 개입하지 말란 법이 없고. 그들이 파견자들을 보낸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일. 그들이 움직이는 게 멀지않았다는 걸 의미해.
모든 정황이 우리 쪽에 불리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동원할 소 있는 전력을 모두 모아 놓고 천운이 우리 쪽이길 빌어 보는 수밖에. “ 라미레스의 말이 결코 허언이나 과장이 아님을 모두는 잘 안다. 그 정도로 현 상황은 좋지가 않았다.
상대하기 벅찬 적은 도처에 웅크리고 있고, 그들의 전력은 완전하게 파악되지 않고 있다. 그런 만큼 적은 더 크고 거대해 보이는 법. 그럼에도 이쪽은 채 전력을 정비하지도 못했다. 이런 암울한 상황 앞에서 승리를 자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라미레스의 말을 토대로 하면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들이 정리된다. 그걸 아난다가 짚었다.
“카란 님을 옆에서 보좌하던 로메로 님이 무한계에 나타나셨다 들었습니다.
그분의 등장으로 보아 카란 님도 봉인을 풀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럼 칠대부족도 우리 쪽의 전력에 합류할 수 있겠죠. 카란 님의 예언대로라면 메테우스 님도 함께 등장하실 터. 그 두 분이 합류해준다면 우리 쪽의 전력은 크게 향상됩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결정해야 할 일은 메덴의 나머지 전력을 이곳 하룬으로 불러들여 결전을 준비해야 할 것이지, 아니면 뒤로 물러나며 시간을 벌어야 할 것인지...... 양자택일해야합니다.
제 견해는 후자 쪽입니다. 조금 더 승률을 높일 수 있는 쪽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그리고 잠재된 힘은 우리 또한 만만치 않습니다. 아직 합류하지 않은 전사들과 봉인한 여러 전사들과 수련자들. 칠대부족을 제외한 여러 부족들.
무한계의 전 역량을 결집시킨다면 아바돈과 대적자의 대군이라 해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는 판단입니다. “ 이러고저러고 해봐야 두 세력간의 전쟁은 뚜껑을 열어 봐야 안다. 결과를 섣부르게 예측하기 힘든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결정적인 변수가 될 절대자들의 개입 여부 때문이었다.
아난다의 말처럼 무한계의 절대자들이 때를 맞춰 힘을 보태 준다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다면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해야 한다. 당장의 자존심을 찾자면 전면전에 응해야겠지만 그건 최후까지 보류되어야 할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대적자와 아바돈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 후에 상대할 마계를 감안하면 무한계의 전력은 그대로 유지되어야 한다. 아무리 머리를 굴리고 짜내 봐도 얼토당토않은 기대였다.
어떤 측면에서는 마계보다도 아바돈이 상대하기 더 까다롭다. 마계는 잔 술수를 부리지 않는다. 하나 숨김없이 전력을 드러내고 전면전을 시도할 것이다. 그건 달리 보면 자신감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아바돈의 성향은 다르다.
먼저 그들의 전력은 어떤 경로를 통해서도 완전하게 파악해내기가 불가능하다. 전면전에서 이긴다 해도 그것인 정말 아바돈의 주력인지 아닌지를 판명해낼 방법도 없다. 그들의 교활함은 대처하기가 쉽지 않다. 꼬리쯤을 머리로 둔갑시키는 것도 어렵지 않으며 안심하고 있는 적의 뒤통수를 치는 데도 일가견이 있다.
결국 그들과의 싸움은 하기오스라 불리는 아바돈의 삼군 총수들을 전면에 끌어내어 한 번에 머리를 짓밟아 다시는 재생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난점이 도사리고 있었다.
불칸은 지금 다른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이들의 기대처럼 카란 님이 이번에 모습을 드러내실지....... 만약 메테우스 님과 그 분 간의 갈등이 이후로도 해소되지 못한다면 심각한 양상을 빚게 되겠지. 무한계는 사분오열되어 제대로 전쟁을 수행하지 못한다. 두 분을 따르는 메덴과 칠대부족, 전사들 간에도 대립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 그 무엇도 장담할 수 없다.
아난다의 견해에 몰간은 동의하는 입장이었다.
“그 말이 맞아. 천상계나 선계가 기대하는 것도 카란 님과 메테우스 님의 등장일 거야. 그 두 분의 영도 아래 무한계가 뭉쳤을 때만이 제대로 적들을 상대할 수 있지 그 전에는 어림도 없는 일이야.
더군다나 이번의 싸움은 영계의 판도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대전쟁. 세력전이기라기보다는 절대자들 간의 싸움이야. 전황이 유리하거나 불리한 것쯤 그다지 중요하지도 않지. 절대자들의 힘은 그 모든 것을 한 번에 뒤집어 버리거든. 어느 쪽에 최강자가 있느냐에 따라 결과는 엉뚱하게 내려질지도 모르지.
결국 우리가 최종적으로 대비해야 하는 건 하기오스들과 제왕들 그리고 루시퍼를 상대할 절대강자가 우리 측 진여에 있느냐는 점이겠지. 메테우스 님이나 카란 님이라면 과연...... 가능할지.......“ 그리 자신 있어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라미레스는 알고 있었다. 천상천의 천주들도, 선계의 팔선도, 메테우스나 카란도 루시퍼를 이기지 못한다는 걸. 그러나 아무도 언급하지 않지만 모두가 한결같이 기대하는 것이 있었다.
‘수호자라면.’ 그랬다. 그가 있어야 한다. 그가 버티고 있다면, 그가 전면에 나서 호령해 준다면 마계도, 아바돈도 겁날 게 없다. 그의 상대는 오직 메타트론뿐. 그는 과연 어디 있는가? 그래서일까? 은연중에 모두의 시선이 파천에게로 모아졌다.
수호자의 안배가 낳은, 총 결집된 인연자. 파천에게서 그들은 지금으로서는 보이지 않는 마지막 희망을 보려하고 있었다.
그의 안위는 이제 영계의 평화와 맞닿아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된 것이다.
그런 뜨거운 관심과 집중을 파천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전사평의회 의장인 에이어가 선발대장인 파천에게 매우 정중하게 질문했다.
“언제쯤 떠나실 계획이십니까?” 파천은 망설이지 않았다.
“즉시 떠날 생각입니다. 저희가 남아 있어 봤자 전력에 그다지 큰 도움도 되지 않고. 더 중요한 건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라 여겨지는 군요. 그래서.…….” 불칸ㅌ이 파천의 이어지려는 말을 잘랐다.
“잘 생각했군. 솔직히 선발대가 여기 있어 준다면 상당한 전력 향상을 기대할 수 있지만....... 그걸 기대하고 더 큰 걸 놓칠 수는 없지.
수호자의 안배. 나 또한 궁금해. 마지막에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를 말야. 과연 광명이 우리가 기대하는 정도의 힘을 가져다줄지도. 아, 물론 광명을 가져온다는 전제하에서지만. “ 이제 더 이상 파천을 보잘것없는 생령정도로 치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마계가 인간계를 침략하고 오늘의 상황을 만들 것을 예상한 이는 얼마 되지 않았다. 영계가 평화롭던 시절. 그때부터 오늘을 준비해왔던 수호자. 그래서 그에 대한 신비는 그 자체로 경외심으로 발전되었다.
그를 그다지 신뢰하거난 인정하지 않는 라미레스도 그 능력만은 인정한다.
카란을 주인으로 따르는 불칸이나 몰간도 수호자의 존재만은 외경의 대상이다. 천상천의 천주들조차 그건 마찬가지였다. 마계마황 루시퍼도 수호자를 언급할 때는 조심한다. 물론 메타트론의 유일한 적수라는 점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영계의 운명을 운운하며 안배한 파천. 그래서 그가 걸어가는 길은 모두에게 예사롭지 않은 일인 것이다.
“그렇군요. 아무쪼록 광명을 가져오시길 바랍니다.” 에이어는 진심으로 그렇게 기원했다.
선발대가 하룬을 떠났다. 이 사실은 알 만한 자들은 금세 알게 될 것이다. 선발대가 하룬에 있다는 것은 단순한 전력 상승효과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적어도 두 세력만은 당장 하룬은 직접적으로 침략하지 않을 것이다.
마계와 귀계. 메타트론의 지시로 루시퍼는 마지막 순간까지 파천을 살려두어야만 했고, 그건 전사평의회나 메덴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장 든든한 방패막이로 작용할 수 있었다. 물론 마계가 무한계로 들어서려면 그 전에 선계를 상대해야 하지만.
선발대는 대체로 처음의 진용 그대로였으나 다소간의 변화가 있었다.
가름을 잃어버린 두름이 파천과 라미레스의 옆에 바싹 붙어있었고, 바로크와 끝내 대면하지 못한 바로크 전사들이 그 뒤를 따른다.
행방불명되었던 바로크와 팡, 가름은 끝끝내 찾아내지 못했다. 그로 인해 두름과 바로크 전사, 아레나의 얼굴은 어둡기만 하다.
제일 앞서 가던 권터가 무엇 때문인지 툴툴거린다.
“간만에 싸움다운 싸움을 해보나 했더니만.” 그의 심사가 틀어진 게 그것 때문이었던가? 파천의 목에 매달려 있던 아그립바가 귄터에게로 날아갔다. 권터의 머리 위에 앉아서 쫑알거리기 시작했다.
“참 이상도 하지.” “뭐가?” “너 말야, 아무도 너보고 같이 가자고 하지 않았을 텐데. 너는 선발대원도 아니잖아 자기가 좋아서 따라 다니는 거면서 뭔 불만이 그렇게 많아?” 권터의 얼굴이 순간 당황과 수치심으로 묘하게 일그러진다.
아그립바의 말이 틀린 건 아니다. 아니 너무나 정확해서 귄터의 얼굴이 뜨듯해진 것이다.
“흠흠.” 권터는 달리 반박할 말이 없어 헛기침만 해댔다. 아그립바는 그것만으로는 모자랐던지 또 한번 일침을 가했다.
“사실 네가 있어 봐야 별로 쓸모도 없어.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지.” 거추장스러운 짐! 그것보다 더 권터의 자존심을 뭉개는 말이 있을까? 영격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영물의 말이라며 대범하게 이해하고 넘어갈 만큼 권터의 마음이 너그럽지 못했다.
“너 이 자식!” 권터의 손이 아그립바의 몸을 낚아채기 전에 아그립바는 슈루룽 날아가서 파천의 어깨 위에 안착한다. 그리고는 마지막 말을 잊지 않는다.
“그냥 묻혀서 따라다닌 거면 잠자코 시키는 짓이나 하면 얄밉지나 않지. 꼭 제 역할도 못하는 것들이 말만 많다니까.” “으으으으.” 권터의 뼈저린 신음은 단지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선발대를 구성하고 있는 대다수 ‘거추장스러운 짐’들은 가슴을 후벼 파는 말에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그들만의 생각일 뿐 파천이나 라미레스는 전혀 그렇게 여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자격지심은 ‘왜 우리가 이 자리에 있어야 하나’ 하는 물을 자꾸만 스스로에게 던지게 했다.
아그립바의 말처럼 그들은 단지 허울 좋은 선발대원으로서 ‘묻혀’ 가는 것일 따름이었다. 하룬을 떠나기 전 라미레스가 파천에게 이러게 권고했었다.
“선발대원들 말인데...... 다 데리고 갈 필요가 있나? 적당히 정리해서 돌려보내든가, 그도 아니면 하룬에 남겨 두는 게 여러 모로 좋을 듯한데. 다들 말은 하지 않지만 여간 착잡해 하는 게 아닌 것 같아.” 다른 일이라면 모를까, 아무리 라미레스의 의견이라 해도 이 일만큼을 파천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끝까지 고집을 부렸고 그건 누구도 꺾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한께 간다.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런 파천의 생각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견고하기만 했다. 그렇지만 현실은 이런 파천의 결정에 무리가 따름을 여실히 증명할 것이었다.
라미레스와 아난다는 동일하게 경고했다. 만약 우리 앞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면 지금부터일 거라고.
현재의 선발대 진용은 그 어떤 세력 쪽에서도 결코 만만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미레스와 불칸, 몰간, 페리칸은 말할 것도 없고 아난다나 카이로, 도아투스, 브라함과 페드로고 혁혁한 명성을 지니고 있는 강자들이었다.
그럼에도 라미레스는 안심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진용을 알고 있음에도 나타나는 누군가가 있다면 충분히 대비한 상태일 것은 자명하다. 라미레스나 아난다를 근심시키는 건 아바돈이었다.
무한계의 상황은 대충 파악되었다. 전사들이나 수련자들 중에서 선발대의 앞을 정면으로 a가을 자들은 없다. 또한 그럴 만한 역량도 없다. 마계는 당분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렇다면 결론은 아바돈이나 대적자, 또는 제왕의 파견자들 중 하나일 가능성이 많았다. 물론 그 외 중부권의 여러 부족들 중 하나일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이런 이유로 라미레스는 선발대원들의 일부를 돌려보낼 것을 권유한 것이다. 물론 이런 결정의 이면에는 그들의 안전에 대한 염려가 가장 크게 작용했다. 그들이 돌아볼 여력이 없을 경우 라미레스는 단호히 외면할 것이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제 몸 하나 지켜내기도 급급한 상황이 오지 말란 법이 없다. 굳이 짐이라고까지는 생각하지 않지만 언제든 그렇게 될 여지는 남아있었다.
더 큰 이유는 그들 스스로가 선발대에 참여하는 걸 동행 이상의 의미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크고 작음의 차이는 있겠지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스스로의 무기력함을 아무런 심적동요없이 받아들이기에는 무리가 따랐다.
특히 선계와 천상계에서 파견된 자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더 두드러졌다. 유명무실한 미약한 존재감에 비해 선발대에 대한 외부의 집중과 관심을 지나치게 컸다.
‘나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반대하지 않는다. 심지어 본인들까지도. 돌려보내야 옳은 것인가? 나 또한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게 아니다. 차라리 나 혼자서라면 그 어떤 위험 속에서도 빠져나갈 수 있다. 수호자도 그렇지 않았던가. 위급함에 처하면 선발대를 돌아보지 말고 도주하라고. 그렇지만...... 난 그럴 수 없다.’ 결국 파천의 결론은 또다시 하나로 귀결되었다.
‘가는 데까지 간다.’
모험을 거는 천상계의 천주들
선발대는 중부권의 중심으로 서서히 접근해 가고 있었다. 전사들이 빠져나간 중부권은 조용하기만 했다. 모든 게 괜한 기우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사방은 평화롭기만 했다.
카이로와 페리칸은 전면은, 불칸과 몰간은 좌우 측면을 주로 감시했으며, 때때로 선발대를 떠나 멀리까지 나갔다 오기도 했다.
“이것 지나치게 조용한 게 오히려 더 이상한데.” 불칸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라미레스도 말을 않고 침묵을 지킨 지 꽤나 오래되었다.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파천은 그게 궁금했다. 시선의 끝자락에 깊은 숲이 보이자 파천이 긴급히 제안했다.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간다.” 굳이 휴식이 필요해서는 아니다. 눈앞에 보이는 숲에서 근거 없는 불길함이 흘러 나왔기 때문이었다. 라미레스도 앞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파천이 물었다.
“뭔가 잡히나?” “아니. 그렇지만 뭔가 있을 것 같긴 해.” 헤아리기 힘든 말이었다. 라미레스의 곁으로 다가온 불칸이 의미가 분명치 않은 말을 한다.
“흡사 귀류에 휩싸인 듯하군.” “귀류라면 귀계의?” 아난다의 덧붙임을 듣고서야 파천은 무엇을 이르는지를 알 것 같았다.
귀계의 귀령들 중 칠성의 영향 아래 있지 않는 라만들이 모여 사는 곳이 있다. 그곳의 지도자를 하만이라 하는데, 그는 생령의 두려움과 악한 정신을 먹고 제 힘을 키운다.
하만은 눈이 없다. 대신 귀류라는 영기를 뿌려 주변의 상황을 인식한다. 불칸이나 라미레스는 하만을 대면해 본 적이 있다. 불칸은 눈앞에 보이는 숲안에 하만이 있는 것이 아닐까 짐작하는 듯했다.
“귀류도 아냐. 그러나...... 그것만큼 기분이 나쁘긴 해.” 다른 선발대원들은 초긴장 상태에 접어들었다. 숲의 초입부터가 시커먼 게 뭔가 알 수 없는 신비한 힘이 도사리고 있음은 대충 눈치로 때려잡을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을 짐작키 힘들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저렇게 내놓고 초청을 안 하니 안 가볼 수도 없잖아?” 파천의 말이었다. 라미레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나와 불칸, 몰간만 간다. 나머지는 구경이나 해라.” 뻔히 위험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굳이 선발대 전체가 뛰어들 필요는 없다는 뜻이었다. 파천은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준비들 해.” 라미레스의 말에 불칸과 몰간이 심호흡을 했다. 조심스런 태도를 보니 이들 역시 긴장하는 것 같았다 감지되지 않는다 함은 쉽게 볼 수 없다는 걸 이름이다. 적이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고 있으니 심적인 부담을 가지는 건 당연한 일.
이때 라미레스가 앞이 아닌 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선발대원들중 가장 뒤쪽에 있던 너울을 지나 저 멀리까지 시선을 이끌었다. 파천의 시선도 거의 동시에 뒤쪽으로 향했다.
‘이쪽도 적인가?’ 누군가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는 게 느껴졌다. 페리칸과 카이로가 경계를 하며 뛰쳐나갔다.
휘류류륭 하늘에서 빠르게 기류가 휘몰아치며 급강하한다. 바닥에서 먼지가 휘말려 오르며 시야를 가린다. 페리칸은 적이라 판단했는지 다짜고짜 공격을 퍼부을 기세였다.
라미레스가 급히 말렸다.
“잠깐 기다려 봐라.” 그의 제지가 아니었으면 페리칸의 선공이 작렬했을 것이다.
“누구냐?” 라미레스의 물음에 아직 형체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음성이 대답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다급한 소리였다. 자욱한 먼지를 뚫고 두 그림자가 선발대 앞에 나타났다. 거대한 체구의 사내와 왜소하고 가녀린 체구의 사내. 둘은 나란히 서서 다가서고 있었다. 페리칸이 급히 제지했다.
“거기 서. 더 이상 다가오면 좋지 않다.” 페리칸의 경고에 큰 체구의 사내가 슬쩍 주목해 바라본다. 그것도 잠시, 빠르게 선발대원들을 훑으며 누군가를 찾는 듯했다. 그러다 파천에게서 시선이 멈춘다.
“그대가 바로...... 파천이란 생령인가?” 그랬다. 그가 찾고자 한 이가 파천이었던 것이다. 파천은 고개를 끄덕여 인정했다.
“그대들은?” “저희들은......” 왜소한 사내의 말을 자르며 나서는 이는 성질이 어지간히 급한 듯했다.
“난 천상계 33천중 무상천의 신장 여록이라 한다.” 무상천의 신장 여록. 그는 천상계 신장들의 회의에서 무한계의 동정을 파악하기 위해 대표로 파견된 신장이었다. 또한 무한계 뜰의 주점에서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던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 옆에 있는 이는 무상천의 아라한이었다. 선발대원들 중 천상계의 아라한 들이 다급하게 고개를 숙이며 예를 갖춘다.
그들도 여록의 이름은 들어 봤으나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록은 두 가지로 천상계서 유명했다. 그 하나는 급한 성정으로 인해 크고 작은 문제를 빈번하게 일으킨다는 것, 또 하나는 도무지 위아래가 없다는 점이었다.
천상계의 신장이라 하면 위로 천주를 모시고 아래로 아라한들을 거느린 채 천상계의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다 그런데 그는 예외였다. 도무지 그런 것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다른 이들의 전혀 호기심을 느끼지 못하는 일에만 매달려 있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분연의 제 임무에는 소홀해지는 게 당연했다. 그럼에도 천상천의 천주는 단 한 번도 그를 나무라거나 책망한 적이 없다. 으레 그렇겠거니 하고 포기한 것인지, 아니면 나름대로 맡겨진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기 때문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었다.
그 여록이 파천과 선발대 앞에 나타난 것이다. 라미레스가 여록에게 물었다.
“존귀하신 신장께서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시오?” 약간 비꼬는 듯한 어투였지만 여록은 그런 걸 문제 삼지 않았다.
“그대가 라미레스? 과연...... 명불허전이군. 척 보아도 내 아래가 아니겠어.” 어찌 들으면 상당히 무례한 말일 수도 있었다. 라미레스로서는 상당히 기분 나쁜 말이기도 했다.
설사 무상천주라고 해도 자신 앞에서 이런 말을 쉽게 뱉어낼 수 업ㄱ다, 라고 생각하는 이가 바로 라미레스였다. 그 정도로 자존심이 강한 라미레스 앞에서 사대천왕이나 도리천의 대신장도 아닌 일개신장이 할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천상계의 아라한들은 여록이 그렇게 말했다는 사실 앞에 놀라워했다.
여록은 도리천의 대신장을 제외하고는 33천의 신장들 중 자신을 능가하는 이가 없다고 큰소리 쳐왔었다. 그런 그가 누군가를 인정한다는 건 상당히 보기 힘든 장면이었다.
이런 사연을 알 리 없는 라미레스의 어투가 다소 거칠어졌다.
“우리는 한가하지 않다. 짧게 용건만 말하라.” “그러지. 나도 한가한 건 아니니까. 파천, 이유는 묻지 말고 잠시 시간을 내줘야겠다. 천상계로 가라.” 뚱딴지같은 요구였다. 명령하는데 익숙한 신장의 전형적인 말투였다.
이때 옆에 있던 아라한이 당황하며 급히 나섰다. 라미레스가 막 발작하려는 걸 봤기 때문이다.
“제가 자세히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이번에 두 가지 지시는 무한계로 들어섰습니다. 하나는 무한계의 현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파천님을 천상계로 들이는 일입니다.
이 일은 33천 중 변천의 천주께서 특별히 부탁하신 일입니다. 지금 변천에 몇 분의 천주께서 모여 계십니다. 그 분들이 파천님을 뵙기를 청하셨습니다.
같은 말인데도 하는 이가 달라지나 받아들이는 쪽에서도 반응이 다르다.
“무슨 연유인지 알 수 있을까요?” 파천의 물음에 아라한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저로서는.......” 여록이 덧붙였다.
“가보면 안다.” 파천은 딱 잘라 거절했다.
“저는 그럴 수 없습니다. 거기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럴 만한 여유도 없습니다. 미안하군요. 먼 길을 오신 듯한데 거절하게 됐으니.” 여록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네가 감히 천주님들의 청을 거절한단 말이더냐!” “이것 참.......” 파천은 잠시 어찌 대처해야 할지를 몰라 머뭇거렸다.
라미레스의 차가운 냉소는 마침 시기적절해 파천에게 쏠렸던 시선을 일시에 그에게로 돌려놓았다.
“볼일이 있으면 그쪽에서 오면 될 것은, 오라 가라 하다니. 그 오만함은 여전하군. 이것 봐, 존귀하신 여록 신장. 그대가 무상천에서야 큰소리치고 사는 신분일지 모르나 이곳 무한계에 와서까지 그러면 곤란하지.
내가 자네 천주 앞에서 버럭 고함을 지르면 기분이 좋겠는가? “ 여록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라한은 여록의 눈치를 보다 또다시 먼저 나섰다.
“시간은 그리 많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잠시면 됩니다. 허락만 하시면 공간이동을 시키면 되는 것이고, 그곳에서도 그리 많은 시간이 소모되지는 않을 겁니다.
변천의 천주께서 말씀하시길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셨습니다.K 그리고 파천님께도 여러 가지 득이 되리라 여겨집니다. 그러니 부디 거절치 마시길. “ 여록은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지금 그는 화가 나 있었지만 꾹 참고 있는 중이었다. 스스로 가지 않겠다는 자를 설득시킬 재주가 없기 때문이었다.
“으음, 어떻게 하지?” 파천은 고민했다. 듣고 보니 그리 많은 시간이 소비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런 잠시일지언정 선발대의 곁을 비울 시기는 아니다.
또한 심정적으로도 흔쾌히 수용하시가 쉽지 않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갈등하고 있는데 아난다가 자신의 의견을 말했다.
“잠시의 심간이라면...... 굳이 거절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천상계의 천주들이 괜한 일로 파천님을 부르실 분들이 아니니 다녀오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여록이 급하게 말을 덧붙인다.
“선발대의 안전이 염려되어서라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있는 한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을 테니까.” 가든, 가지 않든 결정은 빠른 게 좋다.
파천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좋소. 저를 청하신 분들에게로 인도해 주시오.” 라미레스는 파천이 홀로 가는 것에 안심이 되지 않아 동행을 요청했으나 당사자인 파천의 거절로 무산된다.
“선발대의 안위를 위해서도 너는 여기 있는 게 좋을 듯싶다.” 그것이 파천이 거절한 이유였다.
급작스런 천상계의 전령들로 인해 파천은 전혀 예기치 않는 시점에 천상계를 방문하게 된 것이다. 그동안 여러 경로를 통해 천상계에 대해 들어 왔기에 호기심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방문하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누가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하는가?!’ 이건 단지 파천만이 지닌 궁금증은 아니리라. 지금껏 단 한 번도 적극적으로 무한계의 일에 간섭하지 않았던 천상계의 입장은 지금에 와서도 여전할 것이다.
그런 그들이 일개 생령에 대해 신장을 직접 파견하면서까지 관심을 보인다는 건 상당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파천의 공간이동을 돕기 위해 신장이 자세를 취했다. 신장 여록이 파천을 천상계까지 보낼 능력은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건 단지 영언을 전달해 그의 위치를 알리는 것과 이동할 공간의 지점을 정확하게 잡아 주는 정도였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어떤 대상을 소환하기 위해서는 피소환자의 동의가 필요했다. 여록은 파천에게 필요한 당부를 잊지 않는다.
“두 손을 하늘로 뻗치고 내부로 스며드는 기운에 항거하지 말고 받아들이면 된다. 그 힘이 너는 특정한 곳을 이동시킬 것이다.” 간단했다. 파천은 여록이 시키는 대로 따랐다. 몇 번의 호흡이 지나기도 전에 변화는 일어났다. 파천이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서 사라졌다.
잠시 눈을 떴다 감은 것이 파천이 한 일의 전부였다.
전경은 돌변했다. 그를 둘러싸고 있는 건 낯익은 모습이 아니다. 선발대원들 대신 처음 대하는 인물들이 시야를 채웠고, 탁 트인 들판이 보이던 자리에 새하얀 벽이 가로막고 있다.
몇 명인가가 파천을 주시하고 있었다. 파천은 가벼운 현기증에 머리를 짚었다. 공간이동 후에 나타나는 형상이었다.
그는 가장 눈에 두드러지게 띄는 인물에게 먼저 집중했다. 상대의 눈빛은 약간의 호기심을 담았으나 대체적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다. 그 눈은 말하고 있었다.
‘그대가 파천인가?’ 파천은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파천은 무엇인가 물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는 선뜻 입을 열 수 없었다. 심장을 압박하는 위엄이나, 처한 상황이 난처해서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의를 따지는 차원에서도 아니었다.
분명하게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그건 뜻밖에도 친근함 때문이었다. 언제라고 못 박아 규정할 수 없는 때부터 그들과 자신은 서로를 상당 부분 공유했을 것 같은, 많은 시?